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나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느끼는 대로 삶을 인식하는 자유로운 내면 상태를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

 

낭만주의자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그러므로 현실이라는 세계를 받쳐주는 두 개의 기둥, 즉 이성과 논리적 사고와 친해지기 힘들어한다. 그들에게는 이 기둥들은 굵은 쇠창살이요, 현실은 거대한 감방이다. 이 현실의 감방을 탈출하는 유일한 돌파구는 감방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낭만주의자는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새로운 활력소를 얻는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추구하며 개인의 체험과 주관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실과 상상, 이성과 감성, 주지(主知)와 주의(主意)를 철저히 분리하지 않았으며 현실 도피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지 않았다. 특히 독일의 낭만주의 지식인들은 현실을 벗어나야 할 세계가 아니라 변화해야 할 세계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을 변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 대한 소식은 바람을 타면서 유럽 전역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프랑스혁명을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이다. 자유를 동경하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에 열광했으며 혁명을 지지했다. , 물론 혁명을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낭만주의자도 있었다. 또 혁명의 과격함에 충격을 받아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을 철회하거나 혁명 세력을 비판하는 낭만주의자도 있었다. 어쨌든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싶어 했다.

 

 

 

 

 

 

 

 

 

 

 

 

 

 

 

 

* [절판] 뤼디거 자프란스키 낭만주의: 판타지의 뿌리(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2)

 

 

 

 

 

 

 

 

 

 

 

 

 

 

 

* 에른스트 호프만 모래 사나이(창비, 2017)

* 에른스트 호프만 모래 사나이(지만지, 2011)

* 에른스트 호프만 모래 사나이(문학과지성사, 2001)

 

 

 

낭만주의를 감성과 상상을 중시하는 사상또는 현실 도피적인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 낭만주의자들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단순한 생각은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책이 뤼디거 자프란스키(Rüdiger Safranski)낭만주의: 판타지의 뿌리(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책의 저자는 독일에서 시작된 낭만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아 생긴 낭만적인 것의 정의를 구분한다. ‘낭만적인 것이란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은 시대정신이자 문화이다. 저자는 독일 낭만주의의 종착점에 서 있는 작가로 호두까기 인형모래 사나이를 쓴 에른스트 호프만(Ernst Hoffmann)을 지목한다. 호프만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의 내면 상태를 묘사한 이야기를 주로 썼다.

 

호프만 이후에 이어져 온 낭만주의적 문화는 낭만적인 것으로 이름 붙여 분류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남긴 지적 전통과 문화적 유산들은 다음 세대에 이어져 내려왔다. 예를 들어 야성과 광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축제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city dionysia)에 영감을 얻은 니체(Nietzsche)의 디오니소스 예술관과 게르만 신화(Germanic mythology)와 중세 문학을 소재로 한 바그너(Wagner)의 음악들 모두 낭만적인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아카넷, 2007)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아카넷,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책세상, 2002)

* 정영도 니체 vs 바그너(세창출판사, 2019)

 

 

 

그러나 독일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낭만적인 것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만나면서 삐딱 선을 타게 된다.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 우월 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다. 서른 한 살의 니체는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가 되어 자신의 책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를 찬양한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신인 디오니소스적 예술관과 이성 중심의 아폴론적 예술관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의 종교적 편견과 반유대주의에 실망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니체 대 바그너를 썼다. 또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바그너를 음악을 병들게 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유대주의를 비판했던 니체의 글과 사상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히틀러(Hitler)에게 영감을 주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고, 고통을 주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인간상으로 위버멘쉬(Übermensch)를 제시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니체가 제시한 인간상을 초인(超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망상에 가까운 히틀러의 왜곡된 해석은 자신을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로 부각시켜주는 지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정신병이 발병한 니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본 누이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는 반유대주의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니체의 책과 유고를 반유대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해석하여 편집했다. 이렇다 보니 오랫동안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로, 그의 책에 히틀러가 좋아한 반유대주의적 내용이 적혀 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리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게르만 민족의 정신을 잘 구현한 음악으로 바그너의 작품들을 꼽았다. 20세기 초에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낭만적인 것은 낭만주의의 부작용이다.

 

 

 

 

 

 

 

 

 

 

 

 

 

 

 

 

* 이본 셰라트 히틀러의 철학자들(여름언덕, 2014)

* [절판] 괴테 괴테의 프랑스 기행(인화, 1998)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저자 이본 셰라트(Evon Sherat)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지식인들에게 비판이 가해지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완전히 잡기 직전에 독일의 지식인들은 나치즘(Nazism)정치적 낭만주의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나치들은 게르만 민족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지적 및 문화적 도구로 낭만주의를 지목했고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의 책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제3제국 시대의 필독서가 되었다. 낭만주의: 판타지의 뿌리는 독일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제3제국 시대의 낭만적인 것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설명한다. 자프란스키는 책의 머리말에 낭만적인 것은 병적인 것이라고 말한 괴테(Goethe)의 말을 인용한다. 괴테도 처음에 프랑스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자유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약탈을 자행하는 혁명 세력의 행보를 목격한 이후로 혁명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괴테의 불길한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갑갑한 현실 세계를 현실 너머의 세계로 만들려는 히틀러의 애착은 혁명에 흥분한 독일 낭만주의 지식인들이 남긴 불행한 유물이다. 위험한 낭만주의자는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 욕망을 위해 또 다른 개인의 자유와 삶을 무참히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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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2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은 로망의 일본식 음역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것을 차용할 바에야 차라리
원어를 사용하는 게 어떨지 싶네요.

그나저나 이데올로기의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퓨어러에 갖다
대는 방식의 기술적 접근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cyrus 2019-09-03 11:45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낭만주의를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라고 써야겠어요. ^^
 

 

 

지난달 우주지감 독서 모임 지정 도서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2011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다. 8년 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20대 때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뷰를 몇 편 쓴 적이 있다. 오랜만에 과거에 썼던 글을 읽어보니 뜯어고쳐야 할 문장들이 많이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글에서 드러나는 20대 때의 내 모습이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한여름 밤의 꿈(민음사, 2008)

* [품절]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윤기 · 이다희 옮김 한여름 밤의 꿈(달궁, 2005)

 

 

 

 

8년 전에는 최종철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을 읽었다면, 올해는 이윤기 씨와 그의 따님 이다희 씨가 함께 번역한 번역본(달궁)도 같이 읽었다. 두 권의 책 모두 분량이 작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하루에 두 권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출간된 한여름 밤의 꿈번역본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민음사 판본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

 

 

 

 

 

 

책 앞표지에 있는 그림 제목은 ‘The Awaking of Adonis’이다. 이 제목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잠에서 깨어나는 아도니스. 그림을 그린 사람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회원으로 활동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라파엘 전파의 영국 화가들은 성경이나 전설, 신화 속 한 장면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라파엘 전파의 그림은 화려한 색으로 꾸며진 한 편의 이야기.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신화적인 주제를 현실감 있게 표현하려고 했다.

 

아도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소년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도니스에 푹 빠져버린다. 그녀는 아도니스를 독점하고 싶어서 그를 상자 속에 넣고 감춘다. 그런 다음 아도니스가 있는 상자를 저승의 왕 하데스(Hades)의 아내 페르세포네(Persephone)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도 아도니스의 아름다운 외모에 매료되어 아프로디테에게 아도니스를 돌려주기를 거부한다.

 

소년을 둘러싼 두 여성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제우스(Zeus)가 직접 중재에 나선다. 제우스의 판결에 따르면 아도니스는 일 년의 3분의 1을 페르세포네와 함께 저승에서 함께 살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프로디테와 함께 지상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남은 인생은 아도니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 사냥을 좋아한 아도니스는 저승보다는 지상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나머지 삶 역시 아프로디테와 함께 보낸다. 아프로디테는 혼자서 사냥을 즐기는 아도니스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도니스는 사냥하다가 멧돼지 이빨에 찔려 죽는다. 아도니스의 허망한 죽음에 비탄에 빠진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죽어가면서 흘린 피에 신의 음료인 넥타르(Nectar)를 붓는다. 아도니스의 피가 흘린 자리에 붉은빛의 꽃이 피어나는데, 그 꽃이 바로 아네모네(Anemone).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도서출판 숲, 2017)

* 윌리엄 셰익스피어 비너스와 아도니스(전예원, 2011)

* 윌리엄 셰익스피어 비너스와 아도니스(시와진실, 2003)

 

 

 

아도니스 이야기는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기 소재였다. 아도니스 이야기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변신 이야기. 셰익스피어는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 Adonis)라는 제목의 장시를 썼다. 비너스는 아프로디테의 영어 이름이다. 다만 그리스 신화와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장시에 묘사된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구애에 부담스러워 한다. 셰익스피어는 아도니스를 어른의 사랑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로 묘사했다.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살펴보자. 아도니스가 누운 자리 주변에 붉은 아네모네가 피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도니스에게 다가가는 여성은 아프로디테다. 아네모네 한 송이에 손을 내민 아이는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Eros). 화살(한 번 맞으면 각각 사랑 또는 혐오의 감정이 생기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다)이 담겨진 화살집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도니스는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의 피가 남아있는 자리에 신주를 부어 아도니스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깨어나게(awaking) 만든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허종 옮김 로미오와 줄리엣(동인,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경희 옮김 로미오와 줄리엣(을유문화사,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로미오와 줄리엣(민음사, 2008)

 

 

 

 

한여름 밤의 꿈에 아도니스와 관련된 내용이 없다.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가 나오는 그림이 어째서 한여름 밤의 꿈표지 그림이 되었는지 의아하다.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아테네의 품팔이꾼들은 직접 공연을 준비하고 연기를 한다. 그들이 공연하려는 작품은 피라모스(Pyramus)와 티스베(Thisbe) 이야기다. 이 이야기도 변신 이야기에 언급되어 있다.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다.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사랑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워터하우스는 피라모스의 말을 듣기 위해 벽에 난 구멍에 귀를 기울이는 티스베의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이 한여름 밤의 꿈표지 그림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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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1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1 15: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세하게 쓰기 귀찮아서 그냥 간단하게 ‘품팔이꾼’이라고 적었어요. 이윤기 씨가 그렇게 썼어요. ^^

카알벨루치 2019-09-0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벽에 난 구멍에 말을 하고 귀를 기울이는 장면 영화 <화영연화>가 연상됩니다

cyrus 2019-09-01 15:17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도 눈치 채셨군요. 독서모임 멤버 중에 영화를 많이 본 분이 계세요. 그 분도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를 보고는 <화양연화>를 언급했어요. ^^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 - 재벌의 세습경영과 한국경제의 미래
유재용 지음 / 나남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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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워지고 정권의 임기 끝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하면 레임 덕(lame duck) 현상이 일어난다. 레임 덕은 임기 말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하는 현상을 뜻한다. 대통령의 지도력이 약해지면서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을 다리를 저는 오리의 모습에 빗댔다. 이때 재벌과 보수 야당은 공세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한다. 전경련, 자유기업원 등 산하단체는 물론이려니와 우파 학자들까지 총동원하여 정부의 기업정책을 비판한다. 일부 보수 언론까지 여기에 가세하여 마치 정부가 재벌을 억압하여 우리 경제가 정부 잘못되고 있는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들은 정권 교체를 위해 현실의 왜곡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경유착을 알고도 묵인하는 재벌 중심 자본주의를 종식하고 우리나라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정착되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좌파 또는 종북 세력으로 매도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못 하는 일이 없다. 과거에 그랬듯이 말이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1997년. 재벌의 연쇄도산으로 역사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를 맞았다. 부실 재벌의 처리 비용으로 이미 백조 원이 넘게 들었고 앞으로 더 들어야 할 돈과 이자 비용까지 고려하면 이백조 원은 넘을 터인데, 이 모두가 우리 같은 서민들이 갚아야 할 빚이 되었다. 이런 천문학적인 규모의 빚을 국민에게 떠넘긴 장본인들이 바로 재벌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남의 돈을 내 돈인 양 물 쓰듯 쓰면서 수익성을 무시한 채 화려한 외형확장에만 탐닉했다. 돈을 못 벌어 이자를 갚기 힘들면 돈을 더 꾸면 되었다. 회계장부를 조작하여 돈을 많이 버는 양 꾸미면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한번 살려보자는 것이 재벌개혁이다. 재벌의 성적표를 제대로 매겨 시장에 보여주자는 것이다. 각종 비리에 연루되거나 경제 성장을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은 재벌에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국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 있었기에 그 국가들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더디게 하는 세습 경영을 비판한다. 여기까지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책 제목의 주어에 주목하시라.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 ‘우리’는 중의적이다. 불공정한 세습 경영을 고집하는 우리나라 재벌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들을 가리킬 수 있고,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대중을 뜻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단골 소재 중 하나가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는 재벌 2세이다. 그들은 부모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차기 경영인이면서도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을 좋아한다. 대중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임을 알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에 열광한다. 세습 경영이 부작용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영인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경제가 잘못되면 먼저 대통령 탓으로 돌린다. 물론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료주의는 비판 대상이다. 그런데 재벌 3, 4세들이 선친의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면서 경제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에 빨대를 꽂은 재벌 3, 4세들을 보라. 이게 경제 발전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근대적인 세습 경영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친 재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영 방식을 ‘기업 상속’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업 상속은 장점이 많다. 기업이 보유한 핵심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발전시키고, 기업경영의 영속성을 제고할 수 있다. 그런데 친족 관계로 맺어진 경영인들이 기업 상속을 위해 분식회계 · 정경유착 등 무리한 시도를 했다면 그들의 경영 능력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은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감 있는 경영 비전이 있어서 기업 상속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기업’ 그 자체를 지키고 싶은 것일까. 후자의 목표를 위한 거라면 문제가 있다. 기업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를 깎는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친 재벌 경제학자들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비판마저 ‘반 기업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재벌을 만든 고인들은 남다른 도전과 창의성으로 기업을 일궈낸 공로로 생전에도 재계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땅에 자동차와 중화학공업을 뿌리내리고 반도체 · 전자 등 첨단산업을 태동시킨 혜안은 경영학의 사례연구와 분석과제로 손색이 없다. 그들의 경영 방식도 한계가 있고 비판 대상이 되지만, 국익과 경제 성장을 위해 노력했으므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재벌 1세들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경영권 세습을 당연하게 여긴 점이다. 그들의 후손은 리더십 검증을 받지 않은 채 기업을 이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재벌 1세들의 공로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말한다. 재벌 1세가 워낙 능력이 뛰어나니 당연히 그들의 후손들도 기업을 잘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경영인의 외모는 유전될 수 있어도 자질과 능력은 절대로 유전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만 알아도 세습 경영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는 적폐 청산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정경유착의 명맥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지 아주 쉽게 설명한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권력과 부만 대물림되는 세습 경영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씩 알려준다. 재벌 3, 4세의 역량에 대한 공정한 검증이나 평가가 없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후광에 의지해 정치권력과 자본 권력의 중심에 선다. 세습 경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부의 편중 현상을 심화시켜 서민들을 시름에 빠지게 하고, 부정부패에 따른 기회비용은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세습주의(저자는 어쩔 수 없이 ‘세습자본주의’라고 썼는데, 저자 말대로 ‘세습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는지 딜레마다)가 근절되지 않으면 ‘흙 수저론’ 논쟁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흙 수저’ 청년이 경영인이 될 수 있는 공정한 경쟁 기회가 박탈된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재벌이 저지른 크고 작은 사건들을 보면서 점차 분노에 무감각해지고,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짜증 섞인 혼잣말을 되뇐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든 원인을 대통령에게 찾는다. 그러면서 경제를 확실히 살릴 만한 대통령 후보감이 누군지 살펴본다. 이런 와중에 재벌 책임론은 잊힌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재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습과 비리를 시도한다.

 

이제 재벌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왜 세습에 무관심하는가’에 먼저 초점을 맞춘 다음 ‘그들이 왜 세습에 열중하는지’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만의 자본주의(세습주의)’에 적극적으로 분노하고 타파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저항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경험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정권 교체를 이끈 결정적인 동력이 된 저항 의식과 결집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 우리가 재벌 세습주의를 근절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 Trivia

 

 

* 우리나라에서 유독 세습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을 꼽았다. 그렇다. 능력에 대한 존중의식이 있다면 사실 세습은 가능하지 않다. (234쪽)

 

 

→ 재벌 3, 4세의 능력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과 거리가 멀다. 저자는 재벌에 속하지 않은 전문 경영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인식이 형성되어야 세습주의를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의 부재’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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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두 존재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전에 ‘여성 뱀파이어’의 계보를 살펴보면서 이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콜리지 시선》 (지만지, 2012)

* 존 키츠 《키츠 시선》 (지만지, 2012)

* [품절] 존 키츠 《빛나는 별》 (솔출판사, 2012)

* 괴테 《괴테 시 전집》 (민음사, 2009)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 이미지는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에 나오는 드라큘라(Dracula) 백작과 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드라큘라 백작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뱀파이어에 관한 각종 전설이 전해 내려왔고 낭만주의 문학이 꽃 피던 시대에 뱀파이어는 ‘죽은 연인’ 또는 ‘이승의 남성을 유혹하는 유령 신부’로 묘사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서사시 『크리스타벨(Christabel), 존 키츠(John Keats)의 시 『라미아(Lamia)『무정한 연인』, 괴테(Goethe)의 담시 『코린트의 신부』 등이 있다.

 

 

 

 

 

 

 

 

 

 

 

 

 

 

 

 

 

 

 

 

 

 

 

 

 

 

 

 

 

 

 

 

 

 

* 박선경 엮음 《세계 서스펜스 추리여행 1》 (나래북, 2014)

* 테오필 고티에 《고티에 환상 단편집》 (지만지, 2013)

* [품절] 민경수 엮음 《클라리몽드: 아홉 개의 환상기담》 (작품, 2013)

*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 소설》 (민음사, 2010)

* 이규현 엮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창비, 2010)

* [품절]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프랑스의 소설가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의 단편소설 『죽은 연인』에 나오는 클라리몽드(Clarimonde)는 남자를 유혹해 피를 빠는 매춘부다. 이 소설은 여러 권의 단편 선집에 수록되었는데 제목이 다양하다. ‘클라리몽드’, ‘사랑에 빠져 죽은 여인(《고티에 환상 단편집》)’, ‘죽은 여인의 사랑(《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죽은 여자의 사랑(《세계의 환상 소설》) 등이 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 묘사된 여성 뱀파이어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사악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남성 앞에 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함께 뱀파이어 고전으로 손꼽히는 레 파누(Le Fanu)《카르밀라(Carmilla)는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한 작품으로 분류된다. 카르밀라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레즈비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나는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가 아닌 ‘레즈비언 뱀파이어’라고 생각한다. 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다르다. 카르밀라는 여성 뱀파이어의 계보에 속할 수 없다.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정체성을 설명하려면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명제를 가져 와야 한다. 위티그는 1980년에 발표한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On ne naît pas femme)라는 글에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파격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 조현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행성B, 2018)

* [품절] 케티 콘보이 외 엮음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울아카데미, 2001)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을유문화사, 1993)

* 변광배 《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살림, 2007)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 번역문은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한울아카데미)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레즈비언을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를 전복하는 새로운 주체로 규정한 선언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글이 수록된 책이 절판되었다.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행성B)에 위티그의 이론을 소개한 내용이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티그는 보부아르(Beauvoir)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재해석하고 이를 변용한다. 보부아르가 말한 ‘만들어지는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여성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젠더(gender)’의 여성이다. 그러나 위티그는 그녀의 명제를 동의하면서도 ‘만들어지는 여성’이 이성애 여성에 더 가깝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명제를 확장하여 ‘만들어지는 여성’은 레즈비언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강제된 젠더 역할, 즉 ‘남성’과 ‘여성’으로 설명하는 성의 범주는 ‘이성애적 계약(heterosexual contract)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에서 보여준 위티그의 문제의식은 ‘이성애 중심 사회 및 문화 비판’이다.

 

위티그는 생물학적 여성의 존재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성과 재생산 기능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식뿐만 아니라 가모장을 중심으로 한 여성사까지 반대한다. 이러한 설명들이 결국은 이성애에 초점에 맞춰져 있으며 이성애 중심주의는 ‘헤테로 여성의 레즈비언 차별’의 원인이 된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라는 정상성의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카르밀라는 ‘이성애적 계약’에 저항하는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결혼과 모성, 재생산을 중요시하게 여긴 빅토리아 시대의 견고한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다. 위티그는 이성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은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남자나 여자 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도출한 것이다. 위티그가 말한 레즈비언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위티그는 생물학적 · 사회적 남녀 성별 범주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하고도 특별한 존재가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한다.

 

카르밀라는 이성애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레즈비언 뱀파이어’다. 카르밀라는 소녀에게 접근하여 밤마다 그녀들의 목을 노린다. 남성들이 카르밀라의 악행을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다. 특히 소설에 나오는 슈필스도르프(Spielsdorf) 장군은 카르밀라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카딸의 복수를 꿈꾼다. 카르밀라를 퇴치하기 위해 결성된 ‘남성 십자군’의 임무는 가사 및 재생산 노동을 전담하는 헤테로 여성이 되어야 하는 소녀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결국 카르밀라는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에 박혀 죽는다.

 

 

 

 

 

위티그의 레즈비어니즘(lesbianism)은 남성 가부장, 이성애 중심의 정치 및 문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면서 성적 자율성을 가진 레즈비언 정체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위티그의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레즈비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 위티그의 명제를 비판한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 조현준 《젠더는 패러디다》 (현암사, 2014)

 

 

 

버틀러도 레즈비언이다. 그러나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 중심 사회에 대항하는 유일한 존재가 레즈비언뿐이냐고 반문한다. 레즈비언이 아무리 특별하고도 주체적인 존재라고 해도 레즈비언이 중심이 되는 여성운동은 헤테로 여성과의 연대를 단절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권위로 작동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선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 응답하면서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대신에 사람은 (누구나?)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거부하면서 위티그의 레즈비언-페미니즘은 모든 종류의 이성애 여성과의 연대를 단절하는 것으로 보이며, 은연중에 레즈비언이야말로 논리적이거나 정치적으로 필연적인 페미니즘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분리주의적 규정주의는 확실히 더 이상은 존속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젠더 트러블》, 324쪽)

 

 

나는 버틀러의 문제 제기가 여성주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즉 정체성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돌베개, 2017)

* 철학아카데미 엮음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동녘, 2014)

 

 

 

미국의 여성주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등의 단일 정체성을 강조한 좌파의 사회운동 노선을 비판한다. 그녀는 정체성이 ‘물화(reification)’되는 현상이 어떤 개별 존재를 특정한 정체성에 고정해버린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이 헤테로 여성을 여성운동 연대자로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 여성을 여성운동 연대자로 보지 않는 것은 ‘레즈비언’ 또는 ‘여성’이라는 단일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나오는 입장이다. 분리주의식 여성운동은 권위주의, 전체주의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정체성 인정’으로 일관된 여성운동은 단일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여성을 차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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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6 15: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성애자 여성이 있으니까요. 레드스타킹 모임에 참석한 이후부터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사실이 많아요. ^^;;
 

 

 

 

《카르밀라》를 펴낸 초록달 출판사1인 출판사다. 한 사람이 혼자서 책 한 권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책 한 권 만드는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든 업무는 외국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해보지 않았지만, 조금만 역자들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번역하는 일이 고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역자는 원문의 단어 하나하나 끊임없이 눈으로 만져본 다음 그 의미와 비슷한 제2의 단어를 찾아내서 종이에 옮겨 써야 한다. 홀로 단어들과 씨름하고 있는 역자들 덕분에 독자는 다른 나라의 글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초록달 출판사가 레 파누(Le Panu)의 대표작 두 편(『카르밀라』와 『그린 티』)을 번역하기로 한 점,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을 위해 후원해준 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하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문에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카르밀라』의 번역문부터 살펴보겠다.

 

 

 

 

 

  아무 말이 없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큰소리로 글을 읽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소리 내어 말했다. (27~28쪽)

 

 

 

 

 

 

 

 

 

 

 

 

 

 

 

 

 

 

 

* 메리 램, 찰스 램 《명화와 함께 읽는 셰익스피어 20》 (현대지성, 2016)

* 메리 램, 찰스 램 《셰익스피어 이야기》 (비룡소, 2012)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소설을 쓴 적이 없다. 그는 희곡 작품과 소네트(sonnet)를 썼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은 소설 형식으로 편집되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Charles Lamb)과 그의 누이 메리 앤 램(Mary Ann Lamb)은 1807년에 어린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썼다. 메리 램은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류하는 작가였으나 정신병 발작으로 어머니를 살해했다. 찰스 램은 평생 독신으로 누이를 간호하면서 살았다. 남매가 함께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고전이 되었다.

 

『카르밀라』의 시대적 배경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레 파누가 작중 시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로라(Laura)가 어느 시기에 살았는지 어림짐작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르밀라』의 작중 시간은 19세기 중반이다.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19세기 초반에 나왔으니 로라가 이 책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가 언급된 원문과 번역문만 봐서는 로라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 이야기》의 한 구절을 인용했는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에 있는 구절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원문에는 ‘셰익스피어의 소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구절이 없다. 어린 로라는 어른이 읽는 희곡 버전보다 소설 버전의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더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소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은 오역이다.

 

 

 

 

  라폰테인이 머리에 검은색 터번을 쓰고 인상이 험악했던 여인에 대해 설명했다. (38쪽)

 She described a hideous black woman, with a sort of colored turban on her head.

 

 

 

 

 

 

 

 

 

 

 

 

 

 

 

 

 

 

 

 

* [품절]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다음 인용문은 흑인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은 아니다. ‘colored turban’을 번역한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coloured’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을 비하하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검은색 터번을 쓴 여인’이라고 번역하면 독자는 (원문에 분명히 언급된) 그 여인이 흑인이라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리면서 번역한다면 ‘색깔 있는 터번을 쓰고 인상이 험악했던 흑인 여성’으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 이미 『카르밀라』를 번역했던 정진영‘유색 터번을 두른 오싹한 흑인 여자’라고 썼다(《뱀파이어 걸작선》, 36쪽).

 

 

 

 

 

 

 

 

 

 

 

 

 

 

 

 

 

 

 

 

* [품절] 윤호송 엮음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 (자유문학사, 2004)

 

 

 

 

다음 인용문은 『그린 티』의 결말에 해당하는 문장의 일부다. 마틴 헤셀리우스 박사(Dr. Martin Hesselius)는 동료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녹차를 마신 뒤부터 악마를 목격하게 된 제닝스(Jennings) 신부의 증상에 대한 소견을 밝힌다.

 

필자는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에 수록된 『녹차』를 읽었는데, 『녹차』(자유문학사)의 결말과 『그린 티』(초록달)의 결말에 있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는 걸 느꼈다. 확인해 보니, 『그린 티』의 결말 부분에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었고, 심지어 원문의 일부가 누락된 것을 알았다.

 

 

 

  You know my tract on “The Cardinal Functions of the Brain.” I there, by the evidence of innumerable facts, prove, as I think, the high probability of a circulation arterial and venous in its mechanism, through the nerves.

 

 ‘뇌의 기본적인 기능’이란 제목을 붙인 내 논문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많은 사례를 들어, 뇌 조직의 기능에 신경이 연결되어 정 · 동맥 혈액의 순환 작용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녹차』, 343쪽)

 

  제가 뇌 주요기능학회에서 어떤 연구를 발표했었는지 아실 겁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신경세포가 뇌 메커니즘에서 동맥과 정맥 순환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린 티』, 250쪽)

 

 

 

‘my tract’ ‘내 (소)논문’ 또는 ‘내 팸플릿’으로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The Cardinal Functions of the Brain’은 헤세리우스 박사가 쓴 논문 제목이거나 주제이다. 원문에 ‘학회’라고 번역할 만한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다음 문장은 『그린 티』에 누락된 원문과 그 번역문이다.

 

 

 

  The seat, or rather the instrument of exterior vision, is the eye. The seat of interior vision is the nervous tissue and brain, immediately about and above the eyebrow. You remember how effectually I dissipated your pictures by the simple application of iced eau-de-cologne. Few cases, however, can be treated exactly alike with anything like rapid success. Cold acts powerfully as a repellant of the nervous fluid. Long enough continued it will even produce that permanent insensibility which we call numbness, and a little longer, muscular as well as sensational paralysis.

  I have not, I repeat, the slightest doubt that I should have first dimmed and ultimately sealed that inner eye which Mr. Jennings had inadvertently opened. The same senses are opened in delirium tremens, and entirely shut up again when the overaction of the cerebral heart, and the prodigious nervous congestions that attend it, are terminated by a decided change in the state of the body. It is by acting steadily upon the body, by a simple process, that this result is produced—and inevitably produced—I have never yet failed.

 

 

  외적 영상으로서의 역할, 혹은 도구는 바로 눈(eye)이다. 하지만 내적 영상의 역할은 눈 주변에 있는 조직과 뇌가 담당한다. 내가 얼음으로 차게 만든 오드콜로뉴(eau-de-cologne: 향수 이름)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당신의 환각 증상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그렇게 신속정확하게 큰 효과를 본 예는 좀처럼 없었다. 어쨌든 차게 한다는 것은 신경 유동체(nervous fluid)를 흩어지게 하는 데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을 장시간 연속해서 사용한다면, 마비(paralysis)라는 영속적인 불감성(不感性, 감각이 없는: insensibility)을 생기게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오랫동안 연속해서 사용하면 감각과 함께 근육(muscular)까지도 마비될 것이다.

  사실 나는 제닌구즈(제닝스) 씨가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해서든 그의 내면의 시력(inner eye)을 잃게 해서, 마지막에는 결국 그것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지각은 섬망증(delirium tremens: 의식장애와 내적인 흥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운동성 흥분을 나타내는 병적 정신상태)의 경우에도 일어나는 신경의 이상 충혈(congestion)이 신체 정황의 결정적인 변화에 의해서 한정될 때에 완전하게 폐지된다. 이런 결과는, 신체상에 항상 작용하는 단순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써,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녹차』, 343~344쪽)

 

 

 

이 긴 내용을 요약하자면, 헤세리우스 박사는 제닝스의 환각 증상을 녹차에 중독된 ‘내면의 눈(inner eye)’에서 일어난 이상 증세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 증상의 원인을 제대로 발견한다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린 티』의 역자는 ‘내면의 감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이 표현이 ‘inner eye’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번역을 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독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이 글에 대한 반박 의견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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