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여행 -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신비한 여정, 2019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말린 쉬위 지음, 김창호 옮김 / 산지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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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우울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마음이 아플수록 더욱더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때로는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릿속을 꽉 채운 잡다한 상념을 비우기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만의 방법을 사용해 슬픔을 잊어보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내 마음의 상처는 과연 모두 사라진 걸까?” 자아 성찰적인 질문을 나에게 던질 때 ‘그렇다’고 확신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힘든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도움이 되는 방법을 위급하게 찾아 헤맨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다짐과는 다르게 고통과 두려움을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위태로운 상황은 반복된다.

 

치유(healing). 우리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만,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일단 치유의 정의를 내리기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픈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내면 여행’이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내면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일기 여행》은 자아 성찰에서 치유로 이어지는 내면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서다.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저자는 ‘일기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기는 글쓰기를 이용해 심신의 병을 고치는 일종의 치료법(therapy)이다. 마음속이 복잡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이에 뭘 쓰거나 낙서를 하면 마음이 진정되던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일기 쓰기 숙제를 하느라 끙끙대던 추억에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기는 누구나 혼자서 쓸 수 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날짜를 기록하며 쓰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다. 하지만 일기조차 남을 의식하고 써온 사람들에게는 이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이때 《일기 여행》이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일기 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의 일기 쓰기’란 무엇일까. 저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삶을 기록하려는 여성의 정신적 여행”이라고 말한다. 일기라는 글을 쓰는 물리적 행위, 즉 종이 위에 단어가 되어 나타난 내 모든 감정은 ‘나’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진솔한 목소리에 대한 확인이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은 내 목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

 

이런 멋진 행위를 여성이 마음껏 누릴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자와 문법을 이해해야 하고, 책에 접근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성 중심적 사회는 대부분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읽을거리도 제한했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성으로 보일 수 있는 필명을 만들어 작가 활동을 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여성들은 자신만의 비밀 노트에 글을 쓰거나 일기 쓰기에 몰두했다. 수많은 여성이 남긴 일기장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고, 마음껏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었다.

 

‘일기를 읽는 행위’도 장점이 있다. 일기는 그것을 쓴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일기를 보면서 타인의 삶이 되어 그 사람의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일기를 읽는 행위에 매료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일기는 타자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타자의 의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일기를 보는 독자는 일기의 주인공 속에서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일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봄으로써 큰 도움과 위안, 나아갈 방향을 얻을 수 있다. 일기는 글쓴이의 사적 성찰에 대한 단순한 기록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경험과 깨달음을 들려준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를 쓰는 행위는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어차피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대개의 기록이 사회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뭐라도 써야 한다.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 쌓여갈수록, 사회 전체의 표준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휜다. 그래서 특출한 경력이 없는 사람, 즉 전업 작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많이 배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고상한 행위’라는 통념은 거짓이다. 이런 거짓말로 이익을 누리는 이들은 글쓰기로 밥을 버는 이들뿐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육체적 노동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면서 밥을 챙겨 먹는 자신들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쓰기가 마치 대단히 신비한 재능이 필요한 일인 양 꾸미곤 했다.

 

글쓰기는 ‘수준 높은 정신적 노동’이 아니다. ‘정신적 노동’임에는 분명하지만, 높은 수준의 지식과 사고력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대단한 교양인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교양인이 아니어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해 쓰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글의 본질적인 용도는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과감히 들춰보자. 그런 다음에 마음을 편히 하고 종이 위에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사무치게 미웠던 사람에 대한 감정,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사건, 하려고 했으나 잘되지 되었던 일, 내년엔 꼭 하고 싶은 계획 등 주제를 잡아도 좋다. 고통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데서 나온다. 일기 쓰기를 통해 여러 개의 나를 돌아보면 진짜 옹골찬 내면의 힘을 가진 새로운 내 모습이 정체를 드러낸다. 여러 개의 감정이 있던 내가 하나의 ‘나’로 합체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힘겹게 살아온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글쓰기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기를 쓰면서 시작할 수 있다. 일기는 새로운 글을 낳게 만드는 모태가 될 수 있다. 일기를 쓰면서 글쓴이 스스로 자신 안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일기 쓰기는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그 ‘기록하는 과정’에 가치가 있다. 일기는 진정한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을 위한 지름길이다.

 

 

 

 

 

※ Trivia

 

역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국인 이름을 영어로 발음하는 방식대로 썼다. 그리고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소설 《빌러비드》를 직역하는 세심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표기에 맞게 쓰면 다음과 같다.

 

 

* 31쪽: 크리스타 울프(Christa Wolf) → 크리스타 볼프

 

* 71쪽: 리처드 바그너(Richard Wagner) → 리하르트 바그너

 

* 171쪽: 오더 로드(Audre Lorde) → 오드리 로드 (‘오드르 로드’라고 쓰는 사람도 있음)

 

* 295쪽: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n) → 로베르트 슈만

 

* 310쪽: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사랑하는(beloved) → 《빌러비드》

 

* 317쪽: 조지아 오케이프(Georgia O’Keeffe) → 조지아 오키프

 

* 320쪽: 마리 배쉬커트세프(Marie Bashkirtseff) → 마리 바시키르트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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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3   좋아요 1 | URL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 일기와 독후감을 많이 썼어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잃었어요. 사실 공부만 하느라 글을 쓸 기회가 없었죠. 이상하게도 군인이 되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하고 난 뒤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남겼어요. 오랜만에 글을 썼던 시기라서 저도 글을 어떻게 쓸지 막막했었습니다. ^^

2019-07-10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기와 리뷰의 공통점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

2019-08-1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30   좋아요 0 | URL
원래 그 분 강연이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 분의 강연을 처음 분들은 당혹스러울 수 있어요.. ^^;;
 
동물 농장 세계문학 마음바다 2
조지 오웰 지음, 안경환 옮김 / 홍익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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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조지 오웰(George Orwell)《동물농장》 의 번역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를 지낸 안경환 씨가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었으나 각종 논란이 알려지게 되면서 장관 후보 자격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동물농장》 번역본은 안 씨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에 나왔다.

 

이 번역본의 특징은 소설의 장(章, 《동물농장》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끝난 다음에 해설이 나온다는 점이다. 기존에 나온 번역본들의 ‘작품 해설’은 책의 뒷부분에 있다. 소설 텍스트와 텍스트 해설을 교차 배치한 방식이 신선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각 장에 전개된 이야기들 속에 숨은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과 장 사이에 끼인 역자의 해설은 독자의 독해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 번역본에 실린 부록은 오웰이 직접 쓴 서문, 특별히 우크라이나 판 《동물농장》 출간을 위해 오웰이 특별히 쓴 서문, 그리고 오웰이 생각하는 정치적 글쓰기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에세이 두 편(『나는 왜 쓰는가』 『작가와 리바이어던』 )으로 채워져 있다.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와 역자와의 인터뷰 대담도 있는데,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다. 이 인터뷰 대담은 안 씨가 오웰의 글을 어떤 이유로 좋아하게 되었고, 왜 《동물농장》을 번역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 보니 인터뷰에 안 씨의 개인사도 나오는데, 안 씨는 출간 당시 논란이 되었던 《조영래 평전》(강, 2006)을 번역한 일까지 언급했다.

 

 

 《조영래 평전》은 ‘특징 없는 모범생’이었던 저 자신의 엘리트로서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투영된 책이지요.  (228~229쪽)

 

 

이런 것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나? 나는 안 씨가 《동물농장》이 아닌 다른 책을 쓰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으며 알고 싶지 않다. 안 씨가 말하는 사족만 빼면 내용이 전체적으로 괜찮은 인터뷰다.

 

 

책을 읽다가 오자 두 개를 발견했다.

 

 

 ‘영국의 짐승들’ 노래가 예견하는 ‘황금빛 미래’에는 동물들은 인간의 잔인한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노동의 대가로 행복한 공동체의 삶을 누린게 된다는 것이다. (32쪽)

 

 

‘누린게’를 ‘누리게’로 고쳐야 한다.

 

 

부록 「작가와 리바이어던」 216쪽에 제임 조이스(James Joyce)라는 오자가 있다. 《율리시스》를 쓴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오자다.

 

 

《동물농장》 5장 해설에 오류가 있다. 잘못된 내용이 있는 문장을 인용해 본다.

 

 

 역사에서도 레닌이 죽자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오웰 자신이 스페인내전(1936~1939)에서 트로츠키파에 가담한 경험이 있기에 스노볼을 비교적 우호적으로 그렸다는 해석도 있다. 레닌은 멕시코에까지 암살단을 보내어 트로츠키를 살해한다. 트로츠키 사후에도 레닌은 계속하여 그를 ‘위험한’ 유령으로 규정하고 그를 핑계 삼아 1930년대 피의 대숙청작업을 단행했다. (84쪽)

 

 

레닌이 죽은 뒤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했다고 언급된 문장이 있다. 그런데 ‘죽은’ 레닌이 트로츠키를 암살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문장이 이어서 나온다.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생전에 레닌은 스탈린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레닌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당내 유일한 지도자로 자리 잡은 스탈린은 ‘피의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 시기에 레닌은 죽고 없다. 레닌은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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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2:18   좋아요 0 | URL
오웰이 <동물농장>을 쓰기 시작한 시기에 이미 소련은 ‘스탈린 제국’이었어요. 그런데 영국의 일부 좌파들은 소련 내 분위기와 심각한 상황들에 대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사실 오웰이 ‘독재로 변질된 사회주의’만큼이나 걱정했던 것은 ‘냉전’ 체제 분위기가 올 수 있는 암울한 미래였어요. 오웰이 예상한대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냉전이 시작되었어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이튼스쿨에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준 교사는 오웰의 문학에 큰 영향을 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다. 이때 헉슬리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헉슬리는 눈이 너무 좋지 않았다. 10대 때부터 걸린 각막염으로 인해 시력이 반쯤 상실된 상태였다. 그의 시력 장애는 이튼스쿨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웰은 헉슬리 선생을 잘 따랐다. 그는 헉슬리 선생에게서 프랑스 문학 작품들을 접했고, 가끔 그와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오웰은 헉슬리에게 프랑스어를 잘 배운 덕분에 파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 2017)

 

 

 

 

오웰은 인도 제국 경찰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와 일 년간 지내다가 파리로 건너갔다. 1928년 초에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살아온 경험을 소재로 한 첫 번째 작품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쓰게 됐다. 오웰이 파리에 정착하는 데 경제적으로 도움을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모 넬리 리무진(Nellie Limouzin)이다. 넬리는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 영국에서 만들어진 점진적 사회주의) 협회에 소속된 회원이었고,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살롱의 주인이기도 했다. 오웰 평전인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은 오웰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아주 상사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 책에 넬리의 살롱에 드나든 유명 인사들이 누군지 언급된 내용도 있다.

 

 

 

 페미니스트이자 페이비언협회 회원인 넬리는 자신의 집을 작가들의 살롱으로 제공했다. [중략] 그러나 불행히도, 에릭은 역시 이 살롱에 드나드는 신랄한 논조로 유명한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나, 공포 이야기와 공상과학 소설가 P. M. 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의 우상인 웰스와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67~68쪽)

 

 

 

그런데 내가 인용한 문장에 오류가 있다. 이 문장의 오류는 ‘공상과학 소설가 P. M. 실이다. 작가 이름이 잘못 적혀 있는데, 오류라기보다는 ‘오식’에 가깝다. 퍼스트 네임과 미들 네임의 순서가 잘못 적혀 있다. ‘P. M. 실’이 아니라 ‘M. P. 실’이다. 사족이지만 P와 M, 그리고 실(Shiel)의 첫 글자인 S가 합쳐지면 ‘PMS’가 된다. PMS는 월경 전 증후군(premenstrual syndrome)의 약자이다.

 

넬리의 살롱에 드나든 G. K. 체스터턴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각각 추리소설가(대표작: 브라운 신부 시리즈), 《타임머신》과 《투명 인간》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M. P. 실은 어떤 사람인가? 실은 체스터턴과 웰스의 인지도에 비해 한참 못 미치지만, 장르문학의 역사를 논할 때 한 번쯤은 언급되는(언급되어야 할) 작가다.

 

 

 

 

 

 

 

풀 네임은 매튜 핍스 실(Matthew Phipps Shiel)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영국령 몬세라트(Montserrat) 섬에 태어났고, 주로 미스터리물이나 공상과학소설을 썼다. 생전에 실의 작품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실은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실이 죽고 난 후에 극소수의 미스터리 마니아와 장르문학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재평가했다.

 

 

 

 

 

 

 

 

 

 

 

 

 

 

 

 

 

 

 

* M. P. 실 《The Purple Cloud》 (Penguin Group USA, 2012)

* H. 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 (북스피어, 2012)

 

 

 

실의 대표작은 1901년에 발표된 <The Purple Cloud>이다. ‘자줏빛 구름’ 또는 ‘보랏빛 구름’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 지구가 파괴되어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래서 <The Purple Cloud>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세계 종말 이후의 상황을 그리는 SF문학의 한 하위 장르)의 서막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공포 문학 작품들을 비평한 자신의 글《공포 문학의 매혹》(북스피어)에서 <The Purple Cloud>의 작품성을 호평했으나 이 작품의 종반부가 아쉽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곁들었다.

 

 

 

 

 

 

 

 

 

 

 

 

 

 

 

 

 

 

 

 

 

 

 

 

 

 

 

 

 

 

 

 

 

* 안길환 엮음 《영국의 괴담》 (명문당, 2000)

* 정진영 엮음 《세계 호러 걸작선 2》 (책세상, 2004)

*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한스미디어, 2013)

* [e-Book] 매튜 핍스 실 《오번 가문의 비극》 (한스미디어, 2014)

 

 

 

 

실은 스무 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남겼지만,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총 세 편인데, 나는 이 작품들을 엘러리 퀸(Ellery Queen)이 썼던 평가 방식처럼 소개하겠다.

 

 

 

 

 

 

 

 

 

 

 

 

 

 

 

 

 

 

* 엘러리 퀸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북스피어, 2016)

 

 

 

 

‘엘러리 퀸이 썼던 방식’이 무엇이냐면 그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사용했던 세 가지 기준을 말한다. 첫 번째 기준은 ‘역사적 중요성(Historical Significance)이다. 작품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지 평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품이 문학적으로 우수한지(Quality) 평가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초판본의 희소가치(Rarity)다. 내 글에서 사용된 ‘R’은 초판본이 아닌 ‘번역본’의 희소가치를 뜻한다. 퀸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이 세 가지 기준을 뜻하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HQR’로 표시했다. 나는 여기에 네 번째 기준을 추가했다. ‘번역되지 않은(Untranslated) 작품’일 경우 ‘U’를 표시했다.

 

 

 

 

 

1. 지상에서 못 이룬 사랑

The Tale of Henry and Rowena (1928)

 

R

 

 

 

 

 

 

《영국의 괴담》 (명문당)에 수록된 작품이다. 자신이 사랑한 귀부인에 집착하는 한센병 환자 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귀부인은 저주의 병(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센병은 치료법이 없는 불치병이었다)에 걸린 귀족에 연민을 느껴 어쩔 수 없이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지만, 귀부인에 향한 귀족의 사랑은 간절하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발악에 가깝다. 번역이 영 좋지 않다. 이 작품만 번역에 문제가 아니라 《영국의 괴담》에 수록된 전 작품 모두 번역이 좋지 않다. 2000년에 나온 책인데,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다. 문장 한 개에 들어 있는 한자어가 한글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역자가 한자어를 너무 많이 썼다. 거기에 편집자는 아주 친절하게 한자어 옆에 한문까지 같이 써주셨다…‥. 동양고전을 전문적으로 펴낸 출판사라서 한자를 많이 썼던 것일까? 한자어가 너무 많은 문장은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 귀족의 이름은 ‘헨리(Henry)’인데 번역본에는 ‘덴리’로 되어 있다.

 

 

 

 

 

 

2. 제루샤

Xélucha (1896)

 

HR

 

 

 

 

 

 

러브크래프트는 이 작품을 ‘독기 어리고 소름 끼치는 단편’이라고 평가했다. 소설 제목인 ‘제루샤’는 ‘악마 같은 여성’으로 묘사된 인물의 이름이다. 『제루샤』는 세기말에 유행했던 병적이고, 반도덕적이고, 퇴폐적인 문화 양식, 즉 데카당스(décadence)풍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메리메’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자로 유명한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3. 오번 가문의 비극

The Race of Orven (1895)

 

HRU (엘러리 퀸의 평점은 HQR)

 

 

 

 

 

실은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탐정소설 네 편을 썼다. ‘잘레스키 왕자(Prince Zaleski)가 미궁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오번 가문의 비극』, 『에드먼즈버러 승려의 돌(The Stone of the Edmundsbury Monks)』, 『The S.S』는 실이 살아있을 때 발표한 ‘잘레스키 왕자’ 시리즈다. 그러나 이 작품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절판] 김봉석, 장경현, 윤영천 《탐정 사전》 (프로파간다, 2014)

 

 

 

 

잘레스키 왕자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오귀스트 뒤팽(Auguste Dupin)과 흡사하다. 두 사람 모두 앞날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력이 있으나 신분이 몰락한 상태가 되었고,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도락가로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잘레스키는 골동품을, 뒤팽은 책을 수집한다. 실과 포의 탐정소설에 나오는 화자의 역할도 비슷하다. 작품 속 화자는 탐정에게 미궁의 사건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은 탐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논리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렇다 보니 뒤팽과 잘레스키는 종종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들은 너무 진지하게 현학적인 발언을 하는데 대부분은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철학적인 내용이다.

 

『오번 가문의 비극』은 ‘잘레스키 왕자 시리즈’에 속한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다. 그래서 1895년에 『오번 가문의 비극』과 함께 발표된 나머지 두 작품은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U’를 표시했다. 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알려진 『The Return of Prince Zaleski』도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45년에 쓰였으나 실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동안 잊히고 말았다. 다행히 실과 공동으로 집필 작업을 했던 존 고스워스(John Gawsworth)가 이 작품의 원고를 엘러리 퀸에게 보내게 되면서, 잊힐 뻔했던 ‘잘레스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오번 가문의 비극』이 수록된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한스미디어)의 작품 해설에 오류가 있다.

 

 

『Prince Zaleski: three detective stories』(1895)에는 잘레스키가 활약하는 「오번 가문의 비극」과 「에드먼즈버리 승려의 돌」 「The SS」「The Return of Prince Zaleski」로 네 편의 단편이 실렸다

 

 (해설, 658족)

 

 

 

『Prince Zaleski: three detective stories』의 부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는 세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해설을 쓴 글쓴이는 이 단편집에 「The Return of Prince Zaleski」이 실려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단편집에 네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면 ‘three detective stories’라는 부제가 삭제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The Return of Prince Zaleski」는 실 사후에 나온 단편 선집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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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7-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조지 오웰 평전에 등장하는 이름 오류에서 출발해,
그 작가가 쓴 작품들까지 평가하는 이 글, 너무 너무 멋지군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3편 밖에 없다니, 아쉽네요.

시루스님의 이 글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 읽어야겠어요.

cyrus 2019-07-09 11:11   좋아요 0 | URL
<The Purple Cloud>가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왠지 이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아름다움의 진화 - 연애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 갈등의 자연사
리처드 프럼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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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윈(Darwin)《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다윈은 이 책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장류 조상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엎은 이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은 지금도 중학생 정도면 다 아는 과학 이론이 되었다. 《종의 기원》이 나오고 12년이 지난 후에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성 선택(sexual selection)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고, 성 선택이 자연 선택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은 철저히 외면당했고, 다윈을 지지하던 진화론자들도 이 책을 비난했다. 하지만 다윈이 더욱더 뼈아팠던 것은 따로 있다. 다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을 증명하여 그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한 앨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is)가 성 선택을 공격하는 선봉장으로 나선 것이다.

 

조류학자인 다윈주의자 리처드 프럼(Richard O. Prum)이 쓴 《아름다움의 진화》는 백여 년 동안 진화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은 자연 선택에 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성 선택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조류의 짝짓기와 수컷 조류의 구애 행동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에 도전하게 된다. ‘조류의 성 선택이 진화의 다양한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성 선택은 간단히 말하면 수컷은 배우자가 될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암컷은 배우자 수컷을 고른다는 주장을 발전시킨 이론이다.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자식을 늘리기 위해 섹스(교미)에 집착하고, 성적 욕구가 있는 암컷은 (자신이 보기에 섹시하고 멋진) 수컷을 고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컷에 대한 암컷의 성적 선호와 이런 선호를 충족시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수컷의 깃털 장식들이 진화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암컷의 성적 선호는 다음에 태어날 암컷에게 대물림되고, 수컷의 깃털 장식들은 점점 더 세련되고 화려해진다. 프럼은 이 과정을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성 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aesthetic evolution)라고 부르면서 배우자가 될 수컷을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암컷의 미적 감각과 짝짓기 행위가 이루어지면 자기 결정권을 갖는 암컷의 태도에 주목한다. 암컷을 반하게 만드는 수컷의 몸에 난 장식들, 즉 크고 화려한 깃털은 ‘성적 상징물(sexual ornament)이다.

 

성 선택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성적 상징물은 수컷 공작의 화려한 깃털이다. 공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컷 조류들도 각자 암컷을 유혹하는 성적 상징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암컷 앞에서 교태를 부린다. 따라서 수많은 조류에서 나타난 암컷의 배우자 선택과 수컷의 성적 상징물의 공진화는 다양한 ‘성적 아름다움’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자연 선택을 지지하는 다윈주의자들은 여전히 다윈이 생각해낸 성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연 선택과 성 선택으로 갈라진 다윈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를 ‘진화론의 허구’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본다. 진화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복잡한 진화론 논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진화론자들끼리 서로 대립하는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름다움의 진화》는 자연 선택의 한계를 밝혀내 성 선택에 더 많이 주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 선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모든 생물의 진화를 자연 선택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을 쓰게 된 의도와 관련이 있다. 다윈은 자연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물들의 특성에 주목했고, 진화론의 빈틈이 되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 성 선택을 제시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진화》에 나오는 ‘자연 선택 지지자와 성 선택 지지자 간의 논쟁’을 ‘진화론을 틀린 이론으로 만드는 프레임’으로 삼는 것은 난센스다.

 

성 선택을 비판하는 자연 선택 지지자들은 암컷이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 선택이 짝짓기에 너무 초점을 맞춰서 설명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 선택으로 모든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게 되면 인간도, 생물도 모두 본능적으로 섹스를 선호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이러한 자연 선택 지지자들의 반응은 백여 년 전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을 발표했을 때 나온 대중들의 반응과 거의 비슷하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즉 유독 성에 대해 보수적인 반응을 보인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사람들은 암컷이 섹스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성 선택에 분노를 드러냈다. 성 선택은 암컷에게 짝짓기를 주도적으로 임하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론이다.

 

과학적으로 성 선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수컷은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거추장스러운 성적 상징물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되었냐고 따진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수컷 공작의 깃털은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깃털이 지나치게 커서 적의 눈에 띄기 쉬운 수컷 공작은 생존할 확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짝짓기를 할 확률도 낮아진다. 사실 성 선택을 주장한 다윈도 이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실용성 없는 성적 상징물’의 기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성적 상징물의 무용성을 근거로 성 선택을 비판하는 입장을 다시 반박한다. 그는 성 선택이 종의 쇠퇴와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짝짓기를 하는 데 유리한 이점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적에게 잡혀 죽을 위험이 있더라도 수컷은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점점 더 아름다워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들에 짝짓기는 생존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수컷일수록 짝짓기에 유리하다는 성 선택을 재미있게 비유해서 설명한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잘생긴 용모를 가졌지만 무모함 때문에 요절한’ 제임스 딘(James Dean) 스타일의 수컷이 ‘책만 파면서 여든 살까지 생존한’ 범생이 스타일의 수컷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  (201쪽)

 

 

‘아름다움이 무기’라는 말이 있다. 요즘 이 말은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게 만드는 강압적인 말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미디어가 만들어 낸 틀에 박힌 ‘강요된 아름다움’을 탈피하고,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아름다움도 개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훌륭한 이점이자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진화》가 강조하는 미적 진화론은 모든 존재가 아름다움을 즐기며,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욕구를 가진 성적 주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진화하는(social evolution) 존재이다. 진화 속도가 더디지만, 과거에 최고로 여겨지던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우리 사회가 화장이나 성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은 부족해도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회로 진화되길 바란다.

 

 

 

 

 

※ Trivia

 

* 482쪽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두더지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지적 분열을 탐구했다.

 

→ 두더지가 아니라 ‘고슴도치(hedgehog)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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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6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08 17:46   좋아요 0 | URL
네, 간혹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의 생물들이 발견되곤 하죠... ^^;;

AgalmA 2019-07-07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커크 월리스 존슨 『깃털 도둑』을 읽으며 극락조 생태에 대해 좀 찾아보니 1년이 거의 짝짓기 준비더군요ㅎㄷㄷ 공작의 화려함만큼이나 극락조도 성 선택 이론의 표본 아닌가 싶습니다.
미의 추구를 인간의 예술적 감각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모든 존재가 미적 욕구로 가득한 성적 주체라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의 진화』사놓고 아직 안 읽고 있었는데 곧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19-07-08 17:48   좋아요 1 | URL
<아름다움의 진화>에도 극락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수컷 극락조가 구애하는 모습을 찍은 컬러 사진도 있는데, 스마일 표시가 있는 커다란 깃털을 펼친 모습이에요. <깃털 도둑>이라는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AgalmA 2019-07-12 15:42   좋아요 0 | URL
극락조 중 그 새 사진 신기하다고 인커넷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여요ㅎ 정말 신기하죠. 우리 인간이 유사를 보려는 특성이 있긴 하지만 극락조 구애 무늬가 웃는 모습이라니ㅎㅎ!

테레사 2020-08-1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저도 참 재밌고 즐겁게 읽었어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세이 선집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 실천)《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사)를 동시에 읽었다.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에세이 몇 편이 있는데, 그중 한 편이 『Good Bad Book』이다. 이틀 전에 『Good Bad Book』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 [품절]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사, 2003)

* 조지 오웰, 하윤숙 옮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 실천, 2003)

 

 

 

 

오늘도 내가 『Good Bad Book』을 언급한 이유는 《코끼리를 쏘다》에 발견된 오역(원문에 있는 문장이 빠져 있다)과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 설명이 미흡한 역주가 있던데 일단 이것부터 먼저 언급하겠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237쪽에 볼테르(Voltaire)의 시 『오를레앙의 성처녀(La Pucelle d’Orléans)에 관한 역주가 있다. 역주에 볼테르의 작품이 ‘1899년’에 발표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1694년에 태어나 1778년에 세상을 떠난 볼테르가 1899년에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한 세기가 지난 뒤에서야 발표되었을까?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프랑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Jeanne d’Arc)의 별명이다. 당연히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잔 다르크의 삶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고, 볼테르는 이 시를 1730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한동안 잊힌 작품은 영국의 작가인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William Henry Ireland, 1775~1835)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고,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1899년이다.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알마, 2014)

* 주명철 《계몽과 쾌락》(소나무, 2014)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시’라고 말하기 민망한 ‘포르노그래피’. 제목만 보면 볼테르가 프랑스의 영웅을 찬양하는 시를 섰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볼테르가 잔 다르크를 음란한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를레앙의 성처녀』는 외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취급받았지만, 자극적인 소재를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통되면서 널리 읽히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프랑스의 독서 문화와 금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분석한 《책과 혁명》(알마)을 쓴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은 1769년부터 1789년까지 불법 유통된 720종의 금서가 적힌 목록을 조사했는데, 그 목록에 『오를레앙의 성처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단턴은 『오를레앙의 성처녀』와 같은 특정 인물을 비방하기 위해 만든 포르노그래피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한 부싯돌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포르노그래피 형태로 만들어진 책들 대부분은 군주와 기득권층을 풍자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정부는 이 포르노그래피 유통을 막기 위해 금서를 지정했다. 그러나 금서는 발 빠르게 유통되었고, 이로 인해 금서를 접한 대중들의 마음에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단턴은 음란물로 규정된 프랑스의 금서들이 군주와 귀족 중심의 구체제(ancien régime)에 어떻게 균열을 냈는지 《책과 혁명》에서 설명하고 있다.

 

자, 다시 역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래서 정리하자면, 『오를레앙의 성처녀』를 '1899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대충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역주에 ‘볼테르가 1730년에 쓴 미완성 작품’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이제 《코끼리를 쏘다》에 발견된 오역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 두 개는 《코끼리를 쏘다》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발췌한 『Good Bad Book』 번역문이다.

 

 

 

* 원문

A cut above most of these was Barry Pain. Some of Pain’s humorous writings are, I suppose, still in print, but to anyone who comes across it I recommend what must now be a very rare book — The octave of Claudius, a brilliant exercise in the macabre. Somewhat later in time there was Peter Blundell, who wrote in the W. W. Jacobs vein about Far Eastern seaport towns, and who seems to be rather unaccountably forgotten, in spite of having been praised in print by H. G. Wells.

 

 

* 좋으면서 나쁜 책, 《코끼리를 쏘다》, 118쪽, 박경서 옮김.

 

 이들보다 더 우수한 작가로서 베리 페인(Barry Pain)도 있다. 그의 유머스러운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지만, 그의 책을 접하는 사람에게 오늘날 구하기가 힘든 작품인 『클로디어스의 8일(The octave of Claudius)』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후의 작가로는 극동지방의 항구도시에 대한 이야기로 출판 당시 웰스(H. G. Wells)의 찬사를 받았지만 이상하게 요즈음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피터 블룬델(Peter Blundell)이 있다.

 

* 좋은 대중소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316쪽, 하윤숙 옮김.

 

 이보다 상급에 속하는 작가로는 베리 페인(Barry Pain)이 있는데, 그의 작품 중에는 여전히 판매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혹시 읽을 사람이 있다면 지금은 필시 구하기 힘들 『클라우디우스의 8일(The octave of Claudius)』을 추천한다. 이 작품은 섬뜩한 분위기를 띤 탁월한 작품이다. 다음 시기로 내려오면 피터 블런델(Peter Blundell)이 있다. 그는 극동의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W. W. 제이콥(W. W. Jacobs) 같은 성향의 작품을 썼는데 H. G. 웰스가 지면상에서 높은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잊힌 것 같다.

 

 

 

박경서 씨의 번역문에는 원문에 있는 문장(필자가 밑줄 친 문장) 두 개가 빠져 있다. 박경서 씨는 조지 오웰의 작품을 주로 번역했고, 오웰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인데 원문을 누락한 번역을 했다는 점이 아쉽다. W. W. 제이콥은 ‘제이콥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영국의 작가다. 그의 대표작은 『원숭이 손』으로, 역대 최고의 공포 단편 소설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추천받는 작품이다. 필자는 3년 전에 W. W. 제이콥스를 소개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내가 쓴 졸문을 참고하길 바란다.[주]

 

 

 

* 원문

 

Enough talent to set up dozens of ordinary writers has been poured into Wyndham Lewis’s so-called novels, such as Tarr or Snooty baronet. Yet it would be a very heavy labour to read one of these books right through.

 

 

* 좋으면서 나쁜 책, 《코끼리를 쏘다》, 121쪽, 박경서 옮김.

 

타르 혹은 속물의 귀족(Tarr or Snooty baronet)과 같은 윈담 루이스(Wyndham Lewis)의 소설을 보면 수십 명의 평범한 작가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재능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란 무척 어렵다.

 

* 좋은 대중소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320쪽, 하윤숙 옮김.

 

 윈덤 루이스가 쓴 『타르』나 『오만한 준남작(Snooty baronet)에는 평범한 작가 12명을 탄생시킬 만한 재능이 들어있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은 매우 힘든 중노동이다.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 1882~1957)는 영국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화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1918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타르(Tarr)다. 『오만한 준남작(속물의 귀족, Snooty Baronet)』은 1932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러므로 『오만한 준남작』은 『타르』와 별개의 작품이다.

 

 

 

 

[주]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 <원숭이 손>] (2016년 5월 17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8499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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