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올리나요? 저는 유대인 하면 탈무드(Talmud)홀로코스트(Holocaust)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살았던 안네 프랑크(Anne Frank)도 있네요. 우리는 영화나 역사책을 통해 과거 유대인이 겪은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치는 게르만인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원래 ‘전쟁으로 인해 일어난 대참사’를 뜻하는 단어였어요. 그러다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 [절판] 노먼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한겨레출판, 2004)

 

* [품절] 노먼 핀켈슈타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 시오니즘 지식 권력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돌베개, 2004)

 

* [절판] 미하엘 브레너 《다윗의 방패: 시온주의의 역사》 (들녘, 2005)

 

 

 

그런데 이 ‘홀로코스트’라는 고유명사를 내세우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은폐하는 유대인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주의(Judaism)라고도 일컫는 시온주의(Zionism)를 신봉합니다. 시온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은 중동 지역을 지배했던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존하면서 그들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대다수 유대인은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온주의를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옹호하거나 폭력적인 점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나치가 부활한 듯한 이스라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비판했다가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망각한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거든요. 서구의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입니다.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려는 이스라엘의 군사 정책 정책을 정당화하는 ‘진리’로 행세하는 시온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위태로운 삶》에 수록된 『반유대주의라는 비난: 유대인, 이스라엘, 그리고 공적인 비평의 위험부담』이스라엘과 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공적 비판을 뭉뚱그려 반유대주의라고 오명을 덮어씌우는 발언의 문제점을 검토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버틀러의 글과 페미니즘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버틀러는 핍박의 세월을 오랫동안 견뎌온 피해자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쉴 새 없이 강조하는 시온주의를 비판합니다.

 

 

 유대인이 언제나 희생자로만 여겨지는 존재일 수는 없다. 그럴 때도 분명 있지만, 어떤 때는 분명 그렇지 않다. 어떤 정치적 윤리도 유대인이 희생자의 지위를 독점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희생자”는 재빨리 바뀔 수 있고 순간순간 바뀌어서, 버스에 탄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일 수 있고 이스라엘의 총격에 무참히 살해된 팔레스타인 어린이일 수도 있다.  (151~152쪽)

 

 

미국 내에 활동하는 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은 실제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불이익을 거의 당하지 않았는데도 미국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희생자’로 꾸몄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봤을 때 작년에 읽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이 생각났어요.

 

 

 

 

 

 

 

 

 

 

 

 

 

 

 

 

 

* [레드스타킹 여섯 번째 책] 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이 책에서 정희진은 ‘피해자’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타자와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제안합니다. 피해자 정체성이라는 ‘땔감’을 구하면서 가해 세력을 처벌하는 여성주의와 시온주의는 각각 여성과 유대인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여성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이며 피해자 편을 들라는 뜻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의 지위를 독점하면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온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복잡 미묘한 유대인 문제를 예리하게 들여다본 버틀러의 통찰이 용기 있게 느껴졌습니다.

 

 

 

 

 

 

 

 

 

 

 

 

 

 

 

*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 콜린 데이비스 《처음 읽는 레비나스》 (동녘, 2014)

*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6)

 

 

 

책의 마지막 글인 『위태로운 삶』에서 버틀러는 독일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을 바탕으로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에 대한 공적 애도가 무시되는 문제를 분석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낯선 타자를 만나면 공포와 불안을 느낍니다. 이 불안한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력을 앞세워 타자를 공격합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투쟁하기 위해서 타자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 글을 읽기 전에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위태로운 삶』이 제일 어렵게 느껴졌어요. 이번에 제가 쓴 후기가 내용면에서 빈약하기 때문에 제 후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위태로운 삶』을 알기 쉽게 설명한 《주디스 버틀러 읽기》[주]를 권합니다.

 

‘《위태로운 삶》 읽기’ 마지막 모임에 온 5명의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위태로운 삶』의 내용과 상관없이 각자 나름대로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을 자유롭게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독(共讀)을 마무리한 뒤에 다음 달부터 시작하게 될 ‘페미 스쿨’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도 이 논의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레드스타킹이 열심히 준비한 페미 스쿨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주] 이 책에 ‘옥에 티’가 있는데요, 저자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제시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호모 사커’라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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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6-1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인들의 행위를 보면 홀로코스트니 반 유대주의하고 이스라엘인들이 외쳐도 그닥 공감이 가질 않더군요.

cyrus 2019-06-20 16: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세력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독일을 포함한 몇몇 유럽 국가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를 법률로 금지하고 있어요.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2019년 청년 인문 상상 프로젝트 지원’ 사업에 ‘레드스타킹’이 선정되었습니다. ‘청년 인문 상상 프로젝트’는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운영하는 인문 단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레드스타킹은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레드스타킹은 대구에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목표로 ‘엄청난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레드스타킹이 ‘페미니즘 스쿨(페미 스쿨)을 개설했습니다. 페미 스쿨은 대학원 수준의 페미니즘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든 대안적 학습 공간입니다.

 

 

 

모집 인원은 ‘입금 완료’를 기준으로 선착순 6명입니다. 수강료는 7만 원입니다.

 

수강 신청은 여기 링크에 하면 됩니다.

https://bit.ly/2ILBCyw

 

 

 

참여 조건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페미 스쿨에 참여하게 되면 2주에 한 번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작성하여 네이버 카페(개설 예정)에 등록합니다. 그리고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졸업 에세이’를 발표합니다.

 

 

페미 스쿨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간: 2019년 7월 1일 월요일 ~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총 15주)

 

* 교육 일정: 강의 6회 + 글쓰기 피드백 1회 + 세미나 6회 + 워크숍 1회 + 졸업 에세이 발표 1회 (총 15회)

 

* 일정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강의 시간(빨간색 글씨)에는 강사와 함께하며, 나머지 시간은 수강생들끼리 진행됩니다.

 

* 총 15주의 교육 일정 중 10주 이상 참석(70% 이상)하고, 졸업 에세이 1편을 작성해야 수료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교육 장소는 ‘카페 스몰토크’입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해서 10시(그날 교육 진행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종료 시각이 짧아질 수 있고 길어질 수 있습니다)까지 진행됩니다.

 

 

 

 

 

 

 

 

 

 

 

 

 

 

 

 

 

* [품절] 전혜은 《섹스화된 몸: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주디스 버틀러의 육체적 페미니즘》 (새물결, 2010)

 

* [페미 스쿨 교재] 전혜은, 루인, 도균(비사이드 콜렉티브)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 강사는 전혜은 선생님입니다. 전혜은 선생님은 퀴어 이론과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을 공부하는 연구가입니다. 저서로는 《섹스화된 몸: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주디스 버틀러의 육체적 페미니즘》이 있고, 현재 ‘아픈 사람’과 퀴어, 장애와 행위성에 관한 주제로 글을 쓰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의 집필진으로 참여하여 책의 서문,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 『‘아픈 사람’ 정체성』을 썼습니다.

 

 

 

 

 

 

 

 

 

 

 

 

 

 

 

 

 

 

 

 

* [페미 스쿨 교재]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 [페미 스쿨 교재]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문학과지성사, 2015)

* [페미 스쿨 교재] 주디스 버틀러,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자음과모음, 2016)

 

 

 

 

* 전혜은 선생님과 함께 4개월 동안 ‘교차성 페미니즘’,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주디스 버틀러’라는 이 세 가지 주제로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집니다. 수업 관련 교재는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 전혜은 선생님이 공저로 참여한 《퀴어 페미니즘, 교차성을 사유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허물기》《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총 4권입니다.

 

 

대구에서, 그것도 여성학과 대학원 밖에서 고급 수준의 페미니즘 이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이번에 레드스타킹이 야심차게 준비한 페미 스쿨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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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6-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좋은 기회다. 수강료도 싸고.
경쟁를이 좀 있겠는데? 너도 수강하지?ㅋ

<섹스화된 몸>은 나도 읽어보고 싶다.
근데 왜 벌써 품절이래.ㅠ
그도 그렇지만 상품화된 몸도 문제 아니겠니? 같은 맥락일 것 같은데?

cyrus 2019-06-19 12:5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페미 스쿨 학생이에요. <섹스화된 몸>을 도서관에 가서 읽어보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서고에 보관되어 있어요. 사서한테 직접 이 책을 달라고 얘기해야 되는데 말을 할 수가 없네요... (부끄부끄) ^^;;

stella.K 2019-06-19 14:07   좋아요 0 | URL
그때는 마스크하고 썬글라스 끼고
사서한테 조용히 책 제목을 적은 쪽지를 내밀면 되지.ㅎㅎㅎ

cyrus 2019-06-20 16:51   좋아요 0 | URL
그러면 사서가 이상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겠는데요.. ㅎㅎㅎㅎ

2019-12-21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2-23 22:02   좋아요 0 | URL
멤버들이 하자고 하면 해야죠. ^^
 
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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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가 1933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작가가 된 블레어는 이때부터 필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줄여서 ‘파리와 런던’)은 오웰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한 작가로서의 오웰을 이해하려면 《파리와 런던》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조지 오웰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혼란스러운 세계(스페인 내란과 제2차 세계대전이 연이어 일어나고 전체주의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 한가운데에 우뚝 솟으면서 자란 ‘나무’라고 한다면 이 나무의 ‘씨앗’은 블레어의 모습을 간직한 《파리와 런던》이다. 《동물농장》과 《1984》는 당도(문학적 성숙도)가 높은 ‘열매’라 할 수 있다. 책벌레들은 ‘오웰 나무’에 열린 두 개의 ‘열매’를 너무 많이 먹었다. 같은 열매만 계속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오웰에 관심 많은 책벌레는 훌륭한 ‘열매’와 ‘나무’를 있게 해준 ‘씨앗’에 주목해야 한다.

 

1922년에 블레어는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나 5년 뒤에 그는 고국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회의를 느껴 경찰 일을 그만두었다. 블레어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개고생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에서 생활했고, 너무나 가난해서 며칠 내내 쫄쫄 굶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봤다.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부터 시작해서 파리 호텔 안에서 가장 천한 일로 여기는 접시 닦는 일까지 했다. 파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블레어는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그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블레어는 스파이크(부랑자 보호소를 뜻하는 속어)를 전전하는 부랑자 신세였다. 《파리와 런던》은 파리와 런던에서 가난하게 생활했던 블레어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파리와 런던》이 수록된 문학동네 출판사의 번역본에서는 이 작품을 ‘자전소설’로 소개되어 있는데, 사실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nonfiction)으로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왜 《파리와 런던》에 주목해야 할까. 오웰의 첫 번째 작품이라서?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를 언급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리와 런던》은 블레어가 ‘오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문학의 거목으로 자랄 수 있게 만든 ‘씨앗’이다. 이 작품은 파리의 빈민가 풍경과 런던의 스파이크 내부 모습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 놓는다. 오웰은 그곳에 사는 다양한 하층민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그들의 일상생활과 생각을 관찰하듯이 꼼꼼히 들여다본다.

 

소설의 원제에 들어있는 ‘Down and Out’이라는 표현은 ‘빈털터리’, ‘노숙자 신세’를 뜻한다. 역자는 ‘Down and out’을 ‘따라지 인생’이라고 의역했는데, 이 표현은 작품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압축돼 있다. ‘따라지 인생’은 남에게 매여 보람 없이 사는 하찮은 인생을 뜻한다. 말 그대로 ‘노예’처럼 사는 인생이다. 오웰은 호텔의 접시닦이가 현대 사회의 노예라고 말한다(275~276쪽). 그들은 하루에 열 시간 또는 열다섯 시간씩 접시를 닦는다. 호텔에 일하는 요리사와 웨이터들은 접시닦이를 반말로 하대하며 온갖 잡일을 그들에게 시킨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고 매일 부당한 처우를 받는데도 접시닦이는 노조를 만든다거나 파업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웰은 ‘따라지 인생’으로 살아가는 저임금 노동자, 걸인, 부랑자에 향한 대중의 편견(‘게으르다’, ‘사회에 무익한 기생충 같은 존재’)을 비판하면서 그들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이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파리와 런던》의 화자는 ‘블레어’지만, 그의 말과 시선은 우리가 아는 그 ‘오웰’과 비슷하다. ‘오웰’이 되려고 하는 블레어는 《파리와 런던》을 통해서 빈부 격차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솔직하고도 비판적 견해를 밝힌다. 투철한 비판 정신에 입각한 오웰의 글쓰기는 《파리와 런던》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Trivia

 

 

* It was a very narrow street—a ravine of tall, leprous houses, lurching towards one another in queer attitudes, as though they had all been frozen in the act of collapse.

 

아주 비좁은 거리였다. 문둥병에 걸린 것 같은 높다란 집들이 마치 와그르르 무너지다가 바싹 얼어붙은 듯 서로에게 비스듬히 묘하게 기울어져 협곡을 이루었다. (128쪽)

 

 

 

→ 문둥병은 한센병(나병) 환자를 멸시하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는 구시대적인 표현이다.

 

 

* 프랑스의 전당포는 처음이었다. 웅장한 석조 정문(물론 ‘자유’ ‘평등’ ‘박애’라고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는 경찰서 건물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으로 들어가자 학교 교실같이 넓고 텅 빈 방이 나왔다. (151쪽)

 

 

→ 프랑스 국기에 들어있는 적색을 상징하는 ‘Fraternite’를 우리나라에선 흔히 ‘박애’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Fraternite’는 ‘형제애’를 뜻하므로 ‘우애’로 번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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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8 16:19   좋아요 0 | URL
오웰은 몸으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글을 쓰는 작가예요. 오웰은 소설가로 유명한데, 사실 그의 진가는 에세이에 있어요. 에세이를 읽으면 맨몸으로 세상에 부딪혀보고, 고민했던 오웰의 사유를 엿볼 수 있어요. ^^

방랑 2019-06-18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농장 재밌었는데 저는 오웰 작품은 아니지만 멋진 신세계가 더 충격적이었어요.
아. 사이러스님, 책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
과학 관련한 책을 읽고 싶은데
과학 잡지도 좋구요
(과학 지식은 거의 없는 편이에요..)

cyrus 2019-06-18 16:23   좋아요 0 | URL
저도 문과 출신이라 과학 지식이 부족해요. 중급 이상의 과학 책보다는 초급 과학 책 위주로 읽었기 때문에 제가 방랑님에게 과학 책을 추천할만한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

제가 읽은 책 위주로 보자면, 초급 수준의 과학 잡지로는 ‘뉴턴 하이라이트’가 좋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뉴턴 하이라이트 시리즈들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과학 지식들을 소개하고 있고요, 이 책에 그림이 많아서 좋아요.

방랑 2019-06-18 19:13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추천해주신 책 읽어봐야겠어요. 비 오네요
벌써 장마인가 싶기도 하고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레삭매냐 2019-06-1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따라지 인생을 어디에 쟁여 두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네요.

오웰의 책 읽기는 언제나 즐거움입니다.

cyrus 2019-06-18 16:35   좋아요 0 | URL
오웰이 좌파를 까는 글을 읽으면 속 시원해요. 오웰 본인도 좌파인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동조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좌파를 비판해요. ^^
 
작가의 어머니
데일 살왁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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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통’이다. 출산 중 진통은 고통스러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오죽하면 작가들도 자신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을 아이 낳는 고통에 견주겠는가. 산모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진통은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아기가 질 밖으로 쑥 빠져나오면 그 길었던 통증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단한 성취감과 감동을 안겨준다. 산고 끝에 아기를 안은 어머니들은 대개가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작가들은 산고를 거쳐 탄생한 작품에 애착을 느낀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계속 던짐으로써 제자들 스스로 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불렀다. 그가 진리의 탄생을 도왔기 때문이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답을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산파술의 핵심이다. 작가가 창작의 산고를 치르는 ‘산모’라면, 작가의 어머니는 산모의 출산(작품의 탄생)을 돕는 ‘산파’라 할 수 있다.

 

작가와 작가 어머니의 관계를 산파술에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와 창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는지, 어머니의 존재감은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서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까지 여덟 명의 영미 소설가 및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전기(biography)이다.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메리 아든(Mary Arden)은 남편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기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활기찬 사람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여덟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사실은 그가 부부 관계에서 여성의 우위를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극의 전개를 쥐락펴락하는 가모장(家母長)으로 그려진다. ‘애바(Abba)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애바는 루이자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애바는 루이자가 글을 쓸 때마다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루이자는 자신이 쓴 글을 애바에게 보여주었고, 애바는 루이자의 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루이자는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을 편지 한 통과 함께 어머니에게 보냈다.

 

 

 엄마의 크리스마스 양말에 나의 ‘첫 아이’를 넣어두었어요. 아무리 결점 투성이라도 엄마가 받아주실 걸 알아요. (할머니는 늘 자상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하게 해낸 일로 봐 주실 것도요. …‥ 이 책이 엄마를 기쁘게 해준다면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할 거예요.

 

(「야심만만한 딸: 루이자 메이 올컷와 어머니」 중에서, 55쪽)

 

 

애바는 루이자에게 글쓰기를 독려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모녀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루이자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물론 모든 작가의 어머니가 글 쓰는 자녀를 늘 자상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녀의 글쓰기를 매정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어머니는 아들이 극작가가 아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길 원했다.

 

2부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한 명의 작가들이 자서전 형식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쓴 글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영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언 매큐언(Ian McEwan)도 이 책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매큐언의 「어머니의 말: 회고록」은 작가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알 수 있는 글이므로 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글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으로,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은 여성을 의미한다. 이 뮤즈를 거론할 때 대부분은 ‘남성’ 작가의 아내이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은 늘 남성 작가를 보조하는 뮤즈로 호명되곤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예술사와 문학사 속에서 구축되어온 정형화된 뮤즈 이미지의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성애 관계로 맺어진 남성 작가와 여성 뮤즈’ 이미지는 어린 시절 작가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보고, 자녀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보살펴준 어머니의 존재감을 가린다.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신이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자기 대신에 어머니를 같이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한 편의 글은 작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그녀의 말과 일정 수준의 문학적 능력을 물려받으면서 자란 작가들도 있다. 위대한 작가의 곁에는 문학을 좋아한 신과 같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창작에 몰두하는 자녀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촉진자’ 역할에 충실한 산파가 될 수 있다. 어머니가 촉진자 역할에 충실하려면 ‘갑’의 위치에 서지 않아야 한다. 구석구석 참견해서는 안 된다. 너무 지나친 애정도, 너무 애정을 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극단은 양자 모두에게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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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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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6: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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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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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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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서재를 탐하다’가 2019년 6월 21일로 문을 닫는다. 책방은 3년 동안 머물렀던 동네(대구 북구 침산동)를 떠나게 된다. 책방뿐만 아니라 책방의 이웃인 옷 수선 가게와 떡 가게도 떠난다. 책방과 소규모 가게들이 사라진 자리에 40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선다. ‘서재를 탐하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시 태어날 뿐이다. 빠르면 다음 달에 원대동에서 ‘서재를 탐하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다.

 

동네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생로병사의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동네에서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가 일어난다. 오래된 건물들이 철거돼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발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재개발로 한층 젊어진 동네의 부동산 가치는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야 한다.

 

책방은 도시의 오아시스다. 책방은 너무나 빠른 도시의 속도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휴식처다. 그러나 자주 가던 책방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잠시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찾으면 셔터가 내려 있거나, 다른 간판이 걸려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오래된 책방(헌책방)은 동네 책방보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킨 책방도 ‘책의 맛’을 아는 독자들이 주로 찾는 노포(老鋪). 노포가 사라지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이 잊히는 것처럼 오래된 책방이 사라지면 그곳에 있는 책들도 사라진다.

 

 

 

 

 

 

 

 

 

 

 

 

 

 

 

 

 

 

* 오 헨리 《마지막 잎새》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내게 오래된 책방은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마지막 잎새’와 같다. 담쟁이덩굴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생각하는 소녀는 마지막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늙은 화가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마지막 잎새를 벽에다 그려놓고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잎새’와 같은 오래된 책방이 사라지면 그 속에 있는 책들의 생명도 끝이 난다. 책의 일부는 다른 책방으로 이동하게 되지만, 팔지도 못하는 책들은 폐휴지로 전락한다. 오래된 책방이 살아남으려면 책방을 운영하는 젊은 주인이 있어야 하고, 책방을 찾는 손님들이 조금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마지막 잎새’를 지켜줄 (젊은) 애서가와 독자들이 많지 않다.

 

 

 

 

 

 

 

 

 

 

 

 

 

 

 

 

 

 

* 야마시타 겐지 《서점의 일생》 (유유, 2019)

 

 

 

‘가케쇼보(벼랑 책방)’라는 이름의 책방을 11년 동안 운영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호호호좌(웃음소리가 있는 곳)’라는 새 간판을 단 야마시타 겐지《서점의 일생》에 보면 이미 책방 폐점을 경험한 일본인의 글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야마시타 겐지는 ‘가케쇼보’ 책방을 문 닫을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방을 운영한 적이 있는 하야카와 요시오라는 가수를 직접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하야카와는 책방을 그만두니까 “편안해졌다”라고 말한다. 하야카와도 책방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제목은 「폐점한 날」이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책에 「폐점한 날」의 일부를 인용한다.

 

 

 폐점한 나는 울고만 있었다. 눈물이 끝없이 나왔다. 책장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님과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폐점을 알고 매일 오는 손님이 있다. 이제 우리 가게는 그 사람이 살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무엇인가 찾아 간다. [중략] 이와나미 문고가 반품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것만 사 가는 손님도 여럿 있었다. 전별금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친한 사람도 아니었다. 가게 앞에 멈춰 서서 들어오자마자 “너무 서운해요”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예순 살 정도의 사람이다. 다른 손님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뜻밖이었다. 흔히 말하는 단골이나 친한 손님(물론 안타까워해 줬지만)보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쉬워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중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감동이 책방에는 매일매일 있었던 거다. 감동은 예술의 세계에만 있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생활에도 비슷하게 있는 거다. 나는 그것을 폐점 일에 손님에게 배웠다.

 

(《서점의 일생》 중에서, 256쪽)

 

 

책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단골손님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저만치 떨어져서 책방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들도 책방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아도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책방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책방에 자주 오지만, 책을 사지 않는 손님을 삐딱하게 바라봐선 안 되고 쫓아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책방의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책방에 가득한 사람들의 따스한 온정을 느끼고 싶어서 그곳에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책방의 친숙함과 편안한 분위기를 외면할 사람은 없다. 그들은 새로운 것의 가치 못지않게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잘 안다. ‘오래’라는 수식어가 붙여지면 민망할 수도 있지만, 빨리빨리 변하는 현재 도시의 속도를 생각하면 책방이 3년 이상 유지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도시의 속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책방이 많아졌으면 한다. 책에 대한 애정에 상관없이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고, 사람의 온정이 느껴지는 도시의 오아시스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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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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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6-17 16:59   좋아요 0 | URL
원대동이 행정구역상 서구에 속한 곳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 비산 1동에 살았는데요, 비산지하도를 건너면 원대동이에요. 책방을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새삼 책방지기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레삭매냐 2019-06-1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
책방은 과연 어떻게 생존하게 될 지
궁금하네요.

저부터도 동네책방에서 책을 사본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네요.

사라지는 노포... 아쉽네요.

서점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
선다는 소식이 서글프네요.

cyrus 2019-06-17 17:02   좋아요 0 | URL
동네에 만화책 대여점을 찾는 것도 어려워졌어요. 제가 군대를 갔다 오고 나니까 집 근처에 있는 만화책 대여점이 폐점되었어요.

stella.K 2019-06-1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옮겨서라도 계속 한다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너의 마지막 말대로 되기는 왠지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사람들은 술 한 잔 꺾으러 가지 책 읽으러 가지는 않거든.
옛날 방식 가지고는 안 될 거야.
주인이 인품이 좋던가 술이나 차와 같이 팔던가 뭐 그런 다양한 형태로
가야겠지. 이미 그런 영업 방식을 구가하는 책방도 있는 것 같고.
암튼 참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ㅠ

근데 저 그림은 누가 너...?

cyrus 2019-06-18 16:42   좋아요 0 | URL
책방 그림은 서재를 탐하다 책장지기님이 직접 그린 거예요. ^^

요즘 책방들은 책도 팔고, 취미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책방 입장에서는 운영비를 최대한 줄이면서 책방에 사람들을 모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할 거예요. 정말 책만 파는 책방은 오래 가지 못해요.. ㅠㅠ

맑은 생각 2019-06-22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 마음의 위로와 삶에 생기가 있어서 각박함이 없을것입니다.

cyrus 2019-07-08 17: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 같은 경우 책을 읽으면 지루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며칠 동안 책을 안 읽으면 무언가 허전한 마음이 들어요.

뒷북소녀 2019-07-0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전하면 저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온라인에서 보기만 하고, 한번도 가보지 못했네요.

cyrus 2019-07-08 17:53   좋아요 0 | URL
뒷북소녀님은 대구에 사시는가 보군요. 지금쯤이면 책방 이전이 거의 다 완료되었을 거예요. 이번 달 독서모임 장소가 새로운 곳에 정착한 책방에서 하거든요. 조만간 새로운 책방이 문 열게 되는 소식이 책방 인스타를 통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시간 나면 꼭 가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