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oby여도 좋고, anywhere여도 그만이다

 

 

 

 

 

 

 

 

 

작년 헌책방에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번역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번역본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누구나 제목만 보면 프루스트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 뒤편에 소설 원제가 있습니다. ‘Rue Des Boutiques Obscures’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작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84년 한국출판공사에서 나온 번역본입니다. 펼쳐 보면 세로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제가 자주 가는 헌책방에 가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오래된 책이라서 새 주인을 만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 책을 책장으로 모셔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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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6-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이라고 할 만 하네요

cyrus 2016-06-11 16:35   좋아요 0 | URL
의외의 발견이었습니다. 알라딘에 없고, 아무도 모르는 책을 찾는 것이 헌책방의 묘미입니다. ^^

yureka01 2016-06-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제목에서 받는 뉘앙스 차이가 참 크네요.ㅎㅎㅎ

어두운 상점의 거리라니,,,의외네요....

cyrus 2016-06-11 16:39   좋아요 0 | URL
역자 입장에서 번역보다 제일 힘든 일이 제목을 정하는 일일 겁니다. 원작 제목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의역을 하거나 역자가 임의대로 제목을 정합니다. ‘obscure’라는 단어를 불어사전을 찾아봤는데, ‘무명의’, ‘이해하기 힘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김화영 교수는 ‘어두운’으로 옮겼어요.

북깨비 2016-06-11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출판된 세로 쓰기 책이라고 하시니까 어릴 때 부모님 책장에서 보던 세로쓰기로 된 문학전집이 기억이 나네요. 읽진 않고 말그대로 그냥 보기만 봤던.. ^^;; 양장은 양장인데 지금 생각하면 종이질은 뭔가 골판지 같은 느낌? 한 권 한 권 사전처럼 삼면으로 된 상자에 들어 있었던 거 같아요. 요즘처럼 고급 판형은 아니고요 그냥 한자가 나와서 어른이 되야 읽을 수 있나보다 생각하고 저는 어린이 전집만 팠지요. ㅎㅎ 뭔지도 모르고 헤세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수레바퀴 아래서를 펼쳐본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될 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전집이 언제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그냥 처분하시게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요. ㅠㅠㅠ 이 책 보니까 옛날 생각나고 그러네요.

cyrus 2016-06-11 16:4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 작가의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전집인데 총 12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데, 책이 너무 오래 돼서 책 전체가 누렇습니다. 다행히 이 책을 버리지 않고, 박스에 담아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어렸을 때는 책의 가치를 몰랐는데, 세계문학에 눈을 뜨면서부터 뒤늦게 알았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꺼내기가 힘든 상태입니다. ^^;;

alummii 2016-06-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cyrus 2016-06-11 16:44   좋아요 1 | URL
누구나 책을 좋아하게 되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


yamoo 2016-06-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프루스트의 주저 제목처럼 당당히 표지에 인쇄되어 있네요...ㅎㅎ
이런 옛날책이라니~ 좋은 발견 하셨네요^^

cyrus 2016-06-11 16:51   좋아요 0 | URL
저 책을 처음 본 순간, 프루스트 소설 요약본인 줄 알았습니다. ㅎㅎㅎ

sslmo 2016-06-13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저 님 서재 명`개썅 마이 리딩`보고 리썅이 떠올랐다나 어쨌다나~(,.)
혹, 그런 의도로 지으신건 아니겠죠?
암튼 전 개리와 길, 음악 들으러 갈랍니다여~^^

전 세로버전 잘 읽어요. 소싯적엔 대부분 세로 읽기가 대세였죠~^^
암튼, 전 님 여러가지 의미루다가...
넘 멋진거 같아요~^^

cyrus 2016-06-13 21:52   좋아요 0 | URL
서재 이름은 아무도 안 볼 줄 알았는데 나무꾼님이 알아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ㅠㅠ

리쌍의 음악은 좋아하는데 가수와 전혀 관련 없어요. 인터넷 은어 `개샹마이웨이`에서 따온 겁니다. 뜻이 `남들이 뭐라 해도 내 갈 길 가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
 

 

 

길에 새끼 고양이가 힘없이 쓰러져 있더라.”

 

지나가 버린 수요일. 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내게 고양이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는 내가 오기를 엄청 기다렸는지 한동안 입에 꾹 담았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집 건너편에 어린이집이 있다. 그 날 오후에 어머니가 어린이집 앞을 지나가다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소리 나는 곳을 가봤더니 봉고차가 세워진 어린이집 울타리 쪽에 축 늘어진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 다리 부분만 하얗고, 몸 전체가 검은색 빛깔을 띤 고양이였다. 어미를 애절하게 부르는 새끼 고양이가 불쌍해서 어머니는 우유를 담은 작은 접시를 내놓았다. 새끼 고양이를 처음 발견한 지 한 시간 후에 어머니는 고양이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확인해봤다. 새끼는 우유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새끼 고양이의 상태로 봐서는 곧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농담으로 새끼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건강하게 키우자고 말했다. 내가 새끼를 직접 보니까 몸 상태가 생각보다 아주 심각했다. 새끼 크기가 남성 성인의 주먹만 했다. 새끼는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햇살과 공기를 마음껏 느끼는 듯한 자세였다. 그렇게 처절하게 바짝 올리던 고양이의 머리가 점점 바닥 쪽으로 내려갔다. 새까만 털 색깔 때문에 새끼가 눈 뜬 건지 감은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살짝 새끼의 머리를 건드려봤다. 새끼는 내가 가까이 오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새끼에게 더 이상 머리를 들 정도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받으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새끼를 살리고 싶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죽어가는 새끼를 그대로 놔두고 갈 수 없었다. 그래도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찾으러 다시 올 거로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제발 어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 집은 1층이다. 생각날 때마다 발코니 창문 쪽으로 가서 새끼 고양이가 발견된 장소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저녁에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봉고차 밑으로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그 고양이가 새끼를 찾으러 온 어미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새끼 고양이는 내가 마지막에 봤던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새끼 머리 주변에 개미 몇 마리가 기어 다녔다. 아마도 어미는 병든 새끼를 키울 수 없어서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전날 내가 봤던 얼룩무늬 고양이가 새끼의 진짜 어미라면, 새끼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그곳을 다시 찾아왔을 수 있다.

 

나는 새끼 고양이 사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120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콜센터 상담원에게 사체를 수거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길거리에 로드킬당한 개, 고양이 사체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지역 번호+120’으로 전화하면 된다. 사체가 있는 장소 위치나 주소를 정확히 알려주면 상담원이 해당 구청으로 바로 접수한다. 그러면 구청 소속 담당 직원들이 사체를 수거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물을 각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직접 사체를 땅에 묻기도 한다. 그런데 동물 사체를 땅에 묻는 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적발될 경우, 벌금을 내야 한다. 사체에 질병을 유발하는 세균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사체에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

 

 

 

 

 

 

 

 

 

 

 

 

 

 

 

 

 

산속에 동물 사체를 발견하면, 그대로 놔두면 된다. ‘자연의 장의사들이 사체 부패를 돕는 역할을 한다. 사체는 송장벌레, 딱정벌레, 구더기가 좋아하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우리는 사체 주변에 달라붙은 구더기나 동물들을 혐오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즐거운 생명의 축제다. 다른 생명의 죽음은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삶의 영양분이 된다. 만약에 송장벌레와 구더기가 너무 싫어서 모조리 박멸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과연 우리는 구더기 없는 깨끗한 세상을 살게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썩지 않은 동물 사체 그리고 인간의 시체가 많아진다. 사실 인간은 구더기, 송장벌레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남긴 쓰레기, 그리고 죽으면 남게 될 육신을 그들이 뒤처리해주니까.

    

 

 

 

 

 

 

 

 

 

 

 

 

 

 

 

 

 

인간도 언젠가 죽는다. 죽음 앞에 마주치면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래서 세월의 힘을 받으면서 생긴 신체 변화를 느끼면 한숨을 푹 쉬거나 애써 잊으려고 한다.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타인의 약점마저 불편하게 느낀다. 이는 차별과 억압, 그리고 혐오라는 감정으로 형성된다. 옛날 의학 교수는 인체 해부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옛날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가 발견한 해부학 지식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레노스 해부학 지식의 결함이 많았다.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만든 엉터리 지식을 의학 교수는 답습하고,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기독교 중심의 유럽 사회에서 인체 해부는 종교 규율을 어기는 금기 행위였다. 합법적으로 시체에 손을 대고 해부하는 일은 비천한 미용사들의 몫이었다. 미용사가 시체의 배를 가르면, 의학 교수는 해부한 시신에 지휘봉을 가리키면서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인체 해부를 혐오하는 의학교수의 마음속에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이 컸을 것이다. 의학교수의 원초적 혐오는 차별이 되어 시체를 해부하는 일을 맡은 미용사의 존재를 배제했다. 이로 인해 해부 경험이 많은 미용사가 외과 의사가 되는 일이 드물었다. 의사들은 의사 일을 겸하는 미용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혐오가 차별로 변형되는 위험한 감정은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 깊게 내재화되어 있다. 시체를 대할 때, 그리고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시체 앞에 벌벌 떨면서 공포심을 느끼는 자는 시체를 정면으로 대하는 자를 혐오하고 차별한다. 사람들은 직원들이 동물 사체를 보신용으로 해먹거나 식당에서 판매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편견이다. 현행법상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 사체는 생활폐기물로 분류된다. 동물 사체 수거 직원들이 폐기물을 보신용으로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근거 없는 편견은 궂은일을 하는 직원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처럼 인간은 혐오라는 감정에 쉽게 휘둘려서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타자를 차별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믿는다. 혐오는 차별을 만들어내는 위험한 감정의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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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6-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역번호120 알아둬야 겟네요.
사드의 유언은 자신의 시체를 뭍지말고 버리라고 했는데, 본받고싶은 유언이었습니다.

시체를 산에 놔두면 자연이 알아서 거두어가거든요 ^^

cyrus 2016-06-11 10:45   좋아요 0 | URL
사드가 네크로필리아를 위해서 큰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요? ㅎㅎㅎ

‘지역번호 128’으로 전화해도 되는데,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래서 120을 눌렀는데, 통화 연결되었습니다. ^^

표맥(漂麥) 2016-06-1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역 번호 120. 기억하겠습니다.^^

cyrus 2016-06-11 10:46   좋아요 0 | URL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동물 사체를 발견하면 ‘누가 치우겠지?’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럴 때 120으로 전화하면 됩니다. ^^

페크pek0501 2016-06-1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0을 누르는 것, 배워 갑니다. 몰랐어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동물이 가엾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cyrus 2016-06-11 10:50   좋아요 0 | URL
동물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이 아픕니다. 왠지 모르게 죄책감도 느낍니다.

yureka01 2016-06-1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견 유기묘들이 너무 많아요..아고...그것들도 다 생명인데.....

cyrus 2016-06-11 10:53   좋아요 1 | URL
최근 뉴스에서 동물 보호소가 부족한 국내 실정을 보도하더군요. 저도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정말 끝까지 보살필 자신이 없어서 키우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책 읽느라 움직이기 귀찮은 성격의 사람은 동물과 같이 놀지 못해요. 반려동물을 두 마리 이상 보살피는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

찔레꽃 2016-06-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마나님께서 그 고양이를 봤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봤어요. 음.................................

cyrus 2016-06-11 10:57   좋아요 0 | URL
멀쩡한 새끼 고양이는 어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병든 상태가 아니라면 어미가 새끼를 데리러 다시 온다고 합니다. 수요일에 본 새끼 고양이는 딱 봐도 허약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의 새끼를 만나면 갈등이 됩니다. 보살펴주고 싶은데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 같고, 그냥 모른 척 하고 가면 죄책감이 들어요.

yamoo 2016-06-1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 정보네요~! 저두 배워 갑니다..ㅎ

파트라슈 2016-06-11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기된 개나 고양이 구조해달라고 119에도 전화 많이 하는데 고양이 새끼같은 경우 멀쩡하게 어미가 새끼쳐서 잘 기르고 있는 것을 괜히 철없는 사람들이 구조해달라고 119전화해서 사람들이 손으로 건드려놓으면 고양이 본능상 자기새끼들한테서 인간들 냄새 난다고 물어죽여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나 고양이 놔두면 그냥 알아서 다 잘 살아갑니다. 유기견이나 들고양이도 얼마든지 도시에서 산에서 들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일일히 모두 관리하고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 불쌍해보일진 몰라도 개나 고양이 자신들의 입장에선 새끼가 도시의 시궁창에서 태어나 자라는게 이상할 것도 없죠. 그냥 그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다만 들고양이나 유기된 개가 사람한테 위험할수도 있고 전염병의 매개체가 될 수 있으므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한 관찰과 관리는 필요하긴 하죠. 그리고 하루빨리 개나 고양이를 도축법에 포함시켜 개나 고양이의 도축도 법적으로 규제되고 관리되어야 합니다. 먹지 마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왕 먹을거면 법적으로 확실히 규제해서 위생적으로 먹는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cyrus 2016-06-12 18:28   좋아요 0 | URL
저도 멀쩡한 상태의 새끼 고양이를 어미 없다고 해서 몰래 집으로 데려오는 것에 반대합니다. 사람들이 새끼가 귀여워서 키우고 싶어하는데 다 자랄 때 유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고양이의 삶을 망치는 것입니다. 파트라슈님 말씀처럼 그냥 놔두는 것이 좋습니다.

孤로운늑대 2016-06-26 11:40   좋아요 0 | URL
˝ 먹지 마라고는 할 수 없으니...˝
먹지말라고 할 수도 있지요. 복날 꼭 개나 닭을 먹어야 하나요? 나는 채식주의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개를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하긴 고양이를 잡아먹는 미친 인간들도 있으니...
타협안 => 개고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제발 때려잡지는 맙시다. 여러분이 식인종에게 잡혔을 때 몽둥이로 때려죽여야 맛있다고 무작정 패거나 산채로 뜨거운 물에 끓이면 좋겠어요?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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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1. 일본 관동 지방 남부에 대지진이 엄습했다. 사람들은 미처 불도 끄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들리는 땅, 타오르는 화염보다 유언비어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일본 정부는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결과 무고한 재일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스스로 사실로 단정하고 군경을 동원해 직접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조선인들을 나는 조선인입니다라는 팻말 옆에 묶어놓기도 했다. 그들의 학살 방법은 잔인함과 광기의 극치였다.

 

 

 

 

 

 

관동 대학살은 극한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두려움과 좌절을 힘이 약한 상대에 대한 분노로 전이시켜 배설하도록 만든 전형적 정치 선동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듯 역사는 반복된다. 불행히도 잘못된 역사 또한 그렇다. 일본에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란 극우 단체가 있다. 이들은 반한(反韓) 나아가 혐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데 거침이 없다. 한국인에 대해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조선인은 기생충’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들등 부당하게 한국인을 모욕하는 피켓과 구호가 난무한다. 재특회의 구성원은 젊은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저임금의 시간제 근로자 또는 최근 갑자기 늘어난 계약직 근로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좌절감을 분출하는 것이 이들 단체의 목적이다.

 

인간은 늘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선택의 부재, 대안 없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심하면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다. 우리는 그것을 아예 모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아니면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거부해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려움에 유도되어 행동한다. 그럴수록 찐득한 혐오의 그림자가 우리 몸에 달라붙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오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동성애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비합리적인 혐오와 공포를 호모포비아(Homophobia)라고 명명했다. 동성애란 말만 들어도 왠지 소름이 끼치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성애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감정이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세균이 분열하면서 번식하는 것처럼 호모포비아 분위기가 확산하면 혐오범죄로 이어진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때리거나 심지어 죽인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과 외국인, 특정인을 비하할 때 등장하는 냄새나 분비물에 관한 표현은 대표적인 혐오 발언 사례다.

 

 

 

이 책의 두 번째 글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임옥희 편) 27~28쪽에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핵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소개되었다. 혐오와 수치심의 두꺼운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27~28쪽을 읽으면 된다.

 

 

 

인터넷에 서식하는 수많은 남성이 여성이라는 단어만 보면 부모님의 원수를 만난 듯이 발광한다. 여성의 성기와 벼슬아치를 합친 보슬아치란 비하 표현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보지 달린 게 무슨 벼슬이냐라는 의미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김치녀는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폄하해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단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지역감정에 휘둘렸다. 특정 지역이나 출신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며 편을 가르고 감정싸움을 벌여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은 전쟁 양상이다. 호남 사람들을 홍어로 비하한다. 이런 지역적인 특성을 이용해 삭힌 홍어가 풍기는 냄새를 호남 사람들의 인격과 동일시해서 비하하는 데 쓴다. 광주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전사자의 시신 썩는 냄새를 진압군이 홍어 삭힌 냄새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희생자들을 빗댄 통구이등도 경상도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된다.

 

 

 

 

 

 

혐오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부정적 수치심은 자기 파괴적 힘을 가진다. 오랫동안 혐오 발언에 시달렸던 재일 조선인들은 극우 세력의 무차별 폭력 및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낙인은 재일 조선인들의 활동을 제약한다. 차별과 강압의 부당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려면 일본인들의 보복을 감당해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은 언제 또 다시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무차별 폭력이나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부정적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상실된다. 반면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오토코구미의 행동대장 다카하시는 혐한 시위를 보고 있으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다카하시는 한때 반한 감정을 가진 우익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고집하면서 재일 조선인을 차별하는 재특회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껴 오코토구미에 들어가게 됐다. 이처럼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혐오의 감정이 사회적 약자에게만 광적으로 표출하는 잘못된 일본 사회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는 수치심도 긍정적으로, 건설적 방향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독특한 사례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들 기준대로 종북타령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고, 테러방지법 시행을 찬성한다. 이미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테러방지법을 도입하자고? 그들은 국가보안법으로 대통령을 음해하는 종북 세력을 처벌하고, 테러방지법으로 간첩 활동을 하는 종북 세력의 군사적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무고한 진보 세력을 간첩으로 만들어버린 사례가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실체 없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에 사람들 머릿속에 공산당은 빨갱이 괴물로 자리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 세력은 좌파 세력을 극도로 혐오해서 법적으로 통제하려 든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한다. 일베의 혐오 발언의 심각성을 지적하면 표현의 자유운운하면서 일베를 옹호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우파의 이중성. 우파인 나도 그들 보기가 부끄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라고 착각한다. 자신들의 단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정신승리'에 가까운 변명만 늘어놓는다.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이 있어야 공동체의 도덕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하위 집단에 대한 지배 집단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반대한다. 집단적 혐오는 파괴적이다. 역사적으로 지배 집단은 혐오라는 감정을 이용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관동 대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혐오 감정을 위악적으로 배설해서 생긴 비극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심각하다. 사회는 다양성과 자유의 목을 졸라 여기저기에 족쇄를 채운다. 그리고 차이차별로 키우고 모든 걸 정상비정상으로 나누어 힘의 서열을 매긴다. 부당한 차별은 사회 내의 정의와 평등에 어긋난다. 편견에서 비롯된 혐오가 전염된 사회는 자유주의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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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6-0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련 소개 글 보면
혐오, 증오에 관심 많으신 거 같습니다. ^^

cyrus 2016-06-10 13:12   좋아요 0 | URL
내용, 주제가 겹치는 책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진짜 독서의 목적은 이벤트 응모입니다. ㅎㅎㅎ

2016-06-09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0 13:14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도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요.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갑질하거나 분노를 표출합니다.

북깨비 2016-06-10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다 라는 대목을 읽으니 문득 미미여사의 외딴집이 생각납니다. 기나긴 인류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희생양들이 있었을까요. 끔찍합니다.

cyrus 2016-06-10 13:18   좋아요 1 | URL
유언비어와 편견을 맹목적으로 믿는 대중심리가 정말 무섭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침묵합니다. 악성 루머를 만들고 퍼뜨리는 자는 따끔하게 법으로 잡아 족쳐야합니다.

페크pek0501 2016-06-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27~28쪽을 읽으면 된다.˝
- 그래서 책을 들춰 봤어요. ㅋ

집단 망상이라는 것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겠습니다.

cyrus 2016-06-11 11:05   좋아요 0 | URL
27~28쪽에 마사 너스바움이 정의한 혐오와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글쓴이가 700쪽 넘는 책 한 권의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집단 망상의 힘이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잘못한 게 없다고’라고 착각합니다.

 

 

 

 

 

 

 

 

 

 

 

 

 

 

 

 

 

 

 

 

 

 마르시아스를 아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시아스(Marsyas)는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피리를 발견했다. 마르시아스는 피리를 주워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피리에 살짝 숨을 불어넣었는데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피리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마르시아스 주변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피리 연주에 감탄한 사람들의 칭찬에 마르시아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주변의 칭찬에 으쓱한 그는 음악의 신과 겨루어도 지지 않으리라는 우쭐한 생각을 품었다. 사실 마르시아스가 주운 피리는 아테네 여신의 손길이 닿은 특별한 피리였다. 마르시아스는 자신의 연주 솜씨가 신령한 피리 덕인 줄도 모르고 우쭐댔다. 오만한 마르시아스는 음악의 신 아폴론과 연주 실력을 겨루고 싶어 했다. 무모하게 신에 도전하는 자는 불행하고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르시아스와 아폴론 연주 대결의 심판을 맡은 뮤즈들은 아폴론의 손을 들어줬다. 연주 대결에 패한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이 내린 형벌을 받았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산 채로 나무에 묶어 살가죽을 벗겼다.

 

소설가는 자신의 글쓰기가 죽음을 불사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창조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밀레니엄을 맞아 국제화시대에 맞춘다며 새로운 필명을 만들었다. 마르시아스 심. 소설가의 필명은 신화 속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기존의 순문학에서 좀처럼 드러내길 꺼렸던 ‘성’을 주제로 작품을 써내려갔다. 그의 도전은 성공했다.

 

 

 

 

 

하지만 소설가는 오만했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줄 착각하면서 살았다. 그는 내연녀의 얼굴에 주먹을 치면서 이렇게 외쳐댔다. “너 같이 거짓말 하는 사람은 신에게 벌을 받아야 한다. 내가 신 대신 벌을 주겠다.” 소설가는 내연녀를 폭행하고 감금을 시도한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마르시아스는 신 앞에 도전한 오만한 대가로 끔찍한 형벌을 당했다. 마르시아스 심은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벌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소설가’라는 분신이 벗겨지는 천벌을 받았다.

 

 

마르시아스 심, 심상대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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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6-0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마르시아스 심님이 이런분이였군용.

예명대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으셔도 될법한걸요 ^^

cyrus 2016-06-10 13:19   좋아요 0 | URL
징역형이 풀려나면 다시 작가 활동을 재기할 것 같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요. ^^;;

2016-06-09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0 13:22   좋아요 1 | URL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출판업 종사자들은 작가들의 민낯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거만한 성격의 작가들도 있겠죠?

원더북 2016-06-09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적절하고 절묘한 글을 쓰셨습니다!

cyrus 2016-06-10 13:24   좋아요 0 | URL
심상대 작가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필명이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루쉰P 2016-06-1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이네요 ㅠ 종은 글 입니다 ㅎ

cyrus 2016-06-10 13:27   좋아요 0 | URL
더 최악인 건 이 소식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종편 뉴스는 작가 실명을 알려주지 않은 채 이 사건을 비중있게 보도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stella.K 2016-06-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만하면 점잖은 줄 알았더니 소설가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군.
그 예명이 그런 뜻이 있었군.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본명 쓰지 무슨 마르시아냐 킥킥 웃었던 적이 있었다.ㅠ

cyrus 2016-06-10 17:13   좋아요 0 | URL
제가 중학생 2학년 때 마르시아스 심을 처음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냐면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1권 아니면 2권을 읽었는데 마르시아스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글에 이윤기 씨가 마르시아스 심을 언급했어요. 필명이 독특해서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어요. 이윤기 씨가 작가의 앞날에 큰 기대감을 느꼈는데,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네요.

페크pek0501 2016-06-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가 어찌 그럴 수가 있나요?

이럴 때 인간이란 해석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만 그럴까요?

cyrus 2016-06-11 11:05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중견 소설가 A씨’라고 나왔습니다. 누군지 정말 궁금했어요. 종편 뉴스도 작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는데, 소설가 수상 이력을 소개하더군요. 이건 A씨의 정체가 궁금한 시청자들에게 떡밥을 준 거죠. ㅎㅎㅎ 인터넷 뉴스는 실명을 거론했어요.

아마도 작가는 필명의 의미에 사로잡혀서 자신도 신인 줄 알았는가봐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신의 가면`을 썼을 겁니다.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이 만들어 놓은 여러 허상 속에 갇혀 지내왔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구조보다 사회 제도적 문제와 사회제도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다. 굳이 페미니즘의 논의를 빌리지 않아도,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화 된 성의 정체성이 인간에게 하나의 억압이고 굴레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읽고 쓸 줄 아는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남자들은 지식을 향유할 수 권리를 독점했다. 글쓰기의 역사는 남근중심주의와 함께해왔다. 여자가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권위주의(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책을 읽은 여자는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리고 똑똑해진다. 여자는 책을 만남으로써 남성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자신의 것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동문선의 메두사의 웃음/출구에 수록된 출구는 원래 카트린 클레망 공저의 새로 태어난 여성에 있는 글이다.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여성적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역사 속에 부각시켜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을, 자연 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곳은 프랑스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가부장제 담론을 해체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에디시옹 데 팜(Édition des Femmes)’이라는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출판사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여성출판사. 에디시옹 데 팜은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출판사로 프랑스 페미니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실 1970년을 기점으로 프랑스 페미니즘은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형성되었는데, 글의 주제와 벗어난 내용이라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참고하면 된다) 엘렌 식수는 에디시옹 데 팜의 설립을 환영했으나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규범을 거부하여 자신의 사회적 위치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는 이분법적 체계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식수가 말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평등권 쟁취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우선 여성 자신의 내적인 성찰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찾아내 종이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은 남성 중심의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여성 고유의 정신적·신체적 영역을 부각하는 것이다. 식수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에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작가가 많지 않다고 봤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장 주네, 이 세 사람만이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프랑스 작가로 언급했다.

    

 

    

 

 

 

 

 

 

 

 

 

 

 

 

 

 

철학자의 서재에 수록된 <‘알파걸은 결코 모르는 여성의 비밀>을 쓴 연효숙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남성적 글쓰기를 하지 않은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한다. 그런데 여기에 콜레트가 빠지면 여성적 글쓰기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식수는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국내 작가 또는 비평가들은 여성적 글쓰기 사례로 영미 작가들만 편중되어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여성적 글쓰기가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쏙 뺀 채 말이다.

    

 

 

 

 

 

 

 

 

 

 

 

 

 

 

    

 

표지가 없는 책은 꼴레트-바가봉드(예전사, 1993),

'바가봉드'는 방랑하는 여인》의 원제.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은 주인공 르네 네레를 의미한다. 르네의 직업은 경력 3년 차인 뮤지컬 겸 연극배우다. 특히 팬터마임 공연에 능숙한 솜씨가 있다. 사실 콜레트도 팬터마임, 무언극 배우로 활동했다. 콜레트는 자신의 삶을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겼다. 르네는 그야말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전남편과 이혼하여 자유로운 독신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남성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막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르네는 예전과 같은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르네는 남편의 권위에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한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르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무엇인지 고뇌한다. 이 장면이 차지하는 분량은 그리 짧지 않다. 여기서 콜레트는 여성적 글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 “... 이 단어를 되뇌며 마음에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 검붉게 칠하고, 눈 주위에 번들번들한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다. 눈가의 테가 녹기 시작한다... 얼굴 나머지 부분까지 녹아내리도록 두어 버릴까? 그러면 내 모습에는 긴 눈물자국 같은 꽁꽁 얼고 찐득찐득한 얼룩만이 남을까?” (5~6)

 

* “오늘 밤 난 이 긴 거울과 마주 대하고 그토록 열심히 피했다가 받아들이고 도망쳤다 다시 붙들리던 독백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무리 기분을 돌리려 해도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12)

 

* “난 신비스럽게 반사되는 방 안의 거울 속에서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의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연기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지? 그건 관객들이나 내 친구들이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하여 등급을 부여하기를 예의상 거절하려는 미묘한 뉘앙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은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나, 글을 쓰는 사치, 쾌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나... 그런데도 모두에게 그렇게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14~15)

 

 

 

집에서 쓸쓸히 거울을 바라보는 르네의 모습은 남성들을 위한 가장 무도회가 끝난 뒤 휴게실에서 홀로 남은 여장 배우의 쓸쓸한 상황과 비슷하다. 르네는 남자들의 분위기에 맞추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염증을 느낀다. 그러면서 진짜 여자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미 자신을 향한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진 르네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르네는 자신의 독백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도 자기 자신을 글로 쓰는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르네를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로 본다. 르네가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배우 일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여성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따가운 시선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남성 비평가들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였던 그녀의 전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는 자신의 필명으로 콜레트의 작품을 발표했다. 콜레트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클로딘 시리즈>를 연달아 써야만 했다. 빌라르의 아내였던 콜레트가 이 시절 썼던 작품들은 그녀가 원하는 진짜 글이 아니었다. 빌라르와의 이혼은 콜레트가 여성적 글쓰기를 실행하기 위한 결정적인 출구였다.

 

식수는 남성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로운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와 마음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검열했다. 오래된 억압 속에 살아간 여성은 자신 고유의 신체와 마음 심지어 언어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생명력이 상실된 여성은 목이 잘려나간 메두사다. 그녀의 눈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한다. 남성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메두사를 두려워했다. 메두사는 원래 괴물이기 전에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런데 남성 같은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메두사의 웃음’ 29) 

 

 

예나 지금이나 남성은 생명력 있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을 아무 이유 없이 성격이 못난 벌레또는 괴물로 만들어서 질투하고 혐오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반이성적으로 여성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기이한 사회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당당하게 글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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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8 18:3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이다.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면 풍성한 경험과 사유의 기록들을 채워가면서 사는 것이 하나뿐인 인생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ora 2016-06-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트♥

cyrus 2016-06-08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콜레트는 멋진 언냐입니다. ㅎㅎㅎ

수이 2016-06-09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전인데 집에 가서 다시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