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토요일(6월 17일)에 서울국제도서전을 참관했다. 작년에 비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출판사들이 참가했던 터라 책을 많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서전보다 제일 중요한 곳에 가야 해서 ‘꼭 사야 할 책 두 권’만 샀다.
* 김정희 《책방지기 생활 수집》 (탐프레스, 2023)
두 권 중 한 권은 대구 독립서점 <서재를 탐하다>와 출판사 <탐프레스(tampress)> 운영자 김정희의 《책방지기 생활 수집》이다.
전국 각지에서 온 애서가들로 바글거리는 코엑스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나 같은 간서치(看書癡)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세운상가 근처에 있는 <소요서가>라는 철학 전문 서점이다.
* [절판] 데이비드 C. 린드버그 《서양 과학의 기원들》 (나남출판, 2009)
처음에 서점을 찾기 힘들어서 상당히 애먹었다. 서점 건물이 지상에 있는 줄 알고 한동안 헤맸다. 대부분 사람은 유명 서점에 가기 전에 사전 조사로 그 위치를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난 그렇지 않다. 서점에서 어떤 책이 판매되고 있는지 먼저 본다. 사실 <소요서가>에 가고 싶은 딱 한 가지 이유는 절판된 《서양 과학의 기원들》, 이 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 윌리엄 뉴먼 《프로메테우스의 야망》 (도서출판 길, 2023)
* 바이얼릿 몰러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마농지, 2023)
30여 분 돌아다닌 끝에 <소요서가>를 찾았다. 서점 진열창에 배치된 책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중에 이미 내가 산 책 두 권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야망》과 《지식의 지도》. 이 책들은 서양 중세의 과학이 처음에 어떻게 형성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던 터라 여기에 짝이 될만한 《서양 과학의 기원들》을 구매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양 과학의 기원들》은 이미 다른 손님이 예약 구매된 상태였다. 비록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소요서가>에 사고 싶은 책들이 엄청 많았다.
그날 <소요서가>에서 고른 책은 총 여섯 권이다. 그중 세 권은 예전에 이미 읽었고, 서평을 남겼다. 읽은 책 세 권만 간략히 언급하겠다.
*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 (분도출판사, 2018년)
여성도 지식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교회가 어떻게 남성 중심적인 교권 제도를 고집하는 교회로 변했는가. 그렇다면 페미니즘 관점을 적용하여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제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진정한 의미의 여성과 신학이 무엇인지 접근한다. 책은 여성 신학 대신에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그것의 의미와 역사를 다룬다. 그리고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주도적인 생각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 위대한 여성 신학자들을 소개한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은행나무, 2014년)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현대’는 간단히 말하면 현시대의 유행과 풍속이다. 결국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자신이 본 것, 즉 시대의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응시하는 예술가다. ‘현대 예술가’는 벌거벗은 여신이나 신화 속 영웅의 모습을 그리던 고전주의 화풍을 거부한다. 그래서 전통에 반기를 든 보들레르는 이 책을 통해 ‘현대성’이 충실히 반영된 예술가를 옹호한다. 국내에 출간된 보들레르가 쓴 책과 보들레르 관련 서적을 모으는 중인데, <소요서가>에 오기 전까지는 절판된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드디어 이 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 [구판, 절판]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책세상, 1996년)
* [개정판]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년)
<소요서가>에서 구매한 린 헌트의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구판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목록에 포르노그래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서로 지정된 포르노그래피는 대중이 즐겨 보는 베스트셀러였고, 봉건적 구체제를 뒤흔들만한 선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표현을 동원해 종교적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는 ‘언어적 무기’였다. 《포르노그래피의 발명》은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를 촉발한 포르노그래피의 영향력을 조명한 책이다.
* [개정 4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현실문화, 2022)
그날 <소요서가> 주인장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읽고 있었다.
현대미술은 정말 어렵고, 보면 볼수록 머리 아프게 만든다. 사실 ‘미술’이라는 단어조차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미술과 그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의 틈을 메꿔주는 책이다. 미술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과 방식은 고정적이지 않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미술을 보는 눈이 결정되고, 시대가 달라지면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술을 한 마디로 규정하고, 정의 내리기가 참 쉽지 않다. 저자는 현대미술이 소수의 지식인만 이해하는 문화로 전락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지적은 현대미술의 한계에 정곡을 찌른 분석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소요서가> 인스타그램 운영자가 내게 메신저(DM)를 보냈다. 《서양 과학의 기원》이 서점에 입고되었으니(!) 필요하다면 예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절판된 책이라서 영영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소요서가>가 정말 감사하게도 귀한 책을 찾아줬다. 절판된 책 가격은 정가보다 비싸게 매겨지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책 가격이 얼만지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 책을 구매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타이밍이 참 좋았는데 바로 다음 날인 토요일에 <달의 궁전>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라서 서울에 갈 예정이었다. 모임 시작 전에 <소요서가>에 방문해서 《서양 과학의 기원》을 구매했다. <소요서가> 주인장이 말하기를 <소요서가> 대표가 《서양 과학의 기원》을 매우 탐냈다고 한다. <소요서가> 대표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분 역시 내공이 깊은 간서치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