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삼재(三災) 논쟁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올해 삼수에 도전하는 녀석이 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삼수생에게 시험 합격을 위한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작은 동네 호프집에서 친구 여러 명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술과 안주를 벗삼아 즐거운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에 삼수생 친구가 갑자기 '삼재'(三災) 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작년부터 삼재라서 과연 올해 수능시험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든다고 하였다.   작년에는 홀로 독서실을 다니면서 EBS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까지 시험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적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수생 친구는 작년 수능시험의 좋지 않은 결과가 일어난 원인이 다 삼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무조건 하는 일마다 꼬인다거나 좋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고 하였다.   예전부터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시던 아버지의 증세가 더욱 심각해지셨고 올해 모의고사 성적들이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등 삼수생으로서의 말 못한 고통을 토로하였다.    

그러자 한 친구가 삼재는 1년을 주기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삼수생을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작년의 기억은 잊어버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성격의 나는 이를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위로를 그 친구에게 삼재는 1년 주기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삼재는 3년 주기라고 하였다.  사실 나 역시 용띠 삼재이기 때문에 삼재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때부터 올해까지 삼재가 끼어있기 때문에 삼재를 3년 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술기운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임의 대화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구들은 삼재의 주기가 몇 년인지 열띤 토론(?)을 하게 되었다.  몇 몇 친구는 자꾸 1년 주기라고 우겼고 나와 삼수생 친구는 3년 주기라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 지갑 안에 있는 삼재를 예방하는 작은 부적까지 내밀면서까지 '삼재 논쟁'(?)은 약 20분 정도 이어졌다.  

결국 술기운으로 인한 시간을 낭비하는 논쟁답게 마무리는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다. 결국 논쟁의 결말은 삼재는 완전히 믿을게 못된다는 속설에 불과하다는 공통의 의견으로 싱겁게 마무리지었다.

 

 

  나에게 삼재란..? 

집에 돌와오면서 포털 사이트에 '삼재' 를 검색해봤다.   생각해보니 '삼재' 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삼재의 뜻을 알고나니 술자리에 했던 삼재 논쟁은 무의미한 허무한 대화였음을 알게 되었다.     

삼재의 '삼'(三)은 3'년 주기' 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유명 포털사이트 백과사전에 의하면 삼재의 정확한 의미는 '인간에게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삼재는 1년 주기도, 3년 주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과사전에 소개하고 있는 삼재의 의미가 내가 알고 있던 '삼재' 의 의미와 다르면서도 복잡하였다.   그리고 삼재의 재앙에도 각기 다른 종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종류를 보면 ① 도병재():연장이나 무기로 입는 재난, ② 역려재():전염병에 걸리는 재난, ③ 기근재():굶주리는 재난이 있다. 또 대삼재()라 하여 ① 불의 재난(), ② 바람의 재난(), ③ 물의 재난()을 말하기도 한다. 9년 주기로 들어온 이 삼재는 3년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그 첫해가 들삼재, 둘째 해가 묵삼재(또는 눌삼재), 셋째 해가 날삼재가 되어 그 재난의 정도가 점점 희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첫번째 해인 들삼재를 매우 겁내고 조심하는 풍습이 있다.

그 대책을 살펴보면 첫째가 매사를 조심하는 방법이요, 두 번째는 부적()이나 양법()을 행하여 예방하는 방법을 썼다.  

① 부적:삼재적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출입문의 위쪽에 붙여 둔다. 부적은 머리가 셋, 발이 하나인 매()를 붉은 물감으로 그린 그림인데 이때 물감은 한약재인 경면주사()를 쓰는 것이 원칙이다.

② 양법:삼재가 들 사람의 옷을 태워서 그 재를 삼거리에 묻거나 그해 첫번째 인일()이나 오일()에 세 그릇 밥과 3색 과일을 차리고 빈다. 또 종이로 만든 버선본을 대나무에 끼워 정월 대보름에 집의 용마루에 꽂고 동쪽을 향하여 일곱 번 절하고 축원한다.  

③ 나이와 삼재:사·유·축(··)생은 삼재가 해()년에 들어와 축()년에 나가고 신·자·진(··)생은 인()년에 들어와 진()년에 나가고 해·묘·미(··)생은 사()년에 들어와 미()년에 나가며 인·오·술(··)생은 신()년에 들어와서 술()년에 나간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사실...    백과사전 속 내용이 도통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3번의 '나이와 삼재' 같은 경우에는 십이지신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무척 헷갈린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용띠 삼재다. 올해가 삼재 마지막 년이다.   나는 삼재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그냥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장은 다른 편이다.   유독 나에게 삼재를 강조하셨기에 지금까지 내가 삼재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이다.    한 번은 나에게 삼재가 끼어 있는 시기에는 절대로 집 밖으로 멀리 나가지 말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셨다.    어머니가 가끔씩 다니시던 절의 큰 스님 말씀으로는 삼재가 끼여 있는 시기에 내가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안 좋을 일이 생긴다나...     그리고 삼재의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부적까지 구입하면서 지금 내 지갑 안에 모셔두고 있다.    

 

  

  삼재의 시기 때 있었던 일들  

 

 1) 2008년, 삼재 이전

그런데 2009년, 2010년 그리고 올해까지 삼재가 끼여있던 시기들을 회상해보면 그렇게 좋지 않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수생 친구처럼 갑자기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 일상이 꼬이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 좋은 일들은 가장 재앙이 심하다는 들삼재가 있는 2009년이 아니라 삼재와 관련이 없는 2008년에 일어났다.  

일단 2008년, 나에게 가장 안 좋은 일은 바로....    군 복무이다.   이건 뭐,,, 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기억하기 싫은게 군인이 되어 훈련소로 향하는 것일게다. ^^;;   

그 다음으로 안 좋은 일이 그 해 이병이었을 때 유격훈련 행군 도중에 오른발에 골절상을 입었던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골절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 인생에서 가장 큰 부상이었다.  군 생활 잘 하다가 한순간에 발을 다치게 되어 3개월동안 군 병원에서 생활을 했으며 그 곳에서 일병 계급을 달게 되었다.   

이제 막 자대 생활에 정착하려는 이등병에게 오랜 기간동안 군 병원 생활을 하게 되면 퇴원 이후에도 제대로 군 복무를 할 수 없다.  군인들에게 군 병원 생활은 마음껏 편하게 먹고 놀고 잘 수 있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다.   그래서 편한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퇴원 이후 군 생활이 쉽지가 않다.    머릿속에는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배우기 시작한 병기본, 훈련 내용과 같은 군사적 지식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대신에 어여쁜 간호장교님의 얼굴만 남게 될 뿐이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나는 군 병원에서의 생활을 그저 침대에서 누워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배우고 있었던 병기본 공부는 물론이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자격증 공부도 틈틈이 하였다.  (내가 군 복무하고 있었던 당시 이등병들은 자대에서 자격증 공부는 아직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다. 부대 내무반 생활 환경마다 다르지만 자격증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상병 때부터 가능하다)     그리고 이 때만큼 독서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군 병원 안에는 환자 장병들을 위한 독서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덕분에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한창 밖에서 베스트셀러라고 읽혀지던 책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병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읽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부모님이 병원에 면회오시면서 사오신 책이 바로 <신> 1, 2권이었다.  (그 당시에는 1, 2권만 출간되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편안히 읽기도 했었는데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였다.  같은 병실에 만난 다른 부대 장병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 병원에 복무 중인 친한 의무병까지 이 책을 읽고 싶을 정도로 나름 책이 인기가 있었다.   

 

 

 2) 2009년, 들삼재의 시작   

2009년, 삼재의 시작을 들삼재라고 하는데 재난의 정도가 가장 강한 해이기도 하다.   

사실 이 때가 일명 '군 생활이 꼬였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몇 개월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다.    

2009년 2월에 군 병원에서 퇴원하고 드디어 자대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이등병 생활의 반을 병원에서 보낸 일병에 대한 주변 선임병과 동기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필 복귀하던 시기가 소속 소대가 다른 지방으로 파견 중이라서 나는 어느 소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전투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잉여 병력이었다.   

내가 자대에 배치되면서 주어진 주특기가 특성상 많이 뛰어야하고 걷어야하기 때문에 당시 중대장님과 행정보급관님들 그리고 소대 간부님들 사이에서 나의 향후 소속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오고 갈 정도였다.    나는 꼭 에전 소대에 소속되고 싶다고 강력하게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당시 부대 일정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한 2개월동안 본부 소대와 함께 지내면서 무소속 소대 일병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본부 소대 사람들이 성격이 착하고 입원 전에도 원만한 관계를 맺어서 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발을 다치기 전과 군 병원 생활 이후 주변 선임병과 동기들의 시선과 반응이 너무나도 달랐다.    

 한 때 '소대를 짊어나갈 수 있는 유망한 이등병' 에서 한 순간에 '아무짝도 쓸모 없는, 어중간한 일병' 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 선임병과 동기들은 내가 군 병원 생활을 은근히 시샘하였다.   이등병 주제에 상, 병장도 하지 못한 편한 생활 다 누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가 병원 생황을 어떻게 했는지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단순히 '병원 생활' 을 '놀고 먹고 자는 생활' 로만 알고 있었다.   

 

 

 

 

  

 

 

  

 

2009년에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기억 남은 책이라면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이었다.  처음으로 강상중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책을 읽었던 당시 그 어떤 소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잉여 전투병에게는 한국인도 아닌, 그리고 일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재일교포 2세의 입장이 가슴 속 깊이 와닿았다.    비록 정신적으로 힘든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그 때의 경험 그리고 강상중 교수의 책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로서의 고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3) 2009년, 시련의 군생활 속에 피운 긍정의 꽃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시 예전 소대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상병 마크를 군복과 군모에 오버로크를 해도 여전히 '군 병원 생활' 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 역시 나의 이미지에 오버로크 되어 있었다.   말과 생각은 '후임병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선임병' 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소대 생활을 빠르게 적응하는게 쉽지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평소에 나를 좋게 봐주던 소대장님이 다른 부대로 전임하시게 됨으로써 군 생활은 그야말로 '꼬이게' 되었다.   새로 온 부임한 소대장님은 평소에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나를 '소대 내에서 열등한 장병' 으로만 생각했다.   

한 번 찍힌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못하는게 군대의 현실이다.  결국 간부의 눈 밖에 난 이미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해 8월, 나는 다른 부대로 파견으로 복무하게 되는 다른 소대로 강제적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부대의 파견 복무는 맞은 편 북한 부대와 대치할 수 있는 압록강 주변에 근무하는 것이다.   특히 겨울이 되면 야간 근무 시 춥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내가 파견 근무 소대로 옮긴다는 사실에 주변 선임병과 동기들은 내가 군 생활을 제대로 꼬인 대표적인 케이스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도 파견 근무 소대원들과 친분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완전 친하지도 않은 소대였다면 정말 군 생활이 꼬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숙한 소대였다고 하더라도 그 쪽 소대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야하는 것이 내가 먼저 해야할 첫번째 일이었다.  그 곳에서도 안 좋은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소대 생활에 적극절으로 임하였고 무엇보다도 절대로 다른 소대로 강제적으로 옮겼다고해서 풀 죽은 모습을 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최대한 웃으려고 하였고 훈련 때에는 최대한 뛸 수 있을만큼 뛰었다.    

그리고 오랜 노력 끝에 좋은 일들도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파견 근무에 임한 노고가 소대 간부님과 소대원들에게 인정되어 부대장 표창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군 생활 처음으로 포상 휴가라는 것을 받게 된 순간이었다.     좋은 일은 계속 찾아왔다.  부대에서 시행 중인 한자 자격증을 따게 되어 또 포상 휴가를 이어서 받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소대원들은 드디어 내 군생활에 '꽃이 피었다' 라고 할 정도로 나를 예전보다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4) 2010년 묵삼재, 알라딘과의 만남  

삼재의 두 번째 시기인 2010년에는 머리 아플 정도로 힘든 일이 없었다.  오히려 2010년은 나에게 좋은 일이 많았다.  

그 해 5월에 전역하게 되면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알라딘 서재 블로그를 하기 시작하였다.  군 입대 전에는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는데 군 생활하면서 갑자기 해보고 싶은 경험들 중에 하나가 바로 블로그 활동이었다.    사실 알라딘 블로그를 하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땡스투 적립금이었다.     군 입대 전에도 간간이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했었지만 땡스투 적립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블로그에 리뷰나 페이퍼를 남기면 적립금을 모을 수 있다는 제도 자체가 평소 책을 많이 구입하지 않는 나에게는 참으로 획기적인(?) 제도였다.  (지금은 땡스투 적림금의 폐해를 알고 있지만.. ^^;;)       그래서 하게 된 것이 서재 블로그 활동이었다.  적립금을 모으되 리뷰나 페이퍼만큼은 정성껏 쓰려고 노력했다.   

역시 노력한만큼 그에 따른 좋은 결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비록 처음으로 7기 신청할 때는 탈락되었지만 운 좋게도 8기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라딘이나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리뷰 이벤트에 참여하여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알라딘 덕분에 나의 독서를 위한 재정적(?) 지원만 얻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온라인상이지만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좋은 서재 이웃분들도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서재 블로그에 처음으로 댓글을 다셨던 분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에 그 분이 아니었다면 서재 블로그는 무척 썰렁했었을 것이다.   그 분의 댓글 덕분에 나도 다른 이웃분들의 서재 블로그에 가게 되면 댓글을 남기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5) 올 해, 날삼재  

삼재의 마지막 시기인 날삼재는 재앙의 정도가 가장 희박하다.   아직 2011년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재앙' 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일은 겪지 않았다.  

올 해가 3년 만에 복학하게 되어서 성적장학금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아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비록 2등이지만 그동안의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동안 2009년부터 올해까지 쭉 삼재의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의 앨범에 꺼내보니 그저 불행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때가 좋지 않을 일들이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인 것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몰래 독서모임으로 한 달에 두 번 서울을 왕래했던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나는 정말로 이번 삼재를 억세게 운 좋게 보낸 것이다.  이게 다 부적의 효험 탓인지 모르겠지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 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것은 한 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 알렉산드르 뿌쉬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연 -

 

 

'긍정의 힘' 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참고 견딘다면 즐거운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경험마저도 언젠가는 미래, 곧 나에게 다가올게 될 긍정적인 현실의 '열매' 로 이루어지는 소중한 씨앗이 될 수 있다. 저 유명한 뿌쉬낀의 시 구절처럼 말이다.  
   

 

  

P.S>

'삼재' 를 검색하게 되면서 우연히 '액년'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액년이란 '운수 사나운 해' 를 뜻하는데 속설상 보통 남자는 25, 42 , 61세, 여자는 19, 33, 37세를 액년의 시기로 보고 있다.     

이런,,,   내년이면 나 25인데...   심지어 2012년은 전세계적으로 지구 종말의 해로 운운하고 있다.    

과연 내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심 걱정된다.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1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재라는 말을 어릴적 할머니께 들은적이 있어요. 솔직히 뜻은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요 ㅎㅎ 근데 주어지고 짜여진 운명같은 것보다는 엄마 몰래 서울 다니신 cyrus님의 모험이 인생을 만드는건 아닐까도 싶어요 ㅎㅎ

cyrus 2011-09-17 21: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어머니께 그런 말씀을 듣게되니 속으로 얼마나 찔리던지.. ^^;;
지금도 제가 서울에 돌아다니는걸 모르시거든요 ㅎㅎ

순오기 2011-09-17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삼재 공부를 하는 새벽이네요.^^
어머님이 들삼재 날삼재 얘기를 하셨지만 그땐 잘 모르고 지났고~ 지나서 생각하니 그랬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받아들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다고 결론지었어요.^^

cyrus 2011-09-17 21: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중에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최악의 경험이 아니었던거
같아요, 만약에 제가 삼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했었을거에요. 제가 삼재라는 것을 작년에 처음 알게 되었거든요 ^^;;

마녀고양이 2011-09-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알라가 용띠예요, 안 그래도 시어머님이 말씀해주시던데,
코알라 올해 초반은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꽤 좋은 상태인지라..
그래도 천기란게 무서워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지요.

여하간 9년 주기의 세가지 액운이라는 해석을 첨으로 알았네요.
시루스님, 서재 활동 즐거우신가요? 다행이예요,,, 그래야 오래 같이하지요~ ^^

cyrus 2011-09-17 21: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저는 올해가 끝나려면 3개월 남았는데,, 너무 함부로
서재에 글로 남긴거 같아요 ㅎㅎ 괜찮..겠죠..? ^^;;

아마도 9월 말부터 되면 학업 때문에 바빠질거 같아요, 중간고사가
10월 중순에 있으니까요.

stella.K 2011-09-17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멀리가지 말랬다고 하지만 서울 정도쯤이야...?!
그것도 바다 건너 가는 정도가 되야하는 거 아닌가?
뭐 이런 거 미신이라고 믿지 말라고는 말은 못하겠다만,
매사 조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결국 우리가 가저야할 삶의 자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자의 액삼년을 다 지나왔는데 특별히 해당사항은 없었던 것 같아.
나쁘다면 작년, 올핸 것 같아.
몸이 안 좋아졌으니까.
하지만 이때 또 리모델링을 받고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더라.
더 나빠지기 전이니까. 신호를 보내는 거였더라구.ㅎ

그런데 시루스 이런 말하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젊구나. 올해도, 내년도.ㅋ
또 모르지 내년에 더 좋은 일이 있을지.
바라는대로 된다잖아.^^


cyrus 2011-09-17 21:23   좋아요 0 | URL
ㅎㅎ 이러다가 저 유학도 못갈까봐 걱정이에요. 뭐 지금 상황으로서는
유학 갈 형편은 안 되지만요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누님은 액년에 아무 탈이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내년이면 20대가 꺾이네요. 여기서 껶이다라는게 군대에서 특정 기반의 절반을 지났을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정말로 젊었을 때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던데 후회하지 않는 젊음의 시기를 보내고 싶네요 ^^;;


2011-09-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중략)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

   

 

 

  난쏘공,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기록'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난쏘공’ 이란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1978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연작소설은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고통받던 노동자와 빈민의 삶을 그렸다. 당시 정권으로서는 불온하고 위험한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형상화한 이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출간된지 30여 년이 지남 지금까지 200쇄를 돌파했다. 책 한 권이 30년 가까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난쏘공>의 200쇄 출판이 자랑거리가 아닌 '부끄러운 기록' 이며 '억압의 시대를 기록한 소설이 아직도 읽혀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30여년 전의 불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 을 증명하는 기록의 반증이라고 하였다.  작가의 말대로 70년대의 불행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빈부와 소외계층 문제는 우리 사회의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글이 꾸준히 읽혀져 온 사실이 부끄럽다고 여기지만 그 글을 읽었던 독자, 우리들 역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될거 같다.   청소년 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목록에는 예외 없이 <난쏘공>이 포함되곤 한다.  특히 입시교육을 받고 있는 중, 고등학생들에게는 <난쏘공>은 대학수능시험 언어영역 시험에 지문으로 출제될 수 있는 작품이며 대학논술에서도 인용되는 필독서로만 인식하고 있다.  결국 학생들은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시대의 현실상을 보지 못한 채 오직 '대학입시' 을 위해서 읽어야하는 그저 그런 소설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 직시한 이데올로기와 빈부 격차 문제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해야할  '고민' 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청소년들은 그 진지한 고민조차 하지도 못한채 때이른 독서로 강요 당하고 있는 셈이다.      

 

 

  1970년대 '못 가진 자' 들의 이야기  

소설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 사는 난장이 일가의 이야기다. 난장이 아버지와 어머니, 영수 영호 영희 세 남매는 ‘날마다 지기만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루하루 살기도 벅찬 이들에게 어느 날 철거계고장이 날아든다. 쇠약한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녀야 한다. 죽어라 일해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고, 달나라로 떠나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결국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다. 

도시 빈민의 처참한 생활상,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실태를 정면으로 고발한 소설은 1970년대 사회에 대한 강렬한 문학적 보고서로 꼽힌다. 산업 개발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사회에 이 소설은 커다란 충격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는 외형적으로는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되어 근대화가 급진전되는 시기였지만 독재정권이 장기화되고 부정부패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경제적 위기감이 고조된 시기이다.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빈부 격차로 인한 계층 간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농촌과 도시 간의 소득 격차도 커지게 되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산업화로 인한 소외 현상이 심각해지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난쏘공>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대립적인 구도로 사건이 형성, 전개되고 있다.  난장이 가족이 사는 판자촌과 ‘다른 세계’ 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거기에선 매일같이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공간적으로 도시 변두리의 철거민촌, 노동 계층의 비참한 생활상과 개천 건너편에 위치한 잘 사는 계층의 화려하고 타락한 생활상으로 세계는 극명하게 갈린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 소외된 사람을 의미하는 '난장이' 가 있다면 반대로 난장이보다 덩치가 큰, 거대 자본을 상징하는 '거인' 도 존재하게 된다.    키 작은 난장이가 덩치가 크며 힘이 센 거인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속 난장이 가족들은 자본가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만다.   영희는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잇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기게 되며 그녀의 아버지인 난장이는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자본주의 4.0과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난쏘공>은 12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다.  그 중에 동명제목의 소설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2년 전 용산 참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재조명되기도 했었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연작단편 중에 네 번째로 구성된 동명제목의 소설만이 제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데다 '난쏘공' 이라는 제목이 주고 있는 대중들의 인식이 워낙에 강다하다보니 나머지 단편소설들의 문학적 가치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  그나마 '난쏘공' 다음으로 알려진 것이 첫 번째 단편인 '뫼비우스의 띠' 와 열 번째 단편 '클라인씨의 병' 그리고 열한번째에 수록된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이다.  

<난쏘공>은 상징적인 형식과 언어를 통해 비참한 1970년대 사회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소설 집필 당시의 사회에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형식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그 중에 열한번째 연작소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는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같은 경우에는 최근 '따뜻한 자본주의' 를 표방하고 있는 '자본주의 4.0' 와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좋다.   

자본주의 4.0 이란 20세기 초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 시대(자본주의 1.0)를 지나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내세운 수정자본주의(자본주의 2.0), 1970년대 자유시장자본주의(신자유주의·자본주의 3.0)에 이어 등장한 새 자본주의를 뜻한다.   자본주의 4.0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병리적 현상, 즉 빈부격차, 중산층 빈곤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따뜻한 자본주의' 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의 일방적인 성장에만 치중하기보다는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는 동시에 중소기업에도 공정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회적 모순을 정부의 힘이 아닌 시장과 기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4.0이 이전의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자본주의 4.0을 이루고 있는 내용의 요지들은 보게 되면 예전부터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할 때 항상 언급되던 내용들이다.  더구나 시장의 문제와 빈곤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업이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대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홀대하는 지금의 기업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동떨어져보인다.     

마르크스가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를 서로 목에 칼을 겨누는 대립, 투쟁적 관계라고 비유했던 것처럼 시장의 기능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자본과와 노동자가 서로 공생하고 협동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자본가는 '이익' 을, 노동자는 '생존' 을 중요시하다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 계급의 대립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속 은강그룹 노동자들은 기계처럼 착취당하며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있다. 이에 반해 은강그룹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높은 이윤을 얻고 있다. 은강그룹은 거대한 기업으로,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저임금과 높은 이윤’ 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은강 그룹 회장의 손자인 경훈이 전개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본가의 비윤리성과 부도덕성,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화해 불가능성 등을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경훈이 꾸는 꿈이 인상적이다.

 

나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고, 깨기 직전에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물을 쳤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 내 그물로 오는 살찐 고기들이 그물코에 걸리는 것을 보려고 했다. 한 떼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큰 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밖으로 나와 그물을 걷어올렸다. 큰 가시고기들이 수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것들이 그물코에서 빠져 나와 수천 수만 줄기의 인광을 뿜어 내며 나에게 뛰어올랐다. 가시가 몸에 닿을 때마다 나의 살갗은 찢어졌다. 그렇게 가리가리 찢기는 아픔 속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다 깼다. 

- 조세희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중에서 -

  

그물과 가시고기의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달려 있는 가시고기들은 헐벗고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가시고기들이 경훈이 쳐 놓은 그물을 뚫고 나와 경훈을 향해 달려든다. 이는 노동자들이 아무리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경훈은 가시고기의 꿈을 꾸고 난 후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라고 말하면서도 혼잣말을 하게 되는데 경훈의 의식 속에는 노동자들을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도 마땅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계속되는 '난장이' 들의 비극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가난이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던 말이 나오던 전후 시대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는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절대적 빈곤상태에 놓인 가난이라는 말 대신 사회적 양극화라는 그럴 듯한 표현으로 가난을 이야기하며 정계 인사들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 전문가인마냥 자처한다. 눈으로 봤을 때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었다 하여도 여전히 자고 일어나면 가난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거나 가난과 빈곤을 둘러싼 엽기적인 사건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스스로 빈곤하다고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강제철거로 누울 자리조차 찾지 못하는 철거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인들과 노숙인,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과 청소년들이 바로 그들이다. 비정규직자들은 외환위기 이후부터 고용의 불안에 시달려야만 했고, 젊은 패기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야할 청년들은 실업이라는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난장이' 는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공장 노동자였고,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도시빈민을 상징하는 시대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가난한 노동자를 조명했던 조세희의 <난쏘공>에 나오는 그 난장이는 옷을 갈아입을 뿐, 여전히 우리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09-1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세희 소설가 말대로, 이 소설이 점점 "한 때 그런 무지막지하고, 무서운 시대가 있었지.."라고 읽혀야 하는데, 수치상으로나 체감상으로나 빈부격차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누군가는 내몰려 죽음에 이르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낙원구 행복동'이라...

cyrus 2011-09-16 18:56   좋아요 0 | URL
소설 속 배경의 이름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소설 속 이야기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씁쓸하죠.

아이리시스 2011-09-1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친구가 가져간 난쏘공 어떻게 됐어요? 아직 멀었어요?ㅋㅋㅋ 아프지만 유명해서 막막한 마음으로 읽었었는데 뭐 지금도 변함 없으니 씁쓸해요. 세상은 좋아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의 골은 더 깊고 커졌어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어쩐지 아찔하네요. 그래서 낚시의 행위를 좋아하지, 고기를 포획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없고, 때로 미친 폭력이라 생각하는 저입니다. 그렇다고 생선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썩 즐기지도 않지만 갈치조림이랑 고등어찌개는 너무 맛있..^^

cyrus 2011-09-16 22:26   좋아요 0 | URL
네, 아직 못 받았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돌려준댔어요. ^^;;
<난쏘공>에서 '난쏘공'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고 인상 깊은 소설이
'가시고기'에요. 정말 사회적 상황을 기가 막히게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매력적이에요.

그런데 아이리시스님은 부산에서 사시는데 생선을 싫어하시는군요.
지방 사람들은 부산 사람들이 생선회를 즐겨 먹는다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보네요.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편견  

최근에 출간된 진중권<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은 3년 전에 출간된 <고전예술 편>을 이은 2편격이다.    1권 고전예술에는 고대부터 인상주의까지 모더니즘에 들어서기 전의 예술사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면 <모더니즘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책 내용을 소개하기 전부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를줄 아는 '현대인' 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현대미술를 어렵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미술은 너무 단순하고 고색하다고 해서 낡고 뛰덜어진 예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대적인' 현대예술은 복잡하다고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해 못하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당연히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복잡하다' , '고전미술은 그림만 봐도 화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데 반면 현대미술은 도통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 '현대미술은 고전미술보다 당연히 모던(modern)하며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와 선입견에 불과하다.  

진중권은 <모더니즘 편>에서 현대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모더니즘' 적 예술사조를 소개하기 위해서 단순히 기존의 미술사에서 사용하던 통사적 전개보다는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을 빌어 수많은 현대미술 사조들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모더니즘 편>에서는 한스 제들마이어(1896~1984)라는 미술사학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가 선택한 전개방식이 사뭇 이례적이다.   제들마이어는 예술 '보수' 주의자 로서 현대미술의 모순을 끄집어내는 미술사학자로 유명하다.  평소에 '진보' 입장에 서서 사회적 이면에 독설하기로 유명한 저자의 모습과 상반되어 흥미롭다.   

제들마이어는 20세기 초에 등장하다가 사라진 현대예술의 유행들이 전통적 예술 가치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현대적 예술 가치를 찾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쉽게 좌절되어 심지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되돌아갔다고 분석하였다.  현대예술의 전형적인 특징인 동시에 자기모순으로로 이르게 한 네 가지 예술적 근원으로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의 의지, 근원을 향한 열정, 광기에 대한 호기심’ 을 제시한다.

  

 

  순수성의 추구 : 야수파와 입체파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년 

(pp 36 수록) 

  

'순수성의 추구' 란 회화에서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색채, 형태, 원근법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서 회화는 관객들을 위시한 표현 양식과 그에 대한 의미에 부여하다기보다는 회화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 배제시킴으로서 순수한 형태의 회화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순수성을 표현하고자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순수성' 이라는 것이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미술 입문자나 독자에게는 그저 추상적인 용어로 들리지만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현대미술사조가 야수파(fauvisme, 포비즘)입체파(cubism, 큐비즘)이다.   

야수파와 입체파는 20세기 초 거의 동시에 등장한 미술운동이었는데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표현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다.   야수파가 인상파의 화풍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일시적으로 교류를 맺게 되어 형성하였지만 입체파는 인상파로 활동했던 폴 세잔의 구축적인 원근법에 매료되어 초창기 입체파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야수' 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수파 소속 화가들은 색채의 강렬함을 강조하였다.  그림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사물과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실제 색채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실제 색과는 상관없이 원색으로 표현하였다.  야수파 화가들은 원색으로서 빨강, 노랑, 파랑 등과 같은 화면의 전체적인 효과를 펼칠 수 있는 강렬한 색채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년  

(pp 63 수록)  

 

그는 굉장히 단순하고 변형된 금속성의 인물을 고안했다.  그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 인물, 집 등 모든 것을 기하학적 윤곽과 입방체(cubes)로 축약했다.  

- 루이 보셀의 비평,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 pp 55 -

   

반대로 입체파는 '정육면체' 를 뜻하는 Cube에서 비롯되었듯이 색채보다는 형태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당시 비평가들 역시 입방체로 구성된 입체파 회화의 표현방식에 대해서 경멸적인 비난을 퍼부었는데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조롱 섞인 의미에서 '입방체' 그리고 '입체파' 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세잔이 원근법이라는 오랫동안 예술가들을 지배한 기교를 제거한 것처럼 입체파 화가들 역시 원근법의 고정된 시선 대신에 여러 개의 시선이 공존하는 화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루이 보셀의 비평대로 모든 형태들을 기하학적 원형에 가깝도록 표현하였다. 

하지만 오직 '예술의 순수성' 을 추구하다보니 정작 예술적 가치 자체는 관객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모호적인 용어에 불과하며 그런 관념에 불과한 '순수성' 을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추상미술이라는게 많은 이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들마이어는 추상미술을 '인간 행위의 근본을 무시' 하는 '사이비 종교와 같은 비교(秘敎)적인 예술'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pp 21)  

 

 

  근원을 향한 열망  : 표현주의

 

 에밀 놀데, <황금 송아지 주위의 댄스>  1910년 

(pp 29 수록)  

 

20세기 초 독일에서 등장한 표현주의 미술은 화가의 감정 또는 화가를 둘러싼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의 순수함을 표현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표현주의 소속 화가들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들어내고, 원시적이면서도 격앙된 색채를 통해서 근원적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들마이어는 오직 순수함을 추구했던 표현주의의 구호에 모순을 지적한다. 인간이 더욱 순진해지기 위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무의식에 숨겨진 어두운 심연으로까지 파고들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전쟁이 남긴 무력감과 허무주의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실망과 동시에 예술적 변질감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표현주의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몇몇 표현주의 화가들은 '11월 그룹' 을 형성하여 정부의 후원 밑에서 활동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의 표현주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고 키르히너 같은 화가는 자신의 예술이 그토록 믿어왔던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 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그리고 에밀 놀데나치당에 가입함으로써 표현주의 예술을 다시 한 번 부흥시키려고 하였지만 놀데의 정치적 전략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훗날 나치의 히틀러는 표현주의 예술을 '퇴폐예술' 로 낙인찍어버렸다.  

 

 

  광기에 대한 호기심 : 다다와 초현실주의   

 

 

조르조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년  

(pp 217 수록)  

 

키리코의 작품에서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어떤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듯하다.  엇갈린 원근법,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정체불명의 광원(光源)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로운 분위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수수께끼 같은 '경이' 를 보았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pp 218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다 초현실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다다는  본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나 전쟁 이후에 형성된 무의미함 그리고 비합리성, 반도덕을 강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들을 부정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전쟁 이전까지 예술작품이 외적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으며 부조리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에 조롱과 경멸하는 동시에 재앙의 시대를 살아나갈 수 있는 묵시론적 광기를 통해서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가치와 형식을 거부하려는 다다는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변화됨으로써 '다다' 로서의 고유한 무정부주의적 의미가 퇴색된 채 하나의 예술운동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다다 특유의 허무주의만으로 예술의 본질을 찾을 수 없다는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라는 새로운 예술적 이념을 주창하였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 또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할법한 낯선 꿈의 세계 그리고 광인의 착란 증상이 만들어낸 광기의 세계야말로 전쟁에서의 정신적인 해방과 예술로써의 진정한 창조 상태로 보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역시 예술의 내재적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광기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이 진정 '광인' 이 아닌 이상 초현실주의적 예술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정신 분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구축의 의지 : 구축주의, 바우하우스

 

 

 블라디미르 타틀린,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최초 모형,  1920년 

 

시대가 가면 갈수록 현대미술은 더욱 더 새로운 유행의 예술사조들이 등장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예술가들은 예술의 순수함을 찾고자 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 기술, 기하학' 과 같은 기계 역학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러시아 구축주의의 주요 멤버로 활약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철판, 유리, 철사 등에 의한 공간구조에 창안하여 약 400 m 높이의 경사 나선형인 철골구조물인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계획하였다.  당시 철물이 부족한 소비에트 체제의 러시아 재정 상태로 인해 타틀린의 원대한 꿈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인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하여 '기술적 구축의 예술' 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그후 기술과 예술의 만남은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미술에서 추구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독일 데사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건물 

 

'기술과 예술의 만남' 이라는 현대적 예술적 인식은 독일에서도 정착되기 시작하는데 러시아에서 건너온 바실리 칸딘스키(칸딘스키 역시 러시아 특유의 구축주의 예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와 파울 클레 등을 중심으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Bauhaus) 라는 조형예술 전문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과 예술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교육에 치중하였다.   바우하우스에 소속된 학생들과 교수들은  오늘날 산업적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미래' 를 위해서 '과거' 로 돌아간 현대미술  

결론적으로 제들마이어는 이 네 가지 근원으로 인해서 현대예술은 단순한 비(非) 예술로 전락, 역설적으로 자신이 기피하고자했던 예술적 가치와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자기모순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원인으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황폐하고 부조리한 현대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그릇된 우상숭배를 오직 예술에서만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현대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파괴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급진적인 혁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제들마이어는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예술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진정한 조건으로는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라' 는 철학자 셸링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복음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정신' 이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pp 33)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과거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예술 '보수' 주의자다운 결론이다.  저자 역시 현대예술의 자기모순과 이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린 제들마이어의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만 가지고 그가 예술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섣부른 결론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평소에 '진보주의자' 로써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독자들에게는 '예술' 에서만큼은 보수적인 관점에 동의하는 저자의 모습이 흥미로울 것이다.  저자가 말한대로 이 책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면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예술의 진면목을 알게 되며 제들마이어의 예리한 분석에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비록 '모더니즘' 예술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제들마이어의 분석만을 가지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보수' 와 '진보', 상반된 두 가지 관점으로 현대예술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책의 구성면에서 아쉽게 느껴지지만 복잡하면서 어렵다던 현대예술의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들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도둑 2011-09-15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나요?.,,,
결국 현대미술도 '낯설게 하기군요... 작가 마음대로, 보는 사람 마음대로, 참으로 불칠전한 것이 현대미술이 아닌가 싶네요... 진중권의 미학세트를 사놓구선 포장지를 아직 뜯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걸 글을 읽으면서 생각났어요. 사이러스님의 글은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군요. 게으론 독자 다녀갑니다..^^

cyrus 2011-09-15 16:30   좋아요 0 | URL
네, 올해 연휴에는 맛있는거 많이 먹고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연휴가 끝나도 여기 대구는 무척 덥네요. 물론 꽃도둑님이 사시는 곳도
더우시겠죠? ^^

stella.K 2011-09-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대단하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 쓸 것 같고,
뭐라고 쓰긴 써야하는데 난감해.ㅠ

cyrus 2011-09-21 16:03   좋아요 0 | URL
책의 주요 내용들만 뽑아서 정리한거랍니다. 솔직히 인문, 과학, 예술분야
책이 리뷰나 서평으로 쓰기에는 쉽지 않은거 같아요. ^^;;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한계  

어린 시절 TV 앞에 앉아서 즐겨보던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물론 세상물정 몰랐던 어린이라서 만화라면 무슨 내용이든지 간에 보곤 하였다.  그리고 맨날 비디오방에 들러 '후레쉬 맨' , '바이오 맨' 등 지구를 지키는 알록달록 색깔 용사들의 등장에 환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린 시절에 만화, 비디오만 즐겨 본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들이 TV를 시청하는 습관이 부모의 교육과 시청 취향에 따라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실인가보다.   

어머니는 동물을 좋아하시는 편인데 저녁 때만 되면 하던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 보시곤 하였다.  오늘날에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많이 방영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동물이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이라면 '동물의 세계' 와 지금은 방영되지 않은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둘 뿐이었다.    '동물의 세계' 같은 경우에는 만화가 전파되는 시간대랑 겹쳐서 잘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같은 경우에는 온 가족이 집에 모여 함께 볼 수 있는 시간대(저녁 8시쯤에 한걸로 기억하고 있다)라 볼 수 있었다.   '동물의 세계' 는 다큐멘터리라서 유익한 내용임에도 지루할 수도 있지만 '퀴즈탐험' 같은 방송은 동물의 신비로운 생활방식들을 퀴즈라는 오락적인 요소를 통해서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 당시로서는 유익한 내용을 다룬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요즘에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와 같은 프로그램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TV 동물농장' 을 중심으로 동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소개하는 동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동물들의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한 생태 환경을 소개하기에는 범위가 협소한 감이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듯이 요즘 시청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아주 거리가 먼 아마존 밀림의 '동물의 세계' 보다는 자주 볼 수 있는 친숙한 강아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TV 동물농장' 을 즐겨 볼 수 밖에 없다.   r그리고 사람들이 '동물의 세계' 를 즐겨 보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큐멘터리에는 버라이어티에서 볼 수 없는 웃음 코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TV를 통해서 동물의 생활환경을 알기에는 당연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보니 브라운관에 비치는 동물의 모습은 실재에 가깝기보다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희화화하는 장면 위주로만 가공, 편집되기도 한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동물의 생태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동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의도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동물의 생태를 '인간' 위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동물의 눈으로 동물의 생활을 바라보기

최재천 교수는 인간을 동물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강의내용을 담은 <인간과 동물>에서 동물의 행태와 오묘한 자연 간의 조화를 분석해주며, 인간이 동물의 세계를 이기적인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만든다.   구경거리, 포획 대상, 돈벌이 수단으로 보아온 동물의 세상를 자연 그대로 이해하고 환경 친화적인 태도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동물들의 의사소통, 사회생활, 성생활 등을  인간의 생활과 비교해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행동은 ‘어떻게’ ‘왜’ 그런지를 설명하고 있다. 

책에 소개된 동물들의 생활 모습과 실험 내용은 TV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중들을 위한 강의 내용답게 어렵지 않을뿐더러 흥미롭게 읽혀진다.  그리고 몇 몇 내용들 중에는 인간의 생활과 유사한 것도 있다.

 

  

원앙 부부는 금실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 원앙은   

일부다처제이므로 수컷 원앙은 여러 명의 암컷 원앙을 아내로 두고 있다.

 

스웨덴 행동생태학자 앤더슨은 참새만한 몸집에 꼬리가 아주 긴 천인조란 새를 대상으로 기발한 실험을 했다. 앤더슨은 이 새 암컷이 어쩌면 수컷의 꼬리를 보고 짝짓기 상대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가정을 세웠다. 일군의 수컷에겐 꼬리의 절반을 잘랐다. 또 다른 집단에겐 자른 꼬리를 붙였다. 그리곤 두 집단간 암컷 사이에서 인기를 비교했다.  

각 영역 안에 둥지를 튼 암컷을 세어 본 결과, 꼬리를 잘린 수컷은 정상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암컷을 맞아들였다. 반면 꼬리를 붙여준 수컷은 훨씬 많은 암컷을 얻었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엄청나게 긴 꼬리를 만들어 줬더니 암컷들이 수컷의 모습에 정신을 못차린 것이다.

천인조 실험을 통해서 비추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원앙의 이야기와 배치된다.  원앙 수컷은 아내와 함께 다니다가 다른 암컷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미를 한다. 물론 아내가 보는 앞에서다.   원앙 사회에서 수컷은 자기 배우자는 지키면서 남의 아내는 빼앗으려 한다. 오리 종류의 새는 모두 그렇다고 한다. 일부일처제라고 믿고 있는 많은 새들이 사실은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원앙의 생활만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컷이 다 원앙 같지는 않다. 해마는 교미를 하고나면 암수가 뒤바뀐다.  해마 사회에서 수정이 되면 암컷은 수정란을 수컷의 배주머니로 넘겨준다. 해마 새끼들은 자기 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빠 해마는 새끼를 키워서 다 자라면 바다로 떠나 보낸다. 그 사이 엄마 해마는 다른 수컷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또 넘겨주고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    

'인간' 의 시각으로 원앙과 해마의 사례를 본다면 수컷 원앙과 암컷 해마가 단지 바람둥이라서 짝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의 교미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 생활환경에 적합한 교미를 하고 있는 것뿐이며 이들이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생태적 과정이다.
 

  

 

  

동물의 사회에서도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동물이 존재할까? 

개미와 진딧물의 예를 보자. 개미는 진딧물의 단물을 빨아먹는데 진딧물에서는 아주 작은 방울이 가끔 삐죽삐죽 나온다.  개미 입장에서는 힘들게 단물이 나오는 진딧물 뒷꽁무니만 바라봄녀서 감질나게 단물을 먹느니 그냥 진딧물을 통째 삼켜버릴 수도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미의 이런 습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는 진딧물을 살려놓고 계속 거기서 단물을 빨아먹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진딧물을 통째로 잡아먹지 않는다. 이런 방식을 택한 개미들이 진딧물을 바로 잡아먹은 개미보다 더 많이 번식하면서 그런 습성이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개미도 인간처럼 어떤 상황 앞에서 다양한 전략을 세우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인간이 지구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일상에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물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삶의 지혜  

인간은 상당히 모순적인 동물이다. 일본이라는 타국에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故 이수현 씨의 실화처럼 아름다운 일을 하는가 하면,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켜 대량 학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늑대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만 상대를 적당히 위협하는 수준이지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인간이나 몇몇 동물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런 절제된 듯한 동물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해 있는 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종족 번식 또는 종의 유지를 위한 행동이다. 

 

우리에게는 공존의 지혜가 조금 부족한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잇속대로 나무를 마구 잘라내고 동물을 죽이면서 스스로 환경의 위기를 자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개미를 비롯한 여러 동물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들이 진화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공존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 인간만 독불장군처럼 영원히 살 수는 없지요. 남을 배려해야만 우리도 사는 것입니다.    

- 최재천 <인간과 동물> pp 229~230 - 

  

그동안 인간은 인간의 시선과 입장으로 동물을 '오만과 편견' 으로 볼 줄만 알았다. 책을 덮고나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한 시선이 머쓱하게 느껴진다. 책에서 보여 준 동물의 세계는 인간 세계의 판박이나 다름없다. 정치와 사랑과 생존 전략이 숨 가쁘게 충돌하는 세계가 바로 생태계다.  <인간과 동물>생생한 사진이 곁들여진 21세기 이솝 우화를 읽은 듯하다.

인간은 무엇보다 인간들과 공생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사는 인간관계를 떠올려보면, 인간의 삶이야말로 다방면의, 가장 정교한 공생의 원리가 펼쳐지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사거나 파는 것도 결국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나 식물과의 조화로운 공생 관계를 조작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발상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난다. 힘을 가진 인간이 약한 인간을 착취하고 관계를 조작하는 현상들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려 한다. 인간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자연과의 관계를 이기적으로 변질시킬 때, 그 해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처럼,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착취하는 관계에서 해는 결국 착취자들에게 돌아오게 되리라는 교훈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얼핏 보면 손해 보는 것 같은 이 말은 공생의 원리가 보여주는 과학적인 진리이기도 하다.공생의 원리로 개미와 진딧물과 같은 약하고 작은 생물들이 오랜 세월 생존해온 비결을 우리 인간이 머리숙여 배울줄 알고 되새기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최 교수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알면 사랑하라' 가 아닌가.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10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9-11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상이 그 무엇이든 좋은 말씀이죠!
추석인사 고맙습니다~~~
보름달 구경은 어렵다지만 즐거운 일 많은 추석되면 좋겠습니다.
추석이 지나면 열공모드로 들어간다니 응원합니다!!

cyrus 2011-09-14 17: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응원을 해준만큼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

2011-09-11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1-09-1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제일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은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진행하는 '늘푸른 인생'이예요. 거기 나오는 어르신들 얘기하시는 거 보면 정말 할아버지들은 정말 한결같이 할머니 속 썩이고 바람 나고 노름 하고 가산 탕진하고 그러면서도 자손은 많이 낳고...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제나 한세상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프로그램이예요. 바람을 피건 게으름을 피건 노름을 하건 어쩌건 아무튼 방송에 나와 정말 그렇게 한마디 하실 수 있는 분들은 어쩌니 저쩌니 해도 결과적으로는 함께 살고계시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 드네요. 우리도 알라딘 서재에서 오래 오래 함께 '공생'하기루해요. 네?^^

cyrus 2011-09-14 17:22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이상용 씨가 진쟁하는 우정의 무대를 봤어요.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군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였죠 ^^;;
TV 속 군인들의 모습과 충성하는 거수 경례하는 모습이 멋져보였는데,,
어른이 되면서 실제로 군인 생활을 해보니깐,, 제가 어렸을 때 너무
한참 잘못 생각했더군요 ㅎㅎ

'공생' 이라는 표현,, 이렇게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 생활을 비유하는데도
적절하고 좋아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5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앙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요즘은 꽤 알려졌더군요.사진의 원앙수컷의 저 현란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cyrus 2011-09-16 18:57   좋아요 0 | URL
실제로 원앙 수컷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이쁘더군요. 그런데
제 주위에는 원앙 부부를 잉꼬 부부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더군요, 심지어 화려한 깃털의 원앙 수컷을 암컷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48   좋아요 0 | URL
이쁘고 화려하면 암컷일 것이라는 편견이죠! 사실 사람의 암컷(여자)중에서도 못생긴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자는 다 이쁘답니까? 그리고 남자들의 아름다움도 대단한 거죠.
 

   

 

 

 

 

 

 

 

 

제군이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주기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불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 보자.  

-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 조세희 -

   

 

  두 명의 나폴레옹  

 

 

 

 

 

  

    

 

 

1804년 7월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1769~1821)은 같은 해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나폴레옹은 이 역사적인 행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고 싶었는지 자신의 밑에서 전속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에게 맡겼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 자코뱅 당원 소속으로서 혁명에 가담하였으나 당시 자코뱅당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1758~1794)가 처형당하여 권력이 몰락당하자 투옥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급직적인 혁명파들이 하나씩 숙청당하는 피바람 속에서도 다비드는 기사회생하였다.  제1통령 시절이었던 나폴레옹에게 종용되어 전속 미술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다비드의 인생은  커다란 반전을 겪게 되었다.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자코뱅파의 화가였다가 이제는 프랑스 전 지역을 다스리는 절대왕권의 권력자에게 총애를 받는 '왕의 화가' 가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절대권력을 누렸듯이 다비드 역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프랑스 화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7년 

  

나폴레옹은 다시 다비드에게 그의 승리의 행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1804년 12월의 노트르담 대관식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화려함이 극치에 이른 행사였다.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인물은 모두 이 성당에 모였다.   교황 피우스 7세도 참석했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표를 보냈으며, 장-프랑수아 르쥐외르는 특별히 음악을 작곡했다.  교황은 나폴레옹을 축복하여 고요한 성당 안에서 "황제 만세" 를 외쳤다.   다비드는 이 장면을 <조세핀의 성사 1807>라는 제목으로 1807년 11월에 완성했으며, 이것을 "나의 탁월한 주군에게" 바쳤다.  나폴레옹은 환호작약하여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다비드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위를 수여했다.  그는 다비드의 가슴에서 훈장을 꽂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당신 덕분에 프랑스에 고상한 취향이 되살아 났소. "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  

  

그러나 다비드는 이 대관식 장면을 한 장의 스냅 사진을 촬영한 것처럼 즉석에서 바로 그려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당시 승리의 도취감이 하늘에 찌를 정도로 위풍당당하였지만 주변 유럽 국가들과 교황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썩 달갑게 여지기 않았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영웅, 단 한 사람을 위한 성대한 잔치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일부  

   
 

중앙에 특별히 마련된 좌석에 앉아 있는 귀부인이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관을 씌우려고 하는 나폴레옹의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시 로마 교황 피우스 7세(1742~1823)이다.   

 
   

 

프랑스의 '영웅' 이자 '절대권력자' 는 장엄한 대관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다비드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실제로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를 중앙에 그려넣으라고 하였고 자신보다 연상인 황후 조세핀을 우아하고 젋은 '영웅' 의 아내로 미화하여 묘사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다비드가 그린 대관식 장면 속에 압권은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부인 조세핀에게 직접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양손에 왕관을 쥔 나폴레옹의 모습에는 황제로서의 위엄이 묻어나 있다.   

나폴레옹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피우스 7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기존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교황이 직접 황제가 될 사람에게 왕권을 수여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비드의 그림에는 교황은 그저 황제 뒤에 앉아 있을 뿐이다.  

피우스 7세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과의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에 로마 가톨릭교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화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종교협약은 유럽 왕권에 대한 교황의 지위가 한 단계 격하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등장은 곧 왕권이 교황의 지배권으로부터 독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그림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황은 나폴레옹의 원맨쇼를 앉아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대관식을 참관만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관식이 치뤄진 뒤 2년 뒤에 나폴레옹은 교황의 교회령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여 교회령의 병합을 선언, 교황 피우스 7세를 체포함으로써 오랫동안 유럽 왕권을 군림하였던 교황권의 지위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만다.  

 

<프랑스 초대 황제 나폴레옹의 대관식 행렬> 제임스 길레이, 1805년  

  

실세를 잡은 나폴레옹 황제는 자신의 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반동적이거나 풍자 신문을 폐간할 것을 명하고 심지어 자신의 외모에 풍자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왕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에 다비드를 비롯한 화가들은 그를 신격화하는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힘이 미치지 않는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젋은 영웅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할 수 있었다.   영국의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1756~1815)는 다비드가 대관식 장면을 제작하고 있었던 무렵에 마찬가지로 똑같은 주제의 장면을 그렸는데 다비드의 그림과는 다르게 대관식 장면을 희화화하였다.   길레이는 단순히 영웅인마냥 자아도취에 빠진 황제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불만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나폴레옹의 등장에 환호를 하는 당시 유럽 국가와 교황의 이중적인 태도까지도 조롱하였다.   

 

제임스 길레이는 추종자, 아첨꾼, 죄수를 이끌고 점잔빼며 걸어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황제는 잔뜩 부풀어 올라 우쭐거리고 있다.  교황 피우스 7세도 등장하지만 다비드의 그림에서와는 달리 길레이의 교황은 가운 밑에 성가대의 소년을 감추고 있는데, 이 소년은 가면을 벗고 악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중략)   행렬을 나폴레옹이 정복한 프로이센,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표들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들 뒤에는 족쇄를 찬 병사들의 행렬이 따라온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백성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준 황제가 아닌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  

 

길레이의 풍자화가 유럽 곳곳에 유행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희화화한 그림을 프랑스로 반입하는 자를 재판없이 수감하도록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영국 출신의 풍자화가가 그린 단 한 점의 그림 때문에 나폴레옹은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일까?    그는 또 영국을 침공하여 정복하게 된다면 반드시 제임스 길레이를 찾아내겠다고 엄포를 할 정도였다.  

 

 

  거짓말같이 오고 만 해방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 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는 신탁 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는 카이로 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 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의 1면 헤드라인에는 '일본 항복, 전쟁 끝!' 이라고 간결하게 알림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기사에는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에서 "위험과 욕심으로부터 지배당했던" 영토들도 해방될 것이다. 한국의 독립 또한 약속되었다. ' 라고 게재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재미교포단체들이 발간하는 항일 민족 기관지 신한민보에는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중국의 주석 장제스 그리고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이 보낸 한국의 독립에 대한 축전까지 게재되었다.   

  " 한국은 당신들의 승리를 얻었고 한국의 자유가 속히 올 것을 위하여 축하합니다. " 

 

하지만 광복의 기쁨을 먼저 만끽해야할 한반도에서는 외세 언론 속의 반응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그리고 그 날의 1면 역시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수 소속 기관지인 매일신보경성일보는 일본의 항복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기보다는 여전히 천황제를 존속할 것을 알리는 내용들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알리게 된 것은 경성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중계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을 통해 뒤늦게 알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복" 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 는 말이 곧 항복 선언이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중에서 - 

 

엄명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항복 선언은 곧 조선의 독립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조선인들은 해방의 감격을 길거리에 나와 만끽하였지만 라디오를 소유하지 못했다거나 '항복' 이라는 단어를 표현하지 못한 천황의 항복 선언에 시민들은 여전히 광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와 같은 친일 언론들은 실제로 벌여진 일제의 몰락 사실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2~3일 후에야 해방을 알게 된 지역이 많았다.  (강준만, <한국 근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pp 30)  

원로 여류 시인 홍윤숙의 표현대로 8월 15일의 해방은 '참으로 거짓말같이 그날은 오고 만 것' 이었다.  (강준만, pp 25)   36년 간 일제의 억압에 시달려야했던 조선인들은 갑자기 찾아온 해방에 반신반의하였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찾아온 조선의 해방은 또다른 강대국들의 등장으로 인해 광복의 기쁨은 단 하루, 잠시뿐이었다.   이북 38선 전역을 점령한 소련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은 38선 분할을 제기하였고 남한에 미 군정이, 북한에는 소련이 점령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자주적 정부 수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미국은 조선의 자주성 존재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광복을 맞은지 66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의 극우파들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안과 겉'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된 첫번째 단편 '뫼비우스의 띠' 에서 수학 교사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수학적 개념을 학생들에게 알림으로써 안쪽과 바깥쪽이 구별되지 않은 이 요상한 형체와 같이 우리가 진실이라 여기는 뜻이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음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흑백 논리,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왜곡된 사고와 사회적 시선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겉으로 구분을 할 수 없듯이 하나의 사건만을 가지고 무조건 옳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왜곡되고 고집된 생각을 형성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다양한 이면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며 올바른 판단력과 비판적 태도를 통해 현상을 바로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 을 가짐으로써 다양한 학문을 안다고 해서 그 경험만으로도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과 현상 속에서 숨겨진 그 내면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이제는 '아는 것' 이 힘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이야말로 복잡다단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요구되는 진정한 힘인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 에서 교사가 수업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끝으로 이 글 역시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 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 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중략)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 

 

  

 

* 관련 동영상  

EBS e지식채널 <두 개의 시선> (다비드와 길레이의 그림) 

                    <그날의 기록> (8.15 광복)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09-10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주 유익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뫼비우스의 띠 어딘가에의 바깥, 혹은 안쪽에서 반대편을 못 보고 있겠지요?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그 띠를 걷다보면 지금 반대쪽에 있는 것을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거겠지요.^^

cyrus님 그간 여러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추석맞아 전합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cyrus 2011-09-10 18:19   좋아요 0 | URL
<한국정부론>이라는 수업 첫 시간에 보여준 동영상에 대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그 수업은 매주 수업내용을 피드백해서 정리해서
교수님 홈페이지에 올려야하거든요. 동영상을 보면서 하나의 현상을
한쪽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추석 인사 댓글을 읽으면서 맥퍼님의 서재를 들리지 않은게 오히려
맥거핀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드네요, 영화는 제가 관심 있는거만 보는
편이라 맥거핀님 서재에 댓글을 남지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

맥거핀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차세계대전은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한 날을 시작으로 잡습니다.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고 하지요.단,통칭 2차세계대전은 태평양전쟁을 포함하여 말합니다.독일이 1945년 5월 항복하지만 일본은 8월에 항복하기 때문에 이 날을 2차대전이 끝났다고 하지요.물론 그날을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고도 합니다.

cyrus 2011-09-10 18:2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2차세계대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발하고 진행되었는지 몰랐어요.
그저 영화에서 소개된 유명한 전쟁 이외에는 모르는게 많아요.
댓글이나마 노자님께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자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2011-09-1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