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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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eroticism)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와 다르다. 사실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남성 작가가 묘사한 에로티시즘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감정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을 긍정하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티시즘은 여성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 즉 육체적 ․ 정서적 기쁨을 표출하게 만든다. 하지만 포르노는 여성의 진실한 감정을 거부하고 억누른다. 그것은 감정이 없는 관능만을 강조한다. 포르노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에로티시즘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서적 쾌락도 포함한다.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황금기로 알려진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절정을 매력적으로 묘사했다.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삶의 즐거움’을 뜻하는 이 프랑스어는 벨 에포크를 요약해주는 표현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는 게 그저 즐겁기만 했다. 콜레트의 글은 ‘즐거운 삶’에 대한 찬가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즐거운 관능’을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이 느끼고 싶은 ‘즐거운 관능’을 표현한 콜레트의 글쓰기는 여성들만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던 벨 에포크의 사회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콜레트는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남편과 함께 사교계가 주목하는 셀러브리티 커플이었다. 1900년에 그녀는 남편의 필명(윌리, Willy)으로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학교의 클로딘》을 써서 발표한다. 소설의 여주인공 클로딘(Claudine)은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 제도를 거부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소녀이다. 그 이후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로 알려진 《파리의 클로딘》, 《가정의 클로딘》을 연달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클로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파리의 클로딘》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고향인 몽티니를 떠나 파리로 오게 된 클로딘이 사치와 향락이 녹아든 도시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낭만적 사랑의 확산으로 남녀 간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요소가 됐고,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정상 가족’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낭만적 사랑은 성별 역할 분리, 여성의 경제적 의존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콜레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근대적 시민사회에서 벗어난 여성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남성은 거부한다. 남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가부장제 권력은 콜레트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방을 쾌락의 대상으로 즐기는 존재는 여성이다. 클로딘은 고향에서 살았을 때 만난 여학교 동급생 뤼스를 ‘살결이 부드러운 친구’라고 묘사한다. 뤼스 역시 클로딘과의 관능적인 포옹과 애무를 잊지 못한다.

 

 

 ‘클로딘, 네가 나의 제일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준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야. 우린 우리 언니 에메와 마드무아젤(클로딘과 뤼스가 다닌 여학교 교장이자 담임 교사-cyrus 주)만큼 행복할 거고, 난 평생 동안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그 정도로 널 사랑해. 넌 너무 예쁘고, 네 살결은 백합 꽃잎 속 노란 꽃가루보다 더 보드라워. 너한테 따귀를 맞아도 좋아. 네 차가운 손톱도 좋아.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88쪽)

 

 

서로 떨어져 있는 클로딘과 뤼스는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유지한다. 두 소녀는 서로가 몸의 내밀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애무를 선호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에 서로에게 만족을 준다. 동성애를 떠올리게 하는 두 소녀의 우정과 그녀들이 공유하는 관능은 남녀 간의 사랑이 부여하는 통속적인 의미의 관능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콜레트는 남성의 욕구에 초점이 맞춰진 쾌락에 대한 한정된 개념을 거부하고, 관능적 쾌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콜레트의 작품에 구현된 관능은 여성이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마음껏 즐기는 에로티시즘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콜레트의 관능은 육체적 쾌락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식물, 그리고 동물과의 교감도 여성을 만족시켜주는 즐거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이다. 클로딘은 몽티니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감정 상태는 단순하게 향수병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정서적 쾌락을 그리워한다.

 

 

 아! 다시 몽티니로 돌아갔으면…‥ 그곳에서는 키 큰 싱그러운 풀들을 한 아름 껴안았고, 피곤하면 햇볕으로 따뜻해진 벽에 기대 앉아 잠들었고, 빗방울이 수은처럼 굴러다니는 연꽃잎에 담긴 빗물을 마셨고, 강가에 핀 물망초를 따서 테이블에 놓고 시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버드나무가지 껍질을 벗겨 진액을 핥았고, 풀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깨새의 알을 훔쳤고, 야생 까치밥나무의 향내 나는 이파리들을 마구 비벼 댔는데…‥ 아,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에 입 맞추고 싶었다!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입 맞추고, 또 그 나무가 건네는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221~222쪽)

 

 

콜레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양성적인 존재이다. 클로딘은 ‘여성의 남성성’을, 그녀가 장난스럽게 유혹하는 대상인 자신의 조카 마르셀은 ‘남성의 여성성’을 지닌다. 이 소설에서 마르셀은 바느질하는 것을 좋아하며 클로딘을 그를 ‘예쁘게 생긴 계집애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과 양성성은 이 작품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콜레트의 소설은 여주인공의 성적 모험에 충실하며,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성행위 묘사가 많은 통속적인 포르노와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준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볼 수 있듯이 콜레트는 사랑과 섹스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성적 경험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렇듯 《파리의 클로딘》은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면 이성애와 결혼의 안정성을 부인하는 퀴어 소설(queer novel)로 봐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성애 중심의 사회, 가부장적 결혼의 권위를 엿 먹인다. 《파리의 클로딘》은 여성주의적이라기보다 퀴어하다. 포르노적인 성 묘사가 나오지 않는 퀴어 소설이다. 동성애의 의미를 육체적인 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육체적 ․ 정서적 쾌락을 만끽할 수 있는 대항적인 삶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전복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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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음이 비슷해서일까요, cyrus님 글을 읽다보니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영화 「클로이」가 떠오르네요. 물론 내용은 별 관련은 없습니다만^^:)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1 | URL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분한 클로이가 도발적인 여성으로 나오지 않나요? 영화를 안 봐서 잘 모르겠어요... ^^;;

수이 2019-05-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2019-05-07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7 14:46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지 못할 것입니다.
 

 

 

 

1992429일 수요일, 배심원들은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도주한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한 네 명의 백인 경찰관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평결을 내린 총 열두 명의 배심원은 모두 백인이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결과는 흑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격분한 흑인들의 폭력과 방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 와중에 미국 언론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보다 두순자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두순자 사건은 로드니 킹이 구타당한 날과 비슷한 시기인 19913월에 일어났다. 흑인 밀집 지역에서 한인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두순자는 자신의 가게에 있는 주스를 사려던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해했다. 두순자는 흑인 소녀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 사건이 미국 주류 언론에 의해 부각되면서 흑인들의 분노어린 시선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인들에게로 향했다. 429일부터 54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폭동으로 한인업소 2천여 개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LA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인종 간의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달았다. 한흑(韓黑)갈등으로 불거진 LA 폭동은 당시 재미 한인사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인명과 물적 피해뿐 아니라 그동안 어렵사리 미국 사회에 정착해가던 한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 장태한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27년이나 지난 지금, 폭동이 일어난 도심 현장을 가까이선 본 재미 한인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폭동의 살벌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낀 한국 국민은 LA 폭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흑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LA 폭동을 흑인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집단적 일탈 행위로 인식한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폭동에 동참한 흑인을 비판하면서 흑인사회 전체를 범죄자 집단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LA 폭동은 가해자(폭동을 일으킨 흑인)피해자(재미 한인)로 구분하게 만드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LA 폭동이 일어나게 된 거시적인 원인을 되짚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으며 한흑 갈등과 재미 한인 역사 등을 연구했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LA 폭동은 흑백의 빈부 격차, 흑인 사회의 실업률, 경찰의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과 한인업소를 습격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로 인해 LA 폭동은 지역 상권을 둘러싼 흑인과 재미 한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인종 대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을 재미 한인을 공격하는 가해자로 보게 만드는 언론의 프레임(frame)은 흑인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았던 백인과 재미 한인들의 인종 차별 문제를 은폐한다. 1970~1980년대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인들은 단일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그들은 순수 혈통을 중요시했으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를 지향했다. 다른 인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재미 한인은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에게 매우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흑인과 소수 인종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흑인들의 불만을 커지게 했고,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흑인들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LA 폭동을 경험한 재미 한인들은 그 사건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LA 폭동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의 원인을 인종에 대한 무지와 차별이라고 지적한다. LA 폭동 이후로 재미 한인은 미국의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반성했으며 흑인을 포함한 여러 인종과 교류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열린책들, 2015)

* 하퍼 리 파수꾼(열린책들, 2015)

* [e-Book] 하퍼 리 외 하퍼 리 버즈북(열린책들, 2015)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보통 자신과 다른 인종과 민족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미국 흑인 못지않게 미국 남부인도 부정적인 편견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남부 노예제도의 인종 차별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억울한 누명이 씌워진 흑인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를 내세워 편견이 가져오는 인종 차별 및 갈등 문제를 개인의 정의와 양심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과 동명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애티커스 핀치는 정의로운 백인 남성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로 제목과 내용을 완전히 고치기 전에 쓰인 파수꾼(Go Set a Watchman)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전작과 완전히 180도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라고 강조하던 변호사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대부분 독자는 앵무새 죽이기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나이가 들면서 변절했다고 평가한다. 애티커스 핀치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과 해석은 자유다. 나는 앵무새 죽이기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노예제에 반대한 남부인의 모습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의 모습을 각각 대변하는 인물로 보고 싶다. 두 작품에 나오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은 단일한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남부인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품절] 이영효 미국사 낯설게 보기(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 손영호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살림, 2003)

* 김형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살림, 2003)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남북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남부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한계가 있다. 앵무새 죽이기에 묘사된 메이콤은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 붙여진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이다. 메이콤 주민들은 혈연으로 얽힌 폐쇄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하퍼 리는 남부에 위치한 이 마을을 외부인의 유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단절된 지역으로 묘사한다.

 

가난하고, 노예제 유지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남부인 이미지는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인과 북부인 간의 노선 갈등이 고조되던 1820년대에 만들어졌다. 북부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인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고, 성서 구절을 인용해 노예제의 허위를 증명하려고 했다. 북부인들의 공격에 의식한 남부인은 남부 연합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갔고, 남부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도 성서를 인용하여 노예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남부인은 노예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내세워 노예제의 결점을 지우려고 했다. 이로써 미국은 남과 북이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고,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하나님(노예제를 반대하는 하나님, 노예제를 옹호하는 하나님)을 내세워 남북전쟁을 일으킨다. 북군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미국 역사는 북부인 중심의 역사, 승리자 중심의 역사로 기록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역사가는 자유과 노예 해방을 외친 북부인을 찬양했고, 반대로 남부인을 고리타분한 패배자로 평가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부는 자유와 도덕과 담쌓은 사람들이 사는 폐쇄적이고 단절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일관된 남부 이미지는 남부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남부 이미지에 대한 반론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남부에 다수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보다 노예를 한 명도 소유하지 않은 자영농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가 있다. 그리고 북부인들도 남부인들과 다름없는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편견이 어느 정도 반영된 남부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북부의 역사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반쪽짜리 역사만 보는 것과 같다.

 

미국사 낯설게 보기(8, 9, 10)살림지식총서에 포함된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는 주류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미국 흑인과 미국 남부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또는 정의와 불의로만 보는 사람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검은색과 흰색만 볼 뿐, 그사이의 수많은 다른 색의 스펙트럼은 보지 못하게 된다. 인종, 민족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인종과 민족, 심지어 지역 주민을 고정관념만 가지고 정의 내리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정관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비슷한 사람, 같은 언어와 비슷한 억양을 가진 사람을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성향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다운 약점을 피하려면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가 자신의 딸 스카웃(Scout)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무나도 쉬운 일인데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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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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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올해의 절반이 지났지 않았지만, 내년도 올해만큼이나 특별히 기념해야 할 일이 가득하다. 내년이면 하퍼 리(Happer Lee)가 쓴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가 발표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소설은 경제 대공황으로 악화하여가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 위치한 앨라배마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무고하게 체포된 흑인 톰 로빈슨(Tom Robinson)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의 이야기를 그의 어린 딸인 진 루이지 스카웃핀치(Jean Louise “Scout” Finch)의 시선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앵무새 죽이기미국을 대표하는 국민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중의 하나이다

    

소설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흉내지빠귀 죽이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흉내지빠귀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양서류의 울음소리까지 흉내 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 능력이면 흉내지빠귀는 조류계의 주크박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능력은 앵무새를 따라갈 수 없다. 흉내지빠귀는 앵무새와는 전혀 다른 새이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서식지도 다르다. 흉내지빠귀는 미국에 서식하고, 앵무새는 열대 지방에 서식한다.

 

‘To Kill A Mockingbird’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려진 해는 1990년이다. ‘청담문학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은 저작권자와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은 해적판이었다. 해적판 제목은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이다. 1992년에 앵무새 죽이기라는 익숙한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한겨레출판사)이 나온다. 혹자는 하퍼 리의 소설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로 잘못 알려진 것을 오역이 낳은 폐해라고 지적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To Kill A Mockingbird’ 제목 오역 사례를 너무 나쁘게 볼 필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원문을 직역하는 것보다 국내 문화와 국내 독자의 성향을 고려한 초월 번역이 필요하다. 만약 흉내지빠귀 죽이기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이 서점에 비치되었다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책이 어느 정도 판매되었다고 해도 책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 제목인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 ‘흉내지빠귀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중에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골라 보시라. 소설 제목을 직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의 익숙함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앵무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새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제목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번역 문제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는 건 시간 낭비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원작 소설과 영화 둘 다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간략한 줄거리와 애티커스 핀치의 명대사를 기억한다면 어디 가서도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소설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밑줄을 좍좍 그어 종이가 더럽혀져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애티커스는 명언이라고 해도 될 만한 훌륭한 말을 여러 개 남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애티커스의 명대사는 아빠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스카웃을 다그치면서 했던 말이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김욱동 옮김, 64~65)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미국 남부 사회에서 흑인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다. 따라서 백인 여자를 해코지한 흑인을 변호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예상대로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학교에서 스카웃은 아빠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수군대는 친구의 말을 듣는다. 그런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애티커스는 정의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묵묵히 변호 업무에 열중한다. 그가 말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편견의 함정을 지적하면서, 제대로 타인에 향해 다가서는 간단한 방법이다. 도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 도덕 교과서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된다. 말로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어도 살아가다 보면 자꾸만 잊어버린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이다. 편견은 차별, 혐오, 소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한계를 이겨내려면 타인의 경험을 똑바로, 그리고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려면 단순히 그 사람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심정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작가 은유의 말을 빌리자면 온몸이 귀가 되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자가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보는 행위와 타인의 입장을 듣는 행위는 방법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타인을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말, 그것은 실천하는 자세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공허한 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는 타인에 향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존중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애티커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207)고 말한다. 그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집중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지속해서 확산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소설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팁(tip)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을 보면서 타인의 경험을 보고 있기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속을 걸어 다닐 수 있다. 그러면 그 인물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타인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소설에도 한계가 있다. 소설 역시 작가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스며들기 좋은 장르이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인종 차별의 부당함을 강렬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 묘사한 흑인은 백인우월주의 앞에서 제대로 힘쓰지 못하며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 흑인을 억압받고 고통 받는 피해자로 그려진 것이다. 소설 중반부에 흑인들만 드나드는 교회가 나오는데, 톰 로빈슨이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분노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인은 핀치 집안의 유모 캘퍼니아(Calpurnia). 그녀는 교육을 받을 정도로 똑똑하며 흑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흑인 영어를 쓰기도 한다. 그녀의 행보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네그리튀드(Négritude)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백인 가정의 흑인 유모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틀에 벗어나지 못한다. 흑인 여성에게 부여된 충실하고 순종적인 가사노동자 이미지는 백인들이 흑인 여성을 유모로 부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캘퍼니아를 집 밖으로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애티커스의 말에 확인할 수 있다.

 

 

오빠, 마음이 상냥한 것까진 좋아요. 오빠가 인정이 많은 건 알지만 생각해야 할 딸이 있잖아요. 점점 자라고 있는 딸이에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야.

회피하지 마세요. 조만간 직면해야 할 문제예요. 어쩌면 오늘 밤에 하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이제 우리에겐 그 여자가 필요 없어요.

아빠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알렉산드라, 캘퍼니아가 원할 때까지는 내보낼 수 없어. 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그녀 없이 살림을 꾸려 올 수 없었어. 그녀는 이제 어엿한 집안 식구고, 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해. 게다가 난 네가 우리 일로 골치를 썩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필요 없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린 여전히 캘퍼니아가 필요해.

하지만 오빠―」

더구나 그녀가 애들을 키우면서 애들에게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어.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엄마보다 더 엄격했으면 엄격했지‥…. 애들이 잘못하면 벌하지 않은 적도 한 번도 없었어. 흑인 유모들이 흔히 그러듯 애들은 버릇없게 그냥 내버려 둔 적도 없었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키우려고 애썼단 말이다. 그리고 캘퍼니아의 견해란 꽤 훌륭하거든. 그리고 또 한 가지, 애들이 그녀를 좋아해.

 

(김욱동 옮김, 256~257)

 

 

애티커스는 캘퍼니아가 똑똑한 여성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집안에 있는 캘퍼니아를 똑똑한 흑인 여성이 아니라 아이들을 잘 키우는 착하고 모성 본능이 강한 흑인 유모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 아니면 가사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쫓겨날 위기를 처한 캘퍼니아를 지켜준 애티커스를 훌륭한 아버지의 귀감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애티커스의 백인가부장적 온정주의는 위계적인 주인-노예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인지 캘퍼니아는 애티커스가 맡은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녀도 흑인이라면 톰 로빈슨의 처지를 분명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다른 지역에 살다가 온 사람처럼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해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까. 자신과 말이 통하는 스카웃과 젬에게 살짝 자신의 속내를 내비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집안일을 열심히 하느라 톰 로빈슨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신 발언이 백인 주인의 귀에 들릴까 봐 마음속으로 삼켰던 것일까. 스카웃과 젬(“Jem” Finch, 애티커스의 아들이자 스카웃의 오빠)에게 타인을 손님처럼 공손하게 대하라고 따끔하게 가르치던 소설 초반부에서의 모습과 무척이나 상반된다.

 

독자들은 애티커스를 인종 차별에 맞선 정의로운 변호사로 기억한다. 그의 이미지에 따라오는 단어는 정의로움, 지혜, 자상함이다. 독자들은 흑백영화 속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의 얼굴로 그려지는 애티커스는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들 사이에서 유독 빛이 나는 인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만 보고 남부인들을 인종 차별을 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북부인을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개혁가로 추켜세웠고, 남부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종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북부인과 남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인종적 편견에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늘어났다. 남부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종종 남부인들의 인종주의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단순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역사적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의 한계를 보완해준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을 땐 등장인물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애티커스의 품성에 주목하면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는 방식은 낡았다. 출간 6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을 기점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풍성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1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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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 개정판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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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는 날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중에서)

 

 

 

술을 많이 마시면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온다. 술 한 잔 마시면 그 속에 있는 알코올은 혈액으로 흡수된다. 시간이 지나면 알코올은 모든 몸 조직에 퍼진다. 알코올이 뇌에 도착하면 신체에 특별한 변화가 나타난다. 알코올의 마취작용이 뇌 중추 신경계의 기능을 무디게 만든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뇌의 활동이 느려져 몸과 정신이 느슨해질 뿐 아니라 도취감마저 느끼게 된다. 술에 취한 상태는 기분을 좋게 하여 잠이 빨리 오게 만든다. 술잔을 여러 번 비우고 나면 감각신경부터 서서히 둔해지고 마침내 중추에 해당하는 척추신경에 이르러 반사 신경도 마비된다. 이때쯤 되면 첫 술잔의 쓰디쓴 술 한 모금에 인상을 찌푸리던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자제력이 약해진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는 시간에 구애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항상 취하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던 취하라. 그래야만 반복의 괴물인 시간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종교, 도덕과 아름다움이 주는 가치를 믿지 않았다. 그렇듯이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라는 단일한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그는 도취감을 통해 피로감을 일으키는 이성에 벗어나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순간에 일어나는 행복감에 몰입하는 삶의 철학을 말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졸지에 반신불수가 되었고,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오직 단 하나의 말은 잊지 않았다. 보들레르가 틈만 나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다름 아닌 육두문자인 제기랄이었다. 보들레르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쉽사리 채워지지 않은 허기진 마음을 채워보려고,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대마초에 의존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몸은 점점 망가져 너무 빨리 죽음의 길에 이르고 만다. 병상의 보들레르는 이 방법, 저 방법으로 자신의 불만족을 해소하려고 해봐도 끝내 참다운 안식과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쾌락에 의존한 인생살이를 통해 끔찍한 교훈을 얻은 보들레르는 지옥 같은 세상과 반죽음 상태에 이른 자신에 대한 구역질이 날 때마다 제기랄을 내뱉었다.

 

만약 인간이 이성과 언어 등을 담당하는 좌뇌를 상실한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무능력자(단독으로는 법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이토록 좌뇌는 인간의 실체, 라는 존재를 표현하는 핵심 기관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라고 부르면서 설명할 수 있는 건 사람마다 좌뇌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좌뇌이며 좌뇌가 나인 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에 걸려 좌뇌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 말년에 욕쟁이 환자로 살다간 보들레르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뇌과학자는 뇌졸중 전조증상을 느끼자마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였던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19961210일 아침에 자신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는다. 이때 당시 그녀의 나이는 서른 일곱이었다.

 

 

 

 

    

  연구소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오른쪽 팔이 마비가 되어 옆으로 풀썩 떨어지며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알았다.

  ‘맙소사, 뇌졸중이야! 내가 뇌졸중에 걸렸어!’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아, 이거 멋진데!’

일시적으로 황홀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30)

    

 

 

뇌졸중 진단을 받은 그녀는 장래가 밝은 뇌과학자에서 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뇌과학자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뇌 기능이 점점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며 관찰했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 그녀는 8년간의 치료 끝에 회복에 성공한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는 뇌졸중 투병 생활을 한 뇌과학자가 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환자로 살아가면서 경험하거나 느낀 것을 보여주는 투병일기에 머물지 않는다. 뇌졸중을 예방하는 방법과 뇌졸중 환자를 위한 식이요법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저자는 뇌졸중 경험으로 얻은 뇌에 관한 신비롭고 놀라운 통찰을 들려준다. 저자에게 뇌졸중은 절망의 병이 아니었다. 저자가 그토록 알고자 했던 뇌의 기능에 관해, 그리고 인간 존재의 경이로움을 일깨워준 ‘축복의 병이였다.

 

저자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뇌의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특히 그녀는 뇌졸중이 오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우뇌의 특별한 기능을 발견한다. 출혈로 인해 좌뇌가 완전히 멈추게 되자 그동안 조용히 잠들어있던 우뇌가 번쩍 눈을 뜨게 된다. 우뇌가 활발히 작동하면서 그녀의 의식은 일종의 열반 상태에 빠져든다. 대부분 사람은 좌뇌 위주로 사고하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크고 작은 생각들에 휩싸이면서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생각에 매달리게 되고,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괜한 걱정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 우뇌는 좌뇌와 달리 낙관적이다. 평화를 좋아하며 사랑, 공감 같은 기분 좋게 만드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한다. 우뇌가 활발하면 즐겁고 기쁜 일에 몰입할 수 있다. 좌뇌와 우뇌는 서로 다른 기능을 하고 있지만, 그 활동은 상호보완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좌뇌와 우뇌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를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나온 셈이다. 몸과 마찬가지로 지속해서 뇌에 일정하게 자극을 주면서 살아야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설렘이 느끼지 못할 때,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약해진다. 그냥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언제나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변화 없는 삶, 도전하지 않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듯이 우리의 뇌는 자극이 없는 것을 싫어한다.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뇌를 신선하게 자극할 일을 찾아봐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갈수록 뇌는 소리 없이 죽어간다. ()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야 한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를 들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잘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리뷰 제목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소설 제목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을 패러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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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9-04-2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마 모습 보여주세요~

cyrus 2019-05-01 11:42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 인스타에 가면 제 얼굴 사진 볼 수 있어요... ㅎㅎㅎㅎ

수이 2019-05-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팔로잉했어 우리 싸이러스는 똑같구나~~~
 

 

 

역사적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들을 수 없는 가운데 총 9곡의 교향곡을 만든 음악가 베토벤(Beethoven), 소아마비를 앓았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루 게릭 병(Lou Gehrig’s disease)’으로 알려진 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많은 사람이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2005년에 상영된 영화 <말아톤>은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자폐 청년이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은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고 아무 데서나 막춤을 추는 종잡을 수 없는 면모를 가졌지만 달릴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에 나온 영화 <맨발의 기봉이>는 지적장애 1급인 엄기봉 씨의 실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다. 기봉 씨는 팔순의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시는 효자로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는 어머니의 틀니를 사드리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지만, 지병인 협심증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장애를 가졌지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간다. 그들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화 밖으로 나와 우리 곁에 있다면 어땠을까. 스크린 속에만 있는 그들은 적어도 낯선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친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와 같은 영화로 인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은 ‘착하고 순수한 존재’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러한 이해가 장애인을 특정 이미지로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벽이란 이런 것이다. 영화가 아닌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인에 대해 대부분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미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데 일부 언론이 큰 몫을 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개인의 능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들을 마치 한 편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것처럼 보도하는 방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과 영화가 만든 ‘장애인 영웅 서사’를 보고 듣고 자란 비장애인은 장애를 ‘장애인이 극복해야 할 삶의 일부’이며 반드시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장애인 영웅 서사’는 장애인들이 직접 겪고 있는 장애의 진정한 모습을 가린다.

 

 

 

 

 

 

 

 

 

 

 

 

 

 

 

 

 

 

* 해릴린 루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책세상, 2015)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해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여성 운동가이다. 루소는 사람들에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Don’t Call Me Inspirational)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그녀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루소는 이 책에서 한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자신을 ‘대단한 영웅’ 또는 ‘불쌍한 괴물’로 보는 사회적 편견과 맞서는 투쟁의 과정이다. 그녀는 자신을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길 바란다.

 

 

 

 

 

 

 

 

 

 

 

 

 

 

 

 

 

 

* [절판] 앨리슨 래퍼 《앨리슨 래퍼 이야기》 (황금나침반, 2006)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발과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예술가다. 그녀의 두 팔은 아예 없고 다리는 자라다 말았다. 래퍼는 팔과 다리가 짧은 해표지증(海豹肢症)이라는 희소병을 진단받았다.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복지시설에서 자랐다. 20대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9개월 만에 헤어졌다. 그녀는 장애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았다. 래퍼는 자신의 벗은 몸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 즉 장애인 여성의 몸을 작품 소재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기형이라고 여기는 비장애인들에게 정상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져준다.

 

해릴린 루소와 앨리슨 래퍼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그녀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 혹은 ‘대단하다’라는 양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에 저항하면서 분투하는 삶은 절대 쉽지 않았으리라. 장애인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는 것마저도 왜 이리 깐깐하게 구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또 어떤 분은 내가 ‘정치적 올바름’에 너무 몰입하고 있다면서 말할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익숙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장애인을 막 대하게 만드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그러한 편견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쉬이 제거하지 못한다. 장애인은 투명한 공기와 같은 세상의 온갖 편견들을 마시고 걸러내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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