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왕족의 말 못한 고민  

 

   
 

매사가 나를 고발하며 내 무딘 복수심을 채찍질하는구나!  허구한 날 하는 일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사람이란 대체 뭐지?     (중략)   난 왜 ' 이 일을 해야 한다 ' 고 뇌까리고만 있는 거지?   그럴 만한 명분, 의지, 힘, 수단을 다 갖췄으면서도 말이야.  막중한 사례들이 나를 훈계하는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제4막 5장 중 햄릿의 대사, pp 236, 펭귄클래식코리아 -

 
   

 

'햄릿' 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유부단한 인간형의 대표적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그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나이 30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덴마크의 왕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읽는다거나 혹은 두 세 번 읽게 되면 이 젊은 덴마크의 왕자가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있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친의 혼령을 본 이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분노에 사로잡혀 미치광이 노릇을 할 뿐이지 그는 분명 사색적인 성향의 왕자임에는 틀립없다.  햄릿은 분명 정상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갈수록 우유부단한 면이 많이 부각되다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극명한 평가로 엇갈려져 있다.  

 

햄릿뿐만 아니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황제와 왕족들 중에는 후대의 역사가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많다. 

진시황. 그 이름은 최초로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한 영웅이면서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진시황 역시 햄릿처럼 기형적인 친자 관계를 안은채 세상에 등장했고 증명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출생 비밀로 인해서 적잖이 고뇌를 겪어야했다.     햄릿은 선왕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함으로써 조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친자라고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가 된 반면에 진시황은 사생아로 태어나 두 명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진나라를 다스려야했다.   진시황의 출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불위라는 사람의 존재로 거슬러 올러가게 된다.  

 

  

  나의 진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친척보다는 가깝고 혈육만큼은 못 되지!  

- <햄릿> 제1막 2장 중 햄릿의 대사, 같은 책 pp 102 -

 
   

 

전국시대 여불위라는 장사꾼은 진(秦)나라 왕손인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소양왕은 연로했고, 그의 아들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비(正妃)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의 가치를 알아보고,엄청난 자금력으로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도록 힘쓴다.  나중에 자초는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는 재상이 된다.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아는 여불위의 시야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 미래를 보는 시야를 가진 그 역시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종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운명, 아니 진나라의 운명에 판도를 뒤바뀌게 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인 조희를 자초에게 선사한 것이다.  자초와 결호한 조희는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여불위의 아들은 자초의 왕위를 승계했다. 그 아들이 바로 진시황이다.  

사마천은 <사기> ‘진시황본기’ 에선 진시황이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같은 책 ‘여불위열전’ 에선 장양왕을 왕으로 만든 여불위의 아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여불위가 이미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던 애첩 조희를 장양왕에게 보내 그 아이가 대국을 있게 한 음모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진시황과 여불위, 복잡미묘한 관계

하지만 20대의 진시황에게는 복잡미묘한 출생 관계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와 환관과의 은밀한 내연 관계였다.   

마침 자신에게 날아온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진시황의 의혹을 증폭시켜주고 말았다.  투서에는 환관 노애는 진시황의 어머니 태후를 유혹하기 위하여 환관 행세를 하면서 접근한 것이며 노애와 태후의 내연의 관계를 맺어주게 한 사람이 바로 여불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그치기 위해서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의 시종을 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태후와 노애는 서로 정을 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전국책>이라는 또 다른 사료에는 여불위와 노애는 서로 권력을 다투는 대립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엇갈린 기록으로 인해 노애와 태후와의 내연 관계에 여불위가 실제로 연루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여불위 역시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태후와 자신의 은밀한 관계가 진시황에게 발각되면 그동안 누리고 있던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막기 위해서 노애를 불러들였건만 도리어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부채질하고 만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노애는 자신을 둘러싼 태후와의 내연 관계가 진시황의 귀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이는 여불위의 몰락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무거운 처벌 대신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진시황의 마음에는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만큼 여불위는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편지를 읽고난 뒤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여불위열전' 중에서, 김원중 역, 민음사, pp 620~621 -     

 

사마천은 여불위가 진시황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까봐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가들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사마천의 기록이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기록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있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고 똑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려던 진시황에게는 여불위의 존재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환관과의 추찹한 내연관계에 중부라고 칭할 정도로 존경해온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젋은 진시황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궁정에서의 모의가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반란으로 거대한 정권을 무너지기도 하며 십년도 채우지 못하고 왕의 얼굴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권력 타툼의 장소나 다름 없는 궁정의 현실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첩의 자식' 이라는 콤플렉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1장 '여불위의 숙청' 편에 들어있는 각주에 의하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설이라는 기록은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사생아' 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정말로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인정 없는 잔인한 황제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까?

진시황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본기>의 '진시황본기' 에는 정양왕이 여불위의 첩에 반해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진시황을 낳았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여불위의 숙청' 편 각주에 "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 에서 이 설을 받아들였지만, '진시황본기' 에는 적지 않았다. " (pp 55)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내용만 가지고 사마천이 여불위 생부설을 부정하고 있다기에는 근거로 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라 첩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여불위가 생부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진시황에게는 자신이 첩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이 권력자로서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만약에 이 사실이 궁정에 알려진다면 왕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며 훗날 권력을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력했지만 고독했던 권력가

현존하고 있는 사료를 통해서 진시황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족함 없이 완벽할 것만 같았던 어린 진시황에게는 이런 사실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고민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 속에서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보낸 '중부' 여불위가 은밀한 음모 관계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아버린 진시황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거나 다름없다.    

진시황은 중국의 황제이기 전에 번뇌와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불완전한 '인간' 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환관이랑 놀아다니고 무한한 신뢰를 주었던 중부 여불위는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두 가지 사건이 진시황에게는 강력한 군주로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커다란 인생의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은 쉴 틈 없이 하룻동안 업무에 매진할 정도로 진나라 국정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시황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분서갱유' ,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게 한 장본인' , ' 불로초를 찾으려고 했던 왕 ' 으로만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서 유학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으며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였고 아방궁은 향락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진시황에게 남아있는 것은 난폭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이 절대권력의 군주로 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원인에는 황제가 되기 전 태자 시절 때 겪은 사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여불위의 계획에서 비롯된 환관 노애와 어머니인 태후와의 내연 관계는 황제가 되려는 진시황에게는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방술사의 말에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권력이 무너질지 모르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궁정에 비밀통로로 만들 정도로 철저한 비밀주의적 생활을 하였고 자신에게 충언하는 아들 부소를 의심하고 스스로 자결하도록 명할 정도로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간언만 듣고 여불위 다음으로 자신의 곁에 둔 이사를 처형시켰다.  무엇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하루 국정 업무에 열심히 했던 진시황은 주위 신하들로부터 ' 권력욕에 지니치다 ' 라고 할 정도로 거꾸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갈면 갈수록 진시황에게는 주위에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고 고독한 권력은 이어져만 갔다.   

 

   
 

나는 최초의 황제다. 나는 이 땅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 왔다.  나는 법을 세워 힘센 자들의 횡포를 없앴다.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는데 왜 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내가 아니라 어디에 이 백성은 마음을 준단 말인가?  

 - 김태권 <한나라 이야기 1> pp 210~211 -

 
   

  

그의 고독한 읊조림을 파헤쳐 보면, 진시황은 꽤나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미칠 듯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인간 자체로서 할 수밖에 없는 고뇌가 아니라 ‘ 한 나라의 황제이기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뇌’, 그 중심에 강력한 군주인줄만 알았던 진시황은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이 피바람이 부는 권력 다툼의 장에서 너무나 외롭게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삽하나 2011-07-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반가와요 ㅇㅅㅇ
앞으로 알라딘 블로그에서 자주 뵈요 ㅋㅋ

cyrus 2011-08-01 22:23   좋아요 0 | URL
ㅎㅎ 카페에서도 자주 뵈요 ^^

아이리시스 2011-07-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시루스님, 이 많은 리뷰 페이퍼를 언제 다 읽으라고... 더워 죽겠어요. 그리고 토요일이예요. 멋진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알라딘에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 제일 더워요.
그래서 항상 제 앞에는 시원한 것이 있어야해요. 지금도 시원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답글을 달고 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1-07-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조도 자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을 평생 열등감으로 생각했다지 않습니까...김두한의 어머니도 김좌진의 스쳐지나가는 여인이었을 뿐...여하튼 여러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면 그 후손들이 골치아파집니다.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복잡한 출신 관계 때문에 인생 역시 복잡하게 꼬아버리는거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7-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불쌍하죠, 진시황제.
두고두고 최고의 폭군이라는 소실에, 생전에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 했으니 말이예요.
과연 제가 진시황의 입장에 서서, 역사에 끌려 어쩔 수 없는 위치로 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그저 저런 위치에는 가지 않도록 빌 뿐이예요.

요즘 문재인 이사장은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야하는 심정...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답니다.

cyrus 2011-08-01 22:28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지도자라면 고독이라는 권력의 특성을 견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님도 그렇고,,
역시 지도자의 길은 정말 쉽지도 않고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룸살롱 공화국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특유의 접대 문화

최근에 시청자들의 논란을 뒤로한 채 드라마 <신기생뎐>이 막을 내렸다.  드라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첫 회가 방영될 때부터 드라마 속 설정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제가 된 동시에 '막장 설정' 이라는 극명한 평가를 받았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기생들은 전통을 지키는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한국 최고의 부유층들이 다닌다는 '부용각' 이라는 최고급 요정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들이 자존심을 걸고 지키는 한국 전통문화가 한국사회에서 근절되어야 할 바로 ’술접대 문화‘ 라는 것은 몇 번의 에피소드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드라마 속의 부용각 소속 기생들은 마치 황진이처럼 노래와 춤을 선사하며 술 접대를 하고 있다. <부용각> 손님들은 ‘양주’ 를 마시며 ‘한국 전통’ 을 지키고, 또 현대판 기생들인 그녀들은 기생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영어를 배우며 한국전통을 지켜 간다. 한국에선 바이어들에게 한국여성을 접대시키며 비즈니스를 한다는 사실이 이미 국제화되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도 서구 비즈니스 손님들까지 등장시키며 ‘한국여성은 술접대용‘ 이란 전통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있다. 이런 한국의 접대문화를 예쁘게 단장해 세계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신기생뎐>뿐만 아니라 몇 몇 드라마에서도 진한 화장에다 야한 옷을 입은 젋은 여자들을 양쪽에 끼고 술을 마시는 접대 장면이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 국내 언론매체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과 공직자들이 생각하는 향응, 접대 문화가 가장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분야가 '정치' 쪽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 2010년 7월 6일자)   그리고 기업에서도 접대 한 번 하는데 드는 비용이 평균 40만 원이 초과할 정도로 사회조직적 집단 내에서 접대문화는 빠질 수가 없다.  '룸살롱 접대' 를 관행으로 인정하는 정계와 기업의 모습을 통해 접대문화가 독특하면서도 올바르지 못한(?) 또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 접대문화의 불편한 역사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 3대 고급 요정 중의 하나였던 오진암이  

작년에 매각되어 철거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익산동에 위치했던 오진암은 1950~70년대 밀실 정치의 주무대였다. 

(사진출처: 한겨레)  


 

책의 저자 강준만 교수는 룸살롱의 전신인 '요정'이 전성시대를 구가한 해방정국을 그 발원지로 보고, 마침내 위세가 절정에 달한 현재까지 룸살롱 발달의 과정과 변모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한다. 

1947년 서울에만 3천여개 이상의 요정이 있었으니, 요릿집과 기생집이 보통 사람들의 화제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요릿집과 기생집 출입은 정치 지도자들에서부터 경찰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만연된 관행이었다.  

1963년 광화문전화국의 최고 사용률을 기록한 업소는 요정이었다. 2위는 다방, 3위 여관, 4위는 언론사다. 1967년에 언론과 학계에서는 “요정정치를 청산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그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 야당 정치인에게 정치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 " 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 파티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좋은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 때만해도 정계와 접대문화의 은밀한 관계는 땔래야 땔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서부터 늘 요릿집과 기생집을 출입하는데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었던 접대문화가 쉽사리 근절될 리는 없었다. 

1970년대부터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룸살롱과 이에 따른 '호스티스 문화' 가 번화가 한가운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룸살롱이 아닌 업소들도 룸살롱 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도 유사 룸살롱으로 인해 룸살롱의 엄격한 정의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룸살롱 '원맨밴드' 경력 33년인 A씨에 따르면, 국내에 룸살롱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 중반이며, 1세대 룸살롱은 서울 퇴계로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후 이태원 근처에 '길싸롱', '밤길' 같은 룸살롱이 생기기 시작했다.   

88 서울올림픽은 ‘룸살롱 올림픽’ 이라 불릴 정도로 룸살롱이 흥행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11개 대형 요정업체에 20억원이나 되는 돈을 특별융자했고, 요정 수십곳은 ‘모범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도 강준만 교수는 정계, 경영계에서 이루어지는 룸살롱 관련 사건뿐만 아니라 연예인 성 접대 사건 그리고 최근에 경기 불황으로 인해 룸살롱 접대부로 일하는 20대들의 현실까지 읽는 내내 얼굴이 화근거리고 민망함을 느낄 정도로 룸살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밀실문화를 적나라하면서도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다.  



 

  룸살롱에서 부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부패의 막장으로 파고 들어가는 구조적 악습의 뿌리는 '패거리 문화' 에 있다. 그리고 이런 룸살롱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칸막이' 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준만 교수는  ‘칸막이' 는 연고, 정실 중심의 패거리 만들기의 필수 요소라고 분석하고 있다.  칸막이 현상의 이익을 쟁취하고자 하는 게 접대이고 주고받는 접대 속에 부정부패가 꽃을 피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가청렴도가 답보 상태인 우리나라가 공정한 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 각 부분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부패 친화적 접대 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  횡령, 뇌물, 유용 등 전통적인 형태의 부패행위 외에 부패친화적 문화와 연계된 향응, 접대 등에 대해서도 부패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룸살롱은 정치인과 판·검사, 재벌과 언론 등 권력 자본가, 엘리트들이 음주와 놀이를 기본으로 접대를 주고받은 장소다. 술자리 접대와 성상납 강요를 폭로한 문건을 남기고 자살한 탤런트 故 장자연씨는 한국 접대 문화의 희생양인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기 불황을 이유로 젋은 20대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본인 스스로 화려하면서도 음침한 룸살롱으로 향하고 있다. 권력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접대부(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들 중에는 더욱 희망의 빛은커녕 어둠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파탄된 삶에 후회만 거듭하다가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룸살롱 메커니즘은 부정부패의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니다. 사회지도층이란 사람은 룸살롱에 들어서는 순간 악마가 되어 자신들의 쾌락을 충족하고 미래를 꿈꾸는 서민들의 희망을 짓뭉개기도 한다.  그만큼 이 사회는 곪을 대로 곪아 썩은 '룸살롱 공화국' 의 현실인 것이다.

먼저 떠나간 사람들은 숙제를 남겨 놓았다.  남은 사람들은 그 숙제를 나누어 풀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란 비극적이고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접대문화의 문제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제기하여 재고해야 한다.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공동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반부패 청렴문화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7-28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생뎐은 하두 어이가 없어서 처음부터 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웃기는 설정이었지요, 일본의 게이샤 흉내를 내고 싶었던걸까요?

룸싸롱이라, 시루스님..
이번에 남성 전용 클럽으로 회원 딱 300명인가만 모집하는 외국 체인점 생긴거 아세요?
영국에서 들여왔다던가... 부유층 전용으로 회비가 어마어마한데
남성들만의 장소를 만들거라고 합니다. ㅎㅎ. 머하는 짓거리랍니까..

cyrus 2011-07-28 19:34   좋아요 0 | URL
요즘 VIP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외국 회사에서도 우리나라에
그런 클럽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노는 건 좋긴 좋지만 너무 과할 정도로
흥청망청 노는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

아이리시스 2011-07-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끝에 쫌 봤어요. 신기생뎐. 이 책 흥미롭네요. 이런 걸 문화라고 하기도 좀 뭐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 술문화,접대문화 저는 너무 잘못됐다고 보거든요. 접대가 꼭 술이라는 것도 그렇고 우리도 밤 몇 시 이후에는 술을 안팔았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어요. 미국 어느 주들은 요일제한,시간제한 그런 거 있다고 하던데............

아 맞다, 시루스님 장학금 축하해요.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과학혁명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죽기 직전에 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 세월을 지배해왔던 천동설의 체계를 무너뜨렸다.    

이처럼 사유방식에서 혁명적인 대전환을 이룰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엔 의학을 공부한 폴란드의 천문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주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꿔서 '천문학의 대전환' 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것은 '사고의 혁명'을 가져왔다.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혹성의 하나인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구 중심적인 견지를 태양 중심적인 견지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신이 만든 천체는 완전한 원의 궤도를 돈다고 말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케플러 는 혹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돈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발표한다. 이 법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으로 이어지고, 갈릴레이의 법칙으로부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의 확립과 그에 따른 자연상. 세계상의 변혁의 성립이 이루어졌던 17세기 유럽의 시대를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라고 불리우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마스 S. 쿤<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서 과학 지식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학이 이상 현상의 출현으로 위기에 부딪혀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그 결과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때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체현상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학설이었다. 이처럼 상당기간 동안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단계를 정상과학 단계라고 한다.  이렇게 연구를 진행하다가 정상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정상과학은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근대가 시작될 즈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이 너무 복잡한 천체현상을 상당수 과학자들은 발견하게 되면서 천동설은 학문적 당위성으러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이를 위기 단계라고 한다.  

이 위기 단계에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설명체계를 모색하게 되면서 많은 가설이 등장하고, 그 가설들 중에서 보다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이나 모형이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천동설의 대안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가설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었고, 또 다른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이 지동설이 실제로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30여년 동안이나 실험과 관측을 하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브라헤의 천문학 연구를 이어 받은 케플러에 의해 그 오류가 지적되었지만 지구중심설을 태양중심설로 전환시켰으며 이러한 지배학설의 전환을 과학혁명 단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혁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 속에서 ‘과학 혁명’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우리가 ‘과학’ 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추상적인가 아니면 단일한 실재인가라는 것이다.  도리어 여러 개의 구체적인 ‘과학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자연이라는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기존의 역사관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과거를 보는 현재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당대인들의 경험과 시각 속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 혁명을 볼 때 필요한 질문은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혁명적인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는가이다. 

피터 디어가 쓴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과학 혁명’ 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통해 근대 과학의 발달 과정뿐만 아니라 그 당시 과학자들이 '과학' 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탐구하였는지 묘사하고 있다.  

 

 


   1500년 :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텔레스주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스콜라 철학을 탄생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목표는 중세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기독교 신앙에 철학을 이용하여 이성적인 근거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 당시 오랫동안 중세 학문을 지배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을 반영하였다.  

그 당시만해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학문의 내용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이 때부터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이 유행하였는데 중세의 자연철학은 과학적. 실용적 가치보다는 신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 로 격하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신학적 교리를 설명하는데 이용하였다.  오직 신이 조물주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를 이해하는 학문이 자연철학이었던 것이다.    

한 때 몇 몇 학자들 사이에서는 12세기 아랍 철학자였던 아베로에스(1126~1198)의 사상을 받아들여 철학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철학의 독립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대해 논의를 점화시켰지만 자연철학과 종교와의 불가분적 관계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16세기 인문주의 :  '과학적 르네상스' , 공존의 시대

 

 

 

  

(위) 코페르니쿠스의 <천제의 회전에 관하여>에 실린 지동설 체계도  

(아래)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에 실린 도판    

  

14세기에 르네상스 시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인간의 지적. 창조적 힘 역시 재흥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의 동시 출간은 ' 과학적 르네상스 ' 가 등장하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Renaissance)' 라는 단어에는 '부활, 부흥, 재생'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문화의 부흥을 부르짖는 당시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 역시 오랫동안 지배해오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도 고대의 권위적인 학문의 영향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이전에 유지되어온 기존의 학설을 폐기하려는 의지보다는 선대 학자들의 이론을 전수받아 복원하겠다는 인문주의적 의지가 더 강했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인 베살리우스 역시 인문주의적 감수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중세의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지배했다면 의학에서는 갈레노스(131?~201?)의 해부학 이론은 오랫동안 학문적 권위를 누렸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삼았으며 자신이 주장한 원칙들은 어느 정도 갈레노스의 원칙을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적 르네상스' 에는 고대인의 지식을 뛰어넘는 창조성과 함께 그들의 지식을 모방하고 복원이 강조되었던 공존의 시대였다.   

  

 

  17세기  :  혼합된 잡종의 과학

   

  

' 아는 것이 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1561~1626)  

 

이전의 과학이 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면 16~17세기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실용적인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섭정 시대 때 궁정 행정인으로 활동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국가의 역할에 요구되는 자연철학을 강조하였다.  그는 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인간의 기술적 진보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의 등장으로 학문에서의 '실험' 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의 자연철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답게 베이컨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지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의 특징과 비슷하다.  베이컨에게 '실험' 이란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결과를 다시 한 번 검증하는 행위일뿐이었다. 

 

 

 토머스 홉스 (1588~1679)

 

후에 파스칼, 보일 등이 과학적인 검증 과정으로 이루어진 '실험철학' 이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자연철학' 의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철학자 토머스 홉스마저 보일의 실험이 전혀 '자연철학' 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자연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와  

자연현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뉴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애초부터 고수하려는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영국 경험론자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귀납적인 방식과 경험을 강조하였으며 훗날 '뉴턴주의' 라는 과학철학 스타일을 형성하게 된다.    

뉴턴은 가설을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이라 하여, 이를 배격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저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관념적, 이성적 고찰보다는 거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경험적 기술에 치중했다.  뉴턴은 <광학>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빛을 입자라고 설명하면서도 빛 입자의 구체적 운동과 작용에 대해서는 어떤 실험적 증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뉴턴주의와는 반대로 데카르트주의는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관을 강조하였다.  세계와 자연의 모든 과정이 필연적이고도 자연적인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그 기계적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자연의 생물학적 현상들을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책의 저자 피터 디어의 표현대로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주의와 뉴턴주의 간의 논쟁의 시대동안 과학은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실증적인 면이 혼합된 잡종의 학문이었다.  

 

 

  과학혁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과학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는 시대에는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터 디어의 <과학혁명>은 자신의 책이 발간하기 5년 전에 쓰여진 동명 제목인 스티븐 샤핀<과학혁명>(영림카디널, 2002)에 응수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스티븐 샤핀은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학계의 주장에 맞서 도발하였지만 피터 디어는 샤핀의 주장을 정면에 반박하기보다는 샤핀의 관점대로 기존의 과학혁명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전 전회' 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선천적 형식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고 설명하였다. 즉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 구질서의 파괴를 동반한 사고방식의 변혁을 강조하고 있다.  니체는 커다란 사유의 망치로 낡은 구 이론들을 파괴함으로써 '망치로 철학하기' 가 가능했겠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는 코페르니쿠스는 니체처럼 '망치로 과학하기' 가 불가능했다.  아니, 아예 망치를 집어 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자연 철학은 여전히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근대 과학의 주요한 분야인 화학이나 생물학은 18세기에 와서야 ‘과학 혁명’에 해당하는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신구의 과학 학문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구성요소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통일성을 내포하면서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양식의 과학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제국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과학혁명 역시 하루 아침에 근대사회로 전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7-28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정말 다양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읽으시네요.
만화만 빼고 다 읽으시는것 같아요, 아, 판타지도 안 읽으시지.. ^^

저는 맹목적인 진리를 추구하던 때가 차라리 속편하구나 싶기도 해요.
칸트처럼 주관적인 현상학의 관념은 정말 피곤하거든요.
대체! 무엇인 진리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라,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으니까요. ㅎㅎ

cyrus 2011-07-28 19:36   좋아요 0 | URL
만화도 좋아해요. 판타지나 SF도 읽어보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독서 습관에 변화를 준다는게 쉽지 않네요. ^^;;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좀 그런 면이 있죠, 전 학기 때
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 추상적인 내용이라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벽광나치오 -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의 벽광나치오

조선의 18세기는 참으로 묘한 시대였다. 동양과 서양, 중세와 근대, 재래와 신문물이 도입되고 뒤섞이고 대립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정체성과 가치관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수백 년간 정체됐던 문화는 젊은이의 혈관처럼 팔팔한 활기가 돌았다.  오늘날에도 18세기를 ' 조선의 르네상스 ' 라고 평가할 정도로 14~15세기에 서양에 수많은 천재를 배출했듯이 조선에도 셀 수 없는 인재들이 나왔다.   

조선 르네상스의 인재들의 업적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들과 견줄만한 독보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알려지지 않고 뜬소문처럼 사라져버린 이름 모를 인재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책에 소개한 11인의 벽광나치오들이 바로 역사의 기록에 사라져 ' 이름 모를 인재 ' 가 될뻔한 인물들이다.  벽광나치오(癖狂懶痴傲)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고질적인 버릇을 못 고치며 어딘가에 미쳐 있고, 게으르고 바보 같고, 오만한 사람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 벽광나치오들이란  여행가, 프로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기술자 등 한 가지 일에 능통한 '전문가' 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 로 인정받았기 보다는 한마디로 ‘괴짜’ 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들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범상치 않고 기행을 일삼는 괴팍하게 여겼다.


 

  벽(癖) : 몰입의 대가들    

벽광나치오들은 사람들이 '미쳤다' 라고 할 정도로 자기 전공과 재능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 출신인 정란(1725~1791)은 전문 여행가였다. 그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의 명예를 이어가는 것보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조선의 모든 명산을 등반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당대 사대부들은 정란의 여행길을  ‘ 현실 도피’ 라고 손가락질하였으나 그는 “허황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느니 실제 존재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낫다” 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둑기사 정운창(생몰년 미상, 18세기 후반에 활동)은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바둑만 공부한 끝에 조선 팔도 바둑 '명인' 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으며 천민으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단전(1755~1790)은 10년 동안 독학으로 주경야독했다. 독학 끝에 쓴 시 한 편으로 문단을 휘어잡고 있었던 대문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광(狂) : ' 조선의 반 고흐 ' 최 북     

 

 

 


애꾸눈 화가, 최북

 

최북(생몰년 미상, 18세기에 활동)은 출신 성분이 낮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 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비참한 일생 속에서도 호를 호생관(豪生館: 붓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으로 짓고 오로지 자기만의 예술에 도취되어 살았다.

그는 각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 다양한 일화로 남겼다. 최북과 함께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 신광하가 묘사한 최북의 모습은 그의 사나운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북은 사람됨이 몹시도 다부지고 사나운데 

자칭 화사(畵辭) 호생관이라 했지. 

체구는 단소한데 한쪽 눈은 멀었고 

술 석 잔을 기울이면 꺼리는 게 없네.   

 

- 신광하 <진택문집> 중에서,  안대회 <벽광나치오> pp 68 -

  

부자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도 거드름 피우는 태도가 왠지 거슬리면 그는 그림을 팔지 않았으며 자신을 낮춰 부르는 양반 서열의 사람들 앞에서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객기로 자신의 눈을 찔러 외눈이 된 최북 주변에는 그 어느 누구도 지긋이 붙어 있을 사람이 없었고, 세상을 뜨는 최후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절친한 사람들과의 교류가 뜸했으며 그나마 절친한 동료 화가였던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 홧김에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처럼.   최북의 최후 역시 정신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입원 생활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권총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운을 달리한 고흐의 비극적 최후와 유사하다.   열흘을 굶다가 그림을 한 점 팔아 빈 속에 흥건하게 대취한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성 귀퉁이에서 쓰러져 얼어 죽고 말았다.

    

 

  치(痴) : 벼루에 미친 바보, 정철조  

정철조(1730~1781)의 호는 석치()다. 석치란 ‘돌에 미친 바보’ 란 뜻이다. 여기서 돌은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벼루를 말한다. 그러니 벼루를 깎는 데 미친 바보다. 정철조는 벼루 깎는 것을 취미와 예술로 삼았다. 그의 별명에는 벼루 깎는 취미를 폄하하는 의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생전에는 말할 나위가 없고,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벼루를 잘 깎는 명사로서 그의 호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벼루는 글을 쓰는데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이다.  18세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멋진 벼루를 수집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그 유행의 선두주자는 단언 정철조였다. 수많은 문인과 선비들은 그가 만든 벼루를 소장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그의 솜씨는 예술적으로 인정받았다.   

정철조는 벼루를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도구라는 일반적인 용도의 인식을 넘어서 멋진 장식과 문양이 있는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는 벼루를 만드는데 돌의 재질을 따지지 않고 칼과 끌을 잡는 순간부터 순식간에 벼루로 완성시키는 재능을 가질 정도로 동시대의 문인들과 절친한 교우들은 그의 벼루 만드는 능력을 손꼽았다.  

하지만 정철조는 단순히 벼루 잘 깎는 선비로 불리기에는 그가 생전에 펼쳤던 활동들은 다재다능했다.   기계, 지도 제작에 조예가 있었고, 천문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해시계도 제작할 정도로 만능 지식인이었다.  

  

 

  오(傲) :  나는 나다!   

벽광나치오에서 '오(傲)' 에는 '거만하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천성이 사나웠고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대부가 그림에 대해서 무지하면 거리낌없이 독설을 날렸던 최북의 오만한 기질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책에 소개된 나머지 벽광나치오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특별히 당대 사람들 눈에 거슬릴 정도의 오만함을 떨지 않고도 재능을 널리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가졌음에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갈고 닦은 노력 역시 그들이 활동하게끔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벽광나치오들이 남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아무래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북은 호생관이라는 호를 스스로 붙임으로써 붓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긍지를 표현하였으며  시작(詩作) 활동으로 당대로부터 널리 이름을 떨치게 했던 사대부 집안의 노비(종) 출신의 시인 이단전은 자신의 신분을 호와 이름에 사용하였다.   그의 이름 단전(亶佃)은 ‘진실로 밭가는 놈'종놈, 소작농을 뜻한다.   자신의 호를 ' 필재(疋齋) ' 라고 삼았는데 필(疋)을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된다. 그는 스스로 진짜 종놈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은 것이다.   그리고 정철조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평생동안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집대성한 저서를 단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당대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의 신분적 위치도 모른 채 불손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태도로 비춰질 뿐이었다.

하지만 당대로부터 벽광나치오라고 불리던 인물들은 자신의 재능을 겸손히 여길 줄 아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으며 부끄럽고 천하게 여기기는커녕 떳떳하게 자신의 재능을 어필 할 줄 알았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에는 신분이 미천했던 벽광나치오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 자기PR ' 과 유사한 자신만의 홍보 방식인 것이다. 

   

 

  벽광나치오가 아니라, 벽광 '근'(勤) 치오!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조선의 '폐인' 들은 공통적으로 세속과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신분사회임을 감안하면 벽광나치오들은 한 가지 우물에만 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알아주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묵묵히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오랜 노력 끝에 신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둑의 명인 정운창과 시인 이단전 그리고 벼루 깎는 것이 좋아서 그저 오랜 세월동안 벼루를 깎다보니 예술작품에 비견될만한 벼루를 제작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정철조까지, 벽광나치오들은 남들 모르게 부단히 노력하였다.  

사납고 술주정뱅이 최북 역시 가만히 집 안에 앉아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최북의 화풍 스타일은 초기 남종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인 진경산수화로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시점이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다니게 되면서 비롯된다.  최북은 당시 조선 화풍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벽광나치오, 그들이 찾으려고 했던 것


이 책에 소개된 11인의 벽광나치오들 중에 최북과 이단전과 같은 재주 있는 자를 세상은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던 경계인의 생은 끝내 불행했다. 이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비켜가기 어려웠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열정이 인정받기에는 당시의 사회 관념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둑기사 정운창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평양의 또 다른 바둑의 명인 김종귀와의 대국을 위해서 직접 평양까지 찾아가 청을 하였지만 상대로부터 묵살을 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가 내뱉은 탄식은 재능이 있음에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벽광나치오들의 불운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재능을 지닌 선비가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얼추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바둑이라는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기분을 맛보자는 것뿐이다. 허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모양이니 어찌 기구하지 않은가? ” (같은 책, pp 269)  
   

  

정운창의 탄식에는 단순히 바둑 대결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소개된 11명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역사의 시간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수많은 이름 모를 벽광나치오들의 고뇌도 느껴진다.  

결국 그들이 그들이 미친 사람 소리 들어가면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전문가로서의 인정이 아닌 좋아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이었다. 그들에게 ‘즐거움’ 이란 최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동시에 사회와의 불화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용기와 집념을 지닌 조선시대의 전문가들은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 일에 즐기면서 몰두함으로써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자독식의 사회, 거짓과 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운명처럼 정해진 틀을 박차고 나갔던 그들의 열정과 중심 세력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섰던 벽광나치오의 패기와 열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2011-07-2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소개를 보니까 생각나는 책이 있는데요,
허경진교수가 쓴 <악인열전樂人列傳>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악기, 노래, 가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기이한 예술인들의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 놓았어요. 같이 읽어보셔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cyrus 2011-07-26 16:39   좋아요 0 | URL
허경진 교수라면 예전에 <홍길동전> 읽을 때 그 분이 쓰신
<허균 평전>을 조금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 분이 그런 책을 쓰셨군요.
작년에 나온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이라고 안대회 교수가 쓰신 책이
<벽광나치오>랑 비슷해요, 역시 역사의 기록 속에 사라진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굿바이님이 추천하신 책 읽어봐야겠습니다. ^^
 

 

 

 

 

 

 

 

 

 

  

  햄릿을 다시 만나다      

이번 달만해도 <햄릿>을 4번 읽었다. 독서모임 때문에 펭귄클래식판 2번, 이미 소장하고 있었던 민음사판 2번씩 읽었다.     

이렇게 열심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어제 독서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2주 연속 불참이다.  어제 모임이 1기 독서모임 마지막이었는데,,,  어제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지금도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온갖 사정으로 인한 잦은 불참에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셨던 같은 독서모임 조원분들께 죄송스럽다.   

햄릿이 '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로 고민했다면 나는 며칠 전부터 모임에 참석할까 말까 고민했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한 교통 경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손에 쥐고 있던 용돈을 아껴썼지만 서울을 왕래하는데 비용이 조금은 부족했다.  목요일에 헌책방에서 만 원을 썼던게 화근이었다.  서울을 왕래하는 기차를 탑승할 때 드는 비용은 그렇다치더라도 12시가 넘는 심야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드는 택시 비용은 무시할 수 없다.   기본 요금 2200원에 심야 할증까지 붙게 되면 5천원 정도 잡아야한다.   결국 택시비가 발목을 잡았다.  역시 돈이 없으면 뭐든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각설하고 다시 <햄릿>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은 언제나 다시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새롭다.  특히 복수를 하자니 겁도 나고, 부조리를 알게 되면서 분노하는 한편으로는 생의 무의미함에 시달리기도 하는 햄릿이라는 사내의 내면 묘사는 흥미진진하다.  

햄릿은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도 이름만 대면 다 알고 있는 괴테가 창조해낸 베르테르와 더불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문학작품 속 주인공이다.  비록 햄릿은 우유부단한 사람, 베르테르는 자살 모방자의 대명사로서 조금은 불명예스러운 의미로 왜곡된 채 대중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흠이지만.     

  

 

  작년에 썼던 리뷰 속 오류 지적

<햄릿>을 다시 읽다보니 작년에 작성한 리뷰도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항상 느끼지만 예전에 썼던 리뷰를 읽게 되면 부끄럽고 민망하다.  꼭 앨범 사진첩에 보관된 벌거벗은 채 찍은 신생아 시절의 모습이 담긴 나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하고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지만 대부분 다시 읽어보면 헛점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민망한 내용이 많다.  

작년 여름 이맘때 쯤에 민음사판을 읽고 리뷰를 썼는데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햄릿과 그의 어머니 거트루트의 성격에 대한 주관적인 분석와 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잘못 소개된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햄릿 이외에도 그의 어머니인 거르루트에도 흥미로운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
거트루트는 자신의 재혼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아들 햄릿에게
‘곱고 애정어린 말’ (제1막 제2장 121행)을 언급하면서
과거에 선왕이 살아있을 때처럼 지내길 바라면서 햄릿을 설득한다.

  

최종철 연세대 교수가 번역한 민음사판 <햄릿>의 제1막 2장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햄릿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삼촌과 그와 결혼한 햄릿의 어머니 거르루트는 과거처럼 함께 살기를 설득하는 장면이 있다.   작년에 쓴 리뷰에서는 1막 2장 121행인 ' 곱고 애정어린 말 ' 을 햄릿을 가리키는 거트루트의 대사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최근에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121행의 대사는 거트루트가 아니라 삼촌인 왕의 대사 였던 것이다. 그리고 ' 곱고 애정어린 말 ' 이 아니라 ' 곱고 애정어린 답 ' 이었다.  거트루트의 성격에 대한 감상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다보니 내용상 착오가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거트루트가 자신의 재혼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들을 설득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대사 속에서 ' 곱고 애정어린 말 '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가 쓴 글을 글을 쓴 당사자 본인이 직접 지적하는 꼴이 우습지만 나뿐만 아니라 이름 모르는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서 새로 작성하게 된 페이퍼에서나마 리뷰 속 내용의 오류를 언급하게 되었다.  만약에 독서모임을 위해서 <햄릿>을 읽지 않았더라면 잘못된 실수를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햄릿은 진짜 미쳐버렸는가?    

 

 

 

 

  

  

  

 

 

<햄릿>은 세계문학사에서 창조된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심리적 반응과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지금도 셰익스피어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햄릿의 심리나 성격을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하고 있다.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에는 햄릿과 관련된 도서를 다루고 있는 페이퍼가 있다. 페이퍼 내용에 의하면 일본의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가와이 쇼이치로<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시그마북스, 2009)라는 책에서 햄릿을 헤라클레스 신화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쇼이치로는 이 책에서 햄릿이 삼촌의 범죄를 알게 된 이후부터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어했으나 자신의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헤라클레스로서의 변신을 포기하고 세상의 섭리대로 '인간' 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햄릿>을 읽게 되면 선왕을 위한 복수의 광기에 사로잡힌 덴마크 왕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삼촌의 음모로 인한 선왕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삼촌과 재혼하게 됨으로써 형성하게 된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에 맞물리면서 자신의 절친한 벗인 호레이쇼 이외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며 평소에 사랑했던 오필리아에게도 냉정하게 대한다.  이런 반감의 골이 깊어가면 갈수록 햄릿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냉소적이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햄릿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지켜보는 클로니어스와 왕비 거트루트 그리고 오필리아의 아버지인 재상 폴로니어스는 햄릿이 오필리아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미쳐버렸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햄릿은 자신에게 닥쳐온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미쳐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삼촌의 복수를 위해 '미친 척' 한 것뿐이다.   

1막 5장에서 햄릿은 수소문 끝에 드디어 선왕의 유령을 목격한다. 그리고 선왕의 유령을 통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삼촌의 음모도 알게 된다.  햄릿은 자신의 절친한 충신인 호레이쇼에게 선왕과의 만남을 비밀로 유지할 것을 당부하게 되는데 여기서 햄릿이 선왕의 복수를 위해서 이미 미친 척하기로 염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을 손님으로 환영해 주게나.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학문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있다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아까처럼, 결코 발설하지 말게.  그럼 하느님이 자비를 내릴 걸세.  내가 아무리 이상야릇하게 행동해도 - 혹시 내가 이제부터 필요에 따라 어릿광대 짓을 할지도 모르거든.  

 - 셰익스피어 <햄릿> 제1막 5장 중 햄릿의 대사, 펭귄클래식코리아, pp 132 -   

 

이 대사 이후로 다음 막에서 햄릿이 본격적으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조울증에 가까운 증세에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햄릿의 행동에 대해서 호레이쇼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클로디어스, 거트루트, 폴로니어스, 오필리아 등)은 왕자가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햄릿의 '어릿광대 짓' 에 속아넘어간 클로디어스는 그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삼아 햄릿를 제거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파견 일원으로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햄릿은 이미 삼촌의 계략를 이미 알아차린 터.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려는 클로디어스의 조치는 복수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던 햄릿의 심장에 도리어 기름질을 부은 셈이 되었다.  

  

 

  불안에 시달린 햄릿 

햄릿이 충동적인 모습에다가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나머지 생긴 심리적인 갈등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위험한 곳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우리도 불안감에 시달린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 현실적 불안, 신경증적 불안, 도덕적 불안 ’ 으로 분류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현실적 불안은 자신을 위협하게 만드는 상황 속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면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친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게 된 클로디어스의 계략을 선왕의 유령으로부터 알게 된 햄릿은 자신도 언젠가는 삼촌의 손에 죽을 것이라는 현실적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머지 두 가지 불안은 앞에서 언급했던 현실적 불안에서 파생된 것이다.  신경증적 불안은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을 때 올 수 있는 위험을 그러한 행동을 하기 전에 미리 경험하는 불안이다.  

햄릿이 왕비 거트루트와의 대화 도중에 휘장 뒤에 숨어있는 폴로니어스를 삼촌인줄 알고 충동적인 성격을 억누르지 못한 채 죽이게 되는데 그가 찌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였다. (제3막 2장)     

결국 폴로니어스의 살해는 오필리아는 미쳐버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만다.  햄릿은 자신의 행동이 오필리아를 미쳐버리게 될 줄은 예상은 못했더라도 자신이 삼촌을 죽이게 도면 괜히 죄 없는 어머니까지 미쳐버릴지 않을지 자신의 복수로 인해 마주하게 될 또 다른 파국국을 위시하여 신경증적 불안감을 한 번쯤은 가질 법하다.  이로 인해서 햄릿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또 한번 혼자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매사가 나를 고발하며 내 무딘 복수심을 채찍질하는구나!  (중략) 

생각이란 걸 사등분하면 그중 하나만 지혜롭고 나머지 셋은 비겁함에 불과해.  난 왜 ' 이 일을 해야 한다. ' 고 뇌까리고만 있는 거지?  그럴 만한 명분, 의지, 힘, 수단을 다 갖췄으면서도 말이야,  

 - 같은 책, 제4막 4장 중 햄릿의 대사, pp 236 -  
 

 

도덕적 불안은 자신의 욕구나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 자신의 도덕 기준에 맞지 않을 때 경험하는 불안이다.  쉽게 말하면, 양심이라는 도덕 기준에 의해 생기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불안이다.
햄릿은 스스로 부정하고 있지만 삼촌 클로디어스가 어머니와의 결혼이 성립됨으로써 법적으로는 자신의 아버지이며 덴마크의 국왕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면 패륜아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고 주위의 신하들의 반응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햄릿은 삼촌을 증오하고 죽이고 싶지만 그와 결혼한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복수가 초래하게 될 결과에 대한 도덕적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불안은 어떤 종류이든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으며 불안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현실을 파악하는 자아의 기능이 무너질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억제하려고 한다.  햄릿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은 햄릿의 자아 기능을 조금씩 갉아먹게 되며 그가 꾸민 선왕을 위한 복수는 햄릿이 고민하면 할수록 지체된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햄릿은 판단력이 저하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되고자 했던 '인간' 햄릿

불안의 개념을 통해서 본 햄릿의 심리적인 반응에 대한 설명은 사실 작년에 쓴 리뷰에 이미 기록했던 내용이다.    예전에 쓴 리뷰를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감상을 덧붙여 다시 한 번 페이퍼로 정리해봤다.    

가와이 쇼이치로의 분석대로라면 햄릿은 선왕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해서 클로디어스에게 복수를 함으로써 덴마크의 위대한 왕 아니 헤라클레스가 되고 싶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되기에는 햄릿은 야망은 품고 있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부족했다.  하지만 의지가 부족한 햄릿을 어리석고 나약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 하느님,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도 스스로 무한한 우주의 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어. 다만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 같은 책, 제2막 2장 중 햄릿의 대사, pp 155 -

 

햄릿의 저 대사처럼 예상치 못한 비극을 낳게 된 복잡한 상황이 악몽처럼 닥쳐오지 않았다면 햄릿의 복수는 조금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피하고자 했던 악몽은 왕비가 보는 앞에서 폴로니어스를 살해함으로써 끝내 이루어지고 말았다.  폴로니어스가 살해되지 않았더라면 햄릿은 주위 사람들부터 더 이상 미친 척 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연인 오필리아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폴로니아스와 오필리아의 죽음으로 인해 레어티스마저 자신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이렇듯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수록 햄릿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정신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절친한 충신 호레이쇼가 곁에 있다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표현한대로 햄릿에게는 덴마크, 즉 세상은 외부와 단절된 '감옥' 이었다.    

어쩌면 '감옥' 같은 세상이 덴마크의 '외톨이' 왕자 햄릿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불안감에 집착한 나머지 헤라클레스가 되고자 했던 햄릿은 삶에 대한 허무주의로 가득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야망을 힘껏 펼치지 못한 채 햄릿은 그렇게 덴마크라는 감옥 안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7-2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년 전쯤에 박근형이란 연극계에선 알아주는 연출가의
햄릿을 본적이 있어요. 무대를 최대한 간소화해서,
관객들이 배우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어려운 부분은 과감하게 뺏다고 합니다. 근데 뭘 뺐는지 잘 모르겠더만요.
뭐 그만큼 집중도를 높였다는 뜻이겠죠.
나름 몰입도도 좋았고, 인상 깊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365일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언제, 어디선가 계속
공연되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해요.
그 할배는 천국에서도 아, 이 놈의 인기...!하며 행복한 한숨을 쉴 것 같습니다.ㅋㅋ

cyrus 2011-07-25 17:00   좋아요 0 | URL
햄릿을 연극으로도 보고 싶어요,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작픔 중에서
가장 많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이 햄릿과 로미오 & 줄리엣일거 같아요.^^

sslmo 2011-07-2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드 레벤펠드가 쓴 '살인의 해석'이 맞나?
그 책을 보면 햄릿의 명대사를 프로이트와 융의 입장해서 해석한 게 나왔었어요.
New Trolls도 생각나고 말이죠~^^

cyrus 2011-07-25 17:02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때 그 책 나왔을 때 한 번 읽어봤는데 분량이 두껍고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도중에 읽다 포기했어요.
나무꾼님 말씀 듣고보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New Trolls를 몰라서 방금 검색해보니, 가수였군요 ^^;;

2011-07-25 0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