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대재앙을 일으킬 가능성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천문학자들의 대답은 지금까지는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상과학영화 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
* 칼 세이건 《혜성》 (사이언스북스, 2016)
* 다치바나 다카시 《21세기 지의 도전》 (청어람미디어, 2003)
* 게릿 L. 슈버 《대충돌》 (영림카디널, 2004)
* 콜린 윌슨 《세계의 불가사의 1》 (간디서원, 2004)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Tunguska) 지역의 원시림 위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정체불명의 폭발로 인해 약 2,000㎢의 숲이 완전히 타버렸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1,000개가 폭발하는 것과 맞먹는 충격이었다. 미제로 남은 ‘퉁구스카 폭발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소행성과 혜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관심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임에도 우리나라에 퉁구스카 사건의 경위를 소개한 책이 많지 않다. 내가 알아본 바로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의 4장, 다치바나 다카시(たちばなたかし)의 《21세기 지의 도전》, 게릿 L. 슈버의 《대충돌》 그리고 콜린 윌슨(Colin Wilson)의 《세계의 불가사의 1》이 전부다. 《혜성》에는 퉁구스카 사건을 조금만 언급했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는 퉁구스카 사건의 원인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검증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퉁구스카 대폭발의 이유를 ‘운석 충돌’이라 설명했다. 즉, 수십 미터 크기의 운석이 지구로 떨어지면서 일으킨 폭풍 때문에 그 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폭발 지점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기지 않았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석이 땅에 떨어졌다면, 미국의 애리조나 운석구덩이(Meteor Crater)와 같은 거대한 접시 모양의 흔적이 남아야 했다.

 

칼 세이건은 ‘혜성의 조각’이 지구와 충돌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퉁구스카의 대폭발은 정확히 1908년 6월 30일에 일어났다. 매년 이 날을 기점으로 유성우가 떨어진다. 이때 지구는 앵케 혜성(Encke’s Comet)의 궤도에 지나게 된다. 혜성과 유성우가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간 혜성의 조각이 퉁구스카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행성은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 · 통과하면 속도가 감속되고, 대기권의 공기층에 의한 마찰열로 인해 분해된다. 불에 타오르면서 지구에 떨어지는 자잘한 부스러기가 운석이다. 그러나 대기권을 통과하는 혜성의 조각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땅에 충돌할 때 지진과 유사한 엄청난 충격이 일어나고, 삼림을 한 번에 다 태워버린다. 혜성의 조각은 얼음 덩어리로 이루어졌다.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하는 과정에서 얼음 덩어리가 녹아버렸기 때문에 엄청난 충돌에도 땅에 구덩이가 생기지 않는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퉁구스카 폭발 현장을 조사하면서 미세한 다이아몬드 알갱이를 발견했다고 한. 이 다이아몬드 알갱이는 혜성과 운석 물질을 이루는 구성 성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가설은 ‘UFO 충돌설’이다.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운석 및 혜성의 조각 충돌설’에 완전히 밀린 가설이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도 코웃음 치는 가설이다. 상상력에만 너무 의존하는 사람들이 ‘UFO 충돌설’을 선호한다. 우리보다 월등히 수준 높은 외계 지적 생명체가 탑승한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를 지나갔다. 그런데 우주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퉁구스카에 추락했다. 과학소설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다. 일단 우주선의 일부로 보이는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콜린 윌슨은 ‘혜성의 조각 충돌설’에 동의하면서도 공중에 폭발한 물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별에 날아온 우주선일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역시 오컬트에 심취한 작가다운 주장이다.

 

 

 

 

 

며칠 전에 퉁구스카 사건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중에 흥미로운 보도 기사 한 건을 발견했다. 그 보도 기사에는 러시아 과학자들이 퉁구스카 폭발 현장에서 UFO 잔해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게 정말 사실이면 가장 신빙성이 높은 ‘운석 및 혜성의 조각 충돌설’은 폐기된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발견한 잔해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란다. UFO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만 듣고도 흥분하겠지만, 회의주의자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외계 우주선 잔해 말고도 ‘50kg에 달하는 암석’을 발견했다고 하던데, 아마도 국내 기자가 ‘운석’을 ‘암석’으로 잘못 적은 것 같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기자가 ‘운석’을 몰라서 ‘암석’으로 고쳐 썼을 수도 있다. 아무튼 ‘50kg의 돌덩어리’라면 그리 적지 않은 무게이다. 이 정도 무게이면 맨눈으로 확인 가능한 크기이다. 그런데 1926년부터 총 여섯 차례에 걸쳐 현지 조사를 진행했던 레오니드 쿨리크(Leonid Kulik)는 폭발 현장에 운석 부스러기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1958년 이후에 재개된 현지 조사에서도 운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주선의 잔해와 ‘50kg에 달하는 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2004년 이 보도 이후로 우주선의 잔해와 ‘50kg에 달하는 암석’의 실체를 규명한 새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오보’일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과학자들의 발견을 처음 보도한 언론이 인테르팍스 통신(Interfax, Интерфакс)이다. 이 언론사는 러시아 최대의 민영통신사인데, 오보율이 높다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혜성의 조각 충돌설’을 반박한다. 얼음 덩어리로 된 혜성 조각이 폭발 지점으로 추정되는 상공의 7,000Km 지점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녹아 분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듣고 보니, 그럴싸한데? 녹아버려 거의 분해되기 일보 직전인 혜성 조각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될 수 없게 되고, 충격의 힘도 약해진다.

 

칼 세이건은 구소련 시절에 활동한 러시아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외국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퉁구스카에 거주하는 몽골계 소수 민족 에벤키족(Evenki, 과거에는 ‘퉁구스족’이라고 불렀다)의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 폭발 사건 당시의 증언까지도 채록했다. 발품 들여 조사해서 검증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분석에 당연히 신뢰할 수밖에 없다.

 

1908년 퉁구스카에 살았던 에벤키족이 대폭발을 가까이에서 본 목격자이다. 그리고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으나 대폭발의 충격으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에벤키족은 폭발이 일어난 퉁구스카 현장을 자신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여긴다. 그래서 러시아 당국은 현지 조사 진행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그들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로 퉁구스카 폭발로 사망한 에벤키족의 희생자 수를 집계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외국에서는 퉁구스카 사건이 지구 멸망을 초래할 뻔했지만, 희생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역사상 최악의 행운’(《대충돌》 174쪽)으로 소개한다.

 

 

 

 

 

칼 세이건은 에벤키족을 ‘미개한 퉁구스족’(《코스모스》 165쪽)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로 그 자리에 사망한 에벤키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미개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그의 표현에 어폐가 있다. 에벤키족은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지도를 나뭇잎으로 직접 만들 정도로 뛰어난 지리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지성(知性)들이 왜 백 년이나 지난 폭발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생뚱맞은 주제를 들고 나와 뭐 이리 길게 쓰고 있을까. 당연히 알아두면 좋은 내용이라서 썼다.

 

《21세기 지의 도전》의 독자 서평 중에는 이 책에 퉁구스카 폭발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독자는 퉁구스카 사건을 한낱 사라져버리는 ‘나무 한 그루’ 정도로 봤다. 그렇지만 남들과 다른 안목을 지닌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사건을 지구 생존 여부에 직결된 ‘나무 전체’ 수준으로 봤다. 퉁구스카 사건은 과학 교과서에 실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이다. 학생들은 이 사건을 접하면서 혜성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과정과 이유를 알게 되면, 말도 안 되는 ‘종말론’에 빠질 우려가 없다. 퉁구스카 사건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검증, 또 검증하는’ 회의주의 방법론을 체득하게 된다.

 

칼 세이건의 4장 끝부분에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라고 썼다. 다치바나 다카시도 퉁구스카에 다녀온 이후로 ‘푸른 별이 처해 있는 환경적 위험성’을 걱정했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하고, 여기에 투자 가능한 돈만 들인다면 거대한 혜성의 지구충돌도 예방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과학 산업이 튼튼한 강대국들이 그렇게 나서서 해주면 고마울 텐데, 정작 그들은 국가 예산을 엉뚱한 데 쓰고 있다. 힘 있는 국가들이 군사 강국이 되기 위해 지금도 생명 살상 무기와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핵무기가 터질 확률이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확률보다 높아 보인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 절반이 정신 차려서 ‘반핵 운동가’로 변신하면 좋겠는데, 이 확률도 희박해 보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3-09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당장이라도 딮 임펙트 같은 현실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없죠...우주에 수많은 별과 행성들의 명멸은 흔한 일상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7-03-10 10:49   좋아요 0 | URL
네, 지금도 저 먼 우주에 소행성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을 겁니다. 지구 밖의 세계에 시야를 넓힌다면, 별의 일생이 우리 일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별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반짝거리지 않습니다.

레삭매냐 2017-03-1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일전에 저희 회사 이사님하고 테슬라와 관련되어
이야기했던 에피소드네요...

음모론에 심취하신 저희 이사님은 테슬라의 비밀시험
이었다는 주장을 하시더라구요 ㅋㅋ

cyrus 2017-03-11 09:45   좋아요 0 | URL
폭발 사건에 대한 원인 가설이 수백 개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 중에 대다수는 안 봐도 되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회사 이사님이 믿고 있던 테슬러의 비밀시험 설도 그 중 하나겠어요. ^^;;
 
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글, 여기서는 좋은 ‘리뷰(혹은 서평, 독후감)’로 표현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리뷰란 일상 경험을 책 속 이야기와 버무려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리뷰는 책을 좀 더 쉽고 편안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글에서 살며시 배어 나오는 진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다. 글을 자주 써본 사람이라면 이런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한다. 그런데 막상 써보면 어렵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글쓰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글쓰기 교육은 논술이 중심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은 폭넓은 배경지식, 논리적 구성력 등을 습득한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강조한 대로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지적 재료들을 가지고 좋은 글로 아웃풋(Out put, 출력)을 내면 모를까 우리나라 논술문 쓰기는 지식 입력과 출력 과정 양쪽이 완만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구조이다. 학생들은 단기간 내에 전혀 모르는 분야의 지식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논술 고사 당일 날에 머릿속에 담은 재료들을 하얀 시험지 위에 일목요연하게 쏟아낸다. 결국, 그 날 하루를 위해 학생들은 제대로 뜻도 모르는 현학적 용어를 써가며 자신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 가르쳐준 내용을 형식적 논리만을 시험지 위에 옮겨 적는다. 글 쓰는 일 자체가 ‘시험문제’로 직결되는 교육 환경은 자칫 글쓰기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고, 막연한 두려움만을 안겨준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사소한 경험에서부터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 표현해보는 ‘생활 속 글쓰기’에 적응되면, 자연스럽게 논리적 글쓰기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신문 칼럼을 많이 봤고, 사람들과 어울려 부대끼며 지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생활 속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몇 차례 시도를 해봤으나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미미했고, 억지로 과거 경험을 떠올려 조금 과장해서 쓴다는 게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필자의 리뷰가 재미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탓이다. 필자는 이 상황을 팔자라고 생각하면서 알라딘이 망할 때까지 꾸준히 리뷰를 쓸 생각이다.

 

 

 

생활 속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며 자기 자신을 ‘글의 중심’에 세워보는 경험, 즉 ‘독서를 통한 앎과 삶이 조화를 이룬 글쓰기’를 실천한 사람이 박균호이다. (물론, 아주 능숙하게 ‘생활 속 글쓰기’를 실천하는 작가와 독자 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작가가 ‘마태우스’ 서민이다) 최근에 그가 새로 선보인 《독서만담》의 부제를 한 번 보시라.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다. 그의 글은 리뷰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건 나쁜 의미의 말이 아니다. 저자만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 글에서만 갖춰진 특색이다. 리뷰와 에세이라고 하면 책 또는 삶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교훈을 담아 쓰는 글이라는 공통된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리뷰와 에세이에 거창한 담론을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독서만담》에 가득 담은 글을 읽어보면 리뷰와 에세이의 고정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책의 1장은 애서가들이 무릎을 탁 칠만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글 제목은 ‘절판본과 탐욕의 끝’, 두 번째 글 제목은 ‘책 수집의 괴로움’이다. 애서가들은 이 글 제목들을 보자마자 벌써 어떤 내용이 나올지 짐작하리라. 1장 제목이 ‘하나도 쓸모없는 책 이야기’이지만, 이는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반어법이다. 애서가들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가 지금까지 어떤 희귀한 절판본을 구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된다. 헌책과 절판본을 소유하게 된 작가의 무용담을 듣노라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즐겁다. 그리고 귀한 책을 쉽게 양도하지 않으려는 주인들의 태도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책에 미친 이 남자도 계속 사도 끝없는 책 욕심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 알고 있다. 저자는 새 책을 사기보다는 오래된 친구와 같은 헌책을 재회하기로 결심한다.

 

2, 3장은 《독서만담》의 부제에 딱 어울리는 글들이 포진되어 있다. 솔직히 필자는 미혼이라서 부부나 가족 이야기에 관심 없다. 여전히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혼자 지낸 일상에 익숙한 탓이다. 그래도 SNS에 길들어져 버리는 바람에 남의 사소한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이 못된 심리가 남아 있어서 계속 끝까지 보게 된다. 다행히 이 책을 끝까지 보길 잘했다. 역시 작가의 글은 경험담으로 시작해서, 책 소개로 자연스럽게 마무리 짓는다. 야구를 좋아하는 독자가 ‘야구를 아무리 싫어해도’라는 글을 읽으면 ‘맞다, 맞아!’라고 연신 속으로 외치게 될 것이다. 이 글에 나오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와 딸이 ‘리모컨 컨트롤을 손에 꽉 쥔 주인’이 되어 거실 한가운데서 버틴다. 이 두 사람의 힘에 밀려 야구 TV 중계를 시청하지 못해 인터넷 중계로 시청하는 저자의 상황이 딱해 보인다. 필자는 서른이나 먹고 다 컸음에도 ‘거실의 여왕’으로서 오랜 세월 군림하는 어머니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다. 고집은 자신의 입지를 더욱 위축하게 하는 필패의 지름길이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한발 물러나서 양보하는 것이 좋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야구를 볼 수 있는 세상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저자는 아내와 딸처럼 야구를 잘 모르는 여성들을 야구 팬으로 만들 수 있는 책 세 권을 선보인다.

 

 

 

 

잠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작가는 아내와 딸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서 ‘야구는 남자들의 운동, 여자들의 것이 아니다(107쪽)’라고 썼다. 개인의 경험을 근거로 야구는 ‘남자들의 운동’으로 규정하는 말은 요즘 야구에 향한 여성들의 관심 수준을 생각하면 ‘일반화의 오류’에 가깝다. 작년 잠실야구장에 울려 퍼지는 여성 관중의 함성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그만큼 야구를 직관(직접 경기장에 가서 관람)하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야구장에 분 ‘여풍(女風)’이 없었으면 작년 ‘한 시즌 관중 800만’이라는 기록이 오지 않았다. 지금의 야구는 남자, 여자 모두의 것이다. ‘야구는 남자들의 운동, 여자들의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필자의 눈에 걸린다.

 

아, 리뷰를 쓰다 보니 오늘도 재미없는 내용이 되어버렸군. 내 리뷰야말로 ‘하나도 쓸모없는 책 이야기’이다. 그래서 읽어보면 무겁고 딱딱하지 않는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능력이 부럽다. 생활 속에서 길어낸 작고 소소한 작가의 책 이야기는 솔직담백해서 좋다. 글쓰기 공포증이 있거나 편안하게 자기만의 글을 써보고 싶은 분에게 박균호의 《독서만담》으로 시작해보길 권한다.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가벼운 동기 부여는 글쓰기의 열쇠가 된다. 그리고 작가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글감으로 어떻게 만드는지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사실 《독서만담》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1권 3득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두 개의 이득은 앞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개의 이득은? 그것 또한 글 초반부에 이미 언급했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모르면 어쩔 수 없다. 독자들이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탓이다. 아무튼 《독서만담》이 내 리뷰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균호 2017-03-08 2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잡문이 이토록 긴 논의을 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글을 쓸 때 교훈이나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을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 제 글의 단점이기도 하고 ‘일부 독자‘에게는 장점이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야구를 극협하는 두 여자와 살다보니 요즘 야구장의 여성팬들을 등한시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나 봅니다. 뼈와 살이 되는 좋은 리뷰 정말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cyrus 2017-03-09 08:25   좋아요 1 | URL
책 잘 읽었습니다. 글에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논의할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을 겁니다. 박균호님의 글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

yureka01 2017-03-08 2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웃분에게 책 선물 받았습니다..이책이었어요.저도 다 읽으면 리뷰 올려볼께용~~~ㅋ

박균호 2017-03-09 00:22   좋아요 0 | URL
앗...그 고마운 분은 누구신지...ㅎㅎ 소중한 리뷰 미리 고맙다는 말씀 드려요.

cyrus 2017-03-09 08:25   좋아요 1 | URL
‘이웃분‘이 누군지 압니다. 유레카님도 자식을 둔 아버지라서 박균호님의 글에 많이 공감하실 겁니다. ^^

곰토낑 2017-03-09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가 재미 없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굉장히 논리정연해서 정독하고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봐야할 책이네요. 야구가 남자의 것이라는 저 문장이 나오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요.

cyrus 2017-03-09 08:29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제 글이 너무 딱딱해보여서 나름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평소대로 글 쓰는 게 편했어요. 저보다 글 잘 쓰는 분들 따라하니까 힘들었어요.

제 글을 잘 읽어보면 허점이 보입니다. 저보다 똑똑한 분을 만나면 털립니다.. ㅎㅎㅎ

제 글도 비판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판을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

stella.K 2017-03-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 망하면 그동안 좋은 인맥을 쌓아왔던 우리 알라디너들은
흩어져야 하잖아.
글 못 써도 좋으니까 당췌 그런 생각일랑 말고 열심히 쓰기나 하셔.ㅋㅋ

이 책 리뷰에 좋아요가 유독 많더라구. 그러니까 난 같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은 쓰기가 부담되더라. 그래도 올리긴 올려야겠지?ㅠ

cyrus 2017-03-09 15:33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사라져서 흩어져도 다른 인터넷 서점에서 만나겠죠. ^^

‘좋아요‘ 수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거 생각하면 글 못 써요.. ㅎㅎㅎ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 같은 그림을 보면 경건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밀레는 밭에서 하루 일을 끝낸 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멀리 보이는 교회에서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실제의 종소리야 바로 그쳤겠지만 ‘그림’에 담은 종소리는 1세기가 넘도록 울려 퍼지고 있다.

 

 

 

 

 

 

 

 

 

 

 

 

 

 

 

* 드림프로젝트 《세계 명화의 수수께끼》 (비채, 2006)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형언할 수 없는(Unnamable)’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만종』이 노동의 경건함과 일상의 평화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간직한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밀레는 『만종』을 부부가 아사한 어린 자식을 땅에 묻는 장면을 그리려고 했다. 달리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되면 기도하는 부부는 실은 죽은 아기의 명복을 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밀레는 이 장면이 너무 암울하다고 판단하여 죽은 아기가 있는 관을 감자 바구니로 덧칠하여 그렸다.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달리는 『만종』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그림들을 제작했다.

 

 

 

 

 

『만종』을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은 달리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외선 투시 작업을 진행했다. 감자 바구니가 있는 자리에 조그만 나무상자가 그려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이 전 세계로 전해지자 사람들은 달리의 투시력(?)을 재평가했다. 달리의 해석을 신뢰한 사람들은 『만종』이 원래 죽은 아기를 위해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믿게 됐고, 『만종』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필수적인 정설이 되었다.

 

여전히 논란이 있는 달리의 『만종』 해석이 예술 상식으로 소개되는 상황이 난감하다. 예술에 생소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흥미로워 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예술 이야기를 접하면 어렵다고 생각한 예술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밀레의 그림을 연구한 학자들은 달리의 해석이 억측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사실 의문의 나무상자가 달리의 말대로 관인지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만종』의 관 이야기는 그림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던 달리의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심리’는 가짜 지식을 유통하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준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때문에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만종』에 진짜로 죽은 아기의 관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다.

 

 

 

 

 

 

 

 

 

 

 

 

 

 

 

* 살바도르 달리 《달리, 나는 천재다!》 (다빈치, 2004)

*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이마고, 2002)

* 살바도르 달리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이마고, 2012)

 

 

달리는 일생에 걸쳐 확증편향에 가까운 기행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과시욕을 보여줬다. 그는 마치 돈키호테(Don Quixote)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둘러싼 세상과 주변 사람들까지 변형해서 봤다. 그런 자신의 시선을 반영한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생뚱맞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달리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달리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달리가 직접 쓴 글은 달리의 과대망상 세계관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헌이다. 《달리, 나는 천재다!》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일기 형식에 가깝다. 달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천재가 쓴 유일한 일기’라고 밝혔다.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는 달리가 37살에 집필한 자서전이다. 달리는 스스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오만방자한 발언들을 했다. 괴팍한 성격답게 달리의 문장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 어떤 내용은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연상되며 이게 과연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게다가 앞에 언급했던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위배하기까지 한다.

 

 

일곱 살부터 여덟 살까지 나는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 나중에 가서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의 기억은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서, 너무나 부조리한 몇몇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한 다음에라야만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의 어떤 추억거리가 러시아에서 벌어졌다고 할 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추억을 가짜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번도 그 나라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달리의 머릿속 또는 환각과 몽상으로 이루어진 달리의 그림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기본 열쇠이다. 달리의 그림은 상상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얼핏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달리는 자신의 그림들이 '객관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제작한 것처럼 설명했다.

 

 

 

 

 

 

 

 

 

 

 

 

 

 

 

 

 

 

 

 

 

 

 

 

 

 

 

 

* 로버트 래드퍼드 《달리》 (한길아트, 2001)

* 자비에르 질 네레 《살바도르 달리》 (마로니에북스, 2005)

* 장 루이 가유맹 《달리 :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시공사, 2006)

* 돈 애즈 《살바도르 달리》 (시공아트, 2014)

* 캐서린 잉그램, 앤드류 레이 《This is Dali》 (어젠다, 2014)

 

 

달리는 자신이 지향하는 초현실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편집증적 비평 방법은 현실 세계의 대상(사람, 사물)을 환각 또는 상상력을 동원해 또 다른 대상으로 변형하여 해석한다.

 

 

 

 

 

 

 

 

 

달리는 ‘편집증적 비평 방법’으로 『만종』을 새롭게 봤고, 재해석했다. 그는 그 그림 속에 무의식적 욕망이 반영된 서사가 있길 원했고, 그가 확인한 것이 바로 ‘죽은 아기의 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는 농부를 어머니에게 정욕을 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지배한 아들로, 농부의 모자를 발기의 상징으로 봤다. 건초 마차는 성관계를 암시하는 대상으로 해석했다. 어린 시절 달리는 죽은 형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못마땅했고, 그런 어머니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무의식 속에 품은 공포와 절망감을 『만종』에 투영해서 바라본 것이다. 그가 천재 특유의 투시력이 있어서 그림에 가려진 나무상자를 알아챈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실 ‘편집증적 비평 방법’은 달리가 아포페니아(Apophenia)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거창하게 보여주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현상들에서 연관성을 찾는 착시의 심리 상태이다. 이 두 가지 착시에 빠지면, 보름달을 보다가 떡방아 찧는 토끼 한 쌍을 발견하기도 하고, 화성 표면을 찍은 사진에서 외계 생명체로 추정하는 얼굴 형태를 찾는다. 『만종』의 감자 바구니를 죽은 아기의 관으로 본 달리의 시선 역시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 현상과 관련 있다. 회의주의자 입장에서는 객관성과 거리가 먼 달리의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달리의 예술을 옹호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질서, 특히 사람 얼굴과 닮은 형상을 보려고 한다. 달리를 포함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런 인식의 한계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이용했다. 며칠 전에 쓴 글에서도 밝혔다. 인간은 상상할 자유가 있다.

 

 

 

 

[추신] 글의 제목은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에 착안해 정해졌다.

 

[1] 살바도르 달리 《달리, 나는 천재다!》 58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3-0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착각이 심하면 두가지 경향의 극단으로 치닫죠.
미쳤거나, 천재거나..^^..
다행히 예술로 미친거라서 작품의 망상적 해석이
예술로 발현된듯 하네요..

cyrus 2017-03-08 18:50   좋아요 0 | URL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수준 미달 정도가 아니면 예술에서 망상 허용은 인정합니다. ^^

갱지 2017-03-08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죠. 소통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이와 단절시키고 스스로만 공고해져가는 이가 있을 뿐. 달리는 후자의 끝 쪽이었던 듯해요, 재밌는 글 잘 읽고갑니다-.

cyrus 2017-03-08 18: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달리의 삶을 살펴보면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하고, 고집스럽고, 자신의 아내에만 의지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가 아내를 만나지 못하면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연옥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493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자신을 죽음에서 지켜내는 정신의 전략을 마련해왔다. 죽음에 대한 망각과 모른 척 잡아떼기 또는 죽음을 사회에서 배제해 삶과 분리했다.

     

황동규 시인의 《연옥의 봄》은 죽음을 관조하여 삶이 굳건해지는 경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제 곧 여든에 가까운 시인이 죽음을 관조하는 자세는 삶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일인데, 그 과정은 마치 잊은 반쪽을 찾는 것과도 같다. 칠십 넘은 세월을 살면서 잊고 있었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죽음에 다가설수록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저 바퀴 바로 앞에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말이다.

    

 

짧은 비 그치자 밝아진 골목길에 달팽이 하나

몸보다 큰 소용돌이를 등에 지고

끝에 눈 달린 두 더듬이 좌우로 헤저으며 기고 있다.

시멘트 조각 하나를 힘들게 피한다.

눈물보다 더 진득한 분비물을 온몸에 두르고

오체투지 하고 있군.

     

슬그머니 승용차 하나가 앞을 막아선다.

바퀴 바로 앞의 오체투지!

달팽이가 더듬이 조심조심 내저으며 침착히 기어 바퀴 폭을 벗어난다.

볼 것 다 봤다는 몸짓을 하며 나도 자리를 뜬다.

볼 것 다 보았다니?

그래,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고 기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거짓말 없이 어떻게 자리 뜰 수 있겠는가?

     

(『오체투지』 중에서, 44~45쪽)

 

 

한없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실은 온 힘을 다해 기어간다. 이 지구상의 존재들은 저마다 오체투지로 굴러가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오체투지의 삶은 실존이며 생존이다. 그렇게 삶이 움직이는 순간이 힘들어도 달팽이를 생각하면 숨 쉬는 사소한 순간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망각은 곧 죽음이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지우면서 산다. 심지어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곳조차 잊어버린다. 죽음은 나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간다. 시인은 우리 삶 전체를 거대한 ‘기억의 집’으로 비유했다. 이승의 인간은 기억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앞두면 소중하고 행복했던 집을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여기엔 이름 모를 하얀 꽃 한 무리가 피어 있군.

키 작고 꽃이파리 조금 산만하지만

가을 쑥부쟁이 닮은 봄꽃, 이름 가물가물.

아 저기에도 이름 사라진 노란 꽃.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내가 드디어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보다.

     

이러다간 이 세상에서 같이 산 이름 몇마저

제대로 담지 못한 머리를 들고

저 세상 불 앞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꽃들이여, 새들이여, 저세상에는

기억이 더 아픈 자들도 서성댈 것이다.

그대들, 이름 같은 데 신경 쓰지 말고

제 생김새, 제 색깔, 제 꿈들을 가지고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다들 가시게.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중에서, 92~93쪽)

    

 

우리는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고 있다. 잠은 죽음의 동생이다. 죽음의 본능을 가진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동생이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이다. 잠은 외부로부터 자극이 차단되고 반응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회복이 가능한 상태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억의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살고 있었다. 인간은 보통 일생의 30~40%를 잠으로 보낸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뭐가 아쉬워서 수면 부족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노동을 한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 섞인 잠마저 잊으니까 죽음도 같이 잊어버린 걸까. 삶의 여유마저 사라지는 것도 서러운데, 수면의 여유까지 없는 세상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기억의 집’이 아니라 ‘고통의 집’이다. 기분 나쁜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누구나 이 생기 없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혼이 어디 나갔지?

쥐똥나무 쪽에서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혼이라는 거, 그게 어디 따로 있는 거우꽈?

펭생 자기답게 열심히 살면, 그게 그의 혼입주.’

     

(『섬쥐똥나무들의 혼』 중에서, 82쪽)

    

 

정신이 건강한 혼일수록 생기가 싱싱하게 돌고, 삶의 의욕도 넘친다. 꿈, 사랑, 성실로 똘똘 뭉친 오체투지의 생은 특별하다. 즉, 정신이 건강한 혼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주변을 의식해 경쟁 대상으로 삼지 말고,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누구는 바른 역사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 된다고 말했던데, 거짓과 허위 뒤에 비겁하게 숨은 사람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는 주변을 의식해서 자신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지 못한 혼이 비정상이다.

   

삶이 하나의 전체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한계’를 떠올릴 때이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죽음과 친화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시인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연작시의 제목이자 시집 표제어인 ‘연옥의 봄’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간적 공간이다.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는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닌 어중간한 영혼이 머무는 곳.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죽음의 공포에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3-07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8 08:34   좋아요 0 | URL
죽음은 내곁에 머무는 생존의 그림자.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김이지 2017-04-15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좋은 글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공포에 떠는 삶이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라는 것이 와닿는 대목이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4-15 19:49   좋아요 0 | URL
한 번뿐인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벌써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훈 《공터에서》 (해냄, 2017)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김훈의 《공터에서》에 둘러싼 논란 말이다. 이 소설을 안 읽어 본 사람들도 안다. 유아 성기를 묘사한 소설의 문장이 문제라는 사실을.

 

북청(北靑)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이도순은 머리에 쌀 한 말을 이었고, 신혼의 남편이 돌 지난 딸을 업었다. (중략) 아기가 남편의 등에서 오줌을 쌌다. 남편이 처네를 풀었다. 이도순은 보따리에서 기저귀를 꺼냈다. 딸아이의 작은 성기가 추위에 오므라져 있었는데 그 안쪽은 따쓰해 보였다. 거기가 따뜻하므로 거기가 가장 추울 것이었다. 젖은 기저귀에서 김이 올랐다.[1]

 

어떤 독자들은 이 문장을 보자마자 불편하다고 느꼈다. 특히 김현 시인은 ‘딸아이의 작은 성기’에 대한 묘사가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주장했다.[참고1] 그런데 이 문장을 남성 중심적 · 관음증적 시선이 빚어낸 최악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비판의 근거들이 빈약해 보인다.

 

관음증은 남을 몰래 훔쳐보는 행위이다. 인간은 사회를 조직하고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개개인의 원시적 본능은 억제되어야만 했다. 남의 눈 때문에 억압되어 온 감정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면서 해방감으로 전이돼 나타나는 것이 관음증으로 나타난다. 더욱 감춰질수록 관음증적 시선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김훈이 묘사한 ‘딸아이의 작은 성기’는 감춰진 상태가 아니다. 이도순은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그 신체 부위를 보게 된다. 딸이든 아들이든 신생아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어머니는 아기의 성기를 자주 볼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다. 부모가 기저귀를 가는 도중에 아기의 성기를 흘끗 보는 것만 가지고 아이의 성기를 ‘성적 대상물’로 바라본다고 규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여자의 성기를 묘사한다고 해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장으로도 볼 수 없다. 문장에 대한 지나친 과잉 반응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는 친구의 어린 딸(이름은 수전)의 기저귀를 가는 중에, 어린 딸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보게 된다. 그 문장을 인용하겠다. 이 문장을 읽는 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친구에게 자기 어린 딸을 좀 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딸을 수전이라고 부르자. 어머니는 신생아인 나 말고도 더 큰 딸이 있었으므로, 여자아기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수전의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음순의 동그란 둔덕 사이로 삐쭉 튀어나와 있는 클리토리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음경 같지는 않았다. 내 어머니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기 때문에 아기 음경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아기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코끝이나 새끼손가락처럼 보였고, 어머니가 천으로 닦아내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하게도 약간 단단해졌다. 어머니는 수전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모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2]

 

 

수전의 클리토리스를 자세히 묘사한 장면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꼈는가. 정말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생각했다면, (공개든 비밀이든) 댓글에 남겨주시라. 아! 덧붙여 말하자면, 나탈리 앤지어는 여성 작가이다.

 

성기가 따뜻해 보인다고 묘사한 문장도 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기 어렵다. 이 문장이 정말로 외국에서는 ‘소아성애증(pedophilia)’으로 신고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소아성애증은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 감정이나 성적 매력을 느끼는 증상이다. 소아성애자가 아무런 성적 의도가 없는 이 문장에서 성적 흥분을 느꼈다면 작가는 이 문장에 향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문장이 ‘소아성애증’을 유발하는 위험한 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 자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SNS에 공개하는 부모를 먼저 비판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떤 부모는 아기의 알몸 사진이 귀엽다고 SNS에 공개하기도 하는데, 소아성애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성기는 신체 일부이며 당연히 주변 환경에 따라서 체온 변화가 나타난다. 추울 때 몸에 발산하는 열이 피부 표면 밑을 흐르는 혈액에 전해지면 그 피부 부위가 따뜻해진다. 여성의 성기는 온도 변화에 예민하다. 왜냐하면, 신경의 결합조직인 루피니 소체(Ruffini‘s corpuscle)가 체온을 감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3]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4)

 

 

《공터에서》 묘사 논란 때문에 《칼의 노래》의 ‘젓국 냄새’도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유명한(?) ‘여진의 젓국 냄새’이다. 여진은 이순신과 같이 밤을 보낸 여성이다.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 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 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 있었다.[4]

 

작가는 전쟁통에 제대로 씻지 못한 여진의 불결한 상태를 여성의 질 냄새로 비유했다. 과학적인 사실을 근거로 이 문장의 문제점을 따져본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 (동아시아, 2017)

 

 

정상인의 질 내는 pH3.6∼4.5로 약한 산성을 띤다. 이것은 주요 생식기관인 여성의 질을 보호하는 유산균 박테리아가 질 내에 살면서 계속해서 젖산을 생성, 산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이 다른 균에 감염되면 이 산성도가 깨져서 분비물이 많아지게 되고, 오래된 생선 냄새와 유사한 악취가 일어난다. 김훈의 ‘젓국 냄새’를 본 남성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이 질을 자주 씻지 않으면 지저분한 냄새가 나는구나.’ 이런 인식은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여성의 질 냄새는 수치스럽고, 불결하다, 문란하다’는 편견을 심어준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친구나 아내를 위해 질 세척을 권하기도 한다. 특이한 질 냄새가 난다고 해서 여성의 질이 불결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질 냄새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다. 남성과 성관계를 자주 할수록 여성의 질은 정액에 노출되는데, 질 내 미생물 보존 상태가 교란된다. 그래서 질에 생선 냄새가 나고, 심하면 질염이 생길 수 있다. 질 세척은 안 해도, 그렇다고 너무 자주 해도 질 냄새가 생긴다. 질 세척을 자주 하면 질 내 유산균 같은 이로운 미생물마저 죽인다. 질 세척을 자주 할수록 난소의 건강이 악화하여 난소암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참고2]  여자친구의 질에서 나는 생선 냄새를 맡는 게 죽어도 싫어도 섹스를 하고 싶은 남자들에게 유용한 충고를 한다. 여자친구에게 질 세척을 강요하지 말고, 섹스할 때 콘돔을 착용해라. 생선 냄새가 나는 것은 여자친구 잘못이 아니다.

 

사실 《공터에서》에서 읽으면서 내가 불편하게 느낀 묘사는 따로 있다. 양갈보는 미군을 상대하는 매춘부를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런데 참말로 신기하다. 《공터에서》를 비판하는 독자들은 왜 이 문장에서는 침묵하는 걸까. 《공터에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인용 · 공유한 ‘딸아이의 작은 성기’ 같은 사소한 것만 보고 분노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마장세는 구두 통을 메고, 자석에 끌리듯이 미군과 양갈보의 뒤를 따라갔다. 꽉 조이는 스커트에 여자의 엉덩이가 도드라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덩이가 흔들렸다. 하얀 다리가 미군의 바짓가랑이와 보폭을 맞추었다. 아, 여자의 엉덩이는 왜 저렇게 도드라지는 것일까.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 엉덩이는 꽃이 피듯이, 해가 뜨듯이 그렇게 명료하게 마장세의 눈앞에서 도드라져 있었다. 여자의 엉덩이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라는 사실에 마장세를 놀랐다.[5]

 

 

 

 

 

 

 

 

 

 

 

 

 

 

 

* 데즈먼드 모리스 《털 없는 원숭이》 (문예춘추, 2011)

* 플로렌스 윌리엄스 《가슴 이야기》 (Mid, 2014)

 

이 문장이야말로 ‘남성 중심적 · 관음증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왜 ‘여자의 엉덩이’를 도드라진 ‘여성의 가슴’처럼 묘사한 것으로 느껴질까. 여성의 엉덩이를 남성을 위한 성적 신호로 묘사한 이 문장이 심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면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J. Morris)의 《털 없는 원숭이》 96쪽과 플로렌스 윌리엄스(Florence Williams)의 《가슴 이야기》의 2장 ‘젖가슴의 기원’을 꼭 ‘함께’ 읽어보시라.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여성의 가슴이 엉덩이를 모방한 성적 기호라고 주장하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가설을 반박한다.

 

 

 

 

 

 

 

[1] 김훈 《공터에서》 95쪽

 

[참고 1] 『소설가 김훈, 신작서 ‘소아 성기 묘사’ 논란… “관음적 시선 불쾌”』 여성신문, 2017년 2월 13일

 

[2] 나탈리 앤지어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구판) 107쪽

 

[3]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56쪽

 

[4] 김훈 《칼의 노래》(2001년 구판, ‘생각의나무’ 출판사) 39쪽

 

[참고 2] 『질 세척 자주 하는 여성 난소암 위험 2배』 연합뉴스, 2016년 8월 2일

 

 


댓글(29)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아의서재 2017-03-0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논란이 있었군요. 동의와 반대를 떠나 우리의 시선을 다시한번 재점검해야할 시기임을 느낍니다. 여성이 저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기존의 틀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반성하거나 각성해야하는 지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페미의 대세속에서 많이 배워야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7-03-07 20:58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된 언어, 그리고 시선들을 비판하는 일이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교정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yureka01 2017-03-0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논란 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저도 딸아이 아기일때 기저귀 자주 갈았죠.
초딩때까지도 목욕을 시켰어요....

소설적 표현의 디테일이 관음증으로 까여야 하다니..ㅎㅎㅎㅎ
진짜 그런건 깔 게 아니고
좀더 큰 테마를 비평해야할텐데 말이죠...

사소한 것에는 까칠하게 까면서,
정작 중요한 담론에는 건들지 않더군요...

cyrus 2017-03-07 21:01   좋아요 1 | URL
김훈 작가가 다른 작가와 차별화하는 문장을 만들려는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어떤 문장들은 빼도 되고, 아기 성기 묘사하는 내용도 그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이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나저나, 꼼꼼한 사이러스 님의 성의에 감동하고 갑니다..

이참에 이 포스트를 이달의 당선작으로 강력 추천합니다..

cyrus 2017-03-07 21:04   좋아요 0 | URL
아기 성기 묘사가 있는 문장을 근거로 작가의 반 페미니즘적 입장을 비판하는 리뷰를 봤어요. 김훈이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을 경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건 문제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문장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저는 김현 시인이 굉장히 비겁한 태도로 김훈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아마 괘씸하게 여겼던 부분은 한때 최고은( 아니다.... 최보은 기자였나 ? ) 하튼 그런 대화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김훈의 생각이 담겨 있어서 꽤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는데, 김현은 그것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집니다 . 김훈의 신작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말이죠..

cyrus 2017-03-07 21:08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소설을 안 읽는데다가 국내 문단에 소홀했거든요.

페미니즘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훈의 작품을 타당한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비판하면 좋은데,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없는 원숭이 책에서 저도 저문장을 읽고나서 모리스 등신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 글에 이 사람 비판한 것도 있는데... 엉덩이 형태가 가슴을 모방했다고.. 그런 바보같은소리가 어디있냐교.. ㅋㅋㅋ

cyrus 2017-03-07 21:09   좋아요 0 | URL
데즈먼드 모리스를 깐 곰발님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요. 저보다 더 재미있게 깠을 것 같습니다. ^^

stella.K 2017-03-0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나도 작품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

이걸 가지고 문제를 삼을 것 같으면
하루키나 <롤리타> 같은 건 번역되지 말아야지.
1Q84 같은 경우 아오마메 부분은 여자잖아.
결국 하루키는 남자 작가아냐?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필요있나?
하루키는 변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지.
근데 하루키는 그냥 끝판으로 다 보여 주거든.
그렇다고 누가 욕하는 사람 없잖아.
중요한 건 김훈이 그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는 거 아니겠냐?
전체를 보고 얘기해야지 단편적인 거 가지고 작가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건 좀 지양해야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본질 가지고 얘기 안하고 비본질 가지고 따지더라.
하긴 이러다 김훈도 뒤통수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만...ㅋㅋ

cyrus 2017-03-07 21:15   좋아요 1 | URL
어떤 독자는 문제 있는 소설의 묘사에 반응하지 않는 다른 독자들을 욕하던데요. 보는 눈이 없다면서요.. ㅎㅎㅎ

저는 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올거로 예상했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썰렁해서 제가 무안해지네요. 곰발님처럼 전투적이면서 시니컬하게 글을 썼어야 했는데.. ㅎㅎㅎ

분노의휘갈김 2017-03-07 2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허나 마장세의 생각을 묘사하는 부분 마저도 마장세라는 인물을 전달하기 위한 서술일뿐 한쪽 성을 깔보는 인식이 드러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cyrus 2017-03-07 21:18   좋아요 0 | URL
사실 마장세의 시선에 대한 묘사는 보는 사람들마다 반응이 다를 겁니다. 다만 페미니스트 입장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구경거리가 전락한 묘사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17-03-08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잘 뜯어보셨네요. 저는 글쓴이의 의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똑같이 성행위묘사를 찍어도 하나는 에로가 되고, 아나는 멜로가 되잖아요.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하는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원론적인 비판 같은 것도 별로...비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비판 같은거.. 참 싫죠...

cyrus 2017-03-08 08:58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이번 김훈 작가의 신작소설에 대한 악평 대부분은 과거 작가의 반 페미니즘 발언까지 언급하면서 비판한 내용이 많았어요. 과거 발언이 잘못된 건 사실이지만, 이걸 굳이 리뷰에까지 언급해서 책에 평을 하는 방식이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건 리뷰가 아닙니다. 그냥 책이나 작가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3-0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에서 계획서 검토해달라고 하면
전반적으로 내용을 봐야되는데
기껏 띄어쓰기나 오타 잡아내는 사람들이 있죠.

cyrus 2017-03-08 13: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리뷰 쓸 때 정말 쓸 내용이 없으면 오타나 꼬투리 잡을만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봅니다.

레삭매냐 2017-03-0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서 보고 싶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고 싶어 예약 신청을 했는데 자그마치
순번이 7번이나 되고, 전에 빌려간 사람이 2월
에 반납했어야 하는 책을 아직까지 끼고 있어서
언제나 읽게 될지 모르겠네요...

cyrus 2017-03-08 15:10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이 사는 곳, 서울의 도서관은 예약 대기자를 많이 받아주는군요. 대구 도서관은 무조건 예약 대기자는 2명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저는 운 좋게 대구시청 작은도서관에 있는 걸 대출예약해서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어요. 레삭매냐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

건조기후 2017-03-09 18:1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젠더 문제는 결국 바로 그 젠더 문제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결코 하나의 지점에(는 커녕 비슷한 지점에조차도)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네요. 단지 여아의 성기 표현 하나때문에 분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사안을 너무 단순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만큼 여성의 신체가 얼마나 함부로 표현되고 묘사되는지 문제의식을 갖지 못 할 만큼 익숙해져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딱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선 한국의 남성작가가 쓴 소설 <공터에서>와 여성이 쓴 과학도서인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를 비교하는 것은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분야에도 김훈 소설의 여성비하적 표현보다 더 심각한 책이 넘치고 넘치고 넘치겠지만 그 또한 비교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가 불쾌하고 불편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이 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핵심을 비껴간 비겁한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갓난아기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적 묘사와 표현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아 이 정도면 비판할만 하구나, 결론을 내린 이후에야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훈의 문장이 불쾌하다는 것이 다른 건 괜찮다는 의미가 아닌데요.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성기를 보고 안쪽은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아기 엄마가 딸아이 질 안쪽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자기는 물론 딸아이든 누구든 질 안쪽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요. 그것은 질에 삽입하는 사람의 느낌이고, 이도순이 딸아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김훈이 여자 아기를 보는 시각입니다. 소아성애적이라고 비난하는 이유입니다.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여성의 심리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작가가 이도순의 눈을 빌어 은밀하게 아기의 성기를 감상하는 것이 관음증적이라는 뜻입니다. 성기를 몰래 본 게 아니고 드러내놓고 봤으니 관음증이 아니라니 ;; 관음증이라는 단어를 너무 단순하게 지시적 의미로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설사 아기의 질 안쪽이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김훈이라는 작가가 그렇게 여성 캐릭터를 세밀하게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밀하게는 커녕 지금까지 일관되게 젓국, 생리혈 등등 여성의 존재의미를 오로지 질이라는 신체기관 하나에만 국한시켜왔던 작가입니다.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거나 생명을 잉태하는 도구로서의 여성 이외에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갖는 가치관이나 심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작가가 딸아이의 성기를 바라보는 애 엄마의 감정이랍시고 작가 본인이 여성의 질을 바라보는 눈으로 표현하니까 역겹고 어처구니가 없는 겁니다.

김훈의 과거 인터뷰가 저 문장에 대한 비난을 증폭시켰던 것은 사실이고, 책에 대한 비판과 인터뷰에 대한 비판이 혼재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런 여아 성기 묘사의 문제에 있어서 그가 실제로도 지독한 성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나요? 작가의 가치관이나 성향을 작품과 별개로 봐야할 경우도 있지만 작품이라는 게 결국 작가 내면세계의 정수를 담은 결과물이기에 결코 따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가감없이 드러낸 작가의 인터뷰를 비판하는 것이 책 속의 성적 표현을 비난하는 것과 다르다고 보진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까 겹쳐지는 게 당연한 겁니다.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캡처된 문장 하나로 침소봉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읽기가 싫은 기분을 결코 이해하지 못 하실 것 같습니다. 욕을 하더라도 읽어나보자 하고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정말 책을 만지기조차 싫더군요. 지금까지 줄곧 반복되어온 여성혐오패턴을 다시 눈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단순히 문장 하나에 과잉반응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쌓여왔던 분노가 지난 강남역사건에서 비로소 터져나왔듯이 한국문단에서 지금까지 수없이 난무해온 여성혐오 여성비하적 표현에 대해서도 비로소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이 있고, 각종 사회문제를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맥락속에서 저런 표현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겁니다. 문장 하나로도 충분히 문제지만, 이런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줄여야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상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능력의 한계네요.

cyrus 2017-03-10 10: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건조기후님. 댓글을 남겨주신 점 감사드리고요,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몇 시간 동안 건조기후님의 댓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읽었어요. 건조기후님의 생각에 대한 제 입장을 신중하게 밝히고 싶었고, 제가 잘못 생각한 점이 있는지 검토해봤습니다. 그래도 건조기후님이 제 의견에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배움이 부족해서 미흡한 점이 있을 겁니다.

저는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을 둘러싼 논란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가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채 묘사된 것에 심각하게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이라는 글에서 마장세가 매춘부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비판했습니다.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과 아기의 클리토리스를 묘사한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비교한 점이 잘못되었다는 건조기후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사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쓰기 전까지 정말로 두 문장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인용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글쓴이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인용했으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어요. 아니면 남성 작가가 쓴 글이라고 소개하면 이 또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요.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를 ‘아버지’로 살짝 바꿔서 썼다면 어땠을까요? 여러 가지 반응이 있겠지만, 아마도 글쓴이가 아기의 클리토리스를 바라보는 점, 그리고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마음에 들었다’라는 표현 때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은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 논란을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으로 판단해서 쓴 글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라는 의도로 글을 쓰지 않았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이보다 더 심한 사례’로 설정한 것도 아니고요. 제가 그런 의도로 글을 썼으면, 여성이든 갓난아기든 성기를 묘사한 다른 작가의 글을 인용했겠죠.

건조기후님이 딸아이 성기를 바라보는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를 언급하셨는데요, 건조기후님 말씀대로 김훈처럼 생각하는 여성이 없을 거예요. 딸아이 기저귀를 가는 아버지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고, 역시 김훈의 묘사에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건조기후님이 언급한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를 보면서 그 개념의 반대를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가 자기 딸들의 생식기에 마음에 들어 하는 감정이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지 궁금했어요.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건조기후님의 논리대로라면 여성들이 자기 딸의 생식기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딸아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남성은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는 클리토리스’를 선호하지 않고, 무조건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클리토리스’가 예뻐서 좋아하는,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건조기후님의 논리대로라면 제가 이 댓글에 인용한 문장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관음증을 단순하게 바라봤다는 건조기후님의 지적을 인정합니다. 소설, 각종 미디어에서의 ‘관음증적 시선’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협소한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관음증’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공터에서>를 읽으면서 김훈이 ‘가부장제의 힘에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인 작가’로 보였습니다. 당연히 <공터에서>를 통해서 가부장제로 인해 주변에만 머무는 여성 인물(이도순)과 가부장제의 힘에 종속된 여성 인물(박상희)를 봤습니다. 제 리뷰를 보셨는지 모르지만, 제목이 『여성도 슬퍼했고, 아팠다』입니다. 안 보셔도 됩니다. 만약에 읽어보신다면, 제 글의 문제점을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김훈의 과거 반페미니즘 발언, 그리고 작품 속에 드러난 성차별주의를 모조리 덮자고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남성 작가들의 성차별적 · 남성 중심적 발언과 묘사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교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김훈의 성기 표현 논란 분위기가 너무 일찍 소강상태를 보인 게 아쉽습니다. 저는 점점 식혀지는 ‘뜨거운 감자’를 건드려봤고, 다른 관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 입장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 또한 타당성 있게 설명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저도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건조기후 2017-03-14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공부가 많이 부족하고 또 제가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단지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 성기같은 것을 묘사했다고 해서 무조건 여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 페이퍼에서 마장세가 여성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부분이 오히려 여성혐오 아니냐 하셨는데 저는 이 대목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습니다. 물론 소설이 아니라 실제라면 다를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소설이라고 해도 불쾌할 수 있겠죠. 저는 되려 마장세가 아주 짠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미군의 옆에 붙어가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저런 기분을 느끼는 남성 캐릭터는 여성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한심하고 토 나오는 캐릭터이긴 한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고 소설에서 그리지 못 할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요.

불쾌하냐 아니냐 기준을 명확하게 딱 선을 긋기는 어렵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저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긴 한데 왜 꼭 성적 대상화된 여성만을 소설에 등장시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저런 캐릭터가 소설의 재료로 취사선택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의 기준에 작가의 가치관과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겠고요. 세상은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데 여전히 구시대적인 여성관에 사로잡힌 작가를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결국 문학이란 인간에 대해 천착하는 것인데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작가를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저는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댓글에서 굉장히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여성이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오지 않은 깔끔한 생식기를 좋아하는 것이 왜 남성중심적 시각입니까? 남성이 선호하는 것과 여성이 선호하는 것이 같으면 여성이 남성의 선호를 따라가는 것인가요? 이해가 되지 않네요. 여성이 좋아하는 건 여성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성도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오지 않는 것을 좋아할 수 있죠.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여성들이 왜 자기 몸을 남성의 시각으로 본다고 생각하세요? 남자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성형을 하는 여자들도 있긴 하지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으시고 여성들의 존재를 찾는 데 노력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탈리 앤지어의 책에서 인용하신 부분을 처음에는 아버지가 한 말이라고 바꿔볼까 하셨다는데, 기본적인 인식부터 굉장히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적인 언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발화자의 성별인데 그것을 바꿔서 반응이 어떨까를 보려고 하셨다니 좀 당황스럽네요. 어머니가 한 말이라면 단순한 취향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한 말이라면 당연히 아기를 성적 대상화한 것이고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딸의 성기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하나요? 왜 여성의 성기가 남성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까? 당연히 이런 비판이 따랐겠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네요.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도 과학적인 시각으로 중립적으로 봐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

저 위의 댓글도 쓸까말까 하다가 답답해서 쓴 것인데, 조금이라도 여성의 입장이 이해되기를 바랐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던 것 같네요. 나름대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페이퍼를 성실하게 작성하신 것은 알겠지만 진심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신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기본적인 이해조차 잘 못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늘 이런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말하다 지칠 것이 뻔해서 댓글도 쓸까말까했던 것인데 역시 우려대로네요. 제가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하는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평소에 워낙 다독하시는 분이니 앞으로도 관심이 있으신만큼 많이 읽으시고 사고의 깊이도 더해지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cyrus 2017-03-14 10: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건조기후님.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조기후님의 답글을 읽고 난 후 제 첫 번째 의견(댓글)을 다시 검토해봤습니다. 제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페미니즘의 기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을 인정합니다. 건조기후님의 충언,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나탈리 앤지어의 말을 아버지 입장으로 바꿔보려는 제 생각은 불순한 의도로 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의견을 전달하는 데 역효과가 된 건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를 비판하는 의견을 과학적 관점으로 검토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건조기후님의 의견을 듣고 보니 제 생각이 많은 분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신체 부위를 묘사했다고 해서 여성 혐오, 성차별적인 묘사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조기후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마장세가 엉덩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묘사한 장면이 여성 혐오인지 아닌지 의견이 엇갈릴 듯합니다. 건조기후님처럼 그 묘사가 여성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은 분들이 있으니까요. 서로 다른 관점을 시선의 차이로 이해하겠습니다.

여성도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견에서 남녀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얽매 여셔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과거의 남성들은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했고, 자신의 취향을 여성에게 강요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온 여성을 ‘마녀’로 규정했고, 클리토리스의 형태를 여성의 또 다른 얼굴로 봤습니다. 여성들은 클리토리스를 예뻐 보이려고 화장을 했습니다. 남성들의 만족을 위해서죠. 남성들은 예쁘면서도 깔끔한 형태의 클리토리스를 선호했고요, 남초 커뮤니티나 군대에서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한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만난 적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가 소수일지 아니면 생각보다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마이 버자이너》와 나탈리 앤지어의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에 호르몬 이상으로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가진 여성들의 사례가 나옵니다.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들은 그녀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남성중심적 사고와 편견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유를 억압합니다. 그리고 예쁜 클리토리스를 만들기 위해 미용 수술을 합니다. 《마이 버자이너》에 보면 네덜란드의 소녀들은 자신의 클리토리스가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고민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미용 목적의 클리토리스 성형 수술이 있습니다. 《마이 버자이너》의 저자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은 《마이 버자이너》의 구판 《버자이너 문화사》입니다. 제목만 다를 뿐, 저자와 내용은 동일합니다.

“여성 성기 미용 의사는 성기의 비대칭을 모조리 바로잡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 의사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는 수많은 사진들을 보았는데, 엄청나게 다채로운 개개인의 다양성이 천편일률적으로 다듬어져 일종의 표준 음부로 탈바꿈한 데 무척 놀랐다. 우리가 보는 포르노 사진들 역시 손질을 통해 다듬은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모델은 점점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되고 있다.” (《버자이너 문화사》 428쪽)

여성이 매끈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하는 건 그 여성 개인의 취향입니다. 그렇지만, 남성들이 좋아하는 포르노 배우처럼 여성이 클리토리스를 예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라면 클리토리스가 크든 작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클리토리스가 크다면서 무시하고, 놀리는 남성은 여성의 몸을 남성이 소유하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또 여성의 몸은 무조건 아름다워 해야하며 그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선호하지 못한 것을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봤던 것입니다. 제 입장을 오늘 ‘마이페이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 시선 때문에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가꾸려고 하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저는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남성들의 편견과 시선 때문에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다락방 2017-03-14 18:23   좋아요 2 | URL
뒤늦게 덧붙이기가 저어되지만, 건조기후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서 부러 씁니다. 저는 이 페이퍼를 읽고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불쾌함을 백번 얘기해도 전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 역시 긴 댓글을 쓸까 하다가 피로함이 느껴졌어요. 게다가 주루룩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이 지점에 대해 제가 제 불쾌함을 적는다해도 전달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뒤로 빠졌습니다. 페미니즘 얘기하면서 다른 남성 알라디너와도 얘기하다 벽을 느껴본지라 제 힘으로 이걸 전달할 순 없을거라 포기했어요. 그런데 건조기후님은 제가 포기한 걸 해주셨네요.


제가 일전에도 사이러스님께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 역시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고 또 그 나름의 관점과 생각을 갖고 계실겁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들 비난한다면, 또 화를 냈다면, 사이러스님, 그건 그들이 뭔가를 놓쳐서가 아니라, 뭔가를 보았기 때문일겁니다.

cyrus 2017-03-14 18:45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이 제 글의 결함, 그러니까 제가 문제의 사태를 심각하게 깨닫지 못한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댓글을 남겨주신 건조기후님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물론, 잘못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페미니즘에 부합되지 않는 입장을 드러내는 제 글을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네. 제가 페미니즘의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제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을 쓴 이유가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제 입장을 공개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문제점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역시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다락방님 말씀처럼 제가 다른 분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 글쓰기가 옳은 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글쓰기로 제 자신을 교정하고 싶습니다.

너드 2017-03-16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책도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열받은 건 김훈의 인터뷰 시 여성에 대한 쓰레기같은 워딩들 때문이에요. 궁금하시면 검색해 보시면 수두룩하게 뜨니까 참고하시구요. 여성혐오와 남성우월주의에 찌든 그의 워딩의 저열함이란 사이러스님의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정말... 미리 눈뽕(...) 조심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여기에 반대 댓글이 잘 달리지 않는 건 알라딘 특히 모바일의 경우 지금 이 댓글 페이지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너무 까다로워서일 거예요. 접근성이 이렇게나 떨어지니 여기에 댓글이 뭐가 달렸는지 알기가 너무 어렵죠..(저만 해도 책 상세페이지 아래 의견 섹션은 그냥 책 살까말까 독자들 반응이나 보는 용도였지 이렇게 답글 달려고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 헤맸어요 ㅋㅋ 의견 나누는 창구 접근성이 이렇게 떨어지는 거 진짜 고쳐야 해요 알라딘...)

cyrus 2017-03-16 09: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Jeremias님. 죄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초면에 댓글을 남기기가 망설였을 텐데 의견을 밝혀주셔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공터에서>를 읽기 전부터 김훈의 반페미니즘 발언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때 김훈의 소설을 읽은 독자로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지적한, <칼의 노래>와 <화장>의 여성 차별적 묘사도 다시 봤습니다. 비판받을 만한 문장이었습니다. 몇몇 분들의 의견을 듣고 나니까 <공터에서>의 성기 묘사에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글에 반대 댓글이 달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겁니다. 첫 번째 이유는 Jeremias님이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북플 이전의 알라딘 서재 시절에는 회원들은 컴퓨터로 서재 글과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플이 생기니까 스마트폰으로 글을 보게 되고, 분량이 긴 글을 읽기가 불편해요. 댓글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긴 내용의 댓글을 스마트폰으로 입력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댓글은 컴퓨터로 접속해서 남기는 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제 서재가 ‘비회원 계정으로 댓글 달기’ 설정을 막아놨습니다. 비회원 계정으로 악의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건조기후님이나 Jeremias님처럼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히거나 소신 있게 비판하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설득할 수는 있어도, 상대방이 틀렸다는 식으로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욕설이나 인신 모욕 발언이 들어있지 않으면, 저를 비판한 다른 분들의 댓글을 지우지도 않습니다. 만약 제 서재에 ‘비회원 계정’으로 댓글을 달 수 있었다면, 거의 욕설로 도배되었을 겁니다. ^^;;

너드 2017-03-17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댓글을 어떻게 다는지 몰라 새로 냄깁니닼ㅋㅋㅋ 아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 기능(비회원 계정 댓글 막는)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너무나 신기.. 각설하고 사이러스님의 의견 나눔에 관한 성숙한 태도는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