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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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올해의 절반이 지났지 않았지만, 내년도 올해만큼이나 특별히 기념해야 할 일이 가득하다. 내년이면 하퍼 리(Happer Lee)가 쓴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가 발표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소설은 경제 대공황으로 악화하여가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 위치한 앨라배마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무고하게 체포된 흑인 톰 로빈슨(Tom Robinson)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의 이야기를 그의 어린 딸인 진 루이지 스카웃핀치(Jean Louise “Scout” Finch)의 시선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앵무새 죽이기미국을 대표하는 국민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중의 하나이다

    

소설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흉내지빠귀 죽이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흉내지빠귀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양서류의 울음소리까지 흉내 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 능력이면 흉내지빠귀는 조류계의 주크박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능력은 앵무새를 따라갈 수 없다. 흉내지빠귀는 앵무새와는 전혀 다른 새이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서식지도 다르다. 흉내지빠귀는 미국에 서식하고, 앵무새는 열대 지방에 서식한다.

 

‘To Kill A Mockingbird’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려진 해는 1990년이다. ‘청담문학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은 저작권자와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은 해적판이었다. 해적판 제목은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이다. 1992년에 앵무새 죽이기라는 익숙한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한겨레출판사)이 나온다. 혹자는 하퍼 리의 소설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로 잘못 알려진 것을 오역이 낳은 폐해라고 지적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To Kill A Mockingbird’ 제목 오역 사례를 너무 나쁘게 볼 필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원문을 직역하는 것보다 국내 문화와 국내 독자의 성향을 고려한 초월 번역이 필요하다. 만약 흉내지빠귀 죽이기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이 서점에 비치되었다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책이 어느 정도 판매되었다고 해도 책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To Kill A Mockingbird’ 번역본 제목인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 ‘흉내지빠귀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중에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골라 보시라. 소설 제목을 직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의 익숙함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앵무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새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소설을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제목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번역 문제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는 건 시간 낭비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원작 소설과 영화 둘 다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간략한 줄거리와 애티커스 핀치의 명대사를 기억한다면 어디 가서도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소설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밑줄을 좍좍 그어 종이가 더럽혀져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애티커스는 명언이라고 해도 될 만한 훌륭한 말을 여러 개 남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애티커스의 명대사는 아빠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스카웃을 다그치면서 했던 말이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김욱동 옮김, 64~65)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미국 남부 사회에서 흑인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다. 따라서 백인 여자를 해코지한 흑인을 변호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예상대로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학교에서 스카웃은 아빠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수군대는 친구의 말을 듣는다. 그런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애티커스는 정의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묵묵히 변호 업무에 열중한다. 그가 말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편견의 함정을 지적하면서, 제대로 타인에 향해 다가서는 간단한 방법이다. 도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 도덕 교과서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된다. 말로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어도 살아가다 보면 자꾸만 잊어버린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이다. 편견은 차별, 혐오, 소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한계를 이겨내려면 타인의 경험을 똑바로, 그리고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려면 단순히 그 사람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심정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작가 은유의 말을 빌리자면 온몸이 귀가 되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자가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보는 행위와 타인의 입장을 듣는 행위는 방법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타인을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말, 그것은 실천하는 자세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공허한 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는 타인에 향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존중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애티커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207)고 말한다. 그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집중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지속해서 확산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소설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팁(tip)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을 보면서 타인의 경험을 보고 있기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속을 걸어 다닐 수 있다. 그러면 그 인물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타인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소설에도 한계가 있다. 소설 역시 작가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스며들기 좋은 장르이다.

 

‘To Kill A Mockingbird’는 인종 차별의 부당함을 강렬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 묘사한 흑인은 백인우월주의 앞에서 제대로 힘쓰지 못하며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 흑인을 억압받고 고통 받는 피해자로 그려진 것이다. 소설 중반부에 흑인들만 드나드는 교회가 나오는데, 톰 로빈슨이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이 상황에 조금이라도 분노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인은 핀치 집안의 유모 캘퍼니아(Calpurnia). 그녀는 교육을 받을 정도로 똑똑하며 흑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흑인 영어를 쓰기도 한다. 그녀의 행보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네그리튀드(Négritude)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백인 가정의 흑인 유모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틀에 벗어나지 못한다. 흑인 여성에게 부여된 충실하고 순종적인 가사노동자 이미지는 백인들이 흑인 여성을 유모로 부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캘퍼니아를 집 밖으로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애티커스의 말에 확인할 수 있다.

 

 

오빠, 마음이 상냥한 것까진 좋아요. 오빠가 인정이 많은 건 알지만 생각해야 할 딸이 있잖아요. 점점 자라고 있는 딸이에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야.

회피하지 마세요. 조만간 직면해야 할 문제예요. 어쩌면 오늘 밤에 하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이제 우리에겐 그 여자가 필요 없어요.

아빠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알렉산드라, 캘퍼니아가 원할 때까지는 내보낼 수 없어. 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그녀 없이 살림을 꾸려 올 수 없었어. 그녀는 이제 어엿한 집안 식구고, 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해. 게다가 난 네가 우리 일로 골치를 썩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필요 없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린 여전히 캘퍼니아가 필요해.

하지만 오빠―」

더구나 그녀가 애들을 키우면서 애들에게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어.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엄마보다 더 엄격했으면 엄격했지‥…. 애들이 잘못하면 벌하지 않은 적도 한 번도 없었어. 흑인 유모들이 흔히 그러듯 애들은 버릇없게 그냥 내버려 둔 적도 없었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키우려고 애썼단 말이다. 그리고 캘퍼니아의 견해란 꽤 훌륭하거든. 그리고 또 한 가지, 애들이 그녀를 좋아해.

 

(김욱동 옮김, 256~257)

 

 

애티커스는 캘퍼니아가 똑똑한 여성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집안에 있는 캘퍼니아를 똑똑한 흑인 여성이 아니라 아이들을 잘 키우는 착하고 모성 본능이 강한 흑인 유모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 아니면 가사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쫓겨날 위기를 처한 캘퍼니아를 지켜준 애티커스를 훌륭한 아버지의 귀감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애티커스의 백인가부장적 온정주의는 위계적인 주인-노예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인지 캘퍼니아는 애티커스가 맡은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녀도 흑인이라면 톰 로빈슨의 처지를 분명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다른 지역에 살다가 온 사람처럼 톰 로빈슨 사건에 대해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까. 자신과 말이 통하는 스카웃과 젬에게 살짝 자신의 속내를 내비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집안일을 열심히 하느라 톰 로빈슨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신 발언이 백인 주인의 귀에 들릴까 봐 마음속으로 삼켰던 것일까. 스카웃과 젬(“Jem” Finch, 애티커스의 아들이자 스카웃의 오빠)에게 타인을 손님처럼 공손하게 대하라고 따끔하게 가르치던 소설 초반부에서의 모습과 무척이나 상반된다.

 

독자들은 애티커스를 인종 차별에 맞선 정의로운 변호사로 기억한다. 그의 이미지에 따라오는 단어는 정의로움, 지혜, 자상함이다. 독자들은 흑백영화 속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의 얼굴로 그려지는 애티커스는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들 사이에서 유독 빛이 나는 인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만 보고 남부인들을 인종 차별을 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북부인을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개혁가로 추켜세웠고, 남부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종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북부인과 남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인종적 편견에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늘어났다. 남부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종종 남부인들의 인종주의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단순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역사적 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의 한계를 보완해준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을 땐 등장인물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애티커스의 품성에 주목하면서 앵무새 죽이기를 읽는 방식은 낡았다. 출간 6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을 기점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풍성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 은유, 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1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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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 개정판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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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는 날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중에서)

 

 

 

술을 많이 마시면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온다. 술 한 잔 마시면 그 속에 있는 알코올은 혈액으로 흡수된다. 시간이 지나면 알코올은 모든 몸 조직에 퍼진다. 알코올이 뇌에 도착하면 신체에 특별한 변화가 나타난다. 알코올의 마취작용이 뇌 중추 신경계의 기능을 무디게 만든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뇌의 활동이 느려져 몸과 정신이 느슨해질 뿐 아니라 도취감마저 느끼게 된다. 술에 취한 상태는 기분을 좋게 하여 잠이 빨리 오게 만든다. 술잔을 여러 번 비우고 나면 감각신경부터 서서히 둔해지고 마침내 중추에 해당하는 척추신경에 이르러 반사 신경도 마비된다. 이때쯤 되면 첫 술잔의 쓰디쓴 술 한 모금에 인상을 찌푸리던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자제력이 약해진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는 시간에 구애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항상 취하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던 취하라. 그래야만 반복의 괴물인 시간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종교, 도덕과 아름다움이 주는 가치를 믿지 않았다. 그렇듯이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라는 단일한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그는 도취감을 통해 피로감을 일으키는 이성에 벗어나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순간에 일어나는 행복감에 몰입하는 삶의 철학을 말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졸지에 반신불수가 되었고,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오직 단 하나의 말은 잊지 않았다. 보들레르가 틈만 나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다름 아닌 육두문자인 제기랄이었다. 보들레르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쉽사리 채워지지 않은 허기진 마음을 채워보려고,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대마초에 의존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몸은 점점 망가져 너무 빨리 죽음의 길에 이르고 만다. 병상의 보들레르는 이 방법, 저 방법으로 자신의 불만족을 해소하려고 해봐도 끝내 참다운 안식과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쾌락에 의존한 인생살이를 통해 끔찍한 교훈을 얻은 보들레르는 지옥 같은 세상과 반죽음 상태에 이른 자신에 대한 구역질이 날 때마다 제기랄을 내뱉었다.

 

만약 인간이 이성과 언어 등을 담당하는 좌뇌를 상실한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무능력자(단독으로는 법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이토록 좌뇌는 인간의 실체, 라는 존재를 표현하는 핵심 기관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라고 부르면서 설명할 수 있는 건 사람마다 좌뇌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좌뇌이며 좌뇌가 나인 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에 걸려 좌뇌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 말년에 욕쟁이 환자로 살다간 보들레르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뇌과학자는 뇌졸중 전조증상을 느끼자마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였던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19961210일 아침에 자신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는다. 이때 당시 그녀의 나이는 서른 일곱이었다.

 

 

 

 

    

  연구소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오른쪽 팔이 마비가 되어 옆으로 풀썩 떨어지며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알았다.

  ‘맙소사, 뇌졸중이야! 내가 뇌졸중에 걸렸어!’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아, 이거 멋진데!’

일시적으로 황홀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30)

    

 

 

뇌졸중 진단을 받은 그녀는 장래가 밝은 뇌과학자에서 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뇌과학자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뇌 기능이 점점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며 관찰했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 그녀는 8년간의 치료 끝에 회복에 성공한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는 뇌졸중 투병 생활을 한 뇌과학자가 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환자로 살아가면서 경험하거나 느낀 것을 보여주는 투병일기에 머물지 않는다. 뇌졸중을 예방하는 방법과 뇌졸중 환자를 위한 식이요법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저자는 뇌졸중 경험으로 얻은 뇌에 관한 신비롭고 놀라운 통찰을 들려준다. 저자에게 뇌졸중은 절망의 병이 아니었다. 저자가 그토록 알고자 했던 뇌의 기능에 관해, 그리고 인간 존재의 경이로움을 일깨워준 ‘축복의 병이였다.

 

저자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뇌의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특히 그녀는 뇌졸중이 오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우뇌의 특별한 기능을 발견한다. 출혈로 인해 좌뇌가 완전히 멈추게 되자 그동안 조용히 잠들어있던 우뇌가 번쩍 눈을 뜨게 된다. 우뇌가 활발히 작동하면서 그녀의 의식은 일종의 열반 상태에 빠져든다. 대부분 사람은 좌뇌 위주로 사고하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크고 작은 생각들에 휩싸이면서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생각에 매달리게 되고,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괜한 걱정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 우뇌는 좌뇌와 달리 낙관적이다. 평화를 좋아하며 사랑, 공감 같은 기분 좋게 만드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한다. 우뇌가 활발하면 즐겁고 기쁜 일에 몰입할 수 있다. 좌뇌와 우뇌는 서로 다른 기능을 하고 있지만, 그 활동은 상호보완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좌뇌와 우뇌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를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나온 셈이다. 몸과 마찬가지로 지속해서 뇌에 일정하게 자극을 주면서 살아야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설렘이 느끼지 못할 때,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약해진다. 그냥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언제나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변화 없는 삶, 도전하지 않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듯이 우리의 뇌는 자극이 없는 것을 싫어한다.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뇌를 신선하게 자극할 일을 찾아봐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갈수록 뇌는 소리 없이 죽어간다. ()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야 한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를 들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잘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리뷰 제목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소설 제목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을 패러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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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9-04-2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마 모습 보여주세요~

cyrus 2019-05-01 11:42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 인스타에 가면 제 얼굴 사진 볼 수 있어요... ㅎㅎㅎㅎ

수이 2019-05-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팔로잉했어 우리 싸이러스는 똑같구나~~~
 

 

 

역사적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들을 수 없는 가운데 총 9곡의 교향곡을 만든 음악가 베토벤(Beethoven), 소아마비를 앓았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루 게릭 병(Lou Gehrig’s disease)’으로 알려진 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많은 사람이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2005년에 상영된 영화 <말아톤>은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자폐 청년이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은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고 아무 데서나 막춤을 추는 종잡을 수 없는 면모를 가졌지만 달릴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에 나온 영화 <맨발의 기봉이>는 지적장애 1급인 엄기봉 씨의 실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다. 기봉 씨는 팔순의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시는 효자로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는 어머니의 틀니를 사드리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지만, 지병인 협심증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장애를 가졌지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간다. 그들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화 밖으로 나와 우리 곁에 있다면 어땠을까. 스크린 속에만 있는 그들은 적어도 낯선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친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와 같은 영화로 인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은 ‘착하고 순수한 존재’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러한 이해가 장애인을 특정 이미지로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벽이란 이런 것이다. 영화가 아닌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인에 대해 대부분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미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데 일부 언론이 큰 몫을 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개인의 능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들을 마치 한 편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것처럼 보도하는 방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과 영화가 만든 ‘장애인 영웅 서사’를 보고 듣고 자란 비장애인은 장애를 ‘장애인이 극복해야 할 삶의 일부’이며 반드시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장애인 영웅 서사’는 장애인들이 직접 겪고 있는 장애의 진정한 모습을 가린다.

 

 

 

 

 

 

 

 

 

 

 

 

 

 

 

 

 

 

* 해릴린 루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책세상, 2015)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해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여성 운동가이다. 루소는 사람들에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Don’t Call Me Inspirational)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그녀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루소는 이 책에서 한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자신을 ‘대단한 영웅’ 또는 ‘불쌍한 괴물’로 보는 사회적 편견과 맞서는 투쟁의 과정이다. 그녀는 자신을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길 바란다.

 

 

 

 

 

 

 

 

 

 

 

 

 

 

 

 

 

 

* [절판] 앨리슨 래퍼 《앨리슨 래퍼 이야기》 (황금나침반, 2006)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발과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예술가다. 그녀의 두 팔은 아예 없고 다리는 자라다 말았다. 래퍼는 팔과 다리가 짧은 해표지증(海豹肢症)이라는 희소병을 진단받았다.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복지시설에서 자랐다. 20대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9개월 만에 헤어졌다. 그녀는 장애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았다. 래퍼는 자신의 벗은 몸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 즉 장애인 여성의 몸을 작품 소재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기형이라고 여기는 비장애인들에게 정상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져준다.

 

해릴린 루소와 앨리슨 래퍼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그녀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 혹은 ‘대단하다’라는 양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에 저항하면서 분투하는 삶은 절대 쉽지 않았으리라. 장애인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는 것마저도 왜 이리 깐깐하게 구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또 어떤 분은 내가 ‘정치적 올바름’에 너무 몰입하고 있다면서 말할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익숙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장애인을 막 대하게 만드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그러한 편견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쉬이 제거하지 못한다. 장애인은 투명한 공기와 같은 세상의 온갖 편견들을 마시고 걸러내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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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일에 올푸리 출판사의 전자책인 오비의 빛이 새로 업데이트(개정)되었다. 예전에 내가 확인한 연도 표기 오류뿐만 아니라 맞춤법도 고쳐졌다. 415일 이전에 다운받은 전자책이 e-Book 책장에 있으면 그걸 삭제하고 다시 다운로드하면 된다. 그러면 업데이트된 전자책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올푸리 출판사 공식 블로그에 공지되어 있다.

 

링크: https://orpuhlee.blogspot.com/

 

      

새로 업데이트된 전자책을 다운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출판사의 공지 사항을 보면서 처음에는 업데이트된 전자책을 다시 사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사들이지 않고도 업데이트된 전자책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e-Book] 아서 맥킨 오비의 빛(올푸리, 2019)

 

    

 

이번에 업데이트된 전자책에 또 하나 추가된 내용은 저자명 표기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나는 오비의 빛리뷰에 작가 Arthur Machen아서 매켄또는 아서 매컨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을 표명한 내 글을 올푸리 출판사 편집자가 답변을 보냈다. 출판사 편집자의 답변을 읽고 난 뒤에 생각이 달라졌다.

 

달라진 내 생각은 이렇다. 첫 번째, ‘아서 매켄또는 아서 매컨으로 반드시 표기해야 할 의무는 없다. 두 번째, 아서 메이첸또는 아서 맥킨(올푸리 출판사가 표기한 저자명)으로 표기하는 것이 틀렸다고 말한 내 입장은 잘못되었다.

 

Arthur Machen에 관한 국립국어원의 권장 표기법은 없다. 주로 많이 쓰이는 게 아서 매켄아서 매컨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표기법을 많이 쓴다고 해서 올바른 저자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아서 메이첸또는 아서 맥킨으로 표기하는 것은 틀렸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주관적인 잣대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만 셈이다. 국립국어원의 권장 표기법이 없는 단어를 둘러싸고 어느 표기명이 맞느냐 틀렸느냐 식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출판사 편집자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원어민들이 ‘Machen’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사하고 검토했다고 한다. 편집자가 내게 제시한 참고 자료는 1937년에 아서 매켄이 BBC의 웨일스 지역 방송에 출연하면서 남게 된 육성 자료. 놀랍게도 이 귀한 자료는 유튜브에 있다. 이 영상에 흘러나오는 방송 진행자의 말을 들어보면 Machen맥킨또는 매킨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11일에 등록된 오비의 빛관련 글 두 편을 수정했다. 잘못된 내용에 취소 선을 그었다. 예전에는 아무도 모르게 문장을 지웠다. 정말 간단한 일이다. 내 글에서 드러난 결점을 말끔하게 지울 수 있다. 하지만 남몰래 내 결점을 숨기는 게 과연 잘한 일일까? 나의 좋은 점이 부각된 글은 보여주고 내 결점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글을 숨기는 데 급급하면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못한다. 내 결점을 분명히 확인했다면 그게 왜 그렇게 나왔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피드백을 거치고 난 후에 글의 결점을 삭제해도 늦지 않다.

 

 

 

 

 

 

 

 

 

 

 

 

 

 

 

 

 

 

 

 

 

 

 

 

 

 

 

 

 

 

 

 

* 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뢴룬드 팩트풀니스(김영사, 2019)

* 은유 다가오는 말들(어크로스, 2019)

* 은유, 이은의, 윤정원, 박선민, 오수경 불편할 준비(시사IN, 2019)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실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실수에서 호기심을 가지라[1]라고 말한다. ‘내가 그 사실을 어쩌면 이렇게 잘못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실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결점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로슬링이 말한 대로 결점에 호기심을 가지면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마음속으로 교훈을 얻는 데 그친다면, 금방 잊어버리기 쉽다. 글로 써서 남겨야 한다. 작가 은유이성복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한 일이라고 말한다[2]. 내 결점과 한계를 글로 기록하면 온전한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결점을 확인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생각이 틀렸다고 단정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주관적인 생각에 가까운 확신이라는 오만함에 잠깐 눈이 멀었다. 은유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다[3]. 그녀는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요즘 2, 30대의 젊은 사람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확신에 찬 사람이 되기 쉽다.

 

어제 읽은 카알벨루치 님의 글[4]에서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한 말을 발견했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5] 나는 내 결점을 확인하고 난 뒤에 성찰하는 피드백(feedback) 과정도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피드백 과정을 글로 기록하고, 업로드하고, 공유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그리고 내 결점을 떳떳하게 글로 공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장점을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 분명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잠시 오만한 나’를 따끔하게 혼쭐내기 위한 글쓰기도 재미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부끄러운 나의 진짜 모습을 글로 표현하기가 망설여진다면, 은유의 문장[6]을 주문 삼아 외워보자.

 

남에게 보여주는 용기, 약점과 결핍을 드러내는 용기, 글에 대한 어떤 평가도 받아들이는 용기, 다시 글을 쓰는 용기.

 

 

 

 

[1] 한스 로슬링 외, 이창신 옮김, 팩트풀니스, 김영사, 2019, 357

 

[2] 은유, 나로 살고 싶은 여성의 글쓰기, 불편할 준비, 시사IN, 2018, 193

 

[3] 은유, 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2019, 19

 

[4] [투명사회의 기괴한 라디오], 2019418일에 등록됨

 

[5] 유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529~530

 

[6] 은유, 불편할 준비,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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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9-04-1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속으로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글로 써서 남겨야 한다는 것. 공감합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요. 작은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cyrus 2019-04-20 10:22   좋아요 0 | URL
윤동주처럼 좋은 시를 쓰지 못하지만, 윤동주처럼 종이를 거울삼아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
 
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 머릿속엔 죽을 때까지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있는 개 두 마리가 있다. 개의 이름은 편견직감이다. 두 마리 개는 주인의 이성적 사고력을 핥고 또 핥는다. 두 마리 개의 애정공세(?)에 헤어 나오지 못한 주인은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인지심리학 용어로 인지 도식(recognition schema)이라는 것이 있다. 인지 도식이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고 견고해진 개인의 신념체계다. 인지 도식은 어떤 대상이나 관념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인지 도식에 따라 즉각적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신처럼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견과 직감에 의지해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좁은 경험 세계의 한계가 너무 분명하므로 우리는 정확한 정보보다는 부정확한 남들의 말에 더 솔깃해진다. 문제는 내가 막연하게 믿고 있는 생각과 왠지 정확할 것 같은 남들의 말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팩트풀니스는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나의 경험과 확신, 그리고 우리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잘못된 정보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지침을 주는 책이다. 책의 제목 팩트풀니스(Factfulness)는 우리말로 옮기면 사실충실성이다. 말 그대로 사실에 충실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습관이다.

 

고정 관념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다. 수많은 정보와 변화 속에 노출되어 판단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일정하고 고정된 틀에 의존할 수 있다면 안정된 삶을 사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고정 관념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뒤죽박죽일 것이다. 그러나 고정 관념의 이 같은 긍정적인 효과도 적정수준이어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정 관념은 편견의 또 다른 말이 되어 우리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고정 관념에 지나치게 매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해석하고, 언어로 말하면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무언가 불확실하고 무질서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좀 더 단순하고 일관된 생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전쟁, 자연재해, 테러, 범죄, 빈곤 등 인간에게 고통을 가중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은 모든 대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고정 관념을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이 불안해하고 혼자서 속을 태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사람들은 왜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쉽게 믿고, 부조리한 편견과 직감에 의존하는 걸까. 사람들은 복잡한 정보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순한 정보를 선호한다. 사람들이 단순한 정보에 익숙해지고 나면, 나중에 그 정보가 옳지 않거나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도 쉽게 예전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익숙함과의 결별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저자는 잘못된 고정 관념과 믿음은 세상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 만든 무지와 싸운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기관 갭마인더 재단(Gapminder Foundation)을 세웠다. 저자의 신념은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 즉 사실충실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2017년에 사망할 때까지 명확한 데이터와 통계로 가지고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면서 강연을 했다.

 

팩트풀니스의 부제는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이다. 저자는 인간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유를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편견은 지식이 빈곤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생기는 본능(instinct)이다. 저자는 세상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면서 10가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좀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부정적인 고정 관념으로 채워진 세계관은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스스로 고통이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을 나열한 목록에 편견이라는 항목을 추가해야 한다.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면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듯이 내가 믿고 있는 지식도 함께 늙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젊고 신선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젊은 지식을 접하는 과정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새로운 정보와의 거리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겸손과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새로운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호기심이 생긴다고 말한다. 겸손과 호기심은 우리의 한계와 사고의 맹점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정신에 해로운 세계관이 불러일으키는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몰아내기도 한다. 세상은 천천히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데 부정적인 과거에만 얽매여 있다면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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