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3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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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사물을 볼 때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사물도 달리 표현되고 또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을 보면 예술가들의 시각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들의 미술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예술가가 고민하고 호흡한 모든 상념과 숨결을 느끼는 것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발심을 유지하며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속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의문들과 궁금증이 인다. 이는 작품에 문외한이란 말이고 모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토로이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 2011)에 나오는 구절이다. 미술작품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나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작품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 가까이 봐도 제대로 본 것은 없다. 유홍준의 《안목》(눌와, 2017)은 미술작품을 볼 때 필요한 ‘안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내용 면에서는 저자의 전작 《국보순례》(눌와, 2011)와 《명작순례》(눌와, 2013)와 짝을 이룬다. 전작이 우리 미술과 한국 미학의 정수를 끄집어냈다면, 이 책은 안목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책이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틀 속에 빠져 자칫 ‘전문가의 안목’을 소개하는 것을 피하고,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안목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술작품을 지혜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적절하게 가치를 알아주는 것. 그것이 미술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오늘날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추사체를 개성이 넘치는 글씨라고 말한다. 추사체는 추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 완성됐다. 글 쓰는 일에만 전념했을 만큼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추사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당대 사람들은 추사체를 괴이한 글씨체로 봤다. 추사는 자신의 개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하소연을 드러냈다. 그래도 추사의 진가를 알아보는 당대 안목 있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보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작품과의 교감도 달라진다. 먼저 장점을 찾는 관심이 필요하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화가다. 그는 인품이 너그러워서 제자의 작품을 평할 때 제자의 장점을 강조했다. 추사는 표암과 반대로 제자의 작품을 혹독하게 평했다. 그는 작품을 올바로 보려면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 즉 부릅뜬 눈과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목》 19쪽)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렇지만 안목은 예술만큼 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이 언젠가는 사상 최고의 명작이 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안목은 예술보다 더 길 수도 있겠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안목을 양분으로 삼아 미술작품을 마음껏 즐기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미술작품 속에 녹아든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미술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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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8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18 16:47   좋아요 2 | URL
안목이 부족해서 문화재 관리를 소홀히 하면,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기 쉽습니다. 미래에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탁월한 안목을 가진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훼손됩니다.

캐모마일 2017-04-2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틀 속에 빠져 자칫 ‘전문가의 안목’을 소개하는 것을 피하고,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안목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술작품을 지혜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적절하게 가치를 알아주는 것. 그것이 미술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감명 깊게 읽고 갑니다. 책이 사랑받는 이유를 알 거 같네요.

cyrus 2017-04-20 17:24   좋아요 1 | URL
좋은 책도 훌륭한 안목의 눈길을 받지 못하면 알려지지 못한 채 절판됩니다. 저는 좋은 책을 잘 고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싶습니다. ^^;;
 

 

 

알라딘 서재, 북플 활동을 하다보면 인사말 없이 조용히 탈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탈회 회원이 남긴 댓글이나 그분이 눌렀던 ‘좋아요’ 흔적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렇지만, 닉네임은 사라지면서 ‘비로그인’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됩니다.

 

 

 

 

 

 

 

 

이 닉네임을 아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알파벳님. 이 분 원래 닉네임이 ‘롤리팝’이었습니다. 작년에 ‘알파벳’으로 닉네임을 변경했고, 프로필 사진은 구글(Google) 로고를 따온 것이었습니다.

 

어제 알파벳님이 탈퇴한 사실을 알았어요. 알파벳님은 ‘즐겨찾기가 많이 된 서재’였습니다. 작년 ‘서재 기네스’ 결과를 정리한 서재지기 게시판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파벳님의 서재로 이동하는 링크를 누르면 ‘해당 서재가 없거나 삭제되었습니다’라고 알리는 창이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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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4-1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탈퇴하셨군요....왠지 최근에 리뷰가 없더라니....아쉽네요......

cyrus 2017-04-17 16:13   좋아요 1 | URL
알파벳님이 책 속 문장을 인용해서 올린 게시물은 봤지만, 리뷰는 본 적이 없어요. 이분은 글을 쓰는 대신에 다른 분들의 글에 ‘좋아요’를 많이 눌러줬어요. 아마도 그런 모습 때문에 알파벳님의 서재가 ‘즐겨찾기가 많이 된 서재’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박람강기 2017-04-1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오시길 빕니다.

cyrus 2017-04-17 16:13   좋아요 0 | URL
탈퇴해도 재가입 가능하고, 구 닉네임을 다시 써도 되는 걸로 압니다.

yureka01 2017-04-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없었나요??우째 기억도 가물가물한지 ㄷㄷㄷㄷ

cyrus 2017-04-17 16:22   좋아요 1 | URL
제가 기억하는 것은 알파벳님이 <어린왕자> 속 문장을 인용한 게시물을 10개 이상 올렸던 일입니다. 며칠 지나니까 그 게시물들을 볼 수 없었어요. 아마도 비공개로 변경했거나 삭제됐을 겁니다.

hnine 2017-04-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생활 오래 하다 보면 이런 분들 꽤 계시고, 어떤 날 문득 이분들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그런날이면 몹시 서운하고 보고 싶고 (비록 얼굴을 뵌적 없지만) 그렇지요.

cyrus 2017-04-17 21:57   좋아요 0 | URL
몇 년 훌쩍 지나고 나면, 예전에 뵙던 분들 그리고 조용히 서재 활동을 접은 분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정말 허무하면서도 예전 일들이 그리워집니다.

AgalmA 2017-04-17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가끔 인사드리고 했는데... 신변의 우환 같은 사연이 아니시길...

cyrus 2017-04-17 22:00   좋아요 1 | URL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Agalma에서 AgalmA로 살짝 변경됐네요. 양쪽의 A가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

AgalmA 2017-04-17 22:02   좋아요 2 | URL
왠지 웃는 상 같지 않습니까
ㅋgalmㅋ같이ㅋㅋ

cyrus 2017-04-17 22: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그렇네요. 영어 한 글자를 대문자로 바꾼 건데, 느낌이 확 달라지는군요. ^^

나와같다면 2017-04-19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적‘ 님 생각이 나네요..

2017-04-19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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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제대로 해결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종종 면발이 당기는 날이 있다. 식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즉석에서 말아주는 국수를 먹는 것은 소박한 즐거움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담긴 잔칫집에서의 국수는 어떤가. 생일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혼례 때는 부부가 해로하라는 의미로 대접하는 국수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겨우내 곰삭은 묵은 김치를 쫑쫑 썰어서 참기름 넣고 버무려 국수 위에 올려놓아 먹으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국수의 맛이 최고라는 생각하는 것은 입안에 감도는 그 ‘맛’이 아니다. 맛있는 국수를 먹을 때 마음속까지 아련해지는 것은 옛날에 여러 사람과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느꼈던 ‘정(情)’ 때문이다. 소찬이지만 둘레 상에 모여앉아 젓가락을 움직이며 나누는 국수에는 서로를 아우르고 위로하는 힘이 있다.

 

끊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

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어느 저녁』 중에서, 14~15쪽)

 

도종환 시인의 『어느 저녁』에서 차려진 국수는 평등한 음식이다. 나도 한 그릇, 너도 한 그릇. 누구에게나 평등한 음식이어서 좋다. 굳이 여유를 부리지 않아도 좋은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말없이 국수를 먹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큰 위안이 된다.

 

 

 

 

 

Scene #2

 

 

인생의 본질은 니체(Nietzsche)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운명에 대한 사랑, ‘아모르파티(amor-fati)’다.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단순히 체념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내 운명이라면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위버멘쉬(Übermensch)는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재창조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이전과 다른 나를 부단히 재창조하는 인간상이다.

 

모래벌판으로 난 길과 낙타들의 행렬을 따라가다

오늘 수첩을 꺼내 아모르파티라고 적는다

오라 운명이여

한낮의 모래언덕과 초저녁의 푸른 초승달과

내게 오는 운명을 사랑하리라

세상은 오래도록 모래와 바람이 휘몰아치며

열사의 뜨거움과 밤의 냉기가 충돌하는 곳

쓰러질 때까지 내 운명을 지나가리라

선택하고 뉘우치고 또 나아가리라

 

(『아모르파티』 중에서, 58~59쪽)

 

『아모르파티』의 화자는 현재의 정체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Zarathushtra)를 닮았다. 그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위해서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멈춰 서서 성찰한다. 우리는 흔히 목적의식 없이 사는 사람을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목적이 있어야 방향감을 잃지 않고 매진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목적으로 바라보면 그 순간부터 목적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볼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목적의식을 부여하면 그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그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문이 닫혀버린다. 삶은 우연한 마주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숱한 고뇌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실적 삶에 거리를 두는 성찰의 시간이다.

 

 

 

 

 

Scene #3

 

 

세상은 지난 4월 16일에 멈춰버린 괴로운 순간을 털고 일어서자고 한다. 일각에서는 ‘유독 세월호 희생자들에게만 과도한 슬픈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내 의견은 다르다. 우리가 남의 일인 사고로 인해 슬픔을 느꼈다면, 그 슬픔은 단순히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수준을 넘어 본인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이입이 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조금은 털어내고 냉철히 현상을 짚어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는 것 자체를 집단적 무기력 증세로 보고, 이를 금기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매년 4월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슬픔은 ‘화인(火印)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기도 하다.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화인(火印)』, 114쪽)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일은 집단적 슬픔 · 애도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계기’였을 뿐이다. 세월호 사고와 연관된 각종 문제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극우 세력은 세월호 사고라는 하나의 사건이 갖는 사회성을 부정한다. 희생자에 향한 애도하는 행위마저 이념의 색깔을 입혀 깎아내린다. 그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오만하다. 우리는 슬퍼하고 추모할 자유가 있다. 잠깐의 슬픔 후에 다시금 일상으로 걸어 들어가 숨죽이며 사는 것도, 그 슬픔을 딛고 느낀 바대로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어 행동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우리가 느낀 대로 고인들을 추모하는 자유를 당신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왈가왈부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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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4-16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아직 잊을 권리가 없다..

cyrus 2017-04-17 15:18   좋아요 0 | URL
어제 영국 프로 축구팀 맨유 유나이티드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말로 세월호 사고 3주기 추모 성명서를 공개했어요. 이 소식을 전한 네이버 뉴스 게시물의 댓글 게시판에 맨유의 추모 성명서에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습니다.

영국은 매년 힐스보로 참사를 잊지 않고, 추모를 합니다. 이런 모습은 당연한 건데, 우리나라는 3년이 지난 사고를 추모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4-16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 가장 맛있는 국수는 80년대 중반 서대전역 기차역에서 먹었던 가락국수로 기억되네요.^^: 기억할 사람은 평생 가지고 갈 사건이 세월호 참사라 생각이 들어요. 물론 잊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요..

cyrus 2017-04-17 15:23   좋아요 1 | URL
대구 서문시장에 파는 칼국수가 유명합니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에 먹기 좋은 음식입니다. ^^

세월호 사고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잊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건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추모하는 일을 사회통합에 저해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매도해서 지나간 일을 덮어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AgalmA 2017-04-17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달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여러 문화권 사람들이 지능으로 여기는 측면을 연구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같은 사회적 속성을 지능의 한 측면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동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졌다.˝
-리처드 리스벳 <무엇이 지능을 깨우는가> 중

그 분들에게 생각 좀 하고 살고 말하자 그러면 더 욕 들을라나요^^;

cyrus 2017-04-17 22:35   좋아요 0 | URL
차분히 설득을 해도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그런 좋은 말조차 듣기 싫은 적의 말처럼 들릴 거예요. ^^;;
 

 

 

 

일본어 ‘후조시(腐女子)’는 한국말로 옮기면 ‘썩은 여자’로 해석된다. 원래 남성 동성애를 그린 만화나 소설, 즉 야오이(やおい)와 BL(Boy’s Love)을 즐겨 읽는 여성들이 자조의 의미로 만들어낸 단어였다. 지금은 만화와 소설에 푹 빠진 2, 30대 여성 오타쿠(otaku)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일본의 여성 중심의 하위문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타쿠는 ‘마니아(Mania)’의 일본식 표현이다. 야오이와 BL을 보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드는 자연스러운 취미활동일 뿐이다. 그런데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기성세대의 눈에는 오타쿠가 비정상으로 보인다. 오타구의 성적 환상은 평범하지 않아서 오타쿠는 변태이거나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편견이 생긴다. 그래도 취미와 관련된 특정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부르게 되면서부터 오타쿠를 이해하는 시선이 부쩍 많아졌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몰입할 때 고립한다. 반대로 은둔형 외톨이는 세상과 담을 쌓으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집 안에만 지낸다. 그동안 오타쿠는 방구석에 처박혀 하나에만 몰두하는 은둔형 외톨이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덕후’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양지로 나왔지만, 여전히 ‘오타쿠 문화’의 확산을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남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만화, 드라마, 야오이 등 비현실 속 등장인물의 연애담에 푹 빠져 현실에서의 연애와 결혼을 등한시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은 이미 인구절벽으로 치닫고 있고, 결혼 자체가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덕후 문화’가 확산될수록 젊은 비혼 인구는 증가하게 될까?

 

 

 

 

 

 

 

 

 

 

 

 

 

 

 

 

* 우에노 치즈코, 미나시타 기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동녘, 2017년)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는 덕후 문화의 영향이 비혼(非婚)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녀라면 누구나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고 나면 한 번쯤은 멋진 왕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소녀들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꿈을 꾼다고 해서 실제로 왕자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소녀들은 성장하면서 현실과 상상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백마 탄 왕자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는 사실, 이젠 다들 안다. 대신 ‘왕자님’은 TV 드라마에 있고 하이틴 로맨스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야오이 · BL 문화를 잘 모르거나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야오이와 BL을 보는 소녀들이 동성애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과 거리가 먼 착각이자 편견이다.

 

미나시타는 동성애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는 기혼 여성이고, 이성애자라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알고 지냈고, 지금도 연락하면서 지내는 ‘여사친’은 야오이 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녀 역시 작년에 결혼했다. 야오이와 BL를 좋아하는 여성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만 봐도 야오이 · BL 문화가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에노는 후조시가 동성애 커플을 좋아하는 이유를 ‘남장한 이성애 커플’에 대한 환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므로 여성은 야오이와 BL를 보면서 느꼈던 사춘기 시절의 성적 환상을 스스로 넘어설 수 있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힌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끗이 지우는 일과 같다.

 

반면 일부 남성은 포르노 영상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섹스의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포르노 배우가 등장하는 야한 영상을 본 남자들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여성은 포르노 배우처럼 저렇게 해야 한다는 환상과 강박관념을 갖는다.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도 현실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래도 이성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포르노 영상의 한 장면이 기억나게 되고, 그것을 잊지 못할 때가 있다. 음경이 커야 섹스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사랑하는 여자의 동의 없이 항문 성교를 시도하는 등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앞서는 남자들이 종종 있다.

 

 

 

 

 

 

 

 

 

 

 

 

 

*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2017년)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남자들은 비현실적 드라마에 푹 빠진 여성이 현실 구분 못하는 ‘김치녀’, ‘된장녀’가 될 수 있다고 악의적으로 왜곡한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 원인의 오류’에 가까운 여성 차별이며 여성이 향유하는 하위문화마저 무시하고 있다.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야오이 · BL 문화를 비정상으로 보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 또한 잘못된 원인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오류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비혼 문제의 원인을 덕후 문화의 확산으로 보는 전문가의 입장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야오이와 BL를 보는 여성들을 심각하게 바라볼 것이고, 여기에 팔을 걷은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야오이와 BL을 불태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거로 믿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면 야오이와 BL를 보는 것도 문화를 향유하는 일이라는 점을 떳떳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오이 · BL 문화를 누리는 여성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비정상인’과 결혼을 기피하는 ‘이기적이며 까다로운 여성’으로 동시에 낙인찍힌다. 나는 야오이와 BL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야요이 · BL 문화가 사회 망조의 조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볼테르(Voltaire)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오이 · BL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겠다.

 

 

“나는 당신의 취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 취향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이 취향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 딴지 걸기

 

“옛날엔 2PM의 <죽어도 못 보내>가 참 좋았는데, 이제 이런 노래를 들으면 안전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왜 죽어도 못 보내는 거냐?” (《대한민국 넷페미史》 90쪽)

 

→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른 가수는 ‘2A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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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토낑 2017-04-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혼문제를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었네요. 저는 완전 의외에요. 제주변에도 비혼선언하신분들 꽤나 있으시지만 저런 이유로는 전혀 없으셔서요 ㅎㅎ

cyrus 2017-04-09 08:03   좋아요 0 | URL
야오이를 본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될 리가 없고, 결혼을 기피한다고 원인으로 보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2017-04-1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14 21:24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며칠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매일 글을 올리면 보는 분들 입장에서는 지겨울 수도 있어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7-04-15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화책을 보거나 전자오락을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속설(?)이 있었죠.ㅎㅎ 20년이 지나고 나니 왜 우리나라에선 Nintendo를 못 만드냐던 인간이 나왔구요.ㅎㅎㅎㅎㅎ 사실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들이 용납되긴 해요.. 학자들이야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내놓는 걸로 밥먹는 사람들이구요..ㅎㅎㅎ

cyrus 2017-04-15 19:52   좋아요 0 | URL
게임과 만화책을 성적 향상에 방해되는 악의 축으로 설정되다보니 지금도 그런 속설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
 
판다의 엄지 - 자연의 역사 속에 감춰진 진화의 비밀 사이언스 클래식 29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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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기독교와 끊임없는 갈등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시초를 규명하는 이론이 진화론과 창조론으로 양분되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진화론이 전혀 근거 없는 억측이라고 주장한다. 그 비판 근거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다. 생물의 진화 경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화석 증거물을 일컫는다. 복잡한 진화과정에 비하면 발굴된 화석의 수가 많지 않다. 진화학자와 고생물학자 들은 진화의 흐름에서 중간을 이어주는 생물들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써왔다. ‘잃어버린 고리’는 다윈(Darwin)의 《종의 기원》에서 시작된 진화론을 완성해주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다윈은 ‘잃어버린 고리’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점진론’을 내세웠다. 모든 진화는 오랜 세월 자연선택과 도태를 거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복잡한 생물계를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다윈주의자들은 화석 기록의 불연속성을 대충 얼버무리며 “자연은 결코 비약하지 않는다.”(naturanon facit saltum)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화석 기록이 없는 ‘진화론’은 고생물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래서 ‘잃어버린 고리’를 꼬집으며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진화론자들이 먼저 싸움을 걸지 않는다. 진화론자들은 ‘잃어버린 고리’가 진화론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처럼 진화론의 약점을 보완해줄 과학적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굴드의 《판다의 엄지》는 ‘잃어버린 고리’ 때문에 궁지에 몰린 고생물학자들을 구원한 책이다.

 

굴드는 다윈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이 항상 점진적으로 발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순간적 도약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굴드는 닐스 엘드리지(Niles Eldredge)와 함께 단속평형이론을 주장한다. 생물이 오랫동안 거의 변하지 않다가, 환경이 변화하면 갑작스럽게 형태의 변이나 종의 분화가 일어난다. 즉 생물은 생태계가 안정된 평형 상태에서는 거의 진화하지 않다가 빙하기, 운석 충돌 등으로 평형 상태가 깨지면서 순식간에 진화하거나 소멸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화의 역사에서 그런 사건이 자주 있었다. 4, 5억 년 전부터 지구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 종이 폭발적으로 생겨났다.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매우 다양한 주요 동물 군(群)이 대거 출현했다는 점에서 캄브리아기는 혁명적인 지질시대로 구분된다.

 

다윈은 필요 때문에 진화한다는 라마르크(Lamarck)의 용불용설을 반박하면서 종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했다. 진화는 목적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일 뿐이다. 그래서 판다(panda)는 사시사철 푸른 잎을 먹을 수 있는 대나무를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손목뼈를 변형하여 다섯 개 손가락과 별개인 가짜 엄지를 만들었다. 환경에 따라 진화의 방향은 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종의 능력을 퇴화시키기도 하고, 종을 더욱 연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인류의 출현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진보를 상징하는 승리의 과정이 아니라 위험과 우연한 성공의 연속이다. 생명의 진화는 인간의 출현으로 완성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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