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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물리학 - SF가 상상하고 과학이 증명한 시간여행의 모든 것
존 그리빈 지음, 김상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평점
4점 ★★★★ A-
시간여행은 SF의 단골 소재다. 시간을 거슬러 여기저기 넘나드는 여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SF는 종종 오해받는다. 일단 SF라는 이름부터 모순이다.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자다. ‘fiction’은 소설 또는 허구라는 의미를 아울러서 품은 단어다. 과학을 매끈하게 정의하자면 실험과 관찰을 거쳐 보편적인 법칙을 찾는 학문이다. 과학은 결국 실험으로 증명해야 하는 학문이다. 시간여행이 가능한지 실험으로 증명하려면 타임머신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타임머신을 만들 수가 없다. 여기서 사람들은 바로 결론을 내린다. ‘시간여행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어서 과학으로 볼 수 없다.’ ‘시간여행은 허구이며 공상에 불과하다.’
‘S’를 선호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너, T야?”라고 비꼬지 말자. 정확한 과학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도 SF를 좋아한다. SF를 즐겨 읽는 과학자들이 많다. SF를 쓰는 과학자도 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존 그리빈(John Gribbin)은 SF 전문 잡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이력이 있다. 그는 ‘S’와 ‘F’의 만남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SF를 쓰는 과학자의 눈에는 ‘S’와 ‘F’가 ‘아주 오래된 짝꿍’으로 보인다. SF를 좋아하는 과학자는 오래 만난 짝꿍을 억지로 떼어내지 않는다.
존 그리빈은 과학소설에 ‘진짜 과학(real science)’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어린 시절에 만난 H. G. 웰스(Herbert George Wells),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와 같은 SF 거장이 쓴 과학 이야기(science fiction) 덕분에 ‘글 쓰는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SF에 허구 맹랑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비록 상상으로 쓰였다고 해도 이야기 속에 분명히 흥미로운 ‘과학’이 살고 있다.
대부분 물리학자는 이론상으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존 그리빈도 ‘과학적으로 성립되는 시간여행’을 생각하면서 즐기는 과학자다.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그가 쓴 《시간의 물리학: SF가 상상하고 과학이 증명한 시간여행의 모든 것》은 ‘시간여행을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다. 이 책을 잠깐 소개하자면, 역자는 SF 평론가 김상훈이다. ‘강수백’이라는 필명으로 SF를 번역하기도 했다. 《시간의 물리학》은 역자가 처음으로 번역한 과학 도서다. 책의 마무리 글은 존 그리빈이 쓴 단편 SF다. 소설 제목은 『뒤돌아보지 말라』 (Don’t Look Back, 1990년)다.
시간여행을 소설에서만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상상력과 과학을 결합해서 만든 타임머신이 있으면 된다. 머릿속에 타임머신 설계도를 그려라. 단, 설계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타임머신 부품에 과학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빛보다 빠른 우주선을 만들지 않으면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인슈타인을 존중하면서도 타임머신을 만들려고 한다. 과학 법칙에 어긋나더라도 일단 만들어라. 허점투성이 타임머신을 상상하면서 탑승해도 죽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만들었으면 ‘우주 지도’를 그려야 한다. 여기서부터 과학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 타임머신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경로를 찾아야 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권위자인 킵 S. 손(Kip S. Thorne)은 두 개의 시공간(또는 우주)을 연결하는 통로인 웜홀(Wormhole)이 있으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웜홀은 SF에서 유래된 개념이 아니다.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카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을 이용해서 웜홀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빛보다 빠른 우주선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한 아인슈타인은 수학을 이용해서 웜홀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네이선 로젠(Nathan Rosen)이라는 물리학자와 함께 웜홀과 비슷한 ‘우주의 지름길’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Einstein-Rosen Bridge)’라고 부른다.
SF 작가들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블랙홀 연구에 영감을 얻어 시간여행이 얼마든지 가능한 세계를 만들었다. 과학자들은 SF를 읽으면서 시간 여행자들을 위한 이론을 도출해 냈다. 《시간의 물리학》은 ‘S(과학)’와 ‘F(소설)’의 만남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SF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은 ‘과학’과 ‘소설’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둘의 만남을 이해하지 못해서 ‘과학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머릿속에 ‘과학을 모르는 소설가’와 ‘소설을 안 읽는 과학자’가 살고 있다. 사실과 완전히 다른 두 사람 때문에 한때 SF를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공상과학 소설’이 촌스러운 옛말이 되면서 사라졌지만, ‘과학을 모르는 소설가’와 ‘소설을 안 읽는 과학자’는 살아 있다. 너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가상의 존재들이 죽여야 SF의 매력이 살아 숨 쉰다. ‘S’와 ‘F’가 서로 알고 지낸 지 백년이나 넘었다. 둘은 절대로 헤어질 일이 없다. ‘과학을 좋아하는 소설가’와 ‘소설을 즐겨 읽는 과학자’가 SF를 만들었으니까.
<cyrus의 주석>
* 29쪽
시간팽창 효과는 수많은 SF의 기반이 되었고, 미래를 향한 일방통행식 시간여행의 수단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 책 중에서도 이 개념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파고든 폴 앤더슨(Poul Anderson)의 《타우 제로》(Tau Zero)[주1]를 제일 좋아한다.
[주1] 번역본(천승세 옮김, 나경문화, 1992년)이 있다. 절판되었으며 도서관에서도 보기 힘든 책이다.
* 41쪽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하면 열은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흘러들 수 없다. 19세기 열역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켈빈 경(Lord Kelvin)은 좀 더 기술적인 용어로 이 현상을 설명했다. [주2]
[주2] 열역학을 설명할 때는 엔트로피(entropy)를 처음으로 언급했고, 열역학 제1 법칙과 열역학 제2 법칙을 정립한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Julius Emanuel Clausius, 1822~1884)를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 58쪽, [그림 4] 설명문
2차원에 시간 차원을 더한 광추(light cone) 모형. 시공간상의 국소 지점에서 찰나의 시간에 발생한 어떤 사건의 결과로 방출된 빛이 시공간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의 경로를 나타냈다. 3차원 공간에 이 모형을 적용하면 빛은 구형으로 퍼져나가고, 빛 원뿔도 일반적인 원뿔이 아닌 4차원 초 원뿔이 된다. [주3]
[주3] 빛 원뿔 모형은 ‘4차원’ 개념을 처음으로 특수상대성이론에 도입한 독일의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가 제시했다. 빛 원뿔 모형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민코프스키 시공간(Minkowski spacetime)’이라고도 부른다.
민코프스키 시공간을 표현한 그림은 167쪽(그림 14)에 다시 나온다. 처음에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 수학적 개념이 적용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중에 수학의 도움 없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민코프스키 시공간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민코프스키의 업적이 없었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 개념인 ‘휘어진 시공간’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 62쪽
제임스 블리시(James Blish)가 쓴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삐익>(Beep)에서는 거리와 상관없이 순간적인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디랙 라디오’[주4]라는 장치가 등장한다. 그러나 디랙 라디오는 음성 메시지를 수신할 때마다 귀에 거슬리는 삐익 하는 소리를 낸다는 단점이 있었다. 사실 이 삐익 소리는 “과거에 보내졌고 미리[주5]에 보내질 모든 디랙 메시지”를 압축한 복사본이었다.
[주4]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Paul Dirac)의 이름에서 따온 소설 속 장치다. ‘디랙 라디오’의 원문은 ‘Dirac communicator’다.
[주5] ‘미래’의 오자.
* 109쪽
킵 S. 손(Kip S. Thorne), 《인터스텔라의 물리학》(The Science of Interstellar) [주6]
[주6] 번역본: 《인터스텔라의 과학》, 전대호 옮김, 까치, 2015년.
* 115쪽, [그림 12] 설명문
M87 블랙홀 상상도. 처녀자리에 있는 타원은하이자 강한 전파은하다. 2017년 사건지평선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으로 관측한 인류 사상 최초의 블랙홀이다. [주7]
[주7] 2017년 4월에 M87 블랙홀을 관측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2년 뒤인 2019년 4월 10일에 최초로 블랙홀을 화상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 125쪽
폴 데이비스(Paul Davies), 《타임머신을 제작하는 방법》 (How to Build Time Machine) [주8]
[주8] 번역본: 《폴 데이비스의 타임머신》, 강주상 옮김, 한승, 2002년(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