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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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서 ‘유튜브(Youtube)라는 매체를 통해 영상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가 대세 미디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집에 TV가 없다”, “유튜브로 뉴스를 본다”는 말은 더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TV에서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했던 과거 세대와 달리 지금의 세대는 능동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영상을 제작한다. 또 젊은 세대는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텍스트를 통해 얻기보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 얻는다. 내가 관심 있는 영상들을 찾아서 보다 보면 한두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곤 한다. 내 휴식 시간은 책이 아닌 영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상의 시대는 결국 텍스트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텍스트와 영상, 둘 중의 하나만 고르기 어렵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반면, 영상은 구체적으로 보여줘서 그 느낌을 빠르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한 개인의 정체성이 댓글 수와 조회 수로 나타나는 요즘, 글로써 자기 생각과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자아표현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자와의 소통이 부재한다. 이로 인한 치명적인 고독감은 피할 수 없다. 자신을 표현해야 타자에게 인식된다. 이때 주된 표현 방식은 바로 글이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새로운 미디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글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글쓰기가 인터넷과 유튜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 형태라는 사실을 쉽사리 잊는다. 인간은 문자 없이 수천 년간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다시 수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문자를 만들었다. 사실 고대인들은 문자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었다. 일하다가도 짬이 나면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토리텔링 애니멀(The Storytelling Animal)의 저자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에 따르면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지속해서 알려지길 원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는 속담처럼 이야기의 전파력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영원히 보존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해지려면 입이 아니라 손이 필요하다. 전달받은 이야기가 잊히지 않으려면 손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한 가지 대책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를 문자로 표현하는 기술, 즉 글쓰기다.

 

문학은 ‘말(言)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인 스토리텔링과 ‘문자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글쓰기와 교차하면서 탄생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이 ‘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할까’라는 의문점에서 출발해 이를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낸 책이라면 《글이 만든 세계(The Written World)‘글이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역사를 바꾼 텍스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전자의 책은 이야기의 힘을, 후자의 책은 글의 힘에 초점을 맞춘다.

 

《글이 만든 세계》의 저자는 16편의 유명한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텍스트들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리스에 속한 소국의 왕자였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대제국을 거느리는 ‘대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텍스트는 호메로스(Homeros)《일리아스(Ilias)였다. 왕자는 전장에 나갈 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세계를 제패하는 영웅이 되는 꿈을 키웠다.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부처, 공자(孔子), 소크라테스(Socrates), 예수는 자신들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들려줬을 뿐,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다. 부처와 공자의 제자들은 ‘교사(teacher)가 되어 스승의 생각들을 학문(불교, 유가 사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다른 제자들에게 전파했다. 교사가 된 제자들이 손을 쓴 덕분에(글을 쓴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인들의 깨우침을 존중하면서 이어받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은 대화체로 스승의 말을 기록했다. 이렇듯 말하기와 쓰기가 하나가 되면 텍스트가 되고, 나아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를 기록하는 작업은 세상을 읽고, 그것을 바꾸는 행위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만 가능한 지적 작업이다. 고대인들은 문자로 소통을 하고 역사를 남겼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역사는 단절됐을 것이다. 글쓰기는 ‘역사’라는 정보를 자자손손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기술 형태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고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수천 년 전의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학문의 진화는 이뤄지지 않았을 게 자명하다. 역사를 바꿀 정도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글은 힘이 세다! 《글이 만든 세계》는 영상의 힘에 압도당해 점점 잊히고 있는 글의 힘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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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7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상매체가 발달한 요즘 종이책을 읽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 것 같지만,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빨라 따라가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9-06-10 16:3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신간도서가 계속 나와요. 신간도서 위주로 읽는 것도 힘들어요. 애서가 입장에서는 쉴 틈이 없어요. ^^;;

레삭매냐 2019-06-07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의 경우에는
영상미디어가 인쇄미디어를 압도할
것 같습니다.

국민성 자체가 무얼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이랄까요.

새로운 트렌드를 추구하는 건 좋지만
그만큼 올디한 것들도 지켜내야 하는
데, 밸런스 맞추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글쓰기 훈련도 중요하지만 읽는 훈련
도 그만큼 중요한데, 도통 읽지를 않
으니...

cyrus 2019-06-10 16:42   좋아요 1 | URL
길지 않은 글을 읽는 것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댓글도, 카톡도 최대한 짧게 써야 해요. 글이 길어지면 할 말 많은 나이든 사람 같아 보여요... ^^;;

카스피 2019-06-07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요즘은 영상의 시대가 맞는거 같더군요.아무래도 유트브의 영향이 가장 큰것이 아닌가 싶어요.그래선지 사람들도 긴글을 읽어야 하는 블로그보다는 쉽게 볼수 있는 브이로그를 더 선호하는것 같더군요^^;;;

cyrus 2019-06-10 16:44   좋아요 1 | URL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동영상으로 책 리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

수이 2019-06-08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도통 왜 이렇게 글 읽기가 요즘 힘이 들까 자문하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이미지(덩달아 유투브 구독하는 게 날이 갈수록 늘어만가고...)에 크게 좌우되고있는듯한 그런 느낌. 그래서 자꾸 글자가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고 읽어야겠습니다. 진득하게. (레삭매냐님이 말씀하신 무엇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_에서 엄청 찔리고 반성;;;;)

cyrus 2019-06-10 16:49   좋아요 1 | URL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주말에 밭일하고 나니깐 온 몸이 쑤시고 오른쪽 손목이 부었어요. 저는 시골에 살면서 농사짓고 책 읽는 삶이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시골에 지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걱정 X, 불안 X) 책에 집중할 수 있어요.. ㅎㅎㅎ

2019-06-08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0 16:52   좋아요 0 | URL
북튜버 활동을 하기 시작한 지인 덕분에 유튜버의 수익 구조를 알았어요. 역시 유튜버도 돈을 쉽게 버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이 없으면 수익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보여요.
 

 

 

카페 ‘스몰토크’에 가면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볼 수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작품인데 진품은 아니다. 종이에 복사한 복제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간결하면서도 특이하다. 『구상 8(composition Ⅷ)이다. 칸딘스키는 ‘구상’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추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특히 『구상 8』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누구든 알 수 없는 도형과 기호들로 채워진 칸딘스키의 그림 앞에서 난감한 심정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그림 속에서 형체를 찾으려 가까이 보고 멀리 봐도,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이며 왜 그렸는지 알아내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 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내린 결론이 ‘도대체 이게 무슨 그림이야?’다.

 

전시장에 있는 그림 중 초보 관람자들을 난처하게 만들며 가장 인기 없는 회화 장르 대부분은 추상미술에 속한다. 추상미술의 정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작가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추상미술은 기존 정물화나 풍경화, 초상화 즉 구상화가 갖는 재현적인 요소를 거부한다. 애초부터 추상미술은 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비(非)대상 미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떤 대상을 의도적인 왜곡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비구상 미술’이라고 한다.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이것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화가가 바로 칸딘스키다. 그렇다면 칸딘스키와 그의 추상미술을 이해하려면 어떤 책을 참고하면 좋을까? 이제 막 서양미술 공부에 입문(입덕)하는 독자들이 보면 좋은 책에는 어떤 책이 있는지, 필자가 직접 고르고 읽어봤다.

 

 

 

 

 

 

 

 

 

 

 

 

 

 

 

 

 

* 노르베르트 볼프 《표현주의》 (마로니에북스, 2007)

* 하요 뒤히팅 《표현주의,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2007)

* 슐라미스 베어 《표현주의》 (열화당, 2003)

 

 

 

칸딘스키는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창시자다. 그러므로 ‘표현주의’가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표현’이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표현주의의 특징을 요약하면 ‘강력한 색채’와 ‘주관적 양식’이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회화 양식이다. 이때 당시 독일 미술의 중심지는 뮌헨(München)이었다. 인상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한 프랑스 파리에 건너갈 수 없었던 독일, 러시아 출신 화가들은 뮌헨에서 터를 잡아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도 화가가 되기 위해 독일로 건너 온 러시아 출신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뮌헨 미술계는 젊고, 타지에서 온 화가들이 활동하기가 어려운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1870년대부터 뮌헨 미술계를 주름 잡고 있었던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hnbach)는 황제나 수상과 같은 유명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뮌헨에 렌바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렌바흐의 그림을 보면 칙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렌바흐는 옛 거장들이 선호했던 갈색 물감 위주로 그리는 것을 고집했다. 만약 당신이 렌바흐가 그린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Bismarck)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저 그림은 너무 칙칙해서 별로야. 비스마르크가 저렇게 생기 없는 모습으로 보이는 건 처음이야’라고 느꼈다면, 당신도 표현주의 미술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칸딘스키를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생기 없고 칙칙한 렌바흐의 화풍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은 렌바흐의 화풍을 가르치는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다. 칸딘스키는 도유망한 젊은 화가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미술학교를 세웠다. 칸딘스키의 미술학교는 뮌헨의 미술학교와 다르게 개방적인 분위기였고, 전문 화가가 되려고 하는 여성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칸딘스키가 가르친 제자였던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unter)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된다.

 

 

 

 

 

 

 

시대를 앞서 간 칸딘스키와 그의 동료 및 제자들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의 조롱을 받았지만, 젊은 화가들은 여전히 ‘색채만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리하여 칸딘스키는 뮌터, 그리고 러시아 출신 화가이면서 부부로 연을 맺게 되는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마리안네 폰 베레프킨(Marrianne von Wereffkin) 등과 함께 ‘뮌헨 신미술가협회(Neue Künstler-vereiningung München, NKV)를 결성했다. 이 협회장은 칸딘스키였고, 그는 독일 전위미술의 대부가 되었다.

 

열화당 출판사의 《표현주의》, 마로니에북스 출판사의 《표현주의》, 그리고 《표현주의는 어떻게 이해할까?》, 이 세 권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이 탄생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책이다. 이 중에서 필자가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은 《표현주의는 어떻게 이해할까?》이다. 이 책의 장점은 핵심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표현주의 회화에 중점을 둔 책들과 다르게 조형 미술과 건축미술에까지 영향을 준 표현주의도 소개하고 있다.

 

 

 

 

 

 

 

 

 

 

 

 

 

 

 

 

* 지벨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예경, 2007)

* [절판] 토마스 다비트 《프란츠 마르크: 무지개의 색을 훔친 화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독일 표현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면, 이제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가 함께 결성한 ‘청기사파(Blaue Reiter)의 그림들에 주목해보자. ‘청기사’는 마르크와 칸딘스키가 어느 날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조어이다. 마르크는 말을 좋아했고, 칸딘스키는 기사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신비로운 내면의 세계를 통찰하고, 이를 색채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마르크는 인간의 눈으로 동물의 마음을 읽기를 원했고, 동물이야말로 생명력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는 청기사파의 이상을 공유한 당대 화가들의 삶과 주요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남성 화가들의 활동에 가려진 여성 화가들(가브리엘레 뮌터,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의 재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프란츠 마르크: 무지개의 색을 훔친 화가》는 마르크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당연히 이 책의 주인공은 마르크와 그가 좋아했던 동물들이다. 절판된 게 너무 아쉬운 책이다.

 

 

가브리엘레 뮌터가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보관하지 않았으면, 칸딘스키와 표현주의는 현대미술의 문을 본격적으로 연 화가와 예술사조로 평가받지 못했을 것이다. 뮌터는 칸딘스키에 버림받아 실연의 아픔을 겪었지만, 그녀는 세계 대전의 위험 속에서도 남편과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잘 간수했다. 뮌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표현주의 및 청기사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뮌헨 시에 기증했다. 언론은 감동적인 찬사와 함께 그녀의 기부 소식을 대중에게 알렸다.

 

 

“뮌터 부인 앞에 우리 모두 모자를 벗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124쪽)

 

 

칸딘스키가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시대를 열었다면, 뮌터는 그 찬란했던 시대의 유산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현대미술을 공부할 때 막연하게 어렵다고 느꼈던 표현주의를 대충 훑고 지나갈 수 없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표현주의 미술이 많이 주목받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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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0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7 18:33   좋아요 0 | URL
표현주의 미술을 공부하면서 표현주의 미술 작품에 있는 색채를 다시 보게 됐어요. 특히 마르크와 가브리엘레 뮌터의 그림에 있는 색들이 정말 좋았어요. ^^
 
내 안의 가부장 - 여성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
시드라 레비 스톤 지음, 백윤영미.이정규 옮김 / 사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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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인간의 삶을 감싸는 거대한 봉투가 ‘문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쓰는 문화라는 말의 의미는 아주 넓다. 전통문화, 대중문화, 음식문화, 기업문화, 청소년문화 등 ‘문화’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문화를 봉투로 비유한 것은 협소하다. 문화라는 이름의 산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문화는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산소와 같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우리는 문화로 숨을 쉬면서 자라고 문화생활을 영유하는 ‘인간’이 된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존재이다.

 

우리가 호흡하고 활동하는 동안 ‘활성산소’가 생긴다. 몸속으로 흡수되는 영양분과 산소는 활성산소를 만드는 주요 원료이다. 과도한 활성산소는 세포를 공격해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암을 일으킨다. 나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차별과 억압에 일조하는 가부장제 문화를 활성산소에 빗대어 ‘활성 문화’라고 부르고 싶다. 가부장제 문화는 오랜 세월 동안 전통과 관습이란 명목으로 여성을 남성의 말에 순종하고 보호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게 했다.

 

우리는 가부장제라는 활성 문화를 산소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란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나고 자란 우리 중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에게 가부장제는 내면화되어 있다. 우리 무의식의 그림자 속에는 ‘내면 가부장’이 있다. 《내 안의 가부장》은 가부장제 문화를 지속해서 유지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자아의 실체를 보여주는 책이다. 심리학자인 이 책의 저자 시드라 레비 스톤(Sidra L. Stone)우리 안에 다양한 자아들이 있다는 관점을 전제로 하면서, 내면 가부장이라는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관점을 제공한다.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란 우리가 외면하거나 무의식 속에 숨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그림자는 때때로 통제를 따르지 않고, 내면 밖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내면 가부장을 ‘그림자 왕(The Shadow King)이라고 부른다. 내면 가부장은 전통과 규칙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내면 가부장은 사회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만든다. 내면 가부장이 좀 권위적이어도 생각보다 좋은 일을 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전통과 규칙을 어기면 내면 가부장은 초조해지는데, 이게 심해지면 문제가 발생한다. 전통과 규칙을 어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자신을 불신하도록 만든다. 내면 가부장에 지배당한 개인은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인식한다. 특히 내면 가부장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남성은 남성과 관련된 특성을 여성의 특성보다 더 우위에 둔다. 여기서부터 여성 차별과 남성 중심주의가 형성되면서 가부장제 문화가 활성화된다. 활성 문화가 된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할수록 그 속에서 숨 쉬면서 자란 개인은 가부장제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이 책은 내면 가부장뿐만 아니라 내면 가모장도 다룬다. 내면 가모장은 내면 가부장과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내면 가부장이 권력과 규칙을 좋아한다면, 내면 가모장은 감정, 사랑, 양육을 중시하며 관계 지향적인 가치를 선호한다. 그러나 내면 가모장이 ‘그림자 왕’이 되면 남성 그 자체를 싫어하고, 자신의 성별(gender)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는 몇몇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지만, 저자는 ‘그림자 왕’이 된 내면 가모장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여성 우월주의를 넌지시 경계한다.

 

이 책을 보지도 않고, 가부장제를 빌미로 남성을 공격하는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내담자(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이 들려준 경험담을 통해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의 장단점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고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파트너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자신의 그림자(왕)를 직접 만나면서 들여다보는 일은 불편하고 낯선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초조함, 분노, 우울로 인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의 존재를 거부하면 그것은 ‘내 안의 적’이 된다. 그림자 왕은 타인에게 자신의 특징을 그대로 투사함으로써 차별과 갈등을 유발한다.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나고, 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단순히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좀 더 생생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지속적인 성찰의 과정이다. 알면 달라진다.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타인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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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를 읽으니 ‘제도로 형상화된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9-06-06 14:06   좋아요 1 | URL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제도로 형상화되면, 또 다른 사회구성원들은 사회제도(관습, 규범)에 스며든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서 문화가 생기고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자유인으로 살다 갔다. 실제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그는 자유의 극한 영역을 추구하고 탐문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

 

 

 

그의 자유로움은 종교적 통념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파문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그리스 본토에 안식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크레타 섬에 있는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물론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은 카잔차키스만의 전유물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자유보다는 억압이, 평화보다는 전쟁이나 폭력적 상황이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폭력적인 사회다. 특히 동성애자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그/그녀들에게 사회란 폭력이 일상화된 두려움의 대상이다. 퀴어 문화축제는 일 년에 단 하루 성소수자들이 언어와 몸짓, 음악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자유와 해방의 장이다. 그런데 동성애를 ‘문란한 성 문화의 일종’으로 보는 비 성소수자(non-sexual minority)들은 퀴어 축제 소식이 수면 위에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이런 말을 한다. 성소수자를 보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성소수자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성소수자가 퀴어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않을 권리도 있고, 이 또한 자유다.”

 

 

이렇게 말하는 비 성소수자는 ‘자유’, ‘권리’라는 단어를 억지로 끌어들여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 즉 섹슈얼리티(sexuality)는 정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성 정체성(gender identity) 또한 섹슈얼리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정체성은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라고 호명되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만드는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은 존재 이유를 찾는 행위이자 작업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하거나 사회로부터 박탈된 존재는 온전한 ‘나’, 더 나아가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와 정체성은 철저히 분리될 수 없다. 성소수자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산다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존재하고 있다. 이 세상의 누구에게든 사람의 ‘존재’를 반대하고 차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권리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가?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는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 아민 말루프 《사람 잡는 정체성》 (이론과실천, 2006)

 

 

 

개인의 정체성은 종교, 인종, 민족뿐 아니라 언어, 생활방식, 신념 등이 어우러져 형성된다. 따라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사회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한쪽의 정체성(사회나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체성)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거나 강제로 편입시킨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의 호소와 고통을 느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편’이라는 관점 그리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호명하게 만드는 단일한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콩쿠르상 수상 작가 아민 말루프(Amin Maalouf)는 다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을 ‘사람 잡는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랍인 출신이지만 기독교인이다. 모국어는 아랍어이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작가는 자신을 어느 쪽에 더 가깝냐고 묻는 ‘집요한 질문’에 오랫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종교, 민족, 인종이라는 틀에 갇힌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저지르고 있는 많은 갈등과 비극을 분석한다.

 

상대방의 정체성을 거부하거나 박탈하는 것을 자유와 권리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태도는 ‘고상하게 포장한 권위주의’다. 비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를 바라볼 때 과도한 의미를 부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려왔을 지를 헤아려야 한다. 이번 달 29일 토요일, 대구에서 열한 번째 퀴어 축제가 진행된다. 매년 퀴어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축제를 막기 위해 거리를 행진한다. 퀴어 축제에 참여하는 성소수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축제의 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 모두 ‘자유’가 된다. 단 하루만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하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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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5 15:17   좋아요 1 | URL
토니 쿠시너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봐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어요. 검색 결과를 확인하다가 쿠시너의 <미국의 천사들>의 퀴어링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견했어요.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 - 우리의 인생과 음악심리학 이야기
빅토리아 윌리엄슨 지음, 노승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늘 음악을 듣는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나 바쁜 일상의 자투리 시간이 주어질 때, 혹은 슬프고 지칠 때나 기쁘고 신이 날 때 말이다. 우리의 일상을 꾸며주는,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수난의 시기를 지내온 우리 민족은 대대로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하기를 무척 즐겼다. 노래하며 위로받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밭에 김을 매면서, 논에 모내기하면서 노동요를 불렀다. 특별한 악기가 없어도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 흥을 돋을 줄 알았다.

 

노랫가락의 흥을 즐기던 우리의 일상문화를 반영하듯 노래방에 자주 가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노래방은 친구들을 만날 때나 직장 회식 이후에 ‘제2차’로 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기며 ‘우리’라는 공동체를 다시금 확인하기도 한다. 요즘같이 혼자 노는 게 익숙해진 시대에 혼자서 노래방을 즐길 수 있는 ‘코인 노래방’도 있다. 이렇듯 노래방은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곳이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놀이 공간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쓴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문명은 놀이 속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문화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아낸 그는 삶의 의미와 행복 역시 놀이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호모 루덴스는 달리 말하면 ‘예술을 즐기는 인간’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 속에서 자라왔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음악이라는 ‘놀이’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라온 호모 루덴스에 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음악과 우리 삶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예리하게 고찰한 음악심리학 책이다.

 

저자는 태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의 힘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책에 음악의 영향력을 증명해주는 최신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 평소에 음악을 즐기는 저자는 이 책에서 음악의 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표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음악이 그처럼 우리 일상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자 나는 내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중략] 내게 필요한 것은 음악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는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었다.

 

(프롤로그, 6~7쪽)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는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들도, 음악을 어떻게 무엇부터 들어야 할지 막막하던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는 책이다. 독자는 우리가 살면서 음악을 꼭 들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인간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음악을 만난다. 태아는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세상의 소리를 접하는데, 이때가 바로 인간이 처음으로 음악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궁 속으로 전달되는 다양한 소리에 자주 노출된 아기는 박자와 음높이를 감지하고 구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청소년기는 음악과 정체성이 서로 일치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들은 기분 좋게 만드는 노래를 찾게 되고, 이 시기에 접했던 노래를 ‘최애 노래(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돼서도 청소년기에 즐겨 듣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최애 노래’는 지나간 시간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가수의 음악을 한 번 듣고 나면 그 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참 속상하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좌절할 필요 없다. 우리는 음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요즘은 가사 몇 마디만 검색창에 입력하면 그 가사가 나오는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생소한 멜로디의 음악이라도 자주 들으면 멜로디 일부가 고막에 콕 박혀 귓가에 맴돈다(이게 오래 지속되면 귀벌레 현상이 생긴다). 저자는 음악에 노출되는 과정을 ‘집짓기’에 비유한다.

 

 

 음악을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출이 필요하지만, 일단 기억하기만 하면 잘 지어진 집처럼 튼튼하고 오래 지속된다. 실제로 집을 짓는 것과 달리 청취자한테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다. 마음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당신은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7장 기억 속의 음악, 241쪽)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호모 루덴스’ 정신의 복원이다. 삶의 놀이인 음악은 가수, 작곡가, 연주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로서의 음악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기에 직업과 연관 지을 일이 아니다. ‘영원한 가객’ 김광석은 “가수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인생이 풀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대로라면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를 즐기는 우리도 노래대로 인생이 풀리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음악이 관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흐르는 음악은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서평을 다 쓰고 나니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고 노래하던 김광석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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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3 17:09   좋아요 0 | URL
세상 정말 좋아졌어요. 절판된 앨범에 들어있는 곡을 들으려면 그 앨범을 직접 구해야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