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스티븐 호킹 지음, 배지은 옮김 / 까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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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신(God)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자들에게 우주는 기적이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세계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행성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지구에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체가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기적을 일으킨 존재가 신이다. 그러나 확실성을 추구해온 과학은 발전을 거듭할수록 종교의 불확실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신을 찾을 필요 없이 과학의 법칙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호킹의 마지막 책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줄여서 ‘빅 퀘스천’)을 읽고 있자니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 떠오른다. 중세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은 논리적이지 않은 군더더기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쉽게 풀자면, 가장 단순한 설명일수록 진리에 더욱더 가깝고 아름답다는 원칙이다.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가정(假定)은 최소한으로 해야 하며 쓸모없는 가정을 면도날로 잘라버리듯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킹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는 존재론적 검약의 원리인 ‘오컴의 면도날’에 따를 때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호킹은 생전에 여전히 풀리지 않은 우주의 법칙,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 고민했다. 《빅 퀘스천》은 그 고민과 관련된 거대한 질문(Big Questions) 10가지에 대한 최후의 대답이다. 이 책은 그의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질문의 주제는 ‘지적 생명체 존재 여부’,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우주 식민지 건설 가능성’ 등이다. 그는 또 이 책에서 인류가 향후 천 년 안에 핵전쟁이나 환경 재난이 일어나서 지구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거라고 경고한다. 사실 그의 경고는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생전에 언론과 인터뷰를 했을 때나 대중 강연을 했을 때 얘기했던 내용이다. 호킹은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우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미래의 인류를 위한 대안으로 ‘우주 식민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그는 달이나 화성에 인류가 정착할 수 있는 행성이라고 전망한다.

 

우주에 인류를 보내야 한다는 그의 야심 찬 생각에 동의하지만, ‘식민지’라는 표현을 왜 써야 했는지 궁금하다. 과연 우주 식민지는 지구를 대체하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다. 미래의 인류는 우주에서 새로운 문명을 세우려고 할 것이고,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 유지되는 우주의 신세계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호킹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의 발전에 누구보다도 우려를 표시한 학자이다. 그는 ‘성능 좋은 AI 무기’가 등장하게 되면 군비 확장 경쟁이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지구를 넘어 우주로 뻗어가는 군비 확장 경쟁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인공지능 연구는 우주 개발 사업과도 깊이 연계돼 있다. 우주 식민지 개발이 착수하면 사람의 노동력이 투입되는 대신 인공지능 기술에 의존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우주에서 군비 확장을 노리는 강대국들은 우주에서도 쏠 수 있는 미사일과 이에 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할 것이다. 실제로 미국 트럼프 정부는 2020년까지 ‘우주군’을 창설하고 이와 관련해 향후 5년간 8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주]. 우주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 간의 경쟁이 심화한다면 냉전시대 우주 전쟁 시나리오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살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205쪽)

 

 

출처는 확실하지 않지만, 호킹은 “자신을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는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고, 장애에 갇혀 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연구를 통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은 그의 삶을 완성했다. 호킹은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었던 시대의 영웅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고개를 들어 우주를 바라보자는 그의 당부가 장애인들에게 공감을 살지 미지수다. 호킹은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사는 인류를 ‘우리’라는 대명사로 호명하면서 미래에 무관심하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우리’에는 분명히 장애인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장애인이 꿈꿔야 할 미래와 장애인이 꿈꿔야 할 미래는 같지 않다. 호킹이 쓴 대명사 ‘우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미래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한다. 대부분 장애인은 이동권이 보장되어 마음 놓고 편하게 나들이할 수 세상을 원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자 ‘미래’이다. 장애인들도 우주를 향해 눈길을 돌릴 수 있고, 우주에서의 생활이 가능한 미래에 기대할 것이다. 그렇지만 장애인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한, 그들이 우주에 정착하고 적응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선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고민도 안고 가야 한다. 그런데 호킹의 글에는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나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은 장애인’, 즉 ‘비장애인’의 위치에 서서 쓴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호킹은 자기 생각을 ‘간결하게’ 쓰고 싶은 바람에 면도날을 너무 많이 휘두르고 말았다.

 

 

 

 

[주] <[달 착륙 50년 요동치는 우주패권] 美 우주군 선언 · 러는 우주방어 현대화…불붙는 ‘스타워즈’> (서울경제, 2019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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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03-29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을 사랑하는 직장동료가 이 책을 읽더니 제목만큼 간결하거나 쉽지 않다고 해서 엄두를 못 내고 시무룩했는데ㅠㅠ cyrus 님 존경합니다@_@;;;;;;;

cyrus 2019-04-08 05:43   좋아요 0 | URL
정말 쉽게 쓴 책입니다. 작년에 나온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일부 내용과 비슷해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은 번역한 이종필 씨의 해설이 곁들어 있어서 호킹의 업적을 이해할 수 있는 입문서로 좋습니다. ^^

페크pek0501 2019-03-30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비판 자세 좋습니다. 응원합니다.

cyrus 2019-04-08 05:46   좋아요 0 | URL
비판 없는 독서는 재미없어요. 가끔은 저자의 생각에 의문을 품고, 도발하는 일도 있어야 해요. 그래야 책 읽을 맛이 나죠. ^^
 

 

 

 

 

 

 

 

※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도 공개된 글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공식 후기를 써보네요.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한동안 절판된 책이었는데요, 몇 달 전에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이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재고가 남아 있다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출판사 측은 재고가 남아 있지 않다고 답변을 했었는데요, 다행히 그 분의 의견이 출판사 측이 반영했는지 지난달부터 알라딘에 책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언제 절판될지 모르니 관심 있는 독자는 꼭 구입하시길.

 

 

 

 

 

추위와 따뜻함이 반복되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는 감기에 걸리기 쉬운 날씨입니다. 제 주변에 감기나 몸살 증세를 호소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분들 모두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월요일(25일)찬드라 탈파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경계 없는 페미니즘》 첫 번째 읽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1부 1, 2장을 읽었습니다. 모한티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도 출신의 여성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내 유색인 여성 차별 문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인 ‘경계 없는 페미니즘(Feminism without borders)’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단 먼저 ‘경계’가 무슨 뜻인지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경계는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인종, 종교, 장애 등 인간의 일상생활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러 가지 경계선을 가지고 세상을 구분합니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본다”는 강력한 믿음은, 일상생활을 가로지르는 투명한 ‘경계’에서 나옵니다. 이 경계는 때론 차별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피부 색깔로 인종을 구분하는 인종차별주의입니다. ‘국민-비(非)장애인-이성애자-정상’과 ‘난민-장애인-성 소수자-비정상’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경계가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구분입니다. 이러한 구도는 모한티가 허물려고 하는 ‘장벽’입니다. 따라서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수많은 개인과 사회집단의 경험을 관통한 다차원적인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주1]입니다.

 

저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분석 방법으로 탈식민주의와 반자본주의적 비평을 제시합니다. 탈식민주의는 ‘서구-비서구’를 가르는 틀, 그리고 서구의 제국주의가 피식민지 비서구를 바라보며 재현하는 방식 등을 비판하는 이론입니다. 반자본주의 비평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비평 방식입니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는 ‘제3세계’로 명명되는 비서구를 착취한 서구 제국주의 및 식민지 문화를 문제 삼는다면, 반자본주의적 비평은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주목합니다.

 

흔히 ‘제3세계’라고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 ‘(정치적으로, 또는 성적으로) 억압받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한국이나 일본, 중국과 같은 아시아를 제3세계 국가라고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 중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배우고 있는 제3세계 여성을 다룬 과목은 중국 · 재중동포(조선족) 여성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구 여성,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제3세계 여성 이미지는 주체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서구 여성 이미지와 대비됩니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을 ‘서구 식민화의 피해자’, ‘남성 폭력의 피해자’, ‘가부장적 친족체제에 벗어나지 못하는 종속적인 여성’ 등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리는 서구 페미니즘 담론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서구식 담론은 제3세계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그녀들 고유의 역사를 생략해버립니다.

 

제3세계 여성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서구식 담론의 문제점은 우리나라에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우리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서구식 제3세계 담론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멤버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예는 국제 구호단체의 기부금 모집 광고였습니다. 구호단체의 광고를 보면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절망 어린 눈빛을 한 중동 · 아프리카 난민들의 모습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해자로서의 난민’ 이미지를 지나치게 부각하는 광고는 ‘가난하고 꾀죄죄한 난민’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듭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성행하고 있는 ‘여성 음핵 절제술’은 제3세계 여성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악습입니다. 여성 음핵 절제술 근절에 앞장서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관심과 참여는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성 음핵 절제술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3세계 여성을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억압받는 무기력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입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에 ‘서구가 우월하다는 이념의 헤게모니(hegemony)[주2]가 스며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을 함께 읽은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제3세계 여성을 설명하는 서구식 담론과 헤게모니에 익숙해진 것에 대해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3세계 여성 같은 타자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단정하게 만드는 ‘일상 속 권력’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의 위치에 서서 연대해야 할 타자를 ‘피해자’로 대상화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지는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타자들의 고통을 가중하는 커다란 함정이 됩니다. 이 책에 언급된 ‘성찰적 연대(reflective solidarity)[주3]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말하기 전에 ‘나’와 ‘타자’의 관계가 제대로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성찰’이 빠진 연대는 타자의 아픔을 제대로 품을 수 없습니다.

 

 

 

 

[주1]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문현아 옮김, 《경계 없는 페미니즘》, 여이연, 14쪽.

 

[주2] 같은 책, 69쪽.

 

[주3] 같은 책,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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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2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 브로는 가히 페미니즘 전문가로
등극하실 것 각입니다 !!!

전 리베카 솔닛의 책을 두어권 사긴 했는데
딴 데 정신이 팔려서리...

이른바 白禍의 시대에 서구석 관점에서부터
탈피하는 게 가장 우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cyrus 2019-03-28 17:12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ㅎ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없듯이 ‘남성 페미니즘 전문가’도 없어요. 저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

비연 2019-03-2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참 대단. 엄지척!

cyrus 2019-03-28 17:13   좋아요 0 | URL
대단하지 않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만나는 분들이 저보다 뛰어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입니다. ^^

페크pek0501 2019-03-3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게 함께 비를 맞는 것, 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는 자와 받는 자로 나뉘는 게 아니라 함께...

cyrus 2019-04-08 05:58   좋아요 0 | URL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게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비를 맞으면 옷이 젖고, 감기에 걸리기 쉬워요. 결국 비를 맞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에요. 고통이 생기는 일이죠. 내가 타인과 함께 비를 맞는 것은 타인을 힘들게 하는 경험을 함께 하면서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타인과 ‘나’ 모두가 비를 ‘안’ 맞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통을 주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적극적인 일을 시도하는 거죠. 저는 ‘비를 맞는 사람’은 고통을 감수하기만 하는 피해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비를 안 맞으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페크pek0501 2019-04-14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함께 비를 맞는다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비를 안 맞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비를 맞아야만 하는 상황인 거예요. 예를 들면 어느 농성장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며 며칠 동안 농성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비를 맞는 상황인 겁니다. 이럴 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건 함께 비 맞기. 즉 텐트에서 자고 농성을 하며 동고동락함이 되는 것이죠. ^^
 
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법 - 시공을 초월해 예술적 시각을 넓혀가는 주제별 작품 감상법
수잔 우드포드 지음, 이상미 옮김 / 시그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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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에베레스트(Mount Everest)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으니까요(Because it is there).”

 

 

1924년 에베레스트 제3차 원정에 도전하는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는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주 명쾌한 답변을 했다. 이 유명한 답변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회자하는 명언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요)라는 말로 알려졌다. 등산과 산 자체의 의미나 매력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표현한 말은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맬러리의 말은 산에 오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왜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죠?”라고 묻는다면(실제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맬러리가 대답했던 말과 조금 비슷하게 말할 것이다. “매력 있는 이야기가 그림에 있으니까요.”

 

인간은 시각 중심의 미적 체험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또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그림을 보는(감상하는) 것은 삶의 안정감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활동이다. 인간은 이러한 오래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감성과 미적 취향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인간의 심미 활동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그림을 어떻게 봐야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대답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추상미술을 비롯한 갖가지 예술이 등장한 지금 이 시대를 생각하면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미술사가 수잔 우드포드(Susan Woodford)《단숨에 읽는 그림 보는 법( Looking at Pictures)은 “그림을 어떻게 봐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그녀는 네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첫 번째 방법은 그림이 주로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 두 번째 방법은 그림에 반영된 시대상의 분위기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주는지 알아보는 것. 세 번째 방법은 그림이 현실적으로 그려졌는지 살펴보는 것.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화가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기술(technique)[주]을 구사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예술은 직관으로 이해해야 하며 감성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저자가 제시한 ‘그림 보는 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림을 보기 위해 도움이 되는, 아주 기본적인 방법을 모른다면 이런저런 잣대로 그림을 재단하고, 잘못 이해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그림 보는 법’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명료한 것이다. 그림 감상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그 그림 속에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내가 언급한 ‘이야기’는 그림의 형식(형태와 색채), 그림의 내용(그림에 묘사된 인물, 상황이나 사건 등)뿐만 아니라 그림 밖의 이야기(그림이 만들어진 사연, 화가의 삶)도 포함한다. 그림 속과 밖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관람객의 감성을 자극하며 흥미와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 사람은 ‘아름다움’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정의를 도출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잘 그려진 그림이라고 해서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름다움의 의미는 상대적이다. 사람들이 아름답다면서 칭송한 그림을 보면서 아무런 전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나 모델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과거에는 현실을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화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신만의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따라서 관람객은 화가가 그림을 통해 설명한 것, 즉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기 위해 능동적으로 감상해야 한다. 이것은 ‘머리’로 그림을 감상하는 자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단숨에’라는 표현만 보고서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이해하면 오산이다. 이 책의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핵심 질문’은 독자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독자가 그림을 보는 것과 미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이 책의 마지막 질문이다. “좋은 그림과 위대한 그림을 구분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자신만의 정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저자를 도발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호기가 넘치는 독자라면 이 질문 자체를 의심할 수 있다. “좋은 그림과 위대한 그림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화가’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고, 색채의 조화에 관한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기술에 대한 강점과 한계를 안다. 그런데 ‘위대한 화가’를 설명한 저자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가 생각하는 ‘위대한 화가’는 ‘기적 같은 재능’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화가이다. ‘기적 같은 재능’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의 오랜 노력 끝에 얻은 성취를 ‘기적 같은 재능’으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한다. 화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술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그림’과 ‘위대한 그림’을 딱 잘라 구분하면서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림이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이미 앞서 말했듯이 재미나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다. 특별한 매력이 있는 그림 속과 밖의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인 셈이다.

 

 

 

 

 

※ 글쓴이의 변: 글을 쓰다 보니 ‘감상문’이 되고 말았다.

 

 

[주] 책의 본문에는 ‘테크닉(technic)’이라고 적혀 있다. ‘테크닉’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면 ‘기술’ 또는 ‘기법’이라고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테크닉’이 아닌 ‘기술(technique)’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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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3-2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cyrus님 그림 보는 거 좋아하시는군요!!

cyrus 2019-03-27 12:49   좋아요 0 | URL
미술관에 자주 가보지 않았지만, 그림을 보면 무언가 생각할 수 있고,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서 좋아요. 종이책이 질리면 가끔 그림이 많은 미술 관련 책을 보곤 해요. ^^

레삭매냐 2019-03-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회화의 영역까지 파고
드시다니 대단합니다 !!!

cyrus 2019-03-28 17:16   좋아요 0 | URL
인상 깊은 주제를 다룬 미술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한동안 미술 책을 안 읽었어요. ^^;;

페크pek0501 2019-03-30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상문이든 리뷰든 써지는 대로의 글이 좋지요.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cyrus 2019-04-08 06:04   좋아요 0 | URL
가끔 내가 의도한 대로 글을 쓰지 못할 때가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되요. 그 생각을 쫓으면서 글을 쓰면 처음에 생각했던 글의 주제와 내용이 확 달라져버려요. 그런 경우가 많아요. ^^
 

 

 

 

‘죽음’에 대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가 먼저 죽음을 주제로 한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를 들어줄 사람들이 없다. 죽음이 너무 무섭기 때문일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죽음은 먼 옛날부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만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생각해낸 게 두 가지 묘책이었다. 하나는 지옥이나 천국과 같은 내세의 관념을 만들어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른바 불멸성이다. 이로써 삶의 유한성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될 수 있으면 죽음을 멀리 떼어놓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애써 부정하여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려 든다. 마치 햇빛 아래서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 노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2012)

*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슬픈 불멸주의자》 (흐름출판, 2016)

 

 

 

나와 그림자가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도 별개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외면하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긴다. 과거엔 가족이 시한부 환자를 부양했고, 삶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시한부 환자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죽어가는 순간이 가까울수록 가족과 사회에서 더 멀리 배제된다. 특히 의료체계는 죽음과 죽음을 환기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격리한다. 죽어가는 자는 중환자로 격리되며, 시신은 영안실의 싸늘한 침대 위에 눕혀진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노화는 실버타운에 격리된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현대 문명이 죽음을 손쉽게 숨길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과거의 죽음은 두려우면서도 친숙한 개념이었다. 과거에 아이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아이들은 세 살 무렵부터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주1].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에밀리 디킨슨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한국현대영미시학회 엮음 《현대 영미 여성시의 이해》 (동인, 2013)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의 민낯을 아주 가까이서 봤다. 그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사 간 집 주변에 묘지가 있었고, 그곳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을 자주 지켜봤다. 죽음은 그녀의 일상에서 멀지 않은 것이었다. 디킨슨은 친구, 자신과 정서적으로 교류를 나누던 지인들, 그리고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디킨슨은 죽음과 불멸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썼다. 그녀는 일상의 삶과 죽음이 동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았다. 디킨슨에게 죽음은 자신과 무관한 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일이다.

 

디킨슨은 자신의 죽음을 여러 가지 상황과 이미지를 통해 상상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

 

 

나는 내 두뇌에 장례를 느꼈네.

조문객들이 이리저리

밟고— 또 계속해서 밟았고—

마침내 감각이 완전히 터지는 것 같았다네—

 

그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추도식이, 북처럼—

울리고— 또 계속해서 울렸고—

마침내 내 마음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네—

 

그런 다음 나는, 그들이 관[주2]을 들어 올렸고,

똑같은 납 장화가 걸으며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시, 내 영혼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공간이— 조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네.

 

모든 하늘이 하나의 종이 되었고,

존재는 단지 하나의 귀가 되었고,

나와, 침묵은 어느 이방의 종족이 되어

여기서, 외로이, 난파되었다네—

 

그런 다음 이성의 널빤지가, 부서졌고—

나는 아래로, 또 아래로, 떨어지며—

사방으로 곤두박질치며, 별 세계와 부딪쳤고,

그제야— 마침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끝이 났다네—

 

 

(No. 280,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29~30쪽)

 

 

I felt a Funeral, in my Brain,

And Mourners to and fro

Kept treading — treading — till it seemed

That Sense was breaking through —

 

And when they all were seated,

A Service, like a Drum —

Kept beating — beating — till I thought

My Mind was going numb —

 

And then I heard them lift a Box

And creak across my Soul

With those same Boots of Lead, again,

Then Space — began to toll,

 

As all the Heavens were a Bell,

And Being, but an Ear,

And I, and Silence, some strange Race

Wrecked, solitary, here —

 

And then a Plank in Reason, broke,

And I dropped down, and down —

And hit a World, at every plunge,

And Finished knowing — then —

 

 

 

화자(디킨슨)는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장례식을 상상한다. 조문객들이 지나가가면서 생기는 발소리는 화자의 감각을 터뜨리게 만든다. 죽은 자를 추도하기 위해 울리는 북소리는 화자의 마음을 마비시킨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조종(弔鐘) 소리는 화자의 환청이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주변인의 죽음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을 혼자서 감당하는 시인을 예민하게 만든다. 시인의 정신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와 같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강은교 시인은 시 280번의 4행을 “다리에 아무 감각도 없어진 듯할 때까지”라고 번역했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네, 머릿속으로

애도자들은 이리저리

걸어가네 — 걸어가네 — 마치

다리에 아무 감각도 없어진 듯할 때까지.

 

 

(No. 280,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27쪽)

 

 

강은교 시인은 원문의 “Sense was breaking”을 ‘감각이 없다’는 의미로 의역을 했다. ‘breaking’은 ‘파괴’를 뜻한다. 윤명옥 교수는 “감각이 완전히 터진다”라고 옮겨 썼는데, 이 번역문을 읽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한 시인의 감정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디킨슨의 시 465번은 임종 직전의 상황을 그린 내용이다. 그녀는 이 시에 독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존재’를 등장시켜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나는 임종 때에— 한 마리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네.

방 안의 정적은—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있는—

공중의 정적과 같았다네—

 

빙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도 마르고—

숨소리도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왕께서 그 방에— 임종 증언을 위해

현현하는 순간의— 그 마지막 입성을 지켜보려고—

 

나는 내 유품에 대해 유언을 했고— 내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 가지려는 것에 서명을 했다네—

그런 다음, 한 마리 파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네—

 

푸른— 정체불명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빛과— 나 사이에 훼방을 놓았네—

그러더니 창이 가려졌고— 그런 다음

나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네.

 

 

(No. 465,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63~64쪽)

 

 

 

죽음을 앞둔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화자는 죽음에 초연한 모습이다. 윤명옥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이 시의 내용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기독교적인 전통에 반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왕(king)[주3]’은 죽어가는 화자의 눈앞에 나타나 그/그녀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신성한 분위기를 망친다.

 

 

 

 

 

 

 

 

 

 

 

 

 

 

 

 

* 프레드 게팅스 《악마 백과사전》 (보누스, 2014)

* [품절] 마노 다카야 《천사》 (들녘, 2000)

* 마노 다카야 《타락천사》 (들녘, 2000)

 

 

 

‘왕’과 ‘파리’는 대조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신’과 ‘악마’의 대립 구조를 연상시킨다. 디킨슨의 시에 나타난 파리는 ‘베엘제붑(Beelzebub) 또는 ‘벨제붑’으로 알려진 악마를 상징한다. 베엘제붑의 본래 이름은 바알제불(Ba’al Zebul)이다. 히브리어로 ‘하늘의 주인’을 뜻한다. 베엘제붑을 신으로 숭배하는 셈족(Semites)의 신앙을 적대시한 유대인들은 이 호칭이 그들이 존경하는 솔로몬 왕(Solomon)을 떠올린다는 이유로 히브리어로 ‘파리의 왕’을 뜻하는 바알제붑(Ba’al Zebûb)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악마를 가리킬 때 ‘베엘제붑’을 쓰기 시작했다. 베엘제붑은 지옥에서 상당히 높은 계급에 속한 악마이다. 사탄(Satan), 레비아탄(Leviathan)과 더불어 타락 천사 3대장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베엘제붑이 누군지 몰라도, 록밴드 (Queen)의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질리도록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 특이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절정에 이르는 오페라 파트 마지막에 “Beelzebub has the devil put aside for me”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오늘날의 죽음은 삶의 뒤편으로 밀려난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이방의 종족”이다. 그렇지만 디킨슨처럼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는 물질적인 풍요에 아주 많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거나 외면해버린다. 막연한 공포감과 거부감에 짓눌려 죽음을 외면하는 게 과연 행복하게 사는 삶일까. 디킨슨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삶에 대한 애착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죽음과 타협하는 방법을 알려고 했다. 죽음에 관한  디킨슨의 시는 독자에게 ‘삶과 함께 있는 죽음’을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제목에 대한 주]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2018.

 

[주1] 셸던 솔로몬 외, 이은경 옮김, 《슬픈 불멸주의자》, 48쪽.

 

[주2] 박재열 교수는 원문의 ‘Box’를 ‘상자’라고 직역을 했는데(《미국 여성시 연구》, 43쪽), 시의 전체 내용을 생각하면, ‘Box’는 시신을 안치하는 ‘관(coffin)’을 상징하는 단어로 봐야 한다.

 

[주3] 강은교 시인은 ‘죽음의 왕’이라고 번역했다(《고독은 잴 수 없는 것》, 73쪽). ‘king’은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신(God)’을 상징하고, 신의 권위를 깨뜨리는 존재가 ‘파리’이다. 따라서 ‘king’을 ‘죽음의 왕’으로 보기 어렵다. 파리야말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나 신과 대립하는 ‘죽음의 왕’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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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 -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산문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에이치비프레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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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은 ‘재즈 시대(Jazz age)라고 불리던 황금기였다. 재즈 시대는 낭만과 모순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금주법이 시행되었고, 알 카포네(Al Capone)가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한편에선 스윙재즈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성(性)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modern girl)‘플래퍼(flapper)라고 부른다. 그녀들은 싹둑 자른 단발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플래퍼 드레스를 찰랑거리며 무도회장을 드나들었다. 그녀들은 술과 담배, 춤과 파티, 화려하면서도 파격적인 옷차림을 즐겼고,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으며 도발적이었다.

 

스콧 F.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와 그가 탄생시킨 개츠비(Gatsby)는 재즈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환락과 환멸이 교차하는 재즈 시대에 선 젊은 세대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떠나간 연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거부가 된 뒤 날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개츠비의 모습은 그 시대의 화려한 낭만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그 이면에 감춰진 절망을 상징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역시 개츠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과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평생 그를 따라왔다.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는 피츠제럴드를 압박해온 평생의 짐이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를 뛰어넘은 대작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으며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부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술과 파티를 즐겼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면서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화려함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재즈 시대는 사상 최악의 경제 대공황이 오면서 막이 내렸고, 그는 마지막 소설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피츠제럴드 못지않게 그의 아내인 젤다 세이어(Zelda Sayre)도 수많은 스캔들을 몰고 다닌 화제의 인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녀를 낭비벽이 심하고, 남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녀’로 기억한다. 피츠제럴드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증언에 따르면 젤다는 남편의 글쓰기를 질투해서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항상 술을 먹였다. 부부가 파리에 살았을 때, 젤다는 프랑스인 비행 조종사와 짧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피츠제럴드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젤다는 정신병원과 요양소를 오가며 지냈다.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나고 8년 뒤에 젤다는 입원한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사망한다. 과연 그녀는 피츠제럴드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녀였을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아내’로만 기억해야 할 인물인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피츠제럴드를 들들 볶는 젤다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작가로서의 젤다’를 들려주는 《젤다》를 읽어보자. 이 책의 부제는 ‘젤다의 편에서 젤다를 읽다’이다.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젤다의 부정적인 모습, 즉 ‘남편의 재능을 파괴한 정신이상자’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젤다는 글재주만 좋을 뿐만 아니라 발레 실력이 뛰어난 플래퍼였다. 또 그림도 잘 그렸다. 그녀가 쓴 단편소설들은 ‘스콧 피츠제럴드’ 또는 그와 같이 쓴 것으로 발표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창작 욕구와 예술적 열정과 무시했다. 젤다는 남편의 반대와 딸의 양육 문제로 인해 정식으로 무용수로 데뷔할 기회를 놓쳤다. 만약 그녀가 무용수가 되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젤다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고,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그녀의 외로움과 우울증은 커져만 갔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일기와 편지에 담긴 문구를 베껴 적으면서 소설을 썼다. 그 문제의 작품들은 피츠제럴드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 준 데뷔작 《낙원의 이편》과 두 번째 장편소설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두 편 모두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다.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비평한 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Friend husband’s latest)에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을 ‘요상한 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 ‘요상한 책’을 쓴 남편의 ‘표절’을 지적한다.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꽤 편집되어 있지만 편지글들에서도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 있고요. 아무래도 피츠제럴드 씨는―스펠링 제대로 쓴 것 맞죠?―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

 

(이재경 옮김,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 중에서, 118쪽)

 

 

《젤다》에 총 5편의 단편소설과 총 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The original follies girl), 『남부 아가씨(Southern girl), 『재능 있는 여자(The girl with talent)‘Girl 시리즈’라는 표제를 달고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젤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사랑에 눈이 멀고 재능과 열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들이다. 『재능 있는 여자』는 젤다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루’는 미국 전역을 넘은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춤 실력을 갖춘 댄서이지만, ‘사랑’과 ‘가정’이라는 현실 앞에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미친 그들(A couple of nuts)은 재즈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담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주는 소설이다.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환락의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젊은 연인의 모습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재즈 시대의 풍경 사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제 젤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젊음의 생기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춤을 추던 ‘플래퍼’ 젤다의 이야기, 그리고 열정적인 충동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예술가’ 젤다의 이야기를.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재즈 시대의 ‘전설’로 남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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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3-2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게임 이름 같은데요, 젤다 피츠제럴드였네요. 주말에 날씨가 많이 차갑다고 합니다. cyrus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9-03-26 07:22   좋아요 1 | URL
지난 주 토요일과 일요일의 날씨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어요. 토요일엔 비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요즘 같은 날씨에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감기 조심하세요. ^^

2019-03-23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26 07:25   좋아요 0 | URL
제 나름대로 언어유희를 의도한 제목을 정해봤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