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소설 《The Catcher in the Rye》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콜필드 가문 3남 1녀 중 둘째이다. 소설에서 친형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고, ‘D. B.’라는 이름의 머리글자로만 나온다. D. B.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다. 남동생 앨리(Allie)는 1946년 7월 18일에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홀든의 친구 스트라드레이터(Stradlater)는 자신의 작문 숙제를 퇴학이 확정된 홀든에게 맡기는데, 죽은 앨리를 잊지 못한 홀든은 작문 숙제에 동생과 관련된 추억에 대한 글을 쓴다. 막내 피비(Phoebe)는 홀든이 앨리 못지않게 좋아하는 여동생으로,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홀든은 과거에 형과 앨리가 주고받은 대화 한 장면을 회상한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앨리가 형에게 형은 작가니까 전쟁에 참가하면 작품 쓸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형은 앨리에게 야구 미트를 가져오게 하고는, 루퍼트 부루크와 에밀리 디킨슨 중에서 누가 훌륭한 전쟁 시인인가를 물었다. 앨리는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대답했다.

 

(이덕형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210쪽)

 

 

I remember Allie once asked him wasn’t it sort of good that he was in the war because he was a writer and it gave him a lot to write about and all. He made Allie go get his baseball mitt and then he asked him who was the best war poet, Rupert Brooke or Emily Dickinson. Allie said Emily Dickinson.

 

 

 

루퍼트 브룩(Rupert Brooke, 1887~1915)은 영국의 시인이다. 1911년에 첫 시집을 발표했으나 그의 창작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15년에 그리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지배에 저항하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열병이 악화되어 그리스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최후와 조금 비슷하다.

 

루퍼트 브룩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독자들 역시 앨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평생 독신으로 은둔의 삶을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1,775편의 시를 썼다. 그렇지만 그녀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10편에 불과했다. 그녀는 늘 흰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수녀’ 혹은 ‘백의의 처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킨슨은 죽기 직전 여동생 라비니아 디킨슨(Lavinia Norcross Dickinson)에게 자신이 남긴 기록물 전부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언니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펴내는 데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D. B.가 디킨슨을 ‘전쟁 시인’으로 보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디킨슨은 남북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살았다.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를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디킨슨은 남북전쟁을 직접 언급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대상이나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전쟁으로 비유해서 쓴 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를 썼다고 해서 그녀를 ‘전쟁 시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D. B.의 엉터리 말은 얕은 문학 지식을 가진 D. B.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D. B.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황금 금붕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는 무명작가였다. 당연히 D. B.도 콜필드가 비꼬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디킨슨의 시는 대체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쉽게 읽혀지는 시는 아니다. 디킨슨의 시에 많이 나오는 주제는 사랑, 자연, 죽음과 불멸,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 자기 성찰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 대다수는 진중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띤다. 그녀의 시는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디킨슨은 절제된 구성으로 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거나 시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시의 음률을 살리려고 ‘줄표(—, dash)를 많이 썼다. 게다가 특정 시구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문법을 무시하는 작법을 구사했다. 그 때문에 디킨슨의 시는 들어가기는 쉬워도(읽기 쉬워도), 나가기 어려운(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미로’이다.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구판 절판] 에밀리 디킨슨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민음사, 1976)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디킨슨은 시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집 출간에 참여한 편집자와 문학 연구가들은 엄청난 양의 시를 구분하기 위해 각각의 시에 숫자 번호를 붙였다. 그녀의 시를 가리킬 땐 숫자 번호와 시의 첫 번째 문장을 함께 언급한다. 시의 첫 번째 문장은 임시로 붙여진 가제(假題)가 된다.

 

만약 우리나라에 해설을 곁들인 디킨슨 시 ‘전집’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적어도 두 권으로 나올 수 있겠다. 가장 많이 알려진 디킨슨 시 ‘선집’은 1976년에 강은교 시인이 번역한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이다. 알라딘에는 이 시집의 출판연도가 ‘1997년’으로 되어 있는데, 초판 발행연도는 아니다. 1997년에 나온 건 개정 2판이다. 2016년에 나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은 개정 3판이다.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시와 강은교 시인이 쓴 해설 내용은 모두 같지만, 개정 3판을 잘 살펴보면 구판에서 드러난 어색한 번역문과 오역을 고치고 새로 다듬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판과 개정 3판에 ‘하늘나라에 갔었네’라는 가제가 붙여진 시(No. 374: I went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구판 번역문과 개정 3판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Stiller — than the fields

At the full Dew —

Beautiful — as Pictures —

No Man drew.

People — like the Moth

Of Mechlin — frames —

Duties — of Gossamer —

And Eider — names —

Almost — contented —

I — could be —

’Mong such unique

Society —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좀벌레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한 줄기 빛이 되어》, 민음사, 48쪽)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레이스나방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47쪽)

 

 

 

 

‘moth’는 나방을 뜻한다. 그런데 구판에는 ‘moth’를 ‘좀벌레(silverfish)’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 있다. 번역문 옆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구판의 오역을 발견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절판] 에밀리 디킨슨, 김천봉 옮김, 《19세기 미국 명시 6: 에밀리 디킨슨》 (이담북스, 2012)

 

 

 

민음사의 디킨슨 시 선집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의 《디킨슨 시선》이담북스의 《에밀리 디킨슨》을 읽으면 된다. 다만 이담북스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번역본은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이다. 오역으로 추정되는 시구가 몇 개 있긴 하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이 번역본이 기존의 디킨슨 시 선집과 차별화된 특징이 있는데, 시마다 붙여진 숫자 번호까지 적혀 있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은 숫자 번호가 붙여진 유일한 디킨슨 시 선집 번역본이다.

 

 

 

 

 

 

 

 

 

 

 

 

 

 

 

 

* 데이먼 영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L.I.E., 2009)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잘 알려지지 않은 디킨슨의 생애를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는 데이먼 영(Damon Young)《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박재열《미국 여성시 연구》가 있다.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는 정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자연을 관찰하면서 시를 쓴 디킨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녀에게 정원은 ‘안식처’이자 ‘천국’과 같은 곳이다. 《미국 여성시 연구》는 디킨슨을 포함한 6명의 여성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다른 시 선집 해설에서 볼 수 없는 디킨슨의 가족 관계—친오빠의 아내인 올케 수전(Susan)과의 관계이 언급되어 있고, 그녀가 친하게 지내던 남성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올케에 향한 레즈비언(lesbian)을 암시하는 듯한 디킨슨의 편지글은 그동안 ‘무성애적(asexuality) 처녀’로만 알려진 세간의 평가를 뒤집는 자료이다. 저자는 디킨슨이 쓴 편지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끝내 숨기려고 했던 그녀의 내면을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시로 구현되었는지 분석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짜라투스트라 2019-03-2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cyrus 2019-03-22 17:48   좋아요 1 | URL
지만지 번역본에 원문은 없지만, 민음사 번역본에 수록된 시의 수보다 많습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syo 2019-03-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받아야 된다니까 정말......

cyrus 2019-03-22 17:51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네요... ㅎㅎㅎㅎ

oren 2019-03-22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디킨슨의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을 읽었는데, 정말 하나같이 독특한 시들만 있어서 놀랐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그녀만의 세계‘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녀가 유부남이었던 목사를 사랑했고, 자신의 사랑 고백이 거절당한 이후로 평생 집에만 틀어박혀 오로지 시를 짓는데만 열정을 쏟았다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절망에 차 있었을까 싶어서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도 짠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겠더군요.

cyrus 2019-03-22 17:56   좋아요 1 | URL
디킨슨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 시를 읽으니까 그녀가 왜 ‘죽음’과 ‘불멸’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시에서 죽음에 대한 그녀의 트라우마가 느껴졌습니다.

2019-05-31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0:21   좋아요 0 | URL
처음에 디킨슨의 시를 읽었을 땐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생각날 때마다 시를 읽으니까 그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디킨슨의 진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디킨슨이 좋아했던 장소가 정원입니다. 그래서 정원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요. 세밀한 관찰력이 없으면 쓸 수 없는 시들입니다.
 
진화의 배신 -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이 있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얻은 승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는 로마와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자신도 적지 않은 손해를 봤다. 그의 부대는 수많은 장군과 숙련된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군의 몰락을 불러올 승전이라면 패배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그 무섭다는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e)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새롭게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 속에서 신음한다. 인간은 진화에 성공하여 오랫동안 지구상에 살아남은 승리자가 되었지만, ‘승자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다. 질병과의 전쟁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유행하여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고, 장원제가 붕괴하는 거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인플루엔자 치료제가 없었던 1918년에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맞물려 유행하면서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이었다. 육체적으로 매우 취약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인간은 유전자 교환을 통한 유성 생식이 가능한 종이다. 유전자의 다양성은 인간의 장기적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해질수록 질병 면역력이 강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특정 질병에 취약한 속성을 물려받을 수도 있다.

 

진화의 배신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닳고 닳은 소재지만, 저자의 시각만큼은 무척 참신하다. 심장병 전문 의사인 저자는 인류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한다. 생존율을 높여주는 네 가지 유전 형질 덕분에 인류는 멸종하지 않았다. 저자가 제시한 유전 형질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먹으려는 유전 형질이다. 초기 인류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음식을 먹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식량이 귀한 시절이었다. 초기 인류의 과식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식량 부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식이 일상화되면서 당뇨와 고혈압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은 높아진다.

 

두 번째, 물과 소금을 많이 섭취하려는 욕구이다. 초기 인류는 아사(餓死)뿐만 아니라 탈수로 인한 죽음의 공포도 시달렸다. 그러므로 탈수 방지를 위해 물과 소금을 많이 섭취하는 습관이 생겼고, 인류는 체내의 물과 소금을 적절히 보존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소금에 중독되었다. 우리의 뇌는 짠맛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짠맛이 주는 만족감에 익숙해진 뇌는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짠 음식을 찾는다. 과도한 염분 섭취는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염분 섭취량이 많아지면 갈증이 유발되어 물을 많이 마시게 된다. 물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체내의 염분이 부족해지고, 전해질이 희석돼 물 중독 증상이 나타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위기 상황을 스스로 인식하거나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생존 본능이다. 인류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폭력, 살인, 전쟁 등)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우리의 내면이 보내는 경고 신호이다. 위험한 상황일 수 있으니 얼른 피하라.’ 과거에 비하면 현생 인류는 비교적 안전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불안에 떠는 성향은 우울증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자살까지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네 번째는 과다 출혈을 막는 응고 작용이다. 혈액 응고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생 인류는 혈액 응고 작용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응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면 혈전이 생긴다. 혈전이 생기면 심장마비, 뇌졸중 발생 위험이 커진다.

 

네 가지 유전 형질 덕분에 각종 질병에 면역력이 강한 개체의 인류가 살아남았고, 자손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현대에 들어서는 이 기능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승자의 저주에 빠진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미래의 인류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제시한다. 하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다음 후손들이 태어나기 전에 모든 인류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는다는 시나리오다. 두 번째는 건강해지기 위해 인류가 스스로 제 몸을 관리한다는 시나리오다. 세 번째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건강을 유지한다는 시나리오다. 다만, 이 시나리오는 과학에 완전히 의존하는 인류의 탄생을 예고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 가까운 발상은 아니다.

 

이 책은 유전자와 진화의 배신이 인간을 성인병 위험에 노출된 연약한 존재로 만들게 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강이 나빠진다고 유전자 탓만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그동안 진화의 문턱을 수차례 넘어서면서 살아남은 지구의 승리자인 것처럼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승리감에 도취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다. 진화의 배신은 인간을 진화의 배신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저자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진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인류주연의 장대한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음 주 수요일(327)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 주연의 영화 <콜레트(Colette)>가 개봉된다. <콜레트>는 프랑스의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콜레트 역을 맡았다.

    

 

 

 

 

 

 

 

 

 

 

 

 

 

 

* [품절]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천진난만한 탕녀(문학동네, 2000)

    

    

몇 주 전에 영화 개봉 소식을 확인한 이후부터 오랜만에 콜레트의 소설 천진난만한 탕녀(L’ingenue libertine)(약칭 탕녀’)를 펼쳤다. 3년 전(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군…‥)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탕녀1909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초기 작품이다. 1904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Minne)과 이듬해에 나온 후속작 민의 방황(Les égarements de Minne)을 합친 작품이다. 민은 탕녀로 묘사되는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탕녀는 콜레트의 첫 번째 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Henry Gauthier-Villars)와 이혼하고 난 뒤에 나온 작품이다. 콜레트는 작가 겸 음악 평론가로 활동한 빌라르의 필명 윌리(Willy)를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 ‘윌리라는 필명으로 나온 작품이 바로 클로딘 시리즈(Claudine stories)이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총 네 편의 소설이 발표되었으며 클로딘이라는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클로딘 시리즈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콜레트의 글쓰기를 의심하는 여론이 있었다. 고다르가 소설의 절반을 썼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다르가 콜레트의 글쓰기에 지나치게 간섭했던 것은 사실이다. 콜레트는 자신의 창작욕마저 지배하려는 남편의 태도에 못마땅했다. 게다가 작가로서의 명성을 앞세워 다른 여성들을 만나고 다니는 남편의 바람기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콜레트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다. 고다르와의 이혼 후 콜레트는 두 번이나 결혼했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번째 남편의 의붓아들과도 연애했다. 배우로 활동했을 땐 귀족의 딸과 4년간 동거를 했다. 어느 책에서는 콜레트를 레즈비언이라고 언급했던데, 그녀의 성 정체성은 바이섹슈얼(bisexual)에 더 가깝다.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방랑하는 여인(지만지, 2013)

    

 

 

첫 번째 이혼 후에 콜레트는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뮤직홀 댄서와 팬터마임 배우로 활동한다. 1910년에 발표된 방랑하는 여인(La Vagabonde)은 이혼 후 그녀의 삶이 일부 반영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르네 네레(Renée Néré)는 뮤직홀을 전전하는 가난한 댄서이자 팬터마임 배우이다. 그녀는 바람기 있는 화가인 남편과 이혼한 후 개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이 의미하는 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면서 확인하려는 과정이다. 르네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글을 쓰기 위해 남편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선택하지만, ‘고독이라는 그림자가 수시로 그녀를 괴롭힌다.

 

 

 내 나이의 여자에게 고독은 자유를 만끽하게 하는 한 잔의 포도주였다가 어떤 때는 머리를 벽에다 짓찧게 하는 쓰디쓴 독주가 되기도 한다.

 

(콜레트, 이지순 옮김, 방랑하는 여인, 전자책 18~19)

 

 

콜레트의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는 거울’, ‘동물그리고 정원이다. 콜레트의 소설에서 거울은 여성 인물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관능적인 여성성을 확인해주는 남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콜레트의 여성 인물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꾸밈없는 본능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암고양이(창비, 2013)

 

 

콜레트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고양이. 실제로 콜레트는 고양이로 분장하여 공연한 적이 있다.[1] 그녀가 쓴 소설에 개와 고양이를 언급한 내용이 무조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의 행동을 고양이 특유의 행동에 빗대어 묘사하기도 한다. 1933년 작 암고양이(La Chatte)는 암컷 고양이에 푹 빠진 남자와 그와 고양이의 관계에 질투하는 그의 아내의 일상과 심리 상태를 그린 소설이다.

    

 

 

 

 

 

 

 

 

 

 

 

 

 

 

* 데이먼 영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이론과 실천, 2016)

    

 

     

콜레트의 어머니 시도니(Sidonie)는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의 애칭은 시도(Sido)였고, 콜레트는 1929년에 유년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반영한 자전적인 소설 시도를 발표했다. 이 소설에 꽃을 애지중지하게 관리하는 시도의 모습이 나온다. 콜레트의 표현에 따르면 시도는 꽃에 대한 욕심이 무척 강했다. 어린 콜레트가 정원에 있는 화분의 흙을 손으로 파냈을 때, 시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덟 살짜리 살인자라고 말하면서 혼을 냈다고 한다.[2] 꽃에 대한 콜레트의 애착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콜레트에게 정원은 펄펄 뛰어오르는 감정을 잠재울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자 예민한 그녀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놀이터이다.

    

 

 

 

 

 

 

 

 

 

 

 

 

 

 

* 리디 살베르 일곱 명의 여자(뮤진트리, 2015)

* [절판] 조은섭 포도주, 해시시 그리고 섹스(밝은세상, 2003)

    

 

 

영화를 보기 전에 콜레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고 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의 파격적인 행보들(남편의 의붓아들과의 연애, 동성애, 반나체로 춤을 추거나 공연하는 콜레트의 모습)이 과연 영화에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관객들의 정서상 쾌락을 추구하는 콜레트의 자유연애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소재이다. 콜레트의 파란만장한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책으로 프랑스 작가 리디 살베르(Lydie Salvayre)일곱 명의 여자조은섭포도주, 해시시 그리고 섹스 등이 있다. 조은섭의 책은 절판된 상태라 유일하게 남아있는 콜레트에 관한 책은 일곱 명의 여자뿐이다. 콜레트를 조금이나마 언급한 책이 더 있는지 알아보고, 발견하는 대로 새로운 글을 쓸 예정이다.

 

 

 

    

 

 

[1] 사진 설명: 카바레에서 사랑에 빠진 고양이를 연기하는 콜레트(1912년). 로베르 드 라로슈, 질 르 파프 공저의 고양이85쪽에 왼쪽 사진이 실려 있다.

 

 

 

 

 

 

 

 

 

 

 

 

 

 

 

 

 

* [절판] 로베르 드 라로슈, 질 르 파프 고양이(창해, 2000)

 

 

 

 

[2] 데이먼 영, 서정아 옮김,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131~132, 이론과 실천, 2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은 한 달에 한 번씩 여성주의 영화를 봅니다. 한 달 동안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과 관련된 주제의 여성주의 영화를 보는 거죠. 어제가 바로 영화를 보는 날이었습니다. 이날을 ‘무비 나이트(Movie Night)라고 부릅니다.

 

 

 

 

 

 

 

 

 

 

어제 본 영화는 넷플릭스(Netflix)에 공개된 두 편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단편 영화입니다. <피리어드: 더 패드 프로젝트(Period: End of Sentence)><From Iron Girls To Leftover Women>입니다.

 

 

어제 같은 월요일은 ‘월요병’이 생기는 날이죠. 그렇지만 어제 출근을 하지 않아서 월요병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어요. 어제 오전에 네 시간짜리 민방위 교육을 받았어요. 오후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일요일 같은 월요일을 보내는 기분이었습니다.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워서 일찍 ‘스몰토크’로 향했습니다. ‘스몰토크’는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 영화 모임을 진행하는 장소이며 각종 스터디 모임 등을 하기에 아주 좋은 카페입니다. 어제는 카페 사장님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서 제가 카페 문을 직접 열었어요. 사장님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사장님 대신에 카페 장사를 하는 건 아니고요, 저녁에 있을 행사를 준비할 겸 카페에서 책 읽으려고 일찍 문 열었어요.

 

카페에 가기 전에 대구시청 주변의 헌책방과 알라딘 서점을 먼저 들렀어요. 지난주에 알라딘에 주문한 책들이 서점에 따로 보관되어 있어서, 그거 받으려고 갔어요. 한 시간 정도 헌책방과 알라딘 서점을 둘러보고 난 뒤에 카페에 도착하니까 오후 4시경이었어요.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행사를 위해 탁자와 의자들을 배치했어요.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라서 저 혼자서 할 수 있었습니다.

 

 

 

 

 

 

 

 

 

 

 

 

 

 

 

 

 

 

 

 

 

 

 

 

 

 

 

 

 

 

 

 

 

 

* 이지언 《도나 해러웨이》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 [품절] 피터 커스 《ISADORA, A Sensational Life》 (홍익출판사, 2003)

* 라나 톰슨 《자궁의 역사》 (아침이슬, 2001)

* [절판, No Image] 《일본대표단편선 3》 (고려원, 1996)

 

 

 

 

행사 준비를 끝낸 뒤에 저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혼자서 카페에 책을 읽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요, 드디어 어제 그날이 이루어졌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의 장소에서 책을 읽으니까 몰입이 잘 되었습니다. 알라딘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은 영국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평전인 《ISADORA, A Sensational Life》와 이제는 과거 속 이름만 남게 된 대형 출판사 고려원에서 나온 《일본대표단편선 3》, 그리고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의 사상을 요약 정리한 《도나 해러웨이》입니다. 어제 마침 알라딘 서점에 《자궁의 역사》라는 책 한 권을 발견해서 사들였습니다.

 

 

 

 

 

 

오후 5시 조금 지나서 레드스타킹 핵심 멤버인 hippie-yolo(히피 욜로)이 오셨어요. 레드스타킹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분은 이 히피 욜로 님의 인스타그램에 DM으로 신청하면 됩니다(깨알 홍보). 저녁 행사 때 먹을 간식들을 함께 사러 갔어요. 그리고 의자를 다시 배치했어요. 처음에 저는 탁자를 치우고 의자만 세워서 놓았어요(Before 사진 참조). 히피 욜로 님은 영화 보는 사람들이 편하게 마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의자 배열 한 가운데에 커다란 탁자 하나를 놓자고 제안했습니다. 히피 욜로 님이 제안한 방식대로 탁자와 의자를 배치했습니다(After 사진 참조). 제가 시도했던 의자 배열 보다 좋았습니다. 저는 또 한 번 히피 욜로 님에게 한 수 배웠습니다.

 

 

 

 

 

오후 7시부터 외부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레드스타킹이 주최한 공식 모임이나 행사 관련 포스터를 제작하는 멤버가 ‘어른들을 위한 음료’를 무려 5캔이나 사왔어요.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맥주를 마셨어요. 다음 번 영화 행사는 ‘무비 나이트’가 아니라 ‘무비 앤 알코올(M&A) 나이트’가 될 것 같군요.

 

 

첫 번째로 본 영화는 <피리어드: 더 패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영화는 올해 열린 제91회 미국 아카데미상의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도 여성들은 가난한 농촌에서 생활합니다. 그녀들은 위생적인 생리대를 사보거나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도에는 여성의 생리를 금기로 여기는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인도 여성들은 ‘생리’라는 단어조차 입으로 꺼내지 못합니다. 영화 초반부에 인터뷰어(영화감독으로 추정됩니다)는 여학생에게 ‘생리’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여학생은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그 여학생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난감한 표정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표정이었습니다. 여학생의 두 눈에 ‘생리’에 대해서 말을 했다간 신에게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 두려움이 보였습니다.

 

 

 

 

 

 

 

 

 

 

 

 

 

 

 

 

 

 

 

* 엘리즈 티예보 《이것은 나의 피》 (클, 2018)

* 김보람 《생리 공감》 (행성B, 2018)

 

 

 

인도의 상당수 힌두교 사원은 생리 중인 여성의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생리하는 여성이 ‘깨끗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도 성인 여성들조차도 생리를 불결하면서도 부끄러운 신체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또 생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생리 중에 사원에 출입하면 신을 노하게 하여 재앙을 받을 거라고 믿습니다.

 

더 놀라운 건 영화 장면으로 나온 인도 남성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생리대(패드)’가 무슨 용도로 쓰는 건지 모릅니다. 어떤 인도 남성은 생리대가 ‘하기스 기저귀’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생리대의 필요성을 느낀 인도 여성들은 친환경적이면서도 친서민적인 생리대를 직접 만들어 팔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패드 프로젝트’입니다. 생리대의 재료는 인도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목화 솜털입니다. ‘패드 프로젝트’에 참가한 여성들은 직접 기계를 다루면서 생리대를 제작합니다. 완성된 생리대는 ‘플라이(fly)라는 이름으로 판매됩니다. ‘패드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여성들이 사는 집에 직접 방문해서 홍보하거나 한 자리에 모인 여성들 앞에 생리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홍보합니다. ‘패드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처음으로 ‘경제 활동’을 경험합니다. ‘패드 프로젝트’가 참가한 여성들은 그동안 집에서 ‘무급 가나 노동’만 하면서 지냈거든요. 생리대를 판매한 여성들은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여성은 경찰이 되는 게 꿈(경찰이 되면 여성을 괴롭히는 남성을 붙잡아서 채찍으로 때려주고 싶다고 말합니다)입니다. 경찰은 인도 여성의 경제적 ·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주는 직업입니다.

 

레드스타킹 여성 멤버는 생리대 이름이 너무 좋다고 말했습니다. ‘플라이’가 ‘날다’라는 뜻 이외에도 ‘자유’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플라이’를 사용하는 여성들과 ‘플라이’를 판매하는 여성들 모두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합니다. <피리어드: 더 패드 트로젝트>는 생리대 하나가 인도 마을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하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 박이은실 《월경의 정치학》 (동녘, 2015)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인도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긍정적으로 느껴졌지만, 인도 여성들이 ‘날개’를 달아 ‘자유’를 누리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의 권위와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힘이 합친 거대한 카르텔을 깨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월경의 정치학》이 인용한 어느 문화인류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의 생리를 금기로 여기는 종교 문화는 여성을 억압하는 요인이 아니라, 여성을 ‘해방’해준다고 합니다. 생리 중인 여성들은 사원에 출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소한 집안일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성들은 집안일의 중압감에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집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친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듯한 견해이지만, 생리 중인 여성들이 제대로 쉴 수 있는 기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편하게 쉴 수 있다고 해도 ‘일시적인’ 해방에 불과합니다.

 

 

 

 

 

 

 

 

 

 

 

 

 

 

 

 

 

 

* 슐람미스 샤하르 《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나남출판, 2010)

* [레드스타킹 선정 도서]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종교가 점진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구습을 타파하고, 여성의 권익 신장에 노력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백래시(backlash)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종교의 주류 세력은 변화를 지향하려는 다른 종교 세력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주류 세력은 비주류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공격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 대립이 심했던 유럽 중세 시대에 이단 종파로 몰린 ‘카타리 파(Cathari)입니다. 카타리 파는 여성에게도 사제 서품을 했으며, 여성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했으며 여성 사제들을 양성했습니다. 카타리 파가 공식적으로 이단 종파로 규정되기 전까지 카타리 파에 가입한 신자의 60% 이상은 여성이었습니다. 슐람미스 사하르(Shulamith Shahar)《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캘리번과 마녀》는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여성 신자들에게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워 ‘마녀’로 만든 기독교의 탄압 사례를 잘 설명한 책입니다.

 

두 번째로 본 <From Iron Girls To Leftover Women>은 중국 여성 문제를 다룬 영화입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받치고 있다’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을 혁명으로 척결해야 할 권력 중 하나로 봤습니다. 마오쩌둥은 국가 경제력을 향상하기 위해 여성 역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인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여성의 사회적 참여 기회를 늘리기 위해 각종 법적 제도를 마련했고, ‘여성은 곧 국력’이라는 사실을 부각한 ‘강한 여성’ 이미지를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가 외친 ‘여성 해방’은 헛된 구호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 여성들은 여전히 가사 노동을 책임지고 있었고, 국가는 인구수를 조절한다는 이유로 중국 여성들의 출산 능력을 통제했습니다. 1980년대 중국 정부의 ‘한 자녀가정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실행한 이후로 중국 인구수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성비 불균형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배우자를 찾지 못한 결혼 적령기의 남성들을 위한 ‘결혼 시장(相亲角, 샹친쟈오)이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혼하지 못한 남성을 자식으로 둔 노부모들은 아들의 프로필이 적힌 종이를 들고 공원에 갑니다. 자식의 결혼 상대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From Iron Girls To Leftover Women>의 초반부는 결혼 시장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 [레드스타킹 선정 도서]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6장 ‘민족해방과 여성해방’ 편은 사회주의 국가들(중국, 구 소련, 베트남)이 내세웠던 여성 정책과 그곳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부닥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여주면서 한때 ‘여성 해방’을 위한 대안으로 주목받은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이 글은 <From Iron Girls To Leftover Women>을 보기 전에 읽으셔도 좋습니다. 여성을 위한 중국 사회주의적 정책이 나온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읽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03-1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도 생리대를 못 사는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됐는지 모르겠다.
인도는 그렇다쳐도 OECD 가입국이라면서 이게 사실인가
의아스럽더군.
모임 분위기와 달리 영화 보면서 좀 착잡했겠다.

cyrus 2019-03-20 12:36   좋아요 0 | URL
영화에 보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인도 여성들의 모습이 나와요. 일상용품이나 다름없는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있는데도 생리대가 없는 인도의 현실이 웃펐습니다... ^^;;

레삭매냐 2019-03-1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 브로는 맥쥬 드시면 안되지
않았나요? ㅋㅋㅋ

모임에 열심으로 임하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참으로 보기 좋습네다.

cyrus 2019-03-20 12:3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낮술을 하고 싶어서 점심 때 친구들이랑 한 잔, 저녁에는 두 잔 마셨어요. 이 정도면 적게 마신 겁니다... ^^;;

목나무 2019-03-19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영화 모두 저에게는 생소하기만 한데... 리뷰글 보니 한번 보고싶네요!
그나저나 혼자가 아닌 여럿이 즐기는 M&A 나이트라니요! 진짜 부럽습니다.~ ^^

cyrus 2019-03-20 12:39   좋아요 1 | URL
<피리어드: 더 패드 프로젝트>는 한글 자막이 있어요. <From Iron Girls To Leftover Women>은 한글 자막이 없어서 영어 자막으로 봐야 해요. 넷플렉스에 가입하면 한 달 동안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어요. ^^
 
깔보는 사람의 심리
사카이 준코 지음, 장현주 옮김 / 경향BP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중2병’이라는 은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일본의 개그맨이 만든 중2병은 말 그대로 중학교 2학년 청소년들의 정서를 의미하며, 그러한 정신세계를 ‘초딩’이라는 말처럼 비하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원래 중2병은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난 남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라고 생각하는 사춘기 청소년의 특성을 재미있게 표현한 은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해진 중2병은 허세를 부리면서 주위 사람들을 깔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게 됐다.

 

사람들은 누구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그래서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부분에서든 크고 작게 우월감을 느낀다. 우리가 비교하는 대상은 매우 다양하다. 친구일 수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상사나 부하직원일 수 있고, 선배나 후배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비교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열의 개념이 자주 포함된다. 여러 대상을 비교한 후에는 아무리 비슷한 수준이어도 무조건 구분해서 서열을 매긴다. 물론 서열화가 필요한 때도 있지만, 철저하게 서열을 정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진 사회 조직은 개인의 개성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위계질서가 만들어낸 권위 의식은 과도한 우월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깔본다. 또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불합리한 명령도 서슴지 않는다.

 

《깔보는 사람의 심리》는 우리 일상에 만연한 ‘상대방을 깔보는 심리’를 규명하기 위한 시도로 쓰인 책이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사카이 준코(酒井順子)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경험들을 돌이켜보며 ‘깔보는 사람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과 타인을 수없이 비교하며 살아간다. 비교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타인을 깔보게 된다. 따라서 경제적인 부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갑질’을 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깔보는 심리가 있는 건 아니다.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 흔히들 ‘약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타인을 깔보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의식한다.

 

저자는 타인을 깔보는 심리를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는 병’이라고 표현한다. 타인을 깔보는 사람들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누는 극심한 서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깔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우월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없다면, 병의 심각성을 스스로 인식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마음속에 일어난 우월감을 직설화법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러니까 타인을 비교하면서 무시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타인과 비교하려는 심리적 습관을 완전히 떨쳐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위계 사회는 은밀하면서도 더욱 강력해진 우월감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인과 구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회가 평화로워질까? 저자는 머리말에서 타인을 깔보는 생각을 해도 말로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단순한 발상이다. 타인을 비교하면서 깔보려는 심리적인 병을 고치기 힘든 건 안다. 하지만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심리적인 병을 고치라는 식의 대안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대놓고 타인을 깔보는 ‘철면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속으로 타인을 깔보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익명의 가면 쓴 사람’이다.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은 비뚤어진 우월감을 화산처럼 분출하는 장이다. 익명의 사람들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연예인이나 유명인 또는 사회적 약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일시적으로 짜릿한 만족감을 느낀다. 우월감을 느끼고 싶다는 것은 내재한 열등감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은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싶은 본능으로 발산하기 쉽다. 우월감과 타인을 깔보는 심리를 그러려니 하고 개인이 감내하는 건 일시적인 처방이다. 서로 비교하고, 깔보고, 물어뜯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사회를 바꿔내는 데 한계가 있다.

 

 

 

 

 

※ Trivia

 

* 그러나 인터넷 시대가 되자 ‘약자의 집단 따돌림’ ‘선제공격’의 피해자였던 층이 괴롭히는 쪽이 된 것입니다. (17쪽)

 

→ “‘약자의 집단 따돌림’나”로 고쳐야 한다.

 

 

* 49, 50쪽

발렌타인데이밸런타인데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19-03-1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싫네요..;;;;

cyrus 2019-03-19 18:54   좋아요 0 | URL
‘발렌타인데이’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