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파인더 - 인류 최초의 지혜로 미래를 구하다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과학기술과 진보를 향한 숭배에 내재하는 만인을 위한 단일한 문명이라는 이상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지고 불구가 된다. 세계관 하나가 소멸할 때마다, 문화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생명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옥타비오 파스, 『웨이파인더』 중에서, 178쪽)

 

 

 

 

 Scene #1  오만한 문명    

 

“그는 몹시 불편해했다. 바지를 입는 일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윗도리의 소매로 말미암아 어깨와 팔 안쪽에 찰과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는 부분을 몇 군데 넓혀 주었는데, 그는 점차 자신의 신체를 의복에 길들여갔다.”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중에서)

 

프라이데이를 처음 본 로빈슨은 무척 놀랐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백주대낮을 활보했으니 말이다. 신앙심 빵빵한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야만인 옷 입히기'를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혜택이라고 생각했다.

 

'문명'이 고고학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30년대부터다. 이때부터 실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문명이라는 사회단계의 개념화가 진행됐고, 문명 단계로의 이행을 가져온 다양한 요인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다.

 

'문명' 개념은 인류는 발전한다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믿음 속에서 탄생했다. 인류학자 헨리 루이스 모건은 '발전'의 개념을 도입해 인류가 야만과 미개가 단계를 거쳐 오늘의 문명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당시 유럽에선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듯 인종이나 사회도 거친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발전한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졌고, 자기 문화권과 다른 사회는 야만으로 규정해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정신문명을 압도하는 오늘날, 기술과 자본이 개입되지 않은 삶의 모습은 이질적이고 비문명적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옷을 입지 않고 산다거나 피부에 무수한 상처를 남기는 고통스런 통과의례 등은 흔히 야만적인 풍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인식이 상대 문화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명은 오만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불붙은 유럽 제국은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을 단죄했다.

 

도시문명이 발달한 유럽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시선처럼 원주민 문화는 야만스러운 것일까?

 

 

 

 Scene #2  인류학자, 문명과 야만 사이로 직접 뛰어들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수 백만 년이 지났지만 서로 긴밀한 교류를 시작한 건 채 수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 보편적 경로를 밟기도 했으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왔다.

 

캐나다 출신의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물질문명의 단선적인 흐름을 근거 삼아 진보를 주장하는 서구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한다. 그가 쓴『웨이파인더』는 단순한 서구 탐험가의 오지 탐험기가 아니다. 전 세계 토착 부족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만 사이로 나누어진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떤 소통을 꿈꾸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문명인의 눈에는 미개하게 느껴지는 야만의 모습을 그저 야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곳에 살아가는 토착 부족민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이르는 생명들의 삶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야만적 문화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뛰어난 지혜다.

 

폴리네시아인은 지도와 나침반이 없어도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바람, 파도, 구름, 별, 해 등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이 항해하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부표다. 예를 들어 달무리가 생기면 다음 날에 비가 온다는 징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는데 오래전에 폴리네시아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밖에 달무리 안에 보이는 별의 개수를 통해 폭풍의 강도를 예측할 수 있고, 구름이 떠있는 형태나 움직이는 정도로 대기 상태나 바람의 세기 및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항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항해 과정 중에 보고, 겪은 자연현상들도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이것을 지도 삼아 직접 눈으로 바닷길을 찾는 그들은 바닷길잡이(wayfinder)인 셈이다. 기억으로 축적된 폴리네시아인의 추측항법은 오늘날의 천문학, 해양학으로 증명된 지식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들은 추측항법을 따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음 후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다행히 폴리네시아의 추측항법은 보존되고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콜롬비아의 바라사나 족의 우주론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들은 거대한 지구를 구성하는 자연에 각각의 생명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영적 기운으로 살아 숨 쉰다고 말한다. 인간, 동식물 모두는 하나의 우주적 기원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서로 관계 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는 통합체로 인식한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생명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커다란 생명체로 본다. 그러나 바라사나 족은 열린 눈과 마음으로 온갖 생물, 무생물을 보듬어 안은 인류의 지혜를 살아 있는 자의 의무로 봤다. 바라사나 족뿐만 아니라 일부 토착 부족도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대한 공공 재산이자 영적 기운이 들어있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한다.

 

 

 

 Scene #3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근대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무기로 삼는 인류사회의 진보를 자랑해왔지만, 그 이면에는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야만의 역사가 성장해왔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줄기차게 울려왔다. 그 목소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야만'과 '미개'라는 단어를 붙였던 토착 부족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내는 진실 되고 간절한 목소리 앞에 귀를 막아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과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또 다른 세상 보기를 시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때론 편견과 오만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을 느낀다.

 

1854년, 북미 대륙에서 잔혹하게 인디언을 몰아낸 백인들이 내민 계약서 앞에 시애틀 추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웨이드 데이비스도 시애틀 추장처럼 인류학적 근거를 들어 자연과 공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를 강조한다. 자연을 개발하고 소유하는 인식은 미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과 하나로 연결된 채 살아가는 토착 부족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자연개발론자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에 자연을 이윤 획득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본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오랫동안 한 곳의 터전에서 살면서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 토착 부족을 집단학살(genocide)하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생활방식을 말살하는 문화학살(ethnocide)도 일어난다. '진보'의 불도저를 앞세운 문화학살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최고(最古)의 언어, 문화 그리고 내일을 내다보게 만드는 삶의 지혜마저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희귀종의 멸종이나 서식지 파괴와 같이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과 언어 및 문화 다양성은 무관하지 않다. 자연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수세기를 살아온 인간의 언어들 속에는, 자연에 대해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거는 방법이 무척 다양했다. 그래서 특정 언어가 사라지면 특정 생물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생물종의 상실을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손실 즉, '인종권'(ethnosphere)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방관하고 있다. '인종권'이란 인간의 지성과 의식이 함축된 인류를 총칭하는 문화적 재산으로 정의된다.

 

과학 기술의 지속적 발명과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 하에 진행되는 인류에 의한 자연 정복이 이대로 계속될 때 틀림없이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은 지구의 황폐, 생태계의 파멸, 인류 종말 및 모든 생명체의 멸종이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지구는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병에서 회복될 수 없어 사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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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래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물질을 치료에 이용해왔다. 현재까지 많은 의약품들이 식물체로부터 얻어지고 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은 키나나무에서, 진통제인 모르핀은 양귀비 열매에서, 마취제로 쓰이는 코카인은 코카나무에서 추출됐다. 하지만 모르핀, 코카인은 의학용이라기보다는 심각한 중독 증상이 나타나는 마약으로 분류하고 있다.

 

코카인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과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며, 심장 박동수와 혈압을 높인다. 또 도파민을 신경전달물질로 사용하는 뇌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도파민이 전기신호를 전달한 뒤 다시 시냅스에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막아 흥분상태가 이어지도록 한다.

 

코카인은 체내에서 급속히 분해되기 때문에 약효가 신속한 대신 지속시간이 짧다. 적절량을 사용하면 힘이 넘치고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 등 쾌락적인 흥분과 환각 경험을 갖게 되지만, 과량 흡입하면 불안, 구역질, 구토 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심장마비나 호흡정지 등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코카인의 특이한 독성작용 중에는 ‘Coke Bugs’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피부 속에 벌레들이 떼 지어 기어 다니는 듯한 환상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이 일어나면 벌레를 잡기 위해 피부를 마구 긁어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이렇듯 코카인의 해로움은 의학적으로 증명되었으나 코카인을 합법화하는 나라 및 지역이 남아 있다. 그들은 코카인은 몸에 좋은 약물이라고 주장한다. 코카인은 남아메리카의 코카나무 이파리에서 추출하는데, 잉카문명에서 이미 약초로 쓰였다. 잉카인들은 코카 잎을 씹으면 피로와 졸음을 쫓아주고 고된 노동의 고통을 완화해 준다고 믿었다. 1855년에 코카인이 처음으로 코카 잎에서 분리 추출되는 방법이 발견되면서 마취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잉카인의 후예들이 사는 볼리비아에 코카 잎을 사용하는 전통이 남아있다. 그들은 코카나무에서 추출하는 물질을 ‘코카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코카’라고 부른다. 코카 잎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인 볼리비아는 코카 잎으로 만든 에너지 음료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볼리비아는 2006년부터 코카 재배농 출신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가 코카 재배 양성화 정책을 추진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볼리비아 정부의 코카 재배 양성화 정책이 마약류인 코카인 생산을 늘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코카인의 해로운 영향이 공식적으로 밝혀지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히려 코카인에 대한 경계가 느슨했다. 19세기 중반 인기 음료엔 코카인이 버젓이 들어 있었고, 미국의 존 팸버튼이 1886년 첫 선을 보인 이후 20여 년간 코카콜라에 이 중독성 물질이 함유됐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5년간 코카인을 규칙적으로 흡입하면서 “중독성 없이 지속적 행복감을 제공한다”는 예찬과 함께 주변에 권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와서 코카 재배 근절이 하나의 국제적 정책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코카인은 건강에 해로운 마약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오래전부터 코카를 피로회복제로 이용했고, ‘신의 불로초’라 여긴 잉카인의 코카 숭배 문화가 코카인 생산을 부추기는 사회악의 원인으로 지적받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1970년대까지 잉카인들이 사용하는 코카 성분에 대해 과학적 입증이 밝혀지지 않았다. 코카 잎에서 코카 성분을 추출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정작 코카 원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웨이파인더』(정은문고, 2014년)에 코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안데스 산맥을 탐사하는 여정을 소개하는데 남아메리카 지역에 나오는 코카가 단지 마약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데이비스는 코카의 영양학적 연구를 실시한 결과, 유해한 물질임을 밝혀낸다. 코카 잎에서 나오는 효소는 탄수화물을 소화시키는 능력을 높여주는데 안데스 지역의 감자 위주 식단에 아주 적합하다. 그리고 비타민과 칼슘 성분도 포함될 정도로 영양학적 가치가 높다. 잉카인들이 씹는 소량의 코카 잎에 0.5~1%의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는데 인체에 무해하다. 그래서 잉카인들이 코카에 중독되지 않은 것이다.

 

코카인이 위험한 마약이라고 해서 코카를 즐겨 사용했던 잉카 전통 문화를 ‘최악의 문화’로 보는 것은 왜곡된 편견에서 비롯된 문화적 차별이다. 그들의 신성한 식물을 함부로 사용한 진짜 주범은 무기를 앞세워 타 민족의 문화를 파괴한 근대의 문명인이었다.

 

 

 

 

 

 

 

 

 

 

 

 

 

 

 

 

 

잘못 알려진 음식, 건강, 환경 관련 분야 상식을 소개하는 제임스 콜만의 『내추럴리 데인저러스』 (다산초당, 2008년)에 코카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잉카 제국을 침략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미 코카인의 효능을 알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인들을 금광으로 끌고 가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코카인을 사용하게 했다. 금을 캐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광에 투입된 잉카인들은 평소보다 많은 코카인을 강제로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잉카인들은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금을 캤을 것이며 코카인을 과다 복용하는 바람에 그 많은 잉카인들을 사망케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마약은 인류가 발견해 낸 물질 중 가장 신비스럽고 귀한 물질임에는 틀림없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 내는 신통력이 있는가 하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고 심각한 질병을 앓아 수술할 때에는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다. 

 

이처럼 마약이 의학적으로 적정한 용도로만 사용된다면 신비의 묘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확산을 우려하는 이유는 마약류가 지니는 엄청난 파괴력 때문이다. 마약류의 남용은 개인에게는 신체적, 정신적, 가정적 파괴를 사회적으로는 각종 범죄와 혼란을 일으킨다. 중독은 특정한 자극물을 사용하면 만족감을 얻기 때문에 이러한 자극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길 원하게 되고 또 사용을 중단하면 불쾌한 기분과 금단 증상을 경험하게 되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자극물에 의존하게 된다.

 

특히 마약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진보라는 환상에 취하고, 끊임없는 발전에 만족하지 못해 탐욕스러워진 문명인이 이 위험한 약을 만들었다. 결국 마약은 문화제국주의 시대가 낳은 잘못된 근대적 발명품 중 하나다. 지금까지도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현대인은 잘못된 역사적 진실을 믿으면서 아무 죄도 없는 타 민족 문화를 오해하고 무시한다. 그리고 이 근대적 발명품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중독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코카 잎을 씹는 잉카족과 코카인에 중독된 문명인 중에 과연 누가 더 야만스러운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의 지혜가 깃들어진 문화를 멸시하고, 가차없이 짓밟고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문명인이야말로 야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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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문고 2014-09-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고맙습니다.
 

 

 

 Scene #1  수학은 공부할수록 더 어려워질까? 

 

어렸을 때 수학을 좋아했는데 점점 싫어하게 되는 아이들이 많다. 고등학생이 되면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도 곧잘 듣게 된다. 수학은 대입 수능시험에서 입시의 당락을 좌우하기에 사교육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과목 중 하나. 혼자 공부하면서 느끼는 막연함과 단순암기식의 잘못된 공부 방법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

 

나도 고등학생 3년 동안 '수포자'였다. 1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봤지만,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아서 점점 싫어하고, 포기하게 된 유형이다. 그래도 수학 공부를 위해 투자한 시간은 많았다. 수학 성적만큼은 잘 받고 싶어서 수업이 끝나도 수학 선생님 졸졸 따라다니면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여쭤보고,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 공부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집중했다. 수학이 내신 성적과 입시 성적에 절대적으로 비중이 큰 과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이어진 수학과의 싸움은 완전한 패배로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수능시험에서 27점이라는 최악의 점수를 받고 말았다. 고등학생 3년 동안 치러진 모의고사 수학 성적과 통틀어 비고하면 너무 낮은 점수였다. 모의고사 때 평균적으로 수학 성적은 50점 중반 때 받곤 했다. 성적이 좋으면 60점 조금 넘었고. 제일 낮은 점수를 받아도 30점 이하로 받은 적이 없었다. 거의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수학에 대한 학창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왜냐하면 수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이 "너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분명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적인 말을 들을 정도로 수학 성적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 수학 공부를 한창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우면서도 아쉬울 때가 많다.

 

모든 사람들이 수학을 좋아해야 하는 법은 없지만, 잘못된 지도로 인해 수학적 흥미를 잃게 되는 아이들이 많아 안타깝다. 수학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과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수많은 수학 공식을 암기해야 한다. 수학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단순한 교육 방식을 어려워한다. 배우는 양을 많아지고, 내용은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수학 공부가 싫어서 대학 진학을 인문계열로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수학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하는 학생들이 많이 없다. 

 

그런데 국내 학생들의 수학 성취도는 42개국 가운데 1, 2위를 할 만큼 성적이 좋은데도 자신감과 흥미에 있어서는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또 수학을 잘한다고 해도, 수학자의 길을 가는 학생도 많지 않다. 우리나라는 2012년 열린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는데 대표팀이었던 학생 5명 가운데 3명은 졸업 후 의대로 진학할 정도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학 같은 거 배워서 어디에 써먹느냐?"며 아무 쓸모없다고 투덜댄다. 수학은 우리 삶에 쓸모도 없이 괜히 어렵게 만들어져 시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전 세계의 사람들이 쓸모없는 학문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개발을 하고 공을 들여온 것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Scene #2  수학은 예술처럼 아름답다   

 

수학을 왜 배우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학은 정말 필요하고 고마운 과목이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면 논리적인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이 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정말 재미없다. 수학을 무조건 다 이해를 할 때까지 시키고 또 시키면 질려버린다. 수학은 처음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학문이 아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면 논리적인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이 늘게 되는데, 우리나라 수학 교육은 그러한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안 풀리는 문제와 씨름해야 할 상황에 배워야 할 내용은 점점 많아진다. 수학을 좋아할 만한 시간과 기회가 없다.

 

'수포자'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이구동성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 수학은 너무 어렵고, 재미없다고. 어른들은 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의 심정이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게으른 변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학자 고드프레이 해럴드 하디라면 우리 수포자들의 절망적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디는 수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전까지만 해도 수학을 경쟁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수학자가 되기 전까지 여러 번의 수학 시험을 거쳤다. 그러다가 평소 가르침을 받던 수학교수가 추천한 수학책 한 권 때문에 수학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하디는 교수가 추천한 조르당의 『해석학 교정』을 읽으면서 수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하디는 수학은 아름다운 것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미술이나 음악, 시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디가 예찬하는 순수 수학이다. 하디는 수학을 순수 수학(참된 수학)과 응용 수학(사소한 수학)으로 구분하는데 실용성에만 중점을 두는 응용 수학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에 수학의 실용성을 예견하지 못한 한계가 있고, 지나치게 순수 수학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학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사실 하디가 강조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은 수학에 두려워하고 질린 사람에게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들은 안다. 수학 문제를 푸는 증명 과정에서 논리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a²+b²=c² ‘어떤 삼각형의 한 각이 직각이면, 빗변의 제곱과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은 같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피타고라스 정리다. 중학생도 아는 이 공식에 관해 유클리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같은 당대의 수많은 석학들이 자기만의 증명법을 도출하기 위해 연구했다. 왜 이들은 단순해 보이는 이 정리에 그렇게 열광하고 매달린 걸까. 피타고라스 정리는 ‘문명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 뿌리를 통해서 도형과 직각의 개념이 줄기를 올렸고 그것을 통해 건축과 과학기술이 꽃을 피워 고대 피라미드에서 컴퓨터까지 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복잡다단한 거대한 문명의 발전을 떠받치고 있는 간결하면서도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진리. 이것에서 수학자들은 고귀한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올해 한국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 참가한 수학자 세드릭 빌라니가 볼츠만 방정식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필즈상 수상에 근접한 최고의 수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느 기자에게도 말한 바 있지만 볼츠만 방정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정식이다! 나는 어릴 때, 그러니까 박사논문을 쓸 때부터 이 방정식에 빠져들었고 그 후 이 방정식의 모든 면을 연구했다. 이 방정식에서 비롯된 수학적 세계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세드릭 빌라니 『살아 있는 정리』중에서, 11쪽)

 

괴짜 수학자로 유명한 폴 에어디쉬는 이미 타당한 증명을 얻고서도, 타당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한 증명을 얻기 위해 다시 도전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수학의 아름다움을 결과적 성공에서 발견할 수 있다.

 

 


 Scene #3  순수와 응용을 아우르는 생활수학  

 

우리나라 수학은 수학을 공부해야 할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을 무시한 채 문제를 푸는 방식부터 접근해서 가르친다. 문제를 잘 푸는 것이 수학 교육의 일차적 목표다. 문제를 푸는 과정만 반복되는 수학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문제를 풀지 못하면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 낙오자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 있다. 수학 공부에 대한 패배감이 클수록 '수포자'가 되어 시험 전선을 스스로 이탈하고 만다. 

 

하디는 수학의 미적 매력은 선택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감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학은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수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수학을 알아야 한다.

 

수학은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의 기초다. 수학의 실용성을 무시한 채 수학의 아름다움을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용성은 문제 푸는데 만 초점을 맞추는 엘리트 수학에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실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사회를 변화시키게 만드는 생활수학으로서의 실용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생활수학은 하디가 구분한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을 아우를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다. 아름다움과 실용성 그리고 논리적 지식이 공존한다. 단순암기와 문제풀이에서 벗어나 수학이 가진 아름다움을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스스로 깨닫는 교육을 통해 수학에 대한 원리에 접근해야 한다. 간단한 공식과 규칙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수학을 즐길 수 있고, 수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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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Scene #1  평화롭기보다는 살벌한 예루살렘

 

인간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고 소원하며, 신을 향해 애절하게 울부짖는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가슴 아린 현실을 내 안의 그분만은 알아주길 간절히 원하면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유대교인이 되고, 불자가 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예루살렘은 가슴 아픈 역사와 분열의 중심인 동시에 구원과 희망의 성지다.

 

갈릴리에 살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죽기 전날 홀로 기도한 겟세마네 동산이 있고, 부활한 지 40일 만에 승천했다는 곳이 모두 감람산이다. 감람산 밑엔 유대인들이 최고 명당으로 꼽는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직접 문을 열 것이라고 믿는 성벽이 굳게 닫혀 있다. 그 성벽 위엔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아들 이사악을 바치려 한 성전산이 있다. 이곳엔 무슬림의 황금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나란히 서 있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아름다움의 척도 열 가지가 세상에 주어졌는데, 그중 아홉 가지를 예루살렘이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름다움보다는 번득이는 총구가 먼저 눈에 띈다. 더욱 성스러워야 할 이곳은 평화롭기보다는 살벌하다. 평화가 너무도 간절하기에 예루살렘인 것일까.

 

예루살렘에서 여전히 평화는 멀고 저주는 가깝다. 예루살렘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선지자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종교와 신화가 서린 이런 도시를 누가 지배하느냐였다. 정복자는 피지배자들의 신전을 허물고, 그 폐허 위에 그들이 믿는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다. 피지배자들은 허물어진 신전을 언젠가 다시 세우겠다고 맹세했고,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2천년 동안의 고난을 잊은 듯 보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고사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유대인과 아랍의 갈등이 지구상 최고의 ‘뜨거운 감자’라 하더라도 유대인과 기독교의 역사적 갈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수는 2천년 이래 유대인이 낳은 지상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만은 ‘지상 최악의 인물’이다. 예수에 대한 지구상 최고의 환호와 저주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직과 수평의 십자가처럼 예루살렘에서 상극을 연출하고 있다.

 

 


 Scene #2  군인으로 변한 종교인 

 

야만적인 전쟁 행위에 흔히 신성(神聖)을 부여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원시 부족들이 사냥이나 전투에 앞서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에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피 흘리며 죽이고 죽는 것을 무릅쓰도록 부추기고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의식을 씻어주는 집단 최면 효과를 얻는 셈이다.

 

전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종교’로 인해 일어난 전쟁 역시 수없이 많다. 종교 간 대립으로 인한 전쟁,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 등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전쟁 속에서 군인으로 변모한 종교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서유럽이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11∼13세기 200년간 8차례에 걸쳐 감행한 십자군 성전(聖戰)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로 얼룩진 추악한 전쟁이다. 그 이면에 교황권 확대와 유럽인의 대외 팽창 욕구 등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역사의 흐름에서 십자군 전쟁이 끼친 긍정적 파급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신앙을 가장한 인간의 탐욕이 빚은 부끄러운 만행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 정권이 자행했던 유대인 대학살 이후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위해 미국이 팔레스타인 땅 심장부에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했는데 이는 많은 무슬림의 가슴에 반미 감정을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더욱이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4차례의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웃 아랍 국가들의 영토를 불법으로 점령하자 하마스, 헤즈볼라, 이슬람 지하드 같은 조직적인 무장저항단체가 생겨나 반 이스라엘 투쟁을 본격화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알 쿠즈’라 부른다. 앞으로 언젠가는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가 바로 알 쿠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을 선언할 당시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였으나, 1950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예루살렘 성지문제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이 ‘눈에는 눈’식의 보복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평화는 깨졌다’며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를 향해 펀치를 가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어린이 놀이터에 폭격을 가해 9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죽는 잔혹한 일이 발생했다.

 

 

 

 Scene #3  ‘예루살렘 열병’을 치료해줄 ‘좋은 종교’ 어디 없나?

 

요즘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지구 공격 사태로 대체로 이스라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부정적이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팔레스타인이나 이슬람이 늘 피해자였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은 일방적인 피해자도 아닐뿐더러, 이스라엘도 일방적인 폭력의 가해자도 아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 모두가 종교에 의해 열병이 걸려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의 계시'란 이름 아래 종교적 욕망, 군사적 욕망이 더해져 타 민족과 종교집단을 괴롭혔다. 그들의 시각에서 타 종교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다.

 

니체는 "기독교는 피정복자와 피압박자의 본능이 전면에 나타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권력자에 대한 감동이 늘 생생하게 살아난다"며 기독교 권력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가 정치 권력화 되면서 나타나는 병폐는 기독교뿐만이 아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임하는 유대인들은 성스러운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던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지금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알라신의 계시라는 이름하에 타 종교와 대립하고 또한 자신의 육체를 신에게 맡기는 인간폭탄 테러도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 열병은 지독하다. 병명은 ‘예루살렘 열병’. 그 종교의 열병은 곧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그 적대감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케 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타자를 희생물로 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자신이 제물이 된다는 인식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열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성스러움과 폭력이 양립하는 종교의 모순을 목격한 제임스 캐럴은 ‘좋은 종교’로 발전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종교’는 죽음 대신 삶을 찬미하고,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신이 이 땅에 임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는 구원이 아닌 계시에 관한 것이며 강요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세속적 성격을 띨 수 있다.

 

종교의 근본주의 사상에서 가장 문제점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다양성이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세계관을 가졌다. 흑백논리에 점철된 그들의 주장은 타 민족을 학살하거나 억압할 때 정당화 하는 논리로 사용됐다.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를 택한다. 종교는 전쟁에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 주었다. 종교적 광기가 정치권력을 장악할 경우 예루살렘은 절대로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없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가 남긴 말은 ‘예루살렘 열병’의 환각 상태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종교’를 조롱하는 듯하다. 이들의 끝없는 전쟁은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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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 모 방송국에서 남녀 각 연령별로 이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남자 10~40대, 여자 10~30대가 가장 후회하는 일로 압도적으로 공부를 꼽았다. 70대에 이르러서도 남녀 모두 무엇 하나라도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학창 시절에 공부가 그렇게도 하기 싫고, 놀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러다가 나이가 점점 먹을수록 그때 하지 못했던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 마음잡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업무와 잦은 회식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다. 예전처럼 머리와 몸도 따라주지 않는다. 공부하면서 본 내용이 며칠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노안 때문에 책의 활자를 읽기가 어려워진다.

 

평소에 공부와 담을 쌓은 사람은 다시 손에 펜을 쥐고, 책을 펴서 글자를 뚫어지게 봐도 학습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대개 고등학생 때까지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공부하던 습관에 익숙하다. 대학생부터 공부 환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교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바늘구멍만큼 좁다는 취업의 문에 들어서기 위해 스펙이라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강의실에서의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술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토익, 자격증 공부를 한다. 학교생활 절반을 강의실 또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20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부를 질리도록 한다. 10대는 입시 성적을 위해서, 20대 초중반은 취업을 위해서. 그러다가 30대에 직장을 얻게 되면 길고 길었던 공부 터널에서 탈출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어서도 공부는 멈출 수 없다. 고용과 노후에 불안을 느낀 직장인들이 안정된 전문직을 얻으려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취업에 장기간 실패하거나 취업을 했더라도 적응하지 못한 채 인생역전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셀러던트’가 등장했다. 그들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공부에 미치라고 권한다. 우리는 공부 권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공부 소리만 들어도 피곤하고 질린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평생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부 비법을 전수해 주는 등의 공부 관련 도서는 베스트셀러 코너의 단골손님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위에 게시된 사진의 책들은 한 출판사에서 발간된 시리즈물이 아닌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이다.

 

책을 살펴보면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는 10대에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진다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좁은 취업의 문에서 불안해하는 '88만원 세대' 20대들을 위한 자기계발서인 '20대 공부에 미쳐라', 직장인들이 익혀두면 좋은 실용적인 공부 기술을 쉽게 정리해 놓은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도 포함됐다.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는 지식 사회와 고령화 사회의 추세에 따라 평생 학습의 관점에서 40세 이상 중년의 공부를 다뤘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무슨 일에 미친 사람처럼 끈질기게 집중하고 몰두해야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부도 재미있어서 미친 사람처럼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우리는 공부가 너무 즐거워서 미쳤다기보다는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렸다. 그동안 남이 시키는 대로,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가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도 즐겁게 느껴진다면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 늦게라도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 시작해도 된다. 지난 주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소개된 82세 신문배달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80세가 넘는 고령인데다가 한쪽 손이 불편한 상태 속에서도 지난 35년을 한결같이 10시간동안 신문배달을 해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신문배달 일로 버는 월급 90만 원의 3분의 1 가량을 책 구매하는데 쓸 정도로 독서광이다. 할아버지가 구입하고 읽은 책만 해도 2000권 넘는다. 할아버지에게 신문 배달은 생계의 수단보다는 속죄의 과정이다. 술로 인해 멀어진 가족들과 이혼 후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지금까지 신문배달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청춘을 낭비한 과거를 잊고 할아버지는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데 그를 일으켜 세운 준 것이 책이었고,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만든 힘의 근원은 공부였다. 할아버지는 정신이 가난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를 떠난 지금도 혼자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싫증이 난다. 내가 궁금했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10대부터 은퇴하는 40대까지 시험과 승진을 위해서 공부한다. 이러니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태도를 신체 활동으로 비유하자면, 쉬지도 못하고 계속 뜀박질하는 상태다. 호흡이 더욱 가빠지고, 몸은 지쳐간다. 특정 기간 안에 좋은 성적을 얻고, 승진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한다. 무턱대고 너무나 많은 양을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해버린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너무나 급하게 공부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공부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지식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오히려 공부를 쉬엄쉬엄 하는 것을 게으른 방법이며 능력을 발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공부는 깊은 호흡을 들어 마실 수 있는 상태처럼 되어야 한다. 교육학자 사이토 다카시는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를 할 것을 주문한다. 사이토는 10년 전 큰 병을 앓은 뒤 ‘공부’를 삶의 방향으로 삼게 됐다고 한다. 당시 인생이라는 마라톤이 중간에 예고도 없이 끝날 수 있음을 실감한 그는 후회 없이 충실하게 보냈다고 느꼈던 시간을 떠올려봤다. 좋은 책을 다 읽은 날, 공부 재미에 완벽히 몰입했을 때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 즐거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호흡이 길어지는 공부란 철학, 사학과 같은 인문학, 물리학, 수학, 음악, 미술 등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깊이 있게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공부의 수준과 목표는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되고, 단지 교양을 쌓는 공부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 중에서, 62쪽)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공부’는 인생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든다. 일과 삶, 미래를 통찰하는 법을 일깨워 준다. 매일 꾸준히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것보다 하루에 30분씩이라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시작해야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오래 공부할 수 있으며 평생 공부를 가까이 하면서 살 수 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이 즐거움의 한 길임을 일러주고 있다. ‘진짜’ 공부는 일단 즐거워야 한다. 오랫동안 몸에 배인 ‘가짜’ 공부와 관련된 안 좋은 기억과 습관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동안 우리의 뇌를 죄어온 잘못된 사슬을 풀지 못하면 영영 공부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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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시경 2014-08-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이 방송 봤는데~ 정신이 가난한 사람이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는데 공감했어요~ 책을 통해 진짜 공부를 하는 삶이 되고 싶은데..쉽지 않은 일이네요,,

cyrus 2014-08-14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방송 보면서 할아버지 말씀에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지금 저 또한 공부하는 삶을 지향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