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지 116년이 지났다. 열사가 우리 현대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유 열사의 생애와 업적에 비해 연구가 너무 미진하다. 철저한 고증과 균형감 있는 평전 한 권조차 나오지 않았다. 4년 전에는 유 열사에 대한 내용이 빠진 고등학교 교과서 4종이 확인되어 논란이 일어난 적 있었다. 유 열사가 항일운동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친일파가 자신들의 과오를 무마하려고 의도적으로 부각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유 열사가 빠진 역사 교과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보수 언론 등은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이 논란을 빌미 삼아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지하는 진보 세력까지 비판했다. 그런데 국정교과서에도 유 열사에 관한 내용이 담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새누리당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유 열사가 없는 역사 교과서를 제작 · 배포하는 일은 열사에 대한 모욕이며 모든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친일 후손이 소속된 새누리당이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하니까 어색하다. 그들의 생색내기는 결국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 전영택 《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5년에 최초의 유관순 전기로 알려진 전영택《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이 복간되었다. 전영택은 교과서에도 실린 단편소설 『화수분』의 작가이다. 전기를 복간한 출판사명인 ‘늘봄’은 전영택의 호(號)다. 유관순 전기는 1948년에 출간되었다. ‘복간본 출간 열풍’이 있었던 시기에 나온 책이라서 초판 원문의 옛말을 그대로 살렸다. 이 책의 장르를 정확히 구분하자면 《순국처녀 유관순전》은 ‘완전한 전기’라기보다는 ‘간략하게 적은 소전(小傳)’에 가깝다. 전영택은 초판 서문에서 이 책을 ‘소전’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전기는 매우 얇은 소책자라서 분량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전영택은 유관순을 ‘한국의 잔 다르크’로 표현했다. 그는 유관순 열사를 가르친 이화학당(이화여대의 전신) 교사 박인덕의 진술을 토대로 전기를 작성했지만, ‘소설가가 쓴 전기’이다 보니 과장되고 허구적인 묘사가 곳곳에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박인덕과 전영택은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관순은 친일파들이 의도적으로 알린 과장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의 해설은 홍찬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이 썼다. 홍 위원은 친일 인사가 유관순을 발굴했다는 주장 자체가 ‘전체적인 진실’이 아닐 뿐더러 그런 측면이 일부 있었다고 해도 전영택 작가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아 유관순 열사의 업적이 교과서에 누락 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영택 작가의 친일 경력을 교묘히 은폐하는 그의 논변이 거슬리지만, 이보다 더 불편한 사실은 그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이다. 동아일보 창업자 인촌 김성수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의 두 번째 아내 이아주는 3 · 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다.

 

유관순 열사 역사 교과서 논란은 교육부가 기록이 빠진 고등학교 교과서 4종에 2015학년부터 유 열사에 대한 내용을 다시 싣기로 해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유 열사에 대한 대접이 여전히 형편없다. 삼일절이 가까워지면 <삼일절 노래>와 함께 <유관순 노래>가 불린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유관순 노래’ 1절)

 

 

노랫말을 만든 사람은 아동 문학가 강소천이다. 1915년에 태어난 강소천은 1902년에 태어난 유 열사를 ‘누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백 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는 유 열사를 ‘누나’로만 기억하고 있다. <유관순 노래>는 동요다. <유관순 노래>를 접하는 어린이들은 ‘누나’라는 호칭으로 알려진 유 열사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 열사를 ‘누나’로 호명하는 노랫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다 큰 어른들이 여전히 유관순을 ‘애국심 많은 누나’로 기억하고 있는 점이다. 어린 시절 때 들은 <유관순 노래>의 노랫말 속 ‘누나’가 지워지지 않은 기억에 콕 박힌 탓일까. 유관순을 누나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젊은 나이에 순국한 이봉창 열사(유 열사보다 일 년 먼저 태어났다)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은 걸까. 만약 이봉창 열사를 ‘형’이라고 부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선조를 모욕하는 무례한 호칭이라면서 역정을 낼 것이다. 그렇다면 백 년 전에 태어나 독립운동에 뛰어든 선조인 유 열사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무례한 일 아닌가?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 최기숙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문학동네, 2010)

* [절판] 김종대 《한국의 학교괴담 : 한국의 학교괴담에 대한 민속학적 탐구》 (다른세상, 2002)

 

 

 

 

정희진은 유 열사가 ‘누나’라고 불리게 된 배경을 ‘가부장제 중심의 민족주의’에서 찾는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남성의 이해가 반영된 젠더 정치’[1]다. 즉 민족주의는 남성 독립 운동가를 ‘민족의 대표’ 또는 ‘독립투사’로, 여성 독립 운동가를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정치이다. 유 열사를 ‘유관순 누나’라고 호명하면 그녀의 역사적 발자취는 희석된다. 유관순 열사를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가두면 ‘(남성) 일제의 고문으로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피해자’로 남게 된다. 지배세력에 향한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그들에게 굴복한 경험에 대한 민족의 수치심이 불붙으면 ‘한(恨)의 민족주의’가 형성된다. ‘한의 민족주의’가 반영된 유관순 열사는 투지가 넘치는 ‘민족의 대표’가 아닌 ‘피해자 여성의 대표’로 남게 된다.

 

‘피해자 여성의 대표’로 정체화된 유관순 열사는 엉뚱하게도 ‘유관순 귀신’으로 소환된다. ‘공포 괴담’이 유행하던 90년대에 유관순 귀신이 등장하는 괴담이 만들어졌고, ‘유관순 괴담’은 다양한 형태로 알려져 아이들이 즐겨 보던 괴담집에 종종 수록되곤 했다. 지금 들어보면 참으로 황당한 내용이다.

 

 

 1) 새벽 12시에 불이 꺼진 화장실 속 거울 앞에 서서 <유관순 노래>를 열 번 부르면 거울에 비친 유관순 귀신을 볼 수 있다.

 

2) 불이 꺼진 화장실 속 거울 앞에 서서 유관순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유관순 귀신이 나타나 자신을 부른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인다.

 

3) 모 초등학교의 수영장 탈의실 위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유관순 열사가 있었는데 자기 대신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를 품어 밤 12시가 되면 나타나서 이순신 장군과 싸운다고 한다. (김종대 《한국의 학교괴담》 34쪽)

 

4) 매년 삼일절이 되면 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유관순 동상이 살아 움직이면서 피눈물을 흘린다. (김종대 《한국의 학교괴담》 35쪽)

 

 

유관순 귀신은 현대판 ‘처녀 귀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처녀귀신은 ‘원한에 맺힌 억울한 존재’ 또는 ‘공포의 대상’이다. 민간 전설, 고소설 또는 도시전설 속 처녀 귀신은 스스로 원한을 해소하지 못하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유관순 열사’ 또는 ‘인간 유관순’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멀고도 요원하다. ‘친일 청산’이라는 적폐청산은커녕 사회에 고착화된 일제의 잔재조차 청산하지 못하는 이 나라에 유관순 평전이 나오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1] 정희진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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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08:13   좋아요 1 | URL
유관순 열사가 ‘친일파가 과대 포장한 인물‘로 오해받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다녔던 학교인 이화학당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화학당은 이화여대의 전신인데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김활란입니다. 이 사람도 친일 경력이 있고, 그녀가 총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 이화여대는 대대적으로 유 열사 업적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김활란이나 박인덕처럼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가 나중에 변절한 친일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 동료의 이름을 내세워 열사로 만들려고 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2018-05-10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12:29   좋아요 1 | URL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위인을 정답게 부르려고 ‘형’, ‘누나’ 호칭을 자주 사용되는 것 같아요. 전태일 열사에게 ‘전태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예전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형’ 호칭을 쓰기가 거북해요.
 
250만 분의 1 - 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이정모 지음 / 나무나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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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라면 정신없이 빠져드는 게 하나쯤 있다. 그중 하나가 공룡이다. 공룡 그림을 보고 그 이름을 맞추고 초식공룡인지 육식공룡인지 구별해내는 꼬마 공룡 박사님들이 많다. 어린이들 사이에 공룡에 관한 지식은 상식이 돼 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도 공룡 이름이라도 몇 가지 모르고는 자녀들과 눈높이를 맞춰 놀아주기도 힘들게 됐다. 요즘 아이들은 책만으로도 부족하다. 진짜 공룡 화석을 만져 보고 싶어 한다. 예전 박물관은 왠지 딱딱하고 재미없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 박물관은 체험할 것들이 푸짐해지면서 ‘재밌는 놀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시간적 노력과 경제적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체험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서울시립과학관 초대 관장인 이정모 씨는 예전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으로 일했다.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기로 유명한 이정모 씨의 신작 《250만 분의 1》(나무나무, 2018)《공생 멸종 진화》(나무나무, 2015)의 속편이다. 저자는 전작에서 공생, 멸종 그리고 진화라는 주제로 지구 생명의 역사를 들려준다. 지구의 역사, 즉 자연사는 멸종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멸종은 지구 생태계에 빈자리를 만들어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게 된 자연사의 결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250만 분의 1》의 ‘250만’은 현재 지구상에 사는 생물종 수(2017년 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가 발표한 지구의 생물종 수는 2,528,677종이다). ‘1’은 인간이다. 우리는 억세게 운 좋게 살아남은 250만 종 중 하나이다. 저자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다른 생명과 공생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생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우리보다 하찮은 생명에게 배워야 한다. 《250만 분의 1》은 진화와 멸종의 역사를 거친 생명이 주는 교훈을 펼쳐 보인다.

 

학창시절에 단선적 진화론을 공부한 사람들은 공룡의 전성기인 중생대가 끝난 다음에 포유류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신생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공룡과 포유류 중 무엇이 먼저 나타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공룡’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중생대에는 몸집이 큰 공룡과 몸집이 작은 포유류가 같이 살고 있었다. 분명 포유류는 공룡처럼 중생대의 주연급 동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포유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자신의 시대가 될 신생대를 조용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신생대의 주인공들은 어두운 밤을 주 무대로 삼아 야행성 동물로 살아온 덕분에 먹잇감을 노리는 공룡들의 눈치를 피할 수 있었다. 포유류는 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턱뼈 일부를 청각을 향상하는 뼈로 진화했고, 색을 구분하는 시각 능력 대신에 빛을 감지하는 시각 능력을 선택했다.

 

《250만 분의 1》 1부 『공룡 되살리기』 편은 꼬마 공룡 박사님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싶어 하는 부모라면 꼭 읽어야 한다. 1부에 잘못 알려진 공룡 상식을 바로잡는 깨알 같은 저자의 의견뿐만 아니라 공룡에 관한 ‘최신 상식’까지 나온다. 익룡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룡’이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공룡’이 익룡의 정확한 의미가 아니란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날개 달린 도마뱀’, 날아다니는 파충류’이다. 공룡은 골반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면서 형성된 다리가 있고, 땅에서 걸으면서 살았던 파충류를 의미한다.

 

 

 

 

 

 

다음 달에 <쥬라기 월드 : 폴론 킹덤>이 개봉된다. 이 영화에 거대한 익룡이 뒷발로 사람을 낚아채는 장면이 나온다면 “저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하자. 새의 깃털 역할을 한 익룡의 날개막(비행막)은 아주 얇다(프테라노돈의 날개막 두께는 1mm). 아무리 거대한 날개를 가졌다고 해도 날개막이 찢어지면 영원히 날 수 없다.

 

책에 대한 지적을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33쪽에 아이에게 공룡(엘라스모사우루스)을 설명해주는 아빠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공룡을 사랑하고,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의 관심사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빠뿐인가? 엄마도 어렸을 적에 공룡을 좋아했고, 아빠 못지않게 아이에게 공룡을 제대로 가르쳐줄 능력이 있다. ‘아빠’ 대신에 ‘부모’라는 표현을 썼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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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9 19:42   좋아요 1 | URL
따님이 들으면 서운하겠는데요.. ㅎㅎㅎ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분명 어린 시절 따님도 특출한 능력이 있었을 거예요. ^^

psyche 2018-05-10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먹고 있었는데 우리집 막내도 공룡에 빠졌을 때가 잠깐 있었네요. 푹 빠지기 전에 포켓 몬스터로 넘어가는 바람에 저는 공룡이름 외우다 말고 포켓 몬스터 이름을 줄줄 외우게 되었네요.ㅎㅎ

cyrus 2018-05-10 08:15   좋아요 0 | URL
포켓몬 중에 공룡과 닮은 녀석들이 많죠. 저는 포켓몬 1세대를 좋아했던 포켓몬 키드였습니다. 포켓몬 빵에 들어있는 스티커를 열심히 모았어요.. ㅎㅎㅎ

psyche 2018-05-10 10:29   좋아요 0 | URL
cyrus님 연세가??? 제 큰딸이 포켓몬 1세대 포켓몬 키드였는데...ㅎㅎ

cyrus 2018-05-10 12:26   좋아요 0 | URL
30대 초반입니다... ㅎㅎㅎ 우리나라에 포켓몬스터가 처음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초딩이었습니다.. ^^
 

 

 

 

 

 

 

레드스타킹은 지난 4월 한 달 동안 바쁘게 달려왔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게 신기합니다. 430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두 번째 모임을 마지막으로 한 주간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인 514일부터 모임을 재개합니다.

 

지난주 일요일에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술 모임을 했습니다. 새로 문을 연 수제 맥줏집에 모였습니다. 그 날이 마침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의 생일이었습니다. 맥줏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게 됐습니다. 그 날에 저는 과학 혁명의 구조독서 모임에 참석했고, 독서 모임이 끝난 후에 맥줏집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멤버 네 명이 맥줏집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네 명이 모여서 나눈 대화의 주제 역시 페미니즘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술 모임도 월요일 정기 모임처럼 느껴졌습니다. 젠더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은님이 제가 작성한 나영 님 강연 후기[1]를 언급했습니다. 님은 제 글의 내용 일부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님의 지적을 받았을 때 매우 놀랐거나 기분 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지적이었거든요. 문제가 된 제 글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성은 단순히 섹스(Sex)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중략] 젠더(Gender)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섹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젠더는 사회학적 성을 의미합니다. 유전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이 생물학적 성이라면, 사회학적 성은 생물학으로 타고난 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나 문화에 의해 수행된 역할을 의미합니다.

 

 

틀린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영 님은 섹스와 젠더의 의미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나영 님은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젠더는 사회학적 성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교과서적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후기에 쓰지 못했습니다.

 

나영 님이 강연했던 당시 그 날을 복기하면 이렇습니다. 나영 님이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섹스와 젠더, 이 두 개의 단어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페미니즘을 공부한 청중들은 당연히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젠더는 사회학적 성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나영 님은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상대방의 성별이 섹스인지 젠더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나요?”

    

 

아주 자신 있게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한 청중들은 나영 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침묵했습니다. 저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몰랐던 것이죠. 이 두 번째 질문은 (섹스와 젠더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구분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내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의 준말)’는 아닌 것이죠. 이 질문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는 섹스와 젠더는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이고, 또 하나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교과서적 정의를 누가 정했는가?’입니다.

 

이미 나영 님은 작년에 나온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에 수록한 글을 통해 젠더 개념의 모호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 윤보라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

 

 

이제는 누구나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고, 젠더는 사회적인 성이다라는 정의를 마치 답안지에 적어낼 정답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생물학적인 성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 중에서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나영, 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131)

 

 

 

작년에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읽었습니다. 강연에 나온 나영 님의 두 번째 질문은 처음 들어 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그럼에도 페미니즘에 수록된 나영 님의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그 책을 읽은 당시에 나영 님이 대단한 분인지 몰랐어요. 레드스타킹 모임 활동을 하면서 나영 님의 존재감을 알게 됐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과정, 즉 독서 방식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눈으로 페미니즘을 읽으면서여성학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고,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혼자 공부하면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특히 남자가 혼자서 책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정작 중요한 내용을 간과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

 

 

 

저는 지금도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은 세상(또는 나)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마주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공부하기 쉬운 학문이라 말할 수 없어요. 페미니즘은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학문이 아니에요. 그 반대입니다. 하나를 알아도 열은 모르는학문입니다.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은 복수 명사이며 그 속에 다양한 페미니즘이 공존한다고 말했습니다. 페미니즘의 하나를 안다고 해서 페미니즘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힘겨운 일이지만 열 개 이상의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의 페미니즘만으로는 늘 시시각각 변하고 복잡해지는 세상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세상을 읽고 해석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면 또 다른 차별이 생깁니다. 지나온 페미니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한 자유주의 페미니즘(1세대 페미니즘)기득권이라는 든든한 성(城)을 포기하지 못했고 인종과 계급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를 설립한 베티 프리단은 여성운동에 뛰어든 레즈비언을 끌어안지 않았고 페미니즘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차폐막으로 막아버렸습니다. 페미니스트도 인간입니다. 완전하지 않으며 때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의 실수나 한계를 근거로 페미니즘은 불완전하고 문제 있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이 세상에 완벽한 학문은 없습니다.

 

오늘 안나 님의 서재에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유유, 2018)에 나오는 문장을 봤습니다.[2] 그 문장이 지금 저의 상황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 애정의 다함에 대해 나는 나를 자꾸만 의심해야 한다. 한순간의 안도가 한 권의 책을 망칠 수 있다. 어려운 이름, . 그렇다고 당신에게 내 싸다구를 후려쳐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내 귀싸대기는 내가 후려 치는 걸로. (25)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도 내가 배운 지식을 올바르게 표현했는지 의심합니다. 나름대로 생각해본 끝에 글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피드백을 합니다. 저는 얼마든지 싸다구 맞을 각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맞을 각오를 하고 레드스타킹에 들어갔습니다. 제 기준으로 볼 때 레드스타킹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멤버들에게 세 번 넘게 맞았습니다. 젠더 무법자모임 첫날에 남녀평등이라고 말해서 얻어맞았고[3], 권김현영 님한테도 아주 세게 한 방 맞았어요.[4] ! 제가 맞았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레드스타킹을 남자 패는 남성 혐오자들의 모임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이 글에서 쓰고 있는 맞았다라는 표현은 건전한 비판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1] [“나도 고발한다”] 201852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066052

 

[2] [출판하는 마음, 그 마음에 리스펙.]

http://blog.aladin.co.kr/hopeblossom_/10072261

 

[3] 2018213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9903117

 

[4] [페미니즘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2018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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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9 11: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인간이니까 모르는 건 당연하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모든 걸 암기하는 인공지능처럼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어요.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8-05-0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만 맞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2번을 달고 있는 저같은 여자들도 책을 읽다보면 몇대 맞아야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어요. 생각보다 더 많이 이분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더라고요~ 제자신이~

cyrus 2018-05-09 11:50   좋아요 0 | URL
내 스스로 따귀를 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열심히 책 읽고, 강연에 자주 참석해야겠어요.

blanca 2018-05-09 0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배우고 고칠 점이 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는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더 이상 배울 것도 고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퇴보하는 거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8-05-09 11:5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제가 글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말씀해주셨어요. 페미니스트도 인간입니다. 그들이 배움을 멈추고 독선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stella.K 2018-05-0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수제 맥주집! 많이 괴로웠겠다.
요즘 수제 맥주가 대세라며?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간만에 맥주를 샀는데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 어떤 걸 마셔야할지 모르겠더군.
근데 너무 싼 걸 산 것 같아. 자주 마시는 것도 아닌데
이왕 마시는 거 비싼 거 마실 걸. 후회하는 중.ㅠ

흑인 페미니즘이라... 재미있을 것 같다.

cyrus 2018-05-09 19:46   좋아요 0 | URL
편의점에 파는 외국 맥주를 자주 마셔도 좋은 맥주 맛이 뭔지 잘 몰아요. 그냥 맥주라는 술 자체가 좋아요.. ㅎㅎㅎ 수제 맥줏집에 갈 일이 없어서 평소에 먹을 수 없는 맥주를 골랐어요. 제가 고른 건 흑맥주였어요. 다크 초콜릿 향을 넣었다는데 마셔 봐도 잘 모르겠어요.. ^^;;

2018-05-10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12:33   좋아요 1 | URL
저는 이 분의 자유분방한 발언, 특히 자위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간혹 선을 넘는 발언과 행동에 대해선 저도 선뜻 찬성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 같을 순 없죠. ^^;;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게르트 레온하르트 지음, 전병근 옮김 / 틔움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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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함 대부분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한다.

 

- 한나 아렌트 -

 

 

 

 

과학이 생활 곳곳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인공지능 기술은 점점 복잡하게 발전하고 대중과 멀어져간다. 어쩌면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알기를 포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인류의 과학기술 진보가 2배 승수로 체증하는 법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18개월마다 칩의 집적도가 2배씩 높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그는 비단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과학기술이 일정 기간에 2배씩 발전해왔음을 증명해 보였다. 커즈와일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래 인류가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050년에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초인공지능이 가능해져 개개 인격의 한계를 초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그 원리들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게 되면 이미 인간은 신(god)이나 다름없게 된다. 커즈와일의 전망이 가시화할 시점이 그리 멀지 않다. 기하급수적 기술 발전 법칙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에 특이점이 올 수 있다.

 

커즈와일을 비롯한 대부분 학자들은 ‘사람 같은 인공지능’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며 그것도 머지않아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인간의 진화로 인해 탄생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과 다를 게 없다. 여기까지는 수긍이 간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특이점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사람 같은 인공지능은 과연 등장할 것인가. 스스로 배우는 인공지능이 인간성으로 통칭하는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면 이것과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계속 허물어져 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를 만한 인간 고유의 특징을 간직할 수 있을까. 기계와 소통하며 사는 데 점점 길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길 없다. 미래학자 게르트 레온하르트는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것을 삼키는 기술 변화에 직면한 우리는 인간성의 우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15쪽)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틔움, 2018)은 이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인공지능에 관한 내용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기술적 요소가 중심이 되면서 인간의 본질, 즉 안드로리즘(Andronism)이 감축되거나 폐기될 처지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안드로리즘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며 저자는 창의성, 연민, 책임성, 공감 등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안드로리즘이라고 말한다. 기술 발전은 ‘조금씩 그러다 갑자기’ 등장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사실 기술의 발전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속속 현실로 나타나게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지배하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보편화하지 않았을 때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그들의 포로 아닌 포로가 되어 그것들이 없으면 갑갑하고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편해지고자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 앞에 인간 스스로가 발목을 잡힌 것이 현실이다. 우리들의 도덕성이나 인간미는 갈수록 멀어져 가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만을 추구했을 뿐 인간 고유의 가치를 도외시한 결과이다.

 

“기술은 윤리가 없다. 기술이 윤리를 가져서도 안 된다.”[1]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조합한 것을 실존적 존재인 인간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만약 ‘사람 같은 인공지능’의 인권을 인정한다면 인공지능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계에도 인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면 진정한 인간의 윤리와 존엄성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기술자들은 기능을 구현하는 데만 집중할 뿐, 기술이 일으킬 법적 · 사회적 파장 같은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는 기술 발전을 경계하고 있으나 그것을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는 저절로 우리 앞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으로 나날이 변화하는 미래에 대비하려면 우리가 가진 능력(어떤 현상에 대해 숙의하고 성찰하는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요소로써 인간성의 가치는 기술의 혜택과 불안이 동시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새롭게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원효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해골에 고인 물이 맛 좋은 음료가 수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앞으로 기술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부작용을 모두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원효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기계의 진화를 두려워하는 동안 인공지능의 성능은 더 빨리 향상되고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에 대해 정말 깊이 고뇌해야 할 때다.

 

 

 

 

[1]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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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0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악함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혜롭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짓는 인간의 죄라는 것도 있지요.

cyrus 2018-05-08 18:40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몰라서 죄를 짓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면서 죄를 짓는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

2018-05-08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8 18:41   좋아요 0 | URL
이 책에 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을 여러 번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서 북플이 생각났습니다.
 

 

 

매주 일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인문학 독서 모임이 진행된다. 스몰토크가 ‘레드스타킹’ 공식 모임 장소이기도 해서 두 가지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은 일요일, 월요일 이틀 연속으로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 독서 모임에 합류하게 됐다. 요즘 책을 읽으면서 지식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일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는 나 자신에게 놀랄 때가 있다.

 

 

 

 

 

 

 

 

 

 

 

 

 

 

 

 

 

* 토머스 새뮤얼 쿤 《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

 

 

 

 

 

 

 

 

 

 

 

 

 

 

 

 

*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 2015)

* 장대익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김영사, 2008)

* 앨런 차머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85)

 

 

 

 

인문학 독서 모임을 위해 읽고 있는 책은 토머스 새뮤얼 쿤《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이다. 4월 22일 일요일에 첫 번째 모임이 있었고, 매주 세 장씩 읽어와야 한다. 지난주(4월 29일)에 있었던 두 번째 모임은 불참했다. 지난주는 너무 바빠서 《과학 혁명의 구조》 4~6장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빠졌다고 해서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완독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고약한 성질이 있지만, 뚜렷한 목표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읽는다. 인문학 독서 모임 참석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독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쿤과 카를 포퍼가 양분하는 과학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내 독서 목표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로 인해 혁명의 형태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구 패러다임과 신 패러다임이 투쟁하면서 구 패러다임이 폐기되고 신 패러다임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A가 주장한 어떤 이론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A 이론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B는 A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B는 A 이론을 새로 검증하고, 끝내 그것과 다른 ‘B 이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A 이론이 구 패러다임이라면, B 이론은 신 패러다임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지배했던 A 이론은 전면 부정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정말 더럽게 재미없다. 물론, 책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을 쿤의 글쓰기 탓으로 돌릴 수만 없다. 개역판인데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다. 여전히 이 책에 한 번에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더러 보인다. 쿤의 과학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처음부터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시도하면 지쳐서 독서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 토머스 새뮤얼 쿤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

* 남영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

 

 

 

《과학 혁명의 구조》가 쿤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책을 ‘쿤의 첫 번째 저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쿤의 첫 번째 저서는 1957년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에 코페르니쿠스가 많이 언급된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킨 과학 혁명 중 하나로 봤다. 《과학 혁명의 구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먼저 읽으면 된다. 이 책도 학술서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에 재미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보여준 쿤의 과학철학을 미리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집필하기 전에 쿤은 하버드 대학 과학사 강의 준비를 위해 과학사 문헌들을 탐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과학사를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기존 관점’으로 과학사를 서술한 연구가들은 진공이나 중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각 진공과 중력의 실체를 증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뉴턴의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쿤은 수천 년 동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거 학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쿤은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로 이어지는 우주론과 천문학을 추적하여 ‘지식이 축적될수록 과학은 진보된다’는 관점을 반박한다. 그 반박의 입장을 담은 책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수천 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구는 견고한 지지대에 의해 떠받혀 있다고 생각해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의하면 지구만이 천체 운동의 유일한 중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동설과 대치되는 우주론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해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처음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사실, 그는 반동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동의했으며 이를 좀 더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해 자신만의 우주론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멈추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성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 덕분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해온 굳건한 세계관을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훨씬 지나서야 후세 사람들은 그를 ‘비범한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씌워진 ‘신화’를 과감히 벗긴 다음에 과학 발전의 변화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또 낙하 실험을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논박한 것으로 알려진 갈릴레오의 업적도 ‘신화’라고 주장한다. 쿤의 견해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이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이다.

 

과학 이론은 ‘무에서 유’로 탄생하는 건 아니다. ‘천재’로 알려진 과학자들도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한 보수적인 세계관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다. 뉴턴은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스스로 일궈낸 창조적 결과물이 아닌 선대의 지식, 즉 ‘거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 [품절]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까치, 2006)

 

 

때로는 새로운 세계상을 향해서 지적 도약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뉴턴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의 어깨를 도약판으로 사용했다.”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중에서)

 

 

 

뉴턴은 ‘거인들의 어깨’가 자신의 지적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의 사다리’를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구 패러다임의 사다리 삼아 올라가 남들이 보지 못한 지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서야 ‘오래된 사다리’를 과감히 버렸다. 과학이 축적되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지식이 손실되는 과정(‘쿤의 손실’)[1]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과학자들이 쓰다 버린 사다리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그것은 비과학적이고 엉터리로 판명되었어도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요긴한 도구였다. 과학의 발전은 과거 성과를 긍정하면서 그 위에 한 층을 더 올리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부정하는 동시에 사다리 한 층 더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1] 장대익의 책에는 ‘쿤의 손실’을 ‘Khunian loss’로, 장하석의 책은 ‘Khun loss’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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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8-05-03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혁명의 구조 읽어보고 싶은데 여전히 손을 못 대겠네요. 내용도 만만찮은데다 번역의 질도 썩 좋지 않다고 들어서요...태양을 멈춘 사람들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5-04 16:51   좋아요 2 | URL
오랜만입니다. 캐모마일님. 잘 지내고 계시죠? <태양을 멈춘 사람들>이 강연을 정리한 책이라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있어서 좋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8-05-03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과학혁명의 구조 조금 읽다가 포기했었습니다ㅎ 즐독 완독하세요ㅎ

cyrus 2018-05-04 16:52   좋아요 1 | URL
완독하려면 한 달 걸릴 듯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8-05-05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하시네요. 일도 하시고 책도 읽으시면서 이런 모임도 나가서 절차탁마하시니 앞으로도 큰 성장과 발전이 기대됩니다. 사실 저처럼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좀처럼 느껴볼 기회가 없네요. 그나마 알라딘서재가 있어 다행입니다.

cyrus 2018-05-08 12:00   좋아요 1 | URL
예전의 알라딘 서재는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두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상대방의 생각이 압축된 글을 진지하게 보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오로지 내 생각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댓글로 소통을 해도 인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서재 활동을 하다보면 아쉬움을 많이 느껴요.

페크pek0501 2018-05-07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를 억압해서 생기는 문제에 주목했지만, 이 시대는 억압하지 않아도 되니까(다른 걸로 대체할 수도 있고) 그런 문제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문제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니 이론도 바뀐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님이 쓰신 맨 마지막 글을 보고 생각났습니다.

cyrus 2018-05-08 12:04   좋아요 1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교과서로 배운 지식은 오래 가지 못해요. 그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지식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지식을 접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건 독서예요. ^^

雨香 2018-05-09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에 백퍼 공감합니다. 몇 년전에 공룡에 대한 독서를 할 때도 그랬지만(이후의 연구결과가 전혀 다른 이론을 내더군요) 요즘 고려사를 독서와 팟캐스트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데, 고려에 대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더군요

두해전인가 와우북페스티벌에서 <태양을 멈춘 사람들>의 저자 남영 교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왜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론적으로 완벽해보여야(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으로 봐야하는지?) 받아들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cyrus 2018-05-09 11:59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이정모 씨의 <250만 분의 1>를 읽고, 제가 어렸을 때 접했던 공룡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우향 님은 남영 교수가 말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셨어요.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보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어 했어요. 쿤은 천동설을 바라보는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을 ‘미적 가치’를 되살리려고 한 자세라고 분석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비판했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쿤의 분석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