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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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가 1933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작가가 된 블레어는 이때부터 필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줄여서 ‘파리와 런던’)은 오웰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한 작가로서의 오웰을 이해하려면 《파리와 런던》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조지 오웰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혼란스러운 세계(스페인 내란과 제2차 세계대전이 연이어 일어나고 전체주의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 한가운데에 우뚝 솟으면서 자란 ‘나무’라고 한다면 이 나무의 ‘씨앗’은 블레어의 모습을 간직한 《파리와 런던》이다. 《동물농장》과 《1984》는 당도(문학적 성숙도)가 높은 ‘열매’라 할 수 있다. 책벌레들은 ‘오웰 나무’에 열린 두 개의 ‘열매’를 너무 많이 먹었다. 같은 열매만 계속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오웰에 관심 많은 책벌레는 훌륭한 ‘열매’와 ‘나무’를 있게 해준 ‘씨앗’에 주목해야 한다.

 

1922년에 블레어는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나 5년 뒤에 그는 고국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회의를 느껴 경찰 일을 그만두었다. 블레어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개고생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에서 생활했고, 너무나 가난해서 며칠 내내 쫄쫄 굶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봤다.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부터 시작해서 파리 호텔 안에서 가장 천한 일로 여기는 접시 닦는 일까지 했다. 파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블레어는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그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블레어는 스파이크(부랑자 보호소를 뜻하는 속어)를 전전하는 부랑자 신세였다. 《파리와 런던》은 파리와 런던에서 가난하게 생활했던 블레어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파리와 런던》이 수록된 문학동네 출판사의 번역본에서는 이 작품을 ‘자전소설’로 소개되어 있는데, 사실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nonfiction)으로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왜 《파리와 런던》에 주목해야 할까. 오웰의 첫 번째 작품이라서?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를 언급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리와 런던》은 블레어가 ‘오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문학의 거목으로 자랄 수 있게 만든 ‘씨앗’이다. 이 작품은 파리의 빈민가 풍경과 런던의 스파이크 내부 모습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 놓는다. 오웰은 그곳에 사는 다양한 하층민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그들의 일상생활과 생각을 관찰하듯이 꼼꼼히 들여다본다.

 

소설의 원제에 들어있는 ‘Down and Out’이라는 표현은 ‘빈털터리’, ‘노숙자 신세’를 뜻한다. 역자는 ‘Down and out’을 ‘따라지 인생’이라고 의역했는데, 이 표현은 작품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압축돼 있다. ‘따라지 인생’은 남에게 매여 보람 없이 사는 하찮은 인생을 뜻한다. 말 그대로 ‘노예’처럼 사는 인생이다. 오웰은 호텔의 접시닦이가 현대 사회의 노예라고 말한다(275~276쪽). 그들은 하루에 열 시간 또는 열다섯 시간씩 접시를 닦는다. 호텔에 일하는 요리사와 웨이터들은 접시닦이를 반말로 하대하며 온갖 잡일을 그들에게 시킨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고 매일 부당한 처우를 받는데도 접시닦이는 노조를 만든다거나 파업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웰은 ‘따라지 인생’으로 살아가는 저임금 노동자, 걸인, 부랑자에 향한 대중의 편견(‘게으르다’, ‘사회에 무익한 기생충 같은 존재’)을 비판하면서 그들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이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파리와 런던》의 화자는 ‘블레어’지만, 그의 말과 시선은 우리가 아는 그 ‘오웰’과 비슷하다. ‘오웰’이 되려고 하는 블레어는 《파리와 런던》을 통해서 빈부 격차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솔직하고도 비판적 견해를 밝힌다. 투철한 비판 정신에 입각한 오웰의 글쓰기는 《파리와 런던》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Trivia

 

 

* It was a very narrow street—a ravine of tall, leprous houses, lurching towards one another in queer attitudes, as though they had all been frozen in the act of collapse.

 

아주 비좁은 거리였다. 문둥병에 걸린 것 같은 높다란 집들이 마치 와그르르 무너지다가 바싹 얼어붙은 듯 서로에게 비스듬히 묘하게 기울어져 협곡을 이루었다. (128쪽)

 

 

 

→ 문둥병은 한센병(나병) 환자를 멸시하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는 구시대적인 표현이다.

 

 

* 프랑스의 전당포는 처음이었다. 웅장한 석조 정문(물론 ‘자유’ ‘평등’ ‘박애’라고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는 경찰서 건물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으로 들어가자 학교 교실같이 넓고 텅 빈 방이 나왔다. (151쪽)

 

 

→ 프랑스 국기에 들어있는 적색을 상징하는 ‘Fraternite’를 우리나라에선 흔히 ‘박애’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Fraternite’는 ‘형제애’를 뜻하므로 ‘우애’로 번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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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8 16:19   좋아요 0 | URL
오웰은 몸으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글을 쓰는 작가예요. 오웰은 소설가로 유명한데, 사실 그의 진가는 에세이에 있어요. 에세이를 읽으면 맨몸으로 세상에 부딪혀보고, 고민했던 오웰의 사유를 엿볼 수 있어요. ^^

방랑 2019-06-18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농장 재밌었는데 저는 오웰 작품은 아니지만 멋진 신세계가 더 충격적이었어요.
아. 사이러스님, 책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
과학 관련한 책을 읽고 싶은데
과학 잡지도 좋구요
(과학 지식은 거의 없는 편이에요..)

cyrus 2019-06-18 16:23   좋아요 0 | URL
저도 문과 출신이라 과학 지식이 부족해요. 중급 이상의 과학 책보다는 초급 과학 책 위주로 읽었기 때문에 제가 방랑님에게 과학 책을 추천할만한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

제가 읽은 책 위주로 보자면, 초급 수준의 과학 잡지로는 ‘뉴턴 하이라이트’가 좋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뉴턴 하이라이트 시리즈들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과학 지식들을 소개하고 있고요, 이 책에 그림이 많아서 좋아요.

방랑 2019-06-18 19:13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추천해주신 책 읽어봐야겠어요. 비 오네요
벌써 장마인가 싶기도 하고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레삭매냐 2019-06-1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따라지 인생을 어디에 쟁여 두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네요.

오웰의 책 읽기는 언제나 즐거움입니다.

cyrus 2019-06-18 16:35   좋아요 0 | URL
오웰이 좌파를 까는 글을 읽으면 속 시원해요. 오웰 본인도 좌파인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동조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좌파를 비판해요. ^^
 
작가의 어머니
데일 살왁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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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통’이다. 출산 중 진통은 고통스러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오죽하면 작가들도 자신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을 아이 낳는 고통에 견주겠는가. 산모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진통은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아기가 질 밖으로 쑥 빠져나오면 그 길었던 통증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단한 성취감과 감동을 안겨준다. 산고 끝에 아기를 안은 어머니들은 대개가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작가들은 산고를 거쳐 탄생한 작품에 애착을 느낀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계속 던짐으로써 제자들 스스로 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불렀다. 그가 진리의 탄생을 도왔기 때문이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답을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산파술의 핵심이다. 작가가 창작의 산고를 치르는 ‘산모’라면, 작가의 어머니는 산모의 출산(작품의 탄생)을 돕는 ‘산파’라 할 수 있다.

 

작가와 작가 어머니의 관계를 산파술에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와 창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는지, 어머니의 존재감은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서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까지 여덟 명의 영미 소설가 및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전기(biography)이다.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메리 아든(Mary Arden)은 남편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기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활기찬 사람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여덟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사실은 그가 부부 관계에서 여성의 우위를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극의 전개를 쥐락펴락하는 가모장(家母長)으로 그려진다. ‘애바(Abba)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애바는 루이자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애바는 루이자가 글을 쓸 때마다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루이자는 자신이 쓴 글을 애바에게 보여주었고, 애바는 루이자의 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루이자는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을 편지 한 통과 함께 어머니에게 보냈다.

 

 

 엄마의 크리스마스 양말에 나의 ‘첫 아이’를 넣어두었어요. 아무리 결점 투성이라도 엄마가 받아주실 걸 알아요. (할머니는 늘 자상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하게 해낸 일로 봐 주실 것도요. …‥ 이 책이 엄마를 기쁘게 해준다면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할 거예요.

 

(「야심만만한 딸: 루이자 메이 올컷와 어머니」 중에서, 55쪽)

 

 

애바는 루이자에게 글쓰기를 독려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모녀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루이자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물론 모든 작가의 어머니가 글 쓰는 자녀를 늘 자상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녀의 글쓰기를 매정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어머니는 아들이 극작가가 아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길 원했다.

 

2부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한 명의 작가들이 자서전 형식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쓴 글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영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언 매큐언(Ian McEwan)도 이 책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매큐언의 「어머니의 말: 회고록」은 작가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알 수 있는 글이므로 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글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으로,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은 여성을 의미한다. 이 뮤즈를 거론할 때 대부분은 ‘남성’ 작가의 아내이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은 늘 남성 작가를 보조하는 뮤즈로 호명되곤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예술사와 문학사 속에서 구축되어온 정형화된 뮤즈 이미지의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성애 관계로 맺어진 남성 작가와 여성 뮤즈’ 이미지는 어린 시절 작가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보고, 자녀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보살펴준 어머니의 존재감을 가린다.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신이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자기 대신에 어머니를 같이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한 편의 글은 작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그녀의 말과 일정 수준의 문학적 능력을 물려받으면서 자란 작가들도 있다. 위대한 작가의 곁에는 문학을 좋아한 신과 같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창작에 몰두하는 자녀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촉진자’ 역할에 충실한 산파가 될 수 있다. 어머니가 촉진자 역할에 충실하려면 ‘갑’의 위치에 서지 않아야 한다. 구석구석 참견해서는 안 된다. 너무 지나친 애정도, 너무 애정을 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극단은 양자 모두에게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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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8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8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8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방 ‘서재를 탐하다’가 2019년 6월 21일로 문을 닫는다. 책방은 3년 동안 머물렀던 동네(대구 북구 침산동)를 떠나게 된다. 책방뿐만 아니라 책방의 이웃인 옷 수선 가게와 떡 가게도 떠난다. 책방과 소규모 가게들이 사라진 자리에 40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선다. ‘서재를 탐하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시 태어날 뿐이다. 빠르면 다음 달에 원대동에서 ‘서재를 탐하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다.

 

동네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생로병사의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동네에서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가 일어난다. 오래된 건물들이 철거돼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발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재개발로 한층 젊어진 동네의 부동산 가치는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야 한다.

 

책방은 도시의 오아시스다. 책방은 너무나 빠른 도시의 속도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휴식처다. 그러나 자주 가던 책방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잠시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찾으면 셔터가 내려 있거나, 다른 간판이 걸려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오래된 책방(헌책방)은 동네 책방보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킨 책방도 ‘책의 맛’을 아는 독자들이 주로 찾는 노포(老鋪). 노포가 사라지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이 잊히는 것처럼 오래된 책방이 사라지면 그곳에 있는 책들도 사라진다.

 

 

 

 

 

 

 

 

 

 

 

 

 

 

 

 

 

 

* 오 헨리 《마지막 잎새》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내게 오래된 책방은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마지막 잎새’와 같다. 담쟁이덩굴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생각하는 소녀는 마지막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늙은 화가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마지막 잎새를 벽에다 그려놓고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잎새’와 같은 오래된 책방이 사라지면 그 속에 있는 책들의 생명도 끝이 난다. 책의 일부는 다른 책방으로 이동하게 되지만, 팔지도 못하는 책들은 폐휴지로 전락한다. 오래된 책방이 살아남으려면 책방을 운영하는 젊은 주인이 있어야 하고, 책방을 찾는 손님들이 조금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마지막 잎새’를 지켜줄 (젊은) 애서가와 독자들이 많지 않다.

 

 

 

 

 

 

 

 

 

 

 

 

 

 

 

 

 

 

* 야마시타 겐지 《서점의 일생》 (유유, 2019)

 

 

 

‘가케쇼보(벼랑 책방)’라는 이름의 책방을 11년 동안 운영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호호호좌(웃음소리가 있는 곳)’라는 새 간판을 단 야마시타 겐지《서점의 일생》에 보면 이미 책방 폐점을 경험한 일본인의 글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야마시타 겐지는 ‘가케쇼보’ 책방을 문 닫을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방을 운영한 적이 있는 하야카와 요시오라는 가수를 직접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하야카와는 책방을 그만두니까 “편안해졌다”라고 말한다. 하야카와도 책방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제목은 「폐점한 날」이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책에 「폐점한 날」의 일부를 인용한다.

 

 

 폐점한 나는 울고만 있었다. 눈물이 끝없이 나왔다. 책장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님과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폐점을 알고 매일 오는 손님이 있다. 이제 우리 가게는 그 사람이 살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무엇인가 찾아 간다. [중략] 이와나미 문고가 반품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것만 사 가는 손님도 여럿 있었다. 전별금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친한 사람도 아니었다. 가게 앞에 멈춰 서서 들어오자마자 “너무 서운해요”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예순 살 정도의 사람이다. 다른 손님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뜻밖이었다. 흔히 말하는 단골이나 친한 손님(물론 안타까워해 줬지만)보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쉬워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중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감동이 책방에는 매일매일 있었던 거다. 감동은 예술의 세계에만 있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생활에도 비슷하게 있는 거다. 나는 그것을 폐점 일에 손님에게 배웠다.

 

(《서점의 일생》 중에서, 256쪽)

 

 

책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단골손님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저만치 떨어져서 책방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들도 책방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아도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책방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책방에 자주 오지만, 책을 사지 않는 손님을 삐딱하게 바라봐선 안 되고 쫓아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책방의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책방에 가득한 사람들의 따스한 온정을 느끼고 싶어서 그곳에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책방의 친숙함과 편안한 분위기를 외면할 사람은 없다. 그들은 새로운 것의 가치 못지않게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잘 안다. ‘오래’라는 수식어가 붙여지면 민망할 수도 있지만, 빨리빨리 변하는 현재 도시의 속도를 생각하면 책방이 3년 이상 유지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도시의 속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책방이 많아졌으면 한다. 책에 대한 애정에 상관없이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고, 사람의 온정이 느껴지는 도시의 오아시스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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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7 16:59   좋아요 0 | URL
원대동이 행정구역상 서구에 속한 곳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 비산 1동에 살았는데요, 비산지하도를 건너면 원대동이에요. 책방을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새삼 책방지기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레삭매냐 2019-06-1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
책방은 과연 어떻게 생존하게 될 지
궁금하네요.

저부터도 동네책방에서 책을 사본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네요.

사라지는 노포... 아쉽네요.

서점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
선다는 소식이 서글프네요.

cyrus 2019-06-17 17:02   좋아요 0 | URL
동네에 만화책 대여점을 찾는 것도 어려워졌어요. 제가 군대를 갔다 오고 나니까 집 근처에 있는 만화책 대여점이 폐점되었어요.

stella.K 2019-06-1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옮겨서라도 계속 한다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너의 마지막 말대로 되기는 왠지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사람들은 술 한 잔 꺾으러 가지 책 읽으러 가지는 않거든.
옛날 방식 가지고는 안 될 거야.
주인이 인품이 좋던가 술이나 차와 같이 팔던가 뭐 그런 다양한 형태로
가야겠지. 이미 그런 영업 방식을 구가하는 책방도 있는 것 같고.
암튼 참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ㅠ

근데 저 그림은 누가 너...?

cyrus 2019-06-18 16:42   좋아요 0 | URL
책방 그림은 서재를 탐하다 책장지기님이 직접 그린 거예요. ^^

요즘 책방들은 책도 팔고, 취미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책방 입장에서는 운영비를 최대한 줄이면서 책방에 사람들을 모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할 거예요. 정말 책만 파는 책방은 오래 가지 못해요.. ㅠㅠ

맑은 생각 2019-06-22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 마음의 위로와 삶에 생기가 있어서 각박함이 없을것입니다.

cyrus 2019-07-08 17: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 같은 경우 책을 읽으면 지루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며칠 동안 책을 안 읽으면 무언가 허전한 마음이 들어요.

뒷북소녀 2019-07-0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전하면 저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온라인에서 보기만 하고, 한번도 가보지 못했네요.

cyrus 2019-07-08 17:53   좋아요 0 | URL
뒷북소녀님은 대구에 사시는가 보군요. 지금쯤이면 책방 이전이 거의 다 완료되었을 거예요. 이번 달 독서모임 장소가 새로운 곳에 정착한 책방에서 하거든요. 조만간 새로운 책방이 문 열게 되는 소식이 책방 인스타를 통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시간 나면 꼭 가보셔요. ^^
 
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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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서 ‘유튜브(Youtube)라는 매체를 통해 영상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가 대세 미디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집에 TV가 없다”, “유튜브로 뉴스를 본다”는 말은 더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TV에서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했던 과거 세대와 달리 지금의 세대는 능동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영상을 제작한다. 또 젊은 세대는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텍스트를 통해 얻기보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 얻는다. 내가 관심 있는 영상들을 찾아서 보다 보면 한두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곤 한다. 내 휴식 시간은 책이 아닌 영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상의 시대는 결국 텍스트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텍스트와 영상, 둘 중의 하나만 고르기 어렵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반면, 영상은 구체적으로 보여줘서 그 느낌을 빠르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한 개인의 정체성이 댓글 수와 조회 수로 나타나는 요즘, 글로써 자기 생각과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자아표현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자와의 소통이 부재한다. 이로 인한 치명적인 고독감은 피할 수 없다. 자신을 표현해야 타자에게 인식된다. 이때 주된 표현 방식은 바로 글이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새로운 미디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글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글쓰기가 인터넷과 유튜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 형태라는 사실을 쉽사리 잊는다. 인간은 문자 없이 수천 년간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다시 수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문자를 만들었다. 사실 고대인들은 문자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었다. 일하다가도 짬이 나면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토리텔링 애니멀(The Storytelling Animal)의 저자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에 따르면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지속해서 알려지길 원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는 속담처럼 이야기의 전파력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영원히 보존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해지려면 입이 아니라 손이 필요하다. 전달받은 이야기가 잊히지 않으려면 손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한 가지 대책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를 문자로 표현하는 기술, 즉 글쓰기다.

 

문학은 ‘말(言)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인 스토리텔링과 ‘문자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글쓰기와 교차하면서 탄생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이 ‘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할까’라는 의문점에서 출발해 이를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낸 책이라면 《글이 만든 세계(The Written World)‘글이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역사를 바꾼 텍스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전자의 책은 이야기의 힘을, 후자의 책은 글의 힘에 초점을 맞춘다.

 

《글이 만든 세계》의 저자는 16편의 유명한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텍스트들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리스에 속한 소국의 왕자였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대제국을 거느리는 ‘대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텍스트는 호메로스(Homeros)《일리아스(Ilias)였다. 왕자는 전장에 나갈 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세계를 제패하는 영웅이 되는 꿈을 키웠다.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부처, 공자(孔子), 소크라테스(Socrates), 예수는 자신들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들려줬을 뿐,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다. 부처와 공자의 제자들은 ‘교사(teacher)가 되어 스승의 생각들을 학문(불교, 유가 사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다른 제자들에게 전파했다. 교사가 된 제자들이 손을 쓴 덕분에(글을 쓴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인들의 깨우침을 존중하면서 이어받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은 대화체로 스승의 말을 기록했다. 이렇듯 말하기와 쓰기가 하나가 되면 텍스트가 되고, 나아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를 기록하는 작업은 세상을 읽고, 그것을 바꾸는 행위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만 가능한 지적 작업이다. 고대인들은 문자로 소통을 하고 역사를 남겼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역사는 단절됐을 것이다. 글쓰기는 ‘역사’라는 정보를 자자손손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기술 형태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고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수천 년 전의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학문의 진화는 이뤄지지 않았을 게 자명하다. 역사를 바꿀 정도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글은 힘이 세다! 《글이 만든 세계》는 영상의 힘에 압도당해 점점 잊히고 있는 글의 힘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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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7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상매체가 발달한 요즘 종이책을 읽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 것 같지만,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빨라 따라가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9-06-10 16:3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신간도서가 계속 나와요. 신간도서 위주로 읽는 것도 힘들어요. 애서가 입장에서는 쉴 틈이 없어요. ^^;;

레삭매냐 2019-06-07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의 경우에는
영상미디어가 인쇄미디어를 압도할
것 같습니다.

국민성 자체가 무얼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이랄까요.

새로운 트렌드를 추구하는 건 좋지만
그만큼 올디한 것들도 지켜내야 하는
데, 밸런스 맞추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글쓰기 훈련도 중요하지만 읽는 훈련
도 그만큼 중요한데, 도통 읽지를 않
으니...

cyrus 2019-06-10 16:42   좋아요 1 | URL
길지 않은 글을 읽는 것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댓글도, 카톡도 최대한 짧게 써야 해요. 글이 길어지면 할 말 많은 나이든 사람 같아 보여요... ^^;;

카스피 2019-06-07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요즘은 영상의 시대가 맞는거 같더군요.아무래도 유트브의 영향이 가장 큰것이 아닌가 싶어요.그래선지 사람들도 긴글을 읽어야 하는 블로그보다는 쉽게 볼수 있는 브이로그를 더 선호하는것 같더군요^^;;;

cyrus 2019-06-10 16:44   좋아요 1 | URL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동영상으로 책 리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

수이 2019-06-08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도통 왜 이렇게 글 읽기가 요즘 힘이 들까 자문하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이미지(덩달아 유투브 구독하는 게 날이 갈수록 늘어만가고...)에 크게 좌우되고있는듯한 그런 느낌. 그래서 자꾸 글자가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고 읽어야겠습니다. 진득하게. (레삭매냐님이 말씀하신 무엇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_에서 엄청 찔리고 반성;;;;)

cyrus 2019-06-10 16:49   좋아요 1 | URL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주말에 밭일하고 나니깐 온 몸이 쑤시고 오른쪽 손목이 부었어요. 저는 시골에 살면서 농사짓고 책 읽는 삶이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시골에 지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걱정 X, 불안 X) 책에 집중할 수 있어요.. ㅎㅎㅎ

2019-06-08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0 16:52   좋아요 0 | URL
북튜버 활동을 하기 시작한 지인 덕분에 유튜버의 수익 구조를 알았어요. 역시 유튜버도 돈을 쉽게 버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이 없으면 수익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보여요.
 

 

 

카페 ‘스몰토크’에 가면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볼 수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작품인데 진품은 아니다. 종이에 복사한 복제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간결하면서도 특이하다. 『구상 8(composition Ⅷ)이다. 칸딘스키는 ‘구상’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추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특히 『구상 8』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누구든 알 수 없는 도형과 기호들로 채워진 칸딘스키의 그림 앞에서 난감한 심정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그림 속에서 형체를 찾으려 가까이 보고 멀리 봐도,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이며 왜 그렸는지 알아내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 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내린 결론이 ‘도대체 이게 무슨 그림이야?’다.

 

전시장에 있는 그림 중 초보 관람자들을 난처하게 만들며 가장 인기 없는 회화 장르 대부분은 추상미술에 속한다. 추상미술의 정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작가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추상미술은 기존 정물화나 풍경화, 초상화 즉 구상화가 갖는 재현적인 요소를 거부한다. 애초부터 추상미술은 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비(非)대상 미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떤 대상을 의도적인 왜곡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비구상 미술’이라고 한다.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이것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화가가 바로 칸딘스키다. 그렇다면 칸딘스키와 그의 추상미술을 이해하려면 어떤 책을 참고하면 좋을까? 이제 막 서양미술 공부에 입문(입덕)하는 독자들이 보면 좋은 책에는 어떤 책이 있는지, 필자가 직접 고르고 읽어봤다.

 

 

 

 

 

 

 

 

 

 

 

 

 

 

 

 

 

* 노르베르트 볼프 《표현주의》 (마로니에북스, 2007)

* 하요 뒤히팅 《표현주의,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2007)

* 슐라미스 베어 《표현주의》 (열화당, 2003)

 

 

 

칸딘스키는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창시자다. 그러므로 ‘표현주의’가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표현’이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표현주의의 특징을 요약하면 ‘강력한 색채’와 ‘주관적 양식’이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회화 양식이다. 이때 당시 독일 미술의 중심지는 뮌헨(München)이었다. 인상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한 프랑스 파리에 건너갈 수 없었던 독일, 러시아 출신 화가들은 뮌헨에서 터를 잡아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도 화가가 되기 위해 독일로 건너 온 러시아 출신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뮌헨 미술계는 젊고, 타지에서 온 화가들이 활동하기가 어려운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1870년대부터 뮌헨 미술계를 주름 잡고 있었던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hnbach)는 황제나 수상과 같은 유명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뮌헨에 렌바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렌바흐의 그림을 보면 칙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렌바흐는 옛 거장들이 선호했던 갈색 물감 위주로 그리는 것을 고집했다. 만약 당신이 렌바흐가 그린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Bismarck)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저 그림은 너무 칙칙해서 별로야. 비스마르크가 저렇게 생기 없는 모습으로 보이는 건 처음이야’라고 느꼈다면, 당신도 표현주의 미술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칸딘스키를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생기 없고 칙칙한 렌바흐의 화풍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은 렌바흐의 화풍을 가르치는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다. 칸딘스키는 도유망한 젊은 화가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미술학교를 세웠다. 칸딘스키의 미술학교는 뮌헨의 미술학교와 다르게 개방적인 분위기였고, 전문 화가가 되려고 하는 여성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칸딘스키가 가르친 제자였던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unter)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된다.

 

 

 

 

 

 

 

시대를 앞서 간 칸딘스키와 그의 동료 및 제자들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의 조롱을 받았지만, 젊은 화가들은 여전히 ‘색채만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리하여 칸딘스키는 뮌터, 그리고 러시아 출신 화가이면서 부부로 연을 맺게 되는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마리안네 폰 베레프킨(Marrianne von Wereffkin) 등과 함께 ‘뮌헨 신미술가협회(Neue Künstler-vereiningung München, NKV)를 결성했다. 이 협회장은 칸딘스키였고, 그는 독일 전위미술의 대부가 되었다.

 

열화당 출판사의 《표현주의》, 마로니에북스 출판사의 《표현주의》, 그리고 《표현주의는 어떻게 이해할까?》, 이 세 권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이 탄생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책이다. 이 중에서 필자가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은 《표현주의는 어떻게 이해할까?》이다. 이 책의 장점은 핵심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표현주의 회화에 중점을 둔 책들과 다르게 조형 미술과 건축미술에까지 영향을 준 표현주의도 소개하고 있다.

 

 

 

 

 

 

 

 

 

 

 

 

 

 

 

 

* 지벨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예경, 2007)

* [절판] 토마스 다비트 《프란츠 마르크: 무지개의 색을 훔친 화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독일 표현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면, 이제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가 함께 결성한 ‘청기사파(Blaue Reiter)의 그림들에 주목해보자. ‘청기사’는 마르크와 칸딘스키가 어느 날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조어이다. 마르크는 말을 좋아했고, 칸딘스키는 기사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신비로운 내면의 세계를 통찰하고, 이를 색채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마르크는 인간의 눈으로 동물의 마음을 읽기를 원했고, 동물이야말로 생명력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는 청기사파의 이상을 공유한 당대 화가들의 삶과 주요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남성 화가들의 활동에 가려진 여성 화가들(가브리엘레 뮌터,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의 재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프란츠 마르크: 무지개의 색을 훔친 화가》는 마르크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당연히 이 책의 주인공은 마르크와 그가 좋아했던 동물들이다. 절판된 게 너무 아쉬운 책이다.

 

 

가브리엘레 뮌터가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보관하지 않았으면, 칸딘스키와 표현주의는 현대미술의 문을 본격적으로 연 화가와 예술사조로 평가받지 못했을 것이다. 뮌터는 칸딘스키에 버림받아 실연의 아픔을 겪었지만, 그녀는 세계 대전의 위험 속에서도 남편과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잘 간수했다. 뮌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표현주의 및 청기사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뮌헨 시에 기증했다. 언론은 감동적인 찬사와 함께 그녀의 기부 소식을 대중에게 알렸다.

 

 

“뮌터 부인 앞에 우리 모두 모자를 벗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124쪽)

 

 

칸딘스키가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시대를 열었다면, 뮌터는 그 찬란했던 시대의 유산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현대미술을 공부할 때 막연하게 어렵다고 느꼈던 표현주의를 대충 훑고 지나갈 수 없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표현주의 미술이 많이 주목받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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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0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7 18:33   좋아요 0 | URL
표현주의 미술을 공부하면서 표현주의 미술 작품에 있는 색채를 다시 보게 됐어요. 특히 마르크와 가브리엘레 뮌터의 그림에 있는 색들이 정말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