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찍힌 몸 -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
염운옥 지음 / 돌베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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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를 차별하는 것을 인종주의라고 한다면, 문화 · 종교 등을 이유로 삼아 타자를 차별하는 것은 변형된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역사적 뿌리가 깊은 현안이다. 낙인찍힌 몸인간의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에서 시작된 인종주의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 우생학 운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우생학은 열등한 인종의 몸을 분리해내고 낙인찍는 학문이다. 우생학 열풍은 영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우생학은 제국주의 바람을 타고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흑인을 배제하는 인종주의는 지금도 백인들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히틀러(Hitler)와 나치 독일(Nazi-Deutschland)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은 난데없이 툭 튀어나온 사건이 아니다. 유대인 학살은 유럽의 오랜 반유대주의 전통에 기반을 둔 우생학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다. 뾰족한 코를 가진 유대인은 열등 인종의 전형으로 정의되었고, 아리안인(Aryan)의 뛰어난 내적 자질은 출중한 외모를 통해 증명된다는 학설이 전파됐다.

 

과학적인 이론으로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생학은 타자의 몸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 인종 차별과 다른 민족에 대한 침략 및 지배를 정당화해왔다. 인종주의는 외모, 피부색, 골격 등의 생물학적 속성을 기준으로 타자에게 우열을 매긴다. 저자는 인종주의를 인종적 타자의 몸을 먹고 자란 히드라(Hydra)로 비유한다. 히드라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물뱀이다. 히드라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는데, 이 목을 잘라내면 베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목이 생긴다. 히드라 같은 인종주의는 여전히 강력하다.

 

인종(raza)이라는 단어는 원래 동물의 품종을 뜻하는 스페인어다. 이 단어는 유럽으로 확산하면서 우리가 익숙한 인종(race)이 만들어졌다. 분류학이 발전하면서 동물의 품종을 의미하던 인종(raza)은 인간을 분류하는 개념(race)으로 자리 잡았다. 스위스의 박물학자 린네(Linne)는 동물과 식물의 범주를 나누고 속과 종을 분류하면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이명법을 도입했다. 그는 인류의 피부색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린네의 분류법에 따르면 유럽인은 백색, 아메리카인은 홍색, 아시아인은 갈색, 아프리카인은 흑색이다. 린네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종을 공식적으로 정의한 학자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떠받들던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Winckelmann)은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삼았다. 저자는 린네의 분류학과 빙켈만의 미학을 인종주의 발전의 시작점으로 본다.

 

낙인찍힌 몸은 인종주의의 역사는 서양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흑인과 유대인, 무슬림 차별 담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은 서양의 인종주의 문제만을 분석하지 않는다. 저자는 히드라 같은 인종주의가 신인종주의(new racism)또는 문화적 인종주의(cultural racism)라는 이름으로 계속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백인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생물학적 인종주의라면, 오늘날의 인종주의는 신인종주의다. 신인종주의는 타자의 정치적 성향, 종교, 문화에 우열을 매길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편견을 부여한다. 새로운 히드라의 머리는 다문화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 자라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인은 생물학적 인종주의가 주목하는 실험 대상이었다. 외국에 있는 한국인도 종종 인종 차별을 당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타자를 낙인찍고 배제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민, 외국인노동자, 난민, 무슬림들에 가해지는 인종 차별은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히드라의 머리다. 이제는 문화적 지표가 인종주의의 표적이 되고 있다. 생물학적 인종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 히드라의 머리를 자르면 그 자리에 신인종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머리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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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21 11:29   좋아요 0 | URL
저랑 같은 책을 읽는 분을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책에 제가 몰랐던 내용과 사례들이 많이 있어요. 책을 읽으면 생각거리가 많아질 거예요. ^^
 
나우 : 시간의 물리학 - 지금이란 무엇이고 시간은 왜 흐르는가
리처드 뮬러 지음, 장종훈.강형구 옮김, 이해심 감수 / 바다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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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지금 뭐 하고 있어? 한가하면 술 한잔하자. ○○○ 앞에서 보자.” 나는 친구에게 답장 메시지를 바로 보낸다. “지금 내 방 청소하고 있어. 청소 끝내고 갈게.”

 

나와 친구는 평범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친구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잘 살펴보면 어색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친구에게 답장 문자를 보내는 중인데, 지금내 방을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을까? 지금말하는 바로 이 순간을 의미한다. 내가 방을 청소한 행위는 과거의 일이다. ‘지금의 본래 의미에 충실한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면 이렇게 써야 한다. “지금 너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쓰고 있어.”

 

우리는 말할 때 가끔 지금이라는 단어를 과거의 일을 포함해서 쓰는 경우가 있다.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알아듣고 넘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된다. ‘현재지금의 의미와 같다. 그러나 현재지금은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다. 현재 지금은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린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실험 물리학자 리처드 뮬러(Richard Muller)지금이라는 단어가 무척 단순하면서도 신비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옷깃을 살짝 스치듯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지금과거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을 정의하는 일은 시간의 흐름을 연구한 이론물리학자들도 어려워한다. 뮬러는 나우(Now): 시간의 물리학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지금과 시간의 흐름을 물리학적 관점으로 살펴보고, 수많은 물리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든 시간과 관련된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이라는 개념에 맞서고 있다. 시간의 화살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방향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갔다고 말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뜻하고 있기도 하다. 시간의 화살은 왜 미래로만 향할 수밖에 없는가.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예외 없이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엔트로피는 변해버린 물질을 다시 원 상태로 만들 수 없게 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전한 형태의 물질과 질서 체계가 각각 무 형태와 무질서 체계로 가게 된다는 뜻이다. 노화는 열역학 제2 법칙과 시간의 화살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의 소설에 나오는 벤저민 버튼(Benjamin Button)처럼 시간이 거꾸로 가는 삶을 살 수 없다. ‘시간의 화살을 처음으로 언급한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은 엔트로피가 시간을 앞으로 가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뮬러는 시간의 화살에 대한 에딩턴의 설명이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전적인 시간의 화살의 결점을 보완해줄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 대안은 양자물리학으로 시간의 화살을 설명하는 것, 두 번째 대안은 새로운 공간을 끊임없이 팽창하는 빅뱅(big bang)에 의해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빅뱅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우주론에서는 시간의 기원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우주의 미래와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뮬러는 두 가지 대안을 설명하면서 엔트로피 개념을 버리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두 가지 대안에 각각 양자 화살’, ‘우주론적 화살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과거의 물리학자들은 예측 가능한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을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뉴턴(Newton)의 고전물리학을 뒤엎은 아인슈타인(Einstein)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결정론적 세계와 시간관념을 무용하게 하는 불확정성 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불확정성 원리를 내세워서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화살에 매달리는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뮬러는 지금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양자역학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아마도 시간지금이다. ‘시간지금이라는 개념을 파악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여정이 남아 있다. 과학자도 그렇고,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도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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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익숙한 책을 만났어요! :)

- 2019.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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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8 19:28   좋아요 1 | URL
제목을 안 적었네요.. ㅎㅎㅎ
<네 멋대로 읽어라>입니다. 알라디너 stella.k님이 쓴 책이에요. :)

2019-09-18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9 11:52   좋아요 0 | URL
책이 진열대 중앙에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띌 거예요. ^^

2019-09-18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9 11:54   좋아요 1 | URL
네, 책을 보자마자 기쁜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아는 책’인데 이상하게도 ‘내가 쓴 책’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

얄라알라 2019-09-2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stella.K님의 책이라니, 모르고 휘릭 봤을 때랑...마음이 달라집니다. 다시 찾아 읽어야겟어요

cyrus 2019-09-21 11: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은 책이라서 그런지 보자마자 알아봤어요. 안 읽은 책이라면 대충 보고 지나쳤을 거예요.. ^^;;
 

 

 

살롱(salon)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첫 번째 의미는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곳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이다. 세 번째 의미는 활동 중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아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전시회다.

 

 

 

 

 

 

 

 

 

 

 

 

 

 

 

 

 

 

* 강준만 룸살롱 공화국(인물과사상사, 2011)

 

 

 

우리나라에 알려진 살롱의 의미는 앞에 언급한 것들과 다르다. 여종업원이 술 시중을 들어주는 유흥주점을 룸살롱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칸막이가 있는 방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폐부인 접대 문화를 분석한 강준만은 한국을 룸살롱 공화국’, ‘칸막이 공화국이라고 지적했다. 은밀한 접대는 칸막이를 해야 하고, 칸막이를 우아하게 만들어놓은 곳이 바로 룸살롱이다. 룸살롱의 전신은 요정(料亭)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통치한 미군정에 빌붙으려는 세력들은 요정에서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을 접대했다. 요정은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자들이 늘 드나들었고, 밀실 접대를 통해 권력의 한 축이 된 사람들은 룸살롱의 고객이 되었다.

 

 

 

 

 

 

 

 

 

 

 

 

 

 

 

 

* [절판] 하이덴-린쉬 유럽의 살롱들(민음사, 1999)

* 서정복 살롱 문화(살림, 2003)

* 메릴린 옐롬, 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 2016)

 

 

 

이제부터 진짜로 살롱에 대해서 살펴보자. 17~18세기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응접실에 모여 찻잔을 기울이며 과학과 문학, 예술과 정치 등을 논했다. 허영에 찬 상류층의 모임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살롱에서 이뤄진 방대한 정보와 지식의 교류는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살롱은 여성해방의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살롱의 여주인들은 재기와 언변을 바탕으로 유명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삶과 전설은 유럽의 살롱들(민음사)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지금은 몰락한 여성 문화의 황금기. 유럽의 살롱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살롱 문화의 특징과 각국의 살롱 문화를 대표하는 여성들의 주요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20세기까지 이어진 살롱은 정숙한 여성의 역할을 강요해온 가부장적 사회 규범을 타파하는 여성 해방의 자유로운 무대였다. 유럽의 살롱들은 절판되었는데, 이 책의 빈자리를 살롱 문화(살림)가 대신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역사 기록에 가려진 여성의 다양한 우정과 연대 방식을 주목한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도 여성의 살롱 문화를 비중 있게 언급한 책이다. 살롱 문화를 이끌어간 영국 여성들은 블루스타킹(bluestocking)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750년대는 영국의 살롱 문화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은 살롱의 여주인은 엘리자베스 몬터규(Elizabeth Montagu). 그녀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식물학자 벤저민 스틸링플릿(Benjamin Stillingfleet)는 블루스타킹을 착용했다. 그가 모임에 불참하게 되자 몬터규는 벤저민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 후로 몬터규의 살롱 회원들은 블루스타킹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블루스타킹을 신은 사람은 모임에 열심히 활동하는 똑똑한 사람을 상징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지적인 살롱 회원을 의미하는 별명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사람들은 살롱에 참석하는 여성들을 가리켜 블루스타킹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블루스타킹은 유식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됐고, 19세기 초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여성을 조롱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 한일근대여성문학회 옮김 세이토(어문학사, 2007)

* 정애영 히라쓰카 라이초(살림, 2019)

 

 

 

미국과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여성주의자들은 19119월에 <세이토(靑鞜, 청탑)>라는 여성문예 잡지를 창간했다. 세이토는 블루스타킹을 한자어로 바꾼 단어이다. 이 잡지 창간 및 편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천재적인 여성의 등장을 역설한 글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세이토> 창간호에 게재했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해 살아가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은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

 지금 세이토는 태어났다.

 현재 일본 여성의 두뇌와 손에 의해 세이토는 처음 태어났다.

 

 

(히라쓰카 라이초,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중에서, 세이토39)

 

 

 

 

여성은 태양이었다가부장제 사회 한가운데에 근대 일본 여성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다. 라이초는 이 글에서 대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빛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2018)

* [절판]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2009)

 

 

 

라이초와 <세이토>는 각각 일본의 신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과 매체로 되었고, 일본에 유학한 조선의 여성주의자들은 이 잡지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조선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여성해방 운동에 영향을 받은 여자 유학생들은 여자유학생친목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19176[]<여자계(女子界)>를 발간했다.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원 중에 그 유명한 나혜석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계>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혹은 학술지로 평가받는다. 나혜석은 이 잡지를 통해 여성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현실(결혼)과 여성해방의 이상 사이에 고뇌하는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나혜석은 자신의 글 이상적 부인에 라이초를 간접적으로 언급할 정도로 그녀를 신여성 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 [절판]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

 

 

 

그러나 라이초는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우생학을 옹호했으며 일본의 파시즘에 협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모습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한 조선의 신여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신여성의 태양라이초는 1930년대부터 신여성의 욱일(旭日)이 되기 시작했다. 종전 이후에 라이초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반전 운동을 했다고 해서 신여성 운동의 한계가 잊히는 건 아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에 수록된 신여성의 명암, 히라쓰카 라이초는 단순히 일본 신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이 아니라 그녀들에게 영향을 받은 조선 신여성 운동의 한계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이다.

 

몇 년 전부터 나혜석을 필두로 해서 신여성을 조명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신여성의 ()만 소개하는 데 그친다. 시대를 앞서간 선배라고 해서 너무 띄워주면 곤란하다. 태양 빛을 너무 많이 쬐면 암(癌)이 생긴다. 훌륭한 선배가 있다면 그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불량한 선배도 있기 마련이다. 불량한 선배들의 과거 행적은 여성 운동의 오점이자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밟고넘어야 한다. ‘신여성의 암(暗)은 그냥 건너뛸 수 없는 페미니즘의 문제이다.

 

 

 

 

[] 안타깝게도 <여자계>의 창간호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여자계> 원본은 2호와 6호 뿐이다. 그래서 <여자계> 창간호 발행연도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혜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의 저자 이상경<여자계>의 창간호 발행연도를 ‘19177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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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7
로사 멀홀랜드 / 올푸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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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전자책 출판사 올푸리의 출판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이 출판사는 빅토리아 호러 컬렉션(Victorian Horror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표된 단편 환상소설(공포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올해 올푸리 출판사가 펴낸 전자책은 총 6권이다. 6권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샬롯 리델 열린 문(20191)

* 아서 맥킨 오비의 빛(20194)

*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귀퉁이 그림자(20195)

* 브람 스토커 판사의 집(20197)

* 로사 멀홀랜드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20198)

* 허버트 조지 웰스 붉은 방(20198)

 

 

이 중에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작품은 4(열린 문, 오비의 빛, 귀퉁이 그림자,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이다. 지난달에는 두 편의 작품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그중에서 내가 읽은 작품은 헐리벌리 저택의 신들린 오르간 연주자(The Haunted Organist of Hurly Burly, 줄여서 오르간 연주자’).

 

로사 멀홀랜드(Rosa Mulholland)1841년 아일랜드의 명문가 출신 차녀로 태어나 1921년 더블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글을 써서 각종 문예지에 투고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디킨스의 독려를 받은 멀홀랜드는 작가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디킨스가 발행하는 문예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르간 연주자1891년에 발표되었다. 헐리벌리 마을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기이한 사연을 간직한 오르간이 있다. 그 오르간의 주인인 루이스 헐리(Lewis Hurly)는 고인이다. 오르간은 루이스의 늙은 부모가 관리하고 있다. 아니, 아들이 애지중지 아낀 오르간을 방에 고이 보관해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르간을 방치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적절하다. 왜냐하면 오르간은 루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의 악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리자(Lisa)라는 여성이 헐리 벌리 저택에 찾아온다. 그녀는 노부부에게 자신을 루이스의 약혼녀라고 밝힌다. 노부부는 루이스는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지만, 리자는 노부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리자는 자신과 약혼한 루이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루이스의 부탁을 받고 저택에 왔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한 루이스의 부탁저택에 있는 오르간을 쉬지 않고 온종일 연주하는 것이다. 노부부는 리자를 설득하기 위해 루이스의 약혼자였던 마거릿 캘더우드(Margret Calderwood)를 만나보라고 한다. 캘더우드는 망상에 빠진 리자를 위해 루이스의 과거를 들려준다. 루이스는 악마를 숭배하는 일에 빠져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 루이스와 그 일행은 자신들을 악마 클럽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고인을 모욕하는 일만 골라서 저지른다. 하루는 루이스 일행은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부린다. 루이스는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불경한 노래를 크게 부른다. 분노한 고인의 아버지는 루이스와 오르간을 저주한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루이스는 그 문제의 오르간을 헐리벌리 저택으로 가져왔고, 방문을 잠가 놓고 매일 오르간을 연주한다. 미친 듯이 오르간을 연주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본 마거릿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그가 오르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거릿은 리자에게 악마의 계략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리자는 루이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주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다. 오르간은 지속적으로 리자를 괴롭힌다.

 

오르간 연주자는 서양 단편 공포소설 선집에 수록될만한 가치 있는 작품이다. 왜 이 소설이 그동안 국내에 한 번도 번역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멀홀랜드는 아일랜드 민담을 소재로 한 소설과 강인한 여성상을 드러내는 소설을 주로 썼다고 한다. 공포 문학과 페미니즘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두 장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멀홀랜드의 소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평가받을 만한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Trivia

 

 

전자책은 816일에 발행되었고, 826일에 본문의 오자가 수정되면서 업데이트되었다. 그런데 업데이트가 되었는데도 안 고쳐진 오자가 있다.

 

 

 

 

 

18쪽에 마거릿 캐덜우드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시리즈 소개내용에 있는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발표 연도가 ‘1817으로 잘못 적혀 있다. 프랑켄슈타인1818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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