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트럼프의 곁에는 아군이 없다. 음담패설 녹음 파일 공개 이후로 지지율 추락과 함께 당의 내분이란 악재를 만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이 녹음 파일에는 트럼프가 유부녀를 유혹한 경험담이 담겼고, 특히 여성의 신체 부위를 저속한 표현으로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대목도 들어 있다. 녹음 파일 파문으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를 보면서 딱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났다. 묘하게 그 사람은 트럼프와 닮은 인생을 살아왔다. 두 사람 다 한때 자신들이 종사한 분야에 최고의 정점에까지 올랐으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인기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테리 진 볼리아는 고교시절 레슬링에 빠진 뒤 본격적으로 레슬링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WWWF(WWE의 전신)의 프로모터 빈센트 제임스 맥마흔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프로레슬러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볼레아는 훗날 헐크 호건이란 예명으로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1987년 레슬매니아 3에서 열렸던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치른 경기는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며 이날 역대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 (현재 레슬매니아 32가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했다) 호건은 강력한 악역 선수들을 연신 격파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선량한 영웅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존재 덕에 WWE는 소수 마니아 스포츠에서 주류 스포츠의 한가운데로 올라설 수 있었다. 호건은 한때 링을 떠나 할리우드를 기웃거리며 각종 TV쇼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건은 지천명을 넘긴 2000년대에 들어서도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운동 실력을 보여주었다. 전성기가 완전히 지났어도 그의 등장음악이 경기장에 울려 퍼지면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호건의 전성기인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트럼프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사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투자로 인해 회사 두 개를 날려 먹기도 했지만, 부동산 사업에 수완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는 NBC TV<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라는 리얼리티 쇼를 진행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어프렌티스>로 유명세를 얻은 트럼프는 2007WWE에 깜짝 출연한다. 과거에 할리우드 영화배우(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세계적인 운동선수(마이크 타이슨)WWE에 등장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억만장자답게 링 위에 돈을 뿌리면서 등장했고, WWE의 운영자 빈스 맨마흔(빈센트 제임스 맥마흔의 아들)과 신경전을 펼쳤다. 두 사람은 레슬매니아 23에서 각자 자신을 대신한 레슬링 선수를 내세워 경기한 뒤 이긴 쪽이 진 쪽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내기를 걸었다. 부동산 재벌과 프로레슬링 재벌의 대립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당시에도 트럼프는 머리숱이 많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특이한 머리 모양으로 가발이란 의혹을 받았다. 그만큼 실제 머리카락이 잘리는 상황이 벌어질지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많았다. 맥마흔은 엔터테인먼트 대표답게 이 경기를 억만장자들의 전쟁으로 지칭하며 흥미를 유발했다. 하지만 WWE를 오랫동안 지켜본 팬들은 이미 내기의 결과를 예상하였다. WWE는 보통 스포츠와 달리 각본이 정해져 있다. WWE 팬들은 당연히 트럼프의 낙승을 예상했다. 역시나 충격적인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고, 트럼프가 승리하여 맥마흔은 삭발 굴욕을 당한다.

 

호건도 맥마흔과 레슬링 경기를 펼친 적이 있다. 2003년 호건은 더 락(The Rock)과의 경기에서 맥마흔의 방해로 패배했다. 두 사람의 대립 양상은 레슬매니아 19에서 이어졌다. 스트리트 파이트 룰(Street Fight Match, 무기 사용이 허용된 무규칙 경기)이 적용된 경기는 호건이 승리했다. 호건과 트럼프는 WWE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WWE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 WWE 내의 호건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2012년 한 가십 전문 미디어 매체가 호건이 등장한 문제의 동영상을 공개했는데, 이 동영상은 호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호건은 2006년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나누면서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영상 속에서 호건은 자신의 딸이 흑인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인종차별 발언을 퍼부었다. 법원에 증거물로 제시됐던 영상이 언론을 통해 노출되며 파장이 일어났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선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그의 추잡한 스캔들은 엄청난 파장이 일으켰다. WWE는 호건에게 영구 퇴출 징계를 내렸다. 이에 따라 WWE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는 호건은 모든 기록이 삭제됐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캐릭터 헐크 호건을 이용한 수입 일체를 받을 수 없게 됐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헐크 호건은 인종차별주의자테리 진 볼리아가 되어버렸다.

 

 

 

 

 

 

현재 호건에 향한 동정론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지만, 호건은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어렸을 적에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자라다 보니 잘못된 언행이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한 주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켰다. 조용히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할 호건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개 발언을 해서 또 한 번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인종차별주의자들끼리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나 보다. 현재 호건의 곁에는 열성 팬이 없다. 심지어 그를 존경했던 동료 선수들마저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의 현 상황을 비교하면서 느낀 점이 딱 하나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엄청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진리를 강조하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도의에 어긋한 공인의 행동을 눈감아주지 않고, 직설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러웠다. 수십 년간 링 위에서 땀을 흘렸던 WWE 선수들과 보수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해온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에게도 올바른 비판 의식이 있었다. 물론, 공화당 입장에서는 당 전체 이미지 실추를 막으려고 부랴부랴 트럼프 지지를 철회하고 있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미온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우리나라 정당 정치인들의 모습과 많이 비교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미국 정치인들보다 운이 좋다. 국민의 분노를 유발한 실언을 뱉은 정치인은 슬그머니 자숙의 시간을 보낸 뒤에 다시 국회에 등장한다. 그와 같은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그의 복귀 소식에 쌍수 들고 환영한다. 악의 근원은 확실하게 잘라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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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2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신이과 성찰이 부족하면 말 한마디에 훅 가죠그런데 돈이 많으면 돈질로 무마시켜 버리거든요.

cyrus 2016-10-12 21:40   좋아요 1 | URL
변명도 잘 늘어 놓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을 순순히 인정만 하면 되는데 남들도 다 하는 잘못인 것처럼 표현해서 비판을 피하려고 합니다.

아무 2016-10-1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건-트럼프 평행이론인가요?? ^^ 그나저나 트럼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최악의 상황에도 그가 역전 드라마를 쓰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cyrus 2016-10-12 21:42   좋아요 0 | URL
뉴스에서는 이미 트럼프는 끝났다고 하던데 아직은 호흡기가 완전히 떼었다고 보기 힘들어요. 트럼프 고집이 보통 아니라서 끝까지 갈 것 같습니다. ^^;;

다락방 2016-10-13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wwf 엄청 보던 시절에 호건은 진짜 인기 엄청 많았죠. 등장 음악만 들려도 관중들이 난리난리..확실히 이미지는 만들어지기 마련인가봐요. 그는 선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다른 얘긴데, 저는 숀 마이클스를 좋아했습니다!! ㅎㅎㅎㅎㅎ

cyrus 2016-10-13 16:24   좋아요 0 | URL
레슬링을 아는 알라디너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ㅎㅎㅎ

실제 프로레슬러의 성격이 링 위에 오를 때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악역 연기를 잘 수행하고, 험상궂게 생긴 선수가 실제로 만나면 성격이 순하기도 합니다.

하트 브레이크 키드. 숀도 정말 대단한 선수였어요. 헐크 호건이 남성, 특히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면, 숀은 여성들의 인기를 가장 많이 얻은 레슬러였죠. ^^

다락방 2016-10-13 17:02   좋아요 1 | URL
제가 잠깐 바티스타를 좋아하기도 했었는데 몇 번 경기를 보고나니까 경기가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 바티스타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졌어요. 배꼽 주변에 태양 문신한 거 정말 좋았는데!
그리고 존 시나 좋아요 ㅋㅋㅋ 채닝 테이텀 이란 배우 처음 봤을 때, 오, 존 시나인가.. 했어요. 둘이 너무 닮아가지고 ㅋㅋㅋㅋ 존 시나가 아마 저랑 동갑일걸요.
아, 그리고 헐크 호건 인기 있던 시절에 저는 숀 마이클스랑 워리어 좋아했었어요. 워리어 얼굴에 페인트칠 벗긴 거 너무 보고 싶었어요. ㅋㅋㅋㅋㅋ

전 숀 마이클스의 몸과 랜디 오턴의 몸이 좋더라고요. 아주 요란하지 않은 느낌이라서요. 존 시나는 팔이 너무 과한데, 랜디 오턴은 키도 크고 과하지 않게 느껴져서 ㅎㅎ 근데 경기를 보면 딱히 매력은 없고...

숀의 스윗친 뮤직 진짜 너무 좋아요. 그거 볼 때마다 짜릿했어요.

제가 WWE 볼라고 방송하는 월요일엔 약속도 안잡고 집에 일찍 갔었는데, 요즘엔 흥미 떨어져서 거의 안봐요. ㅎㅎ


아, 제가 딱 완전 좋아하는 바디는 레슬링 선수는 아니지만 `바다 하리`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바다 하리 너무 좋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yrus 2016-10-13 19:50   좋아요 0 | URL
바티스타 같은 근육형 레슬러는 파워는 좋은데 경기 운영이 루즈하고,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경기하는 동료 선수들을 부상 입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섬머슬램에서 랜디 오튼을 때려눕힌 브록 레스너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요. 경기 결과가 정해진 각본이지만, 복귀한 오튼이 무기력하게 패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존 시나는 평소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데뷔 시절의 몸과 비교하면 근육이 많이 붙었어요.

저는 랜디 오튼의 RKO를 좋아해요. 요즘 랜디 오튼은 경미한 뇌진탕 후유증이 있는데도 선수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과격한 운동을 하면 뇌에 부담을 줄 수 있고,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요. 오튼도 WWE에서 10년 넘게 활동했으니 예전의 기량을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오늘 다락방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네요. ^^

레삭매냐 2016-10-1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헐크 호건이 저렇게 해서 나락으로 떨어졌군요.

잠시 미네소타 주지사를 역임한 제시 벤츄라와
헐크 호건을 착각했었네요 ㅋ

그나저나 아주 링 밖에서는 아주 추잡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네요 호건 아저씨.

cyrus 2016-10-18 11:46   좋아요 0 | URL
제시 벤추라를 알 정도면 레삭매냐님도 레슬매니아입니다. ㅎㅎㅎ
오래전부터 호건은 사생활 때문에 안 좋은 말들이 많았어요. ^^;;
 

 

 

 

 

 

 

대구 남문시장에 있는 헌책방 ‘해바라기 서점’이 이전했습니다. 코스모스북 서점 건물과 KB국민은행 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길에 들어가면 해바라기 서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작년 1월 초에 찍은 겁니다. 예전에 있던 곳은 너무나도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성인 두 사람이 서서 책을 구경하는 게 힘들 정도였습니다. 직접 새로 옮긴 서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새터가 예전의 터보다 넓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풀지 못한 책이 아주 많았거든요. 건물이 개방형이라서 오래된 책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해바라기 서점 바로 옆에 치킨집이 있어서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습니다.

 

제가 일부러 해바라기 서점 내부의 자세한 모습을 사진에 담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설프게 찍은 사진보다 동영상 한 편 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10월 1일 TBC(대구 지상파 민영방송) ‘리얼인터뷰 통(通)’이라는 프로그램에 헌책방이 소개되었어요. 이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 아침 8시 40분에 방영됩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챙겨보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운 좋게 10월 1일 방송을 보게 됐습니다. 그 날 아버지가 TV 채널을 돌리다가 ‘리얼인터뷰 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거실d 울려 퍼지는 TV 소리가 제 방 안까지 흘려 들어왔습니다. 무심결에 TV 소리를 들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거실에 가보니 월계서점을 운영하는 주인장님이 TV 화면에 나오더라고요. 월계서점 주인장님이 책방 안에 보관된 책들을 MC에게 소개하는 장면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저도 아버지 옆에 앉아서 TV를 시청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들으라고 제가 말 한마디 꺼냈습니다.

 

"저 헌책방 제가 자주 가는 곳이에요.”

 

아버지는 젊은 시절 변변치 못한 직업을 전전했을 때 책 판매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을 어떻게 판매했는지 아버지에게 자세히 여쭤보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길바닥에 책들을 진열해서 판매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책을 만져보면서 일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인지 헌책방이 나오는 방송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창고에 가면 오래된 책 몇 권이 있습니다. 그 책들은 아버지가 책을 팔다 남은 걸 가져온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집에 보관된 헌책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돼서야 그 책들의 실체와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이 책들을 알라딘 서재에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헌책들을 꺼내려면 창고 안에 쌓인 물건들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지 못한 이상 공개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TBC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리얼인터뷰 통’의 예전 방영분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스마트폰으로 다시 봤는데요,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은 곳에서 동영상을 보면 화면이 깨친 상태로 나옵니다. 아무튼 헌책방 내부가 궁금하다면 ‘리얼인터뷰 통’ 10월 1일 방영분을 보시길 바랍니다. 해바라기서점과 월계서점 주인장님과 책장 내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tbc.co.kr/tbc_tv/real/tv_real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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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1 2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애정가의 기질을 아버님의 책에서 부터 내재되었군요...통 한번 보겠습니다^^..

cyrus 2016-10-11 21:41   좋아요 3 | URL
아버지가 저처럼 책을 특별하게 좋아하게 생각하는 성격이 아닌데다가 책을 읽는 것도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저절로 습관이 몸에 뱄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10-12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하게 책과 서점에 얽힌 여러 가지 기억이 돋는 느낌의 글입니다.ㅎ 저렇게 작은 서점이 곳곳에 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cyrus 2016-10-12 17:30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정말 몰랐습니다. 작은 동네서점이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을 때 자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헌책방이 그저 오래되고 낡은 책만 가득하고, 연세 많은 분들만 찾는 곳이라 생각해서 처음에는 헌책방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중한 것들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덕후는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돈질덕질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덕후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자신의 시간과 돈, 열정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느냐의 여부이다. 덕질 대상이 자신에게 돈이나 명예가 되어주지 않지만, 내 땀 흘려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즐길 수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피규어 수집 덕후인 허지웅의 일상을 공개한 방송을 보면, 그의 덕후다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설치하면서 피규어의 광선 칼을 부러뜨린 사실을 알고,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책 덕후인 나로서 허지웅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한다. 나는 책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읽는 편이다. 필기 및 밑줄 치기, 종이가 접힌 상태를 싫어한다. 타인이 내 책을 읽다가 다 읽은 부분을 표시하려고 종이를 접으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책을 사자마자 버린다는 띠지도 버리지 않는다. 그것마저 없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띠지에 조금이라도 찢어진 부분이나 책갈피로 사용해서 생긴 접힌 표시도 싫어한다. 아주 별난 성격 탓에 동생은 내가 산 책에 손을 대지 않는다.

 

 

 

 

 

 

 

 

 

 

 

 

 

 

 

 

 

 

 

스태프가 피규어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를 묻자 허지웅은 어릴 때 장난감을 갖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 사줬다고 답했다. 덕후는 실리가 아닌 재미를 추구한다.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면서 생기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 즐거움의 순간을 오랫동안 보존하면서 만끽하기 위해서 지나간 일을 포착하여 서사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래서 덕후들은 또 다른 덕후들고 모여 소통하며 덕질을 한다. 단순히 자신의 관심사를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 생산자가 된다. 일반인이 덕후가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나 경험도 하나의 서사. 그 속에는 갈망이 아로새겨져 있다. 갈망에 대하여의 저자 수잔 스튜어트는 기념품이나 수집품을 갈망의 서사가 반영된 결과물로 본다. 갈망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사례 하나를 들어볼까. 우리는 과거에 추억이 깃든 수집품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추억의 수집품은 과거의 흔적 역할을 해준다.

 

 

 

 

 

 

 

 

 

 

 

 

 

 

 

 

 

 

발터 벤야민은 열정적인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상의 사물을 통해 세상의 특정한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들을 모은다. 그가 모은 이야기들은 일명 수집가의 책상이라고 부르는 곳에 보관된다. 벤야민의 수집가의 책상은 사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맥락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이미지와 구상으로 재구성되고 재배치되는 세계이다. 그의 독특한 수집 방식은 하나의 서사적 실험이다. 파편적이고 쓸모없는 것들의 고유한 가치를 몽타주식 전개의 서사로 구축했다. 미완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의 이러한 배움과 사유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벤야민의 서사 속에는 도시에 파편으로 흩어진 사유의 흔적들을 수집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벤야민은 주인을 잃게 되면 수집의 의미가 상실된다라고 말했다. 덕후의 덕질은 쓸모없는 것 속에 잠재된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탐정 아케치 코고로는 자신의 하숙집 방에 서적을 가득 채운 이유를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짤막하게 얘기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D언덕의 살인사건’ 135~136) 나의 책 덕질은 책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일이다. 연구는 사물에 대해서 깊이 조사하고 이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나는 연구를 공부와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연구하는 것을 전문가만 하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허지웅이 나온 방송을 본 이후로 시간 나는 주말에 책 덕질이 하고 싶어졌다. 어젯밤 혼자 집에서 창고에 보관한 책 상자들을 개봉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상자에 갇힌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다행히 한 권 빼고는 상태가 좋았다...

 

사실 <내 서가 속 창비 이벤트>에 응모하려고 몇 개월 만에 책이 담긴 상자들을 열어봤다. 창고에 보관한 지 4개월 만에 상자에 손을 댔다. 그런데 내가 찾으려는 창비 책은 상자 안에 없었다. 집에 있는 책들이 몇 권 있는지 조사를 다시 시작해볼 예정이다. 목표는 올해 안에 정서 목록 완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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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책덕후가 아니다
    from 마지막 키스 2016-10-11 08:42 
    오늘 아침에 cyrus 님의 글을 읽고(먼댓글로 연결되어 있음)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책덕후가 아니다 ㅎㅎㅎㅎㅎ나는 책을 읽다가 밑줄도 긋고, 접기도 한다. 그리고 책을 잘 빌려주는데, 돌려 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몇 번이나 샀는지 모른다. 아니, 빌려가면 왜 안돌려줘? 특히나 회사 동료들은 빌려 갔다가 퇴사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돌려주고 퇴사해라... 아..또 이렇게 쓰려는 거
 
 
AgalmA 2016-10-1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마다 다른 속도로 도시를 걷고 있는 이들의 걸음은 각자 개인적인 이동성을 기록하는 손글씨와도 같다.
p20 수잔 스튜어트 <갈망에 대하여>

덕질에 대해 가볍게 읽을 책인 줄 알고 접근했다가 집중해서 읽어야 되는 책이구나! 생각하고 시간날 때를 생각해 묵혀두고 있는 책^^; 저 문장 포스가 계속 이어짐;;

cyrus님 카운팅 기대되는데요^^

cyrus 2016-10-10 20:04   좋아요 1 | URL
Agalma님. 저 그 책 도서관에 빌려 읽었는데 다 못 읽었습니다. 책의 부제 때문에 낚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문장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벤야민의 글이 이해하는데 더 쉬워 보였습니다. ^^

AgalmA 2016-10-10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 대중교양서보다 인문철학에 더 가까운.

cyrus 2016-10-10 20:10   좋아요 2 | URL
덕후들이 다가갈 수 있는 덕후들을 위한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다른 덕후들의 세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요. ^^

붉은돼지 2016-10-1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이제 어느정도 모으고 있지만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립니다. 그동안 꽤 많은 프라모델을 조립했지만 조카들이나 딸아이 손에 다 사지가 찢어져 산화하고 남은 것은 몇 개 없어요..ㅜㅜ

얼마전에 구입한 신의 전사들도 보이는군요 ㅎㅎ

저는 서가에 수용못한 책들 옷장안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박스에도 좀 넣어야 할 것 같아요 ㅜㅜ

cyrus 2016-10-11 10:15   좋아요 0 | URL
떨리는 마음, 그 기분 저도 알겠습니다. 제가 붉은돼지님처럼 책을 보관하면 어머니가 반대하실 겁니다. ㅎㅎㅎ

yureka01 2016-10-10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집을 방문 했을 때 책장에 책이 빼곡히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군요....

cyrus 2016-10-11 10:17   좋아요 0 | URL
네. 남의 집에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책장입니다. 책장을 구경하다가 제가 원하던 책이 있으면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

아무 2016-10-1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저도 엄청 깨끗하게 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밑줄도 긋고 접기도 하면서 읽습니다. 안 그러면 기억을 못 하겠더라구요.. 근데 2-3년 정도 되니까 이젠 밑줄치면서 안 읽으면 집중이 안 돼요. 도서관 책 읽을 때 엄청 난감해져서... 밑줄 그으면서 보고 난 뒤에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있습니다..^^;;

cyrus 2016-10-11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책에 밑줄을 긋지 못해서 중요한 문장이 있는 쪽수를 메모합니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으면 옆에 메모장이 있어요. 책을 다 읽으면 메모한 쪽수의 문장들을 워드로 입력해요. 번거로운 과정입니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려요. ^^;;

다락방 2016-10-11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포스팅을 보면서 확실히 깨닫습니다. 저는 책덕후가 아닙니다 ㅎㅎ
저는 그냥 책 읽는 걸 재미있어할 뿐이지, 덕후랑은 거리가 머네요.
저는 책 접기도 밑줄긋기도 하고 막 빌려주고 난리가 나요. ㅎㅎㅎㅎㅎ 게다가 오래 되어서 낡은 책은 그냥 다 팔아버림요. 책벌레 생길까봐....

cyrus 2016-10-11 10:23   좋아요 0 | URL
책 읽는 것을 재미있게 생각하신다면 다락방님도 책 덕후입니다. 덕후 본능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거랍니다. ㅎㅎㅎ

저도 안 보는 책이 있거나 급전이 필요하면 중고매장에 팔아요. 그런데 책 한 권을 팔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데 오래 걸려요. 이 순간만 되면 결정 장애가 옵니다. ^^;;

transient-guest 2016-10-12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박스에 보관할 때엔 주의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책등이 휘고, 뉘여 보관하면 무게에 눌려 책이 얇아지기도 합니다. 책장에 잘 꽂아놓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ㅎㅎ

cyrus 2016-10-12 17:32   좋아요 0 | URL
책을 박스에 담는 일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어설픈 과정이 있었습니다. 박스에 책을 잘 담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동네 한 바퀴 솔시선(솔의 시인) 19
하재일 지음 / 솔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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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힘과 나무의 무시무시한(?) 성장 본능이 합치면 신기한 현상이 연출된다. 나무는 자전거를 자신의 몸속으로 삼켜버린다. 목륜일체(木輪一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10여 년은 필요하다. 자전거가 땅에 쓰러지지 않고 나무 옆에 서 있었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이 자전거는 나무 곁에서 서서 주인을 기다렸을 것이다. 주인이 보고 싶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숲에서 서성였을까? 나무는 외로운 자전거의 마음을 알았는지 천천히 보듬어 안아줬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나무껍질에 자전거의 설렘과 기다림, 그리고 사랑이 있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생각이 어둠으로 잠겨 있는 것

 

성당 진입로 담장 아래 자전거가 자물통이 채워진 채
은행나무에 꼼짝없이 강아지로 묶여 있듯이

 

자전거의 주인은 품이 크고 속이 깊은 나무를 믿고
쇠줄을 채워 놓은 채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길가에 버려져 바람의 결에 노숙하는데
위치를 벗어나 야반도주라도 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간혹 지나가는 행인이 술에 취해 발길질을 해도
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어야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다

 

내가 배회하던 밤, 달빛으로 서로에게 이불을 덮어주면
불편한 거리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무와 자전거의 결합이 상처뿐인 생이 아니라
둘의 맹세인 옹이로 변해 잎은 푸르러지는 것이다

 

(『자전거는 푸르다』, 18쪽)

 

 

 

나무는 썩어가면서 죽어가고, 자전거는 녹이 슨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껴안은 나무와 자전거는 여전히 건재하다. 둘의 맹세는 서로를 지탱해주는 영양분이 된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사랑의 힘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할수록 시간만 더디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내내 괴로울 뿐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의미로 채워진다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상대방과 함께하는 사랑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자전거의 조용한 변화는 기다림 뒤에 온 것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다. 『자전거는 푸르다』는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길고 아픈 기다림일수록 아름답다.

 

이성적인 잣대에 적응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에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애매모호한 일에 직면하면 인내심이 부족해진다.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해 혼자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구석에 박힌 돌이 차돌이다
사람도 구석에 박힌 인간이 독종이다
너도 그런 구석에 머무르고 있느냐
조물주도 몸의 구석은 거웃이나 비늘을 입혀 보호하잖니
세상의 구석에 박혀 있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바람이 불면 언젠가 넓은 대양으로 나갈 수 있단다
모처럼 땀을 흘리며 밭일을 도와드렸더니

 

엄니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
애비야, 너도 그런 살가운 구석이 있었남?

 

(『구석』 중에서, 60~61쪽)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구석에 박힌 돌’처럼 숨어 있다. 세상과 담쌓은 채 구석에 오래 머무르면 무력감과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들은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타인을 ‘굴러들어온 돌’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행복으로의 통로를 가로막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서늘한 세상에 나와 타인을 연결해 주는 소통의 창이 열려면 부드러운 살가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

 

살가운 구석이 전혀 없고,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하다 보면 기다림이 주는 행복한 설렘과 기대감까지도 함께 사라진다.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진 뒤에야 이 슬픈 사실을 알아차린다. 배려의 마음도 아주 소중하다. 이기적인 동기든, 연민과 자비의 심정이든 타인에게 주는 마음은, 행복이야말로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상한 산수를 실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감성으로 가득 찬 유년의 수많은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나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에는 언제나 진하고 아름다운 감동이 있다. 그 따사로운 감동의 여운이 『동네 한 바퀴』에 남아 있다.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왔어요. 맛있는 술빵이 왔어요. 동네 한 바퀴, 부지런히 도는 트럭 한 대. 꽁무니 따라가며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내 발걸음. 사람들은 한 명도 모이지 않고 봄밤에 꽃망울 부푸는 벚나무들만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네.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

 

 환하게 꽃 핀 알전구 매달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동네 한 바퀴, 두 바퀴로 이어지는 트럭 한 대. 벚꽃보다 지름길을 알고 먼저 왔네. 목련보다 먼저 달려왔네. 아직 일러 꽃은 불을 켜지 않았고 봄이 오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트럭 한 대. 오늘 판 거라곤 겨우 해질녘 꼬부랑 할머니가 팔아 준 술빵 한 봉지. 누구나 편안한 물컹대는 밤인데.

 

 나 홀로 천천히 걸어보는 동네 한 바퀴, 서서히 길들이 어둠 속에 잠겨가네.

 

(『동네 한 바퀴』, 110쪽)

 

 

 

우리 사회에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많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늘어났다. 이런 암울한 세상 탓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다툼이 적어질 텐데, 참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많은 욕망을 죽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편하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자고 싶은 마음,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 등 사람이 살면서 일어나는 많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큰 성취를 이루려면 작고 소박한 것들로 채워지는 시간도 사랑해야 한다. 이처럼 사랑의 감정은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차가우면서 고달픈 이성적인 세상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난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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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0-10 1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사진을 보니 `아폴로와 다프네` 조각상이 떠오르네요..ㅋ 「변신 이야기」의 테마가 이런 신기한 현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cyrus 2016-10-10 17:47   좋아요 1 | URL
정말 탁월한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의 식물성 모티프의 원조는 다프네인 것 같습니다. ^^

또 봄. 2016-10-10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지만 글 제목이 제일 좋군요.

cyrus 2016-10-10 17:48   좋아요 0 | URL
제 글보다 시가 더 좋습니다. 제가 인용한 세 편의 시 이외에도 좋은 시가 더 있습니다. ^^

yureka01 2016-10-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시를 부르게 됩니다. ㄷㄷㄷ

cyrus 2016-10-10 17:50   좋아요 1 | URL
‘자전거를 푸른다’를 읽으면서 자전거 먹는 나무 사진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시인은 제가 찾은 사진을 봤을까요? 시 덕분에 옛날에 봤던 사진 한 장을 찾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자전거 먹는 나무에 대한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데, 이게 과연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의심이 듭니다. ^^;;

AgalmA 2016-10-10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요즘은 동네 꼬마들이 찌링찌링 자전거 벨을 울리며 지나가는 풍경이 사라진 거 같아요. 그 조그만 자전거엔 또 뒷자리가 있어서 옹기종기 타고 있는 앙증맞은 이쁜 모습도 있었는데, 같이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요즘은 어린이용 슈퍼카 문화도 있더군요ㅎ;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세상을 탐험하는 경험 제겐 참 좋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습 노동에 시달리니....

cyrus 2016-10-10 19:46   좋아요 0 | URL
자전거로 등교하는 아이들도 많지 않을 겁니다. 요즘은 버스나 부모님 자가용에 탑승해서 등교하니까요. 예전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장소가 사라지고 있어요. 만화방, 오락실, 비디오 대여점.

또 봄. 2016-10-1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시보다도 사랑이에요. T.T

cyrus 2016-10-10 19:47   좋아요 0 | URL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하죠. 저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

책한엄마 2016-10-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사람이 그리워 지게 만드는 글 한 편 입니다.

cyrus 2016-10-10 19:49   좋아요 1 | URL
제 탓인지 아니면 세월 탓인지 좋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친했던 사람들 생각하면 그리운 반 서러움 반 복잡미묘한 감정이 생깁니다. ^^;;

비로그인 2016-10-25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심보다 사랑이 넘치는 따스한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용기와 대담함, 명예,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 이 모든 것들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성성은 때로는 폭력성, 권위주의, 남성우월주의, ‘마초(macho)’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페미니즘에 무지하면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 사고방식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문제는, 젠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한마디로 일부 남성들은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다. 잘못된 남성성은 일상생활 속에 슬며시 스며들어 억압과 불평등을 양산한다. 맨박스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속에 굳건히 뿌리 내린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돼 발전하고, 나아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상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강인한 정신으로 고정되는 남성성은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남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여성,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된다. 과거의 남성은 늘 강해야 하고 육아와 가사에는 관심이 없다.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나약하고 슬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어렸을 때 눈물을 자주 보이면 어른들은 감성적인 여성이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에게나 있을 수 있는 유약한 태도라고 가르친다. 남자들은 사춘기 때 여자 같다는 놀림을 받기 싫어서 일부러 술, 담배를 일찍 배우는 위악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슬픔에 대한 감수성을 잃은 남자들이야말로 비겁하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슬픔을 느끼는 힘이 없다. 정서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방식을 잘 모른다. 강압된 남성성이라는 상자, 즉 맨 박스(Man Box) 안에서 성장한 남자는 이성과의 관계 맺기에 서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자들이 여성과의 의사소통에 서툴고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이면서도 이를 정당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여자와 손잡고, 키스하고, 마지막에 섹스하는 것으로 사랑이 표현된다고 남자들은 착각한다.

 

남자들도 소통과 교감에 대한 욕망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맨 박스 안에 숨어서 자신의 감정을 은폐한다. 어릴 때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학창시절엔 남녀 간 소통이 배제된 폭력적 판타지인 포르노로 성에 눈을 떴다. 더 커서는 상명하복의 군대·회사 등의 조직으로부터 수직적 관계만을 배웠다. 이런 남자들이 정서적 친밀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남자들은 정서를 교류하는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을 따른다. 관계 맺는 상황에 서툴면 남자는 의기소침해진다. 남자들은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고 느끼면, 감추려고 한다. 약점을 숨기기 위해서 강한 남자로 흉내를 내고, 여자와 거리를 두는 관심 결핍상태에 이른다. 관심 결핍에 빠진 남자들은 여성이 처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남자가 일으킨 여성 폭력이나 성범죄가 잘못된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착하고 평범한 남자라서 그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맨 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는 남자들 스스로 솔직한 성찰과 고백을 표현하고, 여성과 함께 대안을 찾아갈 때 성폭력과 성차별이 근절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맨 박스에 갇혀 지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미숙한 행동에 대해 반성한다. 맨 박스에 살아왔던 남자들이 스스로 마음의 맨살을 보여준다면 남성성에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남성성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남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뭐냐면요. 여자에 대한 인식과 여자를 대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껏 몸에 깊게 밴 인식을 재정립해야 하는 거죠. 전 남자들이 어떤 이슈에서건 여자들의 의견과 생각. 제안, 충고를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남성만큼 존중할 때 우리는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성차별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어요.” (123)

  

 

맨 박스강한 남성성이라는 외투를 입었던 남자로서 자성이 담긴 일종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강압적인 남성성에 의지하는 알량한 고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자신까지 망가뜨린다. 남성과 여성이 본래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님에도 마치 원수처럼 산다면 인생의 큰 즐거움마저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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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07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우리나라에서 갑질이 가장 심한 연령대가 40~50대 남성이라고 하더군요. 무려 전체 신고의 98%였던 것 같아요. 한국 남자들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제가 심각한 상태입니다.

cyrus 2016-10-08 20:23   좋아요 0 | URL
그 연령대 어른들은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미래에 중년층 구성원이 많아지면 지금의 젊은 세대가 갑질을 부릴 수도 있어요.

yureka01 2016-10-07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때 폭력에 많이 노출되면 커서 폭력 휘두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되죠.비슷한 이치겠죠.이걸 끊어낼 성찰이 필요한데...학교에서 ,,커서 군대에서...에휴...

cyrus 2016-10-08 20:2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폭력 문화가 예전에 비해서 사라졌다고 해도 어디선가 여전히 되물림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마립간 2016-10-08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인한 정신으로 고정되는 남성성은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 학벌의 서열화, 아파트(거주지)의 서열화, 직장(예 재벌 기업, 정규직)의 서열화 등도 같은 개념이죠.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개혁이 될지, 아니면 사회개혁을 통해 성평등을 이룰지. ;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죠.

cyrus 2016-10-08 20:29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현재 사회가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단계에 왔다고 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분위기가 식으면 과거의 문제점이 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고, 또 시간 지나면 열기가 가라앉는 반복된 패턴에 진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