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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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과학상자는 공예를 좋아하는 어린이가 받고 싶은 선물이다. 열려라, 과학 나라!’ 장난감을 만들고 싶은 어린 마음이 주문을 외치자, 과학상자가 열린다. 상자 속에 여러 개의 부품이 있다. 어린이는 고사리손으로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만의 장난감을 만든다. 과학상자에 들어간 어린이가 장난감을 만들면, 과학상자는 발명가와 공학자를 만든다일 년 중 과학상자가 제일 많이 열리는 달은 과학의 날이 있는 4월이다








어린 과학자와 발명가들을 만날 때마다 활짝 열어준 과학상자가 43년 만에 닫는다. 과학상자를 잠그는 날은 124일이다. 24일이 지나면 과학상자를 영원히 열 수 없다.


과학책은 종이로 된 과학상자다. 과학책으로 들어간 독자는 공학자처럼 기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까다로운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과학책이 기계 만드는 법과 실험 과정을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종이 과학상자 속에 들어있는 과학은 씩씩하다. 활발한 과학은 자신을 어려워하는 독자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다. 반면 오랫동안 실험실에서 지낸 과학은 소심하다. 부끄럼쟁이 과학은 독자를 만나는 일을 어려워한다. 실험실에 갇힌 과학이 유일하게 친한 사람은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과학자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과학은 갓난아기다. 아기 과학의 어버이는 과학자들이다. 아기 과학은 말랑말랑한 가설이다. 어수룩한 과학은 실험실 안에서 아장아장 걷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한다과학이 어른이 되려면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그리고 과학자들의 정교한 관리(검증)를 받아야 한다. 어버이 과학자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과학은 커서 고집이 센 도그마(dogma)’가 된다. 명성에 집착한 과학자는 과학을 악용한다. 이들은 자신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과학이 잘못되었는데도 무조건 옳다고 주장한다. 실험실 생활을 청산한 어린 과학은 어버이의 손에 이끌려 을 만난다. 과학은 글을 만나는 순간 말하는 과학책이 된


기존 과학사의 주인공은 현미경, 망원경, 대형 강입자 충돌기와 같은 실험 기구와 과학자의 이름이 붙여진 법칙이다《책을 쓰는 과학자들: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의 주인공은 과학사의 조연을 맡은 과학이다. 이 책을 펼치면 실험 기구를 다루는 과학자가 아니라 펜을 쥔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25백여 년 동안 과학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다. 과학자는 자식 같은 과학 지식이 어떻게 자랐는지 기록했다. 과학책은 초보 단계인 가설에서 시작된 과학이 어엿한 지식이 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앨범이다. 책은 지식을 보관하는 종이 상자다. 과학자들이 종이 과학상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과학은 실험실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종이 과학상자 안에 과학자의 이름도 들어 있다과학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면 책 한 권을 써서 남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과학책은 과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생애를 말해주는 산증인이 된다.




최초의 과학책은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그리스, 중국, 인도, 중동 지역에서 나왔다. 과학상자 1호(책의 1장)는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쓴 문서다. 비록 우리가 아는 책의 형태와 다르지만, 보존이 잘 된 과학 문헌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랍 출신 과학자들은 잊힐 뻔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저서를 발굴했다. 그들은 그리스 과학자들의 저서에 드러난 부정확한 지식을 솎아냈고, 빈자리에 자신들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채워 넣었다. 중동에서 성장한 수학과 의학은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과학상자 1호는 과학자들만 읽을 수 있는 기록물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과학자들은 라틴어로 글을 썼다. 라틴어는 지식인들의 공통 언어였다. 초창기 과학상자는 대중 친화적 과학책이 아니었다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대중도 읽을 수 있는 과학상자 2호(책의 2장)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632년에 출간된 대화: 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관하여를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썼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는 1834년에 만들어졌다. 1834년 이전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자연철학자로 불렸다. 19세기에 대중을 위한 과학상자 3호(책의 3장)가 많이 나왔다과학상자 3호에 속하는 과학책 중에 현재 고전으로 알려진 책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과학상자 3호는 진화론 논쟁을 촉발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종의 기원이다. 소탈한 성격의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자신의 직업을 과학자라기보다 과학 전문 강연가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 강의를 진행했는데, 강의 주제는 촛불이 붙은 양초였다. 패러데이는 과학 강의를 요약한 촛불의 과학을 썼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과학상자 4호(책의 4장)를 열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론은 절대불변의 진리로 극진하게 대접받은 뉴턴(Isaac Newton)의 고전 역학과 유클리드(Euclid) 기하학을 뒤집었다과학상자 5호(책의 5장, 마지막 장)는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 스테디셀러. 칼 세이건(Carl Sagan)코스모스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시간의 역사등이 있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에 언급된 대다수의 과학자는 남성이다. 저자는 여성 과학자들의 글쓰기를 허용하지 않은 과학의 불평등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출판물로 인정받은 책에 중점을 두고, 과학적 글쓰기의 역사를 살핀다면 글 쓰는 여성 과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여성 지식인들은 남자 이름으로 느껴지는 가명을 내세워 책을 썼다. 그리고 동료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여성 과학자들의 편지, 일기, 판매 목적이 아닌 기록물 속에도 과학이 있다. 저자가 강조한 대로 글이 과학을 만들었다면,책이 아닌 글에도 주목해야 한다. 실험실이라 할 수 없는 다락방. 그곳에, 과학에 미친 여자들이 살았다. [주1]


책을 쓰는 과학자들은 단순히 과학책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과학책들의 단점과 한계까지 알려준다. 알프레트 베게너(Alfred Wegener)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대륙이동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지질학자들은 거대한 땅덩어리가 이동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자는 베게너가 대륙의 이동 속도를 과장했으며 지질학자들이 이해할 만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이중 나선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지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왓슨의 글쓰기를 칭찬하면서도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전하는 승리의 이야기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조만간 장난감을 만들 수 있는 과학상자가 사라지지만, 종이 과학상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책은 살아 있다. 하지만 과학 지식을 저장하는 종이 과학상자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 있지 않은 종이 과학상자가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유사 과학이 담긴 종이 과학상자의 유사품도 있다과학책을 객관적인 책이라고 믿는 것은 과학을 가치중립적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과학은 반증과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학문이다.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학 지식의 한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런 과학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잘 만든 과학책은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를 배려할 줄 안다. 그리고 난해한 과학 지식을 최대한 쉽게 풀어 써서 알려준다. 하지만 오류로 확인된 과학 지식을 걸러내지 못할 때도 있다. 과학자들은 기존의 과학 이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글을 썼다글이 있어서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과학자들의 도전적인 글쓰기 덕분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과학책은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독자를 위해 항상 열려 있다.






 <cyrus가 쓴 주석과 정오표>







[1] 19세기 여성 문학사를 정리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함께 썼음, 박오복 옮김, 북하우스, 2022)의 책 제목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 254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한 화학자가 화학 결합을 자세히 밝혀내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로 다른 원소가 연결되어 더 큰 구조를 이루고 화합물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낸 것이다. 1901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나[주2]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역사상 네 명뿐인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된 라이너스 폴링이 그 주인공이다.

 

[원문, 201]


 Meanwhile, on the other side of the Atlantic, an American chemist was making fundamental contributions to understanding the chemical bond, the mechanisms by which different elements link together to from larger structures and compounds. Born in Portland in 1901, Linus Pauling was one of only four people to win two Nobel Prize-in his case, in Chemistry and the Peace Prize.



[2]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Portland)에서 태어났다. 폴란드(Poland)’는 오역이다.





* 264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침묵의 봄이전에 해양 생물에 관한 저서를 두 권 썼고,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주3]



[3] 침묵의 봄은 살충제 DDT의 위험성을 지적한 과학책으로, 환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침묵의 봄이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의 대표작으로 많이 소개되면서 바닷속 생물을 주제로 한 카슨의 과학책이 묻히는 편이다. 침묵의 봄에만 주목한 저자는 해양 생물에 관한 저서 두 권의 제목을 언급하지 않았다.

 

카슨의 첫 번째 책은 1941년에 출간된 바닷바람을 맞으며(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2017). 1951년에 두 번째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18)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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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1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아쉽게 됐네. 난 과포자로 살다보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랬다. 43년이나 됐다니. 저걸 첨 보고 읽기 시작한 어린이들이 지금은 중년이란 말이잖아? ㅋ
소개해 준 책도 재있을 거 같다. 신간이라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혹시 중고샵에 보이면 그때나 노려 보마.
잘 지내지? 책 모임 잘하고 있고. 올해도 너의 소식 기대할게. 새해 복 많이 받고, 만사형통해라!^^

cyrus 2025-01-20 06:26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주는 잔업을 하는 주간이 되는 바람에 퇴근 후 책을 못 읽었고, 글도 제대로 못 썼어요.. ^^;;

마힐 2025-01-13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상자가 아직까지 있었는지 몰랐었네요. 제가 초딩 때 (그 시절에는 국민학교 였죠) 만 해도 학교에서 과학 상자 경연 대회가 있었어요. 학급마다 선수를 뽑아서 과학상자의 부품을 가지고 비행기나 포 크레인 같은 것을 만드는 경연 대회 였었죠. 저도 참가 했다가 본선에서 탈락했었죠..ㅎㅎ
그 뒤로 까맣게 잊어었는데 cyrus님 덕에 옛날 생각이 나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 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_()_

cyrus 2025-01-20 06:29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딱 일 년을 국민학교에 다녔어요. 그다음 해에 초등학교가 되었죠.. ㅎㅎㅎ 아마도 우리 세대가 과학 상자를 알고 있는 마지막 세대일 거예요. ^^

공쟝쟝 2025-02-0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서점에서 실물로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읽진 않아도 소장각. 이지만 소장하기엔 주머니가 가난해서 놓고 나왔습니다! 도판들만 봐도 후덜덜 이었는데, 하지만 내용은 몰랏음!! 덕분에 ㅋㅋ 한번 더 눈도장 찍어요!
 
다 큰 사람들을 위한 수학책 - 26가지 수학 원리로 가볍게 익히는 수 감각
에디 우 지음, 안혜림 옮김 / 반반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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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3.5점  ★★★☆  B+






잘 만든 음악은 인류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발자국이다우리는 지금도 음악인들이 남긴 발자국을 듣는다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우주인이다그는 달을 걷는 순간을 위대한 도약(giant leap)’이라고 표현했다








피부가 하얀 암스트롱이 깜깜한 우주로 올라가기 2년 전에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은 음악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1967년에 루이 암스트롱은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순간들을 표현한 노래를 불렀다입이 큰(Satchmo) 암스트롱의 목소리는 뜨겁다그의 노래에 사람들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가 있다시간이 지나도 노래를 달군 열기가 식지 않았고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명곡이 되었다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뜨거운 발자국이 된 이 노래의 제목은 <What a Wonderful World>.


만약에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루이 암스트롱처럼 재능이 뛰어난 음악인이었으면수학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감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 것이다피타고라스는 아름다운 모든 것에 수학이 있다고 믿었다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숫자를 특별하게 여겼다지금도 여전히 수학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수학자들이 있다호주의 수학 교사 에디 우(Eddie Woo)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튜버다수학 강의 콘텐츠를 올리는 에디 유의 유튜브 채널 이름은 우튜브(Wootube)’그는 수학으로 가득한 세상이 멋진 이유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을 썼다책 제목은 <Woo’s Wonderful World of Maths>.


호주에서 태어난 수학책은 새해 첫 주에 우리나라로 왔는데, 제목이 달라졌다다 큰 사람들을 위한 수학책: 26가지 수학 원리로 가볍게 익히는 수 감각숫자와 수학 문제를 보면 질색하는 어른들을 위한 수학책이다저자는 수학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자신의 학창 시절을 술회한다그는 열아홉 살에 수학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저자는 어떻게 수학과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을까?


수학의 재미에 푹 빠진 저자는 호기롭게 수학을 포기한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우리 모두는 수학자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학자는 문제를 푸는 과정을 찾는 사람이다그런데 저자는 수학자들의 진짜 관심사가 패턴(pattern)이라고 말한다패턴은 늘 똑같이 유지된다그래서 패턴을 바라보면 안정감이 느껴진다언뜻 보면 혼잡해 보이는 자연 속에 안정적인 패턴이 숨어 있다우리는 무지개를 만나면 알록달록한 색에 주목한다그렇지만 자연 속에 숨은 패턴을 즐겨 찾는 사람은 무지개가 왜 곡선으로 뜨는지 알고 싶어 한다구름 속에 있는 수많은 물방울이 무지개를 만든다물방울의 실제 모습은 둥그런 모양이다빛이 둥그런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면 굴절이 일어나고물방울을 통과한 빛은 여러 색으로 분산된다패턴을 좋아하는 수학자는 둥글둥글한 패턴의 물방울이 무지개를 만든다라고 설명한다들쭉날쭉한 해안선이나 눈송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계속 되풀이되는 반복적인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패턴을 프랙털(fractal)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는 규칙적인 형태의 패턴을 선호한다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뇌는 패턴을 탐지하는 기계. ‘수학적 본능에 충실한 사람은 패턴 찾는 일을 좋아하거나 패턴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수학은 크게 응용수학과 순수수학으로 나뉜다응용수학은 실생활에 적용되는 수학이다금전적인 손해를 최대한 피하면서 돈을 모으고 싶으면 응용수학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응용수학이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려는 인내심이 필요한 수학 분야라면 순수수학은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수학이다순수수학은 사람들에게 문제를 풀어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순수수학은 멋쟁이다. 수학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패턴을 연구하는 수학자는 순수수학자에 가깝다그런데 똑똑한 수학자의 뇌도 종종 실수하며 오류를 일으킨다수학적 패턴의 아름다움에 너무 집착하면 증명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때로는 아름다운 수학적 진리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서 사소한 오차를 무시하기도 한다.


저자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패턴 중 가장 유명한 황금비를 소개한다황금비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아름다움의 기준이다황금비의 근삿값 1.618이다황금비를 설명할 때 자주 나오는 예시가 나선 형태의 앵무조개황금비를 연구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예술을 대표하는 파르테논 신전이 황금비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라고 주장한다수학 문제를 풀기 싫어하는 사람도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황금비의 신비한 효과를 믿는다.








테디 우 선생은 황금비가 적용된 파르테논 신전을 자신의 책에 언급하지 않았다테디 우의 책을 추천한 키스 데블린(Keith J. Devlin)은 황금비가 수학적 진실로 잘못 알려진 세태를 비판한 수학자데블린은 2006년에 발표한 <The Math Instinct>라는 책에 파르테논 신전이 황금비로 세워졌다는 증거가 없으며 실제로 건물을 측정하면 황금비의 근삿값과 다른 수치가 나온다고 했다







2014년에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의 <황금 비율의 비밀>(2부작)에 키스 데블린이 출연했는데 여기서도 황금비에 대한 잘못된 통념(고대 그리스인들은 황금비를 알고 있었다.’)을 지적했다.


테디 우의 설명에 따르면 황금비는 자연이 만들어 낸 모양인 동시에 미를 추구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모양이다(87). 하지만 대부분 수학자는 증명을 통해 황금비가 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자연은 황금비를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황금비는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수치가 아니다숫자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착각이 만들어 낸 수치다.


과장된 황금비의 실체를 숙지한 상태에서 이 책의 19장을 읽으면 모순을 만나게 된다. 19장의 주제는 수학적 증명이다. 테디 우는 수학적 진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234)수학적 진실로 알려진 황금비가 거짓으로 증명된 이상수학적 진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믿음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cyrus가 쓴 주석>






[1] 다 큰 사람들을 위한 수학책은 반반북스 출판사가 펴낸 첫 번째 책이다출판사 이름인 반반의 의미는 때로는 흐름을 거스르고(보편을 거스를(줄 아는 정신을 뜻한다.






* 41

 

 유클리드는 고대 그리스 황금기에 육체노동을 멀리하고 여가를 즐기는 꿈같은 상류층의 삶을 살았지만유희에 빠지기보다 철학적 사유에 골몰하며 당대 그리스인들의 핵심적인 믿음 중 하나를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업적을 남겼다그 믿음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것들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는 믿음[2]이었다고대 그리스인들의 눈에 실제 세계의 나무는 이상적인 나무를 변형시킨 복제품이었고인간이 만든 건축물은 신들이 사는 성스러운 올림포스산의 신전들을 어설프게 따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2] 그리스인들의 자연관은 플라톤(Plato)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idea)’와 관련이 있다이데아는 현실 저 너머에 있는 완벽한 원형(原形)이다현실에 있는 만물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다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티마이오스(김유석 옮김아카넷, 2019)는 선의 이데아를 모방한 우주를 다룬 대화 편이다이 책에 언급된 데미우르고스(dēmiurgos)는 우주를 만든 신적인 존재이다.






* 251

 

 수학에서 다루는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다수학 개념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여러 인물에 의해 거듭 발견돼 온 것도 그 때문이다그중에서도 미적분의 발명은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17세기에는 미적분의 최초 발명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아이작 뉴턴이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미적분의 창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주3]



[주3] 수학은 서구에서 시작된 학문이 아니다수학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학문이었으며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미적분의 역사는 유럽이 아닌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미적분의 최초 발견자에 대한 논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시 쓰는 수학의 역사(케이트 기타가와 · 티머시 레벨 함께 씀이충호 옮김서해문집, 2024)를 참고하면 된다유럽 백인 남성 중심 수학의 역사에 오랫동안 가려진 비유럽 국가의 수학과 여성 수학자들의 업적을 주목한 책이다.





* 312





 균형 이루지 못하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멸종이 불가피하므로 자연은 반드시 평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균형 → 균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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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는 별명이 많다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다(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니다)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 언급된 별명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보지 않았다작년에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내 눈에 띈 별명들이 있었.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두 번째 선정 도서]

호메로스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 (도서 출판 숲, 2015)





신과 같은 오디세우스오뒷세이아》 1권 20행(천병희 옮김)에 오디세우스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오디세우스는 왕족 출신이다다른 영웅들에 비해 신과의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호메로스는 시작부터 서사시의 주인공이 신과 대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디세우스는 뛰어난 지략가다. 그의 지혜로운 면모와 관련된 별명이 꾀가 많은이다그 밖의 별명은 고귀한’, ‘참을성이 많은 등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는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안으로 진입하는 작전에 성공한다) 길고 긴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부하들과 함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오는 길에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us)가 사는 동굴에 잠시 정착한다오디세우스 일행은 동굴에 갇혀서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는 위기에 처한다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다폴리페모스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불에 달군 뾰족한 나무 막대기로 거인의 눈을 찌른다오디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동굴에 탈출하지만오디세우스는 오만했다그는 배를 타고 탈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폴리페모스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다폴리페모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이다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아들의 절규를 들은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 일행의 귀환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험난한 여정 끝에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이타카에 돌아온다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그러나 이타카 남자들은 페넬로페에게 구혼하기 위해 궁전으로 모여든다100명이 넘는 구혼자들은 제 집인 것처럼 주인 없는 오디세우스의 궁전에 눌러앉아 생활한다구혼자들의 무례한 구애에 지친 페넬로페는 시아버지를 위한 수의가 완성되면 새 남편을 결정하겠다고 약속한다그녀는 낮에 베를 짜고밤이 되면 낮에 만든 것을 다시 풀었다이렇게 해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재혼 결정을 미룰 수 있었다.


변장한 채로 오디세우스는 궁전으로 돌아왔고, 어엿한 어른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와 충직한 부하들과 함께 구혼자들을 죽인다페넬로페를 따르는 시녀는 총 50명이었는데그중 12명은 구혼자들의 애인이었다오디세우스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열두 명의 시녀에게 피범벅이 된 구혼자들의 시체를 깨끗하게 정리하라고 명령한다뒷정리가 끝난 후에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과 잠자리한 시녀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 교살한다.

















아폴로도로스강대진 옮김 그리스 신화》 (민음사, 2022)


아폴로도로스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도서 출판 숲, 2004)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페넬로페는 정숙한 아내를 설명하거나 신화 속 악녀들과 비교할 때 자주 거론된다그러나 신화는 여러 사람이 만든 이야기다또 시간이 지나면 신화 속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다많이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작가들은 페넬로페가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고 주장했다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블리오테케>(Bibliotheca) 신화 모음집이다아폴로도로스는 페넬로페에 대한 다른 형태의 신화를 소개한다그가 인용한 신화에 따르면 페넬로페는 구혼자 중 한 사람인 안티노오스(Antinous)와 몰래 정분을 맺었고오디세우스는 절개를 저버린 페넬로페를 살해했다미상의 작가가 쓴 신화는 원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페넬로페를 묘사했다페넬로페와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반인반수의 목신 판(Pan)이다.
















[절판] 조반니 보카치오임옥희 옮김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 (나무와숲, 2004)





데카메론을 쓴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총 106명의 여성을 소개한 유명한 여자들이라는 책을 썼다그는 이 책에서 페넬로페를 정절을 지킨 영원한 모범으로 칭송한다당연히 그가 참고한 글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다그리고 구혼자 중 한 사람과 부정을 저지른 페넬로페를 묘사한 글도 언급한다이 글을 쓴 사람은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시인 리코프론(Lykophron)이다하지만 보카치오는 리코프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페넬로페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지난 시점에도 순수한 도덕의 표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신화(myth)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우리가 아는 신화의 의미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또 다른 의미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근거 없는 믿음은 주인공을 위한 스포트라이트주인공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을수록 주인공에게 향한 스포트라이트의 불빛은 더 강렬해진다. 항상 그들은 주인공의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 한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은 희끄무레한 조연이 되고주인공과 대립한 인물은 주인공의 팬들에게 비난받는 악인이 된다이렇게 되면 조연과 악인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세계문학 작품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5년 1월의 책]

[개정판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 (문학동네, 2024)


[구판 절판] 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문학동네, 2005)

 




오디세우스 신화를 패러디한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 페넬로피아드는 근거 없는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 영웅을 미화했는지 보여준다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영웅이다.”, “페넬로페는 정숙한 아내다.”, “구혼자들과 사귄 열두 명의 시녀는 나쁜 여자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디세우스 신화를 접한 독자들은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해석을 선호했다이것을 거꾸로 뒤집는 해석은 환영받지 못한다.








페넬로피아드는 신화(근거 없는 믿음)를 뒤집은 신화(이야기)이 소설의 주인공은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에게 희생당한 열두 명의 시녀다작가는 호메로스가 듣지 못한 페넬로페와 시녀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그녀들의 목소리는 ()신화적이다반신화적인 페넬로페는 신분이 아주 낮은 시녀들을 자매처럼 대하면서 어울려 지낸다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열두 명의 시녀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자책한다반신화적인 시녀들은 외로운 페넬로페를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다그녀들은 구혼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알아낸다호메로스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유혹에 굴종한 시녀들을 용서하지 않는다하지만 애트우드의 시녀들은 페넬로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몸을 희생하면서 구혼자들에게 접근했다.


신화를 반신화적인 관점으로 읽는다면우리가 당연하다면서 받아들인 해석들이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근거 없는 믿음이 오래 지속되면 여성이 불리해지는 남성 문화가 된다성경과 함께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인 신화는 가장 오래된 남성 문화를 낳았다영웅호색은 성적 유혹에 이겨내지 못한 남성 영웅의 모습을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포장한다여성의 몸을 마치 정복하듯이 탐하는 영웅은 남성들의 존경심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반면 여성에게 혼전 순결을 강요한다정절을 지키지 못하거나 성적 욕망을 드러내면 모든 남성에게 멸시받는 천박한 존재가 된다. 남성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감정과 자유 의지를 포박한 올가미다.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두 번째 선정 도서

(2017년 11~12, 3주 진행] [주1] 

마거릿 애트우드김선형 옮김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2018)

 

마거릿 애트우드르네 놀트 그림진서희 옮김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황금가지, 2019)

 


 


여성학자 정희진은 피해자 중심주의 비판이라는 글(《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에 첫 번째로 실린 글이다)에서 남성 중심 문화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소위 남성 문화는 남성의 주관성을 보기 좋게 만들려고 보편성객관성전통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 썼다오디세우스가 위기에 빠지면 지혜의 신 아테네(Athena)가 등장해서 도와준다오디세우스 신화는 전통과 지혜로움으로 멋있게 포장해 준 남성 문화 덕분에 고전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희진은 여성주의 지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여성주의 지식은 남성 문화의 한계를 해체하기 위한 지적 무기애트우드는 여성주의 지식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다. 2005년에 발표된 페넬로피아드이보다 20년 전인 1985년에 발표된 시녀 이야기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면서 근거 없이’ 믿어왔던 남성 문화를 해체한 작품이다.

















아즈마 히로키 정정하는 힘》 (메디치미디어, 2024)




해체라는 표현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해체는 흩어짐’과 ‘붕괴’의 의미와 비슷한 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해체’ 대신에 정정(訂定)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정정은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시한 용어이다그가 강조하는 정정하는 행위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고치는 일이다과거의 지식을 고치는 일은 ㅘ거를 재해석’하는 일이과거를 재해석한 견해도 언젠가 고칠 수 있다정희진은 여성의 경험도 남성처럼 주관적이라고 했다개인 또는 집단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성주의 지식도 주관적이다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지적 무기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녹이 슨다폐기 처분할 것이 아니라 조금씩 고치면 된다현실에 맞는 지식으로 갈고 닦는(切磋琢磨) 것이다.

 

오디세우스 신화를 정정한 애트우드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오디세우스가 귀환 여정 중에 겪은 일들을 진실로 볼 수 있는가그의 경험을 가까이서 지켜본 부하들은 모두 죽고 없다오디세우스의 증언은 주관적이다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단지 그가 지혜로운 영웅이라는 이유로 그의 영웅담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다꾀가 많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을 교묘하게 가릴 줄 안다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자신을 방해하는 적들을 만났다고 말하기그는 이 세상에 없는 적들도 만들 수 있다오디세우스의 꾀는 말재주 좋은 선동가들이 자주 쓰는 전술이다. 선동가는 무해한 사람을 위험인물’로 만든다. 위험한 인물로 잘못 알려진 사람은 악인이 되고그런 악인을 집요하게 헐뜯는 선동가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오디세우스를 너무 믿지 마시라오디세이 구라세이[주].






[1] <레드스타킹> 최초의 모임이 진행된 날은 2017년 10월 9일이다내가 <레드스타킹> 모임에 처음 참석했던 기간은 2018년 1월 말이었다이때 페미니즘 영화를 보는 날이었고, 2월부터 책 읽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주2] 귀신을 부르는 주술인 분신사바의 주문이 지역마다 다르다가장 많이 알려진 주문은 분신사바분신사바오이데 구다사이(“와 주세요를 뜻하는 일본어)’변형된 주문 중에 내가 어렸을 때 들은 것은 분신사바분신사바오디세이 그라세이그래서 오디세이 그라세이를 패러디해서 오디세이 구라세이로 바꿔 썼다


오디세이는 오뒷세이아의 영어식 이름이다. ‘장기간 여행을 뜻하기도 한다. 구라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뜻하는 은어세이는 말하다’ 또는 발언권을 뜻하는 영단어 ‘say’따라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자 글의 제목으로 정한 오디세이 구라세이’를 의역하면 오디세우스가 거짓말을 한다(오디세우스의 여행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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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5-01-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즈마의 책이 나왔었군요^^

cyrus 2025-01-27 09:22   좋아요 0 | URL
<정정 가능성의 철학>의 후속작이라던데, 이 책을 안 읽고 바로 <정정하는 힘>을 읽어도 괜찮았어요. 저자가 글을 쉽게 썼거든요. ^^
 
굿 라이프 - 20세기 주거건축의 사상을 찾아서
이냐키 아발로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이유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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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철학자를 건축가로 비유하면, 철학자가 쓴 책은 철학으로 만든 집의 설계도다. 철학자는 사람들을 철학의 집으로 초대한다. 철학의 집은 편안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철학의 집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거푸집이다. 마음에 드는 철학 거푸집을 발견한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면 철학자가 된다. 철학 거푸집에 거주하는 철학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생각한다.








니체(Nietzsche)과거에 만들어진 철학의 집들을 망치로 부수는 철학자. 그의 책 아침놀철거 서약서. 니체는 플라톤(Plato) 이후에 활동한 철학적 건축가들을 비판한다. 철학적 건축가들이 철학의 집을 지으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재료는 도덕이다. 도덕으로 만든 집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도덕에 복종한다. 도덕을 너무 믿고 따르면 개인의 자유는 사라지며 욕망은 억눌린다도덕은 삶의 주인이 아니다. 니체는 도덕 철학의 집들을 철거한 다음에 도덕이 무너진 그 자리를 쟁기로 갈아엎는다. 니체는 자신만의 철학의 집을 세우기 전에 땅속에 구멍을 뚫는작업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도덕에 대한 신념을 파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도덕의 집이 무너져도 흩어진 잔해들은 또다시 도덕의 집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된다.


니체는 철학적 건축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가 열심히 쟁기질한 땅에 새로운 철학적 건축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도덕이 주인인 철학의 집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이 주인이 되는 철학의 집을 만들었다굿 라이프: 20세기 주거 건축의 사상을 찾아서니체 이후에 활동한 20세기 철학적 건축가들을 소개한 책이다20세기의 철학적 건축가들은 다수가 선호하는 좋은 집의 조건을 거부한다. 좋은 집4인 이상 가족이 살 수 있어야 하며,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적 건축가들이 설계한 집은 오로지 건축가를 위한 공간이다. 주로 많이 사용된 재료는 건축가의 상상력이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의 정의를 의심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건물은 형태가 없으며 가족도, ‘라는 개인도 살지 않는다


책은 총 일곱 군데 철학의 집을 소개한다. 독자들이 제일 먼저 방문하는 집은 차라투스트라의 집이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초인(Übermensch)을 상징하는 존재.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어(Mies van der Rohe)8년 동안 중정이 있는 집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중정이 있는 집의 주인은 도덕을 거부하고, 자아를 변화하는 일에 전념한 차라투스트라다니체 철학을 좋아하는 거주자라면 이 집을 거푸집으로 삼을 수 있다.


니체의 망치에 의해서 도덕 철학의 집이 무너진 이후에 철학을 잊은 사람들은 과학과 공업 기술로 만들어진 집을 선호했다. 과학 지식이 적용된 공법, 실증주의적 건축 방식이 유행하면서 저비용으로 많은 양의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실증주의적 건축술의 목표는 대량 건설, 표준화된 설계실증주의가 가져다준 혜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과거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삶의 여유를 잃어버렸다니체는 실증주의를 비판한 철학자다. 미스 반 데 로어가 구상한 차라투스트라의 집굿 라이프에 첫 번째로 소개된 반실증주의적 건축물이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인 현상학을 만들었다. 현상학은 개인의 경험을 분석하는 실증주의와 다르게 개인의 경험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현상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이다그래서 현상학자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물을 한데 모아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콜라주(collage) 또는 브리콜뢰르(bricoleur)을 선호한다. 어린이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 줄 안다. 따라서 주관성이 강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현상학적 집에 입주할 수 있.


굿 라이프실제로 만들어진 집도 나온다팩토리(Factory)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실이다. 팩토리는 무의식과 욕망을 탐구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계급 없는 세상을 꿈꾼 마르크스(Karl Marx)가 혼합된 건축물이다. 이곳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개성과 욕망이 억눌린 채 살아온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팩토리에 자주 드나들었다. 팩토리는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의 장이다.


집을 짓는 일 또한 철학을 하는 일과 같다. 집과 철학은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뼈대다. 뼈대가 튼튼해야 외부의 유혹과 세파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잘 만든 집에 오래 살다 보면 한계와 문제점이 눈에 보인다. 철학적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굿 라이프는 책에 소개된 철학적 건축물들에 입주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과대광고를 하지 않는다. 책은 철학적 건축물들의 한계도 밝힌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집에 인간이 산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철학자의 언어와 사유가 스며든 집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철학자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실존주의자의 집그 집에 사는 사람의 내면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가부장적 권위를 중시하는 실존주의자가 집주인이 되면 그 집 안에 딱딱한 수직적 문화가 흐른다현상학적인 집에 설계자와 거주자의 취향이 반영된 장식품이 많다. 겉만 화려한 현상학적 집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거주자들에게 추천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집은 건축가의 실험 정신이 많이 반영된 가상 공간이다. 현실 도피에 가까운 과도한 실험 정신은 비현실적인 집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마저 파괴한다.


굿 라이프집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선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좋은 삶의 조건과,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좋은 집의 조건 또한 다양하다. 철학은 집을 만들 때 쓸 수 있는 좋은 재료. 그렇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교조주의적 성향이 강한 철학으로 지어진 집은 부실하다. 불량한 사상(思想)이 가득한 집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 cyrus의 정오표




* 65




 

 실존적인 집이 가부장적 권위의 체계와 연결되며, 자기 중심화되고 초월적이며 수직적인 공간 조직을 갖는다는 사실을 명학하게 보여준다.



명학하게 명확하게






* 93쪽 각주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1856~1925) [주]



[] 테일러의 사망 연도는 1915이다.





* 133쪽 각주






조르지오 데 기리코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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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소련 건국사와 러시아 문학사 양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무장한 이방인이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손에 무기를 쥔 이방인으로 살았다. 러시아 황실과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군주의 시대가 무너졌다. 사빈코프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의 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내분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다투는 상태였고, 온건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레닌(Vladimir Lenin)이 주도한 볼셰비키(Bolsheviks)가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러시아를 장악했다


사빈코프는 또다시 무기를 들었다. 그가 보기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민중의 편이 아니었다. 사빈코프는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무장 세력을 조직했다. 볼셰비키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사빈코프는 폴란드에 합류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반 볼셰비키 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 폴란드는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종전 이후에 반 볼셰비키 세력을 토사구팽했다. 사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922년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을 합병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다.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세계만방에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볼셰비키에 반대한 세력을 반혁명 분자로 규정하여 모조리 체포하거나 처단했다. 심지어 소련에 반정부 세력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면서 선동하기까지 했다. 사빈코프는 노동자를 위한 비밀 무장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소련에 돌아왔지만, 결국 비밀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사실 그에게 손을 내민 비밀 무장 세력은 반정부 세력을 소탕하려는 소비에트 정권의 미끼였. ‘무장한 이방인사빈코프는 1925년에 소련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주]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 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빛소굴, 2022)




사빈코프는 망명 생활 중에 무기 대신 펜을 쥐었다. 그는 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자전적인 성격이 짙은 이 글은 처음에 <테러리스트의 수기>라는 단순한 제목이 붙여졌다창백한 말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 68절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빈코프는 회상록을 소설로 개작했고,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사빈코프는 롭쉰(로프신, V. Ropshin)’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빈코프의 글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어울려 지낸 막심 고리키(Maxim Gorky)마저 사빈코프의 글에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사빈코프가 글로 묘사한 테러리스트, 즉 혁명가는 살인을 저지른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가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테러리스트로 활동한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튜체프(N. S. Tyutchev)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사빈코프의 글에 대한 견해를 밝혔는데, 소설가 사빈코프혁명가 사빈코프를 죽였다고 비판했다.

















* [절판] D. S. 미르스끼, 이항재 옮김 러시아 문학사(써네스트, 2008)




사빈코프는 생전에 소설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며 죽어서도 소설가로 대우받지 못한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사빈코프 또는 롭쉰이라는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모든 러시아 문학사 관련 문헌을 전부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빈코프가 한 번이라도 언급된 책 한 권을 찾긴 했다그 책이 바로 현재 절판된 드미트리 P. S. 미르스끼(Dmitry Petrovich Svyatopolk-Mirsky

)러시아 문학사. 영국으로 망명한 미르스끼는 1922년부터 런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했고1926년에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 이듬해에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From Its Beginnings to 1880>를 썼다이 두 권의 책 덕분에 영미권 국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사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역본은 두 권의 책을 요약 편집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미르스끼는 사빈코프를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Dmitry Merezhkovsky)의 영향을 받은 테러리스트로 소개한다. 그리고 센세이셔널한 고백창백한 말은 메레시콥스키의 아내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지나이다 기피우스(Zinaida Gippius)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한다메레시콥스키와 기피우스는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을 이끈 작가다


하지만 단편적인 수준의 내용은 사빈코프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미르스끼의 러시아 문학사》는 1920년대에 나온 책이다.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는 사빈코프가 옥사한 지 일 년 뒤에 나온 책이다따라서 미르스끼의 분석은 사빈코프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 이디스 클라우스, 천호강 옮김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도덕의식에 관하여(그린비, 2022)

 




사빈코프와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책이 이디스 클라우스(Edith Clowes)의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이 책은 19~20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철학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떤 형식으로 자신들의 작품으로 구현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 철학을 접하자마자 전율을 느낀 메레시콥스키러시아 문화가 위대해지려면 종교적 의식, 즉 기독교적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적 가치의 부활을 갈망했는데, 자유로운 주체를 억압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니체 철학을 미래의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으로 이해했다메레시콥스키러시아에 정착해야 할 새로운 기독교를 3의 성서라고 표현한다. ‘3의 성서아름다움을 최상으로 여기는 유미주의와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기독교 윤리를 모두 수용한 미래의 종교.


메레시콥스키는 러시아에 니체 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출판하는 등 니체 철학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고리키와 함께 니체의 책을 번역하려고 했지만, 이들의 계획은 실패한다. 두 사람이 이해한 니체는 너무나도 달랐다메레시콥스키가 니체의 반기독교적 관점에 주목했다면, 고리키는 ‘개인의 창조적 의지에 주목했다. 그는 창조적 의지만 있으면 개인의 삶은 변화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니체 철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통속적 니체주의자였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로 고리키는 니체 철학을 부르주아 철학으로 비난하면서 결별한다.


메레시콥스키는 프랑스로 피신한 사빈코프를 도와준 은인이다. 사빈코프는 은인의 영향을 받아 니체주의적 소설창백한 말을 썼다. 이디스 클라우스는 미르스끼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사빈코프와 메레시콥스키와의 관계를 알려준다. 롭신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사람은 지나이다 기피우스였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김인순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열린책들,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04)




이디스 클라우스는 자신의 책에 혁명가의 본명인 사빈코프대신에 필명이자 소설가 롭신을 호명한다.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롭신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드러난 초인(Übermensch)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접한 니체 철학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가 아니었다러시아에 들어온 니체의 저서는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거나 니체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편집자의 손을 거친 조악한 책이었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왜곡된 니체를 성급하게 만났고, 모방하거나 오독하는 수준에 그쳤다. 클라우스는 롭신을 문학적 개성이 부족한 작가로 평가한다. 


클라우스는 창백한 말에서 니체의 초인 사상을 모방하고 왜곡한 흔적을 주목한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 조지(George)는 테러리스트인 작가의 분신이다. 조지는 세상을 경멸한다. 사랑, 도덕, 평화도 증오한다. 그에게 테러와 살인은 혁명을 위한 일이 아니다. 조지는 살인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삶은 투쟁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지의 투쟁적 삶은 니체의 초인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니체의 초인은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마저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용어로 알려진 운명을 사랑하는(긍정하는) 태도조지의 목적 없는 투쟁은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른다. 니체 철학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고, 자기 파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동적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창백한 말의 테러리스트는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인물이다. 세상을 증오하는 조지는 죽을 때까지 볼셰비키에 맞서 싸운 무장한 사빈코프를 닮지 않았다. 기독교적 사랑과 도덕을 무시하는 조지는 종교에 심취한 메레시콥스키에 대한 사빈코프의 거부감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사빈코프는 생명의 은인을 등 돌릴 수 없었는지 은인의 아내가 지어준 필명으로 자전적인 소설 창백한 말을 발표했다소설가 롭신은 니체를 잘못 이해한 니체주의자이렇듯 창백한 말작가 한 사람의 분열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글에서 서술된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은 주류 역사학계의 관점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러시아 혁명을 연구한 주류 역사학계는 케렌스키 임시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등장한 191710월 혁명을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보수파 역사학자들은 볼셰비키를 부정적인 정치 세력으로 바라봤다


정보라 작가가 쓴 창백한 말해설문에도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정보라 작가는 사빈코프를 권력에 저항한 민중주의자로 소개하는데, 사빈코프가 저항한 권력이 바로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볼셰비키를 가리킨다.


















* [개정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책갈피, 2017)

 

* [구판 절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교양인, 2008)



 

하지만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방 정책과 소련 연방이 해체된 1991년 이후에 오랫동안 봉인된 문서고가 열렸다. 그 속에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사료들이 있었다. 이 사료를 주목한 역사학자들은 주류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견해를 반박했고, 10월 혁명을 민주적인 과정을 거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권력 독점을 목표로 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민중의 평등이 목표인 소수파였다고 주장한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혁명 연구자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라비노비치의 저서 1917년 러시아 혁명》(구판 제목은 《혁명의 시간》이다)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군인 사빈코프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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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2-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글은 거의 논문 수준이네요. 아니, 늘 시루스님의 글은 그랬던 것 같아요. 암살자이자 혁명가가 쓴 소설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런데 또 그 책이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결과물이었다니.

교양인에서 냈던 [혁명의 시간]은 책장에 있었어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읽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개정판을 책갈피에서 냈군요. 두 출판사 모두 인연이 있어서 저에게는 이 사실이 흥미롭네요.

cyrus 2024-12-25 22:56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이번 주 금요일에 있는 독서 모임 때 참석자들에 들려주고 싶어서 썼어요. 참고한 책들의 주요 내용을 요약했어요.

저는 <혁명의 시간>을 살 뻔했어요. 제가 주말에 자주 가는 헌책방에 <혁명의 시간>이 있거든요. 책갈피 출판사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주로 펴내는 곳인데, 개정판이 출판사를 잘 만났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