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한 권이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일러스트레이티드 맨(황금가지, 2010)이다. 도서관에 빌린 책인데, 초판 번역본이다. 이 번역본의 해설과 부록이 마음에 든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 수록된 19편의 단편소설[1]이 처음으로 발표된 연도뿐만 아니라 브래드버리의 저작 목록까지 나와 있다. 그렇지만 번역본이 2010년에 나왔기 때문에 수정 · 추가해야 할 사항이 있다. 또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부정확한 것들도 눈에 띈다.

 

 

 

스무 살에 쓴 첫 단편 이상한 이야기(Weird Tales)를 시작으로 단편과 장편 소설, 희곡, 시 등을 넘나드는 5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책날개 앞 작가 소개’)

 

 

 

레이브래드가 생애 첫 번째로 쓴 단편 소설은 1938년에 발표된 Hollerbochen’s Dilemma(홀로보첸의 딜레마). 이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이상한 이야기(Weird Tales, 위어드 테일즈)>는 환상, 공포, SF 장르 문학 작품을 연재한 펄프 잡지다. 브래드버리는 1942년부터 이 잡지에 환상소설 및 공포소설을 발표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번역본의 해설은 브래드버리의 초창기 시절에 대한 내용이 정확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책날개 앞 내용이 해설의 내용과 달라서 독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비록 분량은 짧지만, 환상문학의 거장들(자음과모음, 2001)<위어드 테일즈>가 왜 장르문학의 요람으로 평가받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 밤(The Last Night of the World)1950<에스콰이어> 2월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357)

 

 

번역본에 소개된 작품 발표 연도의 출처는 William F. Touponce, Jonathan R. Eller가 쓴 Ray Bradbury: The Life of Fiction이다. 이 책에 세상의 마지막 밤‘1950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키피디아(Wikipedia) ‘Ray Bradbury short fiction bibliography’ 항목에 보면 이 작품이 ‘1951에 발표된 것으로 나와 있다.

 

The Internet Speculative Fiction Database(ISFDB, 장르문학 작품들의 발표 연도 및 출처에 대한 각종 기록 등을 정리한 검색 사이트)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첫 번째 공식 출처를 ‘19512The Illustrated Man초판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관련 링크: http://www.isfdb.org/cgi-bin/title.cgi?44809) 위키피디아와 ‘ISFDB’의 정보가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 일단 번역본에 언급된 작품에 대한 세부 사항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 수록된 몇 몇 작품은 다른 레이브래드 소설집 번역본(절판본 제외)에도 포함되어 있다.

   

 

* 그분이 오셨습니다(The Man)- 그분 (온 여름을 이 하루에)

 

* 기나긴 비(The Long Rain)- 끝없는 비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

 

*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The Mad Wizards of Mars)- 추방자들 (The Exiles,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

 

* 제로 아워/에이치 아워(Zero Hour)- 침공 놀이 (멜랑콜리의 묘약)

 

* 로켓(The Rocket / Outcast of the Stars)- 로켓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

 

 

 

 

 

[1] 일러스트레이티드 맨번역본 부제는 문신을 새긴 사나이와 열여덟 편의 이야기. 나는 작품집의 서문 격인 여는 글: 문신을 새긴 사나이(The Illustrated Man, 1951)도 하나의 이야기또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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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0 18:32   좋아요 0 | URL
요즘 많이 바쁘신가 보죠? 요즘 북한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한가롭게 책 읽고 글 쓰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마르틴 사파테르(Martín Zapater). 이 두 사람의 우정은 특별하다. 두 사람은 20여 년 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현재는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보낸 편지들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 편지가 남아 있어서 고야의 성품과 사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사파테르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고야와 동갑내기라고 보는 학자가 있고, 어떤 학자는 사파테르가 고야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이라고 주장한다.

 

 

 

 

 

 

 

 

 

 

 

 

 

 

 

 

 

 

 

 

 

 

 

 

 

 

 

 

 

 

 

 

 

 

 

 

 

 

 

 

 

 

 

* 《고야, 영혼의 거울》 (다빈치, 2011년)

*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 (시공사, 1997년)

* 새러 시먼스 《고야》 (한길아트, 2001년)

* 엘케 폰 라치프스키 《프란시스코 데 고야 :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 파올라 라펠리 《고야 : 검은 관능의 시선》 (마로니에북스, 2009년)

* 로제 마리 하겐, 라이너 하겐 《고야》 (마로니에북스, 2010년)

 

 

 

사파테르에 보낸 고야의 편지들을 보면 친구를 향한 화가의 진심 어린 우정이 느껴진다.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자신의 업무 활동(그림 제작), 사냥 일정, 그리고 아내의 출산 소식까지 편지로 언급하는 걸 보면 사파테르를 친구 그 이상의 가족처럼 여겼던 것 같다. 고야는 사냥을 엄청 좋아했다.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사냥보다 즐거운 일이 없다’(1781년 10월 6일)라고 썼다.

 

고야는 초콜릿도 좋아했다. 사파테르에게 맛있는 초콜릿을 보내달라고 여러 번 부탁한다. 사실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전설적인 바람둥이 카사노바(Casanova)가 초콜릿을 즐겨 마심으로써 여성들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초콜릿은 굴과 함께 자연이 준 최고의 최음제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심리적인 느낌일 뿐이다.

 

초콜릿에 들어 있는 ‘페닐에틸아민(phenylethylamine)’이란 물질은 몸의 에너지 수위를 높이고 심장 박동을 올려서 행복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반면 실연에 빠졌을 때는 그 생성이 중지돼 버린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연인과 헤어진 사람의 상당수는 초콜릿을 간절하게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초콜릿에 들어있는 페닐에틸아민이 소량이라서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지는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약에 고야가 초콜릿을 최음제로 즐겼다면, 그는 여러 명의 여인 또는 매춘부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그가 쓴 편지에 ‘세라피아’라는 수수께끼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세라이파가 고야와 알고 지내는 익명의 여인 중 한 명일 수 있다. 귀머거리가 된 상태에서도 알바 공작부인(Duchess of Alba)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거로 봐서는 고야의 여성 편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고야와 공작부인은 연인 관계로 발전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가 크고, 이미 고야는 쉰 살을 넘긴 유부남이었고, 귀가 먹은 상태였다.

 

고야는 궁정 화가인 프란시스코 바예우(Francisco Bayeu)를 만나 본격적으로 전업 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고야는 그의 동생인 호세파 바예우(Josefa Bayeu)와 결혼했다. 고야는 자신의 아내를 ‘페파(Pepa)’라고 불렀다. 스페인에 영향력 있는 궁정 화가의 처남이 되면서 궁정 화가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제자나 다름없는 고야가 자신과 맞먹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는 심심찮게 고야의 그림에 태클을 걸어 고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호세파는 여섯 혹은 일곱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아들 한 명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출산 후유증 때문인지 호세파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고야는 아내의 근황을 아주 짤막하게 친구에게 전했다.

 

 

 

1777년 1월 22일

페파가 예쁜 아들을 낳았네, 잘 있게. (34쪽)

 

 

1780년 8월 23일

페파가 아주 예쁜 아들을 낳았네.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을 걸세. (43쪽)

 

 

1782년 12월

아내가 9일 전 유산의 후유증으로 몸져누웠다네. (59쪽)

 

 

1784년 12월 4일

이달 2일 아내가 아주 예쁘고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았다네. 어제 프란시스코 페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 (78쪽)

 

 

1785년 8월 5일

자네가 다정한 편지를 보낼 즈음, 아내가 몸져누워 있었다네. 유산의 조짐은 없지만 꽤 많은 피를 흘려 가족과 의사를 긴장시켰지. (88쪽)

 

 

 

호세파는 고야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놀랍게도 고야는 자신의 아내 초상화를 단 두 점만 그렸다. 그런데 유채로 그려진 그림 한 점이 호세파를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호세파가 세상을 떠난 뒤에 고야는 며느리의 친척 레오카이다 웨이스(Leocadia Weiss)와 사랑에 빠졌다. 호세파로 알려진 유채 초상화가 고야의 새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렇게 되면 고야의 아내로 알려진 그림은 딱 한 점만 남는다.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유채 초상화와 비교하면 볼품없다. 주로 습작용 데생(dessin)을 할 때 쓰는 초크(chalk)로 그려졌는데, 고야의 화려한 명성을 생각하면 그녀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 웬디 버드 《디스 이즈 고야》 (어젠다, 2016년)

 

 

 

나는 고야가 정말로 호세파를 사랑했는지 궁금하다. 편지에 아주 잠깐 언급된 고야의 아내는 ‘성공한 화가의 아내’가 아니라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연달아 애를 낳아야 하는 ‘출산 기계’의 모습이다. 《디스 이즈 고야》(어젠다, 2016)의 저자는 고야가 분명히 아내를 사랑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고 말한다. 글쎄,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다. 고야가 입신양명을 위해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면, 과연 이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프란시스코와 고야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야는 처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아내에게 표출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고야는 아내보다 친구 사파테르를 더 좋아했다.

 

 

1790년 12월

 

난 부부 침실의 쾌락과 즐거움보다도 자네를 더 사랑한다네.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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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2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해.
안 좋아한다기 보다 있으면 먹긴하는데
없으면 굳이 찾아 먹진 않게되더군.
그래서일까? 난 요즘 달달한 로맨틱 드라마 갈수록
안 보게되더군. 이게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과
연관성이 있을까?ㅋㅋ

이 글 읽으니 얼마 전 본 고야 영화가 생각이 나는군.

cyrus 2017-09-20 18:39   좋아요 1 | URL
단맛 나는 초콜릿도 좋아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카카오 95% 초콜릿을 많이 사 먹어요. 요즘 나오는 드라마들은 전개 방식이 뻔해요. 결말을 미리 예상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거죠. 특히 아침 드라마는 심해요.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본 내용인데, 방송 3사 아침 드라마 모두 재벌 집안에 자란 엄마가 딸을 찾고, 그걸 방해하는 악인 인물이 등장한대요. ^^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컨텍스트 52
주디스 핼버스탬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나는 미니애폴리스에 강연을 하러 가는 길에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일이 있다. 나는 과감하게 여자 화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칸을 찾아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요, 경비원 여기요!” 금세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어떤 여자가 나를 남자나 소년으로 오인하고 경비원을 부른 것이었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문 앞에 있던 두 경비원은 실수를 깨닫고 우물우물 사과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1]

 

 

이 황당한 사연의 주인공은 퀴어 이론(queer theory: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 등 성 소수자 중심의 담론을 연구하는 학문)을 연구하는 주디스 핼버스탬(Judith Halberstam)이다. 현재 그의 이름은 잭(Jack) 핼버스탬이다. 핼버스탬은 남자 같은 여자. 그의 남자 같은 외모 때문에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변태 취급을 당해 쫓겨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화장실을 성별 이분법으로 나눴을 때 성 소수자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상황에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충분히 여성스럽다고, 혹은 남성답다고 여길 것이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남성성을 혹은 여성성을 더 드러나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보통의 우리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여성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남성이라고 생각하나요? 몸은 여성인데 성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어떤 이는 그의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남성도 여성이 아닌, 3의 성(Third gender)[2]을 가진 이들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낯설고, 특이한 존재로 바라본다.

 

여성의 남성성(famale masculinity)(이매진, 2015)은 성 이분법을 깨뜨리는 퀴어 담론을 통해 대중문화 속 여성의 남성성을 분석한 책이다. 퀴어 이론이 낯선 독자라면 이 책에 나오는 퀴어 용어와 퀴어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책의 옮긴이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지만, 방대한 내용을 수월하게 따라가기 위해선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본적인 퀴어 용어를 숙지하는 것이 낫다.

 

퀴어(Queer)의 사전적 의미는 기묘한, 이상한, 괴상한이다. 처음에는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1980년대 이후 동성애 운동가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된 단어이다. 여성 역할을 하는 게이를 보텀(Bottom), 남성 역할의 게이를 (Top)이라 부른다. 레즈비언 남성 역할은 부치(Butch), 여성 역할은 (Femme)이라 칭한다. 그러나 이는 동성애를 이성애 규범성(heteronormativity)으로 본 것이고, 동성애를 성애의 역할에 한정시킨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드랙 킹(Drag King)드랙 퀸(Drag Queen)은 각각 단순하게 번역하면 남장 여자, 여장 남자다. 이들은 공연 행위를 통해 반대의 성이 되거나 중간자적 성의 경계를 즐긴다. 트리바드(tribade)는 레즈비언의 동의어이며 레즈비언 간의 비삽입 성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트랜스섹슈얼(transsexual)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조금씩 다르다. 먼저 트랜스섹슈얼은 정신적인 성에 육체적인 성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즉 성호르몬 투여와 성전환수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이나 성호르몬을 투여하진 않더라도 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된다. MTF(male-to-female) 트랜스여성은 남성에서 여성의 몸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 FTM(female-to-male) 트랜스남성은 여성에서 남성의 몸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이다.

 

핼버스탬은 생물학적 특징에 따라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남성성-여성성등 삶의 형태를 억압적으로 작동시키는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성 소수자들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 역사적 담론에 대한 심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 정체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약자인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렇다 보니 자신들이 차별받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담론이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성 소수자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손쓰기 어려운 딜레마가 된다. 페미니스트들(레즈비언 페미니스트도 포함됨)FTM남성 진영으로 넘어간 여성 운동의 배신자로 본다.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성차별로 인식하는 FTM은 레즈비언와 페미니스트들을 남성처럼 흉내 내면서도 남성 전체를 악마로 매도하는 부정 세력으로 생각한다. FTM여성혹은 레즈비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남성성이 돋보이는 복장을 착용한다. 핼버스탬은 FTM부치 동성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이성애 규범성 형성에 기여하게 되고, ‘혐오에 이르는 성 소수자 차별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성 정체성은 인구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런데 억지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면 편견이 생기고, 차별과 혐오가 양산된다. 동성애 코드를 시종 무겁게 다루던 TV와 같은 주류 매체가 성 소수자의 문제를 세련되게 풀어가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방적으로 되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속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과 현실의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대중문화 속 동성애는 한 가지 측면만 보여줄 뿐 실제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지 못하다. 동성애자들에게 이성애자들과 같은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고 동성 간의 사랑은 대개 비극적 사랑으로 왜곡된다. 성 소수자의 목소리를 당사자들이 직접 표출하려는 욕망은 진작부터 강했다. 성 소수자는 우리 사회 문화지형에서 투명인간으로 치부되거나 드러나는 경우라도 피해야 할 존재 또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돼온 탓이다. 성 소수자 혐오와 차별은 오래된 문제지만, 최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극우 세력이 늘면서 혐오 발언이나 행위가 더 만연한 상황이다. 성 소수자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오려면 페미니스트들의 참여를 통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남성성을 읽기 바란다. 성 소수자들을 외면하든 지지하든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또는 몸과 마음이 남자로 바뀐 사람을 법률상 여자로 계속 묶어두는 것은 성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억압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1] 주디스 잭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49~50

 

[2] 여성의 남성성49쪽에 3의 성의 원어를 thirdness’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3의 성을 영어로 표기할 때 ‘thirdness’보다는 ‘Third gender’로 쓰고 싶다. ‘Third gender’는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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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9-19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기 쉽지 않은 책은 읽으셨네요.^^

저는 (문화적 경험의 차이로 인해?) 읽지 않고 건너 뛴 부분이 있었습니다.

cyrus 2017-09-19 18:11   좋아요 1 | URL
퀴어 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은 거라 ‘수박 겉핥기식‘으로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저도 퀴어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퀴어 영화가 언급된 챕터는 건너 뛰었습니다.. ^^;;

나와같다면 2017-09-19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Sadie Lee 의 ‘Raging Bull‘ 강렬하네요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cyrus 2017-09-19 18:14   좋아요 1 | URL
어떤 현상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해도 편견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

csp 2017-09-19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달 전 같은 저자의 <가가 페미니즘>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었었는데요. 소개하신 글을 보니 이 책도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네요.

cyrus 2017-09-19 18:15   좋아요 2 | URL
《여성의 남성성》이 《가가 페미니즘》보다 먼저 나왔으니 저자의 대표작으로 보면 됩니다. ^^

yamoo 2017-09-19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미미즘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으시는 사이러스 님^^

안 읽는 분야가 별로 없으신 듯...그러고보니 경제 분야는 리뷰가 많이 없으신 듯...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치네요..ㅎㅎ

cyrus 2017-09-19 19:37   좋아요 2 | URL
네, 맞습니다. 제가 가장 안 읽는 책의 분야는 경제, 종교입니다. 이 두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양의 책을 읽어야될 겁니다.. ㅎㅎㅎ

2017-09-19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19 19:39   좋아요 1 | URL
‘제3의 성‘ 또는 ‘안드로진‘이라고 부릅니다. ^^
 

 

 

다음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김지영을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으로 끝이 난다.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다. 김지영의 삶을 따라가며 진행되던 소설은 정신과 의사가 작성한 진료 기록의 일부였다. 결국, 김지영의 발화 행위는 실패한 셈이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으로(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구호)’ 확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가 그녀의 상황을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목소리와 일상을 사적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시선을 유지한다. 의사는 김지영을 산후우울증과 육아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로 진단하고,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한다.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김지영 씨의 인생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 정도다. 김지영 씨는 일주일에 두 번, 45분씩 상담을 받고 있는데,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는 줄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당장의 우울감과 불면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김지영 씨에게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했다. (169쪽)

 

 

 

나는 의사가 김지영에게 처방한 항우울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프로작(Prozac)일까, 아니면 졸로푸트(Zoloft)[1], 세로작트(Serozat)일까? 국내에 유통된 항우울제 종류가 생각보다 많다.

 

 

 

 

 

 

 

 

 

 

 

 

 

 

 

 

*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궁리, 2017)

 

 

 

방금 언급한 세 가지 항우울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s)다. 우울증은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 세로토닌은 신경 세포로 재흡수 되는 것을 차단해 몸속의 신경전달물질을 적정하게 유지한다. 프로작은 졸로푸트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항우울제였다. 졸로푸트는 다른 약물과 상호작용이 거의 없어 필요할 경우 병용 투여가 가능하고 부작용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SSRIs계 항우울제는 우울증뿐만 아니라 불안장애, 생리 전 불쾌증후군 등의 치료제로도 사용됐다.

 

세상엔 완전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은 SSRIs계 항우울제도 마찬가지다. 항우울제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SSRIs계 항우울제 중 일부 약은 투약을 중단하기가 어렵고 갑자기 투약을 중단했을 때 초조 불안 등의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선 중독성 관련 논쟁이 일기도 했다. 단기적으로 항우울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장기복용 시 효과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다. 항우울제의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임상적 증거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약회사들의 적극적인 광고 전략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항우울제의 효과가 상당 부분 ‘불확실성의 영역’을 안고 있다. 우울증의 원인을 사회 · 심리적 요인, 유전적 요인이 신경전달 물질과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서 찾는 것처럼, “우울증의 치료도 항우울제 복용 같은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은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미국의 작가이자 법조인인 엘리자베스 워첼(Elizabeth Wurtzel)《프로작네이션》(민음인, 2011)에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갉아먹은 우울증과 항우울제의 위험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후 우울 증세를 보였다.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꼈고, 자기 혐오와 무력감을 느끼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각한 임상적 우울증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은, 본능적으로 빈 공간을 채우려는 인간 본성의 몸부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를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지와 목표를 가지려 애쓴다 해도, 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깨어서 걸어 다니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37쪽)

 

 

그녀는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복용해온 프로작이 우울증을 낫기 위한 확실한 해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 항우울제 처방을 권하는 의사를 ‘박사학위를 딴 마약 거래상’이라고 비난한다. 아마도 이런 의사들은 마음이 아픈 여성의 증상이 어떤 병명인지 몰랐을 것이다.

 

 

 

 

 

 

 

 

 

 

 

 

 

 

 

 

 

 

*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이매진, 2005)

* 안미선, 김보성, 김향수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2014)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전업주부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우선 동창들을 인터뷰하면서 문제점을 밝혀냈다. 그녀는 미국 사회 중산층 주부들이 앓고 있었던 불가사의한 증상을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신비화하는 가부장적 관념, 즉 현모양처와 모성애가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가부장제가 여성을 외롭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여성, 즉 ‘엄마’가 된 여성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에 걸린다. 결혼과 출산을 하기 전 여성은 자아실현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지만, 출산 이후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좋은 엄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만들어내고 때로는 강요하는 고정된 성 역할일 뿐이다.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들은 머리 아프고, 혼란스럽다. 모유 수유부터 신생아를 건강하게 돌보는 방법까지 산후조리원이 가르쳐준 대로 학습한다. 아이가 아파도, 잘 안 먹어도, 공부를 못해도 “다 엄마 탓”이라는 지적을 혼자 감당한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맘충(mom蟲)’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는 ‘혐오 대상’이 된다. 자신과 자녀가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특히 남성들)은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이 신체적 및 정신적 증세가 작용해서 일어나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울증의 환경적 요인까지 고려하지 못한다. 과도한 시집살이, 경제적 압박감, 자녀 출산 및 육아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 등이 우울증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많은 연구 자료가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자살한 엄마의 비극적 소식을 접하면 ‘비정한 엄마’라고 비난한다. ‘기레기’라고 불리는 수준 낮은 기자들은 기사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소식을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자살한 엄마의 앞뒤 사정을 확인하지 않은 채 엄마를 '천륜을 어긴 사람'이라는 프레임(frame)을 씌운다. 이 억지스러운 프레임이 재생산되면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말 못 하는 고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여성의 우울증은 사회가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알지 못한 채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 ‘정신과 의사’가 정말 많다. 대중은 ‘무허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자신의 입맛대로 여성의 정신 상태를 판명한다. 여성이 조금만이라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 피해망상, 우울증이라고 성급하게 진단을 내린다. 그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약을 권한다. 우리 사회는 여성이 왜 아픈지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 권하는 사회’이다.

 

 

 

 

 

 

[1]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 『프로작이 과연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 편에 보면 항우울제 이름이 ‘졸로프트’라고 나와 있다. ‘졸로푸트’와 ‘졸로프트’ 둘 다 써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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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도 약이지만 술 권하는 것도 문제지.
하긴 알콜도 약이라면 약인가?

cyrus 2017-09-17 19:5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특유의 술 문화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셔야해요. 술을 못 마시면 사회생활 못한다고 착각하는 시선이 사라져야해요.

transient-guest 2017-09-1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의료업계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우울증처방남발과 약사용은 90년대를 규정짓는 현상들 중 하나로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당시엔 어린애, 심지어 개까지 우울증운운하던 때였다고 History Channel아니면 CNN 다큐인 90s에서 본 것 같습니다. 중증의 우울증은 약으로 일단 조절을 해야하지만, 테라피를 병행해야 근본치유가 가능한 걸로 지금은 많이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정말 비타민처럼 이런 약을 먹었다고 하네요.

cyrus 2017-09-18 09:53   좋아요 0 | URL
‘비타민처럼 약을 복용’했다는 표현을 들으니까 미국인들이 얼마나 항우울제에 지나치게 의존했는지 실감이 납니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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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를 내 마치 인형이 말하는 연기를 복화술이라고 한다. 남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복화술이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당대 남성 작가들은 겉으로는 여성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발언하게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남성 작가의 복화술은 여성의 발화를 원천 봉쇄한다.[1] 주체적으로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여성은 가부장제가 만든 울타리에 갇힌 채 ‘메아리 없는 절규’를 외친다. 조남주《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이 시대 텅 빈 여성의 잃어버린 목소리, 그 메아리 없는 절규를 받아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삶을 깨뜨리는 냉소적인 담화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이라면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담담한 문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네 살의 기혼 여성 김지영이다. 이름만 보면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지영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시작한다.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친정엄마로 빙의해 가슴 속으로 꾹 삼켰던 말들을 쏟아 내뱉는다. 때에 따라 죽은 대학 동아리 선배가 되거나 어렴풋이 아는 다른 여성이 되곤 한다. 기이한 언행을 하는 아내가 걱정된 남편은 그녀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생활, 회사 업무 그리고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영의 삶의 궤적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김지영이란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이해할 수 없던, 그녀 주변의 남성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비감(悲感)이 느껴진다.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현실이 아닌 자신들의 여성 판타지에만 공감하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무시해버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화돼 있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성범죄는 곳곳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십 년 전에도 그러했고 어제도 그랬다. 스마트폰이나 초소형 카메라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진 · 영상을 촬영하는 ‘몰카(몰래카메라)’ 성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몰카 성범죄는 공중화장실, 사우나, 수영장, 탈의실 등 특정 장소는 물론이고 출퇴근길의 지하철이나 버스 안처럼 많은 사람이 밀집된 공간에서 자신이 찍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이 되어, 불특정한 수많은 피해자를 낳는다. 몰카 성범죄 경우 다른 성범죄인 강간이나 강제추행보다 가벼운 혐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영이 다니는 회사의 여자 화장실에 설치된 몰래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남성 직원들은 몰카 성범죄를 ‘가벼운 일탈’로 생각한다.

 

 

“조사받은 남자 직원들이 우리한테 너무했대. 자기들일 몰카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좀 본 거 가지고 성범죄자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사진 유포했잖아. 범죄를 방조했잖아. 근데 그게 잘못인 줄도 몰라. 완전히 개념이 없더라니까.” (155쪽)

 

 

남성 직원들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남자 보안 요원이 찍은 사진을 돌려 봤다. 그들은 야동을 보며 멋대로 키워오던 성적 판타지를 실현했다. 그들의 말과 의식 속에 성범죄는 따로 있다. 성범죄는 너무나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것이기에 정신병자의 소행이 분명하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이 ‘가벼운 일탈’을 성범죄로 문제 삼는 피해자가 신경과민이다. 따라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결론을 낸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익숙한 남성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남성 직원들은 성범죄의 방관자 혹은 공모자다. 이런 주장 뒤에는 남성들의 반발이 아우성칠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두려움과 선입견을 품고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피해의식 프레임과 결합하여 반남성주의적 담론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82년생 김지영》이 ‘물 만난 고기’처럼 잘 팔린 책이 되었다고 말하여 어떤 이는 ‘여성의 피해의식으로만 가득한 최악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평가하는 것과 아예 안 읽은 상태에서 평가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남성 독자들이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읽어보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있잖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중간부터 읽던 계속 읽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차별과 편견이 보이리라.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붕어빵 기계로 찍어놓은 듯 ‘판박이 남성성’에 맞춰 살아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성’을 비판할 뿐, ‘남성’ 자체를 악의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스트가 ‘평범하고 착한 남성’들을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로 매도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착한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착한 남성’은 여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만든 ‘남자다운 남성성’의 변형이다. ‘착한 남성’ 프레임은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상 속 성차별, 성범죄를 묵인한다.[2] 짝꿍인 남자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영은 이미 어렸을 때에 ‘착한 남성’ 프레임이 여성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 방해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던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41쪽)

 

 

이 장면을 잘 살펴보면 데이트폭력을 당사자 간의 애정 문제로 가볍게 치부하는 인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학교는 그릇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재생산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착하다고’ 믿는 부모는 자식이 여자아이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을 단지 여자아이를 ‘좋아해서 시작한 아이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아이에게 괴롭힘당하는 여자아이와 남자친구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맞는 여자는 그 행위가 ‘폭력’이라고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의 표현이고 과한 애정 때문이라는 생각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성차에 기인한 젠더 폭력(gender violence)이 ‘착한 남자’ 프레임에 가려지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비단 남성이 저지르는 착각의 제가 아니다. 여성도 프레임의 덫에 한 번 빠져버리면 성차 문제에 둔감해진다. 혼자 귀가하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남학생에게 봉변당할 뻔한 지영의 곁에 있어 준 여자의 위로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69쪽)

 

 

이 ‘좋은 남자’라는 표현은 자신을 ‘착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단어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 혐오와 폭력 앞에 서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착하고 좋은 남자’들은 여성 문제를 몇몇 나쁜 남성, 예외적 남성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본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표방한 소설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온건적 페미니즘)’에 위치한다. (물론, 내 주장이 옳다고 볼 수 없다. 책과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을 가로막는 관습적, 법적 제한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의 원인으로 보고 줄기차게 비판한다. 작가는 이야기에 각종 도서, 신문 기사, 통계 보고서 등 객관적 자료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부각하는 작가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작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암시하는 복선이나 결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작가는 여성을 억압하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직시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개인의 자아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3]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이것이 ‘급진적 페미니즘’ 관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의 한계다.

 

김지영의 잃어버린 목소리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여성’의 것인가.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 귀화 여성도 여성 혐오 대상이 되고, 가정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아내는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 문제로 한국인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외국인 아내의 취약성(발화불가능)을 담보로 한 불평등한 부부관계가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망하기 사흘 전에 스물두 살(1986년생, 그녀가 현재 살아있다면 서른 한 살이 된다)의 베트남 여성 쩐타이란 씨는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한국에 온지 1주일 만에 이혼했다.[4]

 

 

“자기들이 필요해 베트남으로 와서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국적만 다를 뿐이다.”

 

 

여성이 살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냉혹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도식화된 이분법에 익숙한 남성중심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여성의 목소리이자 '정당한 무기'다. 하지만 이 ‘여성의 무기’를 손에 대지 못한 채 소외되는 여성들도 있다. 과연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김지영’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공감한 사람들은 ‘우리 모두의 김지영’이 된다. 조남주 작가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86년생 쩐타이란 씨도 ‘우리’에 포함되는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섹슈얼리티 이슈와 얽힌 고민의 끈을 계속 부여잡는 일이다. 페미니스트는 인종과 계급을 넘어 여성이 연대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 여성=김지영’이라는 도식적인 형태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김지영 신드롬’이 진지한 성찰 없이 ‘한국 여성들만의 공감과 분노’에 그친다면 《82년생 김지영》은 실패한 페미니즘 소설이다.

 

 

 

 

 

 

[1] 엘리자베스 D. 하비 《복화술의 목소리》 (문학동네, 2006)

 

[2] 토니 포터 《맨 박스》 (한빛비즈, 2016)

 

[3]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4] [죽거나 죽이거나 ‘이주여성 잔혹사’]

(시사인, 2009년 3월 5일 / '북플'에서 링크 기능 X)

이 기사에 언급된 '쩐타이란'은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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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7-09-15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방금 이 책의 리뷰를 썼습니다. 비슷한 내용인 듯합니다. 남녀는 공존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욕먹을 남정네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일반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9-16 15:00   좋아요 0 | URL
리뷰로 쓰기 어려운 책이었어요. 왜냐하면 이 책을 읽고 느낀 독자들의 생각이 거의 비슷하거든요.

북프리쿠키 2017-09-16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모임에서 전 주로 이 책의 한계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는데요.
싸이러스님께서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셨네요^^
하지만 많은 남성들이 거부감없이 접근할 수 있게 마케팅한 부분은 성공적이라 생각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러한 담론들이 차근차근
많은 남성들에게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구요.
대결구도가 아닌 좀더 성숙한
방향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아쉬움 또한 크답니다^^














cyrus 2017-09-16 15:06   좋아요 1 | URL
페미니스트 입장에서는 말로 해도 귀 담아 듣지 않는 남성들이 답답해 보일 겁니다. 그래서 공격적인 ‘미러링’을 시도하게 되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미러링을 시도하게 만든 가장 큰 일차적 원인이 페미니즘을 무시했던 남성들의 태도입니다. 그래도 미러링의 역효과를 지적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독자들의 공감을 유도하는 책이라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블랙겟타 2017-09-1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 저는 페미니즘운동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이 많은데요. cyrus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고 갑니다.

cyrus 2017-09-16 15:06   좋아요 1 | URL
목표점은 같아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학문이 페미니즘입니다.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싸울 필요 있나요? 이 길도 가고, 저 길도 가보면서 살아야죠. ^^

yamoo 2017-09-1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모 중고서점에서 천원 코너에 있었는데..아니다, 굿윌 양천점이었구나...구매할까하다가 한국소설책드을 처분하는 마당에 구매하면 바로 나가야해서 구매안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작가 작품은 안 읽는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얻는 요즘입니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 널렸는데...한국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 같은 느김이 자꾸들어서요.

그럼에도 사이러스 님은 이런 소설을 읽고 이리도 정성스런 리뷰를 써 주시네요~ 재밌든 없든 꾸준히 한국작품을 읽고 리뷰 쓰시는 사이러스 님이 존경스럽습니다!

cyrus 2017-09-16 15:09   좋아요 1 | URL
제가 외국 소설만 읽게 되니까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모르게 되더라고요. 국내 문단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아요. 그런 문단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국내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내 소설을 잘 안 읽던 독자가 국내 문단을 까면 설득력이 떨어져 보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