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사생활 - 관계, 기억, 그리고 나를 만드는 시간
데이비드 랜들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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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군. 사람이란 잘 만큼 자야 해.”
(카프카  「변신」 중에서 / 『카프카 단편전집』, 110쪽, 솔출판사)

 

 

 

어느 날 아침. 그레고리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왜 벌레로 변했는지, 그 변신의 이유도 과정도 모른다. 아무도 그를 원래대로 돌아오도록 만들려 노력하지 않는다. 벌레로 변한 주인공도 그의 가족도 현실을 외면하고 숨기기에만 급급할 뿐이다. 결국, 잠자는 세상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결국 벌레가 된 상태로 죽음을 맞는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이 생각난다. 잠자가 벌레가 되어 벌레로 죽는 과정을 ‘인셉션’의 주요 콘셉트와 연관 지어서 (약간 억지가 있지만, 내 맘대로) 색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소설에서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벌레로 변한 사실을 안다. 잠자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악몽일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잠자가 겪게 될 진짜 악몽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첫 번째 꿈이 지나가고, 잠자는 벌레가 되어버린 두 번째 꿈이 이어진다. ‘인셉션’에서 코브와 아서는 타인의 꿈을 침투하여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역할을 시도한다. 「변신」에서 코브와 아서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잠자의 가족들이다. 외판사원인 잠자는 황급히 일하러 나갈 채비를 해야 하지만 기괴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한다. 식구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잠자가 걱정되어 방문 앞에 문을 두드려 확인해보지만, 오히려 잠자의 불안감을 더욱 커지게 한다. 가족과 직장을 위해서 일만 하던 잠자는 처음으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잠자를 방 안에 갇혀 고립시키는 것이 잠자 가족의 목표이다. 잠자는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기이한 악몽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가족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족은 흉측한 벌레가 된 잠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현실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해왔던 잠자는 꿈에서도 가족을 위해 죽음을 맞기로 선택한다. 죽음만이 악몽에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족의 의도대로 잠자의 악몽은 끝이 난다. 잠자가 죽고 나서야 가족은 예전처럼 평온한 생활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내용처럼 누군가가 내 꿈속으로 들어가 치명적인 방해를 시도한다면 꿈을 꾸는 사람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정신분열에 걸려 고통 속에 죽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 잠을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다. 잠을 자기 전에 늘 확인하는 스마트폰에 도시를 빛나게 하는 환한 인공조명 등이 편안한 수명을 방해하는 주범이다. 미국 인구 100명 중 99명은 광공해 기준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인공조명의 불빛도 엄연히 말하면 생태계와 건강을 파괴하는 공해를 일으킨다.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생태가 이어지면 신체는 우리에게 건강의 적신호를 알린다. 면역이 떨어지고, 환각과 환청을 경험한다. 뇌는 마치 술에 취한 상태가 되어 기억력과 판단력이 떨어진다.

 

잠을 방해하는 것은 또 있다. 스마트폰 못지않게 항상 당신 옆에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 곁에서 사랑스럽게 자는 배우자이다. 한때 몇몇 수면 연구가들은 부부가 침대를 따로 써야 충분히 수면을 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달콤한 신혼으로 깨소금이 쏟아지는 새내기 부부나 여전히 닭살 금슬을 자랑하는 잉꼬부부라면 잠잘 때 침대를 따로 써야 하는 상황이 마뜩잖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남편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아내라면 이런 주장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남편과 아내가 한 침대에서 자면, 남편보다 아내가 불면증으로 고생할 가능성이 높다. 남성은 혼자 자는 것보다 배우자와 함께 자는 것을 선호하며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느낀다. 본인의 코골이나 이갈이가 심해도 배우자는 참는다. 그런데 남편의 잠버릇이 고약하면 아내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 이래서 부부는 백년해로하기가 쉽지 않다. 남편 혹은 아내 둘 중 한 사람의 잠버릇이 심하면 분명 한 쪽은 불면증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경과가 심해지면 건강도 나빠진다.

 

잠의 매커니즘은 신기하다. 수면 박탈로 인해 정신이 완전히 나간 좀비가 되어도 두세 시간만 자면 다시 원 상태로 회복된다. 건강을 위한 충분한 수면 시간을 규정하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지만, 놀랍게도 인류는 잠을 두 시기로 나뉘어서 잤다. 유럽 중세 시대 사람들은 해가 완전히 저문 이른 시간에 잠을 자면, 자정에 깨어난다. 충분한 수면으로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잠을 두 번 나누어서 자려고 일부러 일어났다. 자정부터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다. 사실 개인적인 시간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성(性)스러운 운동을 많이 했다. 어쨌든, 한 시간만 깨어 있다가 다시 잠을 청한다. 이것이 두 번째 잠이다. 시대가 변해 생활 방식도 달라지자 두 번째 잠은 사라져버렸다. 간혹 일찍 자다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비정상적인 수면으로 간주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당신의 몸이 오랫동안 잊힌 과거의 수면 방식을 기억하고 있다는 신체적 증거이다.

 

이처럼 24시간 절반을 자면서도 정작 우리가 왜 잠을 자는지 그리고 꿈을 꾸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몰라도 된다. 사실 수면을 연구한다는 과학자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이것만은 알아두는 것이 좋다. 잠은 꼭 자야 한다는 사실. 우리가 잠에 대해서 너무 모르다보니,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게 만드는 가장 편하고 소중한 시간을 소홀하게 여긴다. 잠잘 수 있을 때 자는 것이 최고다. 밤에 우리를 찾아오는 잠의 신(Hypnos)을 자주 쫓아내면, 신이 분노해서 자신과 똑닮은 죽음의 신(Thanatos)을 데려올 수 있다. 건강엔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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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5-01-12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분한 잠 정말 중요한데 요즘 아이들 불쌍해요. 학교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 물어보면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는지 뭘하는지 하여튼 집에 가면 11시래요. 그러면 아이들은 게임도 하고 스마트폰도 하고 해야하거든요. 그러니 점점 자는 시간은 줄어들고....
부모들한테 제발 애들을 좀 재우라고, 당신은 하루 5-6시간 자고 다음날 제대로 일할 수 있냐고 해도 별 소용이 없네요. ㅠ.ㅠ

cyrus 2015-01-13 18:59   좋아요 0 | URL
잠을 적게 자는 습관이 많아지면 몸도 적응됩니다. 그렇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원인이 될 수도 있어요. 저는 학생들에게 낮잠 시간을 부여하는 제도 도입에 찬성하는 편인데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필적학이 범죄학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둑질을 하기 전에 도둑을 체포할 수 있게 됩니다. 필적만으로 그가 물건을 슬쩍하는 이차 특질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그대로 유치장행인 거죠. 정말 환상적인 미래 아닙니까? 말씀드린 대로 이건 입증된 과학입니다.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카렐 차페크  「필적 미스터리」 중에서,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74~75쪽)

 

 

카렐 차페크의 소설 「필적 미스터리」에 나오는 필적학은 글씨체만으로 상대방이 도둑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허무맹랑한 가짜 학문이다. 범죄는 좋건 싫건 인간 활동의 한 부분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범죄는 반드시 있다. 그런 만큼 범죄가 왜 저질러지는지를 학문적인 연구가 시도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초창기에 등장한 범죄이론은 유전적 요인에 의한 선천적인 범죄자, 이른바 ‘범죄형’은 하나의 정설로 믿었다.

 

 

 

 

 

 

 

 

 

 

 

 

 

 

 

 

 

롬브로소는 수많은 범죄자를 조사한 뒤 선천적인 범죄자의 얼굴을 가려내 발표했다. 그는 범죄자의 얼굴에서 원숭이의 특징을 찾으려 했고,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이 선천적인 범죄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원숭이의 특성은 큰 턱이나 튀어나온 광대뼈, 벌어진 엄지발가락과 같은 외모뿐 아니라 지독한 게으름이나 무책임성과 같은 성격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롬브로소의 범죄인류학은 당시 과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범죄 행위가 생물학적 특성에서 비롯된다는 롬브로소의 주장은 편견이 가득한 위험한 이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도 막연히 범죄형 얼굴이 존재한다고 믿는 편견이 남아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범죄자들의 외모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롬브로소의 기괴한 논리는 여전히 통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편견과 권력을 만나 배제와 억압의 명분과 학문적 근거를 제공했다. 특히 편견과 권력이라는 나쁜 친구를 잘못 만나 고생한 과학자가 다윈이다. 처음부터 다윈은 이들과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 문제의 원인은 다윈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있다.

 

다윈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개념이 '적자생존'일 것이다. 강한 생물일수록 환경에 오래 살아남고, 반면 약한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다윈 진화론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설명으로 꼭 '적자생존'의 사례를 언급하거나 '적자생존' 이론을 다윈이 창안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거나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은 진짜 진화론이 아니다. 가짜 진화론이다. '적자생존=진화론'이라는 인식은 다윈과 전혀 상관이 없고, 진화론을 위험한 학문으로 치부하게 하는 치명적인 착각이다. 

 

 

 

 

 

 

 

 

 

 

 

 

 

 

 

 

'적자생존'은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만들었다. 펜서는 진화의 생존경쟁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이 소멸하는 것이 자연법칙의 순리라고 강조했다. 원래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변이를 거치는 과정을 '자연선택'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다윈과 함께 진화의 비밀을 발견한 앨프레드 월리스는 다윈에게 '자연선택' 대신에 '적자생존'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86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 5판에 처음으로 '적자생존'이 언급되었다.

 

다윈과 '적자생존'의 잘못된 만남은 훗날 제국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원흉이 되었다. 가만히 있었던 다윈은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고, 진화론은 자신이 생각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달라지고 말았다. 다윈의 고종사촌 프랜시스 골턴은 우수한 유전소질을 가진 인구를 늘리고 열악한 유전소질을 가진 인구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우생학을 만들었다. 다윈의 아들 레너드 다윈은 1911년부터 1925년까지 영국 우생학협회 회장을 맡았다. 히틀러의 인종 대청소도 우생학의 뒤틀린 결과다.

 

 

 

 

 

 

 

 

 

 

 

 

 

 

 

 

제국주의를 옹호한 사회진화론이나 인종주의를 정당화한 우생학은 피식민지에 가하는 사상적 폭력이다. 그들에게 굴복당한 피식민지 지식인들은 국력을 길러서 강해야만 살아남는 것이 자신들이 원하는 진보라고 믿었다. 제국주의 세계 질서를 지탱해준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비판 없이 이식받기 시작했다.

 

중국인 최초로 영국을 유학한 사상가 옌푸(엄복, 嚴腹)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정리한 《천연론》(소명출판, 2008)을 썼다. 원래 옌푸는 스펜서의 책을 번역하려고 했으나 방대하면서도 심오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천연론》 집필에 참고한 책이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산지니, 2012)였다. 그런데 다윈 진화론마저 몰랐던 옌푸는 헉슬리의 문장을 자의적으로 편집하고 삭제했다. 중국에 소개된 헉슬리의 생각은 엉뚱하게도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지식인들은 옌푸가 소개한 사회진화론을 다윈 진화론과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생물 시간에 아이들은 진화를 강한 생물이 살아남는 자연의 원리라고 배우고 있을 것이다. 잔인한 자연의 원리를 비정한 사회를 정당하기 위해서 적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과학은 학문으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덧칠된 과학주의다. 다윈을 믿고 따르던 동료 과학자들은 다윈의 위대한 생각을 널리 알리려는 열정이 너무 지나쳤다. 다윈이 생각했던 이론을 자신의 입맛대로 엉뚱한 방향으로 편집, 왜곡해버렸다.  《종의 기원을 읽다》(유유, 2013)를 쓴 양자오는 다윈의 진화론이 다윈주의로 변하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윈이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A이고, A를 증명하는 과정을 a라고 한다면, a에서 새로운 B를 도출한 사람이 다윈주의자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B는 과학으로 볼 수 없는 다윈주의다.

 

 

 

 

 

아직 다윈주의는 죽지 않았다. 다윈을 나쁜 학자로 만들어 놓은 짝퉁 진화론으로 인해 유전자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선량한 사람을 사회적 약자 혹은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어설픈 논리가 되기도 한다.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에 관상으로 종북주의자를 구별하려는 한 편의 코미디가 연출되기도 한다. 롬브로소가 무척 좋아하겠다. 과학주의와 관상의 조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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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2015-01-1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티브이보면 어이없고 위험한 방송이던데 관상으로 자기들 맘에 안드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았나봐요
너무나 어이없네요

cyrus 2015-01-12 11:58   좋아요 0 | URL
김씨 `돼지`의 관상까지 본 적도 있어요. (북)조선 TV인 줄 알았어요.

해피북 2015-01-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섬뜩한 이야기예요 요즘은 개인의 논리로 세상을 판단해버리고 무서운 사건 사고가 생겨나고 말이죠ㅠㅠ아 그런데 유유 출판사 종의기원 읽어보셨나요? 양자오 저자가 좋아져서 읽어보려고 서점갔더니 책이 없더라구요-,.-

cyrus 2015-01-12 19:23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제가 가는 도서관에도 양자오의 책이 없어요.. ^^;; 양자오의 <종의 기원을 읽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쉽게 해설한 책이에요. 읽어보면 좋아요.
 

 

 

 

 

 

 

 

페이스북에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식 사진과 팔 할은 허세로 이루어진 글을 볼 수 있고, 눈이 민망해지는 자극적인 사진이 공유된다. 그래도 페이스북은 무익한 내용만 가득하고 시간만 낭비하게 하는 소셜 네트워크는 아니다. 그 속에서도 유익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모임이 있다. 좋은 책을 서평으로 소개하고, 정기적으로 독서 토론 모임을 하는 그룹도 있다. 내가 가입된 독서 관련 모임 중에 ‘독사모’라는 비공개 그룹이다. ‘독하게 독서하는 모임’의 준말이다. 여기 독서 모임에 단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다. 거기에다가 독사모 회원들의 서평이나 독서 모임 소식들을 눈으로만 확인하는 유령 회원이다.

 

지난 주 금요일 밤에 독사모 그룹에 이런 글이 올려졌다. 잠깐! 글쓴이의 가명을 뭐로 하지? 그래, ‘그 녀석’이라고 하자. 절대로 글쓴이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 가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냥 생각하는 단어가 ‘그 녀석’뿐이다. 요즘 ‘무한도전’에서 출연하지 않는 ‘그 사람’을 의미하는 가장 핫한 별명 아닌가.

 

그 녀석은 독사모 모임이 이름만큼 전혀 독하지 않다면서 처음부터 도발적으로 글을 시작했다. 자신은 독사모에 한 달에 책 100권을 읽는(!) 회원이 있고, 좋은 책 추천과 서평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독사모의 정체가 뭐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 녀석이 원하는 독하게 독서하는 모습은 이런 것이다. 자신이 읽은 책의 서평을 남기고, 독자 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읽고 독서 토론을 하는 것. 결국, 그 녀석은 독사모 자체가 뜬구름 잡는 모임이라고 자체 평가했다.

 

그러자 또 다른 독사모 회원 한 분이 이런 댓글을 남겼다. 그 녀석 당신이 원하는 좋은 책이 무엇이며 도대체 ‘controversial'한 책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나는 페이스북 그룹 안에 회원들끼리 댓글 논쟁을 주고받는 상황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분명히 이 문제의 글 하나가 불타는 금요일 겨울밤에 어울리는 화끈한 댓글 전쟁터로 변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어떤 답글을 남기는지 지켜봤다. 그런데 그 녀석은 답글을 남기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독사모를 은근히 까는 듯한 글을 남긴 채 스스로 그룹을 탈퇴한 것이다. 확실한 건 그 녀석은 독사모의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룹을 탈퇴했다. 그 녀석이 답글을 달면 나도 이 댓글 전쟁터에 참전하고 싶었는데 아무 일 없이 독사모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사실 나도 그 녀석이 생각하는 독하게 독서하는 기준이 무척 궁금했다. 특히 한 달에 책 100권 읽기에 관해서 묻고 싶었다. 그 녀석은 자신이 한 달 네이버 전자북 결제 이력이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한 달에 무려 1000권 정도의 전자북을 결제한다고 언급했다. 나는 그 녀석이 전자북을 결제한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그걸 다 읽기는 했었을까. 그리고 이왕이면 전자북 결제 이력을 공개하려면 책 제목도 화끈하게 보여줘야 했다. 그 녀석이 그토록 선호하는 ‘controversial'한 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북 가격이 100원, 900원인 걸로 봐서는 그 녀석이 결제한 전자북이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네이버 북스 앱스토어에서 100원, 900원으로 결제할 수 있는 분야는 장르소설이다. 전자북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무협 소설의 대여 가격 또는 구매 가격이 100원부터 300원까지 있다. 아니면 웹툰을 결제했는데 일부러 책을 샀다는 식으로 거짓말 했을 수도 있다.

 

그 녀석이 장르소설을 독하게 읽는 것을 잘못 읽었다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너무 장르소설에만 치중해서 읽는 편식 독서는 문제가 있지만, 그 녀석 본인이 이런 독서 자체를 즐기고 만족하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무턱대고 무시하거나 비난해선 안 된다. 본인이 어떤 분야든지 간에 독서 자체를 좋아하고 있다면 간섭하고 싶지 않다. 괜히 이런 책만 골라 읽느냐고 핀잔을 주면 상대는 그저 허세 덩어리가 잔뜩 낀 잔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그런데 내가 그 녀석에게 정말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 달에 책 100권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걸 자부심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전자북 결제 이력을 친절하게 인증샷으로 첨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인증샷을 올려봤자 그 녀석이 한 달에 책 100권을 읽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다. 일 년에 책 100권을 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한 달에 100권을 읽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근자감’, 즉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독서 토론을 위한 책이 꼭 양 극단의 평가가 엇갈리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독서 토론은 책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해하는 것이다. 책에 대한 상대의 의견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해서 반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내 생각과 다르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너그럽게 받아들여도 될 일을 ‘내 생각과 다르니까 너는 틀렸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라는 전투적인 마음으로 독서 토론을 하고 싶다면 정치나 사회 관련 토론 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낫다. 그곳에서도 독서 토론을 할 수 있다. 다만 마음 단디해야 한다. 전투력과 방어력을 상승시켜 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즐비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 녀석은 독서 토론에 직접 한 번도 참석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독서 모임에 가본 적이 있더라도 저런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은 상대 입장에서는 무척 피곤하다.

 

마지막으로 책 한 권 읽고 난 뒤에 서평을 써야만 완벽한 독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선적인 생각이다. 한 달에 책 100권 읽고, 그 100권에 관한 서평을 썼다는 사실을 인증하는 사진을 올렸다고 해서 그것이 독하게 책 읽는 훌륭한 자세일까. 하루에 소셜 네트워크나 여기 알라딘을 포함한 온라인 서점에 수많은 서평이 등재된다. 공개된 상태에서 작성된 엄청난 수의 서평들 중에 분명 누군가는 타인이 쓴 서평 한 편을 읽는다, 자신이 예전에 읽었던 책 서평이라면 상대방의 평가가 궁금해서 읽을 수 있고, 언젠가 읽어보고 싶은 책 서평을 발견하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어서 읽을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타인의 서평을 읽는다. 다만 서평이 모든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타인이 내 서평을 읽는 것이 원하지 않는다면 비공개로 설정해도 된다. 또 서평을 작성할 시간이 부족하면 안 써도 되고, 그냥 서평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으면 안 써도 그만이다. 올바른 독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서평 쓰기가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선택이다. 앞에서도 내가 강조했지만, 책 읽는 행위 자체를 본인이 즐겁게 느끼고 있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를 하고 있다는 마음의 증거이다. 독서 후 서평 작성에만 신경을 쓰이면 오히려 독서의 재미를 반감할 수 있다. 특히 한창 책을 읽어야 할 청소년들이 그렇다. ‘독서+서평=올바른 독서’라는 단순한 인식을 책 안 읽는 아이들에게 알려준다면,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독서+서평=지루한 독서’라는 의도치 않은 답으로 유도할 수 있다.

 

나는 그 녀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페이스북 계정을 확인했다. 자신이 페이스북에 직접 올린 몇 편의 추리소설 서평을 봐서는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혼자서 여러 권 책을 즐겨 읽다 보니 남들과 함께 책 한 권을 깊이 있는 소중한 시간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스스로 '고독한 애서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혼자 독서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책 한 권을 읽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 독서하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 조용히 책 읽는 것도 좋지만, 되도록 광장에 나가서 여러 사람과 책을 읽는다면 책 속에 있는 지식만 얻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인연도 만날 수 있다.

 

그 녀석이 남긴 글 덕분에 지금까지 내 독서를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책 속에 지식만 찾으려다가 그만 거기에 갇혀버려 빠져나올 수 없는 위험한 독서를 경계할 것. 고정 관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책 밖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 어리석은 맹인이 된다. 독서 맹인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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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1-1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그러더군. 페이스북은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실패했다고.
나도 페이스북 계정이 있긴 한데 거긴 정말 왠지 도배글 올리는 곳이란
느낌이 있어.
얼마 전 북스토리지란 걸 선물 받았는데 이렇게 쓰라고
매뉴얼이 있긴 하더만 습관이 안 되서 그런지 아직도 좀 어색하고
읽기도 바쁜데 언제 이걸 정리하고 앉았나 싶기도 하더군.
그나마 리뷰 쓰는 거 하나 겨우 몸에 베었는데 말야.
뭔가 기록을 남기길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좋을 것 같긴 해.
영화나 책이나 한 가지의 작품 가지고 이렇게 생각과 의견이 다른 것에
놀라곤 하는데 그런 독서모임 꾸준히 나간다는 게
보통 독한 마음이 아니면 그도 쉽지 않더군.
그냥 마음에 맞는 서너명과 술을 벗삼아 한나절 책과 세상을
논할 수 있는 모임이면 좋겠는데 말야.ㅋㅋ

cyrus 2015-01-11 20:31   좋아요 0 | URL
도배글을 쉽게 올릴 수 있는 곳이 페이스북 그룹이죠. 왜냐하면 그룹에 글 하나 올리면 그룹에 가입된 회원들에게 글 등록 알림이 가거든요.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쉬워요. 저도 독서 모임 하나 정도 참석하는 게 적당하다고 봐요. 모임 시간이 겹칠 일도 없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정작 인연은 오래 가는 게 없더라고요. 독서모임 끝나고 뒷풀이가 제일 좋아요. 독서모임의 진짜 우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1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수일 때 한달에 책 100권 읽은 적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획을 하고 실천한 것이기에 일부러 얇은 책만 읽게 되고 거의 발췌독으로 진행이 되더군요. 그래야 가까스로 100권 읽을 수 있더군요. 그런데 그런 책 읽기는 그냥 정독으로 느리게 1권 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독한 모임에서의 독`은 아마도 깊이 있게 읽기에 대한 기준이지 넓게 읽기에 대한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서는 아무래도 넓게 파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깊게 파기 위한 독서 행위가 더 값지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넓게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삽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5-01-11 20: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예전에 책 권수 목표를 설정해서 책을 읽어봤는데 예전에 읽었던 책 위주로 읽게 되는 꼼수(?)를 쓰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얇은 분량의 책만 고르게 되고요... ㅎㅎㅎ 깊게 파기 위한 독서에 제대로 몰입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년에 50권 이상은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일 년에 50권 읽기도 꽤 많은 횟수라고 생각해요. 목표 권수에만 신경 쓰다보면 독서의 즐거움이 사라질 겁니다.

해피북 2015-01-12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 그녀석분 마음에 공감가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어느 온라인 북카페에 가보면 책 리뷰 코너엔 사람들이 큰 관심을 안갖더라구요 자유토론방에 일상이야기가 주요하구요 그래서 저두 실망했던 기억이 ㅎ 그렇다구 그녀석분 말씀에 다 공감하는건 아닙니다 북플이 생긴 뒤론 책이야기 나누고 공유할수 있게되서 참 좋아하고 있어요 덕분에 멋진 이웃님들 글 동냥하며 배우고 생각하고 있답니다ㅋㅡㅋ,,

cyrus 2015-01-12 19:29   좋아요 0 | URL
페북에도 서평을 올려서 공개하는 분 계세요. 오래전부터 인터넷 서점 블로거로 활동하고, 출판사 관계자들 사이에서 알려진 분이에요. 그래도 저는 페북보다 북플이 더 좋아요. 접속하면 온통 책 이야기뿐이니까요. ^^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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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TV로 즐겨 봤던 추억의 프로그램 중에 '경찰청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오프닝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형사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국어책 읽듯 어색한 멘트를 날리거나 구수한 사투리로 사건의 상황을 이야기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가 좀 더 리얼한 상황 재연을 위해 본인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사건 사고를 재구성하여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범죄 예방 효과를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단지 이런 의도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경찰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안방에서 지켜보면서 끝내 경찰에 의해 잡히고 마는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가 승리한 듯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경찰청 사람들'을 즐겨 본 세대라면 이때 장래희망을 경찰이라고 정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기서 그들이 말하던 경찰은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이 아닌 강력계 형사였다. 아이의 눈에는 범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형사의 모습이 무척 멋있으니까. 또래보다 힘 좀 쓰고 체력 좋은 친구들은 강력계 형사가 되고 싶어 했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체력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나도 '경찰청 사람들'을 보면서 강력계 형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는 형사들은 영화나 TV 속 잘생긴 형사와는 딴판이다. 우리는 범인을 체포하는 형사의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그건 TV 속 형사의 모습이다. 실제 형사는 그 범인 한 명을 쫓기 위해 거듭된 야근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탐문 수사를 한다. 이런 강행군 탓에 피로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되고, 쏟아지는 사건 때문에 밀려드는 짜증이 늘어난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범인들을 다루다 성격이 거칠어진다.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많은 직업이다. 형사가 경찰보다 업무 강도가 상당히 높다. 이렇다 보니 신입 경찰들이 형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긴다.

 

찡그린 미간에선 범죄자들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과 정의감을 읽을 수 있고, 흉악범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장면에선 뛰어난 신체능력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추리로 범죄의 전모를 밝혀내는 장면에선 지성미까지 느껴지는 잘 생긴 형사. 이런 형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말끔히 잊으시라.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 나오는 경찰들이야말로 경찰서에 만날 수 있는 진짜 경찰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 속 명구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것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장르를 따지면 추리가 맞다.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설정은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오는 형사와 탐정 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냥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거나 수사법과 추리력이 아닌 순전히 운으로 간신히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단편 「발자국」은 똑똑한 탐정과 형사 이미지의 환상을 깨뜨린다. 바르토세크 형사 반장은 눈 위에 달랑 몇 발자국만 남겨진 발자국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반장은 누군가가 일으킨 장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것을 형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르토세크 반장은 발자국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사람에게 자신이 형사라고 해서 미스터리한 현상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형사라는 직업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은 고약한 일을 맡는다.

 

"법과 질서는 손톱만큼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온갖 고약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발자국」 중에서, 21쪽)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과 애환에 공감할 것이다. 메이즈리크 형사는 금고털이범을 체포한 이후로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여러 가지 사건을 맡게 된다. 경찰과 언론은 메이즈리크 형사가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 사건을 해결했다고 떠들어댄다. 정작 형사 본인은 우연을 계기로 해결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해결하는 완벽한 만능형사 혹은 명탐정으로 인정받는다면 명예와 존경이 따라오겠지만, 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종 사건이 형사를 따라온다. 형사는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형사는 명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거부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방법론이 필요하죠. 저도 이번 사건 이전에는 온갖 방법론들을 믿었습니다. 신중한 관찰이나 전문 지식, 체계적인 조사 혹은 이와 유사한 ... 그러나 사실은 엉터리에 불과한 것들 말이죠. 저는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생각이 백팔십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이즈리크가 숨을 내쉬듯 불쑥 말했다. "모든 것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 중에서, 29~30쪽)

 

이처럼 차페크가 묘사하는 경찰과 탐정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용감한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건을 해결했어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이들은 숨겨지고 은폐된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홈즈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너무나 어설픈 엉터리 형사, 탐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차페크는 「실종된 편지」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제아무리 '가장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도 수사 기법과 추리력을 총동원해서 사라진 편지를 찾아보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들이 찾는 편지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조금 수상한 사람」의 경사는 사람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떠는 상대의 자세만 보고 수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신통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궁예의 미륵 관심법 뺨치는 수사 방법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형사 직함을 내밀면 부끄러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만 드러낸다.
 
미국의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임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작가는 미스터리를 푸는 게 아니라 깊게 만드는 것이라고. 차페크의 소설은 단지 미스터리를 푸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상황에 마주하는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깊이 내다본다. 그리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카페크의 형사는 우리처럼 평범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거나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약한 일을 맡고 해결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말을 우린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경찰청 사람들은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이야기에 있다. 이제 TV에서 보던 멋진 경찰청 사람들의 모습을 망각 주머니에 깊숙이 넣으시라. 더 이상 찾지 말라. 지금도 어디선가 추운 날씨 속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고약한 일을 해결하려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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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청 사람들을 보구 꿈을 키우신 세대시거나 토토가 를보고 들썩이셨다는걸보니 저와 비슷한 세대신거 같아요ㅋ 오늘 신문정리하다가 순직하신 분들 기사 봤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말씀처럼 우리 기억에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거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임무라는 말도 크게 공감합니다^^

cyrus 2015-01-12 19:31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된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고 기억하는 나름 젊은 세대입니다... ㅋㅋㅋ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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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보다.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평범하고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느낀다. 그것은 추억과 공감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태어난다. 흔히 그리움이란 두 손 두 발로 만져왔던 자신만의 추억들을 향하고 있기 마련이다. ‘토토가’가 우리에게 준 감동의 열기가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들려준 90년대 가수들의 목소리는 잊고 있었던 시절에 대한 환영들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시를 잘 읽지 않거나 시를 읽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짧은 시에서 우리가 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날 읽은 시 한 편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학창시절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국어 시간에 배운 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의 문장으로 새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안도현의 발견』(한겨레출판, 2014)의 부제가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다. 지나치게 길면서도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 시를 읽음으로써 단순한 대상을 새로 보게 된다. 시인은 단어를 조합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간결한 직물을 짜낸다.

 

11년 전에 나온,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 안도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는 사람과 사물 혹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나오는 대상은 대체로 우리가 소박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시인은 꽃, 나무, 새, 물고기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자연의 섭리나 기억되지 못하는 하찮은 사물에 세상사를 비유하여 직접 눈에 보이도록 만든다. 즉, 시인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삶의 방식, 즉 보조관념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루빈의 잔’이 생각난다. 눈과 마음이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와 욕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독자의 고정된 관습을 시인은 타파한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의 시야를 넓힌다.

 

이 시집은 언뜻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를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인물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이 바로 시인 백석이다. 안도현 시인은 작년에 『백석 평전』(다산북스, 2014)를 펴낼 정도로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흠모해왔다.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서 평소 백석을 사랑했던 시인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16쪽)

 


이 시집이 안도현 시인이 펴낸 이전 시집과 다르게 자아와 외부 대상(자연)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무척 농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의 전개가 가능한 이유를 백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백석 「북관」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104쪽)

 


시에서 북쪽 지역 방언과 고어를 사용했던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도현 시인은 여치 소리를 들으려고 무릎을 모은 뒤에 앉아 ‘끼밀고’ 있다. 여기서 ‘끼밀다’는 어떤 물건을 자세히 보고 느끼기 위해 얼굴 가까이 들이미는 자세를 뜻한다. 백석은 이미 자신의 시 ‘북관(北關)’에서 함경도 음식을 먹으면서 이 지역의 투박함을 자신 삶의 일부로 껴안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끼밀기를 통해 시인은 여진에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화려했던 신라의 향수를 맛보는 데 성공한다.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집 한 채, 어느 날 가보니 저 혼자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형편없이 납작해졌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러나 귀가 뭉개진 집은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을 내려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 집에 살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나 안 오나
 처마 끝으로 고독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집 없이 떠도는 옛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두 눈으로 바라볼 게 없도록
 도무지 그리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도록
 단 한 번에 기둥은 무릎을 접고 서까래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꺾고 봉창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주저앉은 집」, 68쪽)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략)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 「정주성」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84쪽)

 


「주저앉은 집」은 백석의 첫 작품 「정주성」의 분위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작품 다 더 이상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건물을 쓸쓸하게 묘사한다. 백석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경성을 벗어나 고향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북방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곳 또한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백석이 가보고 싶은 북방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고향이지만, 이제는 정착할 수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변했다. 시인이 본 ‘헐리다 남은 성문’은 근대화 바람에 풍화되어 무너져버린 전통사회이다. 「주저앉은 집」에서 무너져버린 폐가 상태에 감정을 이입하여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주인을 기다린다. 폐가가 기다리는 주인은 혹시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해 북방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백석이 아닐까. 그가 아니더라도 북방의 고향 전체를 마음속에 간직했던 백석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귀 본능을 지닌 도시인이 돌아오기를 폐가는 말없이 기다린다. 그가 돌아와야 어렴풋이 남아있는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대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드물다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중에서, 92쪽)

 

 

메마른 듯, 얼핏 죽은 듯 보이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로 숨결을 보낸다면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갈매나무는 삶의 고통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시인의 나무이다. 한편, 가족의 안부도 모른 채 저 북방 춥고 쓸쓸한 여관방에서 외로움에 떨었을 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유일한 희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외로운 가장의 차디찬 가슴 한켠에 자란 갈매나무에서 안도현 시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본다.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갈매나무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갈 마음을 다잡게 한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시큰거릴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순수한 사춘기 청년의 마음처럼. 이제는 남아있는 글만으로 만날 수 있는 시인에게 다가서고 싶고, 자꾸 잊혀가는 시간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일생을 복원했다. 참으로 대단한 문학적 사랑이다. 믿거나 말거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 1위가 노랫말에 사랑하는 상대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면서 ‘백석’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을 넣는 대신, ‘백석의 시’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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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도 ˝시를 만들었다˝도 너무 멋진 제목인데요!

cyrus 2015-01-10 22:10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시를 만들 줄 아는 시인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오후즈음 2015-01-0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이 감각적인 제목이라니

수이 2015-01-1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가 있어야 합니다. 얼른. :)

cyrus 2015-01-10 22:11   좋아요 0 | URL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맞아요. `너`가 있어야 하죠.. ㅠㅠ

해피북 2015-01-1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로스님 덕분에 안도현 저자 팬이 되어버릴것 같네요 ㅎㅎ 지난번에 안도현의 발견이란 책을 서점가에서 들춰봤는데 짧은 산문이 어찌나 재미나고 웃기던지, 마치 눈앞에 상황이 보여지고 상황상황에 위트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좋은 책이더군요 ㅎㅎ 전엔 다른 이웃님의 백석평전에 대한 리뷰글을 보며 안도현 저자의 마음도 느껴지고 그 책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엔 시집까지 소개해주셔서 마음이 바빠지네요 ㅋ

cyrus 2015-01-10 22:12   좋아요 0 | URL
조만간 `백석 평전`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요즘 안도현 시인 덕분에 다시 한 번 백석 시집을 읽게 되었어요. 정말 백석의 시는 다시 읽어도 새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