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과 그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었다. 오웰을 다시 만난 6월은 정말 그가 대단한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룬 글을 주로 썼고, 골수 좌파로 살아간 삶의 이력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영미 문학사에서 오웰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미문학에서 오웰이 차지하는 위상을 재고해보는 글을 써보고 싶다.

 

 

 

 

 

 

 

 

 

 

 

 

 

 

 

 

 

 

 

 

* 조지 오웰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실천, 2013)

* [품절]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2003)

 

※ 오웰의 글 ‘Good Bad Books’가 수록된 책은 《코끼리를 쏘다》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다. 그런데 두 책이 번역한 글의 제목이 다르다. 앞의 책은 ‘좋으면서 나쁜 책’, 뒤의 책은 ‘좋은 대중소설’이라고 되어 있다.

 

 

 

대부분 사람은 오웰의 문학을 ‘좋으면서 나쁜 문학(good bad literature)으로 보고 있는지 모른다. ‘브라운 신부’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쓴 영국의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좋으면서 나쁜 책(good bad book)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다. 이 표현을 주목한 오웰은 1945년에 ‘좋으면서 나쁜 책’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고, 이 글에서 그는 ‘좋으면서 나쁜 책’에 속하는 문학 작품들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체스터턴이 말한 ‘좋으면서 나쁜 책’은 무슨 의미일까. 문학적인 메시지가 부족하거나 문학적인 가치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읽어볼 만한 재미있는 책을 뜻한다.

 

 

 

 

 

 

 

 

 

 

 

 

 

 

 

 

 

 

 

* 조지 오웰, 권진아 옮김 《동물농장: 어떤 동화》 (시공사, 2012)

* [일시 품절]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오웰은 자신의 작품들이 ‘좋으면서 나쁜 문학’에 속할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의 대표작 《동물농장》은 ‘좋으면서 나쁜 책’으로 과소 평가받는 듯하다. ‘문학 작품’으로 보기 어려우나, 그래도 읽을 만한 책으로 말이다. 대부분 사람은 《동물농장》을 ‘우화(fable)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오웰은 이 소설을 완성했을 때 ‘A fairy story’라는 부제를 정했다. 그런데 《동물농장》이 미국에 출판되자 부제가 삭제되었다. 《동물농장》을 펴낸 영국의 출판사들도 부제를 삭제했다. 어느 영국의 출판사는 아동 도서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면서 《동물농장》 출간을 거절했다. 아마도 출판사들은 《동물농장》의 부제를 보는 순간 《동물농장》이 ‘어린이를 위한 우화(동화)’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웰이 살아있을 때 나온 모든 《동물농장》 번역본 가운데 부제가 있는 유일한 번역본은 텔루구어(Telugu language: 인도의 드라비다족이 쓰는 언어) 판이었다.

 

우리는 오웰이 부제를 단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오웰은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동물농장》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동물농장》이 ‘청소년 필독 도서’로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작품의 장르를 ‘아동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독자들은 오웰이 애초에 ‘동물들의 눈으로 인간 세태를 고발하는 우화’를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물농장》은 ‘우화’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작품이다. ‘우화’의 형식을 빌려 쓴 문학 작품이다. 오웰은 자신이 추구했던 사회주의의 이상과 거리가 먼 소련 소비에트 체제에 눈 감은 영국 좌파들, 그리고 ‘연합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련 내의 인권 탄압(1936~1938년에 일어난 반 스탈린파 세력에 대한 대숙청, 1937년에 시작된 소수 민족 강제 이주 정책 등)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영국 언론인 및 지식인들의 태도에 실망했다. 그래서 그는 전체주의로 변질한 소련 소비에트 체제와 국익을 위해 소련과 손잡은 서방 국가들(영국, 미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동물농장》을 썼다. 우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오웰의 진짜 메시지를 알아차린 영국의 출판사들은 《동물농장》 한 권 때문에 영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봐 출판을 꺼렸다. 심지어 오웰이 작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출판인 빅터 골란츠(Victor Gollancz)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마저 오웰의 《동물농장》 출간 제안을 거절했다.

 

《동물농장》이 ‘청소년 필독 도서’ 또는 ‘청소년을 위한 우화’로 많이 알려진 이유는 자명하다. 대부분 독자는 우화 또는 동화의 형태로 소설을 쓰게 된 오웰의 진짜 의도와 이 소설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지 않은 채 《동물농장》 텍스트에 성급하게 접근하는 독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먼저 읽고 난 후 텍스트에 대한 해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작품의 특징에 따라서 정반대로 읽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동물농장》을 제대로 읽으려면 해설을 먼저 읽고 나서 텍스트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동물농장》이 ‘문학적 장치(우화, 디스토피아)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물농장》은 ‘좋으면서 나쁜 책’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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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3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03 16:33   좋아요 0 | URL
군 복무하기 전에 처음으로 <동물농장>을 읽었어요. 그때는 오웰이 생각했던 대로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한 소설로 보였어요. 그런데 최근 다시 읽으니까 <동물농장>이 자본주의가 최고이며 선이라고 우기는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풍자하는 소설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좌파를 공격하고 싶은 우파는 <동물농장>을 그저 좌파를 깎아내리는 소설로 치부합니다.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오지원 옮김 / 유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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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이 단 한 권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책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대부분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책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게 재미없다고? 책이 없으면 스마트폰을 보면 되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독서보다 더 재미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방송, 영화, 드라마, 스포츠 경기 생중계 등을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익숙한 편이다. 그래서 책을 안 읽으면 마음이 허전하다. 마치 하루 세끼 밥을 잘 먹다가 갑자기 한두 끼 식사를 거르면 확 밀려오는 공복감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나도 하루에 스마트폰을 4시간 정도 들여다보는 중독 증상이 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아무 이유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손이 스마트폰에 가게 되면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나 자신을 세뇌한다.

 

스마트폰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눈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줄여야 한다. 밤에 스마트폰 화면을 오래 보고 나면 눈이 침침하다. 20대 중반에 시력이 완전히 상실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밤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시력이 나쁜데 점점 더 나빠진다면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력 상실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너무 많이 책을 읽은 탓에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말년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보르헤스(Borges)처럼 살고 싶지 않다.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도 눈 건강을 나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눈에 가장 많이 부담을 주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서두에 책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언급했을까. 책 없는 지루한 디스토피아(dystopia)를 떠오르게 하는 ‘상상 실험’을 나보다 먼저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이다. 그의 서평 선집인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서문에서 츠바이크는 책이 없는 삶을 상상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밝힌다. 그가 이런 상상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 츠바이크는 생전 처음으로 문맹을 만났는데, 이 사소한 만남이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문맹은 어느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글자를 모르는 그는 편지에 적힌 글을 읽지 못해 츠바이크에게 대신 편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츠바이크는 그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가 자신에게 편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특별한 경험을 한 츠바이크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책에서 읽은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기로 했다. 츠바이크는 문자를 완전히 삭제한 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상상 실험’을 종료했다. 문자와 책이 없는 삶은 책에서 나온 정신적 영양분을 먹고 자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한 끔찍한 상황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결국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알고 경험한 정도만큼만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할 때만이 책을 읽는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츠바이크는 독서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에서 영혼을 확장하고 세계를 건설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의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독서의 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서서히 성장하면서 커가는 아이의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부모는 편식하는 아이들의 식습관을 고쳐주기 위해 반찬을 골고루 먹으면 키가 쑥쑥 커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믿지 않지만, 속는 셈 치고 서서히 반찬을 골고루 먹기 시작한다. 이 아이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몸에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서 실망할 것이다. 사람마다 성장 속도는 다르다. 그리고 몸이 성장하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본인조차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빨리, 많이 읽는다고 해서 똑똑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읽고 머리로만 깨우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책으로 쌓은 지식과 견문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빛을 발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에 수록된 『세계상으로서의 책』이라는 글은 ‘서문의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츠바이크는 이 글에서도 책과 독서를 각각 ‘축전지’와 ‘정신적 힘’에 비유하는데, 이 문장이 끝내주게 좋다.

 

 

 책은 전류를 비축한 축전지와 같이 우리에게 연결된 채로 내부에서 계속 작용하며 무한히 흐르는 정신적 힘에 늘 다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 언제까지나 지치지 않는 그것은 우리 지식의 저장고이자 영원한 완성이란 없는 건축물인 세계상을 쌓아 올리는 진짜 벽돌이다.

 세계는 확장되기 때문에 점점 압축되거나 요약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관찰할 수 없으므로 부지런히 책에 담긴 수많은 타인의 밀도 높은 견해를 스스로에게 날라야 한다. 

 

 (『세계상으로의 책』에서, 70쪽)

 

 

요즘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주는 서평을 쓰거나 ‘북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여전히 독서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독자가 쓴 서평이나 북튜버 영상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독서를 체험한다. 물론 그들의 선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독서는 개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다. 무조건 타인의 독서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책을 접하면 달면서도 쓴 ‘책의 맛’, 그리고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책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운동이다. 이 정신적 운동을 스스로 직접 해보지 않고 남이 알려준 대로 보기만 하면 절대로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없다. 츠바이크가 말했던 대로 독서라는 운동을 진지하게 하려면 책 속에 있는 밀도 높은 타인의 견해(또는 지식)를 내 머릿속에 스스로 날라야 한다. 몸으로 하는 운동은 작심삼일에 그치더라도 ‘머리로 하는 운동’은 그만둬서는 안 된다. 책의 힘을 듬뿍 받아 정신이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책을 너무 멀리해서 정신이 서서히 둔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독서를 홀대하는 삶이 무조건 불행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변화, 자신과 다른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스러워한다. 이러면 세상이 즐겁게 보이지 않고, 살아갈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영상 매체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매끄럽게 만든 영상은 그들에게 삶의 낙이 된다. 이렇다 보니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에 불만을 표출하게 되고, 심지어 자신과 맞지 않는 타인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려고 한다. ‘머리로 하는 운동’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그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 Trivia

 

* 지금 우리 삶에서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나 책은 모든 지식과 학문의 시작을 이루는 알파와 오메가다. (26쪽)

 

→ ‘삶에서뿐 아니라’를 ‘삶뿐만 아니라’로 고쳐야 한다.

 

 

* 163쪽에 있는 역주

마리 바시키르체프(Marie Bashkirtseff):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조각가. 열세 살부터 써 온 일기로 잘 알려져 있다.

 

→ 바시키르체프는 조각 작품도 남겼지만, ‘화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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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 읽을 책이 없다니...
그야말로 끔찍한 상상이네요 ㅋㅋㅋ

그리하야
싸이러스 브로는 영원한 책쟁이라니깐.

cyrus 2019-07-03 09:15   좋아요 0 | URL
다시 생각해보니 책은 엄청 많은데, 그 중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상황도 끔찍하네요.. ㅎㅎㅎㅎ

저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편이 아니라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익숙해요. 그래서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아요. 책쟁이로 살다가 죽으렵니다... ^^

2019-07-03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03 11:27   좋아요 0 | URL
제가 (컴퓨터, 모바일) 게임을 많이 하지 않아서 책 아니면 저 혼자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책에 애착이 많은 제 인생이 별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저는 오히려 책과 함께 하면서 지낸 덕분에 게임, 유흥, 육욕이 주는 쾌락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
 

 

 

우리나라에 출판된 조지 오웰(George Orwell)《동물농장》 번역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직접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절판된 책과 아동용 책까지 포함하면 50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동물농장》은 1945년 8월 17일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날 이틀 전에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제는 항복했지만, 해방된 지 일 년 만에 조선은 두 갈래의 길 앞에 서게 됐다. 분단의 길이냐, 통일 정부 수립의 길이냐. 결국 미국과 소련의 분단 정책에 의해 조선은 두 개로 나누어졌다. 공산주의 사회를 비판한 우화로 해석된 《동물농장》은 미군정 해외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1948년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농장》 번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 조지 오웰, 김기혁 옮김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문학동네, 2010)

* 조지 오웰, 도정일 옮김 《동물농장》 (민음사, 1998)

 

 

 

 

매년 《동물농장》 번역본이 한두 권씩 나온다. 작년에는 무려 8종의 《동물농장》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동물농장》 번역본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민음사 판본이다. 지난달 독서 모임 선정 도서가 《동물농장》이라서 이번에는 ‘문학동네’ 판본(김기혁 옮김)을 읽었다. 두 판본의 출간 연도를 비교하면 12년이나 차이가 난다. 민음사 판본의 초판 출간연도는 1998년이고, 문학동네 판본은 2010년에 출간되었다. 세월의 차이가 느껴지는 만큼 번역 문체를 읽었을 때도 뚜렷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 조지 오웰, 김옥수 옮김 《동물농장》 (비꽃, 2017)

 

 

 

 

농부 존스(Jones)가 운영했던 동물농장의 원래 이름은 ‘Manor farm’이다. ‘manor’는 중세 유럽 봉건 체제에 유지된 토지 소유 형태, 즉 ‘장원(莊園)을 뜻한다. 이 단어를 ‘매너’라고 읽어야 하는데 도정일 교수는 ‘메이너’라고 썼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민음사 판본은 2010년에 출간된 71쇄인데, ‘메이너 농장’이라고 적혀 있다. ‘비꽃’ 판본(김옥수 옮김)에는 ‘장원 농장’이라고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매너 농장’이라고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직역하게 되면 《동물농장》의 우화적인 요소가 반영된 ‘Manor farm’의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동물 중에 ‘모제스(Mose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까마귀가 있다. 어떤 번역본은 ‘모세’라고 되어 있다. 이 녀석은 인간의 손에 길들여져 집에서 사는 까마귀다. 오웰은 이 까마귀를 가리켜 ‘tame raven’이라고 썼는데, 해석하면 ‘길들여진 (큰)까마귀’다.

 

 

 

 

 

 

 

 

 

 

 

그런데 민음사 판본은 ‘집 까마귀’, 문학동네 판본은 ‘길들인 갈까마귀’라고 되어 있다. 두 단어 모두 ‘tame raven’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도정일 교수는 인간의 집에서 서식하는 까마귀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집까마귀’라는 단어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집 까마귀(house crow)’라는 이름을 가진 까마귓과에 속하는 새가 있다. 집 까마귀(house crow)와 까마귀(raven) 모두 까마귓과에 속한 새라고 해서 같은 까마귀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두 새의 학명이 다르므로 서로 다른 종이다.

 

 

 

 

 

 

 

 

 

 

 

 

 

 

 

 

 

 

 

 

 

 

 

 

 

 

 

 

 

 

 

 

 

 

* 에드거 앨런 포, 손나리 옮김 《까마귀》 (시공사, 2018)

* 에드거 앨런 포, 윤명옥 옮김 《포 시선》 (지만지, 2017)

* 에드거 앨런 포, 김경주 옮김 《애너벨 리》 (민음사, 2016)

* 에드거 앨런 포, 공진호 옮김 《에드거 앨런 포우 시선: 꿈 속의 꿈》 (아티초크, 2014)

 

 

 

 

‘raven’을 ‘갈까마귀(jackdaw)’로 번역하는 것도 오역이다. ‘raven’은 우리나라에서는 ‘큰 까마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까마귓과에 속하는 개체 중에서 가장 크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유명한 시 ‘The Raven’가 우리나라에서는 ‘갈까마귀’로 잘못 번역되었고, 수정되지 못한 채 이렇게 오랫동안 알려지는 바람에 ‘raven은 갈까마귀’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조지 오웰, 권진아 옮김 《동물농장: 어떤 동화》 (시공사, 2012)

*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동물농장》 (열린책들, 2009)

 

 

 

 

‘길들인 까마귀’라고 번역된 《동물농장》은 ‘열린책들’ 판본(박경서 옮김)과 시공사 판본(권진아 옮김)이 있다.

 

포의 시 제목에 대해 첨언을 하자면, ‘까마귀’라고 번역되어 있는 포의 시집은 두 종이 있으며 ‘시공사’(손나리 옮김)와 ‘아티초크’ 출판사(공진호 옮김)에 나온 것이다. 반면 나머지 출판사의 시 선집들의 번역가들은 여전히 ‘갈까마귀’를 고수하고 있다. 시인 김경주가 번역한 민음사 판본의 시 선집에는 ‘갈가마귀’라고 되어 있는데, ‘갈까마귀’가 정확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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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0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시네요 싸이러스 브로...

이런 정성이란 -

그나저나 미군정의 지원으로 <동물농장>
이 번역되었다는 건 신박한 정보네요.

왠지 어느 보수지에서 실시한 장준하 선생
의 글로 약산을 공격하는 느낌이랄까요.

cyrus 2019-07-02 17:40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동물농장> 최초 번역본에 관한 내용은 <동물농장>(출판사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해설’을 참고했어요.

503을 옹호하는 방송을 했던 한국XX 논설위원 정모 씨는 (신)자유주의를 사회주의보다 좋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동물농장>을 추천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동물농장>을 오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2019-07-02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02 17:41   좋아요 0 | URL
보면 볼수록 다 똑같은 검은색 까마귀인데 이걸 어떻게 하나하나 분류하고 학명을 붙였는지... 새삼 까마귀를 연구하는 동물학자들이 존경스럽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9-07-0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사이러스 님 !

cyrus 2019-07-02 17:4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
 

 

 

우리나라에서 조지 오웰(George Orwell)‘《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편의 소설이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오웰이 에세이를 썼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또는 간과하는 독자들이 있다. 필자는 한때 후자에 속했다. 오웰이 ‘위대한 에세이 작가’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쓴 에세이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 [우주지감 6월 도서] 조지 오웰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문학동네, 2010)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지난달 독서 모임 참석을 위해 《동물농장》을 읽을 겸 오랜만에 오웰의 에세이 선집인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도 읽었다. 오웰의 에세이는 그의 본명인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와 필명인 ‘조지 오웰’의 삶과 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된 글이다. 그런데 나는 왜 ‘블레어’의 삶과 ‘오웰’의 삶을 구분하면서 언급하고 있을까? 이유는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독자가 ‘블레어’와 ‘오웰’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 채 에세이를 읽으면 그가 에세이를 쓰게 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에세이 읽기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블레어’와 ‘오웰’의 삶을 파악한 다음에 에세이를 읽으면 작가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웰의 에세이도 소설 못지않게 제법 훌륭한 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 2017)

 

 

 

 

‘블레어’와 ‘오웰’의 일대기를 알기 위해 필자가 참고한 책은 《조지 오웰, 작가로 산다는 것》(제3의공간, 2017)이다. 이 책은 내가 ‘블레어’의 삶과 ‘오웰’의 삶을 구분하면서 에세이에 접근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책의 저자는 오웰의 소설과 에세이들에 있는 주요 문장을 인용하면서 그 속에 투영된 오웰의 삶과 생각들을 끄집어낸다.

 

 

 

 

 

 

 

 

 

 

 

 

 

 

 

 

 

 

 

 

* 조지 오웰 《버마 시절》 (열린책들, 2011)

* [품절] 조지 오웰 《제국은 없다》 (서지원, 2002)

 

 

 

 

 

 

 

 

 

 

 

 

 

 

 

 

 

*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반니, 2019)

* 조지 오웰 《영국식 살인의 쇠퇴》 (은행나무, 2014)

* [품절]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2003)

 

 

 

 

먼저 ‘블레어’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자. 1922년에 블레어는 ‘인도 제국 경찰’이라는 직함으로 버마(미얀마)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에서 정의와 윤리에 어긋난 영국 제국주의의 실상과 제국주의에 무력하게 굴복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낀다. 버마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소재로 쓴 소설이 《버마 시절》(열린책들, 2011)이다. 《제국은 없다》 (서지원, 2002)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도 있다. ‘제국은 없다’라는 제목이 원작의 제목(‘Burmese Days’)과 판이하게 다르지만 오웰이 제국주의의 허상을 고발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역에 가까운 제목(‘제국은 없다’)도 오웰의 의도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버마 시절》과 같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두 편 정도 고르자면 『코끼리를 쏘다』『국가는 어떻게 착취되는가: 버마에서의 영국제국』이 있다. 전자의 에세이는 가장 유명한 글이므로 줄거리 소개는 생략하겠다.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코끼리를 쏘다』는 ‘제국은 없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명문이다. 이 글은 5월에 나온 오웰의 에세이 선집 《코끼리를 쏘다》(반니, 2019)와 《나는 왜 쓰는가》에 수록되어 있다. 『국가는 어떻게 착취되는가: 버마에서의 영국제국』은 1929년에 발표된 글인데, 블레어가 ‘오웰’이라는 필명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쓴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식민지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제국주의의 은밀한 음모를 고발하면서 대영 제국과 식민지국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 《버마 시절》에 등장하는 버마인 우 포 킨(U Po Kyin)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 포 킨은 영국 제국에 호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주의 체제에 순순히 따르는 인물이다. 오웰은 버마에 우 포 킨과 같은 원주민과 관리, 지식인들이 많아지면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인도 제국 경찰을 그만둔 블레어는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블레어는 파리의 빈민가를 전전하면서 생활했고,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서도 궁핍하게 살았다. 이 시기에 블레어는 빈곤에 허덕이는 하층계급의 삶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파리와 런던에서 밑바닥 생활 체험을 소재로 쓴 첫 번째 작품이 바로 1933년에 발표된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문학동네, 2010)이다. 이때부터 블레어는 그 유명한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쓰는가》에 수록된 『스파이크(The spike)』는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위해 쓰인 단편적인 소고(小考)이다. ‘스파이크’는 영국의 빈민 수용소를 뜻하는 속어다. 오웰은 스파이크의 허술한 관리 실태를 고발하면서 빈민을 위한 복지 문제에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사회를 비판한다.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한빛비즈, 2018)

* 조지 오웰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실천, 2013)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블레어는 전업 작가인 ‘조지 오웰’로 살아가게 된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로서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스탈린(Joseph Stalin)의 독재 체제에 순응한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좌파의 태도에 크게 실망한다. 이때부터 오웰은 전체주의로 변질한 소련식 사회주의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영국 좌파들의 행보를 비판하는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원한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계급을 철폐시키는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빈곤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분노했고,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의해 쫓겨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인들을 지지했다.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한빛비즈, 2018)《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실천, 2013)는 오웰의 정치적인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낸 글들이 수록된 에세이(글의 장르를 좀 더 명확히 말하면 ‘평론’이다) 선집이다.

 

 

 

 

※ 오웰이 직접 쓴 서문 두 편 모두 수록된 번역본

 

 

 

 

 

 

 

 

 

 

 

 

 

 

 

 

* 조지 오웰, 안경환 옮김 《동물농장》 (홍익출판사, 2013)

* 조지 오웰, 권진아 옮김 《동물농장》 (시공사, 2012)

* [품절]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 『언론의 자유』만 수록된 번역본

 

 

 

 

 

 

 

 

 

 

 

 

 

 

 

* 조지 오웰, 김재희 옮김 《동물농장 외》 (서연비람, 2019)

 

 

 

 

 

※ 우크라이나 판 서문만 수록된 번역본

 

 

 

 

 

 

 

 

 

 

 

 

 

 

 

 

 

* 조지 오웰, 임종기 옮김 《동물농장》 (아로파, 2015)

*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동물농장》 (열린책들, 2009)

 

 

 

 

《동물농장》은 소련 소비에트 체제의 전체주의 실태를 우화 형식으로 풍자한 소설이다. 원래 오웰은 이 소설을 위한 서문을 직접 썼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 연합을 맺었고, 그 이후로 영국 사회 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삼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영국 좌파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오웰은 《동물농장》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 난항을 겪어야 했다. 어려움 속에 《동물농장》은 출판되었지만, 이 소설을 쓰게 된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낸 서문은 끝내 출판하지 못했다. 《동물농장》 서문 원고는 오웰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견되었고, 이 서문은 『언론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오웰은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인들을 위해 ‘우크라이나 판 《동물농장》 서문’도 썼다. 비록 친필 원고는 분실되었으나 다행히 우크라이나어로 된 《동물농장》 서문은 남아 있었고, 이 글을 다시 영어로 번역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두 편의 서문은 에세이로 보기 어려우나, 오웰이 에세이에서 보여준, 치밀하면서도 간결한 ‘정치적 글쓰기’가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서문을 읽어보면 오웰이 진심으로 추구했던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동물농장》만 보고, 오웰을 ‘반공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가 쓴 에세이를 먼저 읽었더라면 오웰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그런 잘못된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웰이 직접 쓴 두 편의 서문이 수록된 《동물농장》 번역본이 많이 나와야 한다. 생각보다 오웰의 서문이 들어있는 《동물농장》 번역본이 많지 않다. 서문 한 편만 수록된 번역본들도 있다. 《동물농장》을 번역한 역자들의 해설이 오웰의 정치적 글쓰기가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지만, 해설만 가지고는 ‘에세이 작가로서의 오웰’이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대부분 독자는 《동물농장》 해설을 접하면서 ‘아, 오웰이 에세이도 썼구나’하고 생각만 할 것이고, 또 어떤 독자는 ‘정치색이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작가의 편견이 남아있는 에세이’라고 오해하면서 오웰의 에세이를 간과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에세이를 꺼리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독자들이 늘어난다면 조지 오웰과 소설과 에세이가 잘못 읽혀질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진다. 오웰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그의 글을 읽으면 그의 글쓰기 의도와 전혀 다른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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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0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까기 신공의 레전드 조지 오웰의
글을 아주 마음에 들어합니다.

<따라지 인생>은 정말 제목을 잘 뽑
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책들을 컬렉션해 두긴 했는데
정작 읽지 않고 버티는 건 무슨 심뽀일
까요.

얼마 전 책정리하다가 눈에 띈 <버마시
절>은 올해 안에 읽어 보는 것으로 :>

cyrus 2019-07-02 09:53   좋아요 0 | URL
오웰은 돌직구를 날리듯이 글을 쓰지요.. ㅎㅎㅎ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9-07-0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 에세이는 정말 한국의 김수영 에세이와 비교할 만하죠. 걸작 오브 걸작입니다...

cyrus 2019-07-02 09:5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두 분 모두 정론직필이 무엇인지 명확히 잘 보여주고 있어요. ^^

뿔대가리 2019-07-06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의 작품은 딱 2권 보았는데 다들 아는 동물농장과 1984 이다 에세이를 볼까 말까 하고 망서리던중 cyrus님의 서재를 보고 읽어보기로 했다 책 소개도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고마움을 표한다

cyrus 2019-07-08 17:54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임스 글릭의 타임트래블 - 과학과 철학, 문학과 영화를 뒤흔든 시간여행의 비밀
제임스 글릭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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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타임머신(Time Machine)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타임머신은 시간의 벽을 넘어 과거나 미래로 여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이다. 가장 유명한 타임머신은 1895년에 발표된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동명 소설에 묘사된 기계이다. 이 소설이 나오고 난 이후 20세기 사람들은 ‘시간여행(time travel)이라는 소재로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다.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타임머신은 여전히 상상 속 기계로 남아있지만, 매력적인 소재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시간여행을 하길 원한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그 욕망을 부채질한다. 물론 대개는 부질없는 상상이나 몽상에 그칠 뿐이다. 전생이나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도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점집이나 역술가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의 농도도 짙어진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미래에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흐릿하게 만드는 과거에 대한 향수, 즉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레트로토피아(retrotopia)가 현대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레트로토피아는 복고풍을 뜻하는 ‘retro’와 유토피아(utopia)를 합친 말이다. 향수병은 흔히 나이가 들수록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젊은이들이 과거의 기억에 집착한다고 주장한다. 여생이 줄어들수록 추억에 빠져 놀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든, 미래로 가든 시간여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타임머신이 실용화된다고 해도 복잡한 문제점(시간여행을 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모순들.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 역설’이다. 시간 여행자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던 과거로 가서 자신의 아버지를 실수로 죽인다면 시간 여행자는 어떻게 될까?)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이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을 다룬 공상과학물 마니아라서? 그러나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은 시간여행이라는 공상적인 소재가 어떻게 해서 우리 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 책이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시간여행은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고리타분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썼을까? 보나 마나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과학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겠지.” 그러나 ‘시간여행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라는 진부한 문제는 이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 《타임 트래블》은 시간여행의 실현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문학 작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밝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이유를 철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자신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음으로 과거를 여행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간여행은 불과 백 년 전에 만들어진 근대적 판타지다. 과학기술은 근대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근대화에 접어드는 시대에 살아온 지식인들은 과학적 진보가 곧바로 사회 전체의 진보에 직결된다고 믿었다. 웰스도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사회가 더 고도로 발달하는 문명화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웰스는 과학기술이 유럽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하면서도 문명이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에 의해 사라지고 잊히는 ‘과거의 유산’을 잊지 않았다. 이 ‘과거의 유산’은 지나가버린 시간을 증명해주는 소중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계속해서 ‘과거의 유산’을 발굴하였고, 그것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어도 과거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근대 초기는 기차와 마차와 공존하는 시대였다. 과거와 (미래에 근접한) 현재가 겹겹으로 포개진 시대에 살던 유럽인들은 ‘시간’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웰스가 소설에서 고안한 타임머신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근대 유럽인들의 기대심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상상 속 기계라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웰스의 타임머신에 콧방귀를 뀌면서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웰스의 《타임머신》을 평한 어느 평론가는 “이런 미래 여행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시간여행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20세기 사람들은 ‘과거’로 남게 될 자신들의 시간(‘현재’)을 영원히 보존하여 미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타임캡슐’을 생각해냈다. 저자는 타임캡슐을 ‘희비극적인 타임머신’이라고 말한다. 땅에 묻힌 타임캡슐은 ‘가장 느린 타임머신’이다. 타임캡슐은 그것을 땅에 묻어둔 사람과 나란히 시간여행을 한다. 타임캡슐을 만든 사람은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주인(시간 여행자)이 없는 타임캡슐은 미래가 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잠든다. 타임캡슐의 용도를 생각해 보면 저자가 타임캡슐을 ‘희비극적 타임머신’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우리는 타임캡슐을 미래로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고, 타임캡슐을 바라보는 미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할 수도 없다.

 

웰스의 소설을 보면서 비웃은 평론가의 말처럼 시간여행은 정말 ‘쓸모없는 여행’일까? 시간여행이 가능한지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사람들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물론, 유사과학에 너무 빠져버려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를 즐겨 본다. 과연 시간여행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인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간여행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시간여행이 궁극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죽음을 피하고 싶은 심리’에서 찾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죽는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 미래를 상상해보라.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내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영원히 눈을 감는 순간 내일(미래)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서글픔을 잊기 위해 행복했던 과거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오지 않을 미래가 어떨지 긍정적으로 상상한다.

 

“인생은 매일 매일 사는 동안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We are all travel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ne)>에 나온 대사가 말해주듯, 우리는 지금도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여행을 상상하는 일만큼 삶에 활력을 주고, 혼자서 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사고 실험’ 게임은 없을 것이다. 단,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게임도 많이 하면 정신에 해롭다. 현실을 도피하는 심정으로 과거에 너무 몰입해서도 안 되며 미래를 맞춘답시고 설레발을 치고 다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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