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도나 사회과학도들을 만난다면 꼭 한번 묻고 싶다. 작년 12월에 타계한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의 학문적 업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 질문에 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윌슨의 견해, 즉 유전자 결정론(또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은 여성의 신체적 · 정신적 열등함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다. 윌슨은 1975년에 《사회생물학》을 발표하여 진화론의 시각에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했다. 그의 책에 반영된 유전자 결정론은 환경과 양육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으로 보는 환경 결정론이 대세였던 당시 사회과학계를 분노로 들끓게 했다. 실제로 윌슨은 유전자가 성차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으며 앞으로도 여성은 남성보다 뒤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생물학자와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발언을 비판했다. 윌슨이 같이 하버드 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리처드 르원틴(Richard C. Lewontin)은 ‘대중을 위한 과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윌슨과 사회생물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자와 좌파들까지 합세하면서 윌슨은 수세에 몰렸다. 그들은 윌슨이 성차별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한 보수 우파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윌슨이 있는 어디든 따라가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들은 심포지엄에서 연설을 시작하려는 윌슨에 다가가 물을 뿌리기도 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사회평론, 2003)
* 리처드 르원틴, 스티븐 로즈, 레온 J. 카민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생물학. 이념. 인간의 본성》 (한울아카데미, 2009)
* [품절]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이데올로기서의 생물학》 (궁리, 2001)
여전히 많은 사람은 유전자 결정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보는 유전자 결정론은 과학이 아니라 성, 인종, 장애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유전자 결정론과 관련이 있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은 남성의 여성 지배를 신체적 차이에 근거한 자연의 질서로 본다. 굴드는 자신의 책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 1977)와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 1981)에서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된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는 견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르원틴은 굴드보다 한층 더 혹독하게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학자다. 그가 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 Biology, Ideology and Human Nature, 1984)와 《DNA 독트린》(Biology as Ideology: The Doctrine of DNA, 1991)은 사회생물학과 유전자 결정론을 요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이 네 권의 책은 유전자 결정론이 불편하지만, 조리 있게 반박하지 못하는 독자에게 힘이 되어 준다.
* 데버라 캐머런 《페미니즘》 (신사책방, 2022)
* 앤 커, 톰 셰익스피어 《장애와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그린비, 2021)
* 마리 루티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 (동녘사이언스, 2017)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하려는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는 진화심리학과 유전자 결정론을 반대한다. 심리학자 마리 루티(Mari Ruti)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진화심리학 이론이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생산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 언어학자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은 《페미니즘》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여성 지배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보다 몸집이 크며 체력이 좋고, 공격성이 있어서 사회와 여성을 지배할 수 있다. 장애학도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하는 학문이다. 《장애와 유전자 정치》는 이름만 바뀌면서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우생학의 실체를 보여준다. 우생학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고, 장애인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정책들이 만들어졌다. 사회생물학은 1970년대에 등장한 신우생학이다.
유전자 결정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깊어지면서 환경 결정론은 ‘본성 대 양육’ 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오랜 논쟁이 양육 가설을 지지하는 환경 결정론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지지해야 하는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해야 한다. 더 나은 쪽은 없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 에드워드 O.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11)
* 에드워드 O. 윌슨 《자연주의자》 (사이언스북스, 1996)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사실과 전혀 다른 편견을 낳는다. 그 편견의 예가 진화론자는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한다든가 윌슨 같은 사회생물학자들을 성차별주의자이자 우파라고 속단하는 일이다. 그러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은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이 유전적 요인과 환경과 상호 반응하면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사회생물학》 출간 이후에 펴낸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우연(genetic chance)과 환경의 필연(environmental necessity)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 둘 다 인간 행동에 필수적이라는 윌슨의 견해는 책에 또다시 나온다. “개인은 자신의 환경, 특히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43쪽).” 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는 사회생물학 논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지나오면서 느낀 생물학자의 솔직한 심정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윌슨은 사회생물학이 정치적인 동기가 반영된 학문이라고 비난받은 것에 반박했는데, 자신은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유전자 결정론이 우파의 정치적인 강령과 손을 잡는 것에 우려하는 과학도와 사회과학도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인간 행동의 본질을 설명할 때 무조건 양육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전자 결정론자를 ‘성차별주의자’, ‘반페미니스트’, ‘나쁜 과학을 신봉하는 세력’으로 몰아세우는 비난은 독단적인 태도다.
* [e-Book] 《스켑틱 Vol. 4: 과학을 사유하다》(바다출판사, 2015)
* [e-Book] 《스켑틱 Vol. 16: 길러진 본능인가 타고난 학습인가》(바다출판사, 2018)
과학 잡지 《스켑틱》 4호의 특집 기사 제목은 ‘진화하는 진화심리학’이다. 진화심리학이 인간 본성에 관한 최신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지식의 범위를 어떻게 확장해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이 어떤 학문인지 파악했으면 ‘본성과 양육’을 주제로 한 특집 기사가 실린 《스켑틱》 16호를 읽으면 된다.
*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20세기를 뒤흔든 진화론의 핵심을 망라한 세계적 권위의 교과서》 (동아시아, 2014)
* [절판] 딜런 에번스 《진화심리학》 (김영사, 2001)
《센스 앤 넌센스》와 《진화심리학》은 진화심리학의 한계를 설명하면서도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까지도 비판하는 책이다. 《센스 앤 넌센스》의 저자는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본성과 양육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분해하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라는 재료가 섞어져서 만들어진 케이크와 같다. 그래도 유전자 결정론과 진화심리학이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케이크에 먹음직스러운 환경적 요인만 쏙 빼서 먹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본성과 양육, 어느 쪽이 옳은 건지 따지는 건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