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버지는 선동열을 싫어했는가?      

 

 

선수 시절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前 삼성 라이온즈 감독 선동열 

 

지금으로부터 거의 6년 전, 한국야구의 챔피언을 결정짓는 2005년 한국 시리즈 때였다. 그 당시 한국시리즈는 시즌 패넌트레이스 1위 팀이였던 삼성 라이온즈와 시즌 2위였던 두산 베어스와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 지키는 야구 ' 라고 불릴 정도로 든든한 불펜진을 자랑했던 선동열 감독의 삼성과 반대로 막강한 화력을 뿜어내는 타력을 갖춘 김경문 감독의 두산 간의 한국시리즈전은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였다.  2002년 구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로는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한 삼성으로서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갈망이 높았으며 두산 역시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기에 두 팀 간의 한국시리즈 대결은 성사되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왔다.   

시즌 1, 2위 팀간의 대결이라 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시리즈 예상 우승팀에 대해서 근소한 차이로 엇갈려져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2005년에 갓 부임한 '초보' 선동열 감독의 삼성보다는 오랜 코치 경험에다가 선 감독보다는 2년 선배인 김경문 감독의 두산이 우승할 것으로 조심스레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 진정한 한국야구 챔피언을 결정짓는 한국시리즈답게 치열한 공방전을 예상했지만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4차전 모두 삼성이 4전 전승을 거두게 되면서 3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시리즈는 7전 4선승제로 진행된다)    

선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패넌트레이스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두 가지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야구감독이 되었으며 2010년까지 삼성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이듬해인 2006년에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2관왕을 이루었으며 2010년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두면서 감독으로서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삼성 라이온즈라고 하면 현재 최고의 마무리 투수 오승환 그리고 배영수, 차우찬, 안지만 등과 같은 선발과 중간 계투를 책임질 수 있는 막강한 불펜진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투수 출신이었던 선 감독 시절에서 재능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 감독 시절의 삼성을 '지키는 야구' 의 대명사가 되었다.    올해 선 감독의 지휘봉을 이어받은 류중일 감독의 삼성은 이전 선 감독 시절의 경기 운영과는 다른 화끈한 공격야구를 선보이면서 이전의 '지키는 야구'로서의 색깔을 희석했다지만 여전히 '선동열이 남긴 유산' 인 불펜진의 위력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현재 시즌 1위를 달릴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해태 타이거즈 소속 시절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지금도 선 감독이 부임했던 2005년, 2006년의 삼성의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삼성과는 다르게 투수 위주로 운영한 '지키는 야구' 라서 경기 운영면에서는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의 인연과는 거리가 멀었던 삼성을 2년 연속 우승시킨 점은 삼성 팬인 나로써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해에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좋지도 않았고, 절대로 좋아해서는 안 될 기억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서 TV로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보게 되면 아버지와 함께 보는 날도 있었다. 아버지 역시 야구 경기, 특히 경북 출신에다가 오랫동안 대구에서 자란 토박이다보니 삼성 라이온즈 팬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야구 경기를 보면 항상 불편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경기에 지고 있어서 아버지가 육두문자를 날리면서 짜증내는 점이 불편했던 것이 아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팀이 지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짜증과 욕이 나오는건 당연하니까.

이상하게도 브라운관에 덕아웃에 앉아 있는 선 감독의 얼굴이 나오게 되면 아버지는 비하하는 듯한 말로 이애할 수 없는 불만을 표출하곤 했다.  심지어 삼성이 경기에 크게 이겼어도, 2006년에 한화 이글스 간의 한국시리즈에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어도 아버지는 선 감독에 대해서 호의적인 말씀을 하지 않았다.  

 

  " 저 XX는 참,,. 전라도 출신 주제에 별 것도 아닌 놈이 잘 나가네 "  

 

세상 물정 몰랐고 그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시에 매달렸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불만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평소에 아버지가 야구 팬으로서 선 감독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왜 선동열을 싫어했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선동열은 삼성 라이온즈 소속 감독이 아니라 그저 전라도 광주 출신 감독이었다.  

 

 

  기아 타어거즈 = 홍어 = 전라도 = 빨갱이?  

 

  

광주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기아 타이거즈 

(전신은 해태 타이거즈)

  

요즘에는 TV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야구 중계를 볼 수 있는 참으로 편리한 시대이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야구 중계를 볼 수 있으니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과 피 튀기는(?) 리모컨 전쟁을 할 필요도 없으며 야외에서도 생생한 야구 중계를 시청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야구 중계를 집에서 보게 되면 TV보다는 컴퓨터로 시청하는 편이다. 컴퓨터로 중계되는 야구 경기는 이름만 되면 알만한 유명한 모 검색 포털 사이트가 지원하고 있는데 화면으로는 TV에 비해 떨어지지만 컴퓨터 야구 중계 보는 또 다른 재미는 야구 경기를 보면서 실시간에 달려져 있는 댓글을 보는 것이다.     

 

 

모 포털 사이트에서 지원하고 있는 야구 중계 동영상 

동영상 아래에 댓글창이 있는데 이용자는 경기 동영상을 보는 동시에  

댓글을 달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 팀의 경기를 보면서 열심히 경기에 임하는 그라운드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댓글로 표현하다면 참 좋겠지만 익명성을 이용해 악의적인 내용을 서슴치 않는 우리나라 댓글 문화를 생각하면 그저 현실상으로 불가능한 좋은 생각일뿐이다.    

실제로 야구 경기장에 가게 되면 양 팀을 응원하는 팬들을 구별할 수 있게 좌석이 배치되어 있듯이 온라인 야구 중계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할 수 있게 댓글창도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예를 들면 삼성과 기아와의 경기를 중계하는 동영상 아래에 '삼성 라이온즈 댓글 창''기아 타이거즈 댓글 창' 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경기 동영상을 보고 있는 네티즌이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댓글창에 줄줄이 달리는 댓글 중에는 정말 좋은 말을 하는 내용의 댓글을 찾기가 모래알에 진주 찾는 격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을 때 이에 대한 온갖 불만을 댓글로 표출하는 것은 애교일뿐이다.  대놓고 상대방 팀을 비방하는 수준을 넘어서 팀이 연고를 두고 있는 지역까지 비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 8개 구단이 치르는 경기들마다 지역감정을 담아 상대 팀을 비방하기도 하지만 특히 삼성 라이온즈와 기아 타이거즈 간의 경기는 양 팀 팬들간의 총성 없는 댓글 전쟁 역시 치열하기만 하다. 

기아 타이거즈는 광주광역시에 연고를 두고 있으며 해태 타이거즈 시절 야구 구단 중 최다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명문 구단이다.  그리고 구단 엠블렘과 선수들의 유니폼이 빨간색이다.    다른 야구 팀 팬들은 항상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를 치뤄지게 되는 날이면 온통 기아 타이거즈를 비난하는 악의적인 댓글로 도배를 한다.  야구 팬들은 각 팀마다 그 구단의 전형적인 특징을 꼬투리 잡아 비하성이 담긴 별명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는데 기아 타이거즈 같은 경우에는 전라도에 위치하는 광주에 연고를 하는데다 구단 엠블렘과 유니폼이 빨간 색이라서 '홍어' 라고 부른다.   

그래서 야구 팬들 사이에서 '홍어' 또는 '홍어 타이거즈' 라고 하면 속칭 기아 타이거즈를 가리키는 통칭되는 용어였다.

  

 " 홍어 XX들, 니들은 안 돼. " , " 전라도 홍어는 그냥 나가 X져라. "    

 

하지만 이제는 야구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홍어' 는 단순히 기아 타이거즈를 뜻하는 비하성이 담긴 별명이 아니라 이제는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광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 즉,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악의적인 별명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야구 중계에 댓글을 다려는 사람들 중에는 순전히 야구 중계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상대 팀에 연고를 두고 있는 특정 지역을 비하하기 위해서 지역감정을 이용해 갈등을 조장하려는 악플러가 존재하고 있다.  

"전라도 홍어들 중에서 사기꾼 아닌 사람들 없고 깡패 아닌 사람들 없다" ,  "여수, 순천 반란사건, 5ㆍ18 광주 폭동도 이제 보니 전부 전라도 홍어 XX들이 일으켰지. 전라도 홍어 ×××들. 폭도의 후손들이 이젠 야구로 별 짓을 다 하는구나 " 라는 원색적인 댓글까지 나오게 된다.  

이렇듯, 야구 중계까지에도 전라도를 비하하는 악플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비단 '홍어' 뿐만이 아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이 조금이라도 기아 선수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홍어존’ 논란이 나온다. 일부는 전라도 출신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슨상존’ 이라는 표현을 대신 쓰기도 한다.   그리고  전라도의 [전라ㄷ]+ 사람을 나타내는 영어 접미사 [ian]을 합성해서 '전라디언' 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전라디언' 이라고 하면 곧 친북 좌파 또는 빨갱이를 뜻하게 되어 그 의미가 한층 더 다양해진다(?)  



 
 

   영호남 지역갈등이 만들어낸 최악의 난동사건

 

  

1986년 당시 삼성 팬들로 인해 불 타버린 해태 타이거즈 전용버스  

사진 출처: 프레시안

 

악플러의 지역감정적인 악플의 수준은 단지 인터넷의 발달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적 병리 현상이 아니다.  그 현상의 근원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지역갈등이 있었다.  

기아 타이거즈 vs 삼성 라이온스, 즉 호남과 영남 간의 지역감정이 담긴 갈등이 만들어낸 깊은 악연은 프로야구 최악의 난동사건으로 기록된 한국시리즈의 조금은 부끄러운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 대구 폭동 ' 으로 불리는 사건은 1986년 10월 22일,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발생했다.  직접적인 이유는 홈팀인 삼성이 해태에 5-6으로 역전패를 한 것에 대해. 몇몇 관중들이 경기장 밖에 주차해둔 해태 구단 전용버스에 불을 지른 보복성 사건이었다.   그 날 경기 결과에 대한 분풀이도 원인이지만  방화사건의 시발점으로 한국시리즈 1차전 광주에서 열린 경기에서 삼성 투수 진동한의 부상에서 비롯되었다.  

1차전 경기에서 삼성의 진동한 투수는 7회말까지 호투를 했지만 8회초 덕아웃에서 쉬고 있는 도중에 윗편 관중석에서 술 취한 관중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아 경상을 당하게 되었다.  한창 경기가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라 삼성 팀 입장에서는 최상의 호투를 보이고 있는 투수의 어이없는 부상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8회말에 투수를 김시진(현 넥센 히어로즈 감독)으로 교체했지만 연장전 끝에 3-4로 역전패하고 만다. 

야구계에서는 한국시리즈 1차전에 먼저 우승하는 팀이 한국시리즈에 우승한다는 일종의 속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양팀뿐만 아니라 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게는 한국시리즈 1차전 경기 결과에 촉각을 곤두 설 수 밖에 없었다.   삼성과 해태는 단순히 라이벌 구단 관계 이상이 아닌 영호남 지역주의가 만들어낸 앙숙의 관계로 변질되었다.    

문자 그대로 불붙은 지역감정 때문에 다음 경기를 대구가 아닌 중립지역 서울에서 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대구에서 경기를 강행했지만 예상했던대로 추가 사고가 이어졌다.  4차전마저 삼성이 패하자 홈 팬들은 병을 경기장에 투척했고, 1차전에서 나온 해태 팬의 '빈병 투척 사건' 까지 다시 언급되면서 관중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관중의 난동이 얼마나 심했으면 경기장 주변으로 2000명 가량의 경찰들이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최루탄까지 발사했다고 한다.     

 

 

  지역감정으로 점칠된 스포츠의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 

 

 

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이면서 스페인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로  

활약하고 있는 카시야스 (왼쪽에 월드컵 트로피를 들고 있는 미남)와  

FC 바르셀로나 소속 수비수 푸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견원지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최대 라이벌 관계이다.

사진출처: 스포탈코리아

  

지역차별주의로 인해 형성된 스포츠에서의 라이벌 관계는 우리나라의 삼성과 해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한국의 프로야구와 유사하게 각각 일본 간토와 간사이의 대표 구단으로 자리잡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 간의 라이벌이 유명하며 미국 메이저리그로 넘어가면 각각 뉴욕과 보스턴에 프랜차이즈를 둔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경쟁도 유명하다.   

 

    

   

  

 

 

 

 

 

야구뿐만 아니라 축구계에서도 최고의 라이벌이 존재한다.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나 원작의 동명영화를 보신 분들도 아시겠지만 남녀 주인공 노덕훈(김주혁 분)과 주인아(손예진 분)가 심야 시간에 맥주를 마시면서 함께 축구 경기를 보게 되는데 그 경기가 바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최대의 라이벌 구단 간의 경기인 엘 클라시코(El Clásico)다.    

엘 클라시코는 우리 말로는 '고전의 승부' 라는 뜻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리그 1, 2위를 다투는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로셀로나 간의 축구 경기를 뜻하고 있다.   하지만 '고전의 승부' 답게 이 두 팀간의 대결은 109년이나 될 정도로 지금까지도 선수와 감독들뿐만 아니라 팀을 응원하는 팬들마저 치열한 신경전을 펼칠 정도로 정말로 유명한 축구계의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연고지이며 FC 바르셀로나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인 바르셀로나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이 투 팀간의 대결은 최근에 두 차례나 펼쳐진 두 팀 간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대회에서도 선수들와 코치 간에 난투극이 펼쳐질 정도로 라이벌 관계답게 치열한 경기 양상을 보였다. 엘 글라시코의 열기는 같은 스페인 출신 선수들끼리 지역 연고를 두고 있는 프로 축구 팀 때문에 대립을 펼쳐야하는 상황까지 연출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국가대표팀 주장 겸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슈퍼세이브' 골키퍼 카시야스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남아 있는 엘 클라시코의 갈등과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친목 도모를 위한 회식 자리를 마련한단다.   스페인은 작년에 펼쳐진 2010년 월드컵에 우승할 정도로 세계 최강을 자랑하였지만 최근에는 '무적 함대' 답지 않게 중요한 경기마다 패전을 거듭하고 있다.   카시야스는 다시 한 번 스페인의 명성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대표님 내부에 남아 있는 엘 클라시크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 아빠 + 해태 타이거즈 엄마 = '삼태' 라이거 소년  

사진 출처: 이데일리
 

 

엘 클라시코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역감정으로 점칠된 스포츠의 현실을 그저 구단을 응원하는 팬들만의 전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좀 과장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스포츠 팬들뿐만 아니라 멋진 경기 운영을 보여줘야할 선수들마저도 지역감정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스포츠 내에서도 운동선수들 또는 코치진 사이에서 학벌, 지연 위주에 따라 팀워크가 깨져버리는 사례가 많이 있었듯이 지역차별적 감정이 스포츠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과연 어디서부터, 누가 조장했는지 기원은 의심스럽지만 연고 구단에 대한 일방적 지지가 지역감정에서 비롯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지역감정이 없었다면 야구 팬들 사이에 영원히 회자되는 흥미진진한 라이벌 구도 역시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팀 자체가 아니라 특정 지역과 특정 지역 사람을 비난할 정도로 팬들의 비방이 날로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악플러의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위험할 정도다. 굳이 한국의 현대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들은 구분해야 한다. 상대에게 분노와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말과 글은 자제해야 한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는 정치·사회적 긴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지역감정’ 을 만들어냈다. 호남 고립의 지역감정, 지역구도가 그렇게 탄생했다. 굳이 지역감정의 역사적 기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스포츠 종목에서 나타나는 지역감정의 양상은 분명 퇴행적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는 기본적이면서도 유일한 방법은 상식이 있는 팬들이 앞장서서 일침을 가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 뿐이다.  

올해 한국시리즈가 열리기까지 두 달 정도 남았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한국시리즈에 상대할 팀은 SK 와이번스(현재 리그 2위)와 롯데 자이언츠(리그 4위) 그리고 기아 타이거즈(리그 3위)다.   어느 팀을 만나든 간에 야구 경기를 지역감정과 차별로 만들어낸 색안경을 벗은 채 그저 스포츠를 진정 즐기는 마음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 ' 1986년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사건'  관련 출처 기사  

[그들은 왜 무등구장에서 '김대중'을 외쳤는가] 프레시안 2009년 8월 26일 

호남차별과 야구 종목과의 관계는 고교야구 탄생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글이 길어질 우려가 있어서 그 부분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링크된 기사문을 읽어보시면 좋을듯합니다.   

 

* P.S : 참고로 저는 홍어삼합을 좋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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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5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한 문장에서 뿜었네요...ㅋㅋㅋㅋ ㅎㅎㅎㅎ

야구에 별 관심이 없어 서로의 비방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버스 사건은 첨보는 것입니다만..

cyrus 2011-08-25 20:55   좋아요 0 | URL
이 버스 사건이 지금도 삼성과 기아 경기 때 간혹 기아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악플러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한답니다.

stella.K 2011-08-2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러 조장하는 것도 있을 것도 있겠죠.
그 흥분을 이용해서 팀의 결속, 나아가선 지역의 결속까지.
근데 버스까지 그렇게 된 건 또 참 보내요.
글구 홍어가 무슨 죄라구.

근데 시루스님 삼합 좋아하시는 거 보니까 술 좀 꽤 하시는 편 아닙니까?ㅋ
삼합엔 막걸리라든데.
맛에 호기심이 많은 제가 아직 그걸 못 먹어 봤어요.
글구 거 뭐더라, 말린 꽁치 김에 싸 먹는 거...?
둘 다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피했다능. 아, 아쉬워.ㅠ

cyrus 2011-08-26 22: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신에게 이로울게 없는데 왜 자꾸 사회 내에 불신을
만들게 할까요? ^^;;

저는 딱 한 번 홍어삼합을 먹어봤는데 전라도산이 아니라
시장 안 식당에서 파는 걸 먹어봤어요. 그 때는 홍어가 어떤 맛인지
정말로 궁금해서 처음 먹어봤는데, 먹을만했어요.
냄새 때문에 홍어를 잘 못 먹는 사람이 많다던데 제가 진짜배기
전라도산을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냄새는 참을만했습니다. ^^;;

그리고 혹시 김 싸먹는 꽁치라면 과메기입니다.
과메기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

맥거핀 2011-08-25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전문용어(?)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cyrus님도 꽤나 야구 열심히 보시는 듯 하네요.^^ 야구 관련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면, 참 별 지역비하가 난무하지요. 말씀하신 용어들 외에, 거의 모든 팀을 비하하는 용어들이 있구요. 근데 유독 기아에만 심한 것 같다는 느낌도 좀 있긴해요. 기아를 비하하는 말에는 유독 어떤 지역적(?)인 것이 따라붙는 것도 그렇구요. 아마도 오랜 지역차별과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요..한때 우리나라 지역차별이 많이 옅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요즘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그냥 옛날 기억이 좀 나네요. 지금은 LG팬(-_-)이지만, 어렸을 때는 부모님 따라 해태가 잠실에 오면 자주 보러갔거든요. 부모님이 모두 전라도 분이시라서요.그 때 해태는 참 무적이었는데..열렬한 응원 때문에 더 잘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때 3루측에서 응원들이 꽤 살벌(?)했었거든요.
에고 지금도 살벌한 응원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LG는 이모냥이네요. 하하, 삼성팬이신듯 한데, 삼성 우승 기원합니다. (요즘 보면 삼성이 우승권에 가장 근접한 듯^^)

cyrus 2011-08-26 22:11   좋아요 0 | URL
ㅎㅎ 방금 컴퓨터로 야구 경기 보고 왔어요, 패색이 짙은 경기였는데
다행히도 역전승하게 되었네요 ^^;;

다른 구단도 비하성 별명이 많은데요,, 맥거핀님 말대로 기아가 유독
심하답니다. 심지어 다른 야구 팀을 응원하는 네티즌까지도
기아 경기가 있는 동영상 공간에 기아를 비하하는 악성 댓글을
남기기도 하거든요.

맥거핀님은 LG팬이시군요, 내심 LG도 정말 오랜만에 가을야구할 줄
알았는데, 비록 삼성팬이지만 안타깝습니다. 선수들 중에는 삭발까지
하면서 열심히 경기에 임하던데요. 지금 한화랑 연장중인데
이번 경기는 LG가 승리했으면 좋겠어요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렸을 적이 프로야구 폭발적 부흥 시기였죠. 초, 중학교때요. 전 서울 출신인데 삼성 팬이었어요. 이만수 때문에 그랬었던 것 같아요ㅎㅎㅎ 그땐 아이부터 어른까지 야구 열풍이었죠. 저도 관심이 없었는데도 야구 규칙을 그때 다 배웠다니까요.
어쨌든, 우리 나라에서는 야구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결국 지역 감정싸움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예요. 경상도와 전라도가 없었다해도, 뭘 기준으로든 편을 나누어 싸웠을것 같아요. 그게 인간 세상 아니겠어요? ㅎㅎ

cyrus 2011-08-26 22:17   좋아요 0 | URL
저는 너무 어렸을 때라 초창기 프로야구에 대해서 기억은 없지만
이만수는 정말 레전드죠. 특히 지금도 대구 사람들은 이만수를
각별한 존재로 여기기도 하고요.


2011-08-26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6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우리 신랑의 모습 가관이라죠... ㅋㅋ
오면서 내내 DMB로 보고, 와서 TV에서 꼭 야구 정리 프로 보고.
주말에는 TV를 독차지할 수 있으면 하루종일 야구 보고, 안되면 컴터로 보고.

아주 못 말려요..
하지만 무엇인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모습 자체도 좋은거 같아서 냅두는 중입니다. ㅋㅋ

cyrus 2011-08-26 22:23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팬더님이 저랑 비슷해요 ^^;;
야구 경기 다 보고 나면 야구 정리 프로그램 꼭 봐야해요.
팬더님은 무슨 스포츠채널을 보시는지 모르겠는데 참고로 저는
KBS 아이러브 베이스볼을 보는 편입니다.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예쁘거든요,, ^^;;

예전에 저희 어머니도 저의 야구 사랑(?)에 대해서 핀잔 많이
하셨는데 지금은 제가 컴퓨터로 야구를 시청해서 신경을 안 쓰신답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7 10:31   좋아요 0 | URL
팬더가요, 자신은 3사의 채널을 홀랑 돌리며
몽땅 섭렵하고 있다고 전해달래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cyrus 2011-08-27 13:3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그게 가능한가요? 3사 채널을 담당하는
아나운서들이 모두 미모가 출중해 고정팬이 많답니다. 그래서
정말로 아나운서 보려고 동시에 3사 채널을 본다는 팬들도 있다고 하던데
실제로도 있었군요 ^^

saint236 2011-08-2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그렇군요. 홍아 삼합을 좋아하시는 군요.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플랭클린 포어/말글빛냄)"라는 책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스페인 이야기도 그렇고요. 스페인 전쟁사라는 책을 보면 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싸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됩니다.

전 술을 끊은 이유로 홍어 삼합을 먹지 않습니다. 막걸리 없이 홍어를 먹는 것은 꽤 힘든 일이더군요.

cyrus 2011-08-26 22:26   좋아요 0 | URL
맛있는 음식에는 술이 없으면 안 되는거 같습니다. ^^;;

세인트님이 언급하신 책, 한 번 읽어보고 싶어요. 스포츠 관련 역사라,,
읽는데 지루하지 않을거 같아요 ^^
 
어둠의 심연 을유세계문학전집 9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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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18] 어둠의 속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폐쇄적인 서구인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며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드는 제국주의적 태도를 이야기 하고자 할 때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자주 인용되는 소설 중의 하나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이기도 하는데 자랑할 수준은 아니지만 평생 독서를 하면서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작가를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원제는 Heart of darkness 인데 국내에서는 '암흑의 핵심' (민음사 판),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판 외 그 밖의 출판사) 등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을유문화사판을 읽기 전에 처음에는 '암흑의 핵심' 으로 소개된 민음사 판본을 읽었는데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작품을 읽는데 몰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아무래도 콘래드 특유의 본연의 의미를 드러나지 않게 암시적으로 풀어낸 문체가 나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을유문화사 판에 수록된 콘래드의 또 다른 단편 <진보의 전초 기지> 역시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읽어야했을 정도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화자인 말로가 템즈 강가에 정박한 어느 상선의 갑판 위에서 들려주는 체험담에 근거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 벨기에령 콩고의 어느 회사 소속 기선의 선장으로 취직한 말로가 우여곡절 끝에 콩고 강 상류의 오지로 가서 커츠라는 일급 교역상을 만나게 된다.   

커츠는 현지인들 위에 초법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다이아몬드 채취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교역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끊임없는 무장경계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신처럼 대접받으면서도 순간순간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 같은 분열적 상태 속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황폐해져만 갔고 이는 신체까지 좀먹었다. 커츠는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 끔찍하다, 끔찍해. ” (pp 151)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커츠로 대표되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은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였으며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은 “백인들의 의무” 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에 뛰어들었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서구 문명에서는 커츠의 입장은 그 당시로서는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수사였다. 커츠도 자기 딴에는 고귀한 사명감에 넘치는 인물이어서, ‘아프리카에서 무한한 선을 행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활동 계획서로 정리하여  ‘야만적 악습 억제 협회’ 에 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관습과 문화를 가진 인간들을 비인간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했던 왜곡된 환상의 결과는 자기파괴였다.

검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상징되어지는 ‘어둠의 심연’ 으로의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화자인 말로는 궁극적으로는 커츠의 아프리카 경험이 주는 인간적 가치의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말로의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 속에서 ‘어둠’  , '암흑' 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명감이 지닌 헛됨과 그러한 헛된 사명감의 정신적 기조를 이루는 정신적 황폐함을 상징화시키고 있다.  암흑의 대륙에 문명의 빛을 전달한다라는 사명감에 투철한 유럽인들의 우월주의적 시각이란 결국은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의 상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배와 원시적 암흑 대륙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관념’ 에 불과 하며,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과는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관점의 비평이 소개되면서 재해석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식민주의를 찬양하고 있다는 비평도 있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현재까지도 조지프 콘래드를 '제국주의자' 라는 평단의 오해가 존재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징적이면서도 갈팡질팡하는 문체로 인한 해석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길 법도 하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마다 이해의 방식이 확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콘래드가 서구의 식민주의를 막연히 '찬양'하는 수준은 아니다고 생각이 든다.   

서구의 이중성과 제국주의의 유령은 지금도 아프리카나 제3세계 국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 남반구에  깊고 큰 상처를 남겼으며 다국적기업의 횡포 탓에 만성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다국적기업은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 한 국가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가 씌워놓은 그 굴레를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던지지 못한 채 지금 아프리카와 제3세계의 현실은 너무 어둡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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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3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이군요...이거 매력적인 작품인데...전 예전에 원서로 읽다가(중간도 못 넘겼음)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번역본을 구해놓고는 아직도 완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리뷰를 보니, 8월이 가기전에 완독하고 싶네요..

cyrus 2011-08-25 19:42   좋아요 1 | URL
짧은 분량인데도 읽는데 힘들었어요, 저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도 '문명의 전초지'도 결국 주인공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납니다.제국주의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에 굉장히 비판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보고 싶습니다.저는 이 두 작품이 콘라드의 다른 작품보다는 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봅니다.

저는 '문명의 전초지'가 '암흑의 핵심'보다 읽기 쉽던데요.더 짧기도 하지만...마지막 시체 장면이 압권이죠.

cyrus 2011-08-25 19:43   좋아요 0 | URL
다음 작품으로 <로드 짐>을 읽어보려고 해요, 민음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왔는데,,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6 16:54   좋아요 0 | URL
로드 짐 읽기 전에 문명의 전초지를 한 번 더 읽으라고 권하고 싶네요.정독하면 할수록 맛이 나는 단편입니다.

'청춘'을 구할 수 있다면 읽어도 좋아요.로드 짐처럼 해양소설이면서 분량도 짧으니까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콘라드 평가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콘라드를 평가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4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옥의 묵시록은 정말 매니아가 많은 영화잖아요. 그런데 드디어
시루스님의 취향과 맞지 않는 작가를 만났다는 부분에서 그만 폭소를. ^^

저한테도 읽지 못 한 조셉 콘라드의 작품이 틀림없이 있는데, 어디있는지 찾지 못 하겠어요. 아하하......... 자기 서재의 책도 못 찾다니, 비극이예요, 증말.

cyrus 2011-08-25 19:44   좋아요 1 | URL
그 유명한 영화,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어요.
마고님 댁에 책이 얼마나 많길래 못 찾으시나요? 저도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

네오 2011-08-24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으면서 '아하~ 그렇구나'라며 나지막히 탄식했습니다. 조셉 콘라드는 제가 허빈 멜빌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영미소설가이지만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는 작가는 아니네요~ 그의 소설이 나오는대로 무작정 모아놓고 읽어보는 저로서는 ㅋㅋ <지옥의 묵시록>도 제가 전쟁영화라는 장르만을 한정짓고 놓고 봤을때 거의 베스트10에 껴들만한 작품인데 원래는 이 소설을 맨처음 영화화하고 싶었던 감독은 프란시스 f 코폴라가 아니라 <시민 케인>의 오손 웰즈라고 하더군요~ 이 두 감독이 황홀한 정도로 스타일리쉬했던 감독으로써 이 <암흑의 핵심>에 빠져들었던 감정이 어떤 마음이었을라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몸서리치게 만들던군요~ 아무튼 <암흑의 핵심>도 좋아하고 <지옥의 묵시록>도 좋아해요^^ 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나오는 그 장면만 수십번 본거 같네요~

cyrus 2011-08-25 19:45   좋아요 1 | URL
원래는 허먼 멜빌을 읽으려다가 어쩌하다 보니 콘래드의 소설을 집어
들었어요, 콘래드 역시 항해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죠.
정말 그 유명한 영화, 꼭 보고 싶네요. ^^

2011-08-2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복지 국가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2
정원오 지음 / 책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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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상급식 투표 결과' 에만 혈안이 된 복지 논쟁

대한민국 사회 최대의 쟁점인 무상급식에 대한 주민투표가 드디어 내일 실시된다.  투표 결과는 서울이라는 특정 지역이나 무상급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선별적 복지론과 전면적 복지론이 정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국가 복지정책의 향후 진로가 판가름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투표결과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시장직을 내건 모습이 보기에 민망하고 무모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투표율 33.3%의 벽을 넘을지 모든 국민은 투표 결과에 집중하고 있다. 이 투표율을 넘지 못하면 개표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보수 진영 시민단체 쪽에서는 투표참여 문자 메시지와 홍보문를 전송함으로써 어떻게든 무상급식 도입을 막으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무상급식이라는 복지정책 도입의 의미보다는 투표 결과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거 같다.   오 시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진영 쪽에서는 무상급식은 빨갱이들이 선동하는 경제 파탄으로 가는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진보 진영 측의 야당에서는 오 시장에 내건 주민투표는 무의미하고 위법적인 행위라고 반박하고 나서 국민들에게 참여할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수치로 결정되는 투표 결과에만 매달리는 복지 논쟁이 점점 가열되는 양상이다.    '무상급식' 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무상급식 투표 결과' 를 위한 싸움일까?  보수 세력은 어떻게든 투표율을 높이서라도 무상급식 도입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진보 세력은 그저 투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할 뿐 투표 결과에 따른 무상급식 도입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 마련에 대한 어떠한 자세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들의 입장 역시 천차만별이다.  오 시장의 눈물 쇼(?)에 코웃음치면서도 복지 정책 도입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몇 명이 있을까?   지방에 사는 주민들은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저 남의 나라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정당과 국민들은 정작 '복지' 라는 핵심적인 본연의 의미에 대해서는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례, 베버리지 보고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  윌리엄 베버리지 (1879~1963) 

 

영국은 이미 50여 년 전에 복지 정책 도입 논쟁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나라보다 이미 복지국가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그래서 1945년 전후에 벌어졌던 상황은 2011년 한국의 복지 논쟁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영국 정치지도자들은 국민 사기진작을 위해 종전 뒤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했고, 전시 연립내각인 처칠 행정부는 1941년 이를 위한 위원회들을 구성했다. 윌리엄 베버리지는 그러한 위원회 가운데 하나인 ‘사회보험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베버리지는 1년여의 활동을 거쳐 1942년 12월 보고서를 출판했고, 이 보고서는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그것이 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복지국가의 모토가 탄생된 '베버리지 보고서' 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부모 소득과 관계없이 아동이 성장할 수 있는 아동 수당, 누구나 자유롭게 치료를 받는 무료 의료시스템, 원하는 사람 누구나 일할 수 있게 하는 노동 정책을 제시하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실의에 빠진 영국 국민들은 복지정책 도입에 환영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정책에 도입할 재정적 여건을 충당하기에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노동당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기로 검토하였으나 반대로 보수당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며, 전후 복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복지 확대는 국가 백년대계에 어긋난나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의 폭발적 기대 속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세계대전이 종전됨에 따라 영국은 전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에 돌입하였다.  선거 최대 쟁점은 전후 발전 방향이 아니라 베버리지 보고서의 실현 문제였다.  즉, 사회적 복지 제도가 도입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국민들의 강력한 여론에 선거 전세에 불리함을 느꼈던 것일까?  복지정책 도입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보수당도 어정쩡한 입장에서 보고서 내용 실현을 공약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적극적 실천과 대대적 복지 확대를 내세웠다.  전시내각 해체 전부터 노동당은 주도적으로 복지정책이 도입될 수 있도록 이미 기틀을 확립하고 있었다.  

선거 결과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윈스턴 처칠 총리는 참패하고, 종전 두달만에 그때까지 단독 집권경험이 없었던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집권한 노동당은 약속대로 국민 보험 제도와 산업 재해 보험 제도를 법적으로 실시하게 하였고 복지 국가로서의 영국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과연 한국은 '복지국가' 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이 책의 저자 정원오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국의 사례를 들어 복지국가가 탄생하기 위한 필수 요건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노동당처럼 사회 보장 정책 도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둘째, 영국이 총선거를 통해서 복지국가로 전환될 수 있었듯이 민주주의 정치 과정 혹은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야 하며  

 셋째,  유럽 각국에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민주적 방식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사민주의 혹은 중도 좌파 정당이 존재하고 있듯이 복지국가 존립에 이념적으로 가장 친화성이 있는 정파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4대 사회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제도등 사회 복지 서비스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만 사회 보장을 위한 재정적 규모면에서는 OECD 국가 중에서 복지비 지출 비중이 가장 낮아 이미 복지국가 단계를 거친 영국와 스웨덴 등과 비교하면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저자는 두 번째 요건에서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안정화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pp 156)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최근 MB 정부의 노선 행보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적 가치가 점차 퇴행되고 있음을 역시 부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최대의 쟁점에 서 있는 무상투표 주민투표는 오히려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부정하려는 오 시장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고 서울시의 주민투표 발의는 무상급식 시행여부와 시기 결정 등은 서울시 교육감 소관임에도 불구하고 권한을 침해했으니 법적으로 본다면 이 투표는 민주적 절차를 어긴 위법 행위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민주주의 절차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이다.  

우리나라에 남북 분단의 상황으로 인해서 좌파로 대표되는 진보세력의 입지는 여전히 미약하다.    좌파 이념의 민주노동당이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 집권당인 한나라당과 대표적인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는 확실하게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중도 좌파 정당이 없으며 '복지' , '무상급식 도입 찬성' 을 옹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지 정책 도입에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복지 국가와의 친화성 수준은 낮을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도 복지 국가 유형의 분류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통일적인 유형은 없지만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복지 후진국' 미국과는 별반 차이가 없다.   미국은 실질적인 사회 보험 제도가 도입되지 못했으며 사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출 비용 역시 유럽 복지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어설픈 복지' 보다는 '보편적 복지'

이러한 영국의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분명한 교훈을 준다. 안보 문제와 복지 문제가 충돌했을 때, 선거에서는 복지문제가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안보는 ‘모두의 문제’ 이고 복지는 ‘나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 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집권하여 보편적 복지라는 베버리지의 꿈을 추진했지만 6년 뒤에 다시 국민으로부터 불신당하고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고 되며 훗날 '영국병' 또는 '복지병' 이라고 불리우는 복지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베버리지 보고서와 노동당의 사례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국가에게는 교훈의 대상이다. 과감한 재정적 투자로 체감할 만한 수준의 급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치밀한 정책 기획력에 의해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이다.  

어설프게 보편적 복지를 레토릭으로 주장하는 보수세력도 문제이지만 진보세력은 (투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무상급식 투표율이 33.3% 미달된 결과에 성급하게 축배를 들어서는 안 된다.    

진정 가슴과 머리로, 국민들을 위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할 준비가 필요하다.  복지국가로가 되는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복지정책 및 복지국가의 참된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되든 간에 우리의 삶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는 '복지' 라는 개념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주창하는 보편적 복지는 오히려 역사와 발전을 더욱 후퇴시킬 수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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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2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투표결과가 어땠으면 좋겠어요? 아예 33.3%가 안되면 훗날 또 어떤 식으로 다툴지 궁금해요. 무엇을 위한 선거고 무엇을 위한 투표인지, 어떤 게 진정한 복지인지 요즘은 의문이 들어요.

cyrus 2011-08-23 20:22   좋아요 0 | URL
저는 투표율이 미달되었으면 합니다. 투표율이 미달된다면
진보 여당은 투표 결과에 축배를 들기보다는 영국의 노동당처럼
무상급식 정책이 정착될수록 실질적으로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투표율이 넘는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다고해서
복지 정책 도입에 대한 화두만큼은 오랫동안 쟁점화되었으면 해요.

sslmo 2011-08-2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내일 주민투표를 두고 공방이 있었어요.
전 당근 투표를 할 생각이 없지만,
주민투표 청구 측 얘기(그 여자가 이경자라는 이름였었나?)를 들어보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더군요.
또 어떤 어거지를 쓸지 말입니다.

cyrus 2011-08-23 20:24   좋아요 0 | URL
오늘도 뉴스를 보니 어떻게든 무상급식 도입을 막아보려고
별 수작을 다 하더군요. 무상급식 찬성론자를 빨갱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무상급식하는 학생은 동성애자 된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홍보까지 펼치네요 ^^;;

마녀고양이 2011-08-2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그런데 영국이 복지 국가라 할 수 있는거 맞나요?
처칠 때에는 그런 논쟁이 있었는지 모르나, 대처 수상에 의해서 퇴보되었다는 글을 읽었던거 같기도 하고....... 여하튼 얼마 전 영국의 유혈 투쟁을 생각하면, 이 책의 논점이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어요. 현재 영국의 양극화 현상과 실업 문제는 엄청나니까요.

cyrus 2011-08-25 19:57   좋아요 0 | URL
마고님 말씀 맞아요, 베버리지 보고서와 노동당의 승리로 영국은
복지국가였다가 1980년대부터 복지병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처 수상이 당선됨으로써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가게 되었죠.
오늘날에도 베버리지 보고서를 사회보장제도 확립의 기초로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복지에 반대하는 보수는 벌써부터 복지병 생길거라 운운하면서
망국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하고 있던데 다른 복지국가의 교훈 삼아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도 좋을텐데 말이죠 ^^;;
 

   

 

  2010년에는 '정의' ,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 ,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권의 책이 사회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주는 책들이 있었다.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로 인해 대한민국 20대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 쪽으로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었다면 2010년에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서 10년 전으로 되짚어보게 되면 90년대에는 똘레랑스 신드롬이 있었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똘레랑스(관용)를 소개하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1995년이니 10년을 조금 넘는 정도이다.  재미있게도 국내에 똘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소개된 나라가 바로 프랑스라는 점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던 저자가 프랑스에 정치적 망명을 하고, 호구지책으로 택시운전사를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적었는데 프랑스를 사회 저변에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뿌리내리고 있는 관용의 사회로 소개하고 있다.   

그 뒤 똘레랑스는 보수와 진보, 혹은 계층에 관계없이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게 되었으며 한때나마 한국사회에서 양심의 자유,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용인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똘레랑스가 소개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프랑스의 모습은 똘레랑스의 종주국이라고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사르코지 정부 시대부터 점차 퇴색해져만 갔다.    

 

 

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물가가 올라서 하루 먹고 살기 힘든데다,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사회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르코지 정부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강경한 이민정책이었다.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는 물론, 외국인 걸인과 도둑을 프랑스 사회를 좀먹는 '불순분자' 로 규정하여 법에 따라 모두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사르코지 정부의 강경한 이민책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였지만 정작 프랑스 국민의 절반은 정부의 이민 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시하기도 했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인본주의, 인도주의를 제일로 치던 가치관도 바뀌기 마련이다. 게다가 각종 사회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 혼란한 사회를 경험한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분에 사르코지 정부의 정책에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화적,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 또한 자유, 평등, 유대라는 프랑스 공화국의 정신에 따라 프랑스 사회에 통합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통합주의의 전통에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를 지켜보고 있었던 93세의 노인은 불법체류자와 이민자들을 추방하려고하며 정의가 상실되어가는 자국의 사회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분노' 였던 것이다.    

 

 

  2011년 지금은 '분노' 신드롬   

 

 

 

 

 

 

 

   

 

분노라는 감정은 파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해 때로는 상대에 대해 분노할 때 분노는 단순히 감정이 아닌 행동을 수반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종종 부정적인 측면을 불러일으키기에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경계한다. 그러나 분노가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사회적 구조를 향할 때 이는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다.   

93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권 및 사회문제에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에는 분노의 정치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다.

6000원이라는 상당히 착한 가격에다가 편집자 후기와 추천사 등을 제외하면 6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테판 에셀이 현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은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수호한 민주주의와 평화가 시장경제라는 독재에 의해 훼손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경제는 국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이후 불법 체류자 및 이민 정책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대우, 은퇴 연령 연장, 의료보험 제도 후퇴 등 민주주의의 가치는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10여년 전 다른 나라에서 유래된 올바른 가치를 배우고자고 했던 우리나라도 점점 프랑스를 닮아가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반(反)다문화 정서의 영향은 남아 있다.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반다문화주의 인터넷 카페가 개설되어 외국인 범죄와 결혼 이민자의 가출 사례 등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뜨리고 있다.  반다문화주의자들 역시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방해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부자 중심의 사회 경제 정책을 내세우고 있고 이렇다보니 마땅히 보호받아야할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공정한 사회' 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정계 내에는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불법 비리와 정경유착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권력자와 재벌들의 언론 독점은 이미 언론 독립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의미도 퇴색하고 말았다.

 

스테판 에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경제 소득으로 부가 축적되었지만 문화적, 사회적으로 점점 가난해지고 성숙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질문한다. 국가는 더 이상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릴 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이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셀은 평화적 봉기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추상적인' 분노 신드롬이 아닌 '실천적인' 분노가 필요할 때

올해 소개된 <분노하라>의 저자 스페판 에셀은 본적은 독일 출신이지만 젊은 나이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활약한 프랑스 사람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추앙받았던 그 나라다.   그렇다면 이제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아닌 앵디녜부(Indignez-vous)의 종주국이 되는 것인가?  

프랑스 이외에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국가에도 <분노하라>가 번역될 정도면 분명 21세기에 기억되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범세계적 신드롬이다.

하지만 문제는 ‘분노하라’는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가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울림이 아닌 구체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 말에 탄생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부르주아지로부터 억압받고 있었던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사회개혁을 위한 단결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스테판 에셀의 분노 선언 역시 사회를 개선하려는 분노의 의지를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프랑스 노인이 쓴 짧은 분량의 책을 그저 남의 나라에만 통용되는 이야기라는 인식, 또는 사회변혁에 대한 보수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책의 진정한 메시지를 그저 활자 자체로 읽어버린 시간 낭비적 행위일뿐이며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실을 그저 두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10여 년 전의 똘레랑스 신드롬처럼 역사 속 한 페이지에만 남아있는 일시적인 유행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 적극적으로 사회변혁에 참여할 줄 알아야하며 비정의롭고 모순된 점에서는 분노할 줄 알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성숙된 시민으로서 요구되는 태도는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20대들에게 달려 있다.  

20대들은 이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절규를 넘어서서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자 ‘행동하는 양심’ 이 되어야 하는 기회인 것이다. 정책과 사회, 교육제도,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변혁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법을 찾고자 뭉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뭉쳐진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개혁의 길에 나서고 우리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반값 등록금 문제 덕분에 분노 신드롬이 적절하게 맞아들어가게 되었고 전국 곳곳의 20대의 대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직접 '분노' 하고 '저항' 할 수 있었다.  

결국 20대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다른 세대나 이론에 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20대가 행복해 지는 길은 20대 우리들 속에 있고, 우리들이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 20대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또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우리들의 생존을 다른 누구에게 맡길 수 없다. 우리들의 생존은 우리들이 함께 나서서 찾아야 한다. 자유는 스스로 찾으려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분노하라>가 대대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지가 않다.  책에서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영향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부조리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알고 비판할 줄 알아야한다는 사실이다.     홍세화의 추천사 속 문구대로 스테판 에셀의 분노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것일 수는 없다.    '분노' 신드롬을 뛰어넘어  전세계적으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앵디녜부' 를 사회적으로 실천할 줄 아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 관련기사  

[‘우향우’ 프랑스… 인종차별 살아나고 톨레랑스 사라진다]  동아일보 2010년 8월 18일 

[외국인 편견·몰이해 反다문화 정서 부채질]  서울신문 201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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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2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똘레랑스도 한계는 있다고 봐요. 잘못하면 냉소주의로 흐를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분노하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나라 정서에선 위험할 수도 있구요.
스테반 에셀은 분노하라기 보다는 저항하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은 아닌가 싶어요.
무저항 비폭력를 말했던 것을 보면.

분노하라의 리뷰를 쓸 때 저도 홍세화의 책을 생각은 했는데...
비교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못 읽은 게 아쉬워요.ㅜ

cyrus 2011-08-22 23:5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예전에 스텔라님 서재에 댓글 남겼을 때도 그랬지만,,
이미 관용이라는 게 잊혀진 지금으로 봐서는 거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가치도
시대에 따라 고치게 된다면 관용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고 봐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코지도 동유럽 이민자 가문 출신입니다.그리고 2차 대전 후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서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저지른 잔인한 전쟁을 생각하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cyrus 2011-08-23 00:01   좋아요 0 | URL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식민지나 제3세계 관련 세계사를 보게 되면
한 때 유럽에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국가 중에 프랑스 역시 빠질 수 없다고
봐요. 사르코지가 이민자 가문 출신이군요. 자신이 쫓아내려는 이민자들
중에는 분명 자신의 핏줄과 같은 동족이 있었을텐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정말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새롭네요.

분노나 불안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죠. 그 방향을 어디로 트느냐에 따라서 힘이 될수도 독이 될수도 있다는 부분에 절대 공감합니다. 그리고 도가 지나친 목소리는 많은 이의 공감을 얻기 어렵죠, 물론 순수하기는 하지만요. 무엇인가 하려면, 항상 눈높이를 반보 높게하여 추진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게 실천적인게 아닐까요?

그런데 프랑스도 요즘 휘청거리죠? 에휴.

cyrus 2011-08-23 00:02   좋아요 0 | URL
프랑스나 영국이나,, 어쨌든 유럽 역시 우리나라 못지 않게
소란스러운거 같아요 ^^;;

귀를기울이면 2011-08-2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르코지조차도 GDP로 대표되는 성장률은 '이제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더군요.(책 'GDP는 틀렸다') 우리나라는 7% 성장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이 되는 시대인데 말이죠. 우리나라라면 '빨갱이'취급 받을 사람이 프랑스에서는 극우 취급을 받는 상황이니 우리는 아직 갈길이 멀어보입니다.

cyrus 2011-08-23 00: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귀를 기울이면님 ^^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사르코지도 GDP 수치로 결정되는
성장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하는 노선을 취한거 같은데,,
반대로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들을 위한 복지보다는
그저 국익을 위한 성장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거 같습니다.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그래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맞이하는 40대는 더 치열하네요.
아니, 치열해 져야만 하는 세대인 것 같아요.
쉽게 안주하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시기니까요.
저에겐 때론 <실천적인 분노>가 필요해요. 귀찮은 생각을 버리고, 나 하나 굶지 않으니까 됐어, 라는 이기심을 버리고...

cyrus 2011-08-23 00:11   좋아요 0 | URL
저도 느낌으로 실천적 분노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제 사회를
주도해야 할 20대들이야말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현재로서는 취업으로 결정짓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타인과 사회 공동체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낮은 수준이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 세대도 그렇고
다음 세대들까지도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생각해요.

분명 마음만은 남아 있긴 한데,, 정작 실천이 안 되고 있으니,,
막상 댓글 쓰고 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네요 ^^;;

아이리시스 2011-08-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도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한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거라 봐야겠죠. 사르코지 대통령도 임기가 끝나가는데 다음 선거도 기대돼서 프랑스가 어떻게 흐를지는 기대할만한 것 같아요.

저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맨날 벼르기만 하고, 어느새 고전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저 책이 요즘도 써먹을만 할까요. 실용적이지는 못할 것 같아요. 어느새 똘레랑스만으로 통하는 시기가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적정한 통제가 언제나 필요했는데 그걸 간과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요. [분노하라]는 못 읽었고, 저도 언제나 실천없는 분노만 하고 있기 때문에 죄스러워요.

cyrus 2011-08-23 20:2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요즘 똘레랑스 개념을 언급하기에는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요. 요즘 우리나라 사회는 말 그대로
불만, 분노니까요 ^^;;
 
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억지를 쓰는 존재이다. 이치에 맞든 맞지 않든 억지를 쓰다보면 그럴듯해진다.  교활하고 빈틈없이, 사람은 언제나 자기 형편에 맞도록 사실을 왜곡하고 이어 붙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 교고쿠 나쓰히코 <죽지 그래> pp 135 -  

    

 

  그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고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지금도 사건 관련자 고대 의대생 3명에 대한 징계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다.

수많은 시민단체들 그리고 고대 소속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나체를 촬영한 파렴치한 의대생 3명을 출교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학교 측은 퇴학 수준의 징계를 내렸다.  고대는 다른 대학과 달리 퇴학처분을 받아도 1학기만 지나면 재입학이 가능하다.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뼈저리게 반성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출교처분을 해야하는 것이 합당한 법적 제재이다. 

의대생들이 일으킨 행위는 교육목표에 따라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고 사회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범죄 행위이므로 가장 엄중한 처분을 내리는 것이 걸맞다. 그런데 자신들에 내린 처분이 가벼워서 그런 것일까?  사건이 발생한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과 반성할 기미가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출연한 성추행 사건 피해자의 언니의 진술에 의하면 가해자의 부모가 직접 찾아와 피해자 학생에게 피해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가해자인 본인의 자식들도 인생이 끝난거지만 피해자도 끝난 것이라는 협박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나고 2~3일 후 가해자들에게 연락을 해 ‘ 너희들이 했던거 기억난다. 술에 취했었지만 확실히 기억이 난다 ’ 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다’ 라는 반응이 아닌 ‘ 네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 ,  ‘우리는 망했다’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 애써 연락한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사죄조차 하지 않은 것다.    성추행 사건이 사회의 표면 위로 떠올렸을 때 문자 한 통으로 사죄를 표한 태도와는 무척 상반되고 사죄에 대한 가해자들의 진심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 남 탓이오즘 ' 에 사로잡힌 소설 속 인물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마다 남의 탓만 하는 일은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폭우 피해, 물가인상, 노사분규와 비정규직 문제 게다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사건 등까지 모든 사회적 이슈 속 당사자들은 서로 남의 탓만 하고 있다.  그야말로  ' 남 탓이오즘 ' 의 사회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다. 

교고쿠 나쓰히코<죽지 그래> 속에 등장하는 6명의 인물 역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남 탓이오즘 ' 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아사미라는 여자의 죽음과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와타라이 겐야라는 남자가 그녀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재미있게도 겐야가 만난 인물들은 생전의 아시미와 친분의 관계를 형성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진심어린 애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겐야가 첫 번째로 만난 계약직 회사 직원 야마자키에게 아사미는 그저 자신의 회사에 잠깐 일하러 온 계약직 직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외부적인 존재일뿐이다.   

 

아사미는 석달 전에 죽었다.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경철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모른다.   (중략)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도해주지도 않았고 -  아, 그저 내가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뭐, 자살이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 같은 책, pp 14 -

 

겐야가 세 번째로 만난 야쿠자 사쿠마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사미의 죽음 소식을 접했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신변이 위험에 처할까봐 당황한 반응을 보인다.  

  

슬펐던가?  아사미가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슬펐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놀랐다고 해야 하나.  아니, 아니....  '위험하다' 가 먼저였지 않을까.   (중략) 

나와 아사미의 관계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조사를 받게 된면 귀찮아진다.  내가 아니라 조직이.   

 - 같은 책, pp 127 -

  

네 번째로 만난 아사미의 친엄마의 모습은 죽은 딸의 엄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남 탓이오즘' 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딸의 심정을 한번도 헤아려 본다거나 이해해보지도 못한 채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핍돤 상태다.   

 

" 이봐, 그 사람들은 전부 아사미의 아빠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어.  나하고 결혼한 결과 아사미의 아빠가 된 것뿐이었다고. " 

 겐야는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 그 말은, 아사마의 기분 같은 건 상관없었다는 뜻이야? "    

 그 아이의 기분 따위.... 

 " 몰라, 그런 건.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부부 사이 문제 같은 건 제대로 알지도 못했겠지.  그 아이는 내가 결정한 일에는 뭐든 거스르지 않았어.  그거야 당연하지. 내 인생이니까.

 - pp 198 -

   

그녀는 자신의 딸에 대해서 왜곡된 질투심마저 가지고 있다.  아사미는 그저 '아버지' 라는 존재가 그리웠고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새로 맞이 한 계부에게 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미의 친엄마는 그런 아사미의 태도를 질투를 느꼈으며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아사미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거쳤던 남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 남 탓이오니스트 ' 에게 날리는 겐야의 마지막 확인사살 

소설 속 겐야의 대화 방식은 죽은 아사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겐야의 심리적 상태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아사미의 죽음을 더욱 궁금하게끔 만드는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언뜻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 연상된다.   아사미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은 정작 아사미에 대해서는 막연하고 불확실한 진술을 하게 되는데 겐야는 교묘하게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의 허술하고 모순적인 내면심리를 잘 파악하여 대화 당사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겐야의 완벽한 대화에 걸려든(?) 인물들에게 '약점' 이란 살아있었을 때나 죽고 난 뒤나 아사마에 향했던 냉담하면서도 방관적인 태도이다.   집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대방에게 추궁하는 겐야의 질문들은 양 손으로 번갈아 잽(jab)을 날리는 권투 선수처럼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 겐야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야마자키와 사쿠마 그리고 아사미의 친엄마는 학력도, 직업도 없는 한 남자 앞에서 쩔쩔 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겐야는 궁색한 자기변명과 쓸데없는 하소연만 늘어놓기만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 가득한 이들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림으로써 마지막 확인사살까지 한다.    

 " 죽지 그래. "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잘 되면 내 탓, 그렇지 않으면 남 탓 ' 이라는 현대인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인 냥, 예전부터 오래도록 역사처럼 이어졌다. 타인을 비난하면 자기가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난의 속성인데, 이는 자기가 남으로부터 비난받을 짓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남을 먼저 비난하여 자기의 문제를 감추려고 하는 심리적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의 하나 밖에 없는 인생 또는 목숨과 관련 있는 반인륜적인 사건 같은 경우에는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에게 ' 남 탓이오니즘 ' 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정작 피해자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라는 속담이 있듯이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오히려 남에게 성내게 된다.

결국, ' 남 탓이오니즘 ' 은 자신에 대한 행동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인 셈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한데 그때마다 ' 너 때문이야! ' 라고 탓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궁색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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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20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반가워라. 시루스님, 저 이 책 살까말까 몇 번이나 그랬었어요. 근데 이제 여름도 지나가니까 장르소설은 구입 안하려구요. 대신 리뷰 보니까 좋네요, 읽은 것 같고..ㅎㅎ

세상이 뭐 갈수록 이래요, 방귀 뀐 놈이 성내고, 당한 사람이 더 죄스러워 하고........

cyrus 2011-08-21 17:14   좋아요 0 | URL
사실 장르소설이라고 구분하기에는 애매모호했지만,, 그래도 내용 전개가
인상 깊었어요. 결말에 이를수록 주인공이 마지막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것도 좋았고요,,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반전도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