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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읽기
금정연 지음 / 스위밍꿀 / 2024년 6월
평점 :
평점
4점 ★★★★ A-
후덥지근한 밤은 무겁다. 시곗바늘이 자정으로 향할수록 밤은 점점 무거워진다. 더위에 지친 몸은 열대야의 무게를 느낀다. 열대야를 견디지 못한 몸은 눕는다. 내가 언제 눕는지 기다리고 있었던 졸음이 찾아온다. 졸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얼른 자야지.
그러자 한쪽 손이 뒤척거린다. 손은 빨리 자기 싫다. 항상 붙어 다니는 스마트폰과 더 놀고 싶다. 손도 지쳤을 텐데 마지막 힘을 내서 스마트폰으로 다가간다. 손가락 끝이 스마트폰에 닿자, 쉬고 있던 스마트폰이 네모 눈을 뜬다. 네모 눈에서 빛이 나온다. 스마트폰의 빛은 어둠과 졸음을 깰 정도로 세다. 톡 쏘는 빛에 눈꺼풀이 놀라서 올라간다. 잠에서 깬 눈동자는 스마트폰의 빛나는 눈과 마주친다. 스마트폰이 재미있는 동영상들을 눈앞에 보여준다. 이거 봐봐, 재미있겠지? 눈동자는 줄줄이 지나가는 여러 편의 짧은 동영상을 쫓아간다. 보고 싶은 동영상이 너무 많다. 멈출 수 없는 재미. 눈동자는 즐겁지만 불안하다. ‘과연 일찍 잘 수 있을까?’
사람들은 피곤해도 자기 전에 항상 스마트폰과 눈 맞춤한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같이 있으면 힘이 나는 애인이 아니다. 오히려 달콤한 동영상으로 유혹해서 우리의 소중한 힘을 빼앗아 가는 서큐버스(Succubus)와 인큐버스(Incubus)다. 한밤중에 스마트폰과 놀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침이 되자마자 일어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서평가 금정연은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한밤의 놀이’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가 잘못됐다고 진단한다. 한국 사회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스마트폰 중독이 나쁜 걸 알면서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뇌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쾌락을 잊지 못한다. 스마트폰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숙이는 본인의 통제력이 저질이라면서 자책한다. 하지만 금정연은 사람들이 독서를 포함한 여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스마트폰의 즐거움에 의존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야근과 주말 근무는 노동자의 몸과 정신을 지치게 만든다. 초과 근무 수당은 여가비보다는 생활비로 쓰이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피곤한 상태에서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선호한다. 스마트폰은 피곤해도 일찍 자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놀아주는 파트너로 최적이다.
금정연은 한밤의 놀이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파트너로 ‘책’을 추천한다. 그는 스마트폰이 독점한 ‘한밤의 놀이’ 대신에 ‘한밤의 읽기’를 해보자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한밤의 읽기’는 단순히 심야 독서를 뜻하지 않는다. ‘한밤의 읽기’는 프랑스의 비평가 헬렌 식수(Hélène Cixous)가 처음으로 언급한 표현이다. 그녀는 독서를 ‘몰래 읽기’라고 정의한다. 밤은 무언가를 몰래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간대다. 독자는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종이로 만든 마법의 양탄자’를 준비한다. 종이 양탄자를 펼치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종이 양탄자의 정체는 ‘책’이다.
대부분 사람이 주로 읽는 책은 자기계발서와 실용서다. 그들이 읽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이다. 목돈을 만들 수 있는 금융 정보, 요즘 유행하는 것들이 ‘지금 여기’에 다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은 살아가는 데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자기계발서와 실용서는 자신을 보러 온 독자들에게 명령한다. ‘당신, 잘살고 싶어? 그러면 주변을 돌아봐. 현실 감각이 떨어지면 당신은 뒤처져.’ 자신이 남들보다 게으르다고 믿는 독자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을 찾는다.
‘한낮의 읽기’가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설과 인문학 도서를 피한다. 이런 책들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소설에 묘사된 지나간 날들, 과거가 돼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죽은 철학자들이 남긴 생각들은 흥미롭지만 실용적이지 않다. ‘한낮의 읽기’에 익숙한 독자는 쓸모없는 잡학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상상력을 중시하고, 철학과 잡학에 푹 빠진 독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현실에 아주 밝은 한낮의 독자들이 많아지자, 책 읽는 몽상가와 철학도는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몰래 책을 읽는다.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만나러 떠난다. 은신처가 조금 어두워도 상관없다. 그들이 종이 양탄자를 펼치는 순간, 대낮은 밤으로 변신한다. ‘한밤의 읽기’는 고요하게 시작된다.
금정연은 ‘한밤의 읽기’를 ‘대낮에 탈주하는 읽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마법의 종이 양탄자는 독자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보내준다. ‘한낮의 읽기’는 살기 위해서 책을 읽는 행위라면, ‘한밤의 읽기’는 오로지 읽기 위해서 읽는 행위다. 두 유형의 독서 중에 어느 한쪽만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금정연이 말하길 독자는 고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한낮/한밤’의 읽기만 오랫동안 하다가 어느 순간에 ‘한밤/한낮’의 읽기를 선호할 수 있다. ‘한낮의 읽기’와 ‘한밤의 읽기’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나는 ‘하얀 밤(백야, 白夜)의 읽기’라고 부르고 싶다.
무거운 여름밤에 지쳐서 잠들고 싶지 않으면 ‘책 읽는 밤’을 만들어야 한다. 매일 책 읽는 밤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피곤해도 책이 눈에 들어오고, 두 손이 스마트폰을 세게 밀칠 힘이 있다면 한밤의 읽기가 이루어진다. 힘이 부족해서 책이 반갑지 않으면 쉬면 된다. 한밤의 읽기가 즐거우면 무거운 밤이 무섭지 않다. 마법의 양탄자가 된 책은 절대로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낮에 봤을 땐 평범했던 책을 ‘마법의 책탄자’로 만들 수 있을까? 책을 펼치기 전에 주문을 외워 보자.
책탄자야, 내 눈앞에서 펼쳐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이 무거운 밤을 뚫고 어디든 날아 보자꾸나.
흠, 내가 봐도 정말 이상(李箱)한 주문이군.
그러니 밤에 몰래 읽기 전에 주문도 몰래 할 것.
※ cyrus의 정오표
* 31쪽
도블라토프의 책은 고작 네 권이 번역되어 있을 뿐입니다.
* 37쪽
북쪽에 있는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군복무를 하는데 이때의 경험이 훗날 『수용소』라는 소설이 됩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았고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Sergey Dovlatov)는 미국에 이주한 러시아 작가다.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도블라토프의 책은 네 권이 아니라 총 다섯 권이다. 국내에 출간된 순서로 열거하면 《우리들의》, 《보존지구》, 《외국 여자》, 《여행 가방》, 《수용소: 교도관의 수기》다. 이 책들 모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만들었다.
이 책의 첫 번째 글은 원래 강연을 위해 만들어진 글이다. 《수용소: 교도관의 수기》가 출간된 해는 2020년(5월)이다. 도블라토프의 작품 세계를 주제로 한 강연이 이루어진 시간이 《수용소》가 출간되지 않은 2020년 5월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세 명의 작가 중 한 사람이 도블라토프라고 언급했다. 도블라토프를 좋아하는 금정연이라면 《수용소: 교도관의 수기》를 분명 ‘입고’했을 것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저자가 《수용소》가 번역된 사실을 정말 모르고 계신다면 다음 ‘입고 도서’ 목록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