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이여, 안녕 펭귄클래식 51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1001-396] 한밤이여, 안녕

 

 Episode

1941년 4월 18일, 영국의 우즈 강 풍경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였다.  우즈 강 주변에는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A 소년과 그의 4명의 친구들은 우즈 강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 길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놀고 있었다. 자전거 타기에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A 소년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가다가 멈추면서 우즈 강변 쪽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저기 강에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가고 있는데, 저거 뭐지? "  

A 소년과 나머지 일행들도 타던 자전거를 멈추고, 친구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강변 쪽으로 일제히 고개가 향했다. 그 친구 말대로 강변에는 시커먼 물체가 강 위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A는 강 위의 물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의문의 물체를 뚫어지게 쳐다본 A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 야,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거,,, 저거 사람 시체 같은데,,, "  

A의 말에 친구들도 다시 한 번 그 문제의 물체를 주시하였다. 그러자 이들도 이제서야 사람의 시체인 것을 아는 순간, 놀랐는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시체를 본 순간 느낀 충격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채 한 명은 바로 경시청으로 신고하였고 나머지 동료들은 떠내려가고 있는 시체를 건져냈다.  

소년들이 건져낸 시체는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시체의 상태를 봐서는 익사한지 20일이 되었다. 죽은 여자가 입고 있는 코트 주머니 안에 무언가 가득하게 채워넣었는지 불룩하였다. 코트 주머니를 확인해보니 수많은 돌덩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갑자기, 시체 발견 현장에 얼굴이 빨개진 채 흥분으로 가득한 사내가 시체 쪽으로 달려왔다. 사내는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형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억누르면서 사내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레너드 울프 씨, 혹시 이 여자가 당신이 찾았던 실종되었던 아낸가요? "  

  " 네, 맞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실종 신고했던 제 아내, 맞습니다. "   

4월의 따뜻한 햇살이 내리찌고 있는 잔디밭에 시체가 되어 잠 자듯이 누워 있는 사내의 아내, 그녀는 바로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였다. 죽기 20일 전, 3월 28일. 울프는 자신의 서재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버린 차가운 주검이 된 채, , ,   경시청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생전 그녀가 평소에 앓고 있었던 우울증세로 인한 자살로 판명내렸다.   

 

 

  버지니아 울프 vs 진 리스  

만약에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진 리스<한밤이여, 안녕>을 읽고 난 뒤,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의 성(性)과 문학성이 동일한 이 여성 작가를 반겼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바닥에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진 리스가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여성 독자들과 여성 비평가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 독자들이 보기에는 진 리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너무 나약하고 암울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나로서도 무기력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의 행동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면서도 쉽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진 리스는 울프보다 먼저 8년 전에 태어나, 영국 내에서 여성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작가 '진 리스' 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한밤이여, 안녕>은 1939년에 출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2년 전이다. 울프는 분명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여성 작가와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정신질환 증세가 그녀를 괴롭혔으며 그 정신적 고통의 순간에서도 울프는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 <막간>을 집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시기였다.

버지니아 울프와 진 리스, 이름만 들어도 두 사람 다 영국의 여성 소설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 추구했던 문학 역시 비슷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남성 작가들이 지배하는 문학사들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하면서 여성 작가들을 재평가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력에 눌러 있었던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각인시켜준,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이라는 비평문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울프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진 리스도 '여성' 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한밤이여, 안녕>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작품 속 여주인공인 샤샤라는 인물을 통해서 남성 사회에 억압받고 있는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작품 속 샤샤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져 있으며 온통 불안과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질환자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심한 정신질환과 우울증세를 보여왔었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에게 논란만 남긴 문제의 결말 

<한밤이여, 안녕>의 결말은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소설 속 샤샤는 전체적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괴물' 같은 남자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방이다.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방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는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샤샤의 방은 남성을 믿지 않는 그녀의 폐쇄적이고 어둡기만한 성격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굳건하기만 했던 샤샤의 성격은 결말에 다다르게 되면 허무하게 풀어져버린다.외로운 그녀에 먼저 다가간 르네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재회하기를 고대하던 르네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소설 전반부에서 샤샤가 기피했던 흉측스러운 모습의 사내가 들어온다.(!) 그녀의 방에 들어온 사내는 샤샤는 한 침대에 누우면서 소설은 막을 내리게 된다.  

샤샤가 남자들에 대한 강박적인 혐오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결말에서는 자신이 싫어했던 사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만다. 이런 결말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의 의견이 엇갈려져 있다. 남성들로 가득한 사회에 희생당한 여성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는 비관론적인 의견과 지금까지 겪었던 남성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을 벗어나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아를 다시 얻게 된다는 재탄생이라는 긍정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울프의 방 vs 샤샤의 방

앞에서도 버지니아 울프가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다는 문학적 가정에 대해서 살짝 언급했지만, 그녀가 쓴 <자기만의 방>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이라는 존재의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울프는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 샤샤와 작품 속 결말을 비관론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문학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인 저평가에 대해 예로 들면서 남성 사회에서 부당한 입장에 처한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울프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억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또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와 같은 여성 문학가들이 배출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입(Money)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여성의 공간, 즉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인 샤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방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 사회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울프가 말하고 있는 자유로운 자기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샤샤의 방은 오직 세상의 남성들에 대한 억압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이고 답답한 공간일뿐이다.   

   
 
 "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 "  방이 내게 묻는다.  " 그래? 안 그래? "  
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여성용 큰 침대와 그 맞은편으로 남성용 좀 작은 침대. 세면기는 커튼에 가려져 있다. 방은 꽤 큰 편이다. 싸구려 호텔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내 코를 스친다. 호텔 밖에 자갈을 박아 포장한 좁은 도로는 가파르게 경사져 올라 몇 개의 계단과 만나게 되어 있다. 막다른 길이다.  
 
 - p 9 -  
 
   
   
 
작품의 첫 시작 부부인 샤샤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방에 대한 묘사이다. 샤샤의 방이 의인화되어 샤샤에게 물어보는 첫 문장은 샤샤의 성격이 폐쇄적인 강박 증세를 나타내주고 있다. 방이 샤샤에게 방의 상태를 물어보고 있지만, 이것은 샤샤의 독백 중 한 부분이다. 그리고 방의 외부에는 '막다른 길' 이라는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막다른 길' 은 넓은 세상 앞에서 개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샤샤의 순탄치 않은 삶을 예고하고 있다.
 
   
 

 " 나가세요, 나가요. "  살바티니가 말한다. " 나가라니까. "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가봉실로 들어간다. 이 방은 사용하지 않는 방이다.  이 방이 사용되는 경우는 위층의 방들이 손님들로 가득 찼을 때다. 나는 문을 잠가버린다.

 - p 34 -

 
   

자신의 방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뛰어들어 샤샤는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지만 남성에 대한 기피와 혐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괴롭힌다.  결국, 샤샤는 업무 중 실수로 인해 같은 사무실에 일하는 남성 직원으로부터 싸늘한 시선과 말을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한 충동적인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샤샤는 밀폐된 공간으로 숨게 된다. 그곳이 바로 인적이 드문 회사 내의 가봉실이다. 가봉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가버리는 모습은 자신을 향한 남성들의 따가운 눈총과 언어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자세이다.  

  

 

  검은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마는 샤샤  

여성은 '아름다움' 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이며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남성들보다 민감한 편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사고 싶어하고, 입고 싶어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넘어서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여성' 이라는 정체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려는 심리적 본능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들은 이쁜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한다.  

샤샤는 우연히 옷 가게에서 보게 된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검은 드레스' 는  샤샤가 찾고자하는 잃어버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나는 그 까만색 드레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미치게 화가 날 정도로 나느 그 옷을 갈망한다. 그걸 손에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달라질텐데.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페론 부인이 그 옷을 나를 위해 보관해 주도록 청하면 어떨까? ......  을 꼭 구할 거라고. 그 옷을 살 돈을 반드시 구할 거라고.  

- p 39 -

 
   

하지만, 샤샤는 이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만다. 남성들의 시선을 꺼려하고, 자신의 존재에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에게는 당연히 검은 드레스를 살 수가 없다. 샤샤에게는 여성의 정체성이 이미 상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당에 아름다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샤샤가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에게는 드레스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샤샤에게 당장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주어져있었다면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여 입는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했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전과 같은 남성에 대한 기피증이 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샤에게는 자신의 수중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과 연결되었던 사무실 일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던 당시 유럽의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읽기가 쉽지 않았던 진 리스의 소설

긴 글을 마무리하자면, 진 리스 작품의 결말를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남성의 세상에서 희생당한 여성이라고 비관론적인 해석 쪽으로 손을 들고 싶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문헌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해서 울프의 입장을 빌어서 ' 내 생각은 이렇다' 고 말하기에는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다. 그리고 <한밤이여, 안녕>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어 있어서 쉽게 읽혀지는 것도 아니라서 제대로 읽지 못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 따라서 샤샤의 삶과 작품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글의 마무리를 <한밤이여, 안녕>의 생뚱맞은 결말처럼 마무리짓고자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무척 예민한 성격과 정신질환을 달고 살아야했지만 어렸을 때 의붓 오빠로부터의 성추행과 아버지의 죽음 등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그녀의 마음의 병을 악화시켜버렸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지금보다 미치지 못했다. 울프는 평생 다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기성사회 내에서는 그녀의 활동에 대한 시선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제임스 조이스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작품을 쓰는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울프는 같은 문학적 기법을 구사하는 '여성' 작가가 아닌 제임스 조이스를 뛰어넘는 '문학' 작가가 되기를 바랬다. 어쩌면 그녀의 자살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기성사회를 넘어서지 못한, 불행한 페미니즘 작가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진 리스 역시 남성 위주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 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밤이여, 안녕>이 영국 BBC방송에 극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문학적인 활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는 왕립 문학학회 특별회원으로서의 활동과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작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두 여성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은 같았으나, 이들이 걸어야했던 여성으로서의 삶의 길은 너무 엇갈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에서 보고 있을 울프로서는 진 리스의 삶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위의 Episode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출판번역가 박중서 씨의 글을 토대로 제가 나름 소설 형식으로 꾸민 것입니다. 울프의 죽음과 관련된 실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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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2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The Hours로 버지니아 울프를 엿봤던거 같아요.
'디 아워스'를 시작으로 델러웨이 부인,자기만의 방...정도 읽었던 거 같아요.

cyrus 2010-11-22 12:20   좋아요 0 | URL
울프의 소설들 어떤가요? 울프의 소설을 발표 연도순으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좋은 작품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나무꾼님^^

꽃도둑 2010-11-2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읽었어요. 처음 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되었던 게 아마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였을 거에요. 버지니아 울프가 뭐지?.. 그러다 어느 날 <델러웨이 부인>을 도서관에서 보게 되었죠. 그때의 느낌이란...의식의 흐름...참으로 낯설고 꼼꼼하게 그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야 하는데 좀 지루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극복했던 기억이 나네요...근데 진 리스 작가는 처음 접하네요. 사이러스 님 리뷰 덕분에 흥미로운 책 하나 얻고 가네요..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0-11-22 12: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시를 읽고나서부터 울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답니다.
진 리스도 울프와 동시대의 여성 작가인데 이 사람도 그 당시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나름 시련을 겪었던 작가이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쉽게 읽혀지지도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꽃도둑님 같은 여성 독자분들에게는
진 리스의 작품의 내용이 공감되실겁니다.

지금 국내에서 출간된 작품이 펭귄클래식시리즈로 나온
<한밤이여, 안녕>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전 2권)이
소개되었습니다. 참고로 <사르가소 바다>는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혹시 <제인에어>도 읽어보셨다면
<사르가소 바다>를 읽어보시면 좋을겁니다.

굿바이 2010-11-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어쩐일인지 친구와는 다르게 저는 참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3기니>가 있는데 다시 한 번 꺼내볼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0-11-22 13:3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읽어봤는데,, 글 형식이 비평문이다보니 딱딱한 느낌 때문에
힘들었답니다^^;; 특히 제가 읽었던 <자기만의 방>이 굿바이님께서
언급하신 <3기니>와 함께 수록된 민음사 문학전집 판본이었는데,,
<3기니>와 함께 읽었을 때 고생 좀 했었습니다. 분량도 두꺼웠고요^^;;

비로그인 2010-11-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작가의 일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엔 왜 그렇게 당차던 그녀가 돌을 쥐면서까지 물속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있었는데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죠..

치열한 내면, 용납하지 않는 사회, 이상과 현실의 간극, 그리고 아무도 몰랐을 그녀만의 아픔들.

음.. 오늘 cyrus님의 글을 읽으며 비슷한 시대를, 비슷한 걸음을 걸었던 또 다른 작가를 만나고 갑니다. 왠지 말없이 찡끗 ^^ 웃음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ㅋ

cyrus 2010-11-26 16:2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이 언급하신 <어느 작가의 일기>가 버지니아 울프가 생전에
기록했던 일기문인가요? 진 리스의 작품이랑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나서부터 울프에 대해서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일기라면 그녀의
내밀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을거 같습니다.^^
 
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 이마고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다음 가사 속 단어의 연관성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 . .
 
   

가사를 보는 순간, 어릴적에 많이 불렀던 구전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숭이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으로 끝나는 작사, 작곡사 미상의 이 노래는 끊임없이 연관된 단어들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노래 가사에서 등장하고 있는 굵게 표시된 단어들에는 재미있는 연관성이 있다. 

  원숭이,  사과,  바나나,  기차 

아무리 뚫어지게 네 단어를 쳐다봐도 연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주식이 바나나라는 것을 알겠는데, 사과와 기차는 바나나와는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댄 쾨펠이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쓴 <바나나: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보신 분들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연관성을 알아내기 위한 결정적 힌트는 '바나나' 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바나나 특유의 모양처럼 길고 긴 역사를 알면 원숭이, 사과, 기차와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사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먹었던 것은 , , ,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다 알고 있는 성서 속 내용이다. 하느님이 만든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버려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 즉 사과열매를 따 먹게 됨으로써 그 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아담의 목에는 그 때 먹었던 사과가 걸려 있어서, 목젖(Adam's apple)이라는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생겼다는 기원 역시 유명하다. Adam's apple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담이 먹은 열매가 사과라는 성서 속 기록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댄 쾨펠은 바나나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성서 속 기록을 뒤집는 새로운 문헌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성서에는 아담과 이브가 먹은 선악과가 사과라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선악과가 사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선악' 과라고 쓰여진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malum' 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성서 관련 연구자들은 히에로니무스가 이 라틴어 단어를 쓴 의도가 '악의적인, malicious' 와 비슷한 어감에서 착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가 사용한 'malum' 은 '사과' 로도 번역될 수 있어서 후세의 성서 기록자와 화가들은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선악과를 사과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서에서는 자신들이 나체인 것을 깨닫게 되자 수치심에 무화과 잎사귀를 가린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옛날에는 바나나를 무화과로 불렀다는 것이다. 즉, 고대의 선인들이 아담과 이브가 먹은 선악과를 사과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나나라는 식물의 존재를 알지 못한 상황이 낳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이 책에는 저자가 찾았다던 최고(最古)의 성서 원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소개되지 않아서, 근거의 진위성에 대해 의심이 든다. 댄 쾨펠은 단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성경 원본들' (p 24)' 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기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바나나 사업

16~17세기 유럽의 신항로 개척 이후 열대지방에만 자라는 특별한 과일이었던 바나나는 전 세계 대륙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나나를 통한 무역도 이 시기부터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된 바나나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었다. 바나나 무역을 담당하던 로렌조 도우 베어커라는 사람은 본격적으로 바나나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가 만든 회사가 보스턴 프루트였다. 1900년에는 UFC(미국의 유명한 이종격투기 단체인 UFC가 아니다. 이종격투기 단체의 약자는 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이고, 바나나 회사 UFC의 약자는 United Fruit Company이다)로 개명되었고, 지금은 치키타로 알려져 있는 세계적인 바나나 회사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초반 바나나 사업의 출발은 좋지 못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바나나는 고온다습한 열대기후 지방에서만 자라는 과일이다. 열대기후와 전혀 다른 아메리카나 유럽 대륙에서 바나나가 쉽게 자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바나나 최다 원산국은 코스타리카였는데 사실은 코스타리카가 바나나 최다 원산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한 사업가가 코스타리카에 국유 철도 건설을 하게 됨으로써 바나나 운송에 대한 최대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코스타리카 국토는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철도 건설로 인하여 수많은 열대우림들이 파괴되어 갔다. 그리고 사업가는 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철로 주변의 개간지에 바나나나무를 심었다.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미국을 연결하는 대형 철도가 있으니 코스타리카에 자란 품질 좋은 바나나를 기차를 통해서 쉽게 운반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의 바나나 사업을 담당하는 UFC와 그 밖의 나머지 경쟁 회사들에게는 기차와 철도 덕분에 자신들의 이익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철도 건설과 바나나 사업 뒤에는 코스타리카에 자라던 수많은 야생의 나무들은 베어지고, 철도 건설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착취당해야만 했던 암울한 문제점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노동 개혁을 주장하지만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이들의 노동 착취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정부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기에 코스타리카와 더불어 중앙아메리카대륙 바나나 원산국이었던 과테말라 정부의 국가 운영권은 엉뚱하게도 바나나 회사 UFC로 넘어가게 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과테말라 전체 바나나 경작지의 70%는 UFC의 소유였다. 그리고 이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놀랍게도 무려 99년(!)이었다. 과테말라를 통치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권리를 얻은 UFC는 빼앗은 국력의 힘을 이용하여 이들 나라의 노동자들을 쉽게 착취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저항을 하게 되면 미군들이 이들을 억압하였다. 그래서 UFC, 아니 치카타는 세계 최대의 바나나 수입 회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슬픈 열대 과일, 바나나  

바나나에 의해서 생긴 암울한 역사는 바나나 원산지의 노동자들을 착취한 것뿐만이 아니다. 파나마병이라는 지금까지도 발병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바나나들이 죽어가게 되자 바나나 회사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나마병을 이길 수 있는 좋은 품종의 바나나를 만들어야 했다. 병, 해균의 위험성에 강하는 야생 바나나와 맛이 좋은 복제 품종 바나나끼리 교배하여 좋은 품질과 병에 강한 내성을 두루 갖춘 바나나로 만들게 되었다. 이런 교배식으로 인해서 열대우림의 야생 바나나는 절멸의 길로 걷게 되었으며 지금도 학계에서 지정된 야생 바나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도 시장과 대형마트에 팔고 있는 바나나는 야생 바나나가 아닌 복제와 개량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바나나이다. (사실, 야생 바나나는 원래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열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개량된 바나나 역시 무시무시한 파나마병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나나 회사가 제시한 해결방안은 바나나나무에 강력한 살충제를 뿌리는 것이었다. 살충제 덕분에 바나나 열매는 병을 피할 수 있었지만, 바나나 나무 경작지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을 얻게 되었다. 바나나 회사가 개발한 살충제는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가득했던 것이다. 살충제에 접촉한 노동자들의 피부는 파랗기 시작하였고 심한 열병에 걸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살충제의 위험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바나나 회사는 지금도 살충제 이용을 고수하고 있다. 노동자들보다는 자신의 손에 많은 돈을 쥐어질 수 있는 바나나를 위해서 말이다. 바나나 경작지 노동자들은 바나나보다 못난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이 책에 대한 평에서도 밝혔듯이 바나나의 역사는 곧 슬프고 암울한 세계화의 역사이다. 우리가 시중에 팔고 있는 초콜렛이 아프리카 대륙의 카카오 농장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원주민 노동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듯이 바나나 역시 초콜릿 가공 과정과 유사한, 세계화의 그늘에서 탄생된 악마의 과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강대국으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까지 자신들이 길러낸 바나나를 바나나 원산국인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점이다. 요즘 세계의 식량 고갈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만큼 바나나는 개도국 및 빈곤국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주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바나나를 재배할 수 있는 권한은 정부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버티고 있는 바나나 수입 회사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세계의 식량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바나나의 길고도 암울한 역사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이상, 당분간은 시중에 팔고 있는 맛있는 바나나를 먹게 되면 목구멍에 쉬이 넘어가지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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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1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셈버 별이 될게 들어봤어요.

정말 비슷한데요~ 동생도 같이 들어봤는데 녀석은 잘 모르겠다고 하네요.

표절판정의 기준은 중요하겠지만, 결국은 작곡가의 양심에 맡기는 수 밖에 없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0-11-18 21:04   좋아요 0 | URL
조영수 작곡가 측에서 표절 시비에 대해 입장은 밝힌 적은 없다지만
디셈버 측에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하네요.
그래서 이번 표절 시비는 조용히 묻어갔네요^^

양철나무꾼 2010-11-18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바나나 텔레비젼에서 봤는데요,완전 초록색이더라구요.
그걸 후숙시킨다고 한더군요.
알면 못 먹을 과일들 넘 많아요.
전 바나나를 제일 편안해 하는데...
옛날에...공부 좀 했을 때...바나나 한송이 가지고 들어가면 다 먹을 때까지 안 나오고 공부도 했었는데 말이죠~^^

다이조부 2010-11-18 08:06   좋아요 0 | URL


고시생이었나요? ㅋ

cyrus 2010-11-18 21:07   좋아요 0 | URL
바나나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도 사람들의 입맛을 위해서
(물론 그 의도 뒤에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과일을 팔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요) 약품 처리는 피할 수 없는거 같아요.
바나나 한 개 뒤에는 이런 안 좋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바나나 섭취 반대를 하기에는 그렇고,,,
바나나 뒤의 어두운 세계화의 그늘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서 만족해야겠습니다.

꽃도둑 2010-11-1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할넘의 바나나, 니가 한 짓을 다 고하렷다.
아니 저 대단하신 다국적기업과 그 기업들을 눈감고 밀어주는 각 나라 정부의 목을 비틀어야 노동착취당하는 농민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그나마 공정무역을 통해 들어온 물건을 사면 되지만...그것으로는 약하다는 생각은 합니다.
다음 가사 속 단어의 연관성은?
퀴즈 풀려고 들어왔다가....에혀~ 열만 받고 나가네요.ㅜ.ㅜ

cyrus 2010-11-18 21:10   좋아요 0 | URL
예전에 신간평가도서에서 이 책 소개하신 분이 있었던 같던데,,
그래서 한 번 읽어봤는데 우리가 자주 먹는 바나나 뒤에
이런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빈곤국의 사람들은 바나나를 먹어보지 못하는 점에서 씁쓸했습니다.

도란도란 2010-11-1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cyrus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cyrus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다이조부 2010-11-18 21:06   좋아요 0 | URL


어~ 이 블로그에도 있네요 하하하

난 왜 이런 공지를 못 받을까요 ㅋㅋㅋ

cyrus 2010-11-18 21: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어떻게 재 서재를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저는 좋은 출판사 블로그를 알게 되었네요.
방금 출판사 블로그 확인해봤는데, 리뷰를 개인 블로그와
온라인 서점 블로그, 두 곳에 올려야하더군요,
제가 개인적으로 바쁘고 개인 블로그를 만들지 않아서
서평단에 참여는 못할거 같습니다. 그래도 서재 블로그에는 자주
들리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신문의 신간소개에 이 책이 소개될 때 성서해석 문제에 관심이 갔는데 그다지 명확한 건 아니군요.

중남미의 미국대사관과 유나이티드 프루츠, 그리고 ITT는 미국의 공작정치를 상징하는 조직들이죠.
 
이덕환의 사이언스 토크토크 - 세상 모든 유혹에 대처하는 명쾌한 과학 사용법
이덕환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건강을 위해서 좋은 식품 먹는 것은 좋다지만 , , ,

우리 엄마는 우리 가족 건강 전도사이다. 올해 들어서 알라딘을 통해서 건강 관련 도서를 구입한 권수는 10권이 넘는다. 나랑 내 동생이 읽을 책를 구입한 권수만 합해도 아마도 20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건강에 무엇보다도 관심이 많은만큼 돋보기 안경을 쓰면서까지 열심히 책을 들춰보고 노트에 기록도 하신다. 그리고 노트 기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위주의 식생활로 바꾸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이미 짠 맛에 길들여져버린 아버지와 동생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끔 밥상머리 투정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가족들에게 올바른 건강 정보 한 마디 날려주신다.  

  당근에는 베타카로틴이 있어서 시력에 좋고,  현미는 당뇨병 환자들에게 좋은 식품이다 , , , 

  효소 식품을 많이 먹어야 한다.  유산균이 가득한 요구르트를 먹어줘야 한다 등등.   

이런 어머니의 따끔한 일침에 아버지와 동생은 궁색한 변명 한 마디 못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좋은 음식을 만들어줘도 잘 안 챙겨 먹는다. 반면에 나는 이미 이른 나이에(?) 건강 관리를 우선시하는 마인드가 갖춰져있다보니(아마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알려주는 건강 정보는 항상 귀담아 듣고, 맛이 없어도 건강에 좋은 식품이면 꼭 챙겨 먹는다. 금쪽같은 아들의 호응이 좋아서그런지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건강에 대한 좋은 내용이 있는 책이 <동의보감> 이라던데, 알라딘에도 그런 책 파냐 ? " 

아이쿠, 대중적인 건강 도서를 넘어서 이번에는 허준의 <동의보감> 까지 섭렵하시려고 한다. <동의보감>이 우리나라 최고의 의학서적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그렇다고 그 책에 담긴 모든 내용들이 지금의 생활 방식과 비추어보면 대부분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동의보감>은 현대의학의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의학서적이 될 수 없다. 그 책에는 단지 조선 시대에서만 통용된 의학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주자 어머니는 내 말에 수긍을 하셨다.  사실 알라딘에서 시간에 출판되고 있는 <동의보감>이 있는지 검색해봤는데, 두꺼운 책 값이 무려 10만원(!)에 가까웠다. 만약에 내가 충고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돈이 비싸든지 간에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조건 구입을 했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항상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은 우리나라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 음식은 어디에 어디에 좋더라' 식의 정보는 귀동냥으로 얻은 것이라 잘못된 건강 지식들도 쉽게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 자신과 가족 구성원의 체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음식들을 섭취하면 오히려 건강에 해가 될 수가 있다.  

 

  

  <동의보감>에 대한 대중들의 지나친 믿음

이덕환 서강대 화학 교수의 신간인 <사이언스 토크토크>에서는 TV과 언론에서 주장하는 잘못된 과학 지식에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중들의 오해와 무지를 지적하고 있다. 책 제목에는 '사이언스' 라고 떡하니 표시하고 있어서 과학 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벌써부터 겁을 먹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전문적인 과학 지식에 대한 언급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디지털타임스>에서 연재되었던 칼럼들을 모은 책인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짤막한 칼럼들은 우리나라 사회적 이슈를 통해서 살펴본 실용적인 과학 지식에 대한 내용으로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책에서도 허준의 <동의보감>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시작하면서 <동의보감>에 대한 평가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 저자는 <동의보감>의 의학적 가치의 실효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동의보감>을 무조건 신비화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하며 <동의보감>은 조선 시대에 편찬된 전통의학 서적일뿐이라고 딱 선을 긋고 있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TV나 언론에서 소개한 건강 식품 정보를 보게 되면 꼭 이 말이 빠지지 않는다.  

 " 400여 년 전에 쓰여진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도 이 식품의 효과가 증명되었다 "  

<동의보감>이라는 문구만 들어가 있으면 보는 이들에게는 이 식품에 대해서 무조건 신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한의학적으로 이미 <동의보감>에서 증명된 의학 지식이 있기는 하지만 요즘 엉터리 의학 식품이 판매되는 세상이다보니 <동의보감>이 언급된 문구를 보고 무조건 건강에 좋은 식품이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들을 현혹하고 있는 TV 속 잘못된 과학 정보들

지금까지 TV, 언론, 그리고 수많은 건강서적에 알려주고 있는 의학과 과학 정보들은 대부분 과장되어 있다거나 잘못된 부분이 많다. 그리고 대중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정보들을 무비판 없이 수용한다.  

요즘에는 친환경 제품이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환경과 건강이라는 화두를 마케팅에 내세워 대중들의 지갑을 열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샴푸, 린스 등이 모발과 피부에 좋지 않은 인공 화학물질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친환경'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제품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친환경 샴푸나 인공 화학물질 샴푸냐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머리를 감고 나서 머릿결을 한층 더 부드럽고 빛나게 보이기 위해서 친환경 샴푸에도 인공 화합 성분을 첨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환경 샴푸가 무조건 피지와 비듬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TV 속 샴푸 제품 광고를 보게 되면 자사가 소개하고 있는 신상 샴푸를 쓰고 난 뒤의 모발 상태와 다른 샴푸를 사용하고 난 뒤의 모발 상태를 서로 비교하는 장면을 삽입하곤 하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제품의 상품성을 더욱 높이기 위한 광고 수단일 뿐이다.   

샴푸 광고뿐만 아니라 우리가 TV를 통해 접하고 있는 제품 광고들에도 잘못되고 과장된 정보를 흘러 건강을 중요시하는 심리를 맞물리게 하여 대중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최근에 천연치클껌이 판매되고 있는데, 이 제품과 관련된 TV 광고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광고 속 남녀는 멋진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때마침 이들은 오붓한 식사를 마쳤다. 식후에는 껌을 씹기 위해서 남자는 자신이 씹고 있는 껌을 여자에게 내미는데 , , ,  갑자기 여자는 남자에게 귀싸대기 한 방 날려준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뺨이 기습 공격을 당한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뺨 맞을 짓을 하긴 했다.  그가 내민 껌은 인공 화합물인 '초산비닐수지' 로 만든 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고 마지막에는 이번에 새로 출시된 천연치클껌의 성분에 대해서 1초 정도 자막으로 소개한다.  이 광고를 통해서 식품 회사는 자신들이 개발한 천연치클껌이 건강에 좋은 친환경 껌임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이 광고에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합성된 화학 물질로 만든 껌이 무조건 인체에 유해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광고 속 남자는 여자로부터 억울하게 따귀를 맞은 셈이다. 그리고 천연 성분의 껌이 좋은 것이기는하나 천연치클껌 소비가 너무 늘어나게 되면 또 다른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치클을 얻기 위해서는 중앙아메리카에서만 서식하는 고무나무의 일종인 '사포딜라(Sapodila)' 의 수액이 필요하다. 껌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재료인 수액을 얻기 위해서는 칼로 나무 껍질에 상처를 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포딜라 나무의 보존이 보장되기 어려워진다. 지나치게 천연 껌을 공급하게 되면 사포딜라 나무가 절멸될 수 있으며 자칫하면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씹을 수 있는 껌도 사라지는 제품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것

이 책에는 친환경 샴푸, 천연치클껌뿐 아니라 미네랄 워터, 유산균 요구르트, 식용화된 숯 등 대중들을 알고 있는 건강에 좋은 식품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저자는 여러 가지 과학 이론을 근거로 오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엉터리 광고에 등장하는 과학용어는 대부분 고등학교 수준의 과학 지식만 있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넘쳐나는 광고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지키는 일은 절대 남에게 맡길 수가 없다. 과학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이덕환의 사이언스 토크토크> 이덕환, 프로네시스, p 126 -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주장이 인용된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과학자들과 이공계 전공자들만을 위한 학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체험하고, 볼 수 있는 학문이다. 과학을 외면함으로써 생기게 된 과학에 대한 무지는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접근할 수 있는 사고력을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싫어하면서도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리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들만 귀담아 듣는 것이 아니다. 더욱 문제가 있는 것은 비 과학자들의 엉터리 정보에도 쉽게 현혹당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은 남들에게 알아라고 지적 허영심을 뽐내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오류와 과장이 가득한 세상에서 속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세상 앞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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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11-1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고전이라면 예를 들어 퇴계나 이이의 사상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들이 노비제도를 용인한 것까지 본받자는 말은 안 할 겁니다.그런데 동의보감 같은 책은 그 시대적인 한계는 고려치 않고 만능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고 방식이 강해서 문제지요.거기다가 한국특유의 민족정서까지 결합하니까요.

cyrus 2010-11-17 13:22   좋아요 0 | URL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
된 이후, 한의학계에서는 이 책을 세계 최고의 의학서적인마냥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하네요. 자이트님 말씀대로
이런 한의학계의 홍보 뒤에는 민족정서 강조가 더욱 큰 거 같습니다.

2010-11-17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7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융의 지배 - 세계 금융사 이야기
니얼 퍼거슨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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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너무 불공평해 화가 나는가?  갑부 자본가와 10억 단위 보너스를 받는 은행가들 때문에 분노가 치미는가?  아니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개인 요트까지 소유한 자 사이의 엄청난 격차에 좌절감을 느끼는가?  이는 비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서구 문명사 전반에 걸쳐 금융과 금융업자에 대한 적대심은 꾸준히 있었는데, 이는 돈놀이로 생활하는 자들이 농업이나 제조업 등 '실물' 경제 활동에 어느 정도 기생하고 있다는 사고 때문이었다.  

 - <금융의 지배> 들어가는 글, 니얼 퍼거슨, 민음사, p 8 -

 
   

어떤 이는 돈 펑펑 쓰면서 살고, 한편 또 다른 이는 돈 없어서 못 살고 있는 세상.  예전에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말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 돈 있는 자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에 대해서 불평만 떨면서 속을 앓는 심정.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도 그럴거라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돈 때문에 생기는 속앓이는 우리만 그런게 아니었는가 보다.   

니얼 퍼거슨이 쓴 <금융의 지배>에는 고대 문명에서부터 지금까지 서양의 금융사를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의 펜으로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 금융업자들의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돈에 대한 인류의 생각은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류는 높은 자본의 수익을 얻게 되면 여기서는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한 푼 더 끌어 모으려고 하는 속물 근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남의 속물 근성에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러면서도 남이 돈 잘 보는 꼴을 못 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그 당시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나 지금이나 욕 보이는 이유도 돈에 대한 인류의 습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저 인간은 돈에 눈 멀었어.'   

 ' 예전에는 일자무식했던 저 인간이 어떻게 많은 돈을 벌었지?  분명, 온갖 편법을 썼을거야. '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자신보다 돈을 잘 벌고 잘 살면 썩 좋게 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매스컴이나 언론에는 '돈세탁' 이니 '뇌물', '비리' 등 돈에 관련된 부정적인 어감들과 그 행태와 관련된 기업가들이나 정치인들이 이 자주 언급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돈 잘 버는 사람들, 특히 부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에 우니나라에 워렌 버핏이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주식에 손을 댔다면 주위 시선들이 어떠했을까?  아마도 국내에서는 성공한 주식투자가로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세계적인 갑부로 만들어준 그의 타고난 세상을 인지하는 감각과 꾸준한 노력으로 완성된 투자 방법들을 선호와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에 유사한 인물이 나오면 곱지 않은 시선을 보여준다. 자수성가형으로 갑부가 된 사람들도 부당한 방법으로 갑부가 된 사람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과 동률이 되는 것이 부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러나 니얼 퍼거슨은 인류가 자본주의 사회에 불공평하는 이유는 채무자들에 대한 인류의 호의가 드물었다는 점, 그리고 역사 속에서 등장한 수많은 금융 위기와 금융 스캔들은 인류에게 '빈곤, 불평등' 이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제공해준 점, 또 앞에서도 언급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처럼 세계의 금융을 주름 잡았던 특정 인종과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금융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옹호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부당거래를 포함한 역사 속의 수많은 금융거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세상과 같은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책 표지과 제목만 봐도 저자가 금융을 지배하는 세상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눈과 입에 달려 있는 달러, 파운드, 엔화 단위의 얼굴은 금융에 지배당한 사회를 비꼬는 의도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가 금융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으니 아마도 금융이라는 자본 거래 행위가 사회 번영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라는 뜻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융에 무지한 대중들이야말로 금융 위기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치인, 중앙은행가, 사업가들은 돈에 대한 대중의 무지에 한숨을 쉬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가 지출과 세후 소득 관리를 개인에게 맡기고, 성인들이 저마다 주택을 소유한다고 가정하며, 은퇴 대비 저축액 산정이나 보험 가입 여부도 개인에게 일임해 버리면, 결국 역량 부족한 시민이 금융과 관련하여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는 장차 불거질 문제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 <금융의 지배> 들어가는 글, p 17 -

 
   

사실, 니얼 퍼거슨의 금융 예찬론은 어떻게 보면 국제금융의 자유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은근히 수긍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발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릴 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의 금융 사회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도 약간은 문제가 있다. 빈곤이 탐욕스러운 금융업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 결과가 아니라 금융적 무지에 대한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는 점도 합당한 의견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또 그는 부유한 선진국과 가난한 개도국으로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부의 정도로 세계 지도를 구분하는 현실은 여전하다. 풍부한 금융 지식으로 무장한 선진국이 자본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 개도국으로서는 금융적 기회가 보장되지 못한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이 되다보니 세계의 빈곤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하지만 금융업이 세계의 부의 이동과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이미 금융업이 국가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얼 퍼거슨이 소개하는 금융사를 통해서 앞으로의 부의 흐름에 대한 전망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선견지명의 안목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뱀다리 P.S  

<금융의 지배>을 쓴 저자의 이름과 표지 속 인물을 보면서 제일 먼저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이 생각났다. 이 영감님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세계적인 축구 클럽으로 만드는 공로가 큰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항상 경기가 있으면 껌을 씹는 습관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이 영감님이 24년동안(세상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서 경기를 관람하는 동안 질겅대며 씹었을 수많은 껌들을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 나올지 궁금하다. 표지 속 인물의 입에 달린 (비록 엔화이지만) 화폐 단위처럼 그가 씹고 버렸던 껌값들이 꽤 두둑하게 나올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돈으로 빈곤국가들을 지원하면 참 좋을 거 같다는 희망적인 바람이 담긴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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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11-1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이 금융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이번에 서울 왔을 때도 그 특유의 경제관 선전에 여념이 없더군요.아무래도 사람이란 자기가 아는 분야를 남들은 모를 때 답답한 느낌이 나는 모양입니다.

cyrus 2010-11-17 13:28   좋아요 0 | URL
세계지식포럼에 폴 크루그먼과의 논쟁으로 유명했다던데,,
알고보니 지식포럼에서도 중국과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더군요. 이 책에서도 그렇게 자신의 입장을 그렇게 밝히고 있고요.
제가 아직 경제학 지식이 전무해서 폴 크루그먼이 쓴 책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7 15:48   좋아요 0 | URL
지식포럼의 퍼거슨-크루그먼 논쟁은 저도 관심이 있어서 관련기사를 오려놓았습니다.우리나라 감세정책 논쟁과 비슷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이번 미국중간선거도 그렇고 경제정책 논쟁은 어디나 다 비슷하더군요.

마녀고양이 2010-11-1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이 다시 유동성 자금을 푼 시점에서
화폐 전쟁이 재점화될 듯 합니다.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런 책을
읽어봐야 하는데, 짬이 없다는 이유로 요즘 거의 읽어보지 못 하네요.

읽으면서 틀림없이 위화감을 느낄 듯 하지만,
그렇다해도 현실적으로 세계 경제의 돈놀음에 휘말린 우리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인거 같습니다. 폴 크루그먼의 책두 그렇구요.
아직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나 쑹흉빙의 화폐전쟁도 사놓고 못 읽었으니..
사이러스 님의 리뷰를 보고 제가 한심해져서.. 이런 저런 한탄 늘어놓고 갑니다. ^^

cyrus 2010-11-17 17:01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제가 한심한거 같은데요^^;;
고양이님 언급하신 책들도 읽어봐야할텐데 제가 경제에 많이
무지한 편이라서 선뜻 읽기가 엄두가 나지 않네요ㅎㅎ

2010-11-17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7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8 0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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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9] 감정 교육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  

 
   

 

  플로베르에게 살짝 굴복당한 뻔하다 

   " 이 책에 굴복한다. "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남겼다. 카프카의 문학은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카프카는 플로베로의 세밀한 묘사를 모방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플로베르의 문학은 사실주의에 속하는데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사실감 있게 묘사하려는 필체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정말 작품 속 단어 하나하나에도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그가 얼마나 꼼꼼했는가 하면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이 작가에게 주말에 놀러가자고 권하자 플로베르는 새 작품을 쓰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자신들끼리 유흥을 즐겼고 일요일에 플로베르의 작품 집필 정도 확인 차 집으로 찾아갔다. 플로베르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작품이 완성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두툼한 원고를 읽어본 친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전에 읽어본 내용과 별반 달라진게 없음을 느낀 것이었다. 한 친구는 플로베르에게 며칠 전에 읽어봤던 그 내용과 똑같다고 지적하였으며 주말동안 뭘 했는지 물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은 주말에 작품 집필하는데 바쁘다고 그러더니 내용이 고치지 않은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다. 그런 친구의 반응에 오히려 본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플로베르가 하는 말,   

 "고쳐진게 없다니. 이 친구야. 어제 이 문장 부분의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가 다시 쉼표로 바꾸었다네. "       

문장의 부호 하나 넣는데에도 사실적 표현을 위한 그의 몰입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주말동안 문장 부호 하나를 넣는데 집에 틀어박혀 고심을 한 작품이 아마도 <감정 교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플로베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명작 <마담 보바리>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나는 두 권짜리 <감정 교육>을 읽는 내내 그의 세밀한 묘사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작품 한 편이라도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플로베르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음을.) 1권을 읽는 도중에 여러 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카프카가 왜 플로베르의 작품에 굴복했는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리오 영감> 발자크의 파리  vs <감정 교육> 플로베르의 파리 

<감정 교육>은 파리 상류사회에 진출하려는 어느 청년이 욕망과 허영의 도시인 파리에서 겪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장관이 되기를 꿈꾸는 청년 프레데릭 모로는 자신보다 연상이며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아르누 부인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파리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소속원이 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성에 집착하고 권태에 빠진 상류층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된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자신이 겪은 일들은 부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르누 부인에 대한 사랑도 점차 식어만 갔다. 결국,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은 과거의 사랑에 대한 확인만 한 채 헤어지고 600여 페이지 소설도 마무리짓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길고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통해서 1840년대 파리의 어두운 사회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표 시기는 다르지만 프랑스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굵직한 대혁명 뒤의 프랑스 사회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19세기 초반의 파리를 묘사하고 있다면 플로베르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를 포함한 19세기 중반까지의 파리를 그려내고 있다. 시기와 배경은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 파리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사회진출을 꾀하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다.  

발자크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플로베르는 그의 사실주의적 문학을 영향 받지는 않았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는 무미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의 대단한 집중력과 관찰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필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 프레데릭의 삶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토대로 구상한 것이다. 그러니 플로베르의 파리는 정말 사실적이면서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반면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본인이 말할 정도로 자신이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사회는 순전히 그가 창조한 파리이다. 즉, '발자크의 파리' 인 것이다. 발자크가 묘사한 파리는 무미건조한 파리와는 다르게 생동감 있어 보이며 <고리오 영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플로베르의 작품보다는 쉽게 읽혀진다. (발자크의 작품을 읽어본 다른 이들에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었을 때 술술 읽혀져나갔다) 

서로 다른 사실주의 문학을 구축해서인지, 두 작품의 결말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고리오 영감>의 라스띠냑크는 부에 대한 욕망을 가득한 '진흙투성이' 파리 사회를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낙심과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 

결말에서는 파리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찬 포부를 드러나고 있다. 발자크는 라스띠냑크의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어둡고 칙칙한 파리의 기성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라스띠냑끄의 도전은 발자크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당시 파리의 열악한 현실을 비추어 보면 허무맹랑하다.  그래서 플로베르의 파리와 작품의 결말은 발자크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프레데릭은 부조리한 파리 사회를 목도하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이 제일 좋았다고 중얼거리면서 소설은 결말을 짓는다. 이런 프레데릭의 모습은 혁명 이후의 세대들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뒤집고 바꾸기 위해서 가슴 속에 뜨거운 혁명의 열정을 뿜어내지만 혁명를 지나간 이후에는 이들 역시 혁명 이전의 기성 세대들처럼 순응적이고 나약한 삶을 살게 되면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만약 이 작품을 보들레르가 읽었더라면 

혁명 발발 이후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의 재회 장면은 혁명의 열정이 식어가는 혁명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은 재회를 하면서 서로 간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되지만 아르누 부인에 대한 프레데릭의 사랑은 1권 속 모습과 대조적이다.  아르누 부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면서 속으로는 실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누 부인은 예전과 다른 프레데릭의 변화된 감정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부산 떨면서까지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재차 확인하려고 하고 있다. 프레데릭이 자신 말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거 아닌지 괜한 걱정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프레데릭은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피워보려고 하지만 이전처럼 뜨겁지가 않으며 금방 사그라진다. 식어버린 부인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당혹스러웠는지 담배 한 개피를 물어본다.  

   
 

  프레데릭은 아르누 부인이 몸을 내맡기고자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자 그 어는 때보다도 더 강하며 격렬하고 미칠 듯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 반감이랄까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제지했다. 하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신중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끌어내리지 않으려는 마음에 그는 몸을 돌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 <감정 교육> 2권,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윤진 역, 펭귄클래식, p 338 -

 
   

작품에서는 사소한 장면이지만 당혹스러움에 담배를 피우는 프레데릭과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아르누 부인의 대조적인 모습은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에 쉽게 변해지고 무미건조해지는 인간과 그런 인간의 습성에 두려워하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예전과 달라진 프레데릭의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르누 부인이 떠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에게 전해주는 모습은 딱하기만 하다. 젊음의 상징인 까만 머리카락을 전해줘도 프레데릭의 감정은 이제는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인간의 모습에 대한 알레고리는 <감정 교육>이 발표된 해인 1869년에 나온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쭈글쭈글한 노파는 누구나 좋아하고 환심을 사려 하는 이 귀여운 어린애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노파처럼 그렇게 연약하고, 그녀처럼 이도 머리털도 없는 귀여운 것을. 
 그래서 노파는 아이에게 다가가 웃어주면 좋은 얼굴 표정을 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니는 이 늙어빠진 착한 여인이 어루만져 주는 데 겁이 나 발버둥치며 집 안이 떠들썩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착한 노파는 다시 그녀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  "아! 우리 불행한 노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것들조차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어린것들을 무서워하는구나! "  

 - <파리의 우울> [노파의 절망]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역, 민음사, p 27 -

 
   

<감정 교육> 그리고 <파리의 우울>은 1869년, 같은 해에 암울하기만한 파리를 예리하게 묘사한 글을 발표했지만, 보들레르는 이 유명한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미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이 세상에 나오기 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약에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플로베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파리의 모습을 플로베르라는 동시대의 작가가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높게 평가한 유일한 문학가일 수도 있다. <감정 교육> 발표 당시 문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한 기성 세대가 되어버린 아르누 부인은 보들레르의 글에 나오는 노파처럼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순진무구했던 프레데릭은 저 꼬마처럼 늙어버린 아누르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레데릭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 드러난 프레데릭의 감정들은 다양한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기성 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이 되어서 사회에 대한 환멸과 안주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프레데릭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세대들에게도 드러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프랑스 문단이 플로베르의 날카롭게 파리의 실상을 새긴 <감정 교육>을 외면했던 것은 혁명 이후 보다 나은 세상이 도래되지 않았다는 환멸감과 자신들도 모르게 삶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습성에 물들어 있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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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기전에 적어도 플로베르정도는 읽어줘야 할텐데...
보들레르는 고사하고 김광규만 읽었다나 어쨌다나~~~

근데,플로베르에서 보들레르를 떠올리시다니...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상상력도 대단하십니다여~^^

다이조부 2010-11-14 08:18   좋아요 0 | URL

딴지걸자는 건 아니지만 ^^

저는 세상에 죽기 전에 뭔가 해야 할일, 20대에 꼭 해야 할 일 이런

규정이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것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ㅋ

아무튼 그래서 플로베르 와 보들레르 를 남은 생에서 읽지 않는다고 해서

뭐 그닥 후회는 안할듯~ 한동안 김광규 시집을 틈틈히 읽었던 시기가

있었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언급한 두 명의 외국유명시인의 시를 접하지 못한건 몰라서 모르겠는데

생전에 김광규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인생이 더 시시했을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하하하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저도 시집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말로만 죽기 전에 읽자고 그러지, 그렇다고 너무 연연하게
두지 않습니다. 예전에 문학 작품 읽기를 소홀히 해서
삶도 바빠지는만큼 조금이라도 열심히 읽자는 차원에서 정한 것이랍니다.
뭐 죽기 전에 다 못 읽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책들이고,
안 읽었다고 그렇게 후회하는 점도 없고요^^


비로그인 2010-11-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기 구석에 있는데,, 오늘밤 다시 끌어 안아 봐야겠습니다. 물론 Cyrus님의 글도 생각해보면서 말이지욥 ^^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읽는데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름 생각거리가 많았던 플로베르의
작품인거 같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감정교육>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학생시절의 정의감을 잃고 속세에 물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90년대부터 우리나라 소설에 나오는 후일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프랑스 고유무술 사바트의 고수가 나오는 것이죠.

cyrus 2010-11-14 20:32   좋아요 0 | URL
자이트님은 격투기를 해보신 적이 있어서 그 장면이 기억이 남았군요^^
이 작품 읽으면서 1840년대 파리가 크게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1권에는 부패한 왕정에 대해서 젋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 간혹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1-14 23:36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문학사는 연변에서 나온 것이라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적인 관점이 강한데, 1848년 혁명을 그린 가장 사실적인 작품으로 <감정교육>을 꼽더라구요.

아...그런데 사바트는 발차기 전문이라 저는 못합니다.저는 오른쪽 골반을 다쳐서 오른쪽 무릎을 많이 올리거나 비트는 동작을 못해요.

cyrus 2010-11-14 23:4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격투기는 남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스포츠이지만,
무엇보다도 몸 관리가 중요한거 같습니다.

blanca 2010-11-1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과 정말 비슷한 구도군요.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플로베르는 예전에 보봐리 부인을 참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망설여졌어요. 감정교육은 꼬옥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cyrus님 말씀 들으니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0-11-14 23: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다음 플로베르의 작품으로 <성 앙투안느의 유혹>과
<마담 보바리>를 읽으려고 하는데, 망설여지네요ㅎㅎ
그래도 blanca님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고 예전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두 권짜리 작품들도 완독하실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무턱대고 덤벼든 감이 있었답니다.^^;;

starover 2010-12-1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이러스 님은 짱임.

cyrus 2010-12-11 16:16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으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