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 끝나지 않은 재앙 
 

미국 멕시코 만을 검게 물들었던 석유가 3개월 만에 유출을 멈췄다.
유출을 막기 위해 새로 개발한 캡을 씌우려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였다.
아직 추후 결과를 지켜봐야 하지만 전문가들과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법. 현재까지 흘러나온 기름의 양은 222만~438만 배럴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많은 기름들은 지금까지도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다.

기름이 멕시코 만을 덮치게 된 이후 멕시코 만에서의 어업 중 가장 많은 경제적 수입을  

얻는 새우 관련 어업 종사자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으며 멕시코 만 어부들은 아직까지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유출 사고는 사상 최대의 환경 및 생태계  

파괴를 남긴 최악의 사고로 남게 될 우려가 높아졌다. 기름이 멕시코 만을 넘어서  

대서양쪽 미국 동부 해안으로 흘러들수록 집계되는 동물 피해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기름이 해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큰 생태계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있다. 비단 생태계에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오일 제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감기 증상을 보였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지금까지 장기간 원유  

노출  시 인체 피해에 대한 의학적 보고는 없지만 미 보건당국은 장기적으로  

신경계통이나 혈액 콩팥 간 등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석유에 오염된 물을  

마시게 되면 인간의 신체가 온전치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세상을 바꾼 책

환경 분야의 뉴스 중 핫 이슈인 멕시코 만 유출 사건을 계기로 해양 생태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해양 생태계 도서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레이첼 카슨의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읽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도서관에 와 보니 그 책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 바다 관련 도서가 꽂혀있는 책장까지 샅샅이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마지못해 레이첼 카슨의 대표작인 <침묵의 봄>을 읽기로 하였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가 바다의 생태계와 그것을 지키기 위한 환경 보전에 관한 책이라면 

<침묵의 봄>은 농약이 자연 환경에 주는 악영향을 고발한 책이다.

<침묵의 봄>이 자연 환경 분야의 고전이라는 것은 간혹 언론이나 학교 수업 시간에  

들어봤다. 책 뒤에는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 찬사가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이  

어떻기에 출간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환경 운동의 선구적인 도서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는 걸까? 저자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농약 성분들이 자연 생태계의 오염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농약을 만들고 사용한 인간들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구성하는 내용은 거의 환경오염과 그에 따른 피해  

사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작가가 쓴 책의 배경이 무려 40여 년 전이라서 그런 것이었을까?

저자는 당시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DDT의 유해성에 대해서 낱낱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DDT뿐만 아니라 저자가 환경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농약의 주성분들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환경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을 지금도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다

저자는 일방적으로 자연에게 악영향을 주는 농약 사용을 금하지 않는다.   

농약 사용을 줄이는 대신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의 길을 갈 수 있는 환경 보전 대안을  

제시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제시한 대안은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식물을 방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특정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목초지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런 가능성은  

  상당히 무시되었다. 곤충들은 자신이 원하는 식물만 먹이로 삼는데 그런  

  제한적인 식성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레이첼 카슨『침묵의 봄』 p 116 - 

 

저자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유기농법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농작물에는
해충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전만 해도 농민들은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농약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변할수록 사람들의 환경 보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농약 1%도 묻지 않은 농작물을 선호하게 된다.   

이런 환경 인식의 변화를 읽고 있었던 농부들과 농업 관련 연구자들은 화학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법을 독자적으로 연구 및 개발을 하였다. 오랜 연구 끝에 현재  

유기농법은 지렁이, 우렁이, 오리 등 해충이나 잡초를 먹이로 하는 특정 생물들을  

이용하는 친환경적인 방법이 개발되었다.  역시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무작정 농약 사용을 줄이라고 주장만 했었다면  

세상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을까?  레이첼 카슨이 고백했듯이 그녀가 살던 1960년대에는  

농약 속 유해물질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미치는 피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부와 연구 기관들은 유해물질이 자연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련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 출간 이후로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되었다.
그 때 1960년대의 세상이 이 정도였으니 레이첼 카슨의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농약이 묻은 농작물로 만든 음식들이 우리의 식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레이첼 카슨은 자연친화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철학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세상은 환경 문제에 관해서는  

참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환경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일부분 자연 파괴는 불가피하다는  

개발 옹호론자와 자연을 파괴하면서 개발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며 오히려 개발 이후에도  

환경 문제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개발 반대론자들이다. 그렇다고 개발 옹호론자들이
무조건 자연을 정복해야한다는 고리타분한 사고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까지도 구시대적 발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무분별한 벌목이 그 예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아마존 특유의 야생적인 열대 우림이 파괴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살고 있었던 동물들은 보금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동물들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아마존에 살았던 토박이 부족들도 어려운 현실에 처해져 있다. 다른 나라의  

목재업 회사들이 행하는 벌목 작업을 자신들의 눈 앞에 보면서도
이렇다 할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들은 이곳저곳 떠돌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궁핍한 삶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진출하게 된다.  

아마존의 자연 파괴와 산업화, 거기에 다가 부족들의 단명의 근본적인 원인인  

전염병까지 더하여  아마존의 자연에서만 자랐던 순수 부족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마존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존의  

나무들을 밀어붙이는 불도저와 굴착기들을 보면 아메리카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면서 인디언들에게 무시무시한 피의 응징을 가했던 백인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살고 있는 거대한 땅을 이루고 있는 모든 자연물을 경외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중의 한 구절을 비유하자면 백인들과 개발 옹호론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양날의 칼, DDT

이 책의 감수자인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의 글을 보게 되면 농약의 화학 물질에  

대한 개선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레이첼 카슨이 살았던 시대의 농약과의 차이점을  

감안하여 농약의 위험성에 대해서 상당 부분 낮추어서 이해해달라는 당부의 말이 있다.

<침묵의 봄>을 읽은 계기로 인하여 DDT에 관한 내용들을 찾아봤다. 그런데 내가 책에서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 소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된다면
자칫 환경 문제에 대한 편협된 사고방식을 야기할 수 있는 발상의 소지가 있다.

<침묵의 봄>이 출간 이후로 DDT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DDT 사용을 금지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DDT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다. 경제력이 약한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나 티푸스에 대한 대비책으로 DDT를 모기 살충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과거에 말라리아 환자가 연간 25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적인 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8년부터 1962년까지 DDT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말라리아 환자 수가 연간 31명으로까지 줄었다. 그러나 DDT가  

금지된 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 환자 수가 연간 250만 명으로 다시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DDT가 인간에게 끼치는 악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스리랑카 입장에서는 

말리리아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일부 국가에서는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서 DDT를  

합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DDT를 사용하게끔 하는 원인이 DDT에  

대한 경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DDT가 인간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DDT의 유해성에 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DDT는 인간에게 전염병을 유발하는 모기를 박멸할 수 있는 뛰어난 살충제이지만
어떻게 보면 살충제 내의 독성물질로 인해서 자연 생태계를 교란시키며 그 악영향이  

우리 인간에게도 미칠 수가 있다. 인간은 DDT라는 최고의 칼을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검을 만든 우리가 날카로운 칼날에 찔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략)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중략)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 8, 11연 중에서 -

이상화의 쓴 이 유명한 시는 당시 일제 강점기 상황을 바탕으로 일본에게 넘어간  

우리나라를 ‘빼앗긴 들’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다. 국토뿐만 아니라 국권과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봄’조차 빼앗기는 비통한 현실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1연은 조국 광복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8연은 풍요로운 국토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으며 1연에서 표현한 시적 화자의 질문은 마지막 11연에서 절망적인  

현실 인식이라는 답변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시는 마무리 짓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환경 문제도 이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정부는 4대 강 사업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며 개발 이후에도 4대 강의 자연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국가적 차원의  

사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일부 환경 관련 시민단체들은 4대강 사업은 개발로 인해
오히려 자연환경이 파괴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4대 강을 개발할 때 사용하는  

공사 재료에서 다량의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된 점을 이유를 들었다.

결국, 개발 공사를 하면서 강의 수질이 악화될 수 있으며 환경 파괴가 먹이사슬처럼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강이 오염이 되면 강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자연스럽게  

오염된 물의 독성 성분을 받아들이게 된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희귀종을  

포함한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할 수가 있다. 오염 물질을 먹은 물고기들을 먹고 사는  

수달이나 조류에게 독성 물질이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다. 당연히 물고기를 먹은  

동물들도 사망하게 된다. 동물뿐만 아니라 강에서 흘러나온 물을 용수로 사용하는  

인간도 오염 물질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레이첼 카슨은 모든 먹이사슬을  

지탱하는 것은 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말은 물이라는 관점에서 환경 문제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물속으로 흘러 보낸 독성 물질도 물로 시작하는 먹이사슬의  

순환 관계처럼 환경 오염이 주는 피해도 순환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큰 타격을 입을 수가 있다는 근거도 있다.
4대 강 사업으로 농민들은 강제 이주를 하거나, 강 주변의 채소 재배지가 감소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채소 재배지가 감소되면 채소 가격이 폭등하여 결국에는 소비자들에게도 

심각한 문제를 떠안게 되는 셈이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4대 강 사업이  

자신들의 재배지를 강제로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농민들에게 농사란  

먹고 살리는 유일한 노동이면서도 이상화의 시구처럼 ‘좋은 땀을 흘리면서 부드러운  

흙이 주는’ 자연의 위대함와 노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과정이다.
그리고 4대 강 사업으로 이주를 하거나 재배지가 사라지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게 해주었던 실낱같던 희망마저도 빼앗기게 된다면 농민들에게  희망의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침묵의 봄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의 관용어로 자리 잡게 된 도발적인 책의 제목은 영국의 시인 키츠의 시에서
‘호수의 물들은 시들어 가고 새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네’ 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시구처럼 물이 오염되면 새들은 오염 물질로 인해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예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절은 뒤로 하고 오염되고  

주변에 생물들도 살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다. 이미 죽은 자는 말은 없다.  

결국 봄이 오더라도 생(生)의 감각과 활기를 찾아볼 수 없는 ‘침묵의 봄’이 되는 것이다.

봄을 침묵케 하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자연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침묵의 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연이 파괴 되어가는 현실의 원인을 

회피하려 하거나 알면서도 부정하는 몇 몇 인간들의 침묵이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환경 문제는 자신의 일과 관련 없으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환경 문제를 야기 시킨다는  

생각도 해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환경 문제의 원인은 남 탓이라고 돌리고 묵비권을  

행사하듯이 침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기업인은 자신의 사업으로 인해 자연  

파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국가 경제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명분주의식 변명을 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공장은 사람들 몰래 폐수들을 강에 흘러  

보내기도 한다. 폐수로 인하여 강이 오염되면 앞으로 초래할 환경 문제들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몰상식한 행동을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처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거나 최대한 자신의 죄가 걸리지 

않기 위해서 침묵하기도 한다. 
 

 

 

 3년 전,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내가 앞에서 이상화의 시까지 들먹거리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우리가 처한
자연 파괴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침묵하게 되면 후세에도 불편한 현실이  

이어질 것이며 봄의 침묵도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리 스스로 자연에 대해서  

침묵을 하게 되면 자연이 우리에게 줬던 아름다움과 삶을 위한 혜택 등  

좋은 것들이 자연 파괴자들로부터 허무하게 빼앗기게 될 수가 있다.

멕시코 만 유출 사태가 남의 나라 일이라고 해서 무심코 넘어 가지 말자.
우리나라도 3년 전에 충남 태안에서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를 겪은 적이 있지 않은가.
원인은 자연 상황을 무시한 채 선박을 운행하다가 충돌로 인해 태안의 모든 해안 지역을
타르 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태안의 해안에서 일하는 어부들은 그 사고로 인해서
자식 같이 여겼던 수산물들은 폐사하였고 앞으로 펼쳐질 여생의 희망을 한 순간에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국민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엄청난 해양오염 재앙을 함께 극복하고자 태안으로 향하는 전국의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 사이에 5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 타르 덩어리를 제거하는 데 동참하였고, 재난 극복을 도우려는  

성금도 끊이지 않았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레이첼 카슨이나 대니 서와 같은  

개혁적인 환경 운동가처럼 거창한 행동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당장 해결될 거  

같지 않은 커다란 환경 문제도 관심을 가져 보고 단순하게 접근을 해보면 해결의 답이  

보인다. 그리고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듯이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힘을 합치면 환경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가 있다. 환경과 자연 친화를 중시하는  

그린 코드 사회로 발달할수록 우리들도 환경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고 이에 대한  

성숙한 윤리적 태도와 이를 바탕으로 공동적으로 해결하려는 참여 의지를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인용 관련시가 출처 및 링크 

 

[멕시코만 원유유출 3개월만에 첫 차단] 헤럴드경제 7월 16일자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716000272 

 

 

[ [멕시코만 환경 대재앙] 원유 유출 47일째… 칠펠리컨·돌고래 떼죽음,  

방제요원 건강 적신호 경고] 국민일보 6월 5일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5&aid=0000413705 

 

  

 

인용 검색 출처 및 링크 

 

위키백과 [4대강 정비 사업] 

http://ko.wikipedia.org/wiki/4%EB%8C%80%EA%B0%95_%EC%A0%95%EB%B9%84_%EC%82%AC%EC%97%85 

* 문서 내용 현재 진쟁 중임, 불확실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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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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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 뜨거운 전시회 홍보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하는 ‘퓰리처 상 사진전’에 대한 인기의 열기가 대단하다.
이번 달 15일부터 매주 목요일 관람 시간을 두 시간 연장하기로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시회 폐장 시간이 오후 8시이므로 목요일에는 오후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야 볼 수 있는 서양 예술 작품이나 역사적 희귀 유물들이  

전시되는 대형 기획 전시회가 우리나라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이전의 현상과  

교하면 사진 전시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퓰리처 상 사진전’을 개최 및 책임을 맡고 있는 예술의 전당은 ‘영국 근대 회화전’도  

개최하고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터너, 컨스터블, 고갱 등 근대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영국 근대 회화전’도 ‘퓰리처 상 사진전’과 더불어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관람객의 수를 기록하고 매스컴의 홍보가 많았던 ‘피사로와  

그의 가족, 친구들’ 이나 ‘르누아르 전’과 비교하면 홍보가 미미하고, 전시회 관람객 수에  

대한 소식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같은 기간에 전시하고 있는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 때문에 가려져 있는 거 같다.  

 

‘퓰리처 상 사진전’의 연장 관람 시간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줄을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을 찍은 사진이 옆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 내용에는  

사진 속 관람객들을 ‘젊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고 쓰고 있었다. 기사문을 읽어갈수록 기자의  

감정  이입이 담긴 문장에 낯뜨겁기만 하였다. 인생 선배격인 어른들이 한 마디 하시면  

두 귀를 닫고 대화를 회피하려고만 하는 단절된 세대이며, 지나간 과거나 역사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옛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다.  

기사문 중간 내용에서 전시회를 ‘역사와 인권 교과서’라고 추켜세우는
문장과 절묘하게 어울려져 ‘젊은 세대들도 공감하는 역사와 인권 전시회’임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줄 서 있는 관람객들을 보면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지금도 방학 기간을 맞아 많은 학생들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전시회에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전시회 관람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전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명한 수상작들이 전시되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빼빼 마른 아프리카의 아이의 사진,
냉정하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군인과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 단 한 방으로  

결정짓게 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콩의 사진 등..... 대부분 수상작들은 참혹한  

전쟁의 참상과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 국가의 사람들의 사진들이 있다.  

권위 있는 수상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을 찍은  

사진들도 있다. 왜 굳이 아름다운 인상주의 예술 작품 전시회를 마다하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진 작품을 보려고 오는 것일까? 
 

 

 

 고통 받는 육체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자의 육체가 그려진 그림보다는
고통 받고 있는 육체가 그려진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특히 유럽 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성경 속의 유명한 순교의 장면을 그린 종교화가 

유행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양 손과 몸에 상처를 입은 예수의 모습이나 화살이  

온 몸에 박힌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은 인간이 저지른  

원죄의 벌을 대신 받고 있는 위대한 성자(聖子)로 비춰지게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경 속 순교의 장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게 되었고 그림 속의 순교자들은  

이전보다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고통을 인내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뤼네발트 <십자가책형>,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못이 박힌 예수의 두 손과 두 발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피와 

  예수 온 몸 전체가 생긴 상처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적인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의 고통을 공감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내가 언급한 그림의 표현을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1>을 참고하면 된다. 

 
근대에 와서는 그림의 주제가 대담해진다. 인간이 저지른 전쟁과 살육 현장을 화폭에  

담아내어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잔혹성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화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람객들에게 인간의 추악한 면을 알리기 위한  

충격 요법과 동시에 잔인한 장면이지만 더욱 더 보고 싶게 되는 무의식적인   

사디즘(Sadism)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며, 인간은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들라크루아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카메라가 발달됨으로써 사진기술이 발달된다.
사진 기술이 도입이 되어서도 ‘고통 받는 육체’에 대한 주제는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특히 전 세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는 ‘종군기자’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TV가 없었던 시절에는  

전쟁터의 모습을 세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진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진의 셔터를 눌러댔다. 총탄에 맞아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병사와 포탄에 맞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진 병사의 시체가 찍힌
사진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전 세계 시민들에게 반전(反戰)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진의 활약은 끝나지 않았다.  

냉전 시대의 사회주의 국가 사회에서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살육 장면이 담긴 사진들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하였다. 전쟁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비인권적인 사회 문제와 현상들을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들은 셔터 누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찍은 사진은 빈곤국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촉발시켰고, 미군의 공습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어린이를 찍은  

사진은 미국이 시작한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의 사진 작품은  

예술성을 넘어서 작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사회의식을 관람객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그들에게도 사회 현상에 대해서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한 현상을  

다루는 사진작가들은 아무도 알고 싶지도 않은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을 사진으로  

촬영함으로써 사회를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일종의 사회 운동가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진, 관람객 그리고 TV : 불편한 삼각 관계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펴낸 저자 수잔 손탁은 오늘날의 사진 사업을 비난하고 있다.
선혈이 낭자하고 신체 일부는 절단된 사진들은 보는 이들에게는 충격을 주게 만든다.
저자는 이 점을 문제 삼아 사진 사업은 충격을 이용해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물론,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전쟁을 향한 비난을 북돋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쟁의 현실을 전달해주는 사회적인 공감  

형성은 저자는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람들이 사진 속에  

나타나는 고통의 아우라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수잔 손탁이 제기한 사회적인 문제는 사진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TV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사진작품들은 자연스러운 장면이기보다는 

작가와 사진 속 대상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로 유명한 원작 소설 <아버지의 깃발>의  

표지 속의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조 로젠탈의 1945년 퓰리처 상 수상작에서  

따온 것이다.   

 

   
 

 

 

 

 

 

 

 

 

 

                                       조 로젠탈 <성조기, 수리바치 산에 게양되다>

 이 사진으로 인해서 치열한 전장 속에서 끝내 승리한 미국을 상징하게 된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이 역사적 사진이 의도된 작품이었음을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진이 진실임을 여겨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사진이  

의도되었다고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도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어도  

대다수 사람들은 사진 속 장면들이 실제이며 우연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결국, 오늘날의 사진 작품들은 생생하게 전달되는 현실성과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생기는 허구성이 결합되는 키메라(Chimera)적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기묘한 결합으로 탄생한 사진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여러 가지 해석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람객은 사진을 보면서 이런 참혹한 일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잔혹함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더구나 문제가 있는 점은 관객들은 사진이 전달하고자 하는 충격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사진 작품이 의도적인 

구성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면 사진이 정작 알려주고 했던 의도는 퇴색이 되고, 관객들은 

그 때 알게 된 사진의 허구성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외 토픽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기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수잔 손탁은 관람객들의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으로  

TV에게도 공범죄임을 증명하는 화살을 날리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TV의  

등장으로 사진과 신문을 넘어서 가장 지배적인 보도 체제로 확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TV를 보면서도 타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안방에서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텔레비전 안의 세상 보면서 동점심이나 격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텔레비전 안의 세상도 의도적으로 구성한 세상이다.
방송으로 전파되기 전에 많은 보도 장면들 중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선별한다.  

결국에는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비춰지는 전쟁이나 빈곤 국가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TV 속 이미지는 시시각각 시청들에게 비춰진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TV 속에서 범람하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무감각해지게 된다.  

사람들이 무감각해지는 원인에는 의도적인 면도 더러 있다. 이미지가 주는 고통을  

인식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스스로 외면하기 위해서 무감각해질 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으며 자신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한, 쉽게 타인의 고통과의 합일이 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만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능력만 지적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연민만 느끼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을 보고 고통의 연민만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현실을 방관적으로 받아들인  

인식이 낳은 무고함을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저자는 심하게 손상된 시신이 담겨진  

사진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혔던 점을 예를 들어서
그런 사진 작품들은 과거 식민지주의의 오래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한다는 것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꼴이 된다. 

수잔 손탁은 9.11 테러에 관한 칼럼에서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불의의 테러 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과 추모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테러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게끔 하는 범인은 무역 센터를 폭파하게 한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중동 국가와의 대립을 조장하는 미국도 공범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패권자임을  

자처하면서 세계 평화를 주장하지만 속마음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평화를 저해하고 있는 이중적인 미국 권력의 잣대에 휘둘리는 바보가 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오류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자는 단순히 타인에게  

연민만 베풀지 말고, 고통을 받는 그들과 우리는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해결 방안이 추상적이라서  

독자들에게는 깊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최선의 대안에는 이 방법 밖에 없는 거 같다.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 
 

퓰리처 사진전에 관한 홍보성 짙은 기사문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사진전을 관람했다는 기사문이었다.  

사진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정 총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기사문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문에는 사진전을 보고 난 후의 정 총리의 소감이 짤막하게 인용하고  

있었는데, 그의 소감을 보고 나니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정 총리는 사진전은  

‘역사적 호기심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회’라고 평했다.  

이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살아있는 역사라고 비유하였다.
퓰리처 상 사진 작품들이 전시하는 목적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전시회와 차원이 다르다.  

사진 작품에는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역사의 현장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을 알려주는 역사와 인권의 이력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진전을 역사와 인권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전시회임을 표현한 정 총리의 말은  

공감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정 총리의 말을 거꾸로 비유하자면 퓰리처 상 사진전은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정 총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자극받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적 사진 작품들을 보면서 사진에 뿜어내고 있는 고통에 대해  

자극을 느껴보고, 역사의 과오들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성찰하는 행위와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지적  

행위은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성찰하는 행위는 수잔 손탁이 주장한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몸소 느껴보고, 사진 속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요인들을  

공감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반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정 총리의 말 그대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역사의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지적 호기심을 느끼고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만  

훑어보고 가는 것은 제대로 된 퓰리처 상 사진전 감상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정 총리의 인식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퓰리처 사진전을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가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에 혹하여 전시회를 찾는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을 위해서 방학 기간을 틈타 자식들 손 꼭 잡고 전시회를 찾는 부모님들.
그들도 사진 속의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공감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기 보다는
단순히 전시회의 홍보, 아니면 타인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정 총리가 베이브 루스의 은퇴식을 찍은 ‘그의 등번호, No. 3' 이라는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마지막 기사 문장을 보고나니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개입하려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퓰리처 상 사진전의 광고를 보고 난 뒤에,  

이번 사진전이 우리나라에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거 같은 역사적인 전시회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한 번은 꼭 전시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수전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면서
내가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사진전을 제대로 관람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진 전시회에 직접 찾아가서
진지하게 관람하는 일만 남았다.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시회 관람을 계기로 나도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두근거려진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퓰리처상 사진전’ 끝없는 인파 … 15일부터 관람 시간 연장] 중앙일보 7월 5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89726 

 

[정운찬 총리 “퓰리처상 사진전, 역사적·지적 호기심 자극”] 중앙일보 7월 15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7/15/3912183.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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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쓰는 김연수 도 이 책을 추천하더군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데

마음만 먹은지 1년이 넘었네요 --

cyrus 2010-11-06 16:04   좋아요 0 | URL
김연수 씨가 이 책을 추천했었군요.
간혹 이 책 중간중간에 잔인한 사진들 몇 점 있지만,,
전쟁과 국제 분쟁이 사라지지 않은 지금 이 시대에
수잔 손택이 남긴 메시지를 읽게 되면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문화박물지 - 이어령의 이미지 + 생각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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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고 있는 전통적 한국 문화의 물건들을 전시한 순수문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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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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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공부의 참된 목적과 방법을 알려주는 인간적인 인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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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5 17:01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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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구스타브 도레의 그림과 함께 읽는, 명화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시리즈 0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김근주 옮김 / 예원미디어 / 2006년 4월
16,800원 → 15,120원(10%할인) / 마일리지 8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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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용은 축약되었지만 유명한 세계 명작들의 삽화를 남긴
구스타브 도레 그림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은 단테의 <신곡>, 라 퐁텐 우화집, 샤를 페로 동화집 등이 있다.
특히 <신곡>의 삽화는 유명하다.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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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1- 기발한 시골 양반 라 만차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05년 11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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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진본 서유기 - 전12권
오승은 지음, 조태호 그림 / 맑은소리 / 2007년 1월
117,600원 → 105,840원(10%할인) / 마일리지 5,88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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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시리즈가 진본을 토대로 번역한 것인지 모르갰지만.....
일단 만화로 구성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시리즈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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