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그린 그림 - 미술사 최초의 30가지 순간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최기득 옮김 / 예경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미술사적 사실, 진실 혹은 거짓  

 


 

 

 

 

 

 

 

 

 

 

 

 

 알브레히트 뒤러 <멜랑콜리아 I>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875525   
  

 #1 인간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한 최초의 화가는 살바도르 달리이다. 
 

 #2 팝 아트라는 장르를 최초로 시도한 화가는 앤디 워홀이다. 
 

 #3 동판화를 처음 그린 화가는 알브레히트 뒤러이다.   

 

 

미술사에 조금이라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제시된 세 가지 미술사적 사실들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달리의 그림들은 의식 속의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주제를 하고 있다. 팝 아트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앤디 워홀이다. <기사와 죽음과 악마><멜랑콜리아Ⅰ><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뒤러의 3대 동판화 걸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뒤러는 판화의 대가이다. 지금까지 출판되어 온 각종 미술사 관련 도서에서 세 명의 거장들이 남긴 미술의 발자취를 많이 볼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이들이 미술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 가지 사실들은 틀린 내용이다. 이들은 그 분야에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을 뿐이지 최초로 시도한 것은 아니다. 

 

뒤러가 목격한 꿈 속 세상   


플로리안 하이네라는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딱히 눈에 띌만한 내용이 없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을 뿐이지 저자는 전문적인 미술사가가 아닌 프리랜서 사진작가이다. 저자의 이력 때문에 책의 내용이 깊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부제에도 밝혔듯이 미술사에 관한 책이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미술사 관련 도서와 차별화 하고 있다. ‘최초’라는 키워드를 통해 미술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트마다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각종 미술사적 용어 위주로 미술사를 풀어내지 않아서 읽는 내내 지루함이 없으며 관심 있는 챕터를 골라 읽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잘못된 세 가지 사실들과 관련된 내용은 각 챕터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내용에 대해 살짝 언급해보자면.....  

 

동판화를 처음 그린 화가는 오락용 카드를 만들었던 ‘오락 카드의 대가’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 무명 화가가 그렸다. 팝아트 장르를 최초로 선보인 화가와 작품은 리처드 해밀턴의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특이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이다.

그리고 최초의 꿈 그림을 그린 화가는..... 놀랍게도 알브레히트 뒤러이다.   

 

이 책의 각 챕터에는 최초의 누드화, 최초의 정물화, 최초의 초상화, 최초의 풍경화 등을 소개하고 있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남고 흥미로웠던 챕터는 단언 최초의 꿈 그림에 대한 내용이다.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미술사 관련 도서를 뒤적거리지는 않았지만 뒤러가 자신이 꾼 꿈의 내용들을 그림으로 기록한 사실은 어느 미술사 도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뒤러가 꿈에서 본 세상을 그린 그림은 단순하다. 어마어마한 물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올라 여러 개의 거대한 물폭탄이 되어 떨어지는 장면이다. 꿈에서 이루어진 허구의 장면이지만 직접 꿈을 꿈으써 가상 현실을 체험한 것이나 다름없는 뒤러에게는 그 장면이 무섭게 느껴졌는가 보다. 그는 꿈에서 본 장면들을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장면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느낌까지 글로 남겼다.       

 

  물기둥은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들판 전체를 휩쓸어버렸다. 땅을 내리쳤던 물기둥은  

  너무나 빨랐고 바람소리와 함께 무섭게 울렸다.

  - 뒤러가 쓴 글의 일부(1525년 기록), 플로리안 하이네 『거꾸로 그린 그림』p 228 -  

  

이전 미술사의 그림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그렸다. 현실이 아닌 상상이 가득한 그림을 그렸지만 대부분 성서 속의 신비적인 종교적 내용을 그린 것이 고작이다. 수면 중에서 일어나는 환상적인 심상인 '꿈'을 그림으로 기록한 점은 미술사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뒤러가 최초의 꿈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후세의 화가들로 이어진다는 것은 비약적일지도 모르나 꿈을 그림으로 남긴 새로운 미술의 시도가 초현실주의가 등장했던 20세기 초가 아닌 이보다 먼저 수백 년 전인 16세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점이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위대한 미술사의 오리진(Origin)  


책 한 권에는 30가지의 미술사 최초의 순간들을 담아냈지만 일부 내용들은 나름 미술사 지식의 정도가 중, 고급이라고 자부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배우는 미술사가 기록된 종이에는 순차적으로 구성된 미술사조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한 유명 미술가들의 이름과 명화들로 가득 차 있다. 이상하게도 미술사에서는 ‘최초’라는 내용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세세한 미술사적 기록들이 후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화가’라는 시대상의 인식이 작용했다.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화가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 때는 미술은 오랜 세월을 연마하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멋진 그림 한 점 남겼다 치더라도 그림을 그렸을 화가에 대한 기록과 증거를 일절 남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동판화가 ‘오락 카드의 대가’라는 이름 없는 화가가 처음 그렸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게 된다. 역사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화가들은 후세에 와서도 무명으로 알려진 현실에 대해 서러울 판에 자신의 위대한 공로가 다른 이에게 돌아가게 된다면 하늘에서 억울해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미술사에서 가려져 있던 이름 없는 오리진(Origin)들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다른 미술사 책들과 비교하면 전문성이 떨어지지만 이전에 미술사 책에서 볼 수 있었던 구성 형식과 다르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미술사를 접근했다는 점에서 이제 막 미술사라는 흥미로운 학문에 발을 내딛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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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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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펌프 우화  


하루 종일 햇볕이 내리쬐는, 살아 숨 쉬는 생물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죽음의 땅인 사하라 사막에는 물을 퍼다 마실 수 있게 설치한 펌프 하나가 있었다. 광대한 사막을 건너는 카라반(Caravan)들에게는 그 펌프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의 오아시스이다. 그런데 펌프 옆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서 펌프질을 하면 그대가 간절히 원했던 시원한 물이 틀림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위 밑을 파면 물이 가득 담겨진 병이 있을 겁니다. 
 그 병을 꺼내어 펌프에 물을 채우십시오. 
 만약에 병에 든 물을 한 모금이라도 먼저 마시게 되면 물은 모자랍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물은 틀림없이 그대가 충분히 마시고도 남을 만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물을 다 쓴 후에는 그 병에다 다음에 오는 카라반들을 위해 물을 채우고 마개를  

 꼭 닫아주십시오. 

 추신: 병에 든 물을 급하다고 먼저 마시면 안 됩니다.

만약에 자신이 뜨거운 햇살 아래 사막을 건너고 있는 카라반이나 여행자라고 생각해보자. 물 펌프의 우화처럼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부는 푯말대로 다음 사람을 위해서 병에 물을 채워 놓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펌프질하는 것보다는 바위 밑에 있는 병에 담겨진 물을 마셔버린다. 너무나 목이 말라서 죽을 것만 같은데 펌프질 여러 번 해대는 것보다는 간단히 병에 든 물을 마시는 것이 쉽고 간편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물 펌프에 거쳐 가는 카라반들이 푯말대로 양심을 지켜지지 않으면 뒤에 오게 될 카라반들도 후자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서 되레 손해를 받게 되면 괜히 또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못 본다. ‘나도 손해를 봤으니 너도 나처럼 당해봐라’는 식이다. 결국 본인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며 마음속에 담아둔 피해 의식은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우화 같은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 현실  


비록 짤막한 우화이지만, 우리 삶에는 사막의 물 펌프를 마주한 것처럼 이런 유사한 경우가 일어나고 있다. 8.15 광복절 행사에 언급된 이후에 불거진 통일세 도입 논란, 무상교육 찬반 논쟁 등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떠오르고 있는 두 쟁점은 다음 세대들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크게 갈라져버린 여야당의 찬반 의견을 정부는 쉽게 조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현 세대에게는 손해 볼 일은 없다지만, 나중에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치명적인 손해를 부담을 주게 된다.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찬반 의견 양상에도 세대 간의 갈등 및 불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세대인 유신 세대부터 386 세대까지 이어져 온 승자 독식 체제로 인해서 세대 내 경쟁이 불가피해진 현 20대들을 ‘88만원 세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성세대에게 저임금노동으로 착취당하며,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서 직업 시장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20대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20대들에게는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좁은 취업의 문을 넓혀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들을 내놓지만 우리나라 20대 취업률은 제자리걸음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인류 전체의 이익으로 연결해준다고 말하지만, 모든 인류 전체가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자본주의 경제의 과제이다. 결국에는 인류는 분배의 불평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어 그 경쟁 속에 밀려나면 평생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한창 자본주의의 나무가 자라고 있던 19세기 중엽 영국 역시 빈부 격차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에서 개인의 이익을 최선으로 치고 있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익이 될 수 있는 인간적인 경제학을 제창하였다. 그 인간적인 경제학에는 ‘정직’이 존재하는 믿음이 바탕 되어 있다. 그리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를 고용주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잘못된 노사 관계 시스템이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러스킨은 노동다운 노동을 위해서는 고용주는 자신이 부여한 임무에 걸맞은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지급해줘야 하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있는 고용주를 믿고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Win-Win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노사 관계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서로 위하여 아껴주는 애정과 그 애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고용주가 24시간 열심히 일 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쥐꼬리만 한 급여에다가 쉬지도 않고 노동자를 부려먹는다면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일 할 맛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돈을 벌어도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푸어(Working poor)의 삶을 살게 된다. 
 

러스킨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지배당하고 만 현재 사회에서는 진부하지만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가 않다.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합리적으로 임무를 부여하여 합당한 급여를 지급해준다면 노동자들도 좋은 노동 환경 속에서 일을 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공장 전체의 운영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듯이 윗사람이 잘하면 아랫사람도 따라서 잘하게 되는 법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직에 기초한 정책 
 

하나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수식과 용어로 가득 찬 경제학 지식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사회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에게는 믿음과 정직이라는 정신적인 가치가 구축되어야 한다.  러스킨은 정직이 정책에 기초해서는 안 되며 정책이 정직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깊어지는 마당에 국민들의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 정부는 ‘공정한 사회’ 만들기를 내세우고 있다.  ‘정직’이라는 단어의 뜻에는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바른 미덕을 내포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취업률이 상승하는 사회, 세대 간의 갈등과 불신을 벗어나 화해의 장을 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공정한 사회’ 만들기가 정직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정책에 기초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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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들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 한길인문학문고 생각하는 사람 2
박석무 지음, 황헌만 사진 / 한길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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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무총리는 언제. . .?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공식 사퇴를 밝힌 지 한 달 만에 9월 16일에 김황식 감사원장이 새 국무총리 후보에 내정되었다. 이번 주부터 추석 연휴로 인해서 김황식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는 다음 주인 28~29일로 확정되었다. 김황식 총리 후보자가 내정되기 전까지 여러 명의 총리 후보자들이 거론되었지만 줄줄이 낙마한 이후 국정 운영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정운찬 전 총리는 공식 사퇴 입장을 언급하기 전부터 이미 여당의 6.2 지방선거 패배, 국회에서의 세종시 수정안 부결 결과에 대한 책임론을 운운하며 스스로 물러날 것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 이전부터 정 총리의 사의 결정에 대해서 고심하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 총리의 사퇴서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정치 실무 감각이 뛰어나며 ‘세대교체’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차기 총리 후보를 내정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 후로 후보 물색 작업 끝에 김태호 후보와 장관 후보 2명 등이 거론되었으나 오히려 이명박 정부의 국정 이미지에 손상만 입었다. 청문회를 통해서 총리 후보 내정자들의 과거에 있었던 부정적 의혹들이 불거진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국정이념으로 내세운 '공정한 사회'에 부합하지 못한 채 유력한 후임 총리로 떠올랐던 김태호 후보는 스스로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후임 총리 인선에 난항을 겪고 있는 정부로서는 ‘공정한 사회’에 적합한 총리를 찾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총리 인선의 기간이 가면 갈수록 길어졌다. 그리고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외교통상부 특채 의혹까지 드러나게 되어서 정부에 대한 국내 여론의 시선이 곱지 않게 되자, 여러 명의 정치인들이 총리직 제의를 고사하기에 이른다. 정부의 오랜 고심 끝에 김황식 감사원장이 총리 후보자로 결정되었다.

짧으면서도 기나긴 총리 인선 기간 동안 민심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거 같다. 정부는 여러 명의 총리 후보 카드를 자신 있게 내밀었건만 인사청문회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가 지향하는 ‘공정한 사회’ 실현에 부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황식 감사원장 역시 과거에 부동시(不同視)로 인한 병역 면제가 대두되면서 야당이 총리 임명의 동의 여부와 국민들의 냉담한 민심을 다시 얻을 수 있을지 추석 연휴가 지나고 지켜봐야할 일이다. 총리 인선에 관한 논쟁이 길면 길수록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커질 우려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할 조선의 의인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거느리고 관할하는 아주 중요한 직책이다. 조선 시대의 국무총리와 유사한 직책을 꼽으라면 영의정(領議政)이 있다. 역대 조선 왕조의 영의정 중에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한 위인들이 거쳐 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희, 한명회, 신숙주, 유성룡, 이항복 & 이덕형(舊 오성과 한음) 등이 있다. 이들 중에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은 박석무 교수가 펴낸 『조선의 의인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24명의 의인(義人)들에 대한 기록물이다. 늘그막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 수양을 게을리지 않았던 퇴계 이황부터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현실에 대한 울분을 자결로써 생을 마감한 매천 황현까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서애의 소프트 파워, 영재의 하드 파워

22명의 학자들 중에서 정부가 원했던 실무 처리 능력이 뛰어난 국무총리의 모습과 비슷했던 인물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있다. 벼슬 생활하는 동안 쌓은 국정 운영의 경험을 통해서 국난들을 처리해나갔다. 특히, 서애가 51세였을 때 발발한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의 뛰어난 국정 운영 능력이 빛을 발휘하였다. 특히, 서애는 화합의 달인이었다. 그가 주장한 인재 발굴의 10대 원칙에서는 신분이나 가문과 같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조건들을 따지지 않았다. 오직 학식이 있고, 임무 수행 능력이 뛰어난 호기 있는 인재를 등용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천한 신분 상태이거나 아직까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인재들을 발굴하여 등용하는데 노력하였다. 서애의 안목에서 고른 옥석의 인재는 권율과 이순신 등이 있다. 서애의 탁월한 안목이 이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함으로써 전란에 휩싸였던 조선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애는 뛰어난 학식과 국정 운영 능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옥의 티가 있었다.   

 

 

   서애는 재주나 식견이 높아 임금께 올려 바치는 건의를 잘했다. 더욱이 경연에서  

  아뢰는 내용은 모두가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일관된 마음으로  

  봉직하지 못하고 이롭고 해로운 점만 따지려는 부분이 있어 식자 들이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

   - 박석무 『조선의 의인들』‘유성룡 편’ p 124, 서애에 관한 율곡 이이의 평 -

율곡 이이는 조선의 ‘미스터 쓴소리’가 못마땅했는가 보다. 서애 본인 입장에서는 간언(諫言)했을 뿐인데 그와 당시 활동했던 학자와 관리들에게 서애의 따끔한 지적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단점으로는 성격이 너무 온화한 나머지 굳센 성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컸었기에 서애가 활동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도 조선의 위대한 학자로 명망이 높다.    

 

 반면에 유성룡이 성품이 온화한 스마트 파워(Soft Power)형 정치인이었다면, 영재 이건창(1852∼1898)은 서애보다 뜨거운 애국심이 가득 찬 호기 있는 하드 파워(Hard Power)형 정치인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재야의 학자였지만, 한창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을 때에는 암행어사로 활약했다. 영재는 자신보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탐관오리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냉정하게 따져 판결을 냈다. 그의 날카로운 암행어사 실행 능력과 명성은 당시 고종황제의 귀에도 알려져 있었다. 고종황제가 지방의 관리들을 임명하면서 그들에게 ‘만약 잘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건창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겠다.’라고 당부했을 정도이다. (『조선의 의인들』‘이건창 편’ p 472) 그의 냉철한 비판 능력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조선 개입에 대해 조정을 향해 강력한 비판을 할 수 있었다. 영재의 지나친 쓴 소리는 고종황제에게 눈 밖에 나서 2년의 유배생활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소론이면서도 반대파였던 노론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조선의 당쟁관계사를 기록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어느 당론에도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공정하게 서술되어 있어, 당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원하는 국무총리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국무총리가 서애 유성룡의 소프트 파워와 영재 이건창의 하드 파워가 조합되어 있는 정치를 펼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국민들이 바라는 훌륭한 국무총리를 임명하기 위해서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국무총리라는 직함 자체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의 이익 실현에 급급해 국무총리 자리 하나 가지고 여당과 야당이 논쟁을 질질 끌고 나가면 곤란하다. 국무총리 자리 하나 때문에 시끌벅적한 나라 분위기를 이어가서는 안된다. 혼란의 정세 속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 통솔자답게 서애처럼 화합과 조정의 리더십이 발휘해야할 때이다. 정부는 자신들이 천명했던 ‘공정한 사회’라는 모토에 끼워 맞출 수 있는 총리 후보자보다는 ‘공정한 사회’를 원하고 있는 국민들의 민심에 맞출 수 있는 총리 후보자를 선택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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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9
박경태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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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들의 수난

요즘 프랑스가 유럽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있던 집시(Gipsy)들을 강제 추방하는 정책이 화근이었다. 집시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항상 이동하면서 생활하는 소수 유랑 민족이다. 미신적이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 이들이 가지는 직업이 대부분 점쟁이나 가수, 춤꾼이 많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그들을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예술가나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원의 유래는 15세기경 프랑스 사람들이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사는 집시들을 가리켜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를 알려지게 만든 프랑스가 왜 집시들을 추방하려는 것일까?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 내 치안 안정 및 범죄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써 집시들을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음을 밝혔다. 정부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들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이주해왔었으며, 주로 빈민가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자, 프랑스 내 인권단체 측에서는 사르코지의 정책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반발하며 나섰다. 사르코지의 집시 추방은 유럽 국가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졸지에 집시를 프랑스로 이주하는 것을 방조(傍助)한 국가가 되어버린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사르코지의 발언에 언짢아하였으며, 유럽 연합(EU)과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프랑스의 정책에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비비안 레딩 EU 사법·기본권 담당 집행위원은 프랑스의 집시 추방은 과거 독일 나치의 유대인 추방을 상기시킨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사르코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내 집시 추방 정책은 계속 되고 있으며 올해 들어 추방된 집시들의 수는 7천 명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금도 집시 추방 정책으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만개했던 관용(Tolerance)의 꽃들은 점점 시들고 있으며, 수백 명의 집시들은 떠돌이 민족이라는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프랑스 국경을 넘고 있다.   

  

 

  

인종주의의 진화, 신 인종주의 
 

앞에서 언급했던 집시 추방에 대한 글 중에서 프랑스 인권 단체가 사르코지 정부를 비난하는 근거를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인권 단체가 표현하고 있는 ‘인종차별적’이라는 단어에는 ‘인종주의(Racism)’라는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인종주의는 인종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사고방식이다. ‘흑인은 머리가 나쁘니, 머리가 좋은 백인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합당하다’라는 식의 주장이 구시대적 인종주의다. 최근에는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인종주의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옴으로써 인종주의는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런데, 사르코지 대통령은 집시들이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낸 것이 아닌데 인권 단체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시대적 인종주의는 사라졌다 한들,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종주의로 진화하였다. 구시대적 인종주의의 뜻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신 인종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신 인종주의자들은 구시대적 인종주의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으면서,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는 구시대적 인종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인종의 ‘문화’에 차이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며, 철저히 자문화의 가치와 습관으로 타 민족의 문화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래서 자민족 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신 인종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집시라는 민족의 문화는 방랑과 미신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진보적인 문화를 영위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집시 문화를 근본 없고 미천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집시 족의 인류학적 뿌리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집시들을 온갖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범죄만 일으키는 민폐 끼치는 민족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부하게 된다.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이유

인종주의가 한 단계 진화된 신 인종주의가 하나의 사회 집단에 자리 잡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타 민족에 대한 편견이 만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인종주의를 낳게 한 뿌리이다. 신 인종주의론자들은 ‘집시는 범죄를 일으키는 나쁜 민족이니깐, 집시가 싫다’라는 식의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집시가 ‘나쁜 민족’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시가 범죄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추측성 언급을 하게 되면 대중매체는 이를 부풀려 왜곡되게 한다. 한순간에 집시가 범죄인 민족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대중매체의 왜곡된 정보를 대중들은 무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매체와 신 인종주의, 이들의 잘못된 만남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요즘 미국 내 정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미국의 언론매체는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반 인륜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전 세계 곳곳에 전파하는 이런 언론매체의 소식은 미국 내 여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론은 이슬람 국가에 대한 편견을 형성 하는데 일조했다. 최근에 9.11 테러 기념일에 맞춰 광신적 기독교 목사가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우겠다는 엄포의 해프닝을 일으켰던 것과 아직까지도 논란 중인 모스크 사원 건립 반대는 신 인종주의 앞에 눈이 먼 미국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왜곡된 대중매체의 정보와 오류가 가득한 신 인종주의는 사회화된다. 사회화는 사회 집단에 속하는 인원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사회 고유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집단에 내려져오는 인종주의적 논리는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계승하게 된다. 인종에 대한 잘못된 편견, 대중매체, 그리고 두 개념이 잘 버무려져 사회화되어 탄생된 신 인종주의는 사회 내의 악습관으로 쉽게 자리 잡게 되지만 그 과정이 순환 되다보니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숙된 다문화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도 건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회사 지배인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루 동안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 일을 부여한다. 하루 동안 고된 중노동 작업 끝에 손에 쥐어지는 것은 쥐꼬리만 한 월급. 이들이 원하는 안정된 생활은 언제 올지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친정 가족들이 굶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먼 낯선 땅, 한국으로 건너 와 한국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처녀는 ‘외국인’이라는 주위 한국인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타국의 생활을 적응하기 위해서 고생해서 배워 서툴지만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외국인으로만 보고 있다.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들에게도 이방인에 대한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학교 친구들은 ‘깜둥이’, ‘왕눈이’ 등 피부색과 신체를 이유로 놀림감을 당하기 일쑤이다. 어느 베트남 신부는 속궁합도 제대로 맞춰 보지 못한 채 한국인 신랑을 만난 지 8일 만에 살해되었다. 살인죄로 구속된 신랑은 정신병 증세가 있는 걸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국내 여론은 억울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단지, 이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정부의 국제결혼에 대한 법적 규정 개정에만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나마 부산에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추모하고,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작은 행사가 열렸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는 다문화주의로 향하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사회의 발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수용한 서구의 인종주의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 유입된 세계화가 거름이 되어 자란 신 인종주의라는 나무 그늘 때문에 이제 막 움튼 다문화 사회의 새싹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민족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타 문화의 차이를 인식하려는 관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타 민족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 

 

최근에는 밝은 다문화가정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모 기업의 광고가 대중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열심히 노력하여 장원급제하는 내용, 피부색이 각기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아 강강술래를 하는 장면은 기업 이미지 자체를 떠나서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함이 느껴진다. 단순히 광고 속 내용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기지만 말아야 할 것이다. 곧 다가올 다문화사회가 된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다문화사회로 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청사진에 대해서 한 번쯤은 재고해봐야할 것이다. 

  

 

 

* 관련 기사 인용 및 링크

[프랑스, 집시 추방 논란] 경향신문, 2010년 7월 30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301802385&code=970205

[佛 집시 추방에 교황도 '한 마디'] 연합뉴스, 2010년 8월 23일자 입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617866

["집시 추방을 나치의 유대인 추방에 비유?" 佛 사르코지, EU 정상회담서 발끈]  

조선일보, 2010년 9월 18일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8/20100918001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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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고 장가가고 송기호 교수의 우리 역사 읽기 2
송기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 죽는 조선의 신부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었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보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원문,『미당 시전집 1』민음사 - 
 

이 시는 신랑이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달아나버리는데, 40~50년이 경과한 뒤,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 되어 버렸다는 민중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신부의 죽음은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열녀(烈女)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다.

시가 설화적인 내용이다 보니 신부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신부가 재가 되기 전까지 평생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은 조선 시대의 여성의 모습이라서 낯설지가 않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결혼은 단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필수적인 예식이다.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신랑이 누군지도 모른 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얼굴을 모르는 신랑이 올 때까지 사랑방에 기다린다. 간혹 사극을 보면 신랑이 신부의 얼굴이 못 생긴 것을 알고, 합방을 거부하고 줄행랑 치고 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신부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신랑은 씨받이라는 명목으로 첩을 두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이니 만큼 남성 중심주의의 조선 사회에서는 도망가는 신랑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처한 신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평생 시집살이의 서러움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미당은 자신의 시에서 신부의 비극적 죽음을 정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고, 평생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은 신부에 대한 신랑의 미안함도 드러나 있지 않다.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했던 남성 중심적이며 폐쇄적인 유교 사상의 뉘앙스가 풍기고 있다. 자신들에게 부당했을 유교 사회를 원망하면서 죽었을 조선 여인들에게, 미당은 이들의 죽음을 유교 사회에 걸맞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함으로써 조선의 신부들을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위기의 조선의 주부들   

조선 사회에는 여성들에게 삼종칠거(三從七去)를 강조하였다. 시집 가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시집 가서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복종한다고 했다(삼종). 그리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아들을 못 낳는 것, 음란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면 버림받는다고 했다(칠거). 삼종칠거 중에서 여성들이 갖춰야 할 유교적 소양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다. 결국에는 남성의 지위를 정립해주고 있는, 남성들을 위한 사상인 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개가를 할 수 없었으며 한 남편을 향한 수절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했다.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남편이 죽으면 조선의 부인도 따라 죽었다. 심지어 남편과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인이 먼저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여성들의 이런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사회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전란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여성들은 열녀로 추앙받았다. 

지금은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서 부르는 미망인은 지금의 뜻과 차이가 있다. 원래는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여자, 혹은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부인들을 가리킬 때 불렀다. 병자호란 때 어쩔 수 없이 공녀(貢女)로 청나라에 가야만 했던 여성들은 전란이 끝난 뒤,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는 그들을 매정하게 돌아서버렸다. 
 

  잡혀갔던 여인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란을 만나 죽지 못했 

 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 인조실록 16년(1638) 3월 11일, 송기호『시집가고 장가가고』 

  「처와 첩」에 재인용, p 121 - 
 

‘화냥년’이라는 주위에 멸시의 시선을 받아서 서러운 마당에 조정에서는 유교적 의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쌀쌀하게 대하고 있으니 공녀들에게는 하루하루를 사는데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내가 적에게 잡혀 오면 남편은 무정하게 쫒아내 버렸으며, 새로이 처를 맞아들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칠거에는 적에게 포로로 잡힌 아내를 쫓아내라는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유교와 권위를 앞세워 횡포를 부렸다. 
  

    

남편을 위해서 먼저 죽는 ‘레이디퍼스트’ 

 

나라에서는 열녀의 행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녀가 살았던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 그러나 열녀문을 세운 의도 뒤에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하려는 암묵적인 강조가 숨어 있다. 그리고 강조의 근원에는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 열녀문이 열녀를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기보다는 조선의 유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위를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성을 위한 남성의 정중한 매너와 태도를 ‘레이디퍼스트(Lady-first)'라고 부른다. 여성들은 이런 매너를 갖추지 않은 남성들을 보면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는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서 예의와 도리를 지켜야했으며 그런 태도를 보이지 못한 여성들은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만약 조선 사회에서 ’레이디퍼스트’라는 단어가 통용되었다면 남편보다 먼저 죽는 열녀를 지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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