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빠짐없이 사과나무를 찾아가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나뭇잎을 주워 모으고, 떨어진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면서 숲 속의 왕자가 되어 놀았다. 때론 맛있는 사과도 따 먹고, 혼자 놀다가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사과나무에게 물건을 사고 싶은 소원을 말했다. 나무는 자신의 사과를 팔아서 그것을 사라고 하였다.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돌아왔고 나무는 언제나 그랬듯 소년을 기쁘게 맞이한다. 소년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 후 소년은 나무줄기를 베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가 버렸다. 나무는 소년의 행복만을 기원했다. 한때 자신을 버리고 이용했던 소년이 늙고 병든 몸으로 돌아왔다. 나무는 열매와 가지 줄기를 모두 내주고 마침내 몸체가 잘려나간 밑동까지 쉼터로 내준다. 셸 실버스타인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무는 정말 행복했을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선한 의지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다. 인간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나누어 주고 여전히 행복하기만 한 나무의 모습이 딱해 보인다. 이 책을 아이나 어른들에게 권하는 게 권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안구에 습기가 차오른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주는 삶은 좋다. 하지만 무조건 주는 행위가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고 타인의 희생을 이용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심리 조종자’다. 심리 조종자란 타인의 허점을 파악하고 관계의 주도권을 쥔 다음 조종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을 만날 경우, 우리는 흔히 ‘착한 사람 증후군’에 빠진다. ‘착한 사람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심리 조종자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내면의 욕구를 억누른다.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고 강박적으로 믿고 있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의지나 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상대방 욕구에 자신을 맞추려다 보니 무조건적으로 희생한다. 소년 한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이 퍼주다가 흔들린 나무처럼 말이다. 이렇게까지 하고도 정작 원하던 대가들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은 숭고한 희생의 사랑으로 포장된다. 착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받아 끙끙 앓는다. 마음이 멍들고, 그 감정의 불순물은 마음 밑바닥에 모래알갱이처럼 응어리진다.

 

소년의 입장이 되어 보자. 그가 그동안 살면서 받았던 나무의 도움을 잊지 않았으면 나무의 존재를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사랑을 줘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지켜준 나무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우리는 소년처럼 무엇을 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나무처럼 남을 위해 무엇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직 안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빛나게 만드는 훌륭한 일만 하려 하지 남의 존재를 부각하는 궂은일은 피하려고 한다.

 

 

 

 

 

 

 

 

 

 

 

 

 

 

 

 

 

만약 신영복 선생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었으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사랑을 칭송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진심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준 나무가 행복할 방법을 알려준다.

 

 

 

 

겨울은 별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모든 잎사귀를 떨구고 삭풍 속에 있는 나목처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계절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내년 봄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겨울밤 나목 밑에 서서 나목의 가지 끝에 잎 대신 별을 달아 봅니다. (《처음처럼》 111쪽)

 

 

 

나무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어디에 심어졌든 묵묵히 자라 봄이면 싹을 틔워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어 낸다. 나무는 햇빛을 피하는 그늘도 되고, 성글지만 비를 피하는 우산도 된다. 아이들 놀이터도 되고 그네를 매는 기둥도 된다. 베어져서는 집을 짓는 재료나 땔감으로도 쓰인다. 무엇이 되어도 좋다는 마음, 바로 그게 나무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무의 헌신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에게 선의를 베풀면서 늙어버린 겨울 나목을 외면한다. 이처럼 희생하던 사람은 더 큰 희생을 요구받고 항상 손해를 보게 된다.

 

신영복 선생은 벌거벗은 나목을 위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달아줬다. 아름답고 포근한 별빛을 달아주면 나목은 외롭고 서운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나무를 위한 최상의 배려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진짜 사랑이다. 겨울은 별만 생각하는 계절이 아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한 나무를 생각하는 계절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나무 같은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요구에 맞춰 사는 수동적인 개인에 불과하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나무를 위해서 무언가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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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6-05-1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새로운 시각이네요.심리조종자라니!!

cyrus 2016-05-12 18:38   좋아요 2 | URL
인터넷에서 본건데, ‘심리 조종자’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었어요. ^^

페크pek0501 2016-05-13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면서 모녀관계에 대해 생각했어요.
딸들이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으레 외할머니에게 육아를 맡기려고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선배 중에는 손주를 키워 주는 일을 맡아서 사람들이 만나는 모임에도 못 나오고
집에 갇혀 사는 분이 있는데, 그것이 좋은 삶인지 모르겠어요.

딸이 긴 세월 자신을 키워 주신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데 그렇게 하기엔 답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출산을 장려하는 나라가 육아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데... 현실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주어지고(국공립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힘든 현실...)

저도 자식에게 아낌 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cyrus 2016-05-13 16:45   좋아요 0 | URL
저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부모와 자녀 관계를 생각해봤어요. 자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부모가 많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살면 좋은데, 페크님 말씀처럼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죠.
 
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 개정신판
신영복 글.그림 / 돌베개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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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이란 이름 다음엔 자연스럽게 ‘감옥’이란 단어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선생은 감옥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가장 저주받은 운명을 축복으로 바꾼 사람이다. 어둡고 암울한, 분노와 저주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지혜와 사색의 산실, 때론 축복과 은혜처럼 여겼다. 선생의 생각이나 정서의 형성에 더 큰 계기를 제공한 것은 오히려 오랜 감옥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책으로 구성했던 사회론 대신 가장 소외된 밑바닥 인생을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사회에 숨겨진 모순구조를 통해 사회를 새롭게 바라봤다.

 

인간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다른 사람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절대 감사의 존재다. 신영복 선생은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이라는 묵자의 말을 인용한다. 옛날에는 거울이 없어 맑은 물을 거울로 삼던 시대였다. 거울(물)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 비춰 자기 모습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진리’를 강조한다. 그 사회 속에 나는 내 밥그릇을 챙기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갔다. 물질적 부를 추구하며 과시하는 삶의 외양은 잠시 화려해 보일 수 있다. 거울(물)에 비춰보면 이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화려한 모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편견과 이기심은 자신의 모습에만 매몰되고 다른 이들의 삶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반성을 거치지 않아 나온 부산물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딱딱해지게 되어 있다. 살아서 유연하던 근육과 뼈는 시체가 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진다. 유연하지 못하고 시체처럼 굳어진 이념의 노예가 되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이다. 자신만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흑백 논리에 사로잡히기 쉽다. 우리 사회에 소통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들보다 불행한 존재는 없다. 결핍증 환자는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만한 너그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포용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공존과 상생의 규칙을 모르는 데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만든다. 자격지심은 헛된 자존심으로 헛된 감정싸움을 불러일으킨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처럼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뜻. 맨스플레인(mansplain) 성향이 있는 나였기에 이 말에 비춰 보니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에 대하여는 냉혹하게 평가하는가 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올바르지 않은 판단 속에 남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표출한다. 그래서 비판의 칼날을 자신에 향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홀로 잘났다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마음, 자신을 합리화하는 ‘꼰대’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 도그마의 권력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이다.

 

 

 

 

‘함께 맞는 비’라는 휘호를 보면서 내가 기억했던 ‘공감’이 잘못 변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에 내리는 비를 홀딱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지는 못할망정 빗방울이 튈까 봐 피하기만 했다. 남을 돕는 삶을 살자고 하면서 나 자신부터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면 꿈과 이상은 높은데, 재능과 실력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럴 때 어떤 이들은 냉정한 현실을 말하며 꿈을 접으라고 한다. 하지만 꿈을 꼭 이루겠다는 절실함, 그리고 약간의 우직함만 있다면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 믿고 싶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라고 한 신영복 선생의 역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삶은 모두 순간순간의 과정이다. 실천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제보다 스스로 가하는 강제 즉, 자율의 의지가 중요하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진작에 ‘지기추상’의 철학을 배웠더라면,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이란 구절처럼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끝까지 아집을 추구하는 무식함이 사라졌을 텐데. 너무 후회된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보듬어온’ 선생의 빈자리가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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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5-12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좀더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들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을텐데 말이죠..

cyrus 2016-05-12 17:09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참된 어른이었습니다. 다른 서재 이웃분들의 서평 덕분에 처음으로 <처음처럼>을 읽었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습니다.

yamoo 2016-05-1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영복 님의 책을 3권 갖고 있지만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한 참 후에나 읽게 될 거 같아요. 요즘 동양철학 계에서 핫하신 분을 만나 그 분 책들 다~~읽고 도올 전집을 다 읽은 후에야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참된 어른 인지 아닌지는 제가 신영복 님의 행적을 거의 몰라 평가하기 곤란하구요. 단지 투옥에서 고생하셨고, 그곳에서 쓴 책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감명을 줘서 저도 몇 권 구해놓았을 뿐입니다. 신영복 님 글을 읽으면 저도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겠죠~ 미래의 제 독후감처럼 사이러스 님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예감에 저도 이런 글 비스무리하게 리뷰를 작설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은지라..ㅎ

cyrus 2016-05-13 16:48   좋아요 0 | URL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처음처럼>, <나무야 나무야>를 읽은 게 전부입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동양철학은 어려워요. 신영복님의 삶을 반추하는 평전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행적을 평가할 수 있으니까요. ^^
 
우리가 악몽을 통해서 배워야 할 교훈

 

 

 

 

 

 

 

 

 

 

 

 

 

 

 

가면이 가지는 의미는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많다. 사회학자인 어빙 고프먼이 주장했듯이,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성격만을 일관되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황에서 다른 역할을 연기한다. 예를 들어, 나는 친구들을 대할 때, 일하는 동료들을 대할 때, 알라딘 서재에 접속하여 ‘cyrus’가 되어 회원의 글을 읽을 때 각각 다른 사회적 가면을 사용한다. 만약 이 가면들을 모두 강제로 벗겨버린다면, 남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방어능력을 잃어버린 상처 입은 인간이다.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제임스 앙소르의 그림은 위협적이다. 그의 그림에는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이 엉켜 있는 가면(얼굴)들이 가득하다. 앙소르는 낯익은 것의 낯선 배신을 시도한다.

 

 

 

 

 

 

해골 화가에서 앙소르는 그림 그리는 해골로 묘사된다. 만약에 앙소르가 자신의 모습을 해골로 그리지 않았으면 이 그림은 낯익은 얼굴을 그린 평범한 자화상이 된다. 앙소르는 해골이라는 낯선 가면을 쓴다. 그의 아틀리에는 실재(낯익은 것)와 환상(낯선 것)이 서로 엉겨 상호 침투하는 기묘한 공간이다. 행복한 책읽기를 쓴 김현의 말을 빌리자면, 앙소르의 그림이 주는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그림 속 얼굴과 화가의 실제 모습이 같아야 자화상이 성립된다. 그런데 앙소르는 낯익은 얼굴을 스스로 벗겨 낸다. 이젤 밑에 젊은 남성의 모습을 한 가면이 있다. 젊은 시절의 앙소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골 가면을 쓴 앙소르는 우리가 아는 화가가 아니다. 섬뜩한 죽음그 자체다. 그림 속 죽음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면서 관객에게 말한다. “내가 화가(앙소르)로 보이니?”

 

 

 

 

 

 

 

 

 

 

앙소르는 가면뿐만 아니라 해골을 주제로 한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죽은 인간이 부패하는 현상에 매료되었다. 앙소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스텐데라는 마을에 시체가 엄청나게 많았다. 17세기 초 스페인이 벨기에를 점령한 적이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오스텐데가 확장 공사를 하게 되면서 스페인 군대에 희생당한 시체들이 대량 발굴되었다. 어린 앙소르는 땅 속에 묻힌 시체를 보게 되었고, 그 상황은 지워지지 않는 섬뜩한 기억으로 남았다. 앙소르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죽음에 대한 불안한 정서를 잊기 위해서 앙소르는 죽음의 신으로 분장했다. 그리고 가면을 쓴 자들과 함께 카니발 연회의 흥겨운 분위기에 취하고 있다. 하지만 앙소르의 카니발은 유쾌하다기보다는 기괴하다. ‘낯익은 얼굴의 가면과 낯선해골이 함께 어우러진 앙소르의 그림에서 죽음과 불안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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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5-1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가면을 쓰고
가면무도회로 갑니다~

cyrus 2016-05-11 20:04   좋아요 0 | URL
알라딘/북플은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공간 같아요. 오늘은 어떤 가면을 쓰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생각하니까요. ^^

yureka01 2016-05-1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x-ray찍어도 보이는 해골인데,단지 사진일뿐이겠지만...
해골이 가면이 아니라 진면이란 보장이 없겠지요.
간혹 자신도 자신이 낯설 때가 많아서 말이죠..ㅋㄷㄷㄷㄷ

cyrus 2016-05-11 20:06   좋아요 1 | URL
어떻게 보면 우리 몸을 이루는 해골도 진짜가 아닐 수 있겠어요. 뼈도 세월이 지나면 부식되어 사라지니까요. ^^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5-1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
˝언어유희˝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금은 재밌네요^^

cyrus 2016-05-11 20:28   좋아요 0 | URL
여기 오랫동안 놀다보면 점점 지겨워질 때가 있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으로는 옛날에 앙소르 전시회가 열렸던 것으로기억합니다. 아니면, 종합 전시회 때 옹소르 작품 몇 점이 있었는지.. 하튼, 그림을 본 기억이 나네요..


하튼 그림이 굉장히 독특해서 아주 기묘한 감상에 빠졌던 기억이 나네요. 기분 더럽달까... ㅎㅎㅎㅎㅎㅎㅎ 참 독특한 감상이었씁니다..

cyrus 2016-05-12 17:1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기분이 더럽습니다. 사실 앙소르가 가면과 해골을 그려서 무얼 나타내고자 하는 건지 전문가들도 잘 몰라요. ㅎㅎㅎ

yamoo 2016-05-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앙소르는 처음 듣는 미술가네요~
좋은 화가 소개 감사합니다~ 찾아 봐야 겠어요!

cyrus 2016-05-12 17:11   좋아요 0 | URL
그림이 무섭고, 어둡습니다. 그 점을 참고해주세요. ^^;;
 
알라딘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

 

 

오늘 야무님이 작성한 글을 읽으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3월에 제가 알라딘 서재지수의 문제점에 대한 내용의 메일을 서재지기님에게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회원닉네임이 공개되는 내용이라서 서재지기 게시판에 불만사항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처음에 알라딘 서재/북플 활동이 많지 않은 분이 서재지수가 높게 나오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매일 두 편 이상의 글을 열심히 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마이리뷰’, ‘마이페이퍼’를 많이 작성하면 서재지수가 많이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서재지수 목록을 확인해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마이리뷰와 마이페이퍼를 합산한 글의 수가 100편 안 되는 회원이 1,000편 이상 글을 남긴 회원의 서재지수보다 높았습니다.

 

저는 모 회원의 서재지수와 비교하면서까지 불합리한 서재지수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올해 3월 13일에 서재지기님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서재지기님과 주고받은 메일 내용을 공개합니다. 원래 메일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부조리한 상황이 진행되어도 꾹 참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의 본질을 알리고 싶었고, 여전히 개선될 상황이 보이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뜨거운 감자’를 쥐어봅니다.

 

 

 

* 3월 13일에 보낸 메일

 

 

 

 

 

 

 

* 3월 14일 서재지기님의 첫 번째 답변

 

 

 

 

 

 

 

* 3월 14일 서재지기님의 답변에 대한 재답변

 

 

 

 

 

 

* 3월 15일 서재지기님의 두 번째 답변

 

 

 

 

 

* 3월 15일 서재지기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답변

 

 

 

모든 메일 내용에 의도적인 편집이 없음을 알립니다. 원본 그대로 캡처한 것입니다. 서재지기님의 답변 메일 내용을 읽어보면 서재지수 집계 방식과 그 문제점을 알 수 있습니다.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활동을 하면 서재지수에 반영됩니다. 모 회원이 ‘좋아요’를 1,000회 이상 눌렀습니다. 하루에 ‘좋아요’ 누른 횟수가 많다 보니 서재지수가 급상승한 것이었습니다. 알라딘 측은 이런 특정 활동의 한계치를 고려하지 못했다면서 서재지수 반영의 문제점을 인정했습니다.

 

 

회원 닉네임과 서재지기님의 실명은 가렸습니다. 제가 메일에 언급한 회원은 심은유님이 아님을 밝힙니다. 모 회원과 심은유님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알라딘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알리고 싶어서 쓴 겁니다. 모 회원과 심은유님은 잘못한 점이 없습니다. 모 회원과 심은유님도 서재지수가 반영되는 방식을 몰랐습니다.

 

 

 

 

 

알라딘 측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크게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서재지기님은 ‘토크토크관리’ 님의 서재가 ‘서재의 달인’ 목록에 있으면 안 되는 알라딘 운영진 계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버그가 풀려서 서재지수가 높게 나왔다고 해명했습니다. 바로 처리한다고 했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 ‘토크토크관리’님의 서재지수는 남아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3월 달에 메일을 보냈을 때, 토크토크관리님의 서재지수는 245,602점이었습니다. 그동안 9천 점이나 향상되었네요. 서재지기님이 약속한 말씀과 달리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안 고쳐진 걸로 봐서는 버그의 일종인가 봅니다.

 

평범한 친교 활동이 수치화되고, ‘서재의 달인’의 기준이 되는 알라딘 시스템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서재지기님에게 메일을 보낸 이후로 저는 그동안 다른 회원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 다는 일을 한동안 주저했습니다. 알라딘 메커니즘에 맞춰서 서재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북플에서만 볼 수 있는 ‘읽고 싶어 합니다’, ‘책을 읽었습니다’ 기능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100자평이나 알라딘 책 소개를 복사해서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습니다. 저와 야무님의 의견에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서재지수가 이상하게 나온 것은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평소처럼 친분 있는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댓글로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의견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솔직한 의견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급진적으로 느낄 수도 있겠으나 서재지수 제도를 폐지하거나, 아니면 서재지수 시스템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서재지수가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불편함을 받아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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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강기 2016-05-10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서재본연의 기능에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cyrus 2016-05-11 11:15   좋아요 0 | URL
다른 회원 간의 친분 활동이 없어도 조용히 묵묵하게 책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작성한 글의 양이 많음에도 서재지수가 낮습니다. 서재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게 활동하는데도 주목을 많이 못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책한엄마 2016-05-10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ㅠㅠ
그래도 사일러스님처럼 애정있는 분이 있으니 알라딘이 한뼘 성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cyrus 2016-05-11 11:18   좋아요 1 | URL
애정이라기보다는 쓸데없는 관심입니다. 알라딘 측은 이런 반응에 귀 담아 듣는 척은 하지, 크게 관심이 없을 겁니다. ^^

2016-05-10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11 11:25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북플에 활발히 활동하는 분들 대부분은 서재지수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반응입니다. 이 정도면 서재지수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하루에 100자평, 책 인용문(밑줄긋기), 그림만 열 개 이상 올리면, ‘주간 서재의 달인’ 상위권에 순식간에 올라갑니다. 하루에 글 한 편 쓰는 회원보다 서재지수가 높게 나오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간혹 최근에 글을 올린 적이 없는 유령 회원도 ‘주간 서재의 달인’ 목록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집계 방식이 이상합니다. 이럴 거면 신뢰성이 떨어지는 서재지수 제도를 폐지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2016-05-11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11 11:42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모르겠어요. 회원의 모든 활동 내역을 수치화한 건데,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ㅎㅎㅎ

님께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주셨어요. 알라딘 직원 계정이 회원의 글을 보고 ‘좋아요’를 눌러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님이 생각하는 대로 그런 상황이 (이미 이루어졌거나) 혹은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이아기하면 음모론으로 비춰질 수 있어서 저도 더 이상 말을 못하겠어요. 여러 가지 추측만 무성할 뿐입니다. 아무튼 알라딘 측이 ‘관리상 필요해서 만든’ 서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5-11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북플도 없애버렸고, 다른 활동은 잘 안합니다. 그저 제 글 올리고 가끔씩 친한 분들 서재를 돌면서 글을 보고 댓글을 남기는 정도에요. 사실 서재지수는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매우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되는 소지가 보이지 않네요.. 제가 3월부터인가 갑작스럽게 서재에 방문객 숫가가 줄었어요. 하루 100에서 10-20? 계속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데, 뭐 제 글이 재미없거나 다른 저로인한 것이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북플이나 다른 어떤 서재시스템이 이상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신경쓰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이상하거든요..-_-: 아무래도 서재지수를 늘이기 위한 ˝이상한˝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제 글이나 서재가 묻혀지는 것 같네요..-_-: 잘은 모르지만요.

cyrus 2016-05-11 11:48   좋아요 0 | URL
스마트폰으로 북플을 접속하는 경로가 많아지니까, 컴퓨터로 ‘알라딘 서재’를 접속하는 경로가 줄어들었을 겁니다. 제 블로그 또한 방문자수가 갑자기 줄어들기도 합니다. 서재지수 제도에 관심 없는 회원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서재지수를 올리려고 하루에 글을 도배하는 회원은 없는 것 같아요.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아무런 의미 없는 서재지수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평소대로 친분 있는 회원의 글을 읽고, 간단하게 댓글을 남기면서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마립간 2016-05-11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많아 위 글을 꼼꼼히 다 읽지 못했지만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

어느 분이 주간 서재의 달인 순위에 올라 서재에 방문하니, 글이 없더군요. (어쩌면 1편 정도 있었을지도.) 태그 등 다른 활동으로 서재 지수가 높았던 모양인데, 좀 허무했습니다.

cyrus 2016-05-11 11:52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군요. 저도 그 점이 이상했습니다. 문제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더 밝히고 싶은데, 회원 닉네임까지 공개해야 돼서 꾹 참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제 이 글을 작성하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서재지수 문제점에 무관한 회원분들이 오해하고, 서재 활동이 위축될 수 있으니까요.

잠자냥 2016-05-1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서재지수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거였군요. 저처럼 서재지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그리고 친교 활동을 위해 알라딘 서재나 북플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서재 지수가 좋을 리가 없군요. ㅎㅎ 재미난 정보였습니다.

cyrus 2016-05-11 20:07   좋아요 0 | URL
그냥 알라딘에 이런 시스템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ㅎㅎㅎ

표맥(漂麥) 2016-05-1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지수? 이거 뭐에 쓰는거지? 어디에 붙어 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재지수를 찾아 <나의 서재>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 글을 읽습니다.
별로 찾아오는 분도 없고 하니 신경 써본 적 없는 지수...
그래도 이 참에 제 지수가 얼마인지 알았습니다. : 20697점^^

지속적으로 알라딘에 글 올리는 분이 지수를 많이 받는게 가장 옳은 일 같은데...
컨텐츠를 양산해 주는 사람을 홀대하면(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게 바로 잘못된 정책인거지요.
애정없으면 이런 지적도 못할 터... 알라딘이 잘 받아들여 개선한다면 그게 알라딘의 복이겠지요.

cyrus님 좋은 일 하신겁니다.^^

cyrus 2016-05-12 17:15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의미가 불분명한 점수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셔도 좋습니다. 숫자에 너무 신경 쓰면 피곤해요. ㅎㅎㅎ 저 같은 사람이 계속 따지면, 알라딘이 싫어할거예요.

yamoo 2016-05-1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저보다 훨씬 이전에 이 문제를 제기하셨군요!
제가 또 문제를 공론화 시킨거 같아 좀 거시기 합니다만....이런 문제는 꼭 공론화시켜 볼 가치는 있는 거 같습니다.

사이러스 님의 문제제기에 십분 동감하며, 자세한 이전의 첨부글 잘봤습니다! 사이러스 님 쵝오!!

cyrus 2016-05-12 17:18   좋아요 0 | URL
2014년에 야무님이 서재지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죠. 그때 서재지수가 하양 조정되던 날이었어요. 전 그때까지만 해도 서재지수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친구 관계를 맺지 않은 회원의 서재를 찾으려고 검색하다가 우연히 서재지수를 보게 되었어요. 하나하나 살펴보니까 미심쩍은 부분이 한 개씩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야무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야무님이 2014년에 먼저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으면, 저는 그냥 못 본 척 넘어갔을 겁니다. ^^

감은빛 2016-10-2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서재 지수가 어떻게 매겨지는지 알았네요.
한번도 신경쓰지 않았던 숫자인데,
이 댓글 쓰고 나서 저는 몇 점인지 한번 봐야겠어요.

이 서재 지수에 의해 주간 서재의 달인 순위가 매겨지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없는 숫자라면 몰라도, 이걸로 순위까지 매겨지는데, 운영을 그렇게 하다니!
좀 어이가 없네요.

꼼꼼하신 시루스님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cyrus 2016-10-29 16:29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은 저보다 서재 활동을 오래 하셨으니 폐지된 알라딘 서비스를 기억하실 겁니다.

십년 전에 매주 ‘주간 서재의 달인’ 30위 안에 드는 회원에게 적립금 5,000원을 주는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서비스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순위 안에 들어서려고 주말 하루에 리뷰나 페이퍼를 도배질로 올리는 회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때 알라딘이라는 공간이 있는 줄도 몰랐고. 이런 서비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알라디너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적립금 혜택은 사라졌어도 문제점은 고쳐지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루에 리뷰, 페이퍼를 열 개 이상 올리면 서재지수 상위권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주간 서재의 달인’ 명단을 살펴보세요. 1번이 ‘물감’님이라는 회원의 서재인데, 어제 리뷰를 스무 편 이상 올렸습니다. 이건 솔직히 아니잖습니까? ㅎㅎㅎ

서재 글을 한 편도 올리지 않고, 다른 서재 글에 ‘좋아요’를 많이 누르기만 해도 서재지수 상위권에 오르는 서재도 봤습니다. 웃긴 게 북플이 이런 회원들을 ‘서재 활동을 많이 하는 회원’으로 소개합니다. 글 한 편도 안 썼는데도 말이죠.

감은빛 2016-10-29 20:13   좋아요 1 | URL
제가 알라딘에 가입한 건 2004년 초였던 같아요.
그 전에 사귀던 사람이 알라딘에 글을 쓰기만해도 적립금을 준다고,
당신은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열심히 쓰는 사람이니,
글 써서 그 걸로 적립금을 받아 책을 사면 좋겠다고 했죠.
그 얘길 들었던 건 아마 한 두 해 전이었던 것 같아요.
2003년 초에 이미 그 사람과 헤어졌으니까요.

잘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엔 5편 이상 글을 쓰면 얼마의 적립금을 준 것 같아요.

하지만 전 그리 열심히 글을 쓰진 않았어요.
알라딘 서재도 몇 년간 계속 방치해두었죠.

말씀하신 서비스도 저는 몰라요.
그 때 저는 알라딘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쨌거나 순위를 매기는 시스템이라면,
글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 더 유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서재 지수는 역시 보잘것 없네요.
글도 많이 쓰지 않았고, 좋아요(예전엔 추천이었죠.)도 많이 누르지 않았고,
댓글도 그리 많이 달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그냥 원할 때 글을 쓰고, 좋아하는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과 댓글을 나눠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수 따위 많아도, 적어도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알라딘은 이 시스템을 보다 더 상식적인 방식으로 바꾸면 좋겠네요.

cyrus 2016-10-29 20:59   좋아요 0 | URL
서재지수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집계 방식이 완벽하지 않고, 서재지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그냥 없는 취급하려고요. 이웃 간에 서로 얼굴 붉히지 않으면서 즐겁게 지내는 순간들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술작품을 비평하는 방법이 갖가지가 쏟아졌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평론가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 1912~1991)는 신화비평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에서 창작되는 모든 작품의 원형은 신화 속에 있다고 봤다. 신화비평가들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작품들에서 신화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비평의 해부》(한길사)는 역사주의 비평과 미학적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화비평의 골격을 제시한 프라이의 대표 저작이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 Essays on the Canadian Imagination)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라이의 문학비평서다. 프라이가 1940, 50년대에 발표한 10편의 비평 관련 에세이들을 모은 책으로 1971년에 출간했다. 번역본 초판은 1990년에 나왔다. 이 책의 부제는 ‘캐나다 문학비평’으로 되어 있다. 책의 주제에 맞게 설명하면, ‘캐나다 시문학 비평’에 가깝다. 프라이는 1950년대에 발표된 캐나다 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 시문학과 차별화된 캐나다 시문학의 특성을 확립한다. 여기서도 신화비평에 대한 프라이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라이는 신화가 ‘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열쇠’로 본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은 캐나다인의 문화적 정서를 함축하는 제목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살아가면서 키워진 캐나다인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집 《수잔나 무디의 일기》(The Journals of Susanna Moodie, 1970)에서 이 표현을 빌려 왔다. 애트우드는 현재 캐나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수잔나 무디(Susanna Moodie, 1803~1885)는 영국 식민지 시절 캐나다에 활동한 여성 시인이다. 애트우드는 여성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캐나다인의 정서를 표현했다.

 

 

 

 

 

 

 

 

《덤불동산》에 소개된 캐나다 시인들 전부 생소하다. 캐나다 시를 접해보지 않아서 프라이의 비평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책에 인명 색인이 없어서 캐나다 시인들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 책을 산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을 대충 넘기다가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시인으로 소개되었다. 코헨은 1956년에 《신화를 비교해봅시다》(Let Us Compare Mythologies)로 첫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시와 소설을 발표하다가 1967년에 첫 음반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는 시인으로서의 코헨을 호의적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교를 비판한다. 지나친 감정 과잉이 독자들의 시적 경험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프라이는 젊은 시인 코헨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유대 신화, 기독교 신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코헨의 시를 캐나다 시인 중 누구도 쓰지 못한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재미있게도 프라이는 시집만 비평하지 않는다. 캐나다 고등학생들의 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에 찬사를 표하기도 한다. 그는 시를 마음껏 쓰고, 공감할 수 있는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시를 쓰게 되면 시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시는 의지로 쓰이는 것이 아니며 사회 역시 의지로 시인을 배출할 수는 없다. 캐나다는 자국 내에서 좋은 시가 배출되길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의지가 교육에 나타나 있듯이 시를 읽을 때 훌륭한 시를 인식할 수 있는 세련된 시 독자층을 형성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를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발견하는 지점에 이르면 시 쓰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 하는 주 목적은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사랑을 기르고자 함이다. (《덤불동산》 88~89쪽, 글쓴이가 임의로 편집해서 인용했음)

 

 

캐나다와 한국은 닮은꼴이 있다. 두 나라 다 식민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자국의 문학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한다. 드디어 캐나다는 숙원을 이루어냈다. 2013년에 앨리스 먼로가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노벨상을 받는 두 번째 캐나다 작가 소식을 기대해볼 만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말만 되면 고통스럽다. 언론과 독자들은 매번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 사회는 ‘좋은 시인’이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강렬하게 열망한다. 시는 독자들에게 푸대접받는다. 시집은 많이 나오는데 시를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은 시를 정형화된 방식에 따라 ‘해석’하고 ‘암기’하는 독자층을 만들어낸다. 시를 읽는 방법을 모르는 독자들은 동시대 시인의 시가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로 규정한다. 시가 난해하다고 불평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상황은 단순히 시인들의 자질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시에 대한 사랑이 많이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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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ㅗ 덤불동산이란 책이 있었군요. 금시초문이었슴돠..
프라이 신화 비평 재미있죠.. 이 사람 영향으로 저는 시빌워도 신화에서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슴돠..

cyrus 2016-05-10 19:54   좋아요 0 | URL
《비평의 해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분량이 두껍던데요. 인간은 신화를 엄청 좋아하죠. 그래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좋은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특히 박근혜, 이명박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신화’ 만드는 일을 좋아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