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선정 도서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들춰본 책은 ‘Little Brown & Company’에서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 원서와 3종의 번역본(민음사, 문예출판사, 동서문화사)이다.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The Catcher in the Rye》 (Little Brown & Company, 199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덕형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1998)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공경희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가형 옮김 《백년의 고독 / 호밀밭의 파수꾼》 (동서문화사, 2008)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가형 옮김 《백년의 고독 / 호밀밭의 파수꾼》 (동서문화사, 2016)

 

 

 

 

내가 가지고 있는 번역본은 민음사 판본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이 알려진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이다. 그러나 이십 년 전부터 거론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음사 판본의 오역 문제는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국내에 출간된 여러 가지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들 중에 가장 번역이 잘 된 것은 없다.[주] 민음사 판본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문예출판사 판본에도 오역으로 볼 수 있는 문장 몇 개가 있다. 동서문화사 판본은 당장 절판시켜야 할 최악의 번역본이다. 왜 그런지는 리뷰로 따로 밝히겠다.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윤용성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문학사상사, 1993)

* [절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김욱동, 염경숙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현암사, 2005)

 

 

 

그 밖의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으로는 문학사상사 판본(윤용성 옮김)현암사 판본(김욱동, 염경숙 옮김) 등이 있지만, 번역을 검토하는 작업을 나 혼자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살펴보지 않았다.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번역 일에 전혀 관련이 없는 일반 독자인 내가 더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음사 판본과 문예출판사 판본 중심으로 번역문을 대조하면서 읽은 뒤에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서의 문장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검토했다. 다른 분들이 지적한 오역 사례들도 참고했다. 많이 도움이 됐다. 번역에 대한 내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글에 대한 지적이나 다른 의견은 언제나 환영한다.

 

 

 

[주] <“영미문학 완역본 54%가 표절”> 한겨레, 2004년 2월 13일.

 

 

 

 

 

 

 

1

 

 

* 원문

 

 She had a big nose and her nails were all bitten down and bleedy-loooking and she had on those damn falsies that point all over the place, but you felt sort of sorry for her.

 

 

※ bleedy: 피가 나는

※ falsies: 여자의 가슴을 더 커 보이게 만들기 위해 브라 안에 넣는 물건

 

민음사, 12쪽

 

 셀마는 큰 코를 가지고 있었고, 손톱은 하도 물어뜯어서 애처로울 정도인 데다가, 터무니없이 커다란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다.

 

문예출판사, 10쪽

 

 코가 유난히 컸고 손톱은 물어뜯어 그 밑의 살에서 피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이 커 보이게 하는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는데 안쓰러울 정도였다.

 

 

 

민음사 판본의 번역문은 ‘bleedy-looking(피가 비치는, 피가 보이는)’이 나오는 구절이 빠져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문제가 있는 건 민음사 판본의 역자와 문예출판사 판본의 역자 모두 ‘falsies(폴시즈)’를 브래지어로 번역한 점이다. 원문에는 브래지어(brassiere)라는 단어가 없다.falsie’는 ‘가짜’, ‘모조품’을 뜻하는 단어인데, 원문에 나오는 ‘falsies’는 ‘가짜 유방’, 즉 브래지어 안에 넣는 패드를 뜻한다.

 

 

※ ‘falsies’에 대한 오역을 지적한 글 (작성자: asnever)

https://asnever.blog.me/70188360728

 

 

 

 

 

 

 

2

 

 

* 원문

 

 “We studied the Egyptians from November 4th to December 2nd,” he said. “You chose to write about them for the optional essay question. Would you care to hear what you had to say?”

 

민음사, 22쪽

 

 「우린 11월 넷째 주부터 12월의 두번째 주까지 이집트인들에 대한 공부를 했었다. 자넨 선택 문제로 이집트인들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로 했어. 자네가 뭐라고 썼는지 한번 들어보겠나?」

 

문예출판사, 22쪽

 

 “우리는 11월 4일부터 12월 2일까지 수업 시간에 이집트인을 공부했지. 자네는 자유 논술 문제에서 이집트인을 주제로 택했더군. 그런데 뭐라고 썼는지 한번 들어보겠나?”

 

 

 

 

 

 

3

 

* 원문

 

 The first football game of the year, he came up to school in this big goddam Cadillac, and we all had to stand up in the grandstand and give him a locomotive―that’s a cheer. Then, the next morning, in chapel, be made a speech that lasted about ten hours.

 

 

※ grandstand: 야외 경기장의 지붕이 씌워져 있는 관람석

※ locomotive: 기관차

 

민음사, 29~30쪽

 

 그 해 학교에서 첫번째 축구 경기가 열렸을 때 오센버거는 죽여주는 캐딜락을 타고 학교로 왔다. 그래서 우리는 관람석에서 모두 일어나 열렬한 환호와 박수 갈채를 보내야만 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예배당에서 그가 연설을 했다. 열 시간도 넘었을걸.

문예출판사, 30쪽

 

 그해 첫 축구 시합에 그자가 큼직한 캐딜락을 타고 왔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스탠드에 일어나 그에게 기차박수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 예배당에서 그자가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는 무려 열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기차박수’라는 표현이 생소하다. 국어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표현이지만, 인터넷에 검색하면 적게나마 이 표현이 사용된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박수 소리를 기차가 움직일 때 내는 소리(‘칙칙폭폭’)를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문에 ‘환호(cheer)’라는 표현은 있지만, ‘박수(clapping)’라는 표현은 없다. 두 역자 모두 왜 원문에 없는 단어를 썼을까?

 

 

 

 

 

 

 

4

 

* 원문

 

 I didnt answer him right away. Suspense is good for some bastards like Stradlater.

 

 

※ suspense: 긴장감, 마음을 졸이는, 초조해 하는

※ bastards: 새끼, 개자식

 

민음사, 44쪽

 

 나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스트라드레이터 같은 놈들도 약간은 걱정이라는 걸 해봐야 한다.

 

문예출판사, 47쪽

 

 나는 당장 대답하진 않았다. 스트라드레이터 같은 개새끼들에겐 어정쩡한 미결의 상태가 약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출판사 판본의 번역문이 원문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어정쩡한 미결의 상태’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인지 확 와 닿지 않는다. 번역문을 어렵게 쓸 필요가 있을까?

 

 

 

 

 

 

 

 

5

 

 

* 원문

 

 All of a sudden―for no good reason, really, except that I was sort of in the mood for horsing around―I felt like jumping off the washbowl and getting old Stradlater in a half nelson. That’s a wrestling hold, in case you don’t know, where you get the other guy around the neck and choke him to death, if you feel like it. So I did it. I landed on him like a goddam panther.

  “Cut it out, Holden, for Chrissake!” Stradlater said. He didn’t feel like horsing around. He was shaving and all. “Wuddaya wanna make me do―cut my goddam head off?”

  I didn’t let go, though. I had a pretty good half nelson on him. “Liberate yourself from my viselike grip.” I said.

 

 

panther: 흑표범

※ for Chrissake: 빌어먹을

Wuddaya: ‘What do you’의 줄임말

viselike: (바이스처럼) 단단히 죈

 

 

민음사, 47쪽

 

 갑자기 난 세면대에서 뛰어내려 스트라드레이터를 하프 넬슨으로 확 누르고 싶어졌다. 그저 장난을 좀 치고 싶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하프 넬슨은 레슬링에서 쓰는 용어로 상대방의 목을 뒤에서 있는 힘껏 졸라 반 죽여놓는 것을 뜻한다. 난 그렇게 했다. 그 녀석에게 딱 달라붙어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둬. 홀든. 제기랄!」 스트라드레이터가 말했다. 그는 장난치고 싶지 않은 모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면도를 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묵을 벨 뻔했잖아」

  그렇지만 나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이건 상당히 좋은 하프 넬슨 기술이었다. 「어디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보시지」

 

 

문예출판사, 50쪽

 

 갑자기 그저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세면대에서 뛰어내려 스트라드레이터 자식을 하프 넬슨 수법으로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하프 넬슨이 뭐냐 하면, 상대방의 목을 뒤에서 졸라 원하면 죽일 수도 있는 레슬링의 기술이었다. 나는 표범처럼 그를 덮쳤다.

  “제발 그만둬!” 하고 스트라드레이터가 소치렸다. 그는 장난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면도를 하는 도중이었으니까. “어쩌려고 이래? 내 모가지라도 베려는 거야?”

  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꽤 그럴듯한 하프 넬슨 기술을 걸고 있었다. “풀어보시지. 바이스같이 억센 내 팔을…‥” 하고 내가 말했다.

 

 

 

민음사 판본에 ‘I landed on him like a goddam panther’라는 구절이 빠졌다. 문예출판사 판본의 역자는 ‘panther’를 ‘표범’이라고 번역했는데,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얼룩무늬의 표범은 ‘Leopard’이다. ‘panther’는 흑표범을 뜻한다.

 

 

 

 

 

 

 

 

6

 

* 원문

 

 My brother Allie had this left-handed fielder’s mitt. He was left-handed. The thing that was descriptive about it, though, was that he had poems written all over the fingers and the pocket and everywhere. In green ink. He wrote them on it so that he’d have something to read when he was in the field and nobody was up at bat.

 

민음사, 57쪽

 

 동생인 엘리는 왼손잡이용 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애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묘사적이었냐 하면, 그 애는 손가락 위도 좋고, 주머니도 좋고, 어디에나 시를 써놓았다. 초록색 잉크로 말이다. 그 애 말로는 수비에 들어갔을 때 타석에 선수가 나오지 않았을 때 같은 때 읽으면 좋다는 것이다.

 

문예출판사, 62쪽

 

 내 동생 앨리는 왼손잡이 야수의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그앤 왼손잡이였다. 그 장갑에 대해서 무엇이 묘사할 만한가 하면, 앨리는 야구 장갑의 손가락이고 주머니이고 어디든 간에 시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녹색 잉크로 쓴 시였다. 그렇게 써놓으면 자기가 수비에 들어가서 타석에 아직 선수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읽을거리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내가 밑줄 친 민음사 판본의 문장은 문법이 맞지 않은 ‘비문’이다.

 

 

 

 

 

 

 

7

 

* 원문

 

 I usually buy a ham sandwich and about four magazines. If Im on a train at night, I can usually even read one of those dumb stories in a magazine without puking. You know. One of those stories with a lot of phony, lean―jawed guys named David in it, and a lot of phony girls named Linda or Marcia that are always lighting all the goddam Davids pipes for them.

 

 

puking: [puke의 현재분사] (속이) 뒤틀리는, 토하는

phony: [구어] 가짜, 허위의, 겉치레의

※ lean―jawed: 야윈(마른)

 

민음사, 77쪽

 

 평소처럼 햄샌드위치와 잡지를 네 권 샀다. 밤 기차를 타고 갈 때면, 이따위 잡지에 실린 지겨운 기사들도 그럭저럭 읽을 만하다. 그런 기사들은 대부분 데이비드란 이름에 턱이 길고, 사기꾼 같은 녀석들과 린다니 마르샤니 하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언제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곤 하는 얘기들이다.

 

문예출판사, 85쪽

 

 나는 보통 햄 샌드위치를 한 개 사고 잡지를 네 권 가량 산다. 야간에 열차를 타면 그런 잡지에 실린 지루한 소설도 그럭저럭 읽게 된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엉터리 같고 턱이 훌쭉한 데이비드라는 놈과 항상 그놈의 파이프에 불을 붙여주는 린다니 마르시아니 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소설 말이다.

 

 

두 역자 모두 ‘puking(속이 뒤틀리는, 토하는)’을 ‘이따위(민음사)’, ‘그런(문예출판사)’으로 순화해서 번역했다. 평소 비속어와 과격한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홀든 콜필드의 모습을 돋보이기 위해 ‘puking’을 직역하는 게 낫다고 본다.

 

pipe’도 담배의 일종이지만, ‘cigarette’와 다르기 때문에 ‘파이프 담배’로 정확하게 번역해야 한다.

 

 

※ ‘pipes’에 대한 오역을 지적한 글 (작성자: asnever)

https://asnever.blog.me/220209751917

 

 

 

 

 

 

 

 

8

 

 

* 원문

 

 Old Marty talked more than the other two. She kept saying these very corny, boring things, like calling the can the <little girls room>, and she thought Buddy Singers poor old beat-up clarinet player was really terrific when he stood up and took a couple of ice―cold hot licks. She called his clarinet a <licorice stick>.

 

 

※ beat-up: 낡아빠진

※ licorice: 감초 

 

민음사, 104쪽

 

 마티는 다른 두 여자보다도 좀 말을 많이 했다. 그나마 그녀가 하는 말도 케케묵은 이야기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화장실을 <어린 소녀들의 방>이라고 부르지 않나. 버디 싱어의 밴드에서 불쌍할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첼리스트가 보여준 정말 썰렁하기 짝이 없는 연주를 듣고는 멋있다고 하면서, 그 첼리스트를 <감초 줄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예출판사, 116쪽

 

 마티가 그래도 제일 많이 지껄였다. 그녀는 화장실을 ‘어린 소녀의 방’이니 뭐니 하면서 너절하고 지루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버디 싱어 악단의 말라빠진 늙은 클라리넷 주자가 일어서서 몇 소절을 정열적으로 연주하자 아주 멋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클라리넷을 ‘감초의 줄기’라고 말했다.

 

 

두 역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beat-up’을 ‘말라비틀어진’, ‘말라빠진’으로 번역했다. 새로 번역한다면 ‘늙어빠진’으로 쓸 수 있다. 민음사 판본의 번역을 맡은 공경희 씨는 ‘clarinet player(클라리넷 연주자)’를 ‘첼리스트(cellist)’로 잘못 번역했다. 심지어 원문의 의미와 전혀 맞지 않는 문장(‘첼리스트를 <감초 줄기>라고 부르기도 했다’)까지 썼다. ‘감초 줄기(licorice stick)’는 악기 연주자를 비꼬기 위해 붙인 별명이 아니라 그가 연주하는 악기, 즉 클라리넷을 우스꽝스럽게 비유한 표현이다.

 

 

 

 

 

 

 

9

 

* 원문

 

 “You’re goddam right they don’t,” Horwitz said, and drove off like a bat out of hell. He was about the touchiest guy I ever met. Everything you said made him sore.

 

민음사, 115쪽

 

 「그렇게 생각하면 됐어요」 호이트가 말했다. 그러고는 총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사람은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한 말은 전부 그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문예출판사, 128~129쪽

 

 “됐어요. 그놈들도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면 됐어요.” 호위트는 이렇게 말하고 지옥에서 튀어나온 박쥐처럼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렇게 성질이 급한 사람은 생전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모두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이었다.

 

 

 

민음사 판본의 오역 문장은 나를 화나게 한다…‥.

 

 

 

 

 

 

 

 

 

10

 

 

* 원문

 

 “You ought to go to a boys’ school sometime. Try it sometime,” I said. “It’s full of phonies, and all you do is study so that you can learn enough to be smart enough to be able to buy a goddam Cadillac some day, and you have to keep making believe you give a damn if the football team loses, and all you do is talk about girls and liquor and sex all day, and everybody sticks together in these dirty little goddam cliques. The guys that are on the basketball team stick together, the Catholics stick together, the goddam intellectuals stick together, the guys that play bridge stick together. Even the guys that belong to the goddam Book-of-the-Month Club stick together. If you try to have a little intelligent―”

 

민음사, 176~177쪽

 

 「언제 한번 남학교에 가봐. 시험삼아서 말이야. 온통 엉터리 같은 녀석들뿐일 테니. 그 자식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오직 나중에 캐딜락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야. 축구팀이 경기에서 지면 온갖 욕설이나 해대고, 온종일 여자나 술, 섹스 같은 이야기만 지껄여대. 더럽기 짝이 없는 온갖 파벌을 만들어, 그놈들끼리 뭉쳐 다니지 않나. 농구팀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고,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치지. 똑똑하다는 것들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고, 브리지 하는 놈들은 또 저희끼리 모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영리하다면‥…」

 

 

문예출판사, 196~197쪽

 

 “언제 시간 있으면 남학교에 가보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시험삼아 한번 가봐. 엉터리 자식들이 우글거릴 테니까. 놈들이 하는 일은 장차 캐딜락을 살 수 있는 신분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일뿐이야. 그리고 축구 팀이 지면 분해 죽겠다는 시늉이나 하고, 하루 종일 여자와 술과 섹스 얘기만 지껄여대는 거지. 게다가 더러운 파벌을 만들어 결속까지 하거든. 농구 팀은 그들대로 뭉치고, 천주교 신자들도 그들대로 뭉치고, 지랄 같은 지성인들도 그렇고 놀음하는 놈들은 저희끼리 뭉치거든. 심지어 월간 추천도서 클럽에 가입한 놈들도 끼리끼리 뭉친단 말이야. 그러니까 좀 똑똑하려면‥…”

 

 

민음사 판본에 ‘밑줄 친 원문’을 번역한 구절이 없다.

 

 

 

 

 

 

 

 

11

 

 

* 원문

 

 I remember Allie once asked him wasn’t it sort of good that he was in the war because he was a writer and it gave him a lot to write about and all. He made Allie go get his baseball mitt and then he asked him who was the best war poet, Rupert Brooke or Emily Dickinson. Allie said Emily Dickinson.

 

 

※ War poet: 전쟁 시인

※ Rupert Brooke: 영국의 시인(1887~1915)

※ Emily Dickinson: 미국의 시인(1830~1886)

 

민음사, 188쪽

 

 한번은 앨리가 형은 작가니까, 전쟁에 나가면 작품에 쓸 수 있는 자료를 듬뿍 얻을 수 있으니 좋은 게 아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형은 앨리에게 야구 미트를 가지고 오라 그러더니, 루퍼트 브루크와 에밀리 디킨슨 중에 누가 더 훌륭한 시인이냐고 물었다. 앨리는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대답했다.

 

문예출판사, 210쪽

 

 지금도 기억하는데, 앨리가 형에게 형은 작가니까 전쟁에 참가하면 작품 쓸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형은 앨리에게 야구 미트를 가져오게 하고는, 루퍼트 부루크와 에밀리 디킨슨 중에서 누가 훌륭한 전쟁 시인인가를 물었다. 앨리는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대답했다.

 

 

‘전쟁 시인’은 전쟁에 직접 참여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시를 쓰거나(종군 시인), 전쟁을 주제로 시를 쓰는 시인을 말한다.

 

그나저나 에밀리 디킨슨은 ‘전쟁 시인’이었던가? 그녀는 남북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살았다. 그녀의 삶이 전쟁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긴 한데, 전쟁을 주제로 한 디킨슨의 시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디킨슨의 시를 다시 봐야겠구먼.

 

 

 

 

 

 

 

12

 

 

* 원문

 

 When I came around the side of the bed and sat down again, she turned her crazy face the other way. She was ostracizing the hell out of me.

 

 

※ ostracize: (사람을) 외면하다

 

민음사, 221쪽

 

 내가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피비는 얼굴을 반대쪽으로 아예 돌려버렸다. 완전히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예출판사, 247쪽

 

 내가 침대 가에 가서 앉자, 피비는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나를 탄핵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초반부에 홀든 콜필드는 자신의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행정 용어‘탄핵하다(impeach)라는 표현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13

 

 

* 원문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the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

 

 

※ cause: 이유, 대의명분

※ humbly: 초라하게, 겸손(겸허)하게

 

민음사, 248쪽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묵묵히: 말없이 잠잠하게

※ 겸손하게: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문예출판사, 277쪽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홀든 콜필드가 직접 찾아가서 만난 엔톨리니 선생이 인용한 말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스테켈(Wilhelm Stekel)이다.

 

‘cause’는 ‘이유’라는 의미의 단어이지만, 이 원문의 의미를 살리려면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본분을 뜻하는 ‘대의(명분)으로 쓰는 것이 낫다. 문예출판사 판본은 ‘비겁한 죽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의 의미와 다른 오역이다.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죽음’을 뜻하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두 판본 모두 ‘humbly’를 부정적인 뉘앙스로 번역했는데, ‘성숙한 인간’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겸손하게’로 번역해야 한다.

 

 

이 오역에 대해서 이미 asnever 님과 로쟈 님이 지적한 적이 있다.

https://asnever.blog.me/220238007548 (작성자: asnever)

http://blog.aladin.co.kr/mramor/3131995 (작성자: 로쟈)

 

 

 

 

 

 

 

 

14

 

* 원문

 

 “Where’re the mummies, fella?” the kid said again. “Ya know?”

I horsed around with the two of them a little bit. “The mummies? What’re they?” I asked the one kid.

“You know. The mummies―them dead guys. That get buried in them toons and all.”

Toons. That killed me. He meant tombs.

 

 

※ Toon: (식물) 인도 마호가니

※ tomb: 무덤

 

민음사, 266쪽

 

「미라는 어디에 있어요? 알고 계신가요?」 그 아이가 다시 물었다.

난 그 꼬마들을 상대로 잠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미라라고? 그게 뭐지?」 내가 그 아이에게 물었다.

「정말 모르세요? 미라 있잖아요. 사람이 죽어 있는 거 말이에요. 에 들어 있는 것 말이에요」

이라. 정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문예출판사, 298쪽

 

 “미라는 어디 있나요? 알고 계세요?” 하고 그 아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상대로 잠깐 농담을 나누었다. “미라라니? 그게 뭐지?” 하고 내가 한 아이에게 물었다.

  “모르세요? 미라 말이에요. 그 죽은 것 말이에요. (toon) 속에 있는.”

이라니? 여기엔 손들고 말았다. 그 애는 무덤(tomb)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었다.

 

 

 

샐린저의 소설을 원문으로 읽어보면 언어유희를 이용한 재미있는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산 마호가니 나무의 이름인 ‘툰(toon)’과 ‘무덤(tomb)’은 동음이의어다. 그런데 민음사 판본의 번역문은 원문이 주는 유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공경희 씨는 ‘툰’과 ‘무덤’이 들어간 문장을 국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건’과 ‘관(棺, coffin, casket)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여러 번 봐도 ‘건’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공경희 씨가 쓴 ‘건’의 의미를 아시는 분? 네이버 국어사전에 등록된 ‘관’의 의미는 10개나 넘는다. 그리고 ‘tomb’을 ‘관’으로 번역한 점도 의아스럽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3-05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05 17:30   좋아요 0 | URL
제가 처음으로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이 민음사 판본이었어요, 그때도 읽는데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었어요. 문장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느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겨울호랑이 2019-03-0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cyrus님 이번 리뷰를 작성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cyrus님 자신에게도 큰 공부가 되셨겠지만, 좋은 자료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9-03-05 17:37   좋아요 2 | URL
제가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쌤들한테 민음사 번역본을 추천했어요. 번역이 엉망인 걸 알았을 때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ㅎㅎㅎ 모임 날에 저를 포함해서 15명이 독서모임에 참석하셨는데요, 두 분 빼고 나머지 분들은 민음사 번역본을 읽었어요. ^^;;

반유행열반인 2019-03-0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랑 동서문화사 것이 집에 있는데 내가 제대로 보긴 한 걸까 싶어지는 시점이네요. (아마 처음 볼 땐 문예출판사 걸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봤던 듯 하고.) 좋은 번역이란 이렇게 어렵고 외국어를 잘 못 하니 번역에 불만이어도 늘 뾰족한 수가 없네요. 번역가를 욕하다 아니 그래도 그나마 이 정도라도 해석해 줘서 내가 읽게 해 주는구나 고맙다 아니 또 욕 나온다 반복하며 읽곤 합니다...

cyrus 2019-03-05 17:45   좋아요 1 | URL
가독성이 좋다고 느껴진 책이 나중에 번역이 좋지 않은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번역가에게 속은 느낌이 들어요... ^^;;

카스피 2019-03-0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대단하시네요^^ 번역자들이 좀 각성해야 될것 같습니다.그래도 유명한 문학작품의 경우 번역가들이 나름 신중학에 번역하지만 장르소설의 경우 날림 번역이 많은 편이지요.그래도 번역만 해주면 장르 애독자들은 감지덕지 합니다ㅜ.ㅜ

cyrus 2019-03-06 18:32   좋아요 1 | URL
번역가 입장에서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하는 일에 부담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셜록 홈즈 시리즈를 번역하는 게 부담이 덜 되죠. 기존의 번역본들을 어느 정도 참고하면서 새로 번역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번역 관행이 지속되면 번역의 질은 점점 나빠질 것입니다.

coolcat329 2019-12-11 0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문예출판사로 읽었는데 ‘성숙한 인간은 비겁한 죽음을 택한다‘ 저 문장이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네요. 어떻게 humbly에서 비겁한 죽음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ㅠ 그래서 저는 성숙한 인간이 미성숙한 인간보다 나쁘다는건가? 생각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12-23 22:04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읽었을 때 문장이 이해하지 못했어요. 저 문장이 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japrance 2020-02-21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문의 문장력자체는 민음사 판본이 월등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 재미있게 읽혀요.. 문예출판사 번역은 너무 딱딱하고 예스럽습니다.

cyrus 2020-03-01 19: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문예출판사 번역본이 나온 지 오래된 거라서 그 속에 요즘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몇 개씩 보여요. ^^;;

먼어 2020-03-26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번역에 대한 신뢰성이 많이 떨어져서..꼭 책을 구매하기 전에 미리 인터넷으로 비교글을 보곤 하는데, 너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_^ 번역에 따라 책이 달라지기 때문에 더 예민해지게 되네요. 잘 참고해서 구매하도록 할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20-04-01 08:09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이미 번역본의 문제점을 언급한 분들이 있어서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었어요. 저도 그분들의 비판적인 글을 참고했고, 직접 책을 읽어 보니까 생각보다 사소한 오역이 많이 보였어요. ^^
 
포스트바디 : 레고인간이 온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2019년 우수과학도서 선정작 포스트휴먼 총서 2
몸문화연구소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사이보그(cyborg)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사이보그’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수긍이 될 것이다. 사이보그는 인공 두뇌학을 뜻하는 ‘cybernetic’과 생명체를 뜻하는 ‘organism’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195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극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인공 장기를 연구했다. 따라서 사이보그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공 생명체이다. 모든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생명체를 ‘인조인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안드로이드(Android)가 인조인간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다. 사이보그는 신체나 장기의 일부만 기계와 결합한 인간을 뜻한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심각한 근시라서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다. 내게 안경은 ‘인공 안구’이다. 나는 평생 ‘인공 안구’를 쓰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이보그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신체에 인공 장기나 기계를 장착하는 기술은 상상 속에 나올 법한 미래 기술이 아니다. 미래학자들은 생명공학의 발달과 인공 장기 연구 개발이 인간과 기계의 급속한 융합을 불러올 것으로 예측한다. 인간 속에 기계가 들어오는 것을 ‘기계의 역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감탄하면서 무병장수를 향한 기대를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인간 속에 기계가 들어오고 기계가 인간과 유사한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는 지금,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해체되고 있다. 현재 인간은 ‘트랜스휴먼(transhuman) 혹은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트랜스휴먼은 과학 기술을 이용해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이 개선된 인간이다. 트랜스휴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약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유전자 조작, 줄기세포 연구, 인공지능 같은 부문이 트랜스휴먼의 연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스휴먼도 인간 이외의 존재를 타자화하는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것을 보완한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 주목받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인간의 욕망을 꺾기 힘들어 보인다. 결국 첨단 과학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다. 트랜스휴먼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휴먼의 탄생은 멀지 않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포스트휴먼 시대가 새 질서를 창조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최근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논의에 인문학자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방관하다간 자칫 인간이 소외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다. 또 삶과 죽음,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새로운 존재론, 가치관, 윤리관 정립을 위해 인문학이 나서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몸문화연구소’가 기획한 《포스트바디》포스트휴먼 시대에 구현될 몸에 대해서 현실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몸문화연구소는 2007년에 설립된 연구 단체로, 과학 기술 및 문화의 변화 속도에 대응하는 ‘몸 담론’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무지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이제 포스트휴먼에 대한 열풍을 보면서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내 몸을 알라.’ 왜 내 몸을 알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 몸도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튼튼하고, 균형 잡힌 ‘이상적인 몸’을 갈망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완벽한 인간을 꿈꾼다. 그렇다면 과연 미래에 모든 이들은 완벽한 몸을 가질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의 몸으로 살아가는 게 진정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포스트바디》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비관적인 두려움 대신 지금 포스트휴머니즘이 우리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포스트휴먼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성찰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다시 몸, 삶, 인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몸, 삶, 인간상은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거나 우리 스스로 질문 자체를 회피한다면 포스트휴먼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 기술과 ‘이상적인 삶(또는 몸)’에 종속되는 삶에 살게 된다. 뛰어난 지능과 신체 능력, 외모 향상 등을 통해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과학 기술이 만나면 인간의 몸과 삶의 다양성이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몸’인 포스트바디로 살아간다면, ‘진짜 나’, ‘진짜 삶’이라는 게 있을까? 이렇게 살면 정말 행복할까? ‘내가 원하는 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포스트휴먼 시대로 들어서는 우리가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 숙제를 무시한 채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포스트바디는 축복의 몸이 아니라 저주의 몸이 될 수 있다.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몸으로 말이다.

 

 

 

 

※ Trivia

 

 

* 13쪽에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를 잘못 적은 ‘로버트 프루스트가 있다. 예전에 프로스트를 ‘프루스트’로 적은 책을 본 적이 있다. 두 개 성(姓)의 철자가 다르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의 철자는 ‘Proust’이다.

 

 

* 148쪽

  우리가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나, 영화 <퍼시픽림>에서 보아왔듯이, 인간과 로봇, 인간과 무기를 한 몸처럼 연결해서 전투 능력을 극대화하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시리즈나’로 고쳐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9-03-0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년대에 나왔던 미드 600만불의 사나이나 소모즈란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전형적인 사이보그라고 할수 있죠.당시에는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현재는 실제 팔이 잘린 아이가 기계의수(동영상을 보니 거의 실제손과 같이 사용하더군요)를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입니다@.@

cyrus 2019-03-05 17:47   좋아요 0 | URL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화 속 세계는 현실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

얄라알라 2019-03-1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새로나온 책 검색하다가 이 책 제목에 꽂혀서^^
˝몸문화연구소˝ 회원분들이 궁금하네요^^

cyrus 2019-03-18 16:14   좋아요 0 | URL
몸문화연구소가 기획해서 출간된 책이 꽤 많아요. 요즘 몸을 바라보는 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들도 보려고 해요. ^^
 
문학비평의 원리
I. A. 리처즈 지음, 이선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시를 썼다고 치자.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시골의 정경을 소재로 시를 쓴다. 완성된 시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시를 읽고 잊고 있었던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시에 묘사된 고향의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쓴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가 시골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시에 진술한 시골 정경은 도시 밖에 나가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경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아무리 좋아도 시인의 경험과 거리가 먼 시적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비평가 I. A. 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라면 내 시에 후한 점수를 줬을 것이다. 리처즈는 독자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 비평가다. 그는 시를 ‘정서적 언어’로 만들어진 텍스트로 봤다. 독자는 시의 정서적 언어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독자는 시적 언어로 진술된 시인의 개인적 경험에 공감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경험이 사실인지 허위인지 판단하는 건 중요치 않다. 리처즈는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효과를 기준으로 하여 그 작품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처즈는 1920년대에 영국의 신비평(new criticism)을 제시한 인물이다. 1924년에 발표한 《문학비평의 원리(Th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는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비평 수준의 위치로 한 단계 끌어올린 책이다. 리처즈가 제시한 비평가의 역할은 문학작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문학작품의 가치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긍정적 정서를 뜻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공감하는 독자의 반응 등이 ‘정서적 언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이다. 이러한 효과를 유도하는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전달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리처즈가 《문학비평의 원리》 23장의 제사(題詞)로 인용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말은 그의 비평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말이다.

 

 

 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미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다.

 

(《문학비평의 원리》, 224쪽)

 

 

흄의 말속에 있는 단어인 ‘사물’을 ‘문학작품’으로 바꿔서 설명한다면,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가치는 작품 텍스트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작품 텍스트를 읽으면서 반응하는 독자의 마음속에 있다.

 

《문학비평의 원리》에 부록 두 편이 있는데, 그 중 한 편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서 리처즈는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이 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들은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독자가 『황무지』를 신비주의 사상과 연관 지어서 읽는다거나 분석한다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리처즈는 엘리엇이 『황무지』를 쓰면서 사용한 인유(引喩)를 주목한다. 인유는 유명한 고전의 내용이나 널리 알려진 어떤 다른 개념을 끌어다가 비유하는 표현 방법이다. 리처즈에 따르면 『황무지』에 나오는 상징들은 단순히 초월적인 개념 혹은 대상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 경험’을 뜻하는 인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지식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인유를 사용해 드러나고자 하는 『황무지』의 의미는 텍스트 자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시를 분석하는 리처즈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리처즈는 시를 ‘감정의 표현’, ‘정서적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봤지만, 반대로 엘리엇은 시를 ‘지식의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리처즈의 신비평주의를 본다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정서적 언어’로 진술된 시를 무조건 가치 있는 작품으로 보는 시선,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문학작품의 분석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은 1920년대 이후로 나온 여러 가지 비평주의들과 비교하면 낡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치’라는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려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또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리처즈가 제시한 ‘훌륭한 비평가의 자질’ 중 하나인 ‘가치를 건전하게 판단하는 일’은 한계가 있는 작업이다.

 

언어로 진술된 작가의 경험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과정을 간과하는 리처즈의 비평 관점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는 몇 년 전에 불거진 ‘문단 내 미투 운동’ 사례와 관련 지어 설명할 수 있다. 남성 작가가 여권 신장을 강조하는 시나 소설을 썼다고 치자. 어떤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고 나서 작가가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에 가려진 여성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한 페미니스트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 남성 작가가 평소에 여성을 차별했다는 사실, 여성 문인을 성추행한 이력이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 작가의 모습과 그가 작품 속 언어를 통해 진술한 페미니즘 관점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작품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에 중점을 둬서 볼 것이다. 이러면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철저히 분리한 채 문학작품을 평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분리해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게 맞는가? 도덕적인 문제로 비난받은 작가가 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글이 독자에게 좋은 가치관을 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가의 경험과 무관한 글에 감동하는 독자의 반응은 결국 작가의 허위에 속아 넘어간 ‘가짜 감동’에 불과하다. 진실하지 않은 글을 쓴 작가는 독자를 기만한 것이다. 이런 작가의 글이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문학적으로 가치 있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비평 관점을 떠나서 자신과 독자들을 속이는 작가의 글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옹호할 수 없다. 독자는 자신의 삶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면서 재미와 감동을 끌어올리는 ‘이야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한다. 그러나 거짓으로 감동을 유발하면서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 Trivia

 

* 92쪽 [역주]

  미국의 물리학자인 A. A. 마이켈슨과 E. W. 모울리는 공동의 실험으로 그 당시까지 믿어 왔던 에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낳는 동기를 만들었다.

 

→ 역자는 옛 외국어 표기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몰리(Morley)를 ‘모울리’로, 아인슈타인(Einstein)을 ‘아인쉬타인’으로 썼다. 참고로 번역본이 출간된 연도는 2005년이다. 아마도 역자는 ‘에테르(ether: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상의 물질)라는 단어 자체를 몰라서 그냥 단순하게 ‘에텔’로 표기했던 것 같다.

 

 

 

* 260쪽 [역주]

  희랍 신화의 인유. 제우스는 백조의 모습으로 레다에게 접근하여 그 여성에게서 헬레네와 포류 듀케스를 낳았다.

 

→ 포유류 듀케스? 이 해괴한 이름을 정확하게 쓰면 ‘폴리데우케스(Polydeuces)이다.

 

 

 

* 287쪽

괴스타 베를링 이야기

 

→ 스웨덴의 소설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작품명이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Gösta Berlings saga)로 고쳐 써야 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3-04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치 있는 문학이란 정말 주관적인
잣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관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나한테 재밌는 책이 저
는 좋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cyrus 2019-03-04 17:2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결국 애서가가 즐겨 읽는 책은 본인이 재미있다고 느껴지거나 관심 있는 책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책’을 절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책’과 상대방이 생각하는(원하는) ‘재미있는 책’은 아주 다르거든요.. ^^

레삭매냐 2019-03-04 17:28   좋아요 0 | URL
가끔 블로그에 책 추천해 달라는
덧글이 달리는 데 정말 난감합니다.

보는 관점이 그리고 좋아하는 킬링
포인트가 다 다른데, 어찌 추천을
해달라고 하시는지...

거의 100% 욕 먹을 확률이 높습니다.
캐공감하는 바입니다.

cyrus 2019-03-04 17:34   좋아요 0 | URL
난감한 질문이 들어오면, 저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이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해요.

상대방이 제게 특정 주제와 관련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답변해줄 수 있어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책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

페크pek0501 2019-03-04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경우, 난감하군요...

cyrus 2019-03-05 12:20   좋아요 0 | URL
삶과 문학관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 망설이게 됩니다. ‘작가는 비난할 수 있어도 그 작가가 쓴 작품까지 비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
 

 

 

목사의 딸들(Daughters of the Vicar)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가 쓴 초기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초고였을 때 제목은 두 결혼(Two Marriages)이었다. 1911년에 써졌다가 1914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패니와 애니(창비, 2013)

* [구판 절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목사의 딸들(창비, 2001)

 

    

 

초고 제목은 소설의 핵심 인물인 어니스트 린들리 목사의 두 딸 메리루이자의 결혼을 의미한다. 린들리는 자신이 상류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탄광촌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는 가난한 목사로 살아간다. 메리는 기울어진 가세를 살리기 위해 매시라는 젊은 목사와 결혼한다. 매시는 성실하게 목회 활동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열두 살 소년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체격이 상당히 왜소하다. 매시는 자식을 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이가 얼른 태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메리의 삶은 가정에서 남편을 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내/어머니 역할을 하는 게 전부다. 루이자는 그런 언니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루이자는 메리와 다르게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다. 그녀는 언니의 결혼에 손톱만큼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자신은 계급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다짐한다. 루이자가 사랑하는 알프레드 듀랜트는 하류 계급에 속한 광부. 막둥이로 자란 알프레드는 어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았지만, 광부가 되려고 하자 어머니와의 관계가 냉랭해진다. 어머니는 신사(남자)답지 못한 알프레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남성성을 찾기 위해 해군에 복무하지만, 해군 특유의 엄격한 규율과 권력적 상하 관계에 적응하지 못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 알프레드는 자신이 남자답지못한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수록 자존감은 계속 떨어지고, 여성을 멀리하게 된다.

 

어느 날 알프레드는 부사관과 함께 술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여성 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구애하는 이탈리아 남성을 보게 된다. 알프레드는 아주 쉽게 여성에게 다가가는 이탈리아 남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성에게 말조차 걸어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개인과 무관한 본능적인 힘에 끌려 몸이 여자에게 다가가는, 우쭐거리며 편하게 사랑하는 이딸리아인들을 기묘한 부러움으로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남자였고 자신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마치 문둥이 같다고 느끼며 앉아 있었다(He sat feeling short, feeling like a leper). 그리고 그는 자신과 어떤 여자와의 성적인 교접 장면을 상상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런 몽상에 몰두한 채 걸어 다녔다.

 

 

(목사의 딸들, 《패니와 애니, 101)

 

 

알프레드는 자신의 소심한 남성성을 문둥이(leper)’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프레드의 자기비하적인 심리 상태를 문둥이로 비유한 로렌스의 표현, 그리고 ‘leper’문둥이로 번역한 백낙청의 단어 선택(차별하려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으로서의 한센인(나환자)을 비하하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백영경, 이유림, 나영, 나영정 외,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후마니타스, 2018)

 

* 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오월의봄, 2018)

 

    

 

로렌스는 여자와 섹스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동정(童貞) 알프레드를 나환자의 삶과 일치시킨다. 이때 로렌스는 한센인을 성적 권리와 무관한 비정상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로렌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와 장애인의 삶을 잘 모르는 비장애인의 문제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가는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을 정상적인 몸의 범주에 벗어난 존재로 보기 시작했고, 그들이 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출산과 관련된 재생산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했다. 특히 국가가 만든 수용시설은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1].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그들의 실질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들을 정의하게 만드는 단편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인식에 익숙한 비장애인은 수용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은 애당초 없는 것[2]으로 규정한다.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심각한 편견 중 하나는 장애인은 성적 욕구와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무성적으로 잘못 정의되기 쉽고,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무시당한다.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장애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많은 장애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거나, 대화해보거나, 실행해보거나, 실패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나영정, 어쩌면 이상한 몸, 79)

 

 

문둥이는 한센인 후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문둥이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란 말과 같은 의미로 쓰였고, 사회에 격리된 한센인들은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 목사의 딸들이 수록된 로렌스의 단편 선집이 처음 나온 해는 1991년이다. 그때는 문둥이가 한센인을 가리키는 표준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구시대적인 악어(惡語)를 쓴 백낙청의 번역도 문제지만, 이를 교정하지 않은 출판사의 편집자도 문제.

 

혹자는 필자의 지적에 책 읽는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사회적 약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거부하게 만들고, 배제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예민해져야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적 사회구조를 인지하는 예민함은 부단한 성찰과 자기반성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반응이다. 예민함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가 발전하는 데 이로운 건강한 비판이다. 세상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자극을 주어 한층 더 생각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향상한다. 나는 상대방의 진지한 예민함을 스트레스에 의한 증상으로 여기면서 걱정하는 그들이 더 걱정된다. 그들은 고민보다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예민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원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변혁의 목소리는 예민한 성찰이 함께 하지 않으면 커질 수 없다.

 

 

 

[1] 조미경, 수용시설에 감금된 성과 재생산 권리, 배틀그라운드, 후마니타스, 2018, 193~194.

      

[2] 같은 책, 각주, 196.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2-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의 책들, 제목만 외우고 있는 책중에 하나가 <목사의 딸들>인데, 이것까지 읽어셨군요! 괜히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cyrus 2019-02-26 23:55   좋아요 1 | URL
구판 <목사의 딸들>은 단편 네 편이 수록되었고요, <패니와 애니>는 <목사의 딸들> 수록작 네 편에 단편 세 편이 추가된 책입니다. 저는 이 책으로 로렌스의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요, 로렌스가 여성을 ‘결혼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한 것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읽을 때마다 찝찝하게 느껴지는 장면 몇 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렌스의 소설을 아예 읽지 말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소설에 대한 해석도 그렇고 그 책을 읽는 행위 역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니까요. 원래 로렌스의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품 하나씩하나씩 읽으면서 장점도 찾고 싶습니다. 얼른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고 싶어요. ^^

카알벨루치 2019-02-27 00:01   좋아요 1 | URL
제가 <아들과 연인>을 가지고 논문을 썼기 때문에 로렌스를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시대의 분위기나 트렌드가 지금 나타난다면 난리나겠죠 로렌스는 남근숭배주의자로도 볼 수 있으니깐요
제가 로렌스의 매력에 꽂힌 것은 그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비평이었다는 역설 ㅎㅎㅎㅎ

cyrus 2019-02-27 00:15   좋아요 2 | URL
제가 꾸준히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렌스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요. 저는 케이트 밀렛이 쓴 <성 정치학>을 통해 로렌스를 알기 시작했는데, 부정적 평이 많았어요. 페미니즘 독서 모임 중에 로렌스의 소설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의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제대로 비판을 하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하니까요. 단편적인 인용이나 설명을 근거로 로렌스의 작품을 단정하면 작품의 진면목을 못 볼 수 있어요. 카알벨루치님은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보셨으니 로렌스를 주제로 한 제 글을 보신다면 의견을 주셔도 좋습니다. 제 견해에 반박하셔도 좋습니다. 변증법적(?)으로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로렌스의 문학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

2019-02-26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7 00:16   좋아요 1 | URL
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나병’, ‘문둥병’이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저는 2010~2011년에 알라딘 블로그에 한하운 시인에 대한 글을 썼어요. 그 글에 ‘문둥이’라는 표현을 썼을 거예요. ‘한센병’, ‘한센인’의 ‘한센’은 나병을 일으키는 균을 처음으로 증명한 학자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나병’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센이 누군지, 한센병이 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

레삭매냐 2019-02-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 샘의 책은 한 개도 읽어 본 게 없네요.

언제고 읽고 말리라 !

<채털레이 부인>부터 읽어야 하나요.

cyrus 2019-03-04 13:48   좋아요 0 | URL
저는 발표 연도순으로 읽으려고 해요. <채털리 부인>은 로렌스 후기 작품에 속하고요, 초기 장편소설은 <아들과 연인>입니다. ^^

2019-02-27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04 13:59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페미니즘 독서 모임의 주제가 ‘인정과 재분배’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잘 살려면 그들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재분배 정책이 나오지 못합니다. 일단 사회적 약자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인정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정 투쟁을 하지 않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들에 향한 ‘무시’와 ‘모욕’은 이어질 것입니다. 인정이 먼저, 재분배가 먼저냐,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정의론을 논할 때 반드시 논의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서 ‘인정 투쟁’이 많아져야 한다는 걸 느껴졌어요.

페크pek0501 2019-03-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말이든 글이든 언어에 예민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어느 쪽에선 상처를 받게 되지요. 편한 것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저 역시 잊으면 안 되는 점을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3-04 14:03   좋아요 1 | URL
저도 종종 글을 쓰다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표현을 쓸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뭔가 생각나면 바로 글을 썼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경솔한 표현이 나올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난 뒤에 글을 씁니다. ^^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catcher’를 ‘파수꾼’으로 해석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일단 익숙한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이 소설의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The catcher in the Rye’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 「호밀밭을 지나오다가(Comin Thro the Rye, Coming Through The Rye)에서 따온 제목이다.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The Catcher in the Rye》 (Little Brown & Company, 199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1998)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어갈 때 한 아이가 흥얼거린 콧노래를 듣는다. 그 노래가 바로 번스의 「Coming Through The Rye」에 곡을 붙인 민요다. 그런데 홀든은 그 노래를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If a body catch a body coming through the rye)이라고 착각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확고히 다진다. 나중에 그의 여동생 피비(Phoebe)는 그 노래가 「Coming Through The Rye」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절판] 로버트 번스 《올드 랭 사인》 (솔출판사, 1995)

* [절판] 김천봉 엮음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이담북스, 2011)

* [e-Book] 로버트 번스, 김천봉 엮음 《다정한 입맞춤: 로버트 번스 시선》 (글과글사이, 2017)

 

 

 

 

로버트 번스는 오늘날에 민요로 더 알려진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붉고, 붉은 장미(A Red, Red Rose)를 쓴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이다. 번스가 누군지 몰라도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드 랭 사인」은 연말 또는 졸업식에 자주 불리는 노래다. ‘auld lang syne’은 ‘옛날’이라는 뜻을 가진 스코트어(Scots: 스코틀랜드 표준 영어)다. 현재의 ‘애국가’가 나오기 전에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 그리고 독립군 및 임시정부 인사들은 민요 버전의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춘 애국가를 불렀다.

 

홀든이 우연히 들은 「Coming Through The Rye」는 「올드 랭 사인」에 비하면 자주 불리는 노래는 아니지만, 사실 「Coming Through The Rye」도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이다. 우리나라에 ‘들놀이’라는 제목의 동요로 번안되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 동요 모음집 카세트테이프에 흘러나오는 ‘들놀이’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도 이 노래를 알려나?

 

 

 

 

 

 

※ 영국의 드라마틱 소프라노(dramatic soprano) 가수 플로런스 이스턴(Florence Easton)이 부른 「Coming Through The Rye」

 

 

 

 

 

 

※ 동요 ‘들놀이’

 

 

 

번스는 스코틀랜드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를 썼으며 전원생활의 평화로운 분위기, 농민들의 애환 등을 담아냈다. 그래서 번스의 시는 투박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 난다. 그의 고향에 박물관이 된 생가가 있을 정도로 번스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번스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분류되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번스의 인지도는 아주 낮다. 시 앤솔러지(anthology)에 가장 많이 수록된 번스의 시는 「붉고 붉은 장미」다. 번스의 시 선집은 1995년에 나온 《올드 랭 사인》(솔출판사)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들과 함께 수록된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이담북스)이다. 두 권 모두 스코티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지만, 절판되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한 번스의 시들은 《다정한 입맞춤》(책과책사이)이라는 새로운 제목이 붙여져 전자책 형태로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절판된 종이책과 전자책 두 권 모두 역자는 같아도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Coming Through The Rye」는 종이책에 없고, 전자책에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출판사의 번스 시 선집에도 「Coming Through The Rye」는 수록되지 않았다. 「Coming Through The Rye」가 번스의 대표 시로 보기 어렵다고 해도 소설 때문에 유명해진 시를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점은 의아스럽다.

 

종이책으로 나온 번스의 시 선집 모두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사실 번스가 시를 쓰면서 사용한 스코트어는 오늘날의 미국과 영국식 영어와 다르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18세기 초반 영국 연방에 합쳐진 후 영어와 스코트어, 그리고 스코틀랜드 방언을 함께 썼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코트어 특유의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영국 표준 영어의 철자(spelling)를 바꿔서 사용했다. 이를테면 영국인들은 ‘하나’를 뜻하는 영어로 ‘one’을 쓰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ane’라고 쓴다. 어쨌든 번스는 스코트어와 스코트랜드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번역가는 번스의 시를 2중(옛 스코트어→영국 표준 영어→한국어)으로 번역해야 하는 번뇌에 시달려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의 역자 해설(119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의 아버지(William Burness, 1721~1784: 1786년까지 번스는 자신의 이름을 ‘Robert Burness’로 표기했다)는 가난한 농부였다.

 

 

시인의 성(姓)은 원래 ‘Burnes’였다. 1786년 이후로 번스는 ‘e’를 뺀 ‘Burns’로 서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는 ‘Burness’로 잘못 적혀 있다. 고친다면 뒤에 있는 ‘s’를 빼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 있는 장시 「경건한 윌리의 기도(Holy Willie’s Prayer)」에 누락된 원문의 일부와 그것을 번역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은 이 시의 제사(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와 번스의 해설문이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의 출처는 번스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웹사이트이다.

 

링크: http://www.robertburns.org/works/58.shtml

 

 

 

“And send the godly in a pet to pray.” - Pope.

 

 

* Argument

Holy Willie was a rather oldish bachelor elder, in the parish of Mauchline, and much and justly famed for that polemical chattering, which ends in tippling orthodoxy, and for that spiritualized bawdry which refines to liquorish devotion. In a sessional process with a gentleman in Mauchline - a Mr. Gavin Hamilton - Holy Willie and his priest, Father Auld, after full hearing in the presbytery of Ayr, came off but second best; owing partly to the oratorical powers of Mr. Robert Aiken, Mr. Hamilton’s counsel; but chiefly to Mr. Hamilton’s being one of the most irreproachable and truly respectable characters in the county. On losing the process, the muse overheard him (Holy Willie) at his devotions, as follows:-

 

 

번즈에 의하면, 홀리 윌리는 실제로 윌리엄 피셔(Willie Fisher)라는 모흘린(Mauchline) 마을의 독신 장로로, 그 마을 목사와 합세하여 개빈 해밀턴(Gavin Hamilton, 또는 곤 해밀턴)이라는 선량한 사람을 교회 재판에 고소했다. 그러나 에어(Ayr, Ayrshire: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항구 도시, 번즈가 태어난 지역- 필자 주)의 장로회가 해밀턴을 무죄로 판결하자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번즈는 불만 가득한 상태의 윌리가 혼자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을 엿듣는 형식을 빌려, 자기만 옳고 선택됐다고 믿는 칼뱅교도의 오만한 독선과 편협성과 이기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솔출판사, 128쪽,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 형식으로 요약한 내용)

 

 

솔출판사 판본의 「Holy Willie’s Prayer」 역시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脚註) 형식으로 언급했지만, 제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 [e-Book]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5)

* [품절]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0)

 

 

 

제사의 출처는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1714년에 발표한 풍자적인 장시 「머리 타래의 강탈(The Rape of the Lock)」 4곡(曲, canto)의 64행 구절이다. 이 시는 흔히 ‘머리카락을 훔친 도둑’으로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The Rape of the Lock」은 총 5곡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포프 시선》(지만지)은 포프의 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본이지만, 「The Rape of the Lock」은 제1곡와 제2곡만 번역되어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2-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잉글리시 튜터가
<호밀 밭의 파수꾼>을 자신의 인생책
으로 꼽던 기억이 나네요 :>

cyrus 2019-03-04 14:04   좋아요 0 | URL
지난주 목요일에 <호밀밭의 파수꾼> 독서 모임이 있었는데, 저랑 다른 한 분 빼고는 이 책을 좋게 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