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관한 책은 정말로 드물다.

제목에 냉장고가 들어간 책은 대부분이 요리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냉각 기술을 대표하는 냉장고를 둘러싼 온갖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류는 물건을 뜨겁게 하는 방법을 비교적 빨리 배웠다.

마찰을 일으키거나, 불을 지르면 된다.

그러나 차갑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차갑게 하는 방법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근대 과학이 거의 성숙 단계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ㅡ <냉장고의 탄생> 에서


 


( 냉장고의 탄생 / 톰 잭슨 지음 / 김희봉 옮김 / 35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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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움을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류는 불을 통제하고, 차가움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강가에 얼어있는 얼음을 채취해 교역하기 시작했고, 부를 축적하기도 했으며, 더 오랫동안 얼음을 온전한 상태로 저장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냉장고로 가는 길목에는 최초라는 과학적 발견이 따라붙었으며, 이러한 발견은 냉장과학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차가움에 대한 갈망은 단순한 호기심에서부터 학문적 고찰과 연구, 우연성과 영리 목적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으며, 인류의 흥망성쇠와 같은 맥락으로 좀 더 세분화되고 치밀해졌다.

 

1883년, 캘커타 사람들은 프레데릭의 배에 실린 얼음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갈망했지만 1880년 디쿠기스는 '냉장혐오증'에 시달리는 파리 사람들을 대신해 사악한 냉장고를 거리로 끌고 나와서 산산조각냈다. 차가움이 마법에서 과학으로 넘어갈 시점부터, 사람들은 차가움에 대한 열망과 두려움이라는 양분된 모순에 빠진 듯하다.

 

어떤 도시건 세끼 식사를 공급하지 못하면 무정부 상태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인즉슨 냉장 체인이 끊어지면, 사회는 붕괴된다는 뜻이다. 냉장고의 전원을 끄는 것이, 그 어떤 테러보다 더 강력하고 빠르게 이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토록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하게 냉장고에 길들여져 있다. 현대 문명은 냉장고에 의존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수많은 사람과 과학, 인류의 역사가 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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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시원한 과학 이야기에 도전하세요!

<냉장고의 탄생>은 고대 문명이 시작된 수메르에서부터

현대를 지나 미래까지 냉장고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가늠합니다.

냉장고의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지금 바로 신청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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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15분을 모시며, 모집 마감은 6월 19일 일요일입니다.

서평 마감기한은 7월 10일 일요일, 우수서평 마감기한은 7월 3일 일요일입니다.

7월 3일 일요일까지 서평을 남겨주신 분들 가운데,

우수서평자 두 분을 선정하여 원하시는 MID 도서 한 권을 선물해드립니다.


신청은 본 게시물 하단에 댓글로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서평은 1곳 이상의 개인 SNS와 2곳 이상의 온라인 서점에 남겨주셔야 합니다.

올려주신 서평은 MID 온라인 채널(독자서평 코너 등)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참고해 주세요.

(특히 처음 지원하시는 분께서는 꼼꼼하게 읽어주신 후, 신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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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루 2016-06-1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장고의 기원과 원리,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는 재미있는 과학교양서 같네요. 신청합니다.

cyrus 2016-06-15 21:41   좋아요 0 | URL
여기 신청하는 것이 아니고, MID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신청해야 됩니다.

물루 2016-06-15 21:4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케익을 굽는 여자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 새와물고기 / 199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먹다. 듣기만 해도 좋은 말이다. 음식 먹는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먹는 것’은 삶을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생리적 행위다. 그러나 ‘먹다’가 꼭 좋은 의미의 단어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여자를 (따)먹다’ 현대에 와서 생겨난 단어 같지만,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불교 찬가인 <월인천강지곡>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여자의 정조를 빼앗다’를 속되게 표현한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여성과의 성관계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남성은 지배 욕구가 강해 소유와 정복에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과 무관하게 다른 여성에게도 성적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정복 욕구와 자손을 널리 퍼뜨리고 싶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반응이다. 인간, 아니 남성이 이룩한 대부분 문화 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섹스와 관련된 언어 표현들이 차고 넘친다.

 

만약에 《The Edible Woman》이라는 제목의 영어권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Edible’는 ‘먹다’의 형용사 표현이다. 특히 어떤 음식에 독성 물질이 함유하는지를 확인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정확하게 의미를 설명하면 ‘독성 성분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이 된다. ‘The Edible Woman’을 직역하면 ‘먹을 수 있는 여성’ 혹은 ‘식용 여성’이다. 우리말로 바꾸기가 상당히 곤란한 제목이다.

 

 

 

 

 

《The Edible Woman》는 캐나다 출신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1969년에 발표한 첫 장편 소설 작품이다. 그녀의 대표작 《시녀 이야기》가 국내에 널리 알려져서 흔히 이 작품이 애트우드의 첫 장편으로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시녀 이야기》는 애트우드의 여섯 번째 소설이며, 1985년에 발표되었다. 애트우드는 1961년 <Double Persephone>라는 시집을 발표해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녀의 시집은 캐나다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네 권의 시집을 발표한 후에 애트우드는 첫 장편을 선보였는데, 그 작품이 바로 《The Edible Woman》이다.

 

 

 

 

 

 

 

 

 

 

《The Edible Woman》는 의미 있는 애트우드의 첫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93년에 《케잌을 굽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는지 헌책방에서 구하기 힘들고, 심지어 이 책을 소장하는 공공도서관도 많지 않다. 이 책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오랜 탐색 끝에 《케잌을 굽는 여자》가 대구남부도서관 서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케잌’을 쓰면 안 되고, ‘케이크’로 써야 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책 제목을 언급할 때 ‘케잌’으로, 본문에는 ‘케이크’로 쓰겠다)

 

소설은 주인공 마리안 맥컬핀(Marian MacAlpin)의 1인칭 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리안은 세이머 설문조사 회사의 직원인데 설문조사 질문을 만드는 일을 한다. 애인슬리(Ainsley Tewce, 번역본에는 ‘애인슬리’로 표기되었다)는 마리안과 같은 집에 사는 룸메이트 여성이다. 두 여성이 사는 집에 가끔 마리안의 남자친구이자 약혼자인 피터(Peter Wollander)가 찾아온다. 피터란 인물은 마리안의 속마음을 간파하지 못한 눈치 없는 놈으로 등장한다. 피터와 마리안은 성격 차이로 종종 말다툼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남녀 커플을 보는 것 같다. 마리안과 애인슬리과 같은 대학교 친구인 클라라(Clara Bates)는 죠(Joe)와 결혼하여 벌써 세 명의 아이를 둔 유부녀다. 마리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두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한다. 애인슬리는 훌륭한 혈통에다가 외모가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을 낳는 것을 원한다. 마리안은 애인슬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크게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혼관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 고민한다.

 

마리안은 주변 환경에 따른 심적 변화가 유독 큰 인물이다. 한 남편의 아내이자 세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클라라를 지켜보면서 마리안은 모성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죠가 클라라 대신에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엄마보다 아빠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은 아이가 성장하면 정신적으로 혼란이 느낄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실 마리안의 착각은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기우(杞憂)다. 한때 그녀는 모성애가 여자가 꼭 갖춰야 할 여성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마리안은 자신의 여성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여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시선과 반응에 점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리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무척 불편하게 여긴다. 그녀 주변에는 피터, 애인슬리, 거기에다가 그녀를 좋아해서 따라오는 대학원생 던컨(Duncan)까지 합세한다. 마리안은 그들에게 둘러싸일수록 예민한 감정을 드러낸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마리안이 겪는 심적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마리안의 심리 상태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독자는 직접 마리안이 되어 그녀가 무엇 때문에 불만을 느끼는 건지 이해해야 한다. 그녀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고 파악하는 것이 《The Edible Woman》을 읽을 때 독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마리안은 고정된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억압받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무척 외롭다. 마리안은 혼자 침대 밑에 숨어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 실망한 피터는 그녀가 ‘여자다움’을 거부한다고 화냈다. 피터가 생각하는 ‘여자다움’은 ‘정상적인 여성성’이다. 누구나 가구 또는 옷장 안에 숨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가끔 어둡고 좁은 공간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할 때가 있다. 마리안에게 침대 밑 좁은 공간은 편안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일 수 있다. 그런데 피터는 마리안의 행동을 ‘비정상적 여성성’, 속되게 말하면 ‘미친 여자’가 할 법한 일로 생각한다. 여성의 자유를 누리는 공간의 의미 자체를 무시해버린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여성의 몸과 정신을 소유한다. 남자는 늘 여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여자다움’을 가졌는지 눈으로 쓱 확인한다. 남자가 공통으로 생각하는 ‘여자다움’이란 일단 예쁘고, 몸매가 좋아야 한다. ‘여자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면 힘과 폭력을 동원하여 여자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반대로 ‘여자다움’이 없는 여자를 만나면 마치 피하고 싶었던 불량품을 만난 것처럼 불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남성들의 혐오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여성은 일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진다. 몸매에 대한 집착 혹은 혼자 감당하지 못할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거식증에 시달린다. 마리안도 거식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 여성을 ‘남성을 만족하게 해주는 상품’ 또는 ‘수동적인 인형’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세계를 감당하기 위해서 마리안은 최후의 방법을 실행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과 닮은 케이크를 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먹여 보는 일이다.

 

이제 밋밋한 하얀 육체가 완성되었다. 접시 위에 부드럽고 달콤하게 그리고 뚜렷한 형태가 없이 누워 있는 그것은 약간 음란해 보였다. 그것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케이크 데코레이터에 밝은 핑크색 아이싱을 채웠다. 처음엔 비키니를 칠해 넣었지만 너무 빈약했다. 가운데 몸통 부분도 칠했다. 이제 보통 수영복같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히 그녀가 원하는 모양은 아니었다. 계속 위아래로 넓혀가서 원피스 모양이 되었다. 입만 있고 머리카락도, 눈도 없는 케이크는 괴상하게 보였다. 케이크 장식기를 씻고 초콜릿 아이싱을 채웠다. 코와 속눈썹이 많이 달린 눈, 그리고 양쪽 눈 위에 각각 눈썹을 그려 넣었다.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마치 그것이 미사에 사용하는 신성한 어떤 것인 것처럼, 받침으로 받쳐진 성상이나 화관이나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받쳐들고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접시를 피터 앞에 있는 커피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키려고 했어요.” 그녀(마리안-서평 작성자 주)가 말했다. “나를 당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난 당신에게 줄 대체품을 만들었어요.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것으로요. 이것이 당신이 내내 정말로 원했던 것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포크를 드리죠.”

 

(《케잌을 굽는 여자》 397~398, 400쪽 편집 인용)

 

 

 

 

피터는 마리안이 만든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마리안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보는 순간, 한동안 잊어버린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케이크를 포크로 떼어내 먹기 시작한다.

 

 

“마리안, 거기 있는 게 뭐지?” 그녀(애인슬리-서평 작성자 주)가 걸어와서 케이크를 내려다 보았다.

 

“여자잖아. 케이크로 만든 여자!” 그녀는 마리안을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마리안은 케이크를 씹어 삼겼다. “좀 먹어봐.” 그녀가 말했다. “맛이 정말 좋아. 오늘 오후에 내가 만든 거야.”

 

애인슬리의 입이 마치 그녀가 본 모든 것의 의미를 꿀꺽 삼겨 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물고기같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마리안!” 그녀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넌 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있구나!”

 

마리안은 다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자는 한쪽 다리가 없어진 채 여전히 멍한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었다. “당치 않아.” 그녀가 말했다. “이건 케이크일 뿐이야.”

그녀는 몸통에 포크를 찔러넣어 깨끗하게 머리로부터 몸통을 잘라냈다.

 

(《케잌을 굽는 여자》 401~402쪽)

 


유일하게 마리안의 케이크를 먹은 사람은 던컨이었다. 마리안은 던컨이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먹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케이크를 다 먹어치운 던컨이 말 한마디를 남기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고마워요.” 그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맛있었어요.” (‘Thank you,’ he said, licking his lips. ‘It was delicious.’)

 

자신의 대체물인 케이크가 남자인 던컨에게 먹히면서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마리안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독자에게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리안은 자신과 닮은 케이크를 만들어 ‘여성이 남성에게 먹히는 관계’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겠지만, 케이크를 굽는 행위만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극복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남성 중심 사회에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숙명적인 고난이다. 여자는 언제 어디서든 남자에게 먹히기 쉽다. 남자는 여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 뒤에 ‘골뱅이’로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여성을 먹은 소감을 영웅담을 들려주듯이 떠벌린다. 이런 세상에 여자들이 누굴 믿고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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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6-1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인천강지곡에 그런 말이 있었군요.. 예전에 중세국어문법 공부한다고 형태소 분석 열심히 했었는데 그때는 미처 못 봤네요.. ^^;;

cyrus 2016-06-14 20:29   좋아요 0 | URL
성적 표현의 유래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습니다. 출처가 인터넷이라서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

아무 2016-06-14 20:34   좋아요 0 | URL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니까 어원으로 월인천강지곡이 나오네요. 제가 학부생 때 공부를 설렁설렁한 걸로.. ㅎㅎ

cyrus 2016-06-15 12:52   좋아요 0 | URL
중세국어문법을 공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거죠. 그때 배운 내용을 다 기억할 수 없어요. ^^

표맥(漂麥) 2016-06-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음직한... 표현이 바로 떠오르는군요...^^ 윽! 돌 날아오는 ===333

cyrus 2016-06-15 12:53   좋아요 0 | URL
주어가 없어서 오해를 살 뻔 했습니다. ㅎㅎㅎ

페크pek0501 2016-06-1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아들에 비해 딸을 키우기 힘든 세상입니다. 언제가 되면 딸을 마음놓고 키울 수 있는 세상이 되려나요?

cyrus 2016-06-15 12:58   좋아요 0 | URL
어머니가 휴대폰을 놔두고 외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 여동생은 밤늦게 친구 만나고 집에 들어옵니다. 이러면 제가 불안해집니다.
 

 

 

북플을 접속하면 궁금한 것이 많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따지고 싶습니다. 이쯤 되면 저는 ‘알라딘 오지랖퍼’ 같습니다. 북플의 문제점에 관심 없는 분이라면 다른 회원분들의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궁금한 점. 북플이 알려주는 ‘활동이 많은 회원들’의 기준이 뭘까요?

 

북플은 틈만 나면 ‘활동이 많은 회원들’이 누구 있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받아보고 싶다면 친구 신청을 하라고 권합니다. 저는 이게 뜨면 삭제합니다. 이미 저는 하루에 ‘좋은 글’ 수십 편 이상 많이 읽고 있으니까요. 저는 북플 공지에 소개된 회원들이 얼마나 많이 활동하는지 궁금해서 한 번 확인해본 적이 있습니다. 친구 관계는 아니지만, ‘화재의 서재글’이 자주 오르는 회원뿐만 아니라 생소한 닉네임의 회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처음 보는 회원의 북플에 들어가 봤는데 글이 한 편도 없었습니다. 글은 없고,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은 책’ 소개만 잔뜩 있었습니다. 이 회원의 서재 블로그에 들어가 봤습니다. 당연히 ‘마이리뷰’와 ‘마이페이퍼’ 수가 ‘0’입니다. 글이 없는 회원을 ‘투명 회원’ 혹은 ‘유령 회원’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회원의 글을 보는 일이 편한 회원이 있을 겁니다. 그분들이 글 한 편 안 쓴다는 이유로 게으르다고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를 만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유령 회원처럼 활동했습니다. 처음엔 제 글이 다른 회원들에게 노출되는 상황이 낯설었습니다. 알라딘 서재가 제 생애 첫 블로그였거든요.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북플이 생각하는 ‘활동이 많은 회원들’의 기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은 책’을 입력하는 것은 개인을 위한 사소한 활동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입력된 책들이 공개된다고 해서 이게 다른 회원들과 교류하는 의미의 ‘활동’과 거리가 멉니다. 제가 생각하는 ‘활동이 많은 회원’은 생각날 때마다 쓰고 싶은 글을 남기고, 가끔 다른 회원들의 글을 읽으면서 댓글을 남기는 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서재지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글 한 편 남기지 않은데도 서재지수 상위권에 있는 회원이 있습니다. 그 회원의 북플에 보면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은 책’ 기록이 많습니다. 하루에 책 입력을 많이 하면, 서재지수가 많이 오르는 건가요? 저보다 꾸준히 글을 남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와 ‘친구’ 관계가 아니더라도 조용히 글을 남기시는 분들 몇몇 알고 있습니다. 비록 댓글 하나 없는 조용한 서재지만, 저는 이런 분이야말로 ‘활동이 많은 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서재지수를 많이 받아야 하고, 하루마다 순위가 달라지는 ‘서재의 달인’ 상위권에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끔 ‘서재글 0편’ 회원이 ‘서재의 달인’에, 그것도 중상위권에 포함된 경우가 있습니다. 글을 작성하지 않고, 북플만 열심히 활동하면 ‘서재지수’가 향상되는지 내일 서재지기님에게 물어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 궁금한 점. 별점 평가 없이 ‘읽은 책’ 회원 입력이 많아지는 현상이 과연 좋은 걸까요?

 

어떤 책을 검색하면 ‘읽고 싶어요’, ‘읽고 있어요’, ‘읽었어요’ 회원이 누구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별점평가를 하지 않아도 북플로 ‘읽었어요’를 입력 가능합니다. 이건 정말 획기적인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책에 ‘읽었어요’ 회원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책이 사람들이 많이 사고 읽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아시다시피 책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아보려면 직접 서점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거나 아니면 그 책을 읽은 분이 남긴 독자서평을 봐야 합니다. 모 알라딘 회원님은 알라딘 서재는 ‘좋아요’ 수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읽었어요’ 회원 수도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전에는 책을 팔기 위해서 출판사 직원들이 인터넷 서점 회원 계정을 만들어 100자평을 남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명 ‘서평 알바’라고 합니다. 이제는 무식하게 글을 남기지 않아도 됩니다. 출판사 직원은 북플 계정을 만들어 자사 해당 도서에 ‘읽었어요’를 입력합니다. 서평이 없는 책에 ‘읽었어요’ 회원 수가 꽤 많이 있으면, 이 책을 고르려는 독자는 ‘읽었어요’ 회원 수가 책에 대한 다른 독자들의 관심이 반영되었다고 믿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읽었어요’ 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회원은 아직 나오지도 않는 예약판매 도서를 ‘읽었어요’라고 입력했더군요. 당연히 그분의 별점 평가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저와 ‘친구 관계’였는데, 하루에 20권 이상의 책에 ‘읽었어요’를 누르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바로 친구 관계를 끊었습니다.

 

 

 

세 번째 궁금한 점. ‘친구 관계’를 먼저 끊은 회원이 다시 ‘친구 요청’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A’라는 닉네임의 회원이 저에게 먼저 ‘친구 요청’을 했습니다. 받아줬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난 뒤에 A 회원이 친구 관계를 끊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경우면, A 회원은 ‘친구’ 목록에서 ‘팔로잉’ 목록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면 저는 A 회원의 ‘팔로워’가 됩니다. 종종 이런 회원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상대방이 먼저 친구 관계를 끊으면 저도 미련 없이 ‘팔로잉’을 해제합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읽기가 싫어서 친구 관계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쓰는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아요’를 안 눌러도 됩니다. 이미 ‘좋아요’를 누른 상대방의 글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으면 글의 허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아요’를 취소하면 됩니다. 저는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친구 관계’를 먼저 해제한 회원이 다시 ‘친구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생기면 저는 난감합니다. 물론, 실수로 잘못 눌러서 ‘친구 관계’가 해제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사정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실수로 잘못 눌렀다고 해도 저로서는 그분이 제 글이 보기 싫어서 친구 관계를 해제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넘어갑니다. 그리고 제 북플 계정에 ‘팔로워’를 하면 ‘친구’ 수락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제 글의 분량은 깁니다. 북플에서 보기 불편합니다. A1 용지 한 장 반을 채우는 글을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면 시력이 나빠집니다. 그래서 제 글은 대충 봐도 괜찮습니다. 만약에 노래가 있는 동영상이 있는 글이 있으면, 그냥 노래만 듣고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글을 안 읽을 거면서 ‘친구 요청’하거나, 글 안 읽고 무조건 ‘좋아요’ 누르는 분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글을 보는 일에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저보다 서재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의 글을 읽거나 아니면 책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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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6-1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저도 궁금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더군요. 좀더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어요. ^^

cyrus 2016-06-14 19:05   좋아요 0 | URL
제가 사소한 것을 너무 꼼꼼하게 보는 성격이라서 북플에 글을 읽다 보면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자주 봅니다. 북플이 무조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시스템 자체 평가 점수를 매긴다면 60, 70점을 주고 싶습니다. ^^

syo 2016-06-14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북플의 발전을 위해 힘쓰시는 사이러스님의 노고ㅠㅠ 잘 읽었습니다.

별점 시스템에 관한 사이러스님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전 얼마전까지 제가 읽은 책에 별 다섯개와 별 한개를 제외하고는 별점을 안 매겼어요. 개인적으로 정말 이 책은 추천하거나 절대 이 책은 안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없었습니다. 2개 3개 4개는 너무 자의적이고, 심지어 내가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달라질 수 있는 건데, 강력추천과 강력비추를 제외한 별점들이 다른 분들께 객관적인 척도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리뷰를 동반한 별점이라면 다르겠지만 그냥 별점만 띡 매기는 것은 자기에게는 유용한 기록일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 크게 도움이 안된다고 봐요.

만약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고 알바를 고용해 읽었어요를 누르게 하는 식으로 조작을 할 마음을 품었다면 당연히 3개 4개 혹은 5개의 별점을 주라고 시킬텐데요. 왜 읽었어요만 누르고 별점은 안매기게 할거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cyrus 2016-06-14 20:19   좋아요 1 | URL
별점을 매기지 않는 회원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나쁘게 보는 제 주장이 문제점이 있어 보입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더 듣고나서 반대 의견이 더 나오면 두 번째 의견을 삭제해야겠습니다. 솔직한 의견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syo님 말씀처럼 별점을 주는 동시에 `읽었어요` 수를 올릴 수 있겠죠. 저는 별점 없이도 `읽었어요` 수를 높여서 조작이 가능하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너무 개인적인 의견이라서 두 번째 의견을 쓸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회원 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별점을 주지 않는 회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예전 알라딘 서재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플 시스템을 거부하는 심리 반응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알라딘 서재와 북플이 조화롭게 운영되는 분위기를 바라는데, 제 눈에는 알라딘은 북플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느낌이 듭니다. 옛날을 선호하는 제 입장이 `알라딘 보수주의자` 같군요. ㅎㅎㅎ

302moon 2016-06-1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 읽고 댓글 달기 위해 서재로 달려왔습니다. (북플에서 댓글 달기는, 저는 불편해서요.)
제가 종종 글을 읽고 ‘좋아요’ 누른다는 걸 알리려고요.(;) 단 한 편이라도 글은 끝까지 읽습니다.:)

cyrus 2016-06-15 13:01   좋아요 0 | URL
저도 북플에서 댓글 달 때 조금 불편합니다. 긴 글을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눈이 금방 피로감을 느껴요. 정독하지는 않지만, 스마트폰으로 글을 보는 것보다는 컴퓨터로 글을 봐야 집중력이 생겨요.

무해한모리군 2016-06-1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수로 좋아요를 취소해본적은 있지만 친구를 끊기는 어려울거 같은데 미스테리네요 ㅡㅡ 저는 딱히 별의견이 없어 댓글을 달기 어려운글도 잘읽었다는 뜻으로 좋아요를 누릅니다.

cyrus 2016-06-15 13:03   좋아요 1 | URL
상대방의 글이 정말 좋은데, 이 느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좋아요’만 누릅니다. 맨날 ‘OOO님의 글. 좋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댓글에 남기면 성의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수이 2016-06-14 2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점 매기는 건 좀 달리 생각해_ 아는 알라디너도 별점은 정말 주관적이다 싶어서 거의 매기지 않는다 하시더라고_ 나도 읽은 책에 정말 크나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예 별점 건너뛰고_

읽은 책이었는데 어떤 분의 북플에 그 책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좋아요_ 누르고 그러다보면 어떤 날에는 읽은 책 일고여덟 권이었던 적도 있어서 그런 거에도 좀 무심한 편_

북플 시스템이 궁금해서 나도 한번 그냥 막 좋아요_ 눌러봤더니 그날 서재지수인가 그거 1위 한 적 있음. 아 완전 개판이다_ 그날 깨달았어. 알라딘 계속 욕 먹지 않으려면 시스템 개편 좀 해봐야할 터인데 말야_

2016-06-14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5 13:07   좋아요 0 | URL
알라딘 제도의 허점 때문에 회원만 불이익을 받아요. 알라딘 제도에 문제 제기를 하는 건데 선량한 회원은 ‘내가 서재 활동을 하는 것에 문제가 있구나’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러면 알라딘 제도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속 시원하게 지적하기가 어려워요. 괜히 회원들 간의 오해를 빚고,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요.

sslmo 2016-06-14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정말 궁금한게 서재 방문자 수는 딸랑 2명 3명인데 좋아요 수는 열몇개씩 되는건 어쩐 일이랍니까?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별점은 후한 편입니다. 그리고 별점을 세개 미만으로 줘야한다 싶으면 그냥 페이퍼로 돌려 버리게 됩니다. 뭐 제가 주는 별점이 영향력을 미친다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 대한 예우 차원이랄까 그런 걸루다가요.
그리고 전 댓글 다는데 인색한 대신, 직장에서 댓글을 달려다 보면 호흡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걍 좋아요로 잘 읽었습니다 정도로 느낌 표현을 해요. 그 정도로 치어 업 정도는 삶의활력소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모두가 서재 지수에 뭔기 반영되는가 보군요?

cyrus 2016-06-15 13:13   좋아요 0 | URL
서재 방문자 수와 북플 방문자 수가 동일하게 카운터 되는지 잘 모르지만, 서재 방문자 수가 적게 나와도 북플 접속자 때문에 ‘좋아요’ 수가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무꾼님의 서재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면 서재지수가 향상됩니다. 몇 달 전에 글을 안 쓰고, 하루에 ‘좋아요’를 엄청 많이 누른 회원이 저보다 서재지수가 높게 나온 거 보고, 서재지기에 제기한 적 있었습니다. 서재지수를 없앴으면 좋겠어요. 서재지수에 반영되는 활동 내역의 기준이 모호하고, 나무꾼님 같은 분들이 ‘주간 서재의 달인’ 하위권에 있는 상황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주에 글 한 편씩 쓰는 회원이야말로 ‘활동이 많은 회원’으로 봐야하는데, 여기 알라딘 회사는 ‘좋아요’ 수를 많이 누르면 회원을 ‘활동이 많은 회원’으로 봅니다.

북프리쿠키 2016-06-1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에 궁금했던 이야기를 풀어서 논리적 혹은 감성적으로 차근차근 이야기할수 있는
내공이 돋보입니다. 또 배우고 갑니다

cyrus 2016-06-15 13:17   좋아요 0 | URL
어제 쓴 글은 추측과 편견에 의지해서 쓴 겁니다. 논리적으로 썼다고 보기 어려운 글입니다. 저보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

2016-06-14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5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6-1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친구 요청 오면 대부분 다 받아주는데,
갑자기 팔로잉으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네요.

오~ 궁금해라~

cyrus 2016-06-15 13:20   좋아요 0 | URL
회원이 먼저 저에게 친구 요청하는 상황이 많지 않아서, 팔로잉, 팔로워를 매일 확인하지 않습니다. 가끔 친구 요청한 분이 누군지 확인할 때, 팔로잉과 팔로워 상태도 같이 확인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친구’로 되어 있는 회원이 ‘팔로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Postumus 2016-06-1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경우는 알라딘 블로그를 늦게 시작해서 읽은 책에 비해 ˝읽었어요˝ 누른 책 수가 엄청 적은데, 이걸 몰아서 다 누르자니 좀 이상해보이고 해서 그냥 그 책이 뉴스피드에 뜰 때만 누르고 있습니닿

cyrus 2016-06-15 13:21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입력한 책 정보를 삭제합니다. 북플에 읽은 책, 읽고 싶은 책을 입력하는 내용을 ‘좋아요’도 하지 않습니다. 공들여 쓴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

보물선 2016-06-1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니아 점수, 순위 정말 궁금하더라구요.

cyrus 2016-06-15 13:22   좋아요 1 | URL
직원에게 물어봐도 ‘안알라줌’으로 일관합니다. 예스24는 스타지수 산정 방식을 공개했더라고요. 알라디너들이 예스24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2016-06-15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5 13:23   좋아요 1 | URL
싫다기보다는 그분들의 정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ㅎㅎㅎ

syo 2016-06-1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저는 거진 100권 되는 시집을 읽었지만 시 부문 마니아의 말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공력이 부족해서 그런걸까요?ㅜ

cyrus 2016-06-15 13:26   좋아요 0 | URL
syo님의 공력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알라딘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책을 안 읽어도 페이퍼에 책 표지만 올리면, 그 책 혹은 책을 쓴 저자 마니아지수가 받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읽고 써도 부실한 내용의 페이퍼를 쓴 회원의 마니아 지수보다 낮은 상황이 생깁니다.
 
10억 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 - 지질학자, 기록이 없는 시대의 한반도를 찾다
최덕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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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언제 만났더라?’ 바쁜 현대인은 며칠 전의 일도 깜박하곤 한다.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에 묻혀 며칠, 몇 달 전의 시간조차 기억에 붙잡아두기가 쉽지 않다. 다른 곳에선 수십억 년의 시간을 계산하며 과거를 캐는 사람들이 있다. 먼 과거에서 찾아온 화석과 암석의 연대를 추적하는 지질학자들이다. 그들이 아주 먼 과거를 알아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이테가 나무의 나이를 기록하듯이 자연은 언제나 시간의 기록을 남긴다. 분침과 시침이 일정하게 움직이듯이 지구에 수십억 년마다 움직이는 시계가 숨겨진 채 존재한다. 그 ‘시계’가 바로 암석이다. 지질학자들은 자연에서 그 시계를 발굴해 그동안 흐른 시간을 밝혀낸다. 암석에는 ‘지질학적 사건’이 일어났던 중요한 시간이 새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지질학자는 자연에서 일어난 지질학적 사건의 발생 시기와 상황 그리고 자연의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탐정과 비슷하다. 암석 속에 새겨진 기록이 ‘지질 수사(조사)’의 단서가 된다. 한편으로 지질학자는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최덕근 명예교수는 지질학자들만 누렸던 지구 시간 여행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10억 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은 우리가 사는 한반도 땅덩어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저자기 직접 목격한 국내 지질학 역사의 현장까지 살펴보는 ‘타임머신’ 같은 책이다.

 

지질조사의 결과는 지질도 하나로 정리된다. 그야말로 지질학자들에게 지질도는 각별하다. 그래서 지질도는 오랜 연구 노력 끝에 나온 연구 성과를 빛나게 해주는 ‘지질학의 꽃’이다. 지질도는 암석을 종류와 나이에 따라 구분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전국 방방곡곡마다 조금씩 말과 문화가 다르듯 암석도 다르다. 지역별로 정확히 분포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곳을 대표하는 암석들이 있다. 우리나라에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한 돌은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깊은 땅속에서 서서히 식으며 굳어진 돌이라 검은색 등을 띠는 결정의 크기가 크다. 그 결정들로 이뤄진 무늬가 화려하고 가공이 편리해 석재로 애용된다. 대리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형성된 석회암이 열과 압력을 받아 변한 암석이다. 과거 바다였던 지역에 대리암이 많은 이유다. 제주 하면 단연 현무암이다. 현무암은 땅속의 마그마가 화산 폭발로 인해 나오면서 이산화탄소 등 해로운 물질들이 빠져나간 뒤 굳어진 돌이다. 그 흔적이 현무암에 숭숭 뚫린 구멍들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도로변의 깎인 암석들엔 대개 수천만, 수억 년의 시간이 간직돼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반도엔 캄브리아기 이전부터, 고생대, 중생대 그리고 신생대까지 갖가지 나이의 암석들이 어울려 있다. 한반도는 거대한 지질학 교과서이다.

 

일반적으로 지질학 지식은 우리 생활에 직접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원 확보나 국토 개발 또는 환경 보존 등에 이용된다. 그러나 땅에 매장된 자원을 찾는 것보다는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또는 일어났던 자연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지구는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구 내부는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과정을 겪어서 현재와 같은 한반도의 모습에 이르렀을까 하는 내용이다. 과학적인 지질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태백산지구 지질도는 1961년에 만들어졌다. 이 지질도가 제작되는 데 걸리는 기간은 불과 4개월이다. 태백산지구 지질도는 과학적인 목적보다는 태백산 자원 분포를 확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보다 지질학 역사가 긴 영국에서는 완벽한 지질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과거 70년대 국민적 병리 현상이었던 ‘빨리빨리’ 문화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정확한 지질도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여전히 ‘빨리빨리’ 성과를 내려는 사회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세밀하게 암석을 관찰하고, 분석해야 하는 지질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점점 비좁아지는 취업 관문으로 인해 지질학자의 길을 걷으려는 젊은 세대가 많지 않을 것이다.

 

지질학자 양성이 시급해 보인다. 나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암석의 나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줄 아는 유능한 인력이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다. 지질학자는 지하자원의 위치를 찾아내는 보물 사냥꾼이 아니다. 지질학자는 지형의 역사를 파악할 줄 알고, 미래에 일어날 지형 변화까지 예측하는 시간 여행자다. 국내 지질학자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지하자원 혹은 싱크 홀이 있는지 찾고 있을 때, 외국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지구상의 대륙은 우리가 느낄 수는 없지만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뜨거운 지구 내부가 천천히 이동하는 탓에 겉가죽에 해당하는 대륙 역시 덩달아 움직인다. 대륙이 오랜 기간 꾸준히 움직이다 보면 서로 부딪치고 합쳐지기도 하는데 약 1억 년 후에는 한반도를 포함해 온 대륙이 모이게 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서로 만나 한 개의 땅덩어리가 된다. 그 결과 동해는 사라지게 되는데, 앞으로 1억 년 후의 일이라 다행이다. 지질학적 시곗바늘을 조금만 뒤로 돌리면 지구가 움직인 증거가 한반도 내륙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 시rPt바늘을 볼 줄 알고, 뒤로 돌리는 법을 아는 지질학자가 많아야 한다. 한반도의 단층 구조와 지층 안정성에 관한 연구와 예측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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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다닐때..지구과학을 아주 좋아했던 과목이었어요...지질학...이게 좀 매력있어요...천문학도 ^^..

cyrus 2016-06-13 21:46   좋아요 1 | URL
고등학교 과학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으로 나누어졌는데, 지구과학이 배우기 쉬웠어요. 나머지 과목은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았던 것 같아요. ^^

오거서 2016-06-12 2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질학자는 매년 일정한 수만큼 배출되고 있어요. 전국 대학을 통해서요. 외국에 유학하는 석박사도 적지 않아요. 그러나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서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 문제지요. 현실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진로를 변경한다는 거지요. 특히 국내에서 자연과학도가 연구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봐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 절대 부족하니까요. 현실적인 대안이나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바라는 바는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지질학이 참 인기 없는 학문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꿋꿋하게 공부하고 있는, 지질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견할 따름이에요.

cyrus 2016-06-13 21:49   좋아요 2 | URL
지질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까봐 걱정입니다. 지질학은 장기적으로 연구해야 성과가 나오거든요. 지질학 전공 학생들 입장에서는 진로 결정에 고민이 많을 거예요.

transient-guest 2016-06-14 0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질학도 참 대접을 못 받는 학문인 듯 합니다. 빅뱅이론에서 Sheldon Cooper가 언젠가 ˝Geology is not a science˝라고 외치곤 도망하는 scene이 있는데, 이걸 보면 미국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리도 중요한데도 말이죠.

cyrus 2016-06-14 18:19   좋아요 0 | URL
T-guest님의 인용이 아주 적절한대요. ㅎㅎㅎ 미국의 지질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영국 지질학 역사는 이 백년이라고 합니다. ^^;;
 

 

 

 

 

 

한때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시집의 서평/리뷰/독후감은 어떻게 써야 할까? 시집을 읽고 나서 그 느낌을 문장으로 옮길 때가 제일 어려웠다. ‘시가 좋다라는 표현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유려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 텍스트를 해석하거나 평가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이렇다 보니 내가 시를 읽은 건지 아니면 분석하는 건지 혼동할 때가 있다. 별것도 아닌 시의 행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시 속에 시인이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발견한 무언가를 서평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시집을 덮는다. 이렇게 여러 번 읽다가 덮은 시집의 수는 지금까지 작성한 시집 서평의 수의 2배나 된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시인이 동료 시인의 시집에 남기는 발문이다. 시집의 발문은 시인과 그 작품에 대한 해설 역할을 하는 텍스트다. 그런데 시집의 발문은 왜 어려운 것일까? 오히려 시보다 시집의 발문이 더 난해하게 느껴진다. 시인들은 관심법을 터득한 특별한 사람 같다. 동료 시인의 마음을 꿰뚫어서 시가 이렇게 쓰였다는 식으로 소개하는 거 보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시 세 편만 선정해서 글을 쓰면 가까스로 A1 용지 한 장 분량 정도 채우는데, 시인들은 화려한 수사와 비평 방식 등을 총동원하면서 다섯 쪽 이상의 내용을 뽑아낸다. 나도 저런 관심법이 있으면 시집 서평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해본다.

 

시집 서평을 쓰는 방식을 찾으려는 고민은 정답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시집의 발문이 시집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무조건 도움을 주는 텍스트로 볼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똑같은 텍스트일지라도 독자들이 거기서 얻어내는 메시지는 저마다 다르다. 창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내적 자질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집착하면, 자신만의 색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활동이 제한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시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시를 자유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암기식 시 해석에 길든 학생은 시를 난해한 텍스트로 인식하게 되고, 창작자의 의도와 문제 출제자의 의도를 동일시하는 오류에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 출제자가 만든 네모난 테두리 속에 시가 갇혀버리는 순간, 텍스트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학생들은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한정된 시간 내에 빨리 찾아내야 한다.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문제) 위의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우울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2) 대립적 가치를 통해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3)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선명한 인상을 준다.

 

(4)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5) 배경 묘사를 통해서 화자의 정서를 암시하고 있다.

 

 

최승호 시인이 직접 이 문제를 풀었는데,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정답은 2번이다.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정답을 맞혔다고 해서 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를 못 맞혀서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시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도 교사들은 문제를 풀지 못한 학생을 공부가 부족한 학생으로 인식한다. 이건 정말 불행한 일이다. 잘못된 교육 방식이 당연한 차이를 기이한 차별로 만든다.

 

 

 

 

 

(사진출처: [우리가 맨날 풀었던 언어영역, 국어영역 문학 문제들. 정답이 도대체 뭔가요?]

<스브스뉴스> 2016년 6월 10일)

 

   

 

캐나다 출신의 비평가 노스럽 프라이는 시를 쓰도록 격려해서 유명 시인을 배출하는 것보다는 시에 대한 사랑을 먼저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가 시인의 원고지에 빠져나와 시집으로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독자의 몫이 된다. 독자의 상상력이 무한히 확장되는 즐거운 순간이다. 특히 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유쾌한 자유를 즐길 수 있다. 나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창작자의 텍스트를 함부로 개입해서 오독할 까봐 두려워했다. 말도 안 되는 정답을 찾아야 하는 문학 수업 시간에 대한 추억 덕분에 나는 텍스트를 너무 신중하게 대했다. 난 정말 바보처럼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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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6-1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기사를 보고 집에 가서 단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저 기사의 문제의식(정답을 강요하는 시 교육)에는 동감하지만 시 해석에서 저자의 해석이 유일무이한 권위인 양 말하는 기사의 어조가 불편했어요. 최승호 시인이 자기가 쓴 시에 대한 문제를 못 풀었다는 근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를 보는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해석 중에 저자나 출제자의 의도가 우위를 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건 독자의 몫인 거죠. 시집 서평은 저도 항상 고민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봤자 제대로 리뷰 써본 건 한 번뿐이지만..

cyrus 2016-06-11 17:17   좋아요 0 | URL
뉴스 보도 방식의 문제점에 동감합니다. 뉴스가 독자들이 수능 문제를 푸는 과정까지 소개했으면 시인의 해석 권위에 대한 느낌이 덜 했을 겁니다.

저만 혼자 고민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님도 저와 같은 심정을 겪어본 적 있으시군요. 아무님만의 생각이 채워진 단상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

아무 2016-06-11 17:54   좋아요 0 | URL
집에 갔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못 쓸지도 모릅니다^^;; 그런 적이 많거든요.. 제가 처음 알라딘서재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이,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무조건 한 편 이상 쓴다였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서 엎은 적이 많습니다..ㅎㅎ

오거서 2016-06-11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니 국어시간에 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네요. 시를 낭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시를 즐길 수 있겠어요. 저 역시 바보처럼 시를 대해 왔군요.

cyrus 2016-06-11 17:19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하면 시 전문을 외우는 수업 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를 못 외우면 벌을 주고, 평가점수에 반영했습니다. 최악의 수업 방식입니다.

단발머리 2016-06-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 시집의 발문이 더 어렵다는 의견에 완전 동의합니다^^

cyrus 2016-06-12 18:08   좋아요 0 | URL
시가 이해되지 않으면 발문을 읽었는데, 오히려 시가 더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발문을 안 읽어요. ^^;;

yureka01 2016-06-1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시의 감상법을 망쳤죠..ㅠ.ㅠ
영원히 시와 멀어지게 한게 학교에서 시험출제용 시 배우는 것이었죠 ....

사실 국어선생님들도 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으니....

cyrus 2016-06-12 18:12   좋아요 0 | URL
한때 국어 교사를 장래희망으로 생각한 적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 시험 준비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학습법을 가르쳐야하는 교육 현실이 짜증났습니다.

수이 2016-06-1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시를 바보처럼 읽은 건 마찬가지인데_ 그래도 그때 문학수업때_ 들었던 시, 외웠던 시 덕분에 시에 대한 사랑이 조금씩 생겼어. 물론 방법은 바보 같았지만_

cyrus 2016-06-12 18:1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누님은 평소에 시집 많이 읽습니다. 누님이 준 시집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어요. ^^

방랑 2016-06-11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집을 읽고 서평을 쓰기가 어려웠어요.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물론 지금도요. 시집 뒤에 있는 동료 시인의 말도 그리 도움되는건지는 의문이에요, 마치 그들만의 언어처럼 또 다른 시가 되어버려서..

시에 대해서 한 가지 얘기해보고 싶은 것은 저작권에 대해서인데, 다른 갈래에 비해 시는 저작권 보호가 약한 것 같아요. 예전에 알라딘에서 친히 메일을 보내셨는데 북플에 올린 글 중 일부가 저작권 문제로 일부 발췌 글을 내려달라구요. 그런데 시는 한번도 문의가 없는 것 같아요. 시를 통째로 올리는 것은 내버려두면서 왜 소설의 일부나 인문서 일부는 발췌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요? 시는 아무도 안보고 돈도 안되기 때문일까요..

cyrus 2016-06-12 18:24   좋아요 1 | URL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발문이 도대체 누구 보라고 쓴 건지 모르겠어요. 특히 철학 용어를 써가면서 시를 접근하는 발문은 싫어합니다. 현학적 언어 때문에 독자들이 시를 어려워 합니다.

저는 시 전문을 인용하면 항상 시집 제목과 쪽수를 적습니다. 일반 도서의 문장을 인용할 때도 이 원칙을 지킵니다. 제가 예전에 출처를 안 밝히고 써서 표절 의심 받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오해가 풀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출처 표시의 중요성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시를 올바르게 인용하려면 출처를 밝혀야하고, 행과 문장 표현 같은 사소한 것도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행 구분이 잘못 배치된 시를 인터넷에 공유하고,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시집 제목을 밝힌 블로거는 많이 본 적 없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시집을 안 읽고, 인터넷에 떠도는 시를 긁어 모아서 인용하는거죠. 저는 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보는 느낌과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시를 보는 것 느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