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면 은은한 빛이 흐르는 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으면 좋다. 비 오는 날이면 가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이럴 때 조용한 방 안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읽으면 편안하다. 책에 몰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어제 비가 오는 날에 토머스 핀천의 단편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 2014년) T.S.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민음사, 2004년)를 다시 읽었다.

 

 

 

 

 

 

 

 

 

 

 

 

 

 

 

 

핀천과 엘리엇. 두 사람이 쓰는 글의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한 번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라는 불편한(?) 공통점이 있다. 핀천의 소설은 역사, 과학, 철학, 대중문화 등 폭넓은 분야의 소재를 마구 뒤섞어 놓고, 아주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꼬아놓았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시인 본인이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말 그대로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리듬감 있게 늘어놓는 불평(Rhythmical grumbling)"이다. 단테,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성서, 우파니샤드 등 동서양을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을 인용하여 총 5부로 이루어진 이 어마어마한 장시는 엘리엇의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투덜거리게 한다. 엘리엇은 이 시를 통해 무기력한 삶에 대한 리드미컬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핀천의 첫 번째 작품인 단편 「이슬비」는 엘리엇의 『황무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4년에 「이슬비」를 포함한 1950, 60년대에 발표한 초기작들을 수록한 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 서문에 핀천은 「이슬비」를 집필하면서 『황무지』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참조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이슬비」는 『황무지』와 같이 읽어야 처음에 느끼지 못했던 핀천과 엘리엇의 문학적 매력을 동시에 맛 볼 수 있다. 아, 그 대신 『황무지』를 먼저 읽어야하고, 이 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까지도 찾아보는 꼼꼼한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핀천이 쓴 서문을 먼저 읽은 다음에 「이슬비」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해설을 읽으면 된다. 작품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슬비」→ 서문 → 작가 해설’ 순서로 읽어도 된다.

 

「이슬비」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위기와 절정으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군 특수병과 소속의 상병 러바인의 평범한 일상을 그려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체들을 인양하는 작업에 나서는 러바인의 모습이다. 이 끔찍한 장면을 제외하면, 러바인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전개되고, 소설 제목을 의식한 듯 하늘이 흐려지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씨를 묘사한 문장이 많다.

 

핀천은 첫 소설인 「이슬비」를 “되도록 문학적으로 써라”라는 신조를 믿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에 쓴 서문에서 그 문학적 신조가 「이슬비」를 미흡한 데뷔작으로 만들어버린 나쁜 충고였다고 후회했다. 핀천은 「이슬비」를 최대한 문학적인 느낌을 살려서 쓰려고 엘리엇과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을 집어넣었다. 핀천 본인은 이 데뷔작이 결함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서투른 초보 작가의 티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집필 방식 덕분에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만약에 핀천이 기성작가 반열에 오르면서 생긴 명예를 좇았다면, 1984년에 쓴 서문에서 자신의 데뷔작이 엘리엇과 헤밍웨이를 어설프게 참고했다고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4년은 『중력의 무지개』의 성공으로 핀천의 문학성이 인정받고 있었던 시기다) 핀천의 서문 덕분에 「이슬비」가 문학적으로 쓰인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슬비」의 러바인은 폐쇄적인 군대 생활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물이면서도,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운명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핀천은 「이슬비」의 등장인물들이 완곡어법이나 상스러운 농담으로 죽음을 회피한다고 평가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핀천이 의도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말이야." 러바인이 읽던 책을 배 위에 엎어놓고 말했다. "가끔 도시로 돌아갔으면 할 때가 있어. 그런데 막상 가면 별로야."
 "왜 별로일까?" 피크닉이 물었다. "난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아니야." 러바인이 찡그리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는 게 나아. 그저 한번 돌아가본 일이 기억나. 어떤 계집애한테였지. 그런데 역시 별로였어."
 "그래." 피크닉이 말했다. "넌 나한테 말한 적이 있어. 돌아가야 했다고.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막사에 돌아가 잠이나 자게."
 "잠은 어디서든 잘 수 있어." 러바인이 말했다. "난 그래." (51~52쪽)

 

러바인은 지루한 군대를 벗어나 자유로운 도시 생활을 꿈꾼다. 군인이 되기 전에 도시에 생활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이를 스스로 부정한다. 현재가 싫어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심리 속에 죽음으로 종착하는 인생의 순리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러바인은 그립고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으며 인간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동료 피크닉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막사로 돌아가서 잠이나 편안하게 잤으면 한다고 농담을 한다. 그러자 러바인은 잠은 어디서든 잘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잠과 죽음의 형제」  1874년

 

 

여기서 말하는 잠은 피크닉이 원하는 편안한 수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러바인이 생각하는 잠은 어디서든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영원한 잠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히프노스(Hypnos)는 잠의 신으로,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형제다. 잠은 ‘작은 죽음’이다.

 

러바인은 시체 인양 작업을 하면서 끔찍하게 부패된 시체를 본다. 죽음은 평범한 삶을 언제 어디서 급습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종말이다. 러바인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인간이다. 우울함과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러바인은 인적이 드문 늪에 버려진 집에 리틀 버터컵이라는 금발 여인과 섹스를 한다. 쾌락이 주는 흥분에 외치는 두 사람의 성(性)스러운 장면은 개구리들이 야만스럽게 울어대는 소리와 중첩되어 묘사한다. 

 

사방의 개구리들은 갈수록 야만적인 합창을 주문 외우듯 읊조렸다. (중략) 개구리의 울음은 작은 숨소리와 외침으로 이루어진 거장의 이중주를 위한 건반 베이스로 바뀌었다. (73쪽)

 

 

그러나 섹스가 주는 쾌락은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즐거운 흥분을 감돌게 하여 죽음의 공포를 잠시 잊게 만드는 마취에 불과하다. 엘리엇의 『황무지』에서도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의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 '젹 젹'(Jug Jug) 소리로 들릴 뿐.

 

(엘리엇 『황무지』 2부 체스 놀이, 64쪽)

 

 

쾌감 절정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맑은 소리를 내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내는 야릇한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황홀한 쾌락은 남녀 두 사람 모두를 기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절정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흥분 상태가 급격히 가라앉는 ‘현자 상태’에 이른다. 섹스를 끝마친 러바인은 숙명적인 절망을 극복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과 허무함을 애써 잊기 위해 말장난을 한다. 잡지의 제목 '라이프'를 가지고 죽음의 신이 내뻗는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커다란 죽음의 한가운데에." 러바인이 말했다. "작은 죽음이 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하, <라이프>지의 사진 설명 같네. '삶'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오, 맙소사." (73쪽)

 

 

인간은 ‘작은 죽음’인 잠을 평생 수만 번 이상 자고 나면, 영원히 잠드는 ‘죽음’이 다가온다. 또는 ‘작은 죽음’을 취하다가, 저승사자가 부르는 대로 한순간에 지옥으로 갈 수도 있다. 이렇듯, 러바인의 표현처럼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그것도 너무 가까이에. 오, 맙소사! 우리의 삶은 점점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엘리엇 『황무지』 5부 천둥이 한 말, 102쪽)

 

 

소설 마지막에 러바인의 동료 리조는 헤밍웨이와 엘리엇을 언급한다. 자신의 데뷔작에 영향을 준 선배 작가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신인 작가의 재치 있는 묘사이다. 러바인의 동료들은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가 싫다고 말하지만, 리조는 뜬금없이 엘리엇은 비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리조가 말했다. "T.S. 엘리엇은 비를 좋아해." 러바인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멨다. "이런 식이면 비는 아주 섬뜩해." 그가 말했다. "이런 비라면 둔한 뿌리를 흔들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고, 쓸어버릴 수도 있어." (74쪽)

 

그러나 러바인은 비를 섬뜩한 존재로 인식한다. 핀천은 이러한 러바인의 냉정적인 어조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일말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즉, 황폐되고 절망적인 삶을 투덜거리는 엘리엇의 불평에 동조하는 것이다.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一陳)의 습풍(濕風)

 

(엘리엇 『황무지』 5부 천둥이 한 말, 112쪽)

 

 

천둥은 비를 부른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엘리엇 『황무지』 1부 죽은 자의 매장, 46쪽) 풍요를 약속하는 구원의 상징이다. 하지만, 천둥은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불태워버리는 신의 분노와 같다. 비는 메마른 지대를 촉촉이 적셔주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강물을 만들어주지만, 너무 많으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태풍과 홍수가 되기도 한다. 천둥과 비를 바라보는 인류의 이중적인 인식. 리조는 삶에 구원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인간이라면, 러바인은 엘리엇처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찾지 않으려는 비관적인 인간이다.

 

「이슬비」는 결말에 세차게 비가 내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러바인은 잠을 잔다. 반복되는 ‘작은 죽음’을 통해 잠시나마 혼란스러운 마음을 잊으려고 한다. 「이슬비」를 텍스트 자체를 그대로 읽는다면, 별 것 아닌 문장과 대화로 이루어진 어색한 소설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핀천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에 문학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신인 작가로서의 열정이 느껴진다. 핀천 본인은 이 데뷔작에 대해서 어설프게 느껴지는 자신의 서투른 솜씨에 대해 불평하고 있지만, 이 작품 속에 젊은 핀천의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리듬감 있게 늘어놓는 불평”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분명히 문학적으로 좋은 작품을 쓰는데 성공했다. 

 

 

 

 

P.s 핀천과 엘리엇을 같이 읽으면서 느낀 시시콜콜한 사실. 두 사람의 First name이 같다. 토머스 핀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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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나온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론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영국 런던경제학교의 진화학자 올리버 커리는 앞으로 10만년 뒤 인간은 지능이 뛰어나고 잘생긴 엘리트 집단과 키가 작고 괴물처럼 생긴 저능한 집단 2종류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커리는 배우자들이 짝을 찾는 습성과 운동량, 사회적 습관 등을 근거로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똑똑한 사람은 자신처럼 지능이 높거나 혹은 더 높은 배우자를 찾으며, 본성을 추가하면 신체적으로도 건장한 사람을 배우자로 찾게 돼 결국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명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리고 인간은 3000년쯤 되면 키가 190cm로 훌쩍 커지게 되고, 수명도 120살까지 살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오늘날 기준으로 치면 분명 거인 족이고 초장수족이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열림원, 2007년)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 거인 족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공허한 느낌을 주는 전망이다. 1000년 후, 나아가 10만년 후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에 관한 예측. 말이 1000년이요 10만년이지, 오래 살아봐야 70∼80살인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히 측량불가의 세월이다. 다만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그것은 후손들의 모습이자 인간이라는 종(種)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인체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의학 등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한다면 커리의 예견처럼 인류는 점점 더 신체와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과 의학에 대한 과잉 의존으로 면역체계가 약화되고 육체는 쇠약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이만 해도 찜찜한데 인류가 2종류로 양분되는 인간 세상이 무섭게 느껴진다. 내 후손이 장신에 건강하고 창조적인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가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웰스의 『타임머신』에 나오는 시간여행자라면 커리의 예견이 무척 궁금해서 당장 자신의 타임머신을 타고 10만년 후의 세계로 떠났을 것이다. 시간여행자는 802701년의 인류를 만났다. 그는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는 8만년 후의 인류는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모든 면에서 진보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 본 8만년 후의 세계는 무척 암울했다. 인류는 엘로이와 몰록, 두 종족만 살고 있을 뿐이었다. 엘로이는 지상, 몰록은 지하에 사는 종족인데 전자를 부르주아, 후자를 프롤레타리아로 비유하기도 한다. 지능은 전 시대보다 떨어졌지만 순한 성격의 엘로이는 똑똑한 수준의 인간 집단이라면, 엘로이를 잡아먹는 난폭한 몰록은 저능한 인간 집단이다. 웰스는 이미 2종류로 나누어 발전된 인류의 모습과 그 시대를 묘사했다.

 

시간여행자는 몰록이 감춰 놓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는 더 먼 미래로 갔다. 그곳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도 없고 달의 흔적도 없는데 일식이 일어나고, 세상은 침묵뿐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시간 여행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웰스의 『타임머신』과 함께 언급되고 비교하는 작품이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필맥, 2008년)이다. 원제는 News from Nowhere, 우리말로 풀이하면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이다. 국내에선 생소한 작품이지만, 유토피아 문학을 소개할 때 자주 언급된다. 이 소설은 1891년에 발표되었다. 4년 뒤에 웰스가 『타임머신』을 발표했다. 『에코토피아 뉴스』의 부제는 '유토피아 로망스 중 평안의 시대'이다. 소설의 주인공 윌리엄(소설을 쓴 저자의 분신)은 사회주의자동맹 모임에서 미래사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뒤 귀가한다. 윌리엄은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2050년대의 런던 템스 강 근처에서 일어난다. 이때부터 새로운 유토피아 세계를 경험한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곳 사람들은 땀 흘리는 노동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육 제도도 없다.

 

"아이들은 여름에 종종 무리를 지어 숲에 와서, 보시다시피 텐트에서 함께 몇주일씩 놀며 보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지요. 그들은 스스로 사는 법을 배우고, 야생의 생물들을 관찰합니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습니다." (62쪽)

 

 

"보통 아이들은 15세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두세 가지 이야기책을 읽는 것 외에는 많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일찍 책을 좋아하도록 권장하지 않습니다. (중략)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어른을 닮는 경향이 있고, 대부분의 주위 어른들이 건축, 도로 포장, 정원 가꾸기와 같은 일을 마음으로부터 즐겁게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통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7~68쪽)

 

미래의 런던은 기계가 가득한 차가운 금속의 세상이 아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목가적 세상이다. 모리스는 이 소설을 통해 자본과 기계에 종속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다. 모리스가 『에코토피아 뉴스』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사회주의 세상은 민주적 사회주의에 가깝다. 미래의 런던은 자유와 자치가 인정되며 모트하우스라는 곳에서 공적인 문제를 토의하는 집회가 열린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아고라(agora)를 연상시킨다.

 

모리스의 진보적 사회주의는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에 가입한 웰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웰스는 이미 20살에 모리스의 집에 열린 사회주의자 모임에 참석했다. 모리스처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 진보의 힘을 믿었고,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웰스는 모리스처럼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타임머신』의 8만년 후의 세계는 『에코토피아 뉴스』에 나오는 미래의 런던이 너무 평화롭게 느낄 정도로 암울하다. 오히려 인류의 계급 갈등이 심화된 문명이 퇴보된 세계이다.

 

 

 

 

 

 

 

 

 

 

 

 

 

 

 

 

이러한 웰스의 미래 세계관은 1897년에 발표한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초록달, 2014년)에서도 보여준다. 22세기 런던을 묘사하는데 마천루가 늘어나고, 전기가 발달한 편리한 세상이다. 그 곳 사람들은 굶거나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계속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며 빈부 격차가 심하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는  미래 도시에 사는 엘로이와 몰록을 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웰스는 모리스의 사회주의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사회주의가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 않았다. 그가 가입한 협회의 이름인 페이비언은 'Fabian'은 '점진적인', '신중한'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되었다. 웰스는 점진적인 개혁을 믿었고,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원칙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싶었다. 비록 초창기 페이비언 협회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점차적으로 늘어났지만, 웰스는 글쓰기를 통한 사회주의 전파를 포기하지 않았다.

 

 

 

 

 

 

 

 

 

 

 

 

 

 

 

 

점진적 사회개혁에 대한 애착은 『타임머신』이 나오고 다음 해에 발표한 단편 『현미경 아래의 슬라이드』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힐은 사회주의자이자 대학 생물학과 소속 학생이다. 그는 생물학 실험실에서 자신의 동료 학생들에게 책을 무료로 대여해준다. 그 책이 바로 모리스가 쓴 것이다. 단편에서는 책 제목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책이 『에코토피아 뉴스』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에코토피아 뉴스』의 주인공 모리스가 작가 윌리엄 모리스의 분신이라면, 『현미경 아래의 슬라이드』의 주인공 힐은 한창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웰스의 분신이다.

 

웰스는 사회주의자로 살았지만, 인류 문명에 대한 비관론도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 세계 대전을 목격한 이후부터 그의 비관론적 시각은 뚜렷해졌다. 젊은 시절에 웰스의 머리에 조그만 뿌리로 시작한 미래 비관론은 과학기술의 힘이 총동원된 두 번의 전쟁 기간을 지나면서 거대한 생각의 나무가 되었다. 미래 비관론의 뿌리가 이제 막 웰스의 두뇌 속로 뻗기 시작한 시기에 『타임머신』이 나왔다. 웰스가 습득한 과학 지식은 미래 비관론의 뿌리를 자라게 만드는 영영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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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알면서도(?) 얼척없는 오역에 빠질까?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4-12-19 12:00 
    윗글에서 cyrus 님이 인용한 『에코토피아 뉴스』(윌리엄 모리스 지음, 박홍규 옮김, 필맥, 2008)의 구절들을 그대로 재인용해 봅니다. 번역문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의아한 부분이 있어서요. 그걸 cyrus 님한테 물어도 보고싶고요. [밑줄은 인용자] ===================================== "아이들은 여름에 종종 무리를 지어 숲에 와서, 보시다시피 텐트에서 함께 몇주일씩 놀며 보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프리드리히 니체 - 단 하나의 삶을 사랑하는 길 작은길 교양만화 메콤새콤 시리즈 12
막시밀리앙 르 루아 글.그림, 임명주 옮김, 이수영 해제, 미셸 옹프레 원작 / 작은길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니체만큼 많은 영감을 주는 철학자도 드물다. 방대한 저작과 그 난해함, 또 해석의 폭넓은 스펙트럼. 청년기엔 누구나 한 번쯤 그 철학의 바다에 몸을 담그게 된다. 그러나 수심이 깊은 ‘니체’라는 바다가 두려워서 대부분 바닷가에서 발목을 적시는 정도로 끝날 수 있다. 니체 자신의 저작도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입문서와 해설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많다. 입구를 잘못 찾으면 평생 잘못 파악한 채 살아가게 된다. 니체에 관한 책은 이미 너무 많아 새 저작을 낸다는 것은 자칫 군더더기가 되기 쉽다. 이는 니체만큼 다양한 주석과 해석, 논쟁을 일으키는 철학자도 드물다는 역설적 반증이기도 하다.

 

한때 니체를 알기 위해 제법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 배운, 그 ‘시험문제용’ 니체가 아니라 ‘삶’의 철학자 니체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투자한 시간과 열정에 비해 그 열매는 언제나 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할 만큼 초라했다. 니체의 대표작『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몇 번 읽어봐도 늘 미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막시밀리앙 르 루아가 그린 『프리드리히 니체』는 니체의 삶과 철학을 적절한 수준에서 간결하게 복원했다. ‘니체의 모든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니체에 입문하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만화는 중간에 니체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을 인용하여 그의 핵심사상을 건드린다. 내 지난날의 수많은 시간과 열정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로 가는 길을 친절하고 쉽게 안내한다.

 

 

 

 

 

 

만화의 채색은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다. 다 알듯이 니체는 항상 병마에 시달렸다. 쉼 없는 집필을 보상받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되었을 때, 이미 니체는 거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죽음을 앞둔 상태였다. 르 루아는 매독의 고통을 못 참아 몸부림치거나 환상과 망상에 시달려 울부짖는 니체의 모습도 그려냈다. 대사 한 줄 없는 무언의 컷 안에 너무 튈 정도로 과감한 선과 색채로 형상화된 니체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병자와 광인 이미지를 돋보이게 한다. 왜 르 루아는 병과 망상 앞에서 무너지는 연약한 니체의 모습을 강조하려고 했을까.

 

 

 

 

 

니체의 질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 의미의 그것과 다르다. 그는 질병을 가장 건강한 사람만이 감행할 수 있는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자신이 심한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 병적이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니체는 질병으로 자신의 철학을 검증하려고 했다.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려고 일보 직전 상태인 자신을 스스로 탈출해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다. 즉, 허무주의에 길들면서 생겨난 지배 정서를 의심하고, 공격하기 위해 니체는 위험한 싸움을 감행한다.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는 것이다. 망치로 허무주의적 본성을 파괴한다면, 삶에 대한 긍정을 느끼고, 삶이 건강해진다. 결국, 병들고 미쳐버린 니체의 모습은 그저 독특한 생의 이력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지금이나 니체를 미친 사람으로만 봤을 뿐, 왜 니체가 미쳐버렸는지 그 누구도 묻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이 우리가 니체의 생각을 어렵게 느껴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록 그는 10년 동안 진행된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직면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죽을 때까지 평생 그를 힘들게 한 친구가 매독이라면 그를 외롭게 만든 친구는 고독이었다. 니체는 외롭게 살았다.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루 살로메에게 반해 단 한 번 만난 후 청혼까지 했지만 결국 사랑은 얻지 못했다. 루는 위대한 철학자의 가슴을 벼락처럼 후려칠 수 있는 여자였다. 그 과정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위대한 책이 탄생했다.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미래의 철학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바로 차라투스트라. 미래에서 온 철학자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에게 비극과 불행은 삶에 있어서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불행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Amor Fati.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지 않고, 이렇게 병마에 시달리다가 무기력하게 죽었다면, 우리가 아는 지금의 니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당시까지의 모든 철학과 종교관, 인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그가 평생 추구한 최대의 화두는 완전한 인간이었다.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것은 종교의 부정이 아니다. 피안의 존재에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상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완성에 전념하라는 주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한 인간다운 인간의 완성은 끊임없이 안정을 거부하고 새로운 혼돈을 지향해 전진하는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인간을 니체는 Übermensch라고 이름 지었다. 니체의 삶은 전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탐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지배된 세상에 짓눌려 생긴 환부를 도려내 버린다고 우리의 삶이 건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도려낼 수 있는 상처라면 차라리 좋겠다. 까짓 잠깐의 고통쯤이야 참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10년 동안 골골 앓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니체라는 철학자도 있었는데. 맹목적으로 아픔을 참는 그런 서투름도 아니고, 그 아픔을 잊으려 하는 어리석음도 아닌, 병을 통해 건강해지는 니체의 지혜를 얻고 싶다. 고통을 즐거운 것으로 긍정할 수 있는 그 삶의 지혜를. 이제 니체의 삶과 생각을 이해했다면, 차라투스트라처럼 미래의 철학자가 된 니체를 만나러 가보자.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니체 철학의 이정표들, 즉 니체를 알고 싶은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국내 문헌들이 언급되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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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4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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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5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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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5 14: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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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우리는 어떻게 자기 삶과 육체의 새로운 사용법을 창안하는가? 『벌거벗음』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10편의 에세이로 구성된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일견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감벤 사유의 핵심인 잠재성과 무위는 각각의 단편들을 단단히 연결하고 있다. 이 글들은 아감벤 본인의 (혹은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작업에 대한 스스로의 재고, 연장, 혹은 주석으로 떠오를 것이다. 아감벤에게 주석이라는 것이 일종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와 글의 배열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은 결코 낯설지도 결여된 것도 아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예외상태’, ‘벌거벗은 삶’, ‘잠재성’과 같은 개념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의 사유는 철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종교학, 문학이론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감벤에게 역사란 불완전한 것이고 그렇기에 잠재성이다. 이 불완전한 잠재성, 우발성과 일시적 무상함의 공간이야 말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이다.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험을 박탈당한 오늘날의 인간은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인간은 쾌활하게 ‘아무 문제없어.’라거나 무책임하게 ‘나는 할 수 있어.’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정확히 인간은 그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전례 없는 힘과 흐름에 휘말려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그의 비능력, 그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가 할 수 없는 것이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본문 중에서)

 

 

 

 

 

차례

 

1장 창조와 구원

2장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3장 K

4장 유령에 둘러싸인 삶의 의의와 불편함에 대해

5장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6장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7장 벌거벗음

8장 영광스러운 몸

9장 황소의 굶주림 : 안식일, 축제일, 무위에 대한 고찰

10장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

역자 후기

영어판 주석

 

 

 

 

 

http://cafe.naver.com/darlgung

 

독서모임 카페 달의 궁전에서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음』 서평이벤트를 하고 있다. 의외로 신청자가 적다. 요즘 주목받는 사상가라서 신청자가 많을 줄 알았다. 현재 달의 궁전 회원 두 분만 신청했다. 총 5명에게 도서를 제공하고, 책을 받고 나서 10일 이내에 달의 궁전 카페와 온라인 서점, 개인 블로그 등에 서평을 작성해서 올리면 된다. 조르조 아감벤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신청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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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반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돌려보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 한 명이 재미있는 만화책을 가져오면 너나 할 것이 서로 보고 싶다고 조른다. 가장 먼저 만화책을 보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뇌물(?)로 과자를 슬쩍 건넨다. 심지어 만화책 한 권 때문에 친구 간의 우정이 파탄 날 때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 자신이 먼저 만화책을 봐야 한다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만화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괴담,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특히 ‘공포특급’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공포를 주제로 한 책이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초중반 무렵이다. 이런 책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서운 이야기 한두 가지 모르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이때 ‘빨간 마스크’ 괴담이 유행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괴담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옛날에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가 공동무덤이었다는 썰부터 시작해서 놀이터에 새벽이 되면 죽은 아이의 귀신이 떠돌아다닌다는 썰까지 근거 없는 괴담을 벌벌 떨면서 들었다.

 

 

 

 

 

 

이틀 전, 헌책방에서 추억의 책을 발견했다. 1992년에 나온 『세계의 요괴도감』(편집부 엮음, 사과나무)이라는 책이다. 이 책도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다. 귀신 이야기에 귀신이 그려진 그림까지 있는 책이었으니 누구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친구가 가져온 『세계의 요괴도감』을 읽었던 기억은 나지만, 끝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고작 십 쪽 읽었을 뿐인데 읽는 순서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자꾸 빨리 읽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떤 녀석이 수업시간에 이 책을 몰래 읽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 녀석 때문에 책은 압수되었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친구들은 그 녀석을 원망했다. 그 친구 다음에 읽는 친구는 실망이 클 수밖에. 이 책을 수업시간에 몰래 읽으면 나름 긴장감이 높아진다. 그만큼 귀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쉬는 시간에 읽으면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요괴도감』은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종이를 가로로 넘기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귀신과 괴물이 그려진 삽화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의 귀신과 괴물을 소개하고 있다. 삽화가 엉성하지만, 흑백의 조화가 나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처음 몇 장 정도는 천연색 삽화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흑백 삽화로 구성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삽화에 흰색보다는 검은색을 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이런 삽화가 무섭게 느껴졌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봐서 그런지 눈을 침침하게 만드는 삽화 인쇄가 불편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책에 대한 호기심과 무서운 느낌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친숙한 괴물도 있기 때문이다.

 

 

 

 

 

 

 

헨리 퓌슬리  「악몽」  1781년

 

잠자는 여자들의 꿈속에 나타나는 악마 인큐버스(Incubus)를 그린 삽화다. 책은 ‘잉크부스’라고 표기했다. 영문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원래 인큐버스라는 이름에는 ‘위에 올라타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인큐버스를 잠자는 여자의 가슴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요괴도감』의 삽화가는 잉쿠버스, 아니 인큐버스는 눈 뜬 여자를 공격하는 악마로 그렸다. 여자의 뱃살을 살짝 꼬집는 인큐버스의 자세가 재미있다.

 

 

 

 

 

 

 

 

 

 

 

 

 

 

 

 

『요괴도감』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각종 요괴 이야기를 모은 책을 참고해서 엮은 책이다. 특히 미츠키 시게루의 <세계 요괴 사전>(1985년, 일본 동경당)을 많이 참고했다. 미츠키 시게루는 요괴만화를 그린 거장으로 평가받는 만화가이다. 예전에 투니버스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요괴인간 타요마’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원제는 ‘게게게의 기타로’) 요괴 전문가라고 불릴 정도로 요괴도감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요괴도감』은 원본을 발췌한 내용일 것이다. 지금도 그의 고향에 가면 만화에 나오는 요괴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 ‘미츠키 시게루 로드’와 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예이츠가 쓴 <켈트 환상 이야기 모음>이라는 책도 참고했는데 『켈트의 여명』(펭귄클래식코리아, 2005년)으로 번역되었다. 예이츠는 192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이다. 그도 켈트족 전설과 신화와 환상적인 민담을 복원할 정도로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예이츠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주석집을 내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신비적 경향을 주제로 시와 그림을 남긴 낭만주의의 선구자다.

 

 

 

 

 

 

이 책의 인쇄 정보를 보면 펴낸이가 '김충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충원 미술교실’을 세울 정도로 드로잉의 재미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한 그 김충원 교수이다. 1990년대 초반에 김 교수는 출판사 ‘사과나무’를 운영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이 있는 아동도서도 아이들이 즐겨 읽었다. 특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시리즈와 ‘IQ 게임 만화퀴즈’ 시리즈를 좋아했다. 이 책들을 펴낸 진선출판사는 현재까지도 김 교수의 드로잉북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공포 이야기를 모은 책이나 만화를 즐겨 읽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책들이 지금도 나오더라도 잘 안 읽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무서운 이야기나 괴담을 접할 수 있으니까.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냥 글자가 적힌 무서운 이야기를 읽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 때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 공포의 여운이 남아 있다. 자꾸 그 무서운 이야기가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인간에게 주는 위력이다. 공포 이야기 모음집은 괴기하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그런데 요즘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요괴들의 세상이 아닌 요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의 세상이다. 흉측하고도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요괴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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