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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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어야만했던 절망적 자아, 기형도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 '식목제' 중에서 -

   

고등학생 때, 국어 수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기형도라는 시인을 알게 된 시가 바로 '식목제'였다. '식목제'는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비교적 긴 내용에 속하는 편이다. 이 시를 알게 된 덕분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시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고도 불행한 죽음이라는 이미지로 결부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인식 탓인지 당시 고등학생인 나로써는 기형도의 시가 너무 어둡고 절망적인 내용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느꼈다. 비록 시인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만, 내용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엄마 걱정'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년 시절 속 어머니에 대한 강렬했던 기억'을 묘사하는 시로만 생각하겠지만 실상 이 시에서도 시인 특유의 어두운 심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식목제'라는 시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과거의 삶을 회상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화자(시인)은 살아가면서 늘 마주하게 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래, 즉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기형도의 시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 즉 '희망'이라는 것이 배제되어 있다. '기형도'라는 이름의 육신은 썩어 사라졌지만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내면적 자아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잎 속의 검은 입>이라는 세련되면서도, 그의 불행했던 생애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죽음' 그리고 '가난의 고통'으로 기억된 시인의 유년 시절 

기형도의 시가 어둡고,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인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그의 시 중에서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은데 어린 기형도는 이른 나이에 '죽음'이라는 현상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을 체험해야만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 때부터 시인의 모친이 가장 역할을 했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 '위험한 家係. 1969' 1연 중에서 -

  

시인의 모친은 어린 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시장통으로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 장터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은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다가 빈방에서 혼자 엎드려 훌쩍거렸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유년 시절을 쓴 시 중에 유독 추운 겨울로 배경을 한 내용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불안한 심성을 지니기 시작했던 어린 기형도에게는 '문풍지를 더듬던' 겨울 찬 바람은 자신의 연약한 심성을 언제 해칠지 모르는  '죽음' 못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마음이 약한 어린 기형도를 보호하기에는 어머니의 존재로도 부족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

 

유년기를 지나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되는 사춘기 시절마저도 불행하게도 죽음의 신은 시인의 생애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중학교 3학년이던 기형도는 누이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맛보았으며,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의 내면적인 고민은 '시'로써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모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중략)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야한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시인이 되고서 4년 남짓 발표한 작품이라곤 많지 않았다.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주목은 받았지만 20대 중반인 시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짧았다. 그의 유고 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인의 작품세계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불안과 죽음이다. 주식처럼 가지고 있는 안개로 인한 그의 불안은 개인적 불안을 넘어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상까지 가감없이 그려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승에 남기고 간 문학의 결과물보다는 죽음으로서 사랑받는 시인은 이상, 윤동주 그리고 기형도 밖에 없다. 세 명의 시인 다 요절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인. 시를 쓰던 날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토록 자신의 삶 주변을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노렸던 죽음의 신과 대면했던 그 순간, 시인이 세상을 향해 '안녕'을 고하는 그 날. 그 후로 가엾은 시인의 사랑은 영원히 빈 집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기형도 시인은 참으로 아픔이 많았던 시인이었다. 스스로 지닌 아픔은 견디다 못해 단 한 권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은 아픔들은 어찌할 것인가.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인의 지인들과 독자들은 기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강산이 변할수록 시간 앞에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시인의 불안하고도 슬픈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그가 이승을 떠나고 난 뒤에 태어난 나 같은 20대의 세대들은 기형도라는 이름의 석 자가 남기고 간 가슴 아픈 '검은' 시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시를 읽기에는 우리 세대들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혹은 어둡고 우울한 시인의 시구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줘야 한다. 삶에 있어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시인은 '거리의 상상력'이 주는 고통을 사랑함으로써 짧은 생애동안 수십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시라는 '가장 위대한 잠언은 자연 속에 있음'을 믿었다. ('詩作 메모' 중에서)  

그는 고통스러운 창작 고통 속에서도 희망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88만원 세대'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형도의 절망을 통해 희망을 향한 안간힘의 줄기를 찾아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부른다면 언제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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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그램 (Ego Gram)   

이번 주 월요일에 이고그램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게 되었다. '이고그램'이란 개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지 심리학적인 검사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이고그램 검사를 하기 전에 먼저 이고그램의 탄생 및 배경부터 시작해서 이고그램 검사 내용을 뒷받참해주는 TA 성격이론까지 알고 있어야하는데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서론이 너무 길 우려가 있다. 이고그램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이고그램'이라고 쳐 볼 것. 한국이고그램연구소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데 이번에 필자가 한 검사도 그 연구소에서 만든 것이다.   

검사 과정은 간단하면서도 은근히(?) 까다로울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처음에는 지능검사르 하는 것처럼 수십 개의 문항을 읽고 그 문항에 맞는 답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문항은 이런 형식이다.  

   
 

1, 나는 항상 창의적인 발상을 잘 한다.        

(1) 매우 그렇다.  (2) 그렇다.  (3) 보통    (4) 그렇지 않은 편이다.    (5) 매우 그렇지 않다. 

 
   

이런 형식의 문항을 보고 체크한 다음, 체크한 문항에 매겨진 점수를 합산하여 자신의 성격 유형을 분석할 수 있다. (점수 합산 과정 역시 세부적으로 설명하기에는 길며, 계산하는 데 취약한 사람에게는 조금은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문항 점수를 합산한 수치를 여러가지 유형의 분석 결과 항목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먼저 구조에 따른 기능적 성격 유형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출처: 한국이고그램연구소

  

 

 분석 결과, cyrus의 성격 유형은...? 

그래서 점수 합산 결과, 필자가 나온 성격 유형은 다음과 같다.    

 

CP: 20점, NP: 41점, A: 44점, FC: 36점, AC: 33점  

 

CP : 적당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위치에 따라 경우에 맞게 행동하고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줄 아는 사람이다. 비판적, 통제적 성격이 한국인의 평균에 속하며 한국적인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평범한 위치에 있다.   

NP : 온정적이고 관용주의자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며 일방적이다. 타인이 무엇인가를 시도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주려 하기 때문에 자립심을 해치기 쉽다.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이용당하거나, 타인 중심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A : 현실적이며 철저한 합리주의자이다. 그러나 감정이나 감수성이 둔해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삶을 즐기지 못하고 정서가 결핍된 기계와 같은 사람으로 비춰 줄 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일에 몰두하여 마음이 차갑고 사실에 입각한 대화로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FC :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재미와 재치로서 분위기를 주도하며 행동이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창조성이 풍부하다. 자신의 생각이나 바람을 곧잘 행동으로 옮기고 명랑하며 적극성이 있다. 그러나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현실을 고려하는 신중성이 떨어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AC :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대해 민감하며,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른다. 감정 조절력이 있고, 선한 이미지를 타인에게 심어준다. 순응적, 소극적, 비대결적인 성격이 한국인 평균에 속하는 위치에 있다.

 

이 검사에서는 TA 성격이론에 따라 인간의 마음 구조를 세 가지 자아 상태로 분류하고 있다. P, A, C로 구분하고 있다. 

P는 Parent의 역자로써 아버지의 자아상태, C는 Child, 어린이의 자아상태를 뜻한다. 필자는 A 구조결과가 나왔다.  

 

 A 구조편향  

 (여기서 A는 Adult, 즉 어른의 자아상태를 말함) 

 

일상생활에서 사실에 입각한 판단과 행동으로 논리적이며 이성적임.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행동하며, 계획을 세운 후 실행에 옮김.

냉정하고 사실이나 상황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탁월하지만,고민이 있어도 감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드뭄.

자타에 대한 엄격성이 부족하나,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 목적지향적 사고를 지님.

합리적이긴 하나 지적편중으로 무미건조한 대화와 정감이 없는 대화 방식을 보임으로써 무감정적임.

기계적이어서 상대에게 차갑고 냉정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음.

어떠한 일이든 확실한 목적과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불안하거나 안심이 되지 않는 경향이 있음.

주위에는 이성적, 합리적, 논리적인 태도를 취하는 A 구조편향인 사람이 많음

 

자아 형성 결과 분석 내용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이성적', '논리적'이라는 말이 눈에 띄기는 하는데, 특히 '기계적', '무감정적'이라는 단어만큼은 눈에 거슬렸다. 자아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단점적인 면을 알게 되어서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검사를 하고난 뒤에 친구들과 함께 서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대부분 친구들에게는 C 유형이 많이 나왔다. 나는 A 유형이 나왔다고 하자 C 유형, 즉 유아기 자아를 가진 자들은 나에게 부러운 눈치를 주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필자 혼자서 진지하게 검사 결과에 생각을 해봤다. '성격면에서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고쳐나갈까?'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너무 합리적이며 기계적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그들의 입장도 생각해봤다.  

사실 필자는 군 입대 전만 해도 사람들 만나는 곳에 가면 대화가 별로 없었다. 특히 친구들 사이에서는 외모에 비해 행동이나 성격이 성숙하다라는 핀잔을 들을 때가 많았다.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기 전부터 먼저 생각을 하는 편이고 상대방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비판도 서슴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번 이고그램 검사 결과를 본 후, 상대방에게는 나의 그런 모습이 피곤하고 까다롭게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모습이 오래 유지하게 되면 감정 없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무감정적이면서도 기계적이라는 점을 이고그램 검사하기 전부터 알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지 자아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지금도 그 성격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출신 남자에게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 만나보려고 하거나 모임에 참석하면 많이 웃어보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서 비판을 하되 좀 더 온화하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만의 감수성 훈련  

 

 

 

  

 

 

 

 

몽테뉴의 <수상록> 중에 '슬픔에 대하여'라는 에세이가 있다. 이 글의 말미에 테뉴는 자신의 자아를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하다. 그리고 날마다 생각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pp 24)

 

몽테뉴의 표현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그리고 독서 습관이나 글을 쓰는 특성을 되돌아본다면 나 역시 어쩌면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한 경상도 남자일 수 있으며 1년 365일 이성의 생각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몽테뉴는 본인 스스로 자아의 특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죽기 전까지 이성적인 감상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에세이를 남겼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그의 멋진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감수성 둔한 몽테뉴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유한 성에서 평생 독신으로 독서와 명상 그리고 글쓰는 삶으로 선택해야했다. 

경영학, 특히 인사조직에 관한 분야에는 '감수성 훈련' 이라는 기법이 있다. 인간 관계의 개선이나 지도성을 양성하는 조직구성원을 위한 교육훈련 중의 하나이다. 이 훈련을 체험함으로써 자신들의 감정과 그 감정이 상대방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집단 상호작용 과정의 역학을 보다 잘 이해하게 만들어 결국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아직 감수성이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아직은 젊기에 얼마든지 감수성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감수성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시집이나 에세이를 읽어보는 중이다.  그리고 평소에 좋아했던 많은 그림이 곁들인 예술 관련 책들도 읽고 있다. 

몽테뉴는 평생 독서와 명상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서 혼자서 '이성'이라는 성(城)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감수성'이라는 성은 세우지 못했다. 인간의 마음이 끝이 없는 광활한 영역의 지대라고 한다면 그 곳에는 '이성'이라는 성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라는 성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날씨가 쌀쌀해진 지금, 우리륻 둘러싼 세상 역시 추운 날씨만큼 따뜻한 정이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해졌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감수성이 움츠려 들 수 밖에 없다.  이성이라는 적에 의해 감수성이 함락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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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12-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상도 남자들은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무뚝뚝함을 남성다움으로 여겨 계속 밀고 나갈 것이냐, 아니면 소통의 시대를 맞이하여 여성이나 어린이들과도 다정다감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남자로 변모할 것이냐 하는 것이죠. 영남출신 연예인들도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함과 마초 기질을 개성으로 내세우는 사람과, 이젠 경상도 남자도 바뀌어야 한다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더라고요.토크 쇼 같은 데 나와서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Cyrus 님은 어느 쪽인가요?

cyrus 2011-12-02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남성다움과 여성의 감수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성격으로 지니고
싶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남자도 너무 무뚝뚝한 것도 좋지 않다고 봐요.
시대 분위기의 흐름에 맞게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생각도 스스로
변화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
 
반 고흐의 정원
랄프 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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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만들어 낸 작은 천국, 정원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어딜까. 철따라 수많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새가 노래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풍요와 사랑이 넘치는 낙원의 땅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꿈의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꼭 천국으로 가기를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혼이 되어 소원대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무사히 안착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낙원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는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반드시 사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며, 현세에도, 또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천국은 꼭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상상의 공간에 불과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본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다.

우리는 훌륭한 자연 경관을 보게 된다면 '천국에 온 기분이 든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많은 이들이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자연 경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일부 몇 몇 인간들 중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원본 그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인간이 발명한 것이 바로 '정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돌, 물, 꽃, 나무 등의 자연재료를 통해 미적인 구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경관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인공적인 공간에 불과하지만 정원 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온갖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 꽃들의 아름다움과 각각의 존재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작은 천국'인 셈이다.  

 
 

 고흐의 정원을 아십니까?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묻어나 있는 정원은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틀리에(atelier)인 동시에 삶의 일부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지상의 천국’이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죽기 전까지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1922년경 

 

   
  모네가 그린 정원의 풍경과 우명한 <수련> 연작은 대부분 지베르니 정원에서 탄생된 작품들이다. 모네는 부인과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게 여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다음으로 모네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바로 지베르니 정원일 것이다.  
   

  
그에게는 지베르니의 정원은 단순히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의 장소 그 이상이었다. “내 그림과 꽃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할 정도로 모네라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간인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네에게 정원은 아내와 자식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었으리라. 모네가 세상을 떠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후세의 예술가와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명소가 되었다. 모네는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하는 법’을 이 정원에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고자 하였다. 특히 모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파 화가들 같은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정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사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정원의 풍경이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8년 

 

인상파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서 그 곳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반대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을 표현한 화가도 있었다. 그가 바로 ‘해바라기’ 연작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지금까지도 고흐가 남긴 작품들을 본다면 ‘해바라기’ 연작 이외에도 고달픈 일상을 끝내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자를 먹는 소시민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역동적으로 그려낸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까지 고흐라는 이름은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 보는 순간, 영원히 잊혀버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모네처럼 정원을 무척 사랑했으며 600여 점이 넘는 작품들 중에 정원의 풍경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군다나 외로운 독학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예술적 능력과 지향하고자 하는 미적 가치가 다르면 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외고집이 강했던 그의 인상을 생각한다면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원을 연관시킨다면 대조적인 느낌이 떠오른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에만 정착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프로방스, 아를, 뉘에넨, 오베르까지 한 곳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방황이 만들어 낸 방랑 생활 그리고 발작과 정신병으로 인한 병원 생활이 고흐의 인생 중 절반을 차지했다. 당연히 고흐에게는 모네처럼 정원을 딸린 집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가 정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흐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목사가 꿈이었던 그는 성격 부조화로 전도와 설교를 버리고 화랑점원 일을 시작하지만 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와의 불화로 젊은 생을 방황하다가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야 늦게 그림을 시작한다. 정식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그림도 어려서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흐는 렘브란트, 야곱 반 로이스달, 장 프랑수아 밀레 등 선대의 화가들의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아니 고흐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인생은 무척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고흐는 3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해보지만 연애로 결실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방황 속에서 혼란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고흐를 아껴주고 이해해주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조차도 고흐의 괴팍한 성격과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자신처럼 목사의 길로 가길 원했던 아버지로서는 화가로 전향하여 한 곳에 정착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난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가족 중에서 고흐의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동생 테오 밖에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  1889년 

(<반 고흐의 정원> pp 74)

 

외곬인데다가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고흐의 성격상 그 누구도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 발작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고흐를 더욱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흐는 차라리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성격에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이들이 살지 않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프랑스 아를에서 정신 발작을 일으킨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라는 지방에 위치한 정신병자들이 모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한다. 오랫동안 방황으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생의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요양원에 도착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요양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였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은 고흐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가두어 버릴 정도로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더욱이 불시에 그를 습격하는 발작은 고흐에게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간간히 정신이 온전히 들 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특히 병원과 요양소 안에 위치한 정원을 그리는 것이 고흐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오랫동안 병원과 요양소에서 생활한 환자들에게는 병원의 정원마저도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공간에 불과했지만 외출마저도 할 수도 없는 고흐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감옥 같은 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라고 정원의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정원은 아니었지만 고흐는 꽃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거대한 밭과 수풀이 자라고 있는 오베르의 전원적인 풍경에서부터 고흐와 친분을 유지했던 가셰 박사의 집 안 있는 작은 정원까지, 그가 남긴 수많은 데생과 유화 작품들 중에는 꽃과 나무를 그린 것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  <정원에 있는 마르게리트 가셰>  1890년 

 (pp 96~97)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질환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고흐의 예술을 인정해준 고흐에게는 몇 안 되는 친분적인 인맥 중의 한 사람이다. 고흐 역시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가셰 박사를 위해서 몇 점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가셰 박사의 집에 있는 정원의 풍경을 그린 적도 있는데, 마르게리트는 가셰 박사의 딸이다.

 
   

 

무엇이 고흐를 정원의 풍경에 매료되도록 했던 것일까.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흐에게 정원은 지옥 같은 삶에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자신만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 이제 나는 자연 앞에서 예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1월 중순, pp 33)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거친 인위적인 자연의 공간이지만 고흐는 정원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였다. 그에게는 정원은 자연의 모습을 탐구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정원은 도시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다. 그 어느 누구도 고흐의 그림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고흐는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만큼은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 이 정원이 나를 꿈꾸게 합니다 '

고흐는 정원을 단순히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평온한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자연이라는 조화로운 현상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리고 고흐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따사로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주게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을 회상하며>  1888년  

(pp 44~45)

   
  정원을 대상으로 그린 고흐의 그림 중 유일하게 상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고흐의 누이와 어머니이며 오른쪽에는 하녀가 정원을 가꾸고 있다. 고흐는 캔버스에 칠해진 보라색과 노란색이 어머니의 성격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단순히 정원에서 노닐던 기억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 포근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림으로나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의 고흐가 지낸 준데르트 지방에 위치한 목사관에는 정원이 있었다. 고흐의 어머니는 고흐와 그 밖의 자녀들이 집 근처의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고흐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테오를 포함한 다섯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고흐에게는 자연은 재미있는 장난감인 동시에 예술적 상상력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심각한 발작과 정신 질환 속에서도 고흐는 목사관의 정원의 모습 그리고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영원히 잊지 않았다.


“ 병을 앓으면서 다시 준데르트에 있는 집의 모든 방을 보았단다. 정원의 오솔길, 화초, 주변 풍경, 들판, 이웃, 묘지, 교회, 집 뒤쪽 텃밭, 묘지의 키 큰 아카시아나무에 튼 까치 둥지까지.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9년 1월, pp 15~16)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년 

(pp 104)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외곬 성격인데다가 때때로 찾아오는 정신적 발작으로 괴로워야했던 고흐에게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정(情)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런 허기진 애정 결핍은 정원을 통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회상하기에 이르면서 혼자서 외롭게 고독을 달래보려고 했다. 고흐에게는 정원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집이며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이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애인이며 그리고 가족이었다. 개인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는 따뜻한 정이 오고가는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같은 삶을 꿈꾸려고 했고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정원의 모습을 망각의 틈바구니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함으로써 고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정원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안락한 지상낙원이었다. 

   

 


 '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가 있는 채마밭> (부분)  1887년 

   (pp 15)

 

동생 테오와 닥터 가셰, 우체부 직원 룰랭이 고흐에게는 그나마 친분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지만 고흐에게는 그들과의 관계만으로도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애정 결핍을 채울 수가 없었다. 자살하기 전까지 수많은 편지를 교류함으로서 형제애를 돈독히 유지했던 동생 테오의 자화상을 단 한 점 그리지 않는 대신에 정원의 모습을 수십 점이나 그려낸 고흐의 창작 활동을 본다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과 떨어져 지내는 동생보다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정원에서 피어나는 말 못하는 꽃들이야말로 고흐에게는 친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장소에는 그 장소 특유의 환경적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인습적인 기법보다는 ‘자연의 언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강조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김춘수 시인이 쓴 시구처럼 고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정원 속의 꽃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꽃처럼 누군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했으며 ‘화가’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의미 있는 존재로 알아준 것은 오히려 고흐가 동경하면서도 행복한 기억들을 꿈꾸고자 했던 정원 속의 꽃들이었다. 해바라기 그리고 정원 속 꽃과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또한 고독한 예술가의 인생을 기억해주는 음악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고흐가 사랑했던 정원의 모습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고흐의 흔적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흐’라는 이름의 꽃은 시들지 않았다. 죽은 뒤에서나마 후대 사람들로부터 한 폭의 캔버스로 ‘자연의 언어’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예술적 염원이 인정받게 됨으로써 예술계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위대한 ‘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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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네의 수련 저 그림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첫 장면으로 나오더라고요. 진짜 아름다웠어요. 그림만큼이나. 저는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림이 그림이고, 나는 나이고. 암스테르담의 우중충한 거리가 생각나서 예전 사진을 들여다봤더니 렘브란트 미술관에도 갔더라고요. 그래서 렘브란트 다큐 찾아보고.. 요즘 그런 식. 뭔가 많이 공허해요.

cyrus 2011-11-30 23:43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사실 고흐는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꽤 많은 꽃과 나무들도 그렸더군요. 특히 아이리스를 그린 그림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아이리시스님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습니까? ^^;;
어제는 날씨가 좋다가 오늘은 갑자기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옆구리가 많이 춥더군요 ^^;;

꽃도둑 2011-11-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 새삼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넘쳐나요,. 저렇게 따뜻할 수가 있다니...

지금 고흐는 뭘하고 있을까요?
자신이 그리워하던 정원에서 거닐고 있을런지도...^^

cyrus 2011-11-30 23:44   좋아요 0 | URL
요양소나 병원 내부라면 먼저 쓸쓸한 분위기가 나기 마련인데
고흐가 그린 병원은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표현해서 그런지
꽃도둑님에게는 마음이 드셨는가보군요. ^^

맥거핀 2011-11-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그림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아지면서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누군가는 저거 관리한다고 고생좀 했겠네, 이 생각부터 먼저 드니, 이거 문제가 좀 있지요? (때로는 너무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이상한 공포심마저 들 때가 있어요.^^;) 아무튼 그림은 좋네요. 특히 <도비니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아주 좋네요.

cyrus 2011-11-30 23:46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정원 가꾸는 것도 쉬운게 아니죠.
저는 어렸을 때 정원 딸린 집을 가진 것이 꿈이었는데,, 식물 하나
가꾸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물 잘 줘야되죠, 햇빛 조절도
잘 해야되고,, 하여튼 관리해야될 게 많아서 수많은 식물이 자라는
정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정말 부지런하고 식물을 사랑하느 사람만이
가능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외투 한 벌을 지키고자 했던 러시아의 관리  

 

 

 

영하 40도를 오고가는 혹한기가 이어지고 있는, 사람 인적이 드문 한밤중에 러시아 뻬쩨르부르그의 거리에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아까끼라는 이름의 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특별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에 문제의 거리를 지나가게 된다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까끼를 만날 수 있다. 유령 아까끼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아채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요구를 한다. 

    " 난 네놈의 외투가 필요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마추친 사람들은 당연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외투가 필요하다고 고통스럽게 호소할 뿐이었다. 유령 아까끼는 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채 외투 한 벌을 찾는 데 뻬쩨르부르그를 배회하고 있던 것일까?  

아까끼는 죽기 전에는 관청에 근무했던 하급 관리였다. 비록 처세 능력이 부족한데다 비천한 신분 때문에 관리직으로서 많은 급료를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맡은 임무에 성실히 수행하면서 관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근검절약을 하면서까지 관리 생활을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화려한 외투 한 벌을 마련하게 된다. 평생동안 낡은 외투만 입고 지낸 아까끼는 오랫동안 모아놓은 수입으로 구입한 새 외투 한 벌이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수많은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새로 장만한 외투를 입고 나타나 그동안 하급 관리라는 직함 때문에 드러나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까끼에게는 새 외투를 입고 있는 순간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까끼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강도에게 새 외투를 도둑맞게 되었다. 그는 거리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들 심지어 상급 관리까지 찾아가 외투를 도둑맞은 자신의 사연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은 외투 한 벌을 도둑맞은 하급 관리의 사연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픈 사연이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까끼는 그 충격으로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러시아 특유의 겨울 날씨를 이겨내지 못한 채 외투를 찾고 싶어했던 아까끼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뻬쩨르부르그에는 자신의 외투를 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유령이 떠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외투를 찾지 못한 채 주위의 조롱 속에서 죽어 간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였다. 

 

    

 왕의 남자였다가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조선의 관리  

 

  

다산 정약용 (1762~1836) 

 

1762년, 명망 있는 벼슬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다산은 한창 젋은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입신(入身)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28세의 나이에 벼슬에 올라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쳤다. 거기에다가 그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 덕분에 정약용은 대왕의 최측근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부귀영화는 한순간에 바닷가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정조가 승하하고 난 후에 터진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사화(辛酉士禍)에 연루되면서 천주교도인이 많았던 정약용 가문은 한순간에 풍비박산나게 되었다. 다행히도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 때부터 기나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이 무려 18년 동안이나 이어질 줄은 다산 본인은 예감하고 있었을까?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잃어버린 그에게는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무척 고통스럽고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날 수가 없었던 외로운 시기였지만 후세 학자들에게는 실학 사상이 완성될 수 있었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다산(多産)할 수 있었던 위대한 시기였다.  

 

 

 조선의 관리가 러시아의 관리에게 해줄 수 있는 충언   

다산은 유배 생활을 지내는 동안 퇴계 이 의 글이 실린 <퇴계집>을 읽으면서 얻게 된 느낌을 단상으로 하루에 한 편씩 기록하였다. 기록의 결과물은 지금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는 이름의 저작으로 남게 되었다. 말 그대로 <퇴계집>을 읽으면서 느낀 맑은 생각들을 기록한, 다산 본인을 위한 개인적인 문집인 것이다. 

책 제목의 '청상(淸賞)'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맑은 생각들은 현대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전반에 대한 성찰과 충고를 담고 있다. 다산의 <도산사숙록>에는 인생의 대선배로써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의 체험에서 깨닫거나 성찰 뒤에 얻게 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수록된 몇 몇 단상들 중에는 고골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급 관리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도 충언을 해봄직할만한 내용이 있다. 비록 태어난 곳과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다르지만 관료 경험을 따져본다면 다산이 훨씬 선배격인 셈이다. 그리고 다산은 대왕의 총애를 듬뿍 받을 정도로 고급 관리로써 화려한 명예를 누려 본 적도 있다. 말단 하급 관리로 지낸 아까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도산사숙록>에서의 다산의 모습은 과거의 부귀영화를 회상하여 자랑을 한다거나 그 때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 화려했던 관리로써의 부귀영화 시절은 다산의 인생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다산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한 때 누리고자 했던 부와 명예는 한순간의 욕심일 뿐이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순간 자신에게 굽실거렸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다산은 보고, 느꼈던 것이다.  

'밤 한 톨'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단상에서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상실된 후 겪게 되는 인간의 상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밤 한 톨을 도둑맞은 어린아이의 심정은 외투를 도둑맞은 아까끼와 비슷한데다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점칠된 속세에 달관하는 경지에 이른 다산의 고고한 태도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우연히 한 어린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참새처럼 수도 없이 팔짝팔짝 뛰는 것을 보았다. (중략) 하도 참혹하고 절박해서 얼마 못 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무 밑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아아! 천하에 이 아이가 우는 것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저 벼슬을 잃고 세력이 꺾인 자나, 재물을 손해보고 돈을 다 써버린 자, 그리고 자식을 잃고 슬퍼 실성할 지경이 된 사람도 달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밤 한 톨의 종류일 뿐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 중에서, pp 30)

  

다산은 한 때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벼슬의 명예에 대해 크게 절망했던 순간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든든하게 지원할 줄 알았던 정조 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슬픔을 시로 표현할 정도로 유배 생활의 시작은 다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유배 생활을 지내면서 중년의 다산은 젊은 시절, 과거에 집착했고 상실된 명예로 가득한 부귀영화가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단상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 속에 느낄 수 있는 고락(苦樂)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온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를 낳는 것은 동정(동정)이나 음양(음양)이 서로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까닭을 알아 깃들어 숨어 있는 것을 살피고 성하고 쇠하는 이치를 헤아려, 내 마음이 상황에 응하는 것을 항상 뭇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한다. 그런 까닭에 두 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기세를 죽인다. 

([고락에 대처하는 방법] "우후 이중협을 증별하는 시첩의 서문' 중에서, pp 50) 

  

樂生於苦, 苦者樂之根也. 苦生於樂, 樂者苦之種也.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며 즐거움은 반대로 괴로움의 뿌리이다. 다산이 말하고 있는 역설적인 문장은 우리 삶에 마주치며 반복되고 있는 화복(禍福)의 순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화복의 순리 앞에 마주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외투 한 벌에 웃고 울어야 했던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다. 외투 한 벌로 인해 고락의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야했던 아까끼는 화복의 순리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화복의 순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탓에 자신 스스로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성을 지닌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도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린아이 수준의 단순한 감정을 지니는 경우가 있다.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다보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고 싶은 기대와 열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마는 욕심 그리고 집착으로 변질된다. 반대로 하늘이 무너질듯한 절망을 느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의 나락 속으로 빠진다. 괴로움이라는 늪에 깊숙하게 빠진 이상 정신을 옥죄게 만드는 이 위험천만한 마음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관리 그리고 인생의 대선배인 다산이 병들어 죽어가는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에게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를 알려줬다면 아까끼는 유령이 되면서까지 외투에 집착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지키는 집" , 수오재(守吾齋) 

다산은 유배생활을 통해서 실학 사상을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그 경험으로부터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자신의 남은 여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수신'(修身)이라 함은 '자신의 몸을 지킨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수신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문 수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석가모니, 예수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 다양한 삶의 변화 속에서 변하기 쉬운 인간의 유동적인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다산은 '나'(自)라는 존재를 온전히 유지하여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다산의 태도는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알 수 있다.  정민 교수가 편집한 <다산청상어록>에서는 '수오재'라는 명칭을 통해 다산이 스스로 깨닫아 독백하는 장면이 있는 일부 내용만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볼 수는 없지만 이 부분만으로도 다산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중략)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은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기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지켜라] "수오재기" 중에서, pp 43)

 

내용만 봐서는 다산이 직접 '수오재'라는 명칭을 붙인 걸로 이해하기 쉽지만 책에서 생략된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맏형인 정약전이 자신의 집에 붙인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는 형이 만들어낸 집의 명칭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수오재'라는 의미에 대해서 형을 통해 알게 되고 난 뒤, 다산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그는 유배 생활 이후, 자신의 지난 부귀영화의 삶이 허망했음을 깨닫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적 자아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자아인 '나'를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본질적 자아, 즉 내면적 자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게 된다.  

형은 자신의 집에 스스로 명칭을 붙여 자신을 지키고자 했고, 그 동생은 그러한 마음의 수양을 기(記)를 통해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저본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자세야말로 바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잡하면서도 하룻밤 자고나면 쉽게 변화되는 이 세상 속에서 '성찰', '수신', '청상'이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고어에 불과하며 그런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다산이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공부 방법과 수많은 저작을 펴낼 수 있었던 비법, 공부의 기본 자세,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서부터 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재산 증식과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산이 들려주는 삶의 성찰과 충고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록 유배에 묶인 몸이지만 그가 쓴 맑은 글 속에는 여전히 세태를 꿰뚫어보는 지성과 함께 묻어나는 '인생의 대스승'으로서 살가운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높은 관리에서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다산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어마어마한 책의 권수로 남겨진 학문적 업적만으로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민의(民意)를 먼저 생각했던 관리였다.실용에 맞지 않으면 임금 앞에서도 승복하지 않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주자(朱子)와도 맞섰으며, 처절한 불행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다산에게서 다시금 삶의 혜안(慧眼)을 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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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한 것이 없다.」

요즘 읽는 책마다 그 속에 '내'가 있어서
'거 참, 여기 저기 나를 많이도 흘리고 다녔구나.'
싶던 차에 저 말을 읽으니, 참,
아픕니다.

cyrus 2011-11-29 12:2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요. 저는 어제 학교 수업 시간에 이고그램 평가를
해봤는데요..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 자신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하더군요,
다산 선생의 짧은 말씀이 한 쪽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yamoo 2011-11-2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 샘 책이 눈에 들어오네요~ 정민 샘 글 좋지요~^^

다산이 지은 책이 500권이 넘는답니다! 후와~~ㅎㅎ

cyrus 2011-11-29 12:27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이 분이 쓰신 글을 좋아하면 즐겨 읽는 편입니다.
가끔씩 생각나면 다시 읽기도 합니다. ^^

아이리시스 2011-11-2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와- 500권. 저는 어젯밤부터 <흑산> 읽는 중인데 정약용 형제의 삶은 매번 읽어도 매번 대단해요. 얼마나 잘 까먹는지 읽을 때마다 새롭고..^^

cyrus 2011-11-30 23:47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온 김훈의 신작이 정약용과 관련된 이야기였군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는데요 ^^
 

 

  

  과제 준비의 어려움  

항상 학기중은 언제나 바빴지만, 이번 주 같은 경우에는 조별 과제가 많아서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다. 조별 과제는 여러 명의 조원들과 함께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 과제보다는 편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별 과제는 어떤 조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작업하는 데 편할 수도 있거나 아니면 본인이 힘들어 질 수 있다. 조원 중에는 전혀 친하지도 않는, 타 과 학생이 한 두 명 있는데 조별 과제를 준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다면 본인뿐만 아나리 다른 조원들 입장에서는 피곤하고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그렇다면 친한 친구들이 나와 같은 조원이라면?  많은 학생들이 조별 편성할 때 가장 선호하는 유형이다. 과제를 준비하는 데 서먹한 기분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도 믿을게 못 된다. 아무래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우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름 열심히 참여하려고 하지만, 꼭 한 명은 슬쩍 눈치를 보면서 참여하는 척만 하는 친구 녀석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학 과제는 혼자를 하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든...  결론은 쉬운 게 없다. -_-;;   

  

 

  상금에 눈이 멀다

과제 타령은 여기까지만 하고, 사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과제라는 것은 다른 이름으로는 '리포트'(Report)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포트를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리포트의 정의를 논문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논문'이라고 하면 자신이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 또는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작성하는 글이다. 평소에 글쓰기에 대한 훈련을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리포트 한 개 쓰는 데 고역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필자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리포트를 작성하는 방법을 습득했으며 일상적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리포트 쓰는 데 크게 어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올해 2학년 1학기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3학기를 수학(修學)했는데 단 한 과목을 제외하고는 리포트 점수는 상위권에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리포트 작성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가진 상태라서 최근에 학교에서 주최한 리포트 공모전에 참가해보려고 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작성한 리포트를 제출하여 가장 잘 쓴 리포트에 상장과 상금(!)을 수여하는 대회이다. 1등이 30만원이었다! 

며칠 전부터 리포트 공모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이번 학기 때 쓴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정부의 역사'라는 주제로 쓴 리포트를 제출해보려고 했다. (리포트 속 내용의 일부는 지난 달에 페이퍼 형식으로 쓴 적이 있었다) 당시 리포트를 본 교수님도 좋은 평가를 주셨고, 내용의 일부를 쓴 페이퍼 역시 나름 반응이 좋아서(^^;;) 솔직히 공모전 수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기존에 쓴 리포트 내용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보완하면 좋았을 것을, 다른 과목 과제 준비하느라 소홀하게 준비를 했다. 준비할 수 있었던 많은 기간동안에 어영부영하다가 제출 마감날 3일 전이 되어서야 드디어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한 리포트의 내용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준비해야 할 과제가 많은 상태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작성한 과제를 보완하는 데 열중해야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과제의 내용이 어떻게 보완해야 되는지 염두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잘 써서 리포트 공모전에 상금을 타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결국에는 주말에는 잠을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좀 더 새로운 내용으로 다듬었다.  

이제 작성한 과제를 담당교수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다 된 것이었다. 교수님은 필자가 쓴 과제를 보고 대회추천서에 과제 내용에 대한 평가를 기록해야만 했다. 리포트 대회에 교수 추천서도 같이 제출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교수님께서 추천서만 작성해주신다면 모든 게 끝인줄만 알았다.  

공모전 마감 기간이 전날에 교수님에게 교수 추천서를 받으려고 연구실에 직접 찾아갔다. 그러나 하늘 높이 찌를 것만 같았던 공모전에 대한 자신감은 하루만에 한 풀 꺾이고 말았다.  

교수님은 리포트 내용이 예전보다 더 못했다고 제대로 된 지적을 하셨다. 문장 중에 간혹 주어가 빠져 있었고, 내용 결론과 느낀점이 너무 진보적인 관점으로 치우쳐서 균형적이지 않다는 등 하나하나 문제점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교수님이 지적하신 부분을 들으면서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답시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실상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리포트가 지적당한 사실이 부끄럽다기보다는 교수님이 지적하신 부분을 내일 제출 마감날까지 보완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막상 다시 해야한다는 생각에 무척 난감하였다. 교수님은 제출 마감날까지라도 꼭 다시 보완해서 제출하려고 당부하셨다.  

한 시간동안 교수님의 지적을 듣고 난 뒤에서야 연구실에 나오는 순간, 온 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쭉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해야 될 과제는 많은 상황에 이미 작성한 과제를 또 수정해야 하는, 힘든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점이 혼자 감당하기가 무척 버겁게 느껴졌다.  

 

  

  '공모전 상금' 과 '학점' 사이에서의 갈등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서 혼자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공모전 제출용 과제를 수정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 학기 학점을 결정 지을 수 있는 이제 막 시작도 해보지 않은 수많은 과제들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공모전을 위한 과제를 포기하면 공모전 상금이 아깝게 느껴졌고, 반대로 공모전을 위한 과제에만 열심히 하다보면 정작 해야 할 과제들을 준비하는 데 지체할 수 있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공모전 과제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공모전은 내년에도 개최하기 때문에 그 때를 기약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구상도 하지 못한 다른 과제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1월이 끝나가기 전에 과제들을 마무리 짓게 되면 12월부터 기말고사 공부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길 수 있다. 꼭 다가올 상황, 즉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하는 목표를 위해서 공모전이라는 기회 비용을 포기한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리포트 공모전의 상금에 얽매였던 집착이 사라진 탓일까? 

그 이후로 다른 과목 과제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준비할 수 있고, 거의 완성이 다 되어가는 상태이다. 과제가 완전히 작성되더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다시 고쳐야하겠지만, 공모전 상금에 대한 욕심이 만들어 낸 집착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버릴수록 크게 얻을 수 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는 난초에 대한 스님의 집착과 관련된 일화가 잘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수필이다. 스님은 한 때 난초에 집착하다가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알고 친구에게 난초를 돌려주고 나면서부터 무소유의 역리를 깨닫게 되었다.  

스님은 난초가 없어진 이후부터 서운하고 허전함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을 느끼셨고 그 이후로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필자는 스님과 같은 삶의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리포트 공모전 포기 이후로 리포트라는 글을 쓰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내가 모르고 있었던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만약에 공모전에 교수님의 추천서 없이 개별적으로 제출했다고 상상해보자. 운이 좋게도 대회에 당선되면 좋겠지만 결과는 꼭 좋은 쪽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공모전에 당선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한 상태에서 입선마저도 하지 못한다면 실패에 대한 정신적 충격과 상실감이 무척 컸을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긴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면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스님은 '무소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짧은 한 순간이었지만 며칠동안 나의 정신과 육체를 괴롭혔던 집착에서 스스로 벗어난 후 뒤의 느낌은 정말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홀가분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소유'의 마지막 문장 중에는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올해 리포트 공모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단지 대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수학하면서 꼭 해야 될 과제, 리포트 작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장기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미래의 발전이라는 2보 전진을 위해 잠시 1보 후퇴한 것뿐이다. 크게 버린만큼 언젠가는 크게 얻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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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배워가는 거겠죠. 무슨 공모전이든 '순수한' 마음이어야 결과가 좋더라구요. 상금이 욕심나지만 열심히만으로 상금 보장이 없잖아요. 가만보면 시루스님은 되게 부지런하고 욕심도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좋은 쪽으로!^^

학기 끝나가요, 힘내요.

cyrus 2011-11-30 23: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번 일을 계기로 부족한 것도
모른채 자만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내년이면 3힉년인데
논문 쓰는 방법이나 따로 공부해야겠어요.

몇 분 뒤면 곧 12월 1일이네요, 정말 이번 학기, 아니 2011년도
얼마 안 남았네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