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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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월의 세계문학









얼떨결에 하와이에 불시착한 테레사(Theresa). 아시아의 변방으로 알려진 한국에서 온 소녀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아늑한 집, 듬직한 어버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나오는 말(母語). 어디서 잃었는지 소녀는 모른다. 불안해진 소녀의 조그마한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는다. 테레사는 외로움과 추위에 떨었다. 소녀를 움츠리게 만드는 하와이의 차가운 바람은 어디서 부는 것일까.







테레사의 괴로움에 이유가 있다. 소녀는 혼자다. 커다란 하와이는 육첩방과 같은 남의 나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도. 혼자서 아픔을 참다가 병원에 온 테레사. 그러나 의사는 소녀의 병을 모른다. 그녀한테 병이 없다고 한다. 지나친 시련, 지나친 피로. 하지만 소녀는 성내서는 안 된다. 테레사, 불쌍한 테레사. 끝없이 침전하는 테레사.


인생살이가 어렵다던 윤동주 시인시가 쉽게 써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고달픈 인생살이를 너무 일찍 깨달은 테레사도 손쉽게 글을 쓰지 않았다.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한 일이다어른이 된 테레사는 여러 번 쓰다가 하와이의 바닷모래로 덮어 버린 자신의 옛 이름을 찾았다. 차학경(Hak Kyung Cha). 어머니의 말(母語)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차학경의 첫 번째 책 딕테(Dictee)가족과 고향의 추억을 되새긴 앨범이요, 회상록이다딕테》는 눈으로 읽는책이면서도 눈으로 보는이다. 이 책에 차학경의 아버지 차형상이 직접 붓으로 쓴 글씨어머니 허형순의 사진이 있다. 차학경은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을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녀는 왜 텍스트 곳곳에 이미지를 넣었을까그녀는 말하기가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차학경은 자신을 말하는 여자(diseuse)’로 지칭한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다. 낯선 언어를 억지로 만나면 입과 혀의 활기가 없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언어는 라는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한다차학경에게 이미지는 책을 쓰기 위해 활용된 비언어적 표현 수단이 아니다. 본인의 정체성과 다양한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시할 수 있는 2 언어.







차학경은 남의 나라에 적응하기 위해 남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 쓰면서(Dictee)’ 성장했다. 포근한 어머니의 말에 익숙한 혀는 차가운 남의 언어가 닿는 순간, 바로 얼어버린다. 목젖은 닫힌다. 웅크린 목소리는 목구멍으로 들어간다. 말하는 여자가 되고 싶은 차학경남의 말과 비슷한 것을 뱉어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 나오는 것은 단어들이 어설프게 만나서 생긴 비문(非文)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은 이방인의 어설픈 말을 듣지 못한다.


어머니 차형순은 차학경에게 말하기와 글쓰기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려준 스승이다. 그래서 차형순은 딕테를 태어나게 한 할머니이자 산파이 책의 2칼리오페 서사시는 어린 차학경이 소중하게 여긴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텍스트다어머니, 모국어, 고향은 차학경의 삶에서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합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정으로. 


(56쪽)



말하는 여자자신이 누군지 떳떳하게 말할 줄 아는 인간이다. 그리고 자유와 존엄성을 말살하는 세상에 거세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차학경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여성을 양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유관순과 잔 다르크(Jeanne d’Arc), 가톨릭 성인 테레즈 수녀(Thérèse de Lisieux, 리지외의 테레사, 小花 데레사)를 소환한다. 이 세 사람은 차학경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녀들은 어린 나이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했으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실천했다. 1장 「클리오 역사」(유관순), 5장 「에라토 연애」(테레즈 수녀, 잔 다르크) 주체적인 여성의 삶과 목소리를 재구성한 글이다. 차학경은 이 글을 통해 자신 또한 그들처럼 살아가겠다고 천명한다.


딕테는 작가가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모아 놓은 보석함과 같은 책이다. 어머니와 모어는 굳어 있던 작가의 입과 혀를 살아있게 해주는 생명력이다. 작가는 한국을 떠나면서 놔두고 온 어머니와 모어를 되찾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 누군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미국 사람이다. 한국에서 차학경으로 태어나 ‘테레사’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미국에 정착한 디아스포라(Diaspora)다. 글 쓰는 작가이자 비디오 아트(Video art) 예술가였다. 어머니와 모어는 풍요로운 정체성을 지닌 테레사 학경 차’로 성장하게 만든 힘이다.





[] 숨은 윤동주 찾기글의 첫 문단부터 세 번째 문단까지의 글은 윤동주 시인의 시구(밑줄을 친 부분)를 엮어서 썼다. 내가 인용한 시는 <쉽게 씌어진 시>, <>, <바람이 불어>, <>,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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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마거릿 애트우드 페넬로피아드



2025년 1월 24일 금요일저녁 8시~10시 20분

장소: 인더가든



<읽어서 세계문학(속으로)>을 만든 독자들

김성현빅토정현정

조약돌천성은히시마최해성(모임 후기 엮은이)






고전은 단단한 껍질로 이루어진 알과 같습니다. 고전의 알은 수많은 독자의 관심을 듬뿍 받은, 아주 오래된 알입니다. 고전을 굉장히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알을 애지중지 품습니다. 그들은 알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바라봅니다. 그래서 고전을 깨뜨리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껍데기는 계속 두꺼워집니다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알은 무정란입니다. 수정(受精)이 되지 않은 알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알껍데기를 깨뜨리는 재해석과 수정(修正)을 거부한 고전의 알 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신선하지 않은 ‘시들시들한 과거’만 남아 있습니.


















[세계문학 작품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5년 1월의 세계문학]

[개정판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 (문학동네, 2024)


[구판 절판] 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문학동네, 2005)



















호메로스, 이준석 옮김 오뒷세이아》 (아카넷, 2023)


호메로스, 김기영 옮김 오뒷세이아》 (민음사, 2022)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두 번째 선정 도서]

호메로스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 (도서 출판 숲, 2015)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페넬로피아드호메로스(Homeros)가 낳은 두 개의 알 중 하나인 오뒷세이아를 깨뜨린 소설입니다(나머지 알은 일리아스입니다)호메로스의 알에서 태어난 오디세우스(Odysseus)는 지혜로운 영웅입니다. 그러나 애트우드가 호메로스의 알을 깨뜨려서 나온 것은 오디세우스가 아니에요. 그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가 태어납니다. 다시 태어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이야기의 중심이었던 과거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갇힌 페넬로페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는 남편을 그리워하고, 구혼자들의 구애를 거들떠보지 않는 현모양처였습니다애트우드가 부활시킨 페넬로페는 남편의 그늘 속에 살아온 삶을 후회하고, 거부합니다. 그녀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없는 오디세우스 신화의 실체를 낱낱이 밝힙니다. 그리고 책 밖에 있는 현대의 독자들을 향해 소리칩니다제발 나처럼 살지 마요!” (페넬로피아드 16쪽)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독자들이 만든 독서 모임입니다.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는 페넬로페가 우리에게 들려준 오디세우스 신화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오뒷세이아를 안 읽은 독자들도 페넬로피아드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오뒷세이아를 읽은 독자들은 원전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이야기를 예상하면서 페넬로피아드를 읽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인상적인 반전이 없어서 아쉽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애트우드의 페넬로페는 호메로스가 묘사한 남편의 영웅적인 면모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점을 알리고 있어요. 그리고 구혼자들과 내통한 죄(호메로스의 묘사, 오디세우스의 관점)로 교살당한 시녀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합니다. 그렇지만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의 독자들은 시녀들의 변론을 묵살한 남편을 두둔한 페넬로페의 양가적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 [절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하정희 옮김 노예의 역사: 현대판 노예노동을 끝내기 위한(예지, 2015)

 



페넬로페는 시녀들을 친자식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시녀들의 부당한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시녀를 사회적 약자로 대입해서 바라본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독자는 페넬로페가 시녀의 죽음을 방관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면서 지적했습니다. 고대 사회의 시녀는 노예와 같습니다. 노예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 길어요. 노예의 역사는 19세기 미국이 아닌 고대부터 시작됩니다시녀는 인간인데도 인간이 아니었어요. 죽을 때까지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소모품입니다. 건강이 쇠약해지거나 엄중한 죄를 저지른 시녀는 갖다 버려도 되고, 죽여도 되는 폐품이 됩니다. 결국 () 페넬로페(호메로스)와 신() 페넬로페(애트우드)는 여성이라는 젠더 안에서 작동되는 계급 차별을 넘어서지 못한 인물입니다.


















* 캐서린 R. 스팀슨 & 길버트 허트 엮음, 김보명 외 옮김 젠더 스터디: 주요 개념과 쟁점(후마니타스, 2024)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페미니즘 운동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페미니스트가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었어요. 인종, 계급, 장애, 섹슈얼리티를 중요하게 인식한 페미니스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흑인 여성, 프롤레타리아 여성, 장애 여성, 젠더퀴어(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성평등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첨예한 논쟁들이 펼쳐졌어요페미니즘의 정의는 다양합니다. 정희진을 포함한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지식 안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여성주의는 성별, 나이, 인종, 계급, 장애, 지역 등 여성들 간의 차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양상에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이론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중에서, 149)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평등과 생물학적 여성만 경험하는 차별 문제에 집중하면 인종, 나이, 장애와 연관된 또 다른 차별을 방관하는 가해자의 학문 되고 맙니다.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 신화를 모르는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고전의 알을 깨고 나온 책도 시간이 지나면 단단한 알이 됩니다. 고전을 재해석한 책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요<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독자들처럼 책을 깊고, 넓게 파고들면서 읽는 분이라면 소설 속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해 첫 독서 모임의 후기는 여기까지 마무리할께요. 2월의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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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Homeros)는 물음표가 많은 음유시인이다. 그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언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는 호메로스가 시력을 잃은 걸인이었다는 점이다.


















* [개정판 절판] 알베르토 망겔, 김헌 옮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세계적인 인문학자가 밝히는 서구문화의 근원(세종서적, 2015)

 

* [구판 절판] 알베르토 망겔, 김헌 옮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세계적인 인문학자가 밝히는 서구문화의 근원(세종서적, 2012)

 

* 새뮤얼 버틀러,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에레혼(김영사, 2018)





호메로스는 어떤 사람인가, 실제로 존재했을까?정답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 질문을 호메로스 문제(Homeric Question)’라고 한다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정체에 대해 갖가지의 가설을 제시했다. 에레혼이라는 유토피아적 소설을 쓴 영국의 작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호메로스의 성별을 의심했다. 그는 호메로스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첫 번째 선정 도서]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도서 출판 숲, 2015)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두 번째 선정 도서]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도서 출판 숲, 2015)





그가 내세운 증거는 오뒷세이아에 있는 사소한 오류들이다. 예컨대 배의 내부 구조와 그리스 국가의 지리와 관련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은 점이다. 여러 개의 오류를 발견한 버틀러는 남성이라면 하지 않는 실수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뒷세이아의 작가가 여성이라서 오디세우스(Odysseus)의 궁전 내부를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버틀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호메로스의 정체는 시칠리아 출신의 젊은 미혼 여성이다. 그녀는 일리아스를 마음대로 인용하면서 오뒷세이아를 썼다.


몇몇 독자는 여전히 호메로스가 여성이라는 가설에 끌린다(나도 한때 이 견해에 흥미를 느낀 적이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견해는 억측이다. 호메로스를 둘러싼 성별 논란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여성의 창작 능력을 깎아내리는 성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된 남성들만의 문제. 버틀러는 가부장의 권위가 식민지로 뻗어나가고 있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다. 이 시대에 살았던 여성 작가들은 남성 중심 문단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마주쳐야 했다. 이들은 작품들이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남성 작가로 보일 수 있는 필명을 썼다.


버틀러는 여성의 글솜씨가 서투르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호메로스를 여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 지식인들은 버틀러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분개했다. 그들은 유구한 서양 지성사의 시작을 알린 아버지와 같은 호메로스가 절대로 여성일 리 없다고 믿었다. 버틀러를 비판한 지식인들은 두려워했다. 호메로스가 여성이라고 알려지게 되면, ‘남성의, 남성이 만든, 남성을 위한 지성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남성의남성이 만든남성을 위한 지성사’를 거룩하게 묘사한 그림이 앵그르(Ingres)의 호메로스 예찬(The Apotheosis of Homer, 1827)이다. 앵그르는 이 그림에서 호메로스를 고전의 전당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묘사했다.


















* [절판] 정금희 엮음 앵그르(재원, 2015)


* 아르킬리코스 & 사포 외, 김남우 옮김 고대 그리스 서성시(민음사, 2018)

 

* 아르킬리코스 외, 오자성 옮김 고대 그리스 서성시선: 서정시는 어떻게 쓰여지는가(청개구리아카데미, 2011)





승리의 여신이 권좌에 앉아 있는 호메로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다. 권좌 아래에 있는 두 여자는 일리아스오뒷세이아를 상징한다호메로스 이후에 활동한 남성 작가와 예술가들이 아버지를 숭배하기 위해 모여들었다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여성 문인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사포(sappho).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은 버틀러의 기이한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면서도, 고전을 대담하게 해석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고전은 예나 지금이나 독자를 지배한다. 고전의 위압감에 눌린 독자는 고전이 알려주는 모든 내용을 순순히 따른다. 그러나 버틀러는 고전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고전을 해석했다. 망겔은 버틀러처럼 유쾌한 뻔뻔함이 있어야 고전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265).


논리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고전을 읽고 느낀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 해석에 정답은 없다. 완벽한 해석은 없다. 그러나 버틀러는 자신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믿었다. 버틀러의 해석은 편파적이다. 이런 해석은 재미가 없고 불쾌하다. 버틀러의 불쾌한 뻔뻔함은 고전뿐만 아니라 고전을 읽은 타인의 해석마저 망가뜨리려고 했다. 고전을 자기 마음대로 뒤집으려면, 고전을 대하는 자신의 해석도 뒤집을 수 있어야 한다. 고전 해석은 고전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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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5-01-25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오늘부터 연휴 시작인데,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월요일이 임시공휴일이 되면서 이번 연휴가 많이 길어졌어요.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5-01-27 09:18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님. 연휴 전 2주 동안 잔업을 연속으로 해서 책을 제대로 못 읽었어요. 토요일부터 읽고 싶은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서 집과 카페에서만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

그레이스 2025-01-27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구엘의 이 책 저는 왜 몰랐죠?
장바구니에 넣어갑니다~♡
절판이네요 ㅠ
아! 이펙트! 이 책으로 갖고 있어요 ㅋㅋ

cyrus 2025-01-27 09:34   좋아요 1 | URL
구판, 개정판 모두 절판됐어요. 이중에 한 권만 있으면 됩니다 ㅎㅎㅎ
망겔이 쓴 책도 그렇고 , 그레이트 이펙트 시리즈가 읽어볼만한 고전 개론서인데 전부 다 절판됐어요.
 




서울에 가는 토요일은 무조건 일찍 일어난다. 그날은 검푸른 빛 아침에 달리는 열차를 만난다. 검푸른 빛 아침 하늘에 슬며시 퍼지는 햇살은 밝지 않다. 여리여리한 햇살은 두 겹으로 된 열차 유리창을 통과하지만, 눈부시지 않다.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이틀 전 토요일은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모임 날이었다. 올해 첫 독서 모임이다모임 선정 도서는 정희진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다이 모임 장소가 있는 동네는 서울 노원구. 모임은 오전 10에 시작된다. 새벽 6시에 서대구역을 지나는 아침 열차를 타야만 모임 장소에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서울역에서 노원역으로 가는 지하철 4호선을 타면 3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작년에 해야 할 건강 검진을 계속 미루었고, 회사는 토요일에 병원에 가보라고 독촉했다. 오전에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해서 독서 모임을 불참하기로 정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오전 시간대의 열차표 전부 매진되면 서울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0시에 서대구역을 지나는 열차 자리 하나를 대기 예약했다. 다행히 자리가 생겼다. 햇살 쨍쨍한 아침에 서울로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수레바퀴와 불꽃>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된다. 1시에 모임이 끝나면 참석자들과 점심을 먹는다. 모임 뒤풀이라 할 수 있다.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나는 모임 뒤풀이에 합석했다. 혼자 식사하는 일이 주말 일상이 되다시피 해서 여러 사람과 식사하는 일이 드물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점심 메뉴가 중요했다. 모임 참석자들이 먹으려는 음식은 피자였다.


<수레바퀴와 불꽃>은 처음에 서한용 작가김지용 님, 두 분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김지용 님은 피자를 매우 좋아하는 분이다. 단순히 피자 먹는 일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피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재료를 쓰는지 살핀다. 지용 님이 선호하는 피자는 대기업이 만든 피자(프랜차이즈 피자)가 아니다.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피자 전문 가게에 직접 가서 먹는다. 이런 피자는 기업형 피자의 토핑과 다르다. 그리고 만드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용 님은 정말 피자에 제대로 미친사람이다. 그분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피자 사진이 많이 있다. 그분은 직접 구매한 피자를 먹고 나서 느낀 점을 인스타그램에 글로 남긴다. 피자 맛집을 잘 아는 지용 님이 추천한 피자 가게에 점심을 먹는다고 하니,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날 내 머릿속은 책이 아닌 피자 냄새로 가득했다













, 서 작가, 지용 님, 이 세 사람이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지노피자 창동이라는 가게였다. 가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봉구 창동에 있다. 우리가 먹은 피자는 오리지널 디트로이트식 페퍼로니 피자 미트볼 피자였다.


피자 두 판이 나오자마자 지용 님은 피자의 전체 모습이 다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이 가게의 도우는 두껍다. 두께가 얼추 토스트와 비슷하다. 도우의 식감은 겉바촉속이다. 피자의 겉부분인 크러스트는 바싹하고, 토핑이 올려진 피자의 속살은 촉촉하다. 피자 토핑이 된 미트볼은 피자 가게 사장이 직접 만든 것이다. 수제 미트볼위에 끈적하게 녹은 치즈가 있다.


우리는 피자를 먹으면서 책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대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피자였다. 세 사람의 입과 눈빛이 피자로 향하자 김지용 교수님의 피자 강의가 시작되었다.


















[절판] 캐럴 헬스토스키, 김지선 옮김, 주영하 감수 피자의 지구사(휴머니스트, 2011)





김 교수님은 이탈리아 피자와 미국 피자의 차이점을 알려줬다. 그 전에 먼저 김 교수님은 이탈리아 피자라는 말을 자주 쓰면 다양한 피자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지방마다 피자를 만드는 방식과 토핑 재료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만들어진 피자는 빈민층들의 주식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피자는 나폴리 피자. 나폴리 피자는 토마토와 치즈가 들어 있는 오늘날의 피자와 다르다. 나폴리 피자가 한참 유행했을 때 이탈리아에 토마토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폴리 빈민들에게 육류는 비싼 재료였다. 나폴리 피자에 먹음직스러운 토핑이 없었다. 둥글납작한 빵에 올려진 것은 마늘과 소금, 라드(lard: 고체 형태로 된 돼지기름)뿐이었다. 그래서 나폴리 피자의 별칭은 흰 피자였다고 한다미국 피자는 미국인들이 만든 피자를 뜻하지 않는다. 미국 피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뉴욕, 보스턴, 코네티컷에 정착했고, 각 지역에서 나오는 특산물로 피자를 만들었다.


피자 가게에서 했던 우리의 대화는 뜨거웠다. 대화의 열기가 더욱 뜨끈뜨끈해질수록 피자는 천천히 식었다. 하루 지났는데도 내 머릿속에 여전히 따끈따끈한 피자 냄새가 진동했다. 다음날, 책에 미친 나는 도서관에 가서 피자의 지구사를 빌렸다. 피자에 미친 김 교수님도 이 책을 가지고 있었다이 책은 피자 강의의 교재였다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강의 후기를 못 쓸 줄 알았다. 강의 교재 덕분에 김 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

 

피자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봐서 그런가? 

여전히 피자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간 피자는 잊어버리고, 이제 책을 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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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20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피자 맛있어 보인다.
나중에 그분 피자 가게 낸 다고 할 것 같네. ㅎ
그래. 다니던 사람은 다녀야 해. 안 다니면 허전하고 뭔가 손해 본 것 같고 그렇잖아.
검진 결과는 이상무지?

cyrus 2025-01-21 06:40   좋아요 1 | URL
지용님이 책을 좋아하셔서 책과 피자를 파는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

자세한 결과는 2월 초에 나올 거예요. 혈압은 정상인데, 혈당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되네요. ^^;;

cyrus 2025-01-27 09:19   좋아요 1 | URL
지난주에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없었어요. ^^

stella.K 2025-01-28 11:49   좋아요 1 | URL
그랴. 잘 됐다. 명절에 과음 과식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보내라.^^

blanca 2025-01-2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자 얘기 재미있네요. 특히 나폴리 피자 얘기는 진짜 신기하네요. 저는 이탈리아 고급 피자인 줄 알았는데...새벽 기차까지 타고 서울 독서모임에 가시는 정열이 부럽습니다.

cyrus 2025-01-21 06:41   좋아요 0 | URL
왠지 올해는 피자를 많이 먹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25-01-25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속의 피자 맛있을 것 같아요. 미국도 지역에 따라 피자가 조금씩 다르다고 들었는데, 디트로이트 식 피자는 처음봅니다. 건강검진 결과도 좋게 나왔으면 좋겠네요.

cyrus 2025-01-27 09:21   좋아요 1 | URL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
 
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브라이언 클레그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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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과학상자는 공예를 좋아하는 어린이가 받고 싶은 선물이다. 열려라, 과학 나라!’ 장난감을 만들고 싶은 어린 마음이 주문을 외치자, 과학상자가 열린다. 상자 속에 여러 개의 부품이 있다. 어린이는 고사리손으로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만의 장난감을 만든다. 과학상자에 들어간 어린이가 장난감을 만들면, 과학상자는 발명가와 공학자를 만든다일 년 중 과학상자가 제일 많이 열리는 달은 과학의 날이 있는 4월이다








어린 과학자와 발명가들을 만날 때마다 활짝 열어준 과학상자가 43년 만에 닫는다. 과학상자를 잠그는 날은 124일이다. 24일이 지나면 과학상자를 영원히 열 수 없다.


과학책은 종이로 된 과학상자다. 과학책으로 들어간 독자는 공학자처럼 기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까다로운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과학책이 기계 만드는 법과 실험 과정을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종이 과학상자 속에 들어있는 과학은 씩씩하다. 활발한 과학은 자신을 어려워하는 독자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다. 반면 오랫동안 실험실에서 지낸 과학은 소심하다. 부끄럼쟁이 과학은 독자를 만나는 일을 어려워한다. 실험실에 갇힌 과학이 유일하게 친한 사람은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과학자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과학은 갓난아기다. 아기 과학의 어버이는 과학자들이다. 아기 과학은 말랑말랑한 가설이다. 어수룩한 과학은 실험실 안에서 아장아장 걷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한다과학이 어른이 되려면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그리고 과학자들의 정교한 관리(검증)를 받아야 한다. 어버이 과학자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과학은 커서 고집이 센 도그마(dogma)’가 된다. 명성에 집착한 과학자는 과학을 악용한다. 이들은 자신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과학이 잘못되었는데도 무조건 옳다고 주장한다. 실험실 생활을 청산한 어린 과학은 어버이의 손에 이끌려 을 만난다. 과학은 글을 만나는 순간 말하는 과학책이 된


기존 과학사의 주인공은 현미경, 망원경, 대형 강입자 충돌기와 같은 실험 기구와 과학자의 이름이 붙여진 법칙이다《책을 쓰는 과학자들: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의 주인공은 과학사의 조연을 맡은 과학이다. 이 책을 펼치면 실험 기구를 다루는 과학자가 아니라 펜을 쥔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25백여 년 동안 과학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다. 과학자는 자식 같은 과학 지식이 어떻게 자랐는지 기록했다. 과학책은 초보 단계인 가설에서 시작된 과학이 어엿한 지식이 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앨범이다. 책은 지식을 보관하는 종이 상자다. 과학자들이 종이 과학상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과학은 실험실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종이 과학상자 안에 과학자의 이름도 들어 있다과학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면 책 한 권을 써서 남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과학책은 과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생애를 말해주는 산증인이 된다.




최초의 과학책은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그리스, 중국, 인도, 중동 지역에서 나왔다. 과학상자 1호(책의 1장)는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쓴 문서다. 비록 우리가 아는 책의 형태와 다르지만, 보존이 잘 된 과학 문헌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랍 출신 과학자들은 잊힐 뻔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저서를 발굴했다. 그들은 그리스 과학자들의 저서에 드러난 부정확한 지식을 솎아냈고, 빈자리에 자신들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채워 넣었다. 중동에서 성장한 수학과 의학은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과학상자 1호는 과학자들만 읽을 수 있는 기록물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과학자들은 라틴어로 글을 썼다. 라틴어는 지식인들의 공통 언어였다. 초창기 과학상자는 대중 친화적 과학책이 아니었다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대중도 읽을 수 있는 과학상자 2호(책의 2장)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632년에 출간된 대화: 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관하여를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썼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는 1834년에 만들어졌다. 1834년 이전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자연철학자로 불렸다. 19세기에 대중을 위한 과학상자 3호(책의 3장)가 많이 나왔다과학상자 3호에 속하는 과학책 중에 현재 고전으로 알려진 책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과학상자 3호는 진화론 논쟁을 촉발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종의 기원이다. 소탈한 성격의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자신의 직업을 과학자라기보다 과학 전문 강연가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 강의를 진행했는데, 강의 주제는 촛불이 붙은 양초였다. 패러데이는 과학 강의를 요약한 촛불의 과학을 썼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과학상자 4호(책의 4장)를 열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론은 절대불변의 진리로 극진하게 대접받은 뉴턴(Isaac Newton)의 고전 역학과 유클리드(Euclid) 기하학을 뒤집었다과학상자 5호(책의 5장, 마지막 장)는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 스테디셀러. 칼 세이건(Carl Sagan)코스모스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시간의 역사등이 있다.


책을 쓰는 과학자들에 언급된 대다수의 과학자는 남성이다. 저자는 여성 과학자들의 글쓰기를 허용하지 않은 과학의 불평등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출판물로 인정받은 책에 중점을 두고, 과학적 글쓰기의 역사를 살핀다면 글 쓰는 여성 과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여성 지식인들은 남자 이름으로 느껴지는 가명을 내세워 책을 썼다. 그리고 동료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여성 과학자들의 편지, 일기, 판매 목적이 아닌 기록물 속에도 과학이 있다. 저자가 강조한 대로 글이 과학을 만들었다면,책이 아닌 글에도 주목해야 한다. 실험실이라 할 수 없는 다락방. 그곳에, 과학에 미친 여자들이 살았다. [주1]


책을 쓰는 과학자들은 단순히 과학책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과학책들의 단점과 한계까지 알려준다. 알프레트 베게너(Alfred Wegener)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대륙이동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지질학자들은 거대한 땅덩어리가 이동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자는 베게너가 대륙의 이동 속도를 과장했으며 지질학자들이 이해할 만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이중 나선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지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왓슨의 글쓰기를 칭찬하면서도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전하는 승리의 이야기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조만간 장난감을 만들 수 있는 과학상자가 사라지지만, 종이 과학상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책은 살아 있다. 하지만 과학 지식을 저장하는 종이 과학상자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 있지 않은 종이 과학상자가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유사 과학이 담긴 종이 과학상자의 유사품도 있다과학책을 객관적인 책이라고 믿는 것은 과학을 가치중립적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과학은 반증과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학문이다.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학 지식의 한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런 과학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잘 만든 과학책은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를 배려할 줄 안다. 그리고 난해한 과학 지식을 최대한 쉽게 풀어 써서 알려준다. 하지만 오류로 확인된 과학 지식을 걸러내지 못할 때도 있다. 과학자들은 기존의 과학 이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글을 썼다글이 있어서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과학자들의 도전적인 글쓰기 덕분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과학책은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독자를 위해 항상 열려 있다.






 <cyrus가 쓴 주석과 정오표>







[1] 19세기 여성 문학사를 정리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함께 썼음, 박오복 옮김, 북하우스, 2022)의 책 제목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 254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한 화학자가 화학 결합을 자세히 밝혀내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로 다른 원소가 연결되어 더 큰 구조를 이루고 화합물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낸 것이다. 1901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나[주2]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역사상 네 명뿐인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된 라이너스 폴링이 그 주인공이다.

 

[원문, 201]


 Meanwhile, on the other side of the Atlantic, an American chemist was making fundamental contributions to understanding the chemical bond, the mechanisms by which different elements link together to from larger structures and compounds. Born in Portland in 1901, Linus Pauling was one of only four people to win two Nobel Prize-in his case, in Chemistry and the Peace Prize.



[2]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Portland)에서 태어났다. 폴란드(Poland)’는 오역이다.





* 264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침묵의 봄이전에 해양 생물에 관한 저서를 두 권 썼고,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주3]



[3] 침묵의 봄은 살충제 DDT의 위험성을 지적한 과학책으로, 환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침묵의 봄이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의 대표작으로 많이 소개되면서 바닷속 생물을 주제로 한 카슨의 과학책이 묻히는 편이다. 침묵의 봄에만 주목한 저자는 해양 생물에 관한 저서 두 권의 제목을 언급하지 않았다.

 

카슨의 첫 번째 책은 1941년에 출간된 바닷바람을 맞으며(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2017). 1951년에 두 번째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18)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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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1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아쉽게 됐네. 난 과포자로 살다보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랬다. 43년이나 됐다니. 저걸 첨 보고 읽기 시작한 어린이들이 지금은 중년이란 말이잖아? ㅋ
소개해 준 책도 재있을 거 같다. 신간이라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혹시 중고샵에 보이면 그때나 노려 보마.
잘 지내지? 책 모임 잘하고 있고. 올해도 너의 소식 기대할게. 새해 복 많이 받고, 만사형통해라!^^

cyrus 2025-01-20 06:26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주는 잔업을 하는 주간이 되는 바람에 퇴근 후 책을 못 읽었고, 글도 제대로 못 썼어요.. ^^;;

마힐 2025-01-13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상자가 아직까지 있었는지 몰랐었네요. 제가 초딩 때 (그 시절에는 국민학교 였죠) 만 해도 학교에서 과학 상자 경연 대회가 있었어요. 학급마다 선수를 뽑아서 과학상자의 부품을 가지고 비행기나 포 크레인 같은 것을 만드는 경연 대회 였었죠. 저도 참가 했다가 본선에서 탈락했었죠..ㅎㅎ
그 뒤로 까맣게 잊어었는데 cyrus님 덕에 옛날 생각이 나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 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_()_

cyrus 2025-01-20 06:29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딱 일 년을 국민학교에 다녔어요. 그다음 해에 초등학교가 되었죠.. ㅎㅎㅎ 아마도 우리 세대가 과학 상자를 알고 있는 마지막 세대일 거예요. ^^

공쟝쟝 2025-02-0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서점에서 실물로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읽진 않아도 소장각. 이지만 소장하기엔 주머니가 가난해서 놓고 나왔습니다! 도판들만 봐도 후덜덜 이었는데, 하지만 내용은 몰랏음!! 덕분에 ㅋㅋ 한번 더 눈도장 찍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