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할머니 댁에서 농촌 활동하기  

매주 일요일 하루 일과는 딱 정해져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하루종일 집에 있기, 친구랑 술 먹기 그리고 아버지 따라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매주 일요일이면 쉬지도 못하고 거의 할머니 댁을 방문하신다.   그 이유는 할머니 홀로 하시는 농삿일을 도우기 위해서다.    

할머니가 살고 계신 곳은 경북 김천이다.  내가 사는 대구와는 거리상으로는 별로 멀지는 않지만 편히 쉬어야할 주말에 농삿일하러 가야하니 그야말로 고역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가용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다니신다.   요즘 기름값도 비싸지만 고속버스 왕래하는 비용 역시 만만치가 않다.    어머니가 우리 집안의 경제권을 주도하고 있으시다보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일요일에 할머니 댁을 가게 되면 눈치를 봐야 한다.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장남이라 사실 농삿일을 굳이 아버지 혼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 밑에 삼촌이 4명이 있는데 삼촌들과 함께 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삼촌들이 각각 따로 지방에 살고 계신데다 각자 주말에도 일할 정도로 바빠서 결국 아버지 혼자 도맡아하신다.   정말 간혹 삼촌들이 도와주러 오신다지만 아버지 혼자 농삿일을 맡는 모습을 지켜보면 아들로서 좀 씁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주 일요일에는 막내 삼촌 가족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막내 삼촌은 자가용을 가지고 있어서 덕분에 아버지는 교통비 때문에 어머니 눈치를 안 봐도 되었다. 

나는 일요일에 특별한 약속이 없는 이상 아버지 따라 함께 동행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노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철없는 젋은이다.   실제로 아버지 따라 농삿일 하기 싫어서 거짓말한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할 때는 정말로 열심히 하는 편이다.  ^^;;  

이번 주 일요일에는 땅콩을 캐기 위해서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땅콩줄기를 다 뽑아내어 뿌리에 있는 땅콩 열매들을 떼어내는데 허리가 안 좋으신 연세 많은 할머니 혼자 하시기에는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막내 삼촌이 괭이로 땅을 파내어 땅콩줄기를 뽑고 나와 할머니는 땅콩 열매를 때어 자루에 담는 일을 하였다.  

다행히도 오늘 날씨는 무덥기보다는 시원한 바람이 불 정도로 날씨가 선선하였다.  그리고 날씨가 흐려서 따가운 땡볕을 피할 수 있었다.  

 

 

 Scene #2  야산에서 열매 채집하기  

땅콩밭에 있는 모든 땅콩을 수확하는데만 네 명이 매달려 하는데만 4시간 걸렸다.  오전에 할머니 댁에 도착해서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늦게 시작했으면 해 떨어질 때 마칠뻔했다.  

이제 땅콩 수확을 다 끝내서 좀 쉴 수 있겠나 싶었는데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야산에 가서 열매를 따러 가게 되었다.  이번 주 일요일은 그야말로 흙냄새, 풀냄새 고루 다 맡아보는 하루였다.     그래도 등산을 좋아하는 편이라 군말 없이 아버지 따라 다녔다.  사실 할머니 댁에 혼자 있어봤자 딱히 할 게 없으니까...  할머니 댁에 사촌 동생들이 있는데 오히려 농삿일보다 애들이랑 상대하는게 더 피곤할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사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따라 야산 가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평소에 몸에 좋은 약초나 열매에 워낙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부모님 따라 야산을 돌아다니면서 그 분들이 캐오는 약초, 열매들을 많이 보곤 하였다.     부모님은 항상 열매나 약초를 캐오면 제일 먼저 술로 담근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건강에 좋다는 열매로 담근 약주(藥酒)가 많다.  

 

 

 

그 중에서 부모님이 야산에 갈 때 제일 많이 따오는 것이 오미자다.   어렸을 때 오미자열매를 처음 보는 순간, 앵두 열매인줄 알았다.   한 번 보면 눈에 익을 정도로 강렬한 붉은색을 띄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오미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총 5가지의 맛이 난다고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정말로 다섯 가지 맛이 나는지 궁금해서 열매를 직접 씹어 먹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그냥 꾹 참았다.  ^^;;       

정말 저 불그스름한 열매를 보라.  씹어먹으면 달콤한 앵두 열매 맛이 날 거 같지 않은가.      

오미자를 차로 달여 마셔본 적이 있는데 오미자차를 좋아한다.  오미자차가 혈압을 낮추게 하고 면역력을 높아주는 효능이 있어서 건강에 좋은 음료라서 그런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차맛치고는 맛이 오묘하다.     마셔보는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오미자차 한 모금 입에 대보면 신맛이 강하면서도 약간 쓴맛과 단맛이 난다.   

 

 

 

 

그 다음에 많이 따오는 것이 으름 열매다.    

어머니는 건강에 좋은 야산 열매가 있으면 항상 나에게도 먹어보라고 권한다.  어렸을 때 처음 으름 열매를 봤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 먹어 봐라,  이게 산에 나는 바나나란다. "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속살이 하얀 이 요상한 열매를 먹어보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말씀한 것과 달리 맛이 내가 알고 있던 달달한 바나나 맛이 아니라서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입 안에 하얀 으름 열매의 속살을 넣은 순간 입 안에 굴러다니는 씨앗이 있어서 먹기가 불편하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입 안에 있는 걸 도로 뱉을 수도 없고...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든(?) 지금은 으름 열매가 보이면 당장 따서 먹는다.   맛은 이상해도 몸에 좋다면 뭐든 먹을 수 있다.     햐안 속살 안에는 수많은 씨앗이 있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쓴맛이 난다.   씨앗만 따로 분리해서 부드러운 햐얀 속살만 먹으면 정말 바나나 같은 달달한 맛이 난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에는 씨앗을 입 안에 분리하는게 귀찮아서 그냥 씨앗까지도 씹어 먹는다.   

으름 열매도 우리 집에서는 술로 담가 먹는데 방금 으름 열매에 대한 정보를 찾는 중에 눈에 띄는 내용은 열매에 비타민 C가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그 전에는 비타민 C가 오렌지, 사과와 같은 평소에 먹을 수 있는 과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야산에서 자라는 열매에도 비타민 C가 있다는 사실에 으름 열매를 자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으름 열매를 섭취하는 관련 정보를 더 첨가한다면 열매 속살을 갈아 우유와 같이 마신다면 우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철분의 흡수를 도와준단다.    속살 안에 파묻힌 씨앗만 어떻게 분리하면 쉽게 먹고 좋을텐데...   

  

 

 

 

 

이번에 산에서 채집한 열매 중에서 그나마 먹을 수 있는게 다래 열매이다.    

이름은 들어봤는데 직접 눈으로 본게 처음이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어렸을 때 산에 어딜 가면 나무에 열린 다래 열매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찾아보기가 드물 정도란다.  그리고 소화가 안 될 때 열매를 먹으면 좋다고 하셨다.  

이제 막 열매를 땄을 때에는 딱딱하였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열매가 익어 물렁물렁해지는데 먹으면 키위 맛이 난다.     열매를 따면서 물렁물렁한 걸 골라서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었다. 

역시나 다래에 대해서 정보를 찾아봤는데 키위가 다래의 한 종류라고 한다.   그리고 소화불량일 경우에 먹어도 좋고 그 밖에도 열을 내리고 이뇨 작용도 한다.   

 

 

  Sence #3  시골 어린이와 도시 어린이   

이 날 동행한 막내 삼촌 슬하에는 각각 중학교 2학년, 초등학생 6학년인 남자, 여자 아이가 있다.     이 두 아이가 우리 집안 중에서  제일 막내 사촌 동생들이다.   

오늘 오전에 땅콩밭에 가면서 장난으로 "땅콩 캐러 가자" 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진담으로 받아들었는가보다.    가기 싫다면서 손에는 스마트폰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항했다.   

어차피 밭에 가도 이 어린 녀석들을 시킬 생각도 없었다.   농담의 의도 뒤에는 도시에서만 자란 이 사촌 동생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즉, 도시에서는 할 수 없는 좋은 경험을 해주고 싶었다.    그 '경험' 이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이다.   

요즘 자라나는 도시 어린이들을 보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다루다보니 농촌이나 야산과 같은 곳에서의 체험을 많이 하지 못하는 거 같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자연 속에 살아가는 곤충이나 식물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밭이나 산과 같은 곳이다.       

약초와 열매를 채집하고 난 뒤에 할머니 댁으로 돌아가는 시골길을 지나가던 중, 남매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복장으로 봐서는 시골에서 자란 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시골길에는 비록 먹을게 많은 슈퍼마켓도 없고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PC방이 없다.   그런데도 이 아이들은 나무와 밭이 있는 시골길을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뛰놀고 있었다.   '자연' 을 벗삼아 마음껏 뛰노는 시골 아이들의 웃음기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내 사촌 동생들이 걱정스럽게 느껴졌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할 양이 많아지게 되면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도 부족하게 된다.    결국에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질 수 밖에 없다.  

하룻동안 시골 어린이와 도시 어린이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시골쥐와 도시쥐' 이야기가 떠올렸다.   

시골의 쥐가 도시의 쥐를 초대하였는데, 도시쥐가 자신이 사는 곳에는 맛있는 음식이 산처럼 많다고 자랑하였다. 시골쥐가 도시에 가보았더니 치즈, 과일, 벌꿀 등 먹을 것은 많았지만, 사람들과 고양이가 돌아다녀서 매우 위험하였다.  시골쥐는 먹을 때마다 위험의 부담을 안고 살아야한하는 생활보다는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골로 되돌아왔다.  위험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보다, 검소하지만 마음놓고 살 수 있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정년퇴임을 하신다면 남은 여생을 농촌에서 사신다고 하셨다.    나 역시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고나면 아버지 따라 남은 여생을 농촌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다.     

그런데 일단은 농삿일과 좀 친해져야 하는데...     신체적으로는 힘들지만 학교에서 하는 '농촌 활동' 을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농삿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  

  

  

 

P.S>  오늘 땅콩밭에서 일한 수당(?)으로 할머니에게 2만원 받았다.  덕분에 꽁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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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18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큰 대학생 손주가 주말을 반납하고 밭일을 도우니
연세 드신 할머니께서 얼마나 이쁘셨을까요...^^
또 함께 다니시는 아버님은 말은 안하셨지만 장성한 아들과 어머니 일을 도우러 가시니
여러모로 뿌듯하셨을거예요. 수고하셨어요~멋져요.

cyrus 2011-09-19 14:03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아들로써 해야되는 일인데요. 조금이라도 효자 노릇 해야겠어요 ^^;;

yamoo 2011-09-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부럽습니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시루스님은 참 부러운 삶을 살고 계시는 군요!

cyrus 2011-09-19 14:0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은 제 심장 속에는 도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답니다. ^^;;
시골에 가면 컴퓨터도 없고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아서 불편했어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1-09-1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일찍 자는 거예요? 으름은 글을 읽고나서도 어떤 맛인지 궁금해요. 어쩌면 먹어봤을지도 모르고, 이미 아는 맛일 수도 있는데, 전혀 감이 안잡혀요.

잘자요~ 피곤한 시루스님.

cyrus 2011-09-19 14:06   좋아요 0 | URL
어제는 좀 일찍 잤어요. 밤 1시에요 ^^;;
으름이란게.. 맛의 정의를 내리기가 애매해요. 확실한건 바나나 씹는 것처럼
부드럽고 단맛이 덜한 편이에요.

쉽싸리 2011-09-1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천도 외곽은 산이 깊죠. 그래도 야생오미자,으름은 흔치 않은데요. 저도 주말에 오미자따러갔었는데 거기는 벌써 다 따갔더라구요. 몇송이는 따서 오면서 먹었어요. 한 번먹어 보세요. 그 맛이정말 오묘합니다. 주로 효소로 담궈서 먹죠. 술도 담고요. 그런 술은 약술이라 너무 많이 안좋다고 합니다. 한잔정도씩 장복해야 좋데요.

cyrus 2011-09-19 14:08   좋아요 0 | URL
제가 간 곳은 사람 발길이 드문 산이에요. 그래도 가끔 시골에 사시는 분들이
먼저 열매나 산 속 깊이 자라는 버섯을 따가곤 해요.

blanca 2011-09-19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천, 제 친구 시댁이 있는 곳이라 기억이 나네요. 주말에 아버지 농사일 도우러 가시는 모습. 시루스님이 대견하기도 하고(죄송해요^^;;) 부럽기도 하고 그렇네요. 아이들 상대 ㅋㅋㅋ 제 남동생이 제 딸 이틀 연속 놀아주고는 누워서 애 둘 키우는 사람 정말 대단하다고 그러고 도망가더라고요 ㅋㅋ 할머니와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루스님이 부러워요.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 잘 못해드린 게 두고두고 자꾸 곱씹게 되고 한이 되는 저로서는...

cyrus 2011-09-19 14:10   좋아요 0 | URL
나이 차이가 많은 편이라 아이들 상대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정말로
어른과 아이가 생각하는게 달랐어요. 그래서 상대하기가 좀 힘들었어요 ^^:;

감은빛 2011-09-1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할머니댁에 농활을 다녀오셨군요! 멋져요!
으름은 처음 들어보네요. 어떤 맛일지 궁금해요.

시골아이와 도시아이 많이 다르겠죠?
사실 우리 아이들만봐도 집주변에서 흙을 밟을일조차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이란 것을 전혀 접하지 못하고 살고 있어요.
나중에 자라서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회색 콘크리트 숲에 갇혀 지낸 기억만 떠올릴까봐 걱정되네요.

cyrus 2011-09-19 14:12   좋아요 0 | URL
맛있다라고 보장은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건 먹으면 건강에 좋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골의 모습도 점점 사라지고
아이들도 많은 학업 때문에 자연에서의 체험할 기회 역시 많이 없을거 같아요.

stella.K 2011-09-1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용돈이 2만원! 좋겠다!
뭐할건지 궁금한데...?ㅋㅋ
요즘 농업도 옛날 같지 않아서 돈 잘 번대더라.
물론 기후가 걱정이긴 하지만,
홍수 때 우리가 tv에서 보는 건 극단적으로 안 좋은 예만 보여줘서 그런 거고,
잘 사는 사람은 아주 잘 산대.
그 대신 뭐든 공짜는 없다고 고되긴 하다던데...

으름 들어보긴 했는데 저렇게 생겼군.
못 생긴 생선 주둥이 같아.ㅋ
맛 없다니 나도 그닥 기대는 안 되는데?ㅎㅎ


cyrus 2011-09-19 14:14   좋아요 0 | URL
지금 2만원 가지고 뭐할까 고민중이에요. 돈만 조금 있다면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이 돈 가지고
술값으로 하기에는 너무 아깝고요 ^^;;

누님!! 맛은 없어도 건강에는 정말 좋은 약이에요. ^^

stella.K 2011-09-20 13:15   좋아요 0 | URL
ㅎㅎ 서울에 살면 내돈 보태서 대작 한 번 하면 좋을텐데 말야.
말마따나 알라딘 중고서점도 가고. 아깝다. 그지?ㅋㅋ

잘잘라 2011-09-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뭐랄까요, cyrus님다운 글이기도 하고 어떤 면은 좀 생소한 느낌도 나고 그래요. 특히 여기요, 「.. 실제로 아버지 따라 농삿일 하기 싫어서 거짓말한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할 때는 정말로 열심히 하는 편이다. ^^;;」 ㅋㅋㅋ 거짓말은 안할 것 같은 cyrus님이었는데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하신게 생소하구요, 하지만 할 때는 정말로 열심히 하는 편이라,라고 하신게 cyrus님 다워요. '열심히 한다'가 아니라 '열심히 하는 편이다'라고 하셔서 한참 웃었네요. ㅎㅎ

cyrus 2011-09-19 14:16   좋아요 0 | URL
저도 살다보면 피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거짓말을 한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9-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락, 시루스님,,,, 부비부비 (이거 총각에게 이래도 되는건지?)

페이퍼 너무 이뻐요, 정말 따스하구요,
휑한 제 맘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예요. 농담 아니구 당장 에세이집에 실어도 되겠어요.
참........ 좋다, 저 열매들과 땅콩 따기라니. 예전에 친정 아버지께서 밭에서
땅콩을 캐내어 즉석해서 불에 구워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어요.

cyrus 2011-09-19 20:53   좋아요 0 | URL
페이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좀 재미나게 썼어야했는데... 앞으로 일상적인 이야기들도 일기형식으로 쓰려고해요 ^^

순오기 2011-09-20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이런 총각이 어디 또 있겠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책만 읽는 줄 알았더니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는 국보총각이군요!^^
할머니랑 아버지께서 참 든든하고 대견하다 생각하시겠어요.
나는 중학교 2학년까지 촌에서 살았지만, 오미자나 다래, 으름열매도 본 적 없어요. 충청도 산골에는 왜 그런 열매가 없었을까요.ㅜㅜ

cyrus 2011-09-20 16:1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사람 발길이 드문 야산 깊숙한 곳에 자라다보니 못 보실 수 있을거
같아요. 제가 본 열매들은 기후와 지역에 따라 자라는 곳이 다를 수도 있고요. ^^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그레이트북스 92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1750년 디종의 아카데미 논문 공모 대상을 수상한 장 자크 루소의 처녀작이다.   당시 아카데미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 라는 주제를 내걸게 되었는데 루소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소논문 형식으로 쓴 것이다.  이 논문 한 편은 가난과 방랑 생활을 보낸 젋은 루소를 일약 지식인 사회에 떠오르는 스타로 만들어줬다.  

화려한 학력도 없이 그저 독학으로 숙지한 지식으로 무장한 무명의 젋은이가 단숨에 아카데미 논문 공모전에 대상을 받는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당시 사회를 주름잡고 있었던 기존의 지식인들에게는 풋내기 사상가의 입장을 반박할 정도로 루소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논문에 대해서 반박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편지들이 날아 올 정도였다.  이에 대해 루소는 편지 교류를 통해서 자신에게 향하는 반박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재반박함으로써 정면에 맞섰다.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의 풍속을 타락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루소의 입장은 파격적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성' 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발달 덕택에 인간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루소가 살던 시대보다 더 윤택하면서도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 중에도 루소의 입장에 수긍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논문은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루소는 그동안 독서를 통해 쌓은 역사적 지식들을 총동원하여 학문의 발달과 관련된 문명에 대한 통설을 과감히 깨뜨리는 동시에 역사적 실례를 통해 충분히 논증하고 있다. 시대마다 명성을 떨친 여러 나라와 민족의 사례을 살펴보고 학문의 발전과 풍속의 타락, 패망 사이의 역학관계를 조망한다.    

   

 

  '못 된' 지식인과 권력자들에게 향하는 '가난한 노숙자' 루소의 비판

루소는 시대가 변할수록 학문이 사회 발젼에 이바지하기는커녕 타락하게 만드는 원인을 그 당시 학문 구조 자체에만 문제를 삼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학문이 사회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원인을 자신들의 이익욕과 오만 그리고 위선으로 점칠된 지식인들의 학문 남용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학자' 라는 이름 하에 오히려 사회 내 불신을 조장하고 대중들에게 왜곡된 학문을 제공하는 '못 된' 지식인이 인간의 풍속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예를 통한 교류의 주요한 이점, 다시 말해 칭찬받을 마한 작품을 써서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을 더 사교적이게 해주는 이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 장 자크 루소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pp 36 -

 

인간이 '지식' 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습득하게 될수록 학문과 문예가 더욱 발달해지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정신적인 욕망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권력자들까지도 정신적 욕망이 만들어낸 예속의 힘이 뻗쳐나가게 되었다.    

루소와 볼테르 등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전 유럽은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절대군주 시대였다.   권력자들은 학문과 문예를 존립한다는 명목 하에 지식에 무지한 국민들을 '개화한 국민' 으로 만듦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몇 지식인들은 권력자 앞에 아부를 하며 학문을 통한 정의 구현과 사회적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상류사회 사교계에 널리 알리는데만 치중했다.    루소는 사교계에 들락날락거리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미덕'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pp 37)    실제로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볼테르가 점점 사교계 출입이 잦아들게 되자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노숙자에 불과한 루소는 '아카데미' 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지식인 집단이 내건 주제를 가지고 '참된 인간' 을 만들기 위한 올바른 윤리과 미덕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명예을 드높이기 위한다거나 얄팍하게 그지 없는 영영가 없는 학문과 지식으로 치장한 '못 된 지식인' 들이 활동하던 당대의 현실을 용기있게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학문 연마는 오직 소수의 천재만이 할 수 있다   

루소가 기존 지식인 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은 듣도 보지도 못한 한 젊은이가 쓴 논문이 상당히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런 점을 비추어 본다면 수많은 지식인들이 루소에게 논문 내용에 대한 반박성 편지를 보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용기있게 자신들의 얼굴에 정면으로 침을 뱉은 루소의 행동 때문에 괜히 비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루소는 학문이 풍속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천재들만이 학문을 연마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아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학문 연마를 통해 천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심지어 소수의 천재들로 이루어진 사회 구성원 1%을 제외한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 99%는 은 애초에 학문에 염두를 두지 말자고 냉정하게 경고를 하고 있다.   

 

하늘이 별로 큰 재능을 부여해주지 않았을뿐더러 별로 큰 영광도 예정해놓지 않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초야에 묻혀서 살 일이다.   (중략)    백성에게 의무를 가르치는 임무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자.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 pp 66 -

  

루소가 생각하는 '천재' 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올바른 학문을 수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를 가리킨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루소는 자신 스스로 '평범한 사람들' 이라고 겸손하게 낮추고 있지만 실제로 루소는 이 논문을 집필할 수 있게끔한 방대한 지식을 평생 독서를 통해 습득한 머리가 좋은 사상가이다.    

루소의 '천재' 예찬은 지식인들의 눈에는 루소의 갑작스런 등장은 그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젋은 지식인의 오만으로만 보게 되었으며 그리고 당시 설립되어지던 교육기관들의 존재를 부정하는듯한 그의 입장을 수긍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루소가 생각하는 인성교육의 중요성

그러나 루소가 '학교' 와 같은 교육기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참된 인간' 이 될 수 있는 '참된 지식' 을 가르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루소가 생각하는 올바르고 참된 지식의 교육이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닌 건전한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도덕적 교양에 초점을 맞춘 인성 교육이다.  

분별없는 교육이 우리 정신을 치장하여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아주 오랜 전부터의 일이다.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젋은이들에게 온갖 것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의무는 가르치지 않는 엄청나게 큰 교육기관을 도처에서 본다.   당신의 아이들은 자기 나라 말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그들은 아무 데서도 사용되지 않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자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쓸 것이다.  그들은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줄 모른 채 그럴듯한 주장을 폄으로써 남들이 진리와 오류를 분간하기 힘들게 만드는 기교를 습득하게 될 것이다.  아량과 공정, 절도, 인간성, 용기 같은 말들이 뜻하는 바를 그들은 전혀 모른다.  

- pp 58 -

  

루소가 이미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주장한 것도 흥미롭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직접 몸소 교육의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 덕분이다.  루소는 사상가로서 활약하기 전에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직업을 진전하기도 하였는데 게중에 귀족 자녀의 가정교사 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당장의 쓰임새만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이란 한낱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역사학, 철학, 문학 등은 전공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인문학은 당대의 사회공동체를 존립하기 위해 구성한다. 사회공동체의 미래 비전도 인문학적 상상력 없인 제대로 세울 수 없다. 그런데도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 사회과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규범과 가치가 날로 황폐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학문의 위기, 특히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한 사회공동체의 비판의식 마비와 학문의 실종, 그리고 윤리의 타락을 초래한다.    

설상가상으로 지식생산의 장소가 되어야 할 대학은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진리탐구를 위한 상아탑으로부터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장으로 바뀌고 있다.  대학은 차세대의 인재를 길러낼 뿐 아니라 교양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처럼 주요 자원으로 인적자본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국가에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에밀> <사회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며 유명 저작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은 논문에 담겨져 있는 루소가 주장하는 의견들 중에는 오늘날의 관점과 맞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지식과 학문을 내세워 대중들에게 불량 지식을 제공하거나 권력에 기대는 아부하는 지식인들이 판을 치고 참된 교양과 인성을 함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학문 사회에 대한 루소의 비판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학문, 교육 현실을 비추어본다면 지금도 유효하면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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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9-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존 지식인들의 속을 팍팍 긁어놨으니 루소가 욕을 많이 얻어먹었겠죠.그런데 루소의 지명도에 비해 댓글이 너무 한산하네요.왜 그럴까...

cyrus 2011-09-1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이 저작물의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게 아닐까요? 짧은 니
내용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루소의 비판의식과 교육론에 대해 공감이 많았습니다
 

 

  

  때아닌 삼재(三災) 논쟁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올해 삼수에 도전하는 녀석이 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삼수생에게 시험 합격을 위한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작은 동네 호프집에서 친구 여러 명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술과 안주를 벗삼아 즐거운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에 삼수생 친구가 갑자기 '삼재'(三災) 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작년부터 삼재라서 과연 올해 수능시험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든다고 하였다.   작년에는 홀로 독서실을 다니면서 EBS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까지 시험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적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수생 친구는 작년 수능시험의 좋지 않은 결과가 일어난 원인이 다 삼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무조건 하는 일마다 꼬인다거나 좋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고 하였다.   예전부터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시던 아버지의 증세가 더욱 심각해지셨고 올해 모의고사 성적들이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등 삼수생으로서의 말 못한 고통을 토로하였다.    

그러자 한 친구가 삼재는 1년을 주기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삼수생을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작년의 기억은 잊어버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성격의 나는 이를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위로를 그 친구에게 삼재는 1년 주기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삼재는 3년 주기라고 하였다.  사실 나 역시 용띠 삼재이기 때문에 삼재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때부터 올해까지 삼재가 끼어있기 때문에 삼재를 3년 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술기운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임의 대화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구들은 삼재의 주기가 몇 년인지 열띤 토론(?)을 하게 되었다.  몇 몇 친구는 자꾸 1년 주기라고 우겼고 나와 삼수생 친구는 3년 주기라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 지갑 안에 있는 삼재를 예방하는 작은 부적까지 내밀면서까지 '삼재 논쟁'(?)은 약 20분 정도 이어졌다.  

결국 술기운으로 인한 시간을 낭비하는 논쟁답게 마무리는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다. 결국 논쟁의 결말은 삼재는 완전히 믿을게 못된다는 속설에 불과하다는 공통의 의견으로 싱겁게 마무리지었다.

 

 

  나에게 삼재란..? 

집에 돌와오면서 포털 사이트에 '삼재' 를 검색해봤다.   생각해보니 '삼재' 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삼재의 뜻을 알고나니 술자리에 했던 삼재 논쟁은 무의미한 허무한 대화였음을 알게 되었다.     

삼재의 '삼'(三)은 3'년 주기' 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유명 포털사이트 백과사전에 의하면 삼재의 정확한 의미는 '인간에게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삼재는 1년 주기도, 3년 주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과사전에 소개하고 있는 삼재의 의미가 내가 알고 있던 '삼재' 의 의미와 다르면서도 복잡하였다.   그리고 삼재의 재앙에도 각기 다른 종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종류를 보면 ① 도병재():연장이나 무기로 입는 재난, ② 역려재():전염병에 걸리는 재난, ③ 기근재():굶주리는 재난이 있다. 또 대삼재()라 하여 ① 불의 재난(), ② 바람의 재난(), ③ 물의 재난()을 말하기도 한다. 9년 주기로 들어온 이 삼재는 3년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그 첫해가 들삼재, 둘째 해가 묵삼재(또는 눌삼재), 셋째 해가 날삼재가 되어 그 재난의 정도가 점점 희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첫번째 해인 들삼재를 매우 겁내고 조심하는 풍습이 있다.

그 대책을 살펴보면 첫째가 매사를 조심하는 방법이요, 두 번째는 부적()이나 양법()을 행하여 예방하는 방법을 썼다.  

① 부적:삼재적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출입문의 위쪽에 붙여 둔다. 부적은 머리가 셋, 발이 하나인 매()를 붉은 물감으로 그린 그림인데 이때 물감은 한약재인 경면주사()를 쓰는 것이 원칙이다.

② 양법:삼재가 들 사람의 옷을 태워서 그 재를 삼거리에 묻거나 그해 첫번째 인일()이나 오일()에 세 그릇 밥과 3색 과일을 차리고 빈다. 또 종이로 만든 버선본을 대나무에 끼워 정월 대보름에 집의 용마루에 꽂고 동쪽을 향하여 일곱 번 절하고 축원한다.  

③ 나이와 삼재:사·유·축(··)생은 삼재가 해()년에 들어와 축()년에 나가고 신·자·진(··)생은 인()년에 들어와 진()년에 나가고 해·묘·미(··)생은 사()년에 들어와 미()년에 나가며 인·오·술(··)생은 신()년에 들어와서 술()년에 나간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사실...    백과사전 속 내용이 도통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3번의 '나이와 삼재' 같은 경우에는 십이지신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무척 헷갈린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용띠 삼재다. 올해가 삼재 마지막 년이다.   나는 삼재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그냥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장은 다른 편이다.   유독 나에게 삼재를 강조하셨기에 지금까지 내가 삼재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이다.    한 번은 나에게 삼재가 끼어 있는 시기에는 절대로 집 밖으로 멀리 나가지 말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셨다.    어머니가 가끔씩 다니시던 절의 큰 스님 말씀으로는 삼재가 끼여 있는 시기에 내가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안 좋을 일이 생긴다나...     그리고 삼재의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부적까지 구입하면서 지금 내 지갑 안에 모셔두고 있다.    

 

  

  삼재의 시기 때 있었던 일들  

 

 1) 2008년, 삼재 이전

그런데 2009년, 2010년 그리고 올해까지 삼재가 끼여있던 시기들을 회상해보면 그렇게 좋지 않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수생 친구처럼 갑자기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 일상이 꼬이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 좋은 일들은 가장 재앙이 심하다는 들삼재가 있는 2009년이 아니라 삼재와 관련이 없는 2008년에 일어났다.  

일단 2008년, 나에게 가장 안 좋은 일은 바로....    군 복무이다.   이건 뭐,,, 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기억하기 싫은게 군인이 되어 훈련소로 향하는 것일게다. ^^;;   

그 다음으로 안 좋은 일이 그 해 이병이었을 때 유격훈련 행군 도중에 오른발에 골절상을 입었던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골절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 인생에서 가장 큰 부상이었다.  군 생활 잘 하다가 한순간에 발을 다치게 되어 3개월동안 군 병원에서 생활을 했으며 그 곳에서 일병 계급을 달게 되었다.   

이제 막 자대 생활에 정착하려는 이등병에게 오랜 기간동안 군 병원 생활을 하게 되면 퇴원 이후에도 제대로 군 복무를 할 수 없다.  군인들에게 군 병원 생활은 마음껏 편하게 먹고 놀고 잘 수 있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다.   그래서 편한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퇴원 이후 군 생활이 쉽지가 않다.    머릿속에는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배우기 시작한 병기본, 훈련 내용과 같은 군사적 지식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대신에 어여쁜 간호장교님의 얼굴만 남게 될 뿐이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나는 군 병원에서의 생활을 그저 침대에서 누워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배우고 있었던 병기본 공부는 물론이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자격증 공부도 틈틈이 하였다.  (내가 군 복무하고 있었던 당시 이등병들은 자대에서 자격증 공부는 아직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다. 부대 내무반 생활 환경마다 다르지만 자격증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상병 때부터 가능하다)     그리고 이 때만큼 독서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군 병원 안에는 환자 장병들을 위한 독서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덕분에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한창 밖에서 베스트셀러라고 읽혀지던 책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병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읽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부모님이 병원에 면회오시면서 사오신 책이 바로 <신> 1, 2권이었다.  (그 당시에는 1, 2권만 출간되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편안히 읽기도 했었는데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였다.  같은 병실에 만난 다른 부대 장병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 병원에 복무 중인 친한 의무병까지 이 책을 읽고 싶을 정도로 나름 책이 인기가 있었다.   

 

 

 2) 2009년, 들삼재의 시작   

2009년, 삼재의 시작을 들삼재라고 하는데 재난의 정도가 가장 강한 해이기도 하다.   

사실 이 때가 일명 '군 생활이 꼬였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몇 개월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다.    

2009년 2월에 군 병원에서 퇴원하고 드디어 자대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이등병 생활의 반을 병원에서 보낸 일병에 대한 주변 선임병과 동기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필 복귀하던 시기가 소속 소대가 다른 지방으로 파견 중이라서 나는 어느 소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전투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잉여 병력이었다.   

내가 자대에 배치되면서 주어진 주특기가 특성상 많이 뛰어야하고 걷어야하기 때문에 당시 중대장님과 행정보급관님들 그리고 소대 간부님들 사이에서 나의 향후 소속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오고 갈 정도였다.    나는 꼭 에전 소대에 소속되고 싶다고 강력하게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당시 부대 일정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한 2개월동안 본부 소대와 함께 지내면서 무소속 소대 일병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본부 소대 사람들이 성격이 착하고 입원 전에도 원만한 관계를 맺어서 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발을 다치기 전과 군 병원 생활 이후 주변 선임병과 동기들의 시선과 반응이 너무나도 달랐다.    

 한 때 '소대를 짊어나갈 수 있는 유망한 이등병' 에서 한 순간에 '아무짝도 쓸모 없는, 어중간한 일병' 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 선임병과 동기들은 내가 군 병원 생활을 은근히 시샘하였다.   이등병 주제에 상, 병장도 하지 못한 편한 생활 다 누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가 병원 생황을 어떻게 했는지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단순히 '병원 생활' 을 '놀고 먹고 자는 생활' 로만 알고 있었다.   

 

 

 

 

  

 

 

  

 

2009년에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기억 남은 책이라면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이었다.  처음으로 강상중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책을 읽었던 당시 그 어떤 소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잉여 전투병에게는 한국인도 아닌, 그리고 일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재일교포 2세의 입장이 가슴 속 깊이 와닿았다.    비록 정신적으로 힘든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그 때의 경험 그리고 강상중 교수의 책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로서의 고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3) 2009년, 시련의 군생활 속에 피운 긍정의 꽃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시 예전 소대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상병 마크를 군복과 군모에 오버로크를 해도 여전히 '군 병원 생활' 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 역시 나의 이미지에 오버로크 되어 있었다.   말과 생각은 '후임병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선임병' 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소대 생활을 빠르게 적응하는게 쉽지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평소에 나를 좋게 봐주던 소대장님이 다른 부대로 전임하시게 됨으로써 군 생활은 그야말로 '꼬이게' 되었다.   새로 온 부임한 소대장님은 평소에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나를 '소대 내에서 열등한 장병' 으로만 생각했다.   

한 번 찍힌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못하는게 군대의 현실이다.  결국 간부의 눈 밖에 난 이미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해 8월, 나는 다른 부대로 파견으로 복무하게 되는 다른 소대로 강제적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부대의 파견 복무는 맞은 편 북한 부대와 대치할 수 있는 압록강 주변에 근무하는 것이다.   특히 겨울이 되면 야간 근무 시 춥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내가 파견 근무 소대로 옮긴다는 사실에 주변 선임병과 동기들은 내가 군 생활을 제대로 꼬인 대표적인 케이스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도 파견 근무 소대원들과 친분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완전 친하지도 않은 소대였다면 정말 군 생활이 꼬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숙한 소대였다고 하더라도 그 쪽 소대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야하는 것이 내가 먼저 해야할 첫번째 일이었다.  그 곳에서도 안 좋은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소대 생활에 적극절으로 임하였고 무엇보다도 절대로 다른 소대로 강제적으로 옮겼다고해서 풀 죽은 모습을 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최대한 웃으려고 하였고 훈련 때에는 최대한 뛸 수 있을만큼 뛰었다.    

그리고 오랜 노력 끝에 좋은 일들도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파견 근무에 임한 노고가 소대 간부님과 소대원들에게 인정되어 부대장 표창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군 생활 처음으로 포상 휴가라는 것을 받게 된 순간이었다.     좋은 일은 계속 찾아왔다.  부대에서 시행 중인 한자 자격증을 따게 되어 또 포상 휴가를 이어서 받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소대원들은 드디어 내 군생활에 '꽃이 피었다' 라고 할 정도로 나를 예전보다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4) 2010년 묵삼재, 알라딘과의 만남  

삼재의 두 번째 시기인 2010년에는 머리 아플 정도로 힘든 일이 없었다.  오히려 2010년은 나에게 좋은 일이 많았다.  

그 해 5월에 전역하게 되면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알라딘 서재 블로그를 하기 시작하였다.  군 입대 전에는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는데 군 생활하면서 갑자기 해보고 싶은 경험들 중에 하나가 바로 블로그 활동이었다.    사실 알라딘 블로그를 하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땡스투 적립금이었다.     군 입대 전에도 간간이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했었지만 땡스투 적립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블로그에 리뷰나 페이퍼를 남기면 적립금을 모을 수 있다는 제도 자체가 평소 책을 많이 구입하지 않는 나에게는 참으로 획기적인(?) 제도였다.  (지금은 땡스투 적림금의 폐해를 알고 있지만.. ^^;;)       그래서 하게 된 것이 서재 블로그 활동이었다.  적립금을 모으되 리뷰나 페이퍼만큼은 정성껏 쓰려고 노력했다.   

역시 노력한만큼 그에 따른 좋은 결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비록 처음으로 7기 신청할 때는 탈락되었지만 운 좋게도 8기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라딘이나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리뷰 이벤트에 참여하여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알라딘 덕분에 나의 독서를 위한 재정적(?) 지원만 얻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온라인상이지만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좋은 서재 이웃분들도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서재 블로그에 처음으로 댓글을 다셨던 분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에 그 분이 아니었다면 서재 블로그는 무척 썰렁했었을 것이다.   그 분의 댓글 덕분에 나도 다른 이웃분들의 서재 블로그에 가게 되면 댓글을 남기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5) 올 해, 날삼재  

삼재의 마지막 시기인 날삼재는 재앙의 정도가 가장 희박하다.   아직 2011년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재앙' 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일은 겪지 않았다.  

올 해가 3년 만에 복학하게 되어서 성적장학금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아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비록 2등이지만 그동안의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동안 2009년부터 올해까지 쭉 삼재의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의 앨범에 꺼내보니 그저 불행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때가 좋지 않을 일들이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인 것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몰래 독서모임으로 한 달에 두 번 서울을 왕래했던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나는 정말로 이번 삼재를 억세게 운 좋게 보낸 것이다.  이게 다 부적의 효험 탓인지 모르겠지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 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것은 한 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 알렉산드르 뿌쉬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연 -

 

 

'긍정의 힘' 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참고 견딘다면 즐거운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경험마저도 언젠가는 미래, 곧 나에게 다가올게 될 긍정적인 현실의 '열매' 로 이루어지는 소중한 씨앗이 될 수 있다. 저 유명한 뿌쉬낀의 시 구절처럼 말이다.  
   

 

  

P.S>

'삼재' 를 검색하게 되면서 우연히 '액년'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액년이란 '운수 사나운 해' 를 뜻하는데 속설상 보통 남자는 25, 42 , 61세, 여자는 19, 33, 37세를 액년의 시기로 보고 있다.     

이런,,,   내년이면 나 25인데...   심지어 2012년은 전세계적으로 지구 종말의 해로 운운하고 있다.    

과연 내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심 걱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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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1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재라는 말을 어릴적 할머니께 들은적이 있어요. 솔직히 뜻은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요 ㅎㅎ 근데 주어지고 짜여진 운명같은 것보다는 엄마 몰래 서울 다니신 cyrus님의 모험이 인생을 만드는건 아닐까도 싶어요 ㅎㅎ

cyrus 2011-09-17 21: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어머니께 그런 말씀을 듣게되니 속으로 얼마나 찔리던지.. ^^;;
지금도 제가 서울에 돌아다니는걸 모르시거든요 ㅎㅎ

순오기 2011-09-17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삼재 공부를 하는 새벽이네요.^^
어머님이 들삼재 날삼재 얘기를 하셨지만 그땐 잘 모르고 지났고~ 지나서 생각하니 그랬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받아들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다고 결론지었어요.^^

cyrus 2011-09-17 21: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중에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최악의 경험이 아니었던거
같아요, 만약에 제가 삼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했었을거에요. 제가 삼재라는 것을 작년에 처음 알게 되었거든요 ^^;;

마녀고양이 2011-09-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알라가 용띠예요, 안 그래도 시어머님이 말씀해주시던데,
코알라 올해 초반은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꽤 좋은 상태인지라..
그래도 천기란게 무서워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지요.

여하간 9년 주기의 세가지 액운이라는 해석을 첨으로 알았네요.
시루스님, 서재 활동 즐거우신가요? 다행이예요,,, 그래야 오래 같이하지요~ ^^

cyrus 2011-09-17 21: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저는 올해가 끝나려면 3개월 남았는데,, 너무 함부로
서재에 글로 남긴거 같아요 ㅎㅎ 괜찮..겠죠..? ^^;;

아마도 9월 말부터 되면 학업 때문에 바빠질거 같아요, 중간고사가
10월 중순에 있으니까요.

stella.K 2011-09-17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멀리가지 말랬다고 하지만 서울 정도쯤이야...?!
그것도 바다 건너 가는 정도가 되야하는 거 아닌가?
뭐 이런 거 미신이라고 믿지 말라고는 말은 못하겠다만,
매사 조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결국 우리가 가저야할 삶의 자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자의 액삼년을 다 지나왔는데 특별히 해당사항은 없었던 것 같아.
나쁘다면 작년, 올핸 것 같아.
몸이 안 좋아졌으니까.
하지만 이때 또 리모델링을 받고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더라.
더 나빠지기 전이니까. 신호를 보내는 거였더라구.ㅎ

그런데 시루스 이런 말하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젊구나. 올해도, 내년도.ㅋ
또 모르지 내년에 더 좋은 일이 있을지.
바라는대로 된다잖아.^^


cyrus 2011-09-17 21:23   좋아요 0 | URL
ㅎㅎ 이러다가 저 유학도 못갈까봐 걱정이에요. 뭐 지금 상황으로서는
유학 갈 형편은 안 되지만요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누님은 액년에 아무 탈이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내년이면 20대가 꺾이네요. 여기서 껶이다라는게 군대에서 특정 기반의 절반을 지났을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정말로 젊었을 때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던데 후회하지 않는 젊음의 시기를 보내고 싶네요 ^^;;


2011-09-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중략)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

   

 

 

  난쏘공,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기록'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난쏘공’ 이란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1978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연작소설은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고통받던 노동자와 빈민의 삶을 그렸다. 당시 정권으로서는 불온하고 위험한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형상화한 이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출간된지 30여 년이 지남 지금까지 200쇄를 돌파했다. 책 한 권이 30년 가까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난쏘공>의 200쇄 출판이 자랑거리가 아닌 '부끄러운 기록' 이며 '억압의 시대를 기록한 소설이 아직도 읽혀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30여년 전의 불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 을 증명하는 기록의 반증이라고 하였다.  작가의 말대로 70년대의 불행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빈부와 소외계층 문제는 우리 사회의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글이 꾸준히 읽혀져 온 사실이 부끄럽다고 여기지만 그 글을 읽었던 독자, 우리들 역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될거 같다.   청소년 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목록에는 예외 없이 <난쏘공>이 포함되곤 한다.  특히 입시교육을 받고 있는 중, 고등학생들에게는 <난쏘공>은 대학수능시험 언어영역 시험에 지문으로 출제될 수 있는 작품이며 대학논술에서도 인용되는 필독서로만 인식하고 있다.  결국 학생들은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시대의 현실상을 보지 못한 채 오직 '대학입시' 을 위해서 읽어야하는 그저 그런 소설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 직시한 이데올로기와 빈부 격차 문제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해야할  '고민' 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청소년들은 그 진지한 고민조차 하지도 못한채 때이른 독서로 강요 당하고 있는 셈이다.      

 

 

  1970년대 '못 가진 자' 들의 이야기  

소설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 사는 난장이 일가의 이야기다. 난장이 아버지와 어머니, 영수 영호 영희 세 남매는 ‘날마다 지기만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루하루 살기도 벅찬 이들에게 어느 날 철거계고장이 날아든다. 쇠약한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녀야 한다. 죽어라 일해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고, 달나라로 떠나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결국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다. 

도시 빈민의 처참한 생활상,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실태를 정면으로 고발한 소설은 1970년대 사회에 대한 강렬한 문학적 보고서로 꼽힌다. 산업 개발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사회에 이 소설은 커다란 충격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는 외형적으로는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되어 근대화가 급진전되는 시기였지만 독재정권이 장기화되고 부정부패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경제적 위기감이 고조된 시기이다.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빈부 격차로 인한 계층 간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농촌과 도시 간의 소득 격차도 커지게 되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산업화로 인한 소외 현상이 심각해지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난쏘공>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대립적인 구도로 사건이 형성, 전개되고 있다.  난장이 가족이 사는 판자촌과 ‘다른 세계’ 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거기에선 매일같이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공간적으로 도시 변두리의 철거민촌, 노동 계층의 비참한 생활상과 개천 건너편에 위치한 잘 사는 계층의 화려하고 타락한 생활상으로 세계는 극명하게 갈린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 소외된 사람을 의미하는 '난장이' 가 있다면 반대로 난장이보다 덩치가 큰, 거대 자본을 상징하는 '거인' 도 존재하게 된다.    키 작은 난장이가 덩치가 크며 힘이 센 거인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속 난장이 가족들은 자본가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만다.   영희는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잇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기게 되며 그녀의 아버지인 난장이는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자본주의 4.0과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난쏘공>은 12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다.  그 중에 동명제목의 소설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2년 전 용산 참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재조명되기도 했었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연작단편 중에 네 번째로 구성된 동명제목의 소설만이 제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데다 '난쏘공' 이라는 제목이 주고 있는 대중들의 인식이 워낙에 강다하다보니 나머지 단편소설들의 문학적 가치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  그나마 '난쏘공' 다음으로 알려진 것이 첫 번째 단편인 '뫼비우스의 띠' 와 열 번째 단편 '클라인씨의 병' 그리고 열한번째에 수록된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이다.  

<난쏘공>은 상징적인 형식과 언어를 통해 비참한 1970년대 사회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소설 집필 당시의 사회에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형식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그 중에 열한번째 연작소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는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같은 경우에는 최근 '따뜻한 자본주의' 를 표방하고 있는 '자본주의 4.0' 와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좋다.   

자본주의 4.0 이란 20세기 초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 시대(자본주의 1.0)를 지나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내세운 수정자본주의(자본주의 2.0), 1970년대 자유시장자본주의(신자유주의·자본주의 3.0)에 이어 등장한 새 자본주의를 뜻한다.   자본주의 4.0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병리적 현상, 즉 빈부격차, 중산층 빈곤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따뜻한 자본주의' 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의 일방적인 성장에만 치중하기보다는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는 동시에 중소기업에도 공정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회적 모순을 정부의 힘이 아닌 시장과 기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4.0이 이전의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자본주의 4.0을 이루고 있는 내용의 요지들은 보게 되면 예전부터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할 때 항상 언급되던 내용들이다.  더구나 시장의 문제와 빈곤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업이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대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홀대하는 지금의 기업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동떨어져보인다.     

마르크스가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를 서로 목에 칼을 겨누는 대립, 투쟁적 관계라고 비유했던 것처럼 시장의 기능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자본과와 노동자가 서로 공생하고 협동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자본가는 '이익' 을, 노동자는 '생존' 을 중요시하다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 계급의 대립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속 은강그룹 노동자들은 기계처럼 착취당하며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있다. 이에 반해 은강그룹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높은 이윤을 얻고 있다. 은강그룹은 거대한 기업으로,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저임금과 높은 이윤’ 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은강 그룹 회장의 손자인 경훈이 전개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본가의 비윤리성과 부도덕성,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화해 불가능성 등을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경훈이 꾸는 꿈이 인상적이다.

 

나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고, 깨기 직전에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물을 쳤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 내 그물로 오는 살찐 고기들이 그물코에 걸리는 것을 보려고 했다. 한 떼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큰 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밖으로 나와 그물을 걷어올렸다. 큰 가시고기들이 수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것들이 그물코에서 빠져 나와 수천 수만 줄기의 인광을 뿜어 내며 나에게 뛰어올랐다. 가시가 몸에 닿을 때마다 나의 살갗은 찢어졌다. 그렇게 가리가리 찢기는 아픔 속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다 깼다. 

- 조세희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중에서 -

  

그물과 가시고기의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달려 있는 가시고기들은 헐벗고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가시고기들이 경훈이 쳐 놓은 그물을 뚫고 나와 경훈을 향해 달려든다. 이는 노동자들이 아무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경훈은 가시고기의 꿈을 꾸고 난 후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라고 말하면서도 혼잣말을 하게 되는데 경훈의 의식 속에는 노동자들을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도 마땅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계속되는 '난장이' 들의 비극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가난이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던 말이 나오던 전후 시대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는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절대적 빈곤상태에 놓인 가난이라는 말 대신 사회적 양극화라는 그럴 듯한 표현으로 가난을 이야기하며 정계 인사들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 전문가인마냥 자처한다. 눈으로 봤을 때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었다 하여도 여전히 자고 일어나면 가난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거나 가난과 빈곤을 둘러싼 엽기적인 사건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스스로 빈곤하다고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강제철거로 누울 자리조차 찾지 못하는 철거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인들과 노숙인,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과 청소년들이 바로 그들이다. 비정규직자들은 외환위기 이후부터 고용의 불안에 시달려야만 했고, 젊은 패기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야할 청년들은 실업이라는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난장이' 는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공장 노동자였고,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도시빈민을 상징하는 시대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가난한 노동자를 조명했던 조세희의 <난쏘공>에 나오는 그 난장이는 옷을 갈아입을 뿐, 여전히 우리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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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1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세희 소설가 말대로, 이 소설이 점점 "한 때 그런 무지막지하고, 무서운 시대가 있었지.."라고 읽혀야 하는데, 수치상으로나 체감상으로나 빈부격차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누군가는 내몰려 죽음에 이르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낙원구 행복동'이라...

cyrus 2011-09-16 18:56   좋아요 0 | URL
소설 속 배경의 이름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소설 속 이야기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씁쓸하죠.

아이리시스 2011-09-1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친구가 가져간 난쏘공 어떻게 됐어요? 아직 멀었어요?ㅋㅋㅋ 아프지만 유명해서 막막한 마음으로 읽었었는데 뭐 지금도 변함 없으니 씁쓸해요. 세상은 좋아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의 골은 더 깊고 커졌어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어쩐지 아찔하네요. 그래서 낚시의 행위를 좋아하지, 고기를 포획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없고, 때로 미친 폭력이라 생각하는 저입니다. 그렇다고 생선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썩 즐기지도 않지만 갈치조림이랑 고등어찌개는 너무 맛있..^^

cyrus 2011-09-16 22:26   좋아요 0 | URL
네, 아직 못 받았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돌려준댔어요. ^^;;
<난쏘공>에서 '난쏘공'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고 인상 깊은 소설이
'가시고기'에요. 정말 사회적 상황을 기가 막히게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매력적이에요.

그런데 아이리시스님은 부산에서 사시는데 생선을 싫어하시는군요.
지방 사람들은 부산 사람들이 생선회를 즐겨 먹는다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보네요.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편견  

최근에 출간된 진중권<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은 3년 전에 출간된 <고전예술 편>을 이은 2편격이다.    1권 고전예술에는 고대부터 인상주의까지 모더니즘에 들어서기 전의 예술사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면 <모더니즘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책 내용을 소개하기 전부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를줄 아는 '현대인' 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현대미술를 어렵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미술은 너무 단순하고 고색하다고 해서 낡고 뛰덜어진 예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대적인' 현대예술은 복잡하다고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해 못하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당연히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복잡하다' , '고전미술은 그림만 봐도 화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데 반면 현대미술은 도통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당연히 모던(modern)하며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와 선입견에 불과하다.  

진중권은 <모더니즘 편>에서 현대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모더니즘' 적 예술사조를 소개하기 위해서 단순히 기존의 미술사에서 사용하던 통사적 전개보다는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을 빌어 수많은 현대미술 사조들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모더니즘 편>에서는 한스 제들마이어(1896~1984)라는 미술사학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가 선택한 전개방식이 사뭇 이례적이다.   제들마이어는 예술 '보수' 주의자 로서 현대미술의 모순을 끄집어내는 미술사학자로 유명하다.  평소에 '진보' 입장에 서서 사회적 이면에 독설하기로 유명한 저자의 모습과 상반되어 흥미롭다.   

제들마이어는 20세기 초에 등장하다가 사라진 현대예술의 유행들이 전통적 예술 가치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현대적 예술 가치를 찾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쉽게 좌절되어 심지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되돌아갔다고 분석하였다.  현대예술의 전형적인 특징인 동시에 자기모순으로로 이르게 한 네 가지 예술적 근원으로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의 의지, 근원을 향한 열정, 광기에 대한 호기심’ 을 제시한다.

  

 

  순수성의 추구 : 야수파와 입체파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년 

(pp 36 수록) 

  

'순수성의 추구' 란 회화에서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색채, 형태, 원근법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서 회화는 관객들을 위시한 표현 양식과 그에 대한 의미에 부여하다기보다는 회화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 배제시킴으로서 순수한 형태의 회화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순수성을 표현하고자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순수성' 이라는 것이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미술 입문자나 독자에게는 그저 추상적인 용어로 들리지만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현대미술사조가 야수파(fauvisme, 포비즘)입체파(cubism, 큐비즘)이다.   

야수파와 입체파는 20세기 초 거의 동시에 등장한 미술운동이었는데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표현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다.   야수파가 인상파의 화풍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일시적으로 교류를 맺게 되어 형성하였지만 입체파는 인상파로 활동했던 폴 세잔의 구축적인 원근법에 매료되어 초창기 입체파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야수' 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수파 소속 화가들은 색채의 강렬함을 강조하였다.  그림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사물과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실제 색채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실제 색과는 상관없이 원색으로 표현하였다.  야수파 화가들은 원색으로서 빨강, 노랑, 파랑 등과 같은 화면의 전체적인 효과를 펼칠 수 있는 강렬한 색채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년  

(pp 63 수록)  

 

그는 굉장히 단순하고 변형된 금속성의 인물을 고안했다.  그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 인물, 집 등 모든 것을 기하학적 윤곽과 입방체(cubes)로 축약했다.  

- 루이 보셀의 비평,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 pp 55 -

   

반대로 입체파는 '정육면체' 를 뜻하는 Cube에서 비롯되었듯이 색채보다는 형태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당시 비평가들 역시 입방체로 구성된 입체파 회화의 표현방식에 대해서 경멸적인 비난을 퍼부었는데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조롱 섞인 의미에서 '입방체' 그리고 '입체파' 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세잔이 원근법이라는 오랫동안 예술가들을 지배한 기교를 제거한 것처럼 입체파 화가들 역시 원근법의 고정된 시선 대신에 여러 개의 시선이 공존하는 화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루이 보셀의 비평대로 모든 형태들을 기하학적 원형에 가깝도록 표현하였다. 

하지만 오직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다보니 정작 예술적 가치 자체는 관객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모호적인 용어에 불과하며 그런 관념에 불과한 '순수성' 을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추상미술이라는게 많은 이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들마이어는 추상미술을 '인간 행위의 근본을 무시' 하는 '사이비 종교와 같은 비교(秘敎)적인 예술'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pp 21)  

 

 

  근원을 향한 열망  : 표현주의

 

 에밀 놀데, <황금 송아지 주위의 댄스>  1910년 

(pp 29 수록)  

 

20세기 초 독일에서 등장한 표현주의 미술은 화가의 감정 또는 화가를 둘러싼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순수함을 표현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표현주의 소속 화가들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들어내고, 원시적이면서도 격앙된 색채를 통해서 근원적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들마이어는 오직 순수함을 추구했던 표현주의의 구호에 모순을 지적한다. 인간이 더욱 순진해지기 위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무의식에 숨겨진 어두운 심연으로까지 파고들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전쟁이 남긴 무력감과 허무주의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실망과 동시에 예술적 변질감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표현주의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몇몇 표현주의 화가들은 '11월 그룹' 을 형성하여 정부의 후원 밑에서 활동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의 표현주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고 키르히너 같은 화가는 자신의 예술이 그토록 믿어왔던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 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그리고 에밀 놀데나치당에 가입함으로써 표현주의 예술을 다시 한 번 부흥시키려고 하였지만 놀데의 정치적 전략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훗날 나치의 히틀러는 표현주의 예술을 '퇴폐예술' 로 낙인찍어버렸다.  

 

 

  광기에 대한 호기심 : 다다와 초현실주의   

 

 

조르조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년  

(pp 217 수록)  

 

키리코의 작품에서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어떤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듯하다.  엇갈린 원근법,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정체불명의 광원(光源)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로운 분위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수수께끼 같은 '경이' 를 보았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pp 218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다 초현실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다다는  본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나 전쟁 이후에 형성된 무의미함 그리고 비합리성, 반도덕을 강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들을 부정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전쟁 이전까지 예술작품이 외적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으며 부조리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에 조롱과 경멸하는 동시에 재앙의 시대를 살아나갈 수 있는 묵시론적 광기를 통해서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가치와 형식을 거부하려는 다다는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변화됨으로써 '다다' 로서의 고유한 무정부주의적 의미가 퇴색된 채 하나의 예술운동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다다 특유의 허무주의만으로 예술의 본질을 찾을 수 없다는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라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을 주창하였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 또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할법한 낯선 꿈의 세계 그리고 광인의 착란 증상이 만들어낸 광기의 세계야말로 전쟁에서의 정신적인 해방과 예술로써의 진정한 창조 상태로 보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역시 예술의 내재적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광기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이 진정 '광인' 이 아닌 이상 초현실주의적 예술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정신 분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구축의 의지 : 구축주의, 바우하우스

 

 

 블라디미르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최초 모형,  1920년 

 

시대가 가면 갈수록 현대미술은 더욱 더 새로운 유행의 예술사조들이 등장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예술가들은 예술의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 기술, 기하학' 과 같은 기계 역학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러시아 구축주의의 주요 멤버로 활약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철판, 유리, 철사 등에 의한 공간구조에 창안하여 약 400 m 높이의 경사 나선형인 철골구조물인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계획하였다.  당시 철물이 부족한 소비에트 체제의 러시아 재정 상태로 인해 타틀린의 원대한 꿈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인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하여 '기술적 구축의 예술' 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그후 기술과 예술의 만남은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미술에서 추구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독일 데사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건물 

 

'기술과 예술의 만남' 이라는 현대적 예술적 인식은 독일에서도 정착되기 시작하는데 러시아에서 건너온 바실리 칸딘스키(칸딘스키 역시 러시아 특유의 구축주의 예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와 파울 클레 등을 중심으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Bauhaus) 라는 조형예술 전문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과 예술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교육에 치중하였다.   바우하우스에 소속된 학생들과 교수들은  오늘날 산업적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미래' 를 위해서 '과거' 로 돌아간 현대미술  

결론적으로 제들마이어는 이 네 가지 근원으로 인해서 현대예술은 단순한 비(非) 예술로 전락, 역설적으로 자신이 기피하고자했던 예술적 가치와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자기모순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원인으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황폐하고 부조리한 현대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그릇된 우상숭배를 오직 예술에서만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현대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파괴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급진적인 혁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제들마이어는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예술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진정한 조건으로는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라' 는 철학자 셸링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복음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정신' 이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pp 33)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과거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예술 '보수' 주의자다운 결론이다.  저자 역시 현대예술의 자기모순과 이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린 제들마이어의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만 가지고 그가 예술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섣부른 결론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평소에 '진보주의자' 로써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독자들에게는 '예술' 에서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에 동의하는 저자의 모습이 흥미로울 것이다.  저자가 말한대로 이 책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면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예술의 진면목을 알게 되며 제들마이어의 예리한 분석에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비록 '모더니즘' 예술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제들마이어의 분석만을 가지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보수' 와 '진보', 상반된 두 가지 관점으로 현대예술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책의 구성면에서 아쉽게 느껴지지만 복잡하면서 어렵다던 현대예술의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들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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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9-15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나요?.,,,
결국 현대미술도 '낯설게 하기군요... 작가 마음대로, 보는 사람 마음대로, 참으로 불칠전한 것이 현대미술이 아닌가 싶네요... 진중권의 미학세트를 사놓구선 포장지를 아직 뜯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걸 글을 읽으면서 생각났어요. 사이러스님의 글은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군요. 게으론 독자 다녀갑니다..^^

cyrus 2011-09-15 16:30   좋아요 0 | URL
네, 올해 연휴에는 맛있는거 많이 먹고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연휴가 끝나도 여기 대구는 무척 덥네요. 물론 꽃도둑님이 사시는 곳도
더우시겠죠? ^^

stella.K 2011-09-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대단하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 쓸 것 같고,
뭐라고 쓰긴 써야하는데 난감해.ㅠ

cyrus 2011-09-21 16:03   좋아요 0 | URL
책의 주요 내용들만 뽑아서 정리한거랍니다. 솔직히 인문, 과학, 예술분야
책이 리뷰나 서평으로 쓰기에는 쉽지 않은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