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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
E.F. 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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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다익해(多多益害), 우리나라 경제특구의 현주소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음을 뜻하는 다다익선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하지만 좋은 것이라고 해서 너무나 많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무작정 과식하게 되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심지어 비만으로 초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제특구(경제자유구역) 설립의 시초는 김대중 정부 때이다.
동북아 허브 육성을 위한 추진으로 경제자유구역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목표 하에  

부산·진해, 인천, 광양만권, 황해, 새만금·군산, 대구·경북 등 전국에 6개 경제특구가  

지정되었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는 황해, 대구․경북 지역은 재 지정되었고, 새로  

추가된 경제특구 지역은 새만금․군산이다. 그리고 현재 경기, 충북, 전남, 강원은  

추가 경제특구 지정 신청을 하였다. 그래서 현재까지 지정된 경제특구 지역의 지구 수는  

총 13개이다. 경제특구의 설립 목적은 외국 기업들을 불러들여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특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 성장에 커다란 활력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아진 탓에 상황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외국 기업을 경제특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기업이 운영할 수 있는 최적의 기반시설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특구의 도로와 상가 등 기반시설을 설치하는데 들어간 세금만 해도  

2조원이다. 어마어마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경제특구 지역의 외국 기업은 생각보다 적다. 

오히려 도로, 아파트, 상가만 들어서게 되어 정작 정부가 내세운 경제특구의
목적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경제특구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늑장  

대응과 수도권 규제 정책을 이유로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경제특구 지정을 해제할 것을 원하고 있다.  

  

 

 만약 슈마허가 살아있었더라면

역대 정부 시절에 지정된 경제특구는 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 투자하게끔 만드는  

기반 시설을 제대로 유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을 씌운 그들의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어 결국 경제특구는 빛 좋은 개살구만 되어버렸다.

만약 어네스트 슈마허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는 자신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중간기술’이라는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중간기술이란 자원재생과 지역 에너지의 활용을 도모하는 동시에  

지역의 고용관계까지 배려하는 기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원을 소비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시킨다. 생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제특구와 같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게 된다.

반면 중간기술은 고액의 투자를 들이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중간기술도 생산과 소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과 소비를 지역적  

차원으로 정하고 있다. 도시 중심이 아닌 농촌과 소도시가 만드는 ‘농업 관련 산업  

구조’를 형성하여 그 지역 내에서만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그 지역만의  

원재료, 그리고 단순한 생산기술과 생산비용으로 운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실업률과 인구의 도시 유입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간기술을 적용한 산업 구조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의 특색을 갖춘  

경제특구가 그 예다. 나주 배로 유명한 나주시는 ‘배 산업 특구’로 지정되어 배 유통시설과 
가공공장, 테마공원 조성 등 특화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로 인해 배 농업이 증진하게  

될 것이며 나주시의 지역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주시 이외에도 구례군은  

지리산과 섬진강의 자연적 이점을 이용하여 야생화를 육성하는 ‘야생화생태특구’를  

지정하였다. 나주시와 구례군이 경제특구 유지를 위해 투입된 비용은 각각 259억 원,  

500억 원 정도이다.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많아야 1조 정도의 세금을 쏟아 붓는 정부의  

투자와 비교하면 지역 경제 특구가 효율적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경제학

현재의 경제학은 자원과 상품이 최우선이며 그 상품을 만들거나 또는 얻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원과 상품에 눈이 멀게 되어 탐욕과 이기심이  

발동하게 됨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경쟁의 승자는 부를 획득함과 동시에 권력을 가지게 되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경쟁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은 자원 고갈, 환경오염 문제를 낳게 된다.  

결국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 피로스의 승리의 기쁨에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슈마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경제적 대안을 제시한다.
앞에 ‘불교’라는 단어가 수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슈마허의 경제학도 불교 사상이
녹아들어가 있다. 자본주의가 자원과 상품의 소비가 미덕인 반면에 불교 경제학은
인간의 삶과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은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 경제학의 소비 형태는  

‘최소 소비 최대 이익’이다. 소박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게 되면 상품에 대한  

욕구를 해소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그의 대안이 자본주의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각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만성질환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가 있다.  자신이 산 상품들이 내가 살아가는데 이익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순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충동구매를 하고 있는지 자신의 소비 형태를 반성해보고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불교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최소 소비의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그가 이 책을 출간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슈마허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경제적 교류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경제적 교류가 없는 폐쇄적인 국가는 경제 성장이 늦춰지게 되며  

빈곤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 간의 경제적 교류가 잦아지게 되면서 경제적인 통합에 대한  

요구도 증가하고 있다. 이렇듯 그가 비판했던 규모의 경제는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  

그러나 비만이 걸리면 성인병에 걸리게 되는 것처럼 뚱뚱해져 버린 규모의 경제에도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 간의 경제적 경쟁이 나중에 전쟁으로 일이 커지게 되어  

피를 보게 되고 만다. 그리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가 간의 빈부 격차는 전혀 좁혀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석유는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인간의 부주의 때문에  

하필이면 많은 양의 석유가 바다에 흘러들어 환경오염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리 앞에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일으킨 문제들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해서는 안 된다.  뚱뚱해진 몸의  

지방을 빼기 위해서는 다이어트만이 살 길이다.  거대해진 규모의 경제가 작아지기  

위해서는 힘이 들더라도 해결하려는 우리들의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책 제목과 같이 우리 스스로 욕심과   

소비를 작은 것으로 만들게 되면 언젠가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작은 것’이 아름다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 [지방정부가 국가재정 거덜낸다] [3] 산업단지·특구 난립] 조선일보 7월 19일자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7/19/2010071900117.html

[거부당한 경제특구] 중앙일보 7월 10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7/20/3919133.html?cloc=olink|article|default

[특구지정으로 지역경제 ‘청신호’] 세계일보 5월 26일자
http://local.segye.com/articles/view.asp?aid=20100524001890&cid=610106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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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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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性) 춘향, 팜 파탈로 변신하다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서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도 개봉 내내 논란의  

화살을 맞아야 했던 영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6월에 개봉했던 <방자전>이다.  

영화 제목만 봐도 이 영화가 우리나라 고전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를 한 영화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원작은 다 알다시피 기생 집안의 성춘향과 벼슬 집안의  

이몽룡과의 사랑을 그린 애정소설이다. 하지만 영화 <방자전>에서는
<춘향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몽룡의 몸종인 방자가 춘향에게  

한 눈에 반해 버려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방자전>를 관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 속 춘향은 두 남자 주인공 방자와 이몽룡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휘어잡는  

팜 파탈로 나온다.  <방자전> 포스터를 보게 되면 ‘춘향, 두 남자에게 덫을 놓다’라는  

카피와 함께 춘향 역을 맡은 조여정의 포즈가 인상적이다. 한국적인 미를 발산하는  

아리따운 한복을 입고  단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아한 춘향의 얼굴이 아니다. 카피처럼 방자와 이몽룡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들에게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유혹의 덫을 놓겠다는 눈빛이다.  

그리고 남녀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과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방자와 춘향의 모습이 있는   

포스터도 있다 . 영화는 전통적인 정절녀 춘향을 두 남자의 애간장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요부로 표현하면서 원전을 비틀어놓았다.

그래서 춘향문화선양회라는 단체가 원작 속의 춘향을 모독한 이유를 들어 영화 제작사를 

상대로 상영금지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영화 제작사를 향한 규탄 궐기 대회도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영화 제작사 측은 단체에게 사과 의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단체가 일으킨 상영금지 해프닝은 오히려 영화 관람객 기록 수만  

늘리게 되는 홍보효과가 되었다. 의도하지 않게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된 셈이다. 
 

  

 미스 춘향은 있고 성춘향은 없다?

리뷰 작성을 계기로 인하여 알게 된 춘향문화선양회에 대해서 좀 도 알아보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열람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춘향을 기리기 위한 제사와 전북 남원에서  

개최하는 미스 춘향 선발대회를 주최하고 있었다. 홈페이지 공지사항에는  

영화 <방자전>과 관련된 규탄 성명과 궐기 대회를 알리는 글이 있다.   
그리고 ‘춘향 선양 제안’이라는 코너도 있는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보다 다양한  

글들이 올려져 있었다. <방자전> 상영금지와 관련된 의견들이 많았는데 영화에 대해서  

찬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영화는 엉터리 내용이며 춘향을 모독했다는 등 상영금지  

찬성이 있는 반면에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면서 오히려 상영금지 요청은 유교사상에  

젖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찬반 게시문은 으레 자유게시판에 있기  

마련인데 자유게시판은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였다. 게시판이라기보다는 춘향 관련  

행사를 공고하는 글만 있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던 것은 춘향연구논문자료라는 코너였다.
이 자료실에는 진짜로 소설 <춘향전>에 관한 문학적, 역사적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클릭하여 들어 가보니 제목은 그럴싸하게 춘향과 관련된  

연구논문 자료라고 해놓고는 내용은 글은 고작 두 개 밖에 없었다. 두 개의 글은  

어이없게도 역대 춘향, 이몽룡 선발대회 수상자 명단이었다. 단체의 홈페이지에는  

미스 춘향만 있었지 정작 소설 속의 성춘향은 없었던 것이다.  

이 단체가 정말로 춘향을 기리고 있는지 의혹만 느껴졌다. 그리고 큰 실망감을 느꼈다.

<방자전> 규탄 성명서에는 <춘향전>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견하여
10여개의 나라에 번역이 되었으며 120여개의 판본을 갖고 있는 명작이라고 손꼽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춘향을 위한 홈페이지에는 춘향전의 판본의 수와 비교가 안 되는  

원작과 관련된 자료가 없으니, <춘향전>의 문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성명서 속의 말이 무색하게만 느껴졌다. 
 

 

 왜곡된 ‘정절’의 의미

춘향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절녀라고 생각하는 것은 춘양문화선양회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어린 시절부터 어린이용 전래 동화로 <춘향전>을 접했기 때문에
춘향을 정절을 지킬 줄 아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성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춘향은 정절녀가 맞긴 맞다. 하지만 우리는 춘향이를 수식하고 있는
‘정절’의 의미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그 ‘정절’이라는 단어를
조선 시대부터 지배하고 있던 유교 사상에서 유래된 남존여비의 시선으로  

읽고 있다.

국어사전에는 ‘정절’의 의미를 여자의 곧은 절개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한 평생 사랑하는 남자와의 정(情)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정절은 꼭 굳이 한 사람에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사전에는 정절은 꼭 사랑하는 딱 한 사람에만 지켜야한다는 말도 없지 않은가.
조선 시대에는 삼종지덕(三從之德)이라는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집을 가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 시대의 여성은 연애의 선택권이 없었다. 좋든 싫든 한 남자와 혼인이  

성사되면 한 평생 살아야만 했다. 지금의 여성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연하남과  

연애를 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결혼한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하고 다른 배우자와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이혼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만약 부녀자가 다른 남자와 정분을 맺는 것이 발각된다면 정절을 지키지 못한  

죄로 가혹한 벌을 받게 되고 평생 주위 사람들에게 화냥년 취급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반면 한 평생 남편을 섬긴 여자들은 죽은 뒤에 나라로부터 ‘열녀’라는 칭호를 하사하였고
후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여자가 살았던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 
이는 조선 시대의 여자들에게 정절을 강조하기 위한 국가적인 훈계책이기도 하였다. 
 

 

 춘향은 착한 여자?

정절을 지킨 여자들은 성격이 바르며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품행이 단정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춘향은 매사에 자상하며 여성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춘향전>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아서 생각하게 되는  

착각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춘향은 전래동화 속의 인물이다. <춘향전>은  

다양한 판본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판본은 <열녀춘향수절가>이다. 
이 판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전래동화 속의 춘향과는 차이가 난다.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이몽룡이 서울로 떠난다는  

소리를 들은 춘향의 표정과 대사를 주목해보자. 
 

 

  춘향이 이 말을 듣더니 별안간 얼굴색을 바꾸며 안절부절이라. 붉으락푸르락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이 꼿꼿하여지면서 코가 벌렁벌렁하며 이를 뽀드득  

  뽀드득 갈며, 온몸을 수수잎 틀 듯하고 매가 꿩을 꿰 차는 듯하고 앉더니, 
    "허허 이게 웬 말이오.”
  왈칵 뛰어 달려들며 치맛자락도 와드득 좌르륵 찢어 버리고 머리도 와드득  

  쥐어뜯어 싹싹 비며 도련님 앞에다 던지면서, 
    "무엇이 어쩌고 어째요? 이것도 쓸데없다!” 
 

                                                                      - <춘향전> 송성욱 역, p 75 -  

 

이몽룡이 서울로 가게 되어 이별을 고하자, 춘향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분노의  

표출을 서슴지 않는 정열을 지니고 있다. 분을 억누르지 못해 치맛자락을 찢어 버리는  

춘향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의 모습과 비교하면 무척 생소하다.

그리고 춘향은 이몽룡에 대해서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변학도에 대해서는  

저항적이고 도덕적인 열녀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녀의 두 얼굴은 단순히 이몽룡에  

대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이중적인 행동을 했던 것일까?

   전라도 남원에는 월매라는 기생이 있으니 삼남에서 이름난 기생이었다.  

  일찍이 기생을 그만두고 성가라고 하는 양반과 더불어 살았는데 나이  

  사십이 되도록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었다. 
                                                    

                                                      - <춘향전> 송성욱 역, p 11~12 - 
  

<열녀춘향수절가>의 시작에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춘향은 단순히 기생 집안의 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녀의 아버지는  

양반이다. 그래서 양반과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양면적인 신분 상태이다.  

춘향은 신분적 양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원 부사의 아들인 이몽룡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끈질긴 저항과 인내심으로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도덕성을  

지향함으로써, 사회의 인습을 극복하고 결말에 이몽룡과 재회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킨다. 결국 춘향의 정절은 조선 시대의 신분 사회 메커니즘이 낳은 것이다.  

춘향의 사랑은 기생 신분을 벗어나 사대부가의 일원이 되겠다는 신분 상승의
성취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니 춘향이 이몽룡이 서울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속 춘향은 현대의 여성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때 취업난으로 인하여 유행했던 신조어 중에서 ‘취집’이라는 말이 있다.
취직을 하지 못한 대학 졸업 여성들이 취직 대신에 시집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냉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대안으로 선택하고 돈 많고 괜찮은  

신랑감을 찾는 요즘 여성들의 모습은 신분을 상승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춘향과 비교하면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독자성이 결여된 우리의 대중문화

춘향이를 둘러싼 <방자전> 영화 제작사와 춘향문화선양회 간의 대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만의 시위는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해프닝을 통해서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암맹(暗盲)과 우리나라 고전에 대한  

관심 부족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문화의 어두운 현실이기도 하다.  

춘향문화선양회의 사례를 보여주듯이 <방자전>이 고전 소설 <춘향전>의 모티프를  

두고 있다고 해서 영화의 내용을 원작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작품은 일단 원작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원작이 아닌  

그 작품 내에 주어진 정보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창작의 모티프나 동기를 일일이  

설명해 주어야만 하며 꼭 원작 내용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독립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독창성이 없는 복제된 작품일 뿐이다 

 

반면 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예술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문화적 코드를  

이용해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 컨텐츠를 창출한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출간 50여 년을 지나서 피터 잭슨의 손에 의해서 현대적이면서도 원전의 맛을 살린  

영화로 재탄생했다. 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에 등장하는 왓슨 박사는 자신의  

추리력 부재로 인해 주인공 셜록 홈즈를 부각시키는 인물이었지만
작년에 개봉한 리메이크 동명 영화 속 왓슨 박사는 주인공 셜록 홈즈 앞에서 꿀리지 않는  

호기로운 인물로 등장하였다. 결국 외국의 사례들처럼 독창적인 블록버스터 급 작품이  

우리나라에도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적 암맹에서  

벗어나야 하며 우리나라 고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대중들이 <춘향전>의 원전을 조금이라도 읽거나 이해를 하고 있었더라면
두 남자를 사로잡으려하는 영화 속 팜 파탈로 나오는 춘향에 대해서
그리 놀라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언급한 외국 유명 영화들은 고전을 읽은
독서 문화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읽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전 읽기에 대한 역효과일뿐이다. 우리나라 고전의 대중적인 보급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전통 고전에 현대적인 감각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러면 독자들이  

고전에 대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춘향문화선양회와 같은 고전을 알리기 위한 단체 설립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우리나라 고전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  

설립 단체의 유지와 홍보 활동의 이익에 급급하다가는 정작 단체 설립 목적은 

잃게 된다. 그러면 고전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알리기는커녕 더욱 더 대중들의  

왜곡된 인식을 낳게될 뿐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고전은  

외국에서 온 고전과 다양한 문화에 의해서 사장(死藏)될지도 모른다. 
 

서양의 고전들도 읽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자기 나라의 고전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  작품 속의 과거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현상들도 새롭게 보이게 되며  옛날의 고전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하녀'가 못한 일 '방자전'이 해냈다] 머니투데이 7월 19일 입력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7190057

[화난 춘향문화선양회, “영화 ‘방자전’이 춘향 모독했다”] 일간스포츠 6월 4일자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405287

[춘향문화선양회] http://www.nwchunhy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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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 경매 회사의 실체

미술 경매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어느 미술품 경매 회사가 김환기, 천경자 등  

한국의 유명한 현대 화가의 초기 작품들과 고액가의 보석, 시계 등을 경매하게 된다는  

기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김환기, 천경자라면 미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인기 화가들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보다 컬렉터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경매 작품들의 백미(白眉)가 있었으니, 그것은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이다.  

  


 

 

 

 

 

 

 

 

유명 미술 경매 회사에서 출품한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

 

경매 작품들 중에서 제일 높은 추정가를 기록한 작품이 천경자의 <백일>이라는 작품이며  

3억~5억 5000만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높은  추정가의 작품은 바로 르누아르의  

작품으로 1억 5000만~2억5000만원이다.  나머지 다른 작품들은 한국 화가들의  

작품들인데, 추정가는 르누아르의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평균적으로 500만원~2000만원 사이의 추정가 범위를 정하고 있다.

천경자의 작품이 이번 경매 출품들 중에서 최고의 낙찰 가격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작품도 무시할 수가 없다. 한국의 미술 경매장에서 외국의 그림이
출품된다는 점은 보기 드문 일이다. 무엇보다도 르누아르는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화가이다. 루브르나 오르세와 같은 세계 유명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 하나 정도는
소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컬렉터들은 르누아르의 그림에 당연히 눈독 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르누아르는 벌거벗은 여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림이 많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작품을 경매 관련 기사를 통해서 처음 보게  

되었다. 다른 미술 책에서 보지 못한 작품이었다. 물론 르누아르는 죽을 때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을 그렸으며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어딘가에서 어둠과  

함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 그림도 긴 세월동안 어둠과 먼지들 사이에
지내다가 드디어 이번 경매를 통해서 빛을 본 것일 게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낯익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나니 또 한 번의 태클 본능과 결합된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과연 이 유명한 그림이 어떻게 한국 경매 시장에서 등장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르누아르의 그림이 천경자의 그림보다 추정가가 낮은지,
그리고 이 그림이 정말 진품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세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유통 경로가 보안성이 짙은 거래라서  

그런지 내가 알고 싶어 하던 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작품 추정가가  

생각보다 낮게 책정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외국 작품들은 자신들의 무대인  

외국 경매 시장보다 우리나라 경매 시장에서는 낮은 가격으로 거래된다.  

미술작품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라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국내 컬렉터들의 작가 인지도, 작품 선호도에 따라 해외에서 통용되는 가격보다  

훨씬 낮은 선에서 경매 추정가가 책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르누아르가  

유명하다고 해도 작품 인지도가 낮으면 우리나라 컬렉터의 구입 의지가
낮을 것임을 고려하여 낮은 가격으로 책정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을 하다 보니 기사에 나온 이 유명한 미술 경매 회사에 대해서
새로운 점을 알게 되었다. 확인 결과, 이 미술 경매 회사는 이전에도 다른 르누아르의  

작품을 경매 시장에서 출품한 적이 있었다. 르누아르 말고도 경매 시장에 출품되었던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들을 열거하자면 이중섭, 조르주 브라크, 앤디 워홀 등이 있다.
그리고 최고로 높은 경매 낙찰률이 70%이었다. 이것은 침체되었던 한국의
미술 시장의 부활 조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많은 경매 회사 관련 뉴스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4개월 전의 기사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회중시계가 경매 물품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 시계가 진짜로 순종이  

사용한 회중시계가 맞는지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순종의 시계가 경매 사이트에 공개한 것을 본 문화유산 관련 전문가는
순종의 시계는 순종의 능에 들어가는 부장품 목록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땅 속에 있어야 할 시계가 어떻게 경매장에서 등장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면서 진품 논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쐈다. 무엇보다도 전문가의 의견이  

신빙성이 높은 것은 순종의 능이 지금까지 도굴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전문가는 경매 시장에 나온 시계가  단순히 순종이 소장한 시계가 아니라  

자신이 구입한 많은 시계들 중의 하나라고 추정하였다. 결국, 경매장에서 출품  

예정인 시계는 순종이 직접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전문가는  

영리적인 목적을 위해서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단정 짓고 홍보를 하는 경매 회사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진위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어떤 경로를 거쳐 경매에  

나오게 되었는지 확실히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작품의 본질을 보는 능력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이라는 책에서 세계사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다섯 가지 힘의 영향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였다.
그가 말한 다섯 가지 힘 중의 하나가 바로 ‘욕망’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이라도  

명시되어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대와 공간을 다르지만 인간들이 일으켰던  

역사적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욕망들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욕망들이 서로 상충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재화와 권력을 누리는 부귀영화의 욕망은 사람들 간의 대립과  

경쟁 메커니즘을 형성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런 메커니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 현상의 본질을 들어다보면 역사를 움직여왔던
보이지 않는 힘이 눈에 보이게 된다. 그래서 미술도 욕망의 힘으로 인해서 발달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앞에서 언급한 르누아르 작품의 경매와 경매 물품의 진위  

논란은 근본적으로는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의 힘에 기인하고 있다.

대중적인 미술 평론가인 이주헌은 <지식의 미술관>의 서문에서 직관을 활용해 작품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능력을 배양하는 방법을  

구슬을 꿰는 실로 비유하였다. 지식과 경험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구슬이라면 직관은  

실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실로 구슬을 꿰는 것처럼 하게 된다면 감상 능력과  

안목 수준이 높아진다. 그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예술의 본질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식의 미술관>에 소개하고 있는 몇 몇 키워드를 동원하여  

두 가지 욕망 코드와 관련시켜서 오늘날의 예술 현상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1 남성의 성(性)적 욕망 : 
     나는 보고 싶지만, 남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줘서는 안 돼! 
 

여성의 벌거벗은 몸을 그린 그림들은 여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남성들의 관음증을 유발하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성적 판타지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재미있게도 벌거벗은 여성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나서 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상 증세가 심리학계에서 보고되고 있는데 이것을  

루벤스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예를 들자면 에로틱 연극으로 인기를 끌었던 '교수와 여제자' 있다.  

남성 관객들이 보면 화끈거릴 정도의 외설적인 성적 표현의 대사가 나오며    

두 남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전라의 연기와 파격적인 성행위 묘사 연기를 펼친다.  

가까이에서 보기 드문(?) 장면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남성들은  

공연 내내 꽤나 어질어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간혹 감정의 혼란을 주체하지  

못한 일부 남성 관객이 갑자기 무대 앞으로 뛰어들어 연기 중인 여배우를 껴안으려는  

돌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연극이 잠시 중단되었고, 남성 관객은 극단 측  

인원들에 의해 강제로 퇴장 당하였다. 연극도 예술의 한 일부분임을 생각하면 루벤스  

신드롬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벤스 신드롬은 벌거벗은 여성의 몸을 보면 성적 욕망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는
남성들만의 심리가 만드는 증후군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성들의 특정 심리를
이용한 정보 매체가 많다. 컴퓨터에서 보는 야동이나 포르노뿐만 아니라
이제 집 안의 TV에도 채널 돌리다보면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성적 코드를
무차별적으로 내보낸다. 그래서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정보와 매스컴 등이
그런 남성들의 심리를 24시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먼 옛날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성 누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이때는 여성 누드보다는 남성 누드가 보편적이었다. 그리스 인들은
남성이야말로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여성은 아예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 시대의 조각품들은  

다 벌거벗은 남자를 모델로 한 작품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벌거벗은  

여성의 몸을 주제로 조각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만들어봤자 여성의 불완전성만  

부각시키기 때문이니깐. 물론 몇 몇 여성 누드를 주제로 한 조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각의 모델들은 대부분 창녀, 무희, 신화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여인들이었다. 즉, 남성의 문명에서 소외된 여성들이다.

헬레니즘 시대가 오면서 드디어 여체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여성 누드의 조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인간’ 여성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으로  

작품을 설정하였다. 여자의 신체를 이상적인 형태로 표현한 조각품으로는  

‘밀로의 비너스’가 유명하다.   

 


 

 

 

 

 

 

 

 

 <밀로의 비너스>

 

우리는 그 조각을 보면서 당연히 상반신을 노출한 비너스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에도 완전히 벌거벗은 여자의 몸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얇은 옷을 입은 것처럼 표현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비너스도 상반신 올 누드가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고대 그리스의 예술은 남성 중심적이며 성차별적인 미(美)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예술적 의식은 19세기 근대까지 전해져 내려오게 된다. 

 

  

 근대 예술을 지배하고 있는 성적 욕망
  

근대 예술의 여성 누드는 여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장르로 확립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남성의 권력적 시선에서 바라 본 타자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근대의 여성  

누드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들은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었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당시 예술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던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와  

같은 공적 미술 교육 기관에는 누드 실기를 주로 남성 모델로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술 학교 내에서는 여성 누드를 그릴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반(反) 아카데미 화가들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여성 모델을 고용하여 여성 누드를  

그렸으며 간혹 아카데미 소속 학생들이 화가의 아틀리에에 찾아가서 여성 누드를  

그리곤 하였다. 어떻게 보면 아틀리에는 화가들만의 공간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여성  

모델들도 그리스 시대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모델들은 매춘업, 술집 같은 하류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근대 문명에서 소외된 여성들이다.   

 

여성 누드는 단순히 누드를 바라보는 남성 관람객들에게만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아니다. 주로 남성인 화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스타브 클림트는 황금빛과 같은 다채롭고 화려한 색깔을 이용하여 여성 누드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지금은 예술적 평가는 높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클림트의 작품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아틀리에에 여성 모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데  그 중에서 무려 13명의 모델들과  

관련된  염문을 뿌렸으며 심지어 클림트의 누드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그와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남성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여성 누드의 무서운 위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 누드는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방하면서도 남성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이중적인 예술 장르이다. 여성 누드화가 이중적인 것처럼 남성들의 생각도 여성 누드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여성의 알몸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것은 혐오하고 오히려 그런 여성들을 폄하하기도 한다.

그런 남성지배적인 사고는 지금도 남아 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로 뜬  

파라과이 노출녀 라리사 리켈메의 예를 들 수가 있다.
전 세계 남성들 대부분은 지금의 리켈메라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한 문제의 사진을
봤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 사진을 봤다. 전 세계 남성 네티즌들은 그 한 장의 사진으로
그녀를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고 리켈메가 자신의 고국이 월드컵이 우승하게 되면
올 누드로 거리를 돌아다니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니 전 세계 남성들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파라과이는 우승을 못하게 되었고, 월드컵 폐막이 

다가올수록 과거에 찍었던 그녀의 누드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녀에 향한 일부 남성  

네티즌들의 시선은 싸늘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녀가 최근에 인터뷰에서 월드컵을  

이용해서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그 기사 이후로  

그녀의 빼어난 몸매와 쿨한 매력에 흠뻑 빠졌던 남성들은 한순간에 그녀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몸을 팔았던 여자라고 말이다. 물론 그녀의  

누드 사진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그녀를 옹호한 남성 네티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의 상황과 전혀 다르다. 불과 3주 전에 그녀의 몸매에 대해서 끝이 없는
칭찬이 이어졌으며 그녀가 말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곤 하였다.
속내는 리켈메의 누드를 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그녀가 단지 마케팅 차원으로 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마케팅에 속아 넘어갔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아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부끄러움도 없이 개념 없이 옷을 벗는 풍기문란한 여자로  

손가락질하고 있다. 
 

 

 

 #2 소유와 지배의 욕망 : 나,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야 
 

15~16세기는 유럽은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동방과 신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를 세계사에서는 ‘신항로 개척’이라고 말한다.  신항로 개척으로  

인하여 유럽과 다른 대륙 간의 교역이 더욱 활발해지게 된다.  그래서 동방과 신대륙의  

다양한 새로운 작물들과 물품들이 유럽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상업혁명에 큰 공헌을 한다. 

유럽의 신항로 개척은 노예무역과 팽창을 통한 식민지 형성이라는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특히 신항로 개척으로 급부상하게 된 신흥 상류층들에게는 자신의 부와 권력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진귀한 물건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자신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모은 물건과 동식물들을 따로 자신만의 컬렉션으로 만들어 자신의 능력과 

부자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과시욕은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또 하나의 예술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자신의 수집품들을 모은  

컬렉션을 그린 그림을 쿤스트카머라고 한다. 반대로 그림과 조각 등 예술 작품만 모은  

컬렉션을 그린 그림을 피타코테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과시욕은 자신이 사냥한  

동물들을 그림까지 표현할 정도이다. 사냥감 그림도 한 때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세 가지 예술적 유행이 상류층의 욕구만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17세기에 이르러 정물화의 발달도 쿤스트카머와 피타코테카의 유행에 한 몫 기여했다.
상류층들은 자신들의 컬렉션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권력에 관한 과시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과 탐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컬렉션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전혀 다른 세상. 즉, 동방과 신대륙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그 곳의 진귀한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지는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19세기는 동방에 대한 서양인의 관심이 한창 하늘을 찌를 때였다.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동방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던 지중해 부근뿐만 아니라 인도, 아시아까지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동경에 대한 그들의 상상력의 동경은 식민지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와 맞물리게 되면서 동방 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방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은 오리엔탈리즘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시대를 나타나는 문화적  

유행의 흐름에 따라 화가들은 오리엔탈리즘 회화를 구축하게 되면서 그들은 식민지에  

대한 우월적인 시선과 제국주의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과거에 쿤스트카머가 진귀한 물건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킨 것처럼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그림들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방 문화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식민지나 다른 동양의  

약소국에 침입하여 그곳의 문화재를 약탈하기까지 이른다. 서양인들은 예술품을  

애호(愛好)한다는 명분으로 식민지와 약소국의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전쟁의 승리자가 패자로부터 전리품을 약탈해오는 그들만의 관례에서 유래된  

일종의 소유 욕구 해소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우월감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가해국인 유럽과 피해국인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이에 일어나는 대륙 간 문화재 반환 시비는 아직까지도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무조건 그림만 팔면 그만  

 

시간이 흐르면 시대와 공간은 변하고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소유와  

지배라는 욕구의 바다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바다는 서로 이어져있다.  

하나의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배하는 자만이  

가능하다.  지금도 상류층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명예를 축적하고 있다.  

그리고 멈출 줄 모르는 소유와 지배욕은 미술 시장에서도 손을 뻗고 있다.
과거에는 화가가 그림을 팔기 위해서는 자기와 거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화상을 통해서  

그림을 팔고 수입을 얻었다. 화상들은 화가의 그림을 팔기 위해서 대형 백화점에 물건
진열하듯이 그림들도 쇼 윈도식 마케팅을 이용하여 미술 애호가들의 시선을 끌도록  

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단순히 그림들을 진열하고 고객이 구입하기를  

기다리는 방식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현대에 오면서 미술 시장은 두 가지 마케팅  

방식으로 명확하게 갈라지게 된다.

화가들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VIP 고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구입하도록 만드는  

마케팅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팔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화가라는 이름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방법 밖에 없다. 그들은 가만히 화가의 아틀리에에 처박혀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틀리에를 벗어나 좀 더 대중들에게 노출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만의  

마케팅을 개발하여 미술 시장뿐만 아니라 미디어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는 앤디 워홀이 있으며 이런 부류의 예술가들을 아티스트 마케터라고  

부른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아틀리에는 ‘팩토리’라고 부르면서 당시 인기 스타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대중적인 스타들을 자신의 작업장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게 되었다.

지금은 최고의 아티스트 마케터는 데미안 허스트이다. 그의 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재료와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데미안 허스트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죽은 상어 시체에 모터를 달아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유리관에서 움직이도록 

 설치하였다. 작품 출품 당시 갤러리들의 충격을 주었으며 최초의 낙찰가가 

 1억 원이었다가 2005년에는 140억 원에 거래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 같지 않은 예술 작품을 VIP 고객을 대상으로  

노골적인 마케팅이다. 한 때 미술계를 떠들썩했던 스캔들이 있었는데
해골에 무수히 많은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세계 전시 투어를 하게 되는데 전시의 목적은 단순히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팔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5000만 파운드의 가격이라는  

최고가 기록을 세우면서 팔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미술 경매 시장이 활성화된 것을  

알 수 있듯이 현대의 미술 시장은 과도하게 시장화 되었으며 상업적인 측면이 강하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략은 위작을 만들어 거래하는 것이다. 유명한 화가의 초창기  

작품이라고 한다거나 지금까지 공개되지 못한 새로운 작품 발굴이라는 식으로  

소란스럽게 홍보를 하는데 대부분 위작 작품을 알리기 위한 일반적인 방식이다.  

단순한 방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유욕에 눈 먼 고객들은 화상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개봉한 영화 <인사동 스캔들>처럼 김래원이 분한  

복원 전문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거대 미술 경매 시장과 관계를 맺어
위작들을 만들어 내고 경매 시장에 내놓고 있다.  결국에는 위작 거래도 고객들의  

소유욕을 부추기게 되면서 미술 시장을 상업화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 
 

지루하고 긴 리뷰를 읽게 되면 책 속에 등장한 키워드가 눈에 보일 것이다.  

나름 리뷰를 조리 있게 쓰려다보니 내용도 길어지게 되었으며 간혹 읽다가 내용이  

비약적일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키워드와 관련된 책 속의 도판들을  

리뷰에 넣으려고 했지만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누를 끼칠 거 같아서  

넣지 않았다. 읽는 내내 길고 지루한 형편없는 글이 되고 말았지만 독자들이  

직접 책 속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리뷰 내용마저 책의 내용을 

스포일러성을 느끼게 했더라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내용의 논리성은 썩 좋지 않았지만  

이번 리뷰 작성 덕분에 책에 있는 미술 키워드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이 책과 리뷰 작성을 계기로 제대로 미술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팔만대장경에는 짧지만 읽으면 긴 여운이 남는 문장 한 구절이 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
역사도 그렇고 미술사를 간단히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거 같다.  

리뷰도 잘 써야겠다는 과도한 욕심 때문에 내가 봐도 욕이 절로 나오는 글이 되고 말았다.
별로 집착하지도 않을 정도의 조그마한 ‘욕심’이 결국에는 우리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탐욕’으로 발전하게 된다. 벌거벗은 여체의 아름다움을 상징했던 여성 누드는
지금은 남성들의 관음증을 유발하게 만드는 음란한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방에 대한 서양인들의 지적 욕구가 먼 훗날 동경했던 동방을 식민지로 삼아 약탈하고
무자비하게 살육할 것이라고는 상상이나 했었을까?
살아있는 동안 500여 점의 작품들 중에서 단 한 점만 팔았던 기인(奇人) 화가 반 고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불행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작품들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액수로 팔리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그린 적도 없는 해바라기 그림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래 되고 있다. 안 그래도 고흐가 한 가닥 성격 하는 다혈질인데 하늘에서 인간들의  

끝이 없는 욕심과 욕망이 가득찬 세상을 보고 있자니 분해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일 것이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K옥션, 21일 명품그림, 보석, 시계 122점 경매] 한국경제 7월 15일자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71567021 

 

[佛 유명 화가 브라크 작품…K옥션, 11억~14억 경매] 한국경제 5월 26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52677441 

 

["외국작가 작품 경매 해외보다 국내가 싸네"] 서울경제 2008년 6월 17일자 

http://economy.hankooki.com/lpage/entv/200806/e2008061717315094210.htm 


[K옥션, 경매 눈앞에 두고 진위논란 '시끌'] 문화저널21 3월 9일자  

http://www2.mhj21.com/sub_read.html?uid=26358&section=section2 

 

[`교수와 여제자` 여배우 알몸연기에 남성 관객 돌발 난입] 

매일경제 2009년 12월 8일자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63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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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 끝나지 않은 재앙 
 

미국 멕시코 만을 검게 물들었던 석유가 3개월 만에 유출을 멈췄다.
유출을 막기 위해 새로 개발한 캡을 씌우려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였다.
아직 추후 결과를 지켜봐야 하지만 전문가들과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법. 현재까지 흘러나온 기름의 양은 222만~438만 배럴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많은 기름들은 지금까지도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다.

기름이 멕시코 만을 덮치게 된 이후 멕시코 만에서의 어업 중 가장 많은 경제적 수입을  

얻는 새우 관련 어업 종사자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으며 멕시코 만 어부들은 아직까지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유출 사고는 사상 최대의 환경 및 생태계  

파괴를 남긴 최악의 사고로 남게 될 우려가 높아졌다. 기름이 멕시코 만을 넘어서  

대서양쪽 미국 동부 해안으로 흘러들수록 집계되는 동물 피해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기름이 해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큰 생태계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있다. 비단 생태계에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오일 제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감기 증상을 보였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지금까지 장기간 원유  

노출  시 인체 피해에 대한 의학적 보고는 없지만 미 보건당국은 장기적으로  

신경계통이나 혈액 콩팥 간 등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석유에 오염된 물을  

마시게 되면 인간의 신체가 온전치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세상을 바꾼 책

환경 분야의 뉴스 중 핫 이슈인 멕시코 만 유출 사건을 계기로 해양 생태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해양 생태계 도서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레이첼 카슨의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읽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도서관에 와 보니 그 책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 바다 관련 도서가 꽂혀있는 책장까지 샅샅이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마지못해 레이첼 카슨의 대표작인 <침묵의 봄>을 읽기로 하였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가 바다의 생태계와 그것을 지키기 위한 환경 보전에 관한 책이라면 

<침묵의 봄>은 농약이 자연 환경에 주는 악영향을 고발한 책이다.

<침묵의 봄>이 자연 환경 분야의 고전이라는 것은 간혹 언론이나 학교 수업 시간에  

들어봤다. 책 뒤에는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 찬사가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이  

어떻기에 출간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환경 운동의 선구적인 도서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는 걸까? 저자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농약 성분들이 자연 생태계의 오염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농약을 만들고 사용한 인간들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구성하는 내용은 거의 환경오염과 그에 따른 피해  

사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작가가 쓴 책의 배경이 무려 40여 년 전이라서 그런 것이었을까?

저자는 당시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DDT의 유해성에 대해서 낱낱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DDT뿐만 아니라 저자가 환경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농약의 주성분들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환경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을 지금도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다

저자는 일방적으로 자연에게 악영향을 주는 농약 사용을 금하지 않는다.   

농약 사용을 줄이는 대신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의 길을 갈 수 있는 환경 보전 대안을  

제시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제시한 대안은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식물을 방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특정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목초지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런 가능성은  

  상당히 무시되었다. 곤충들은 자신이 원하는 식물만 먹이로 삼는데 그런  

  제한적인 식성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레이첼 카슨『침묵의 봄』 p 116 - 

 

저자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유기농법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농작물에는
해충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전만 해도 농민들은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농약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변할수록 사람들의 환경 보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농약 1%도 묻지 않은 농작물을 선호하게 된다.   

이런 환경 인식의 변화를 읽고 있었던 농부들과 농업 관련 연구자들은 화학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법을 독자적으로 연구 및 개발을 하였다. 오랜 연구 끝에 현재  

유기농법은 지렁이, 우렁이, 오리 등 해충이나 잡초를 먹이로 하는 특정 생물들을  

이용하는 친환경적인 방법이 개발되었다.  역시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무작정 농약 사용을 줄이라고 주장만 했었다면  

세상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을까?  레이첼 카슨이 고백했듯이 그녀가 살던 1960년대에는  

농약 속 유해물질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미치는 피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부와 연구 기관들은 유해물질이 자연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련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 출간 이후로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되었다.
그 때 1960년대의 세상이 이 정도였으니 레이첼 카슨의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농약이 묻은 농작물로 만든 음식들이 우리의 식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레이첼 카슨은 자연친화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철학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세상은 환경 문제에 관해서는  

참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환경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한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일부분 자연 파괴는 불가피하다는  

개발 옹호론자와 자연을 파괴하면서 개발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며 오히려 개발 이후에도  

환경 문제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개발 반대론자들이다. 그렇다고 개발 옹호론자들이
무조건 자연을 정복해야한다는 고리타분한 사고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까지도 구시대적 발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무분별한 벌목이 그 예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아마존 특유의 야생적인 열대 우림이 파괴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살고 있었던 동물들은 보금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동물들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아마존에 살았던 토박이 부족들도 어려운 현실에 처해져 있다. 다른 나라의  

목재업 회사들이 행하는 벌목 작업을 자신들의 눈 앞에 보면서도
이렇다 할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들은 이곳저곳 떠돌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궁핍한 삶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진출하게 된다.  

아마존의 자연 파괴와 산업화, 거기에 다가 부족들의 단명의 근본적인 원인인  

전염병까지 더하여  아마존의 자연에서만 자랐던 순수 부족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마존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존의  

나무들을 밀어붙이는 불도저와 굴착기들을 보면 아메리카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면서 인디언들에게 무시무시한 피의 응징을 가했던 백인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살고 있는 거대한 땅을 이루고 있는 모든 자연물을 경외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중의 한 구절을 비유하자면 백인들과 개발 옹호론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양날의 칼, DDT

이 책의 감수자인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의 글을 보게 되면 농약의 화학 물질에  

대한 개선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레이첼 카슨이 살았던 시대의 농약과의 차이점을  

감안하여 농약의 위험성에 대해서 상당 부분 낮추어서 이해해달라는 당부의 말이 있다.

<침묵의 봄>을 읽은 계기로 인하여 DDT에 관한 내용들을 찾아봤다. 그런데 내가 책에서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 소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된다면
자칫 환경 문제에 대한 편협된 사고방식을 야기할 수 있는 발상의 소지가 있다.

<침묵의 봄>이 출간 이후로 DDT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DDT 사용을 금지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DDT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다. 경제력이 약한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나 티푸스에 대한 대비책으로 DDT를 모기 살충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과거에 말라리아 환자가 연간 25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적인 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8년부터 1962년까지 DDT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말라리아 환자 수가 연간 31명으로까지 줄었다. 그러나 DDT가  

금지된 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 환자 수가 연간 250만 명으로 다시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DDT가 인간에게 끼치는 악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스리랑카 입장에서는 

말리리아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일부 국가에서는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서 DDT를  

합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DDT를 사용하게끔 하는 원인이 DDT에  

대한 경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DDT가 인간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DDT의 유해성에 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DDT는 인간에게 전염병을 유발하는 모기를 박멸할 수 있는 뛰어난 살충제이지만
어떻게 보면 살충제 내의 독성물질로 인해서 자연 생태계를 교란시키며 그 악영향이  

우리 인간에게도 미칠 수가 있다. 인간은 DDT라는 최고의 칼을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검을 만든 우리가 날카로운 칼날에 찔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략)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중략)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 8, 11연 중에서 -

이상화의 쓴 이 유명한 시는 당시 일제 강점기 상황을 바탕으로 일본에게 넘어간  

우리나라를 ‘빼앗긴 들’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다. 국토뿐만 아니라 국권과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봄’조차 빼앗기는 비통한 현실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1연은 조국 광복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8연은 풍요로운 국토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으며 1연에서 표현한 시적 화자의 질문은 마지막 11연에서 절망적인  

현실 인식이라는 답변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시는 마무리 짓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환경 문제도 이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정부는 4대 강 사업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며 개발 이후에도 4대 강의 자연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국가적 차원의  

사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일부 환경 관련 시민단체들은 4대강 사업은 개발로 인해
오히려 자연환경이 파괴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4대 강을 개발할 때 사용하는  

공사 재료에서 다량의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된 점을 이유를 들었다.

결국, 개발 공사를 하면서 강의 수질이 악화될 수 있으며 환경 파괴가 먹이사슬처럼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강이 오염이 되면 강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자연스럽게  

오염된 물의 독성 성분을 받아들이게 된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희귀종을  

포함한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할 수가 있다. 오염 물질을 먹은 물고기들을 먹고 사는  

수달이나 조류에게 독성 물질이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다. 당연히 물고기를 먹은  

동물들도 사망하게 된다. 동물뿐만 아니라 강에서 흘러나온 물을 용수로 사용하는  

인간도 오염 물질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레이첼 카슨은 모든 먹이사슬을  

지탱하는 것은 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말은 물이라는 관점에서 환경 문제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물속으로 흘러 보낸 독성 물질도 물로 시작하는 먹이사슬의  

순환 관계처럼 환경 오염이 주는 피해도 순환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큰 타격을 입을 수가 있다는 근거도 있다.
4대 강 사업으로 농민들은 강제 이주를 하거나, 강 주변의 채소 재배지가 감소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채소 재배지가 감소되면 채소 가격이 폭등하여 결국에는 소비자들에게도 

심각한 문제를 떠안게 되는 셈이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4대 강 사업이  

자신들의 재배지를 강제로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농민들에게 농사란  

먹고 살리는 유일한 노동이면서도 이상화의 시구처럼 ‘좋은 땀을 흘리면서 부드러운  

흙이 주는’ 자연의 위대함와 노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과정이다.
그리고 4대 강 사업으로 이주를 하거나 재배지가 사라지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게 해주었던 실낱같던 희망마저도 빼앗기게 된다면 농민들에게  희망의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침묵의 봄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의 관용어로 자리 잡게 된 도발적인 책의 제목은 영국의 시인 키츠의 시에서
‘호수의 물들은 시들어 가고 새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네’ 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시구처럼 물이 오염되면 새들은 오염 물질로 인해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예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절은 뒤로 하고 오염되고  

주변에 생물들도 살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다. 이미 죽은 자는 말은 없다.  

결국 봄이 오더라도 생(生)의 감각과 활기를 찾아볼 수 없는 ‘침묵의 봄’이 되는 것이다.

봄을 침묵케 하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자연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침묵의 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연이 파괴 되어가는 현실의 원인을 

회피하려 하거나 알면서도 부정하는 몇 몇 인간들의 침묵이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환경 문제는 자신의 일과 관련 없으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환경 문제를 야기 시킨다는  

생각도 해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환경 문제의 원인은 남 탓이라고 돌리고 묵비권을  

행사하듯이 침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기업인은 자신의 사업으로 인해 자연  

파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국가 경제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명분주의식 변명을 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공장은 사람들 몰래 폐수들을 강에 흘러  

보내기도 한다. 폐수로 인하여 강이 오염되면 앞으로 초래할 환경 문제들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몰상식한 행동을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처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거나 최대한 자신의 죄가 걸리지 

않기 위해서 침묵하기도 한다. 
 

 

 

 3년 전,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내가 앞에서 이상화의 시까지 들먹거리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우리가 처한
자연 파괴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침묵하게 되면 후세에도 불편한 현실이  

이어질 것이며 봄의 침묵도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리 스스로 자연에 대해서  

침묵을 하게 되면 자연이 우리에게 줬던 아름다움과 삶을 위한 혜택 등  

좋은 것들이 자연 파괴자들로부터 허무하게 빼앗기게 될 수가 있다.

멕시코 만 유출 사태가 남의 나라 일이라고 해서 무심코 넘어 가지 말자.
우리나라도 3년 전에 충남 태안에서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를 겪은 적이 있지 않은가.
원인은 자연 상황을 무시한 채 선박을 운행하다가 충돌로 인해 태안의 모든 해안 지역을
타르 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태안의 해안에서 일하는 어부들은 그 사고로 인해서
자식 같이 여겼던 수산물들은 폐사하였고 앞으로 펼쳐질 여생의 희망을 한 순간에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국민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엄청난 해양오염 재앙을 함께 극복하고자 태안으로 향하는 전국의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 사이에 5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 타르 덩어리를 제거하는 데 동참하였고, 재난 극복을 도우려는  

성금도 끊이지 않았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레이첼 카슨이나 대니 서와 같은  

개혁적인 환경 운동가처럼 거창한 행동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당장 해결될 거  

같지 않은 커다란 환경 문제도 관심을 가져 보고 단순하게 접근을 해보면 해결의 답이  

보인다. 그리고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듯이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힘을 합치면 환경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가 있다. 환경과 자연 친화를 중시하는  

그린 코드 사회로 발달할수록 우리들도 환경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고 이에 대한  

성숙한 윤리적 태도와 이를 바탕으로 공동적으로 해결하려는 참여 의지를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인용 관련시가 출처 및 링크 

 

[멕시코만 원유유출 3개월만에 첫 차단] 헤럴드경제 7월 16일자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716000272 

 

 

[ [멕시코만 환경 대재앙] 원유 유출 47일째… 칠펠리컨·돌고래 떼죽음,  

방제요원 건강 적신호 경고] 국민일보 6월 5일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5&aid=0000413705 

 

  

 

인용 검색 출처 및 링크 

 

위키백과 [4대강 정비 사업] 

http://ko.wikipedia.org/wiki/4%EB%8C%80%EA%B0%95_%EC%A0%95%EB%B9%84_%EC%82%AC%EC%97%85 

* 문서 내용 현재 진쟁 중임, 불확실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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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낯 뜨거운 전시회 홍보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하는 ‘퓰리처 상 사진전’에 대한 인기의 열기가 대단하다.
이번 달 15일부터 매주 목요일 관람 시간을 두 시간 연장하기로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시회 폐장 시간이 오후 8시이므로 목요일에는 오후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야 볼 수 있는 서양 예술 작품이나 역사적 희귀 유물들이  

전시되는 대형 기획 전시회가 우리나라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이전의 현상과  

교하면 사진 전시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퓰리처 상 사진전’을 개최 및 책임을 맡고 있는 예술의 전당은 ‘영국 근대 회화전’도  

개최하고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터너, 컨스터블, 고갱 등 근대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영국 근대 회화전’도 ‘퓰리처 상 사진전’과 더불어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관람객의 수를 기록하고 매스컴의 홍보가 많았던 ‘피사로와  

그의 가족, 친구들’ 이나 ‘르누아르 전’과 비교하면 홍보가 미미하고, 전시회 관람객 수에  

대한 소식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같은 기간에 전시하고 있는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 때문에 가려져 있는 거 같다.  

 

‘퓰리처 상 사진전’의 연장 관람 시간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줄을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을 찍은 사진이 옆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 내용에는  

사진 속 관람객들을 ‘젊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고 쓰고 있었다. 기사문을 읽어갈수록 기자의  

감정  이입이 담긴 문장에 낯뜨겁기만 하였다. 인생 선배격인 어른들이 한 마디 하시면  

두 귀를 닫고 대화를 회피하려고만 하는 단절된 세대이며, 지나간 과거나 역사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옛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다.  

기사문 중간 내용에서 전시회를 ‘역사와 인권 교과서’라고 추켜세우는
문장과 절묘하게 어울려져 ‘젊은 세대들도 공감하는 역사와 인권 전시회’임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줄 서 있는 관람객들을 보면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지금도 방학 기간을 맞아 많은 학생들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전시회에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전시회 관람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전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명한 수상작들이 전시되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빼빼 마른 아프리카의 아이의 사진,
냉정하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군인과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 단 한 방으로  

결정짓게 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콩의 사진 등..... 대부분 수상작들은 참혹한  

전쟁의 참상과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 국가의 사람들의 사진들이 있다.  

권위 있는 수상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을 찍은  

사진들도 있다. 왜 굳이 아름다운 인상주의 예술 작품 전시회를 마다하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진 작품을 보려고 오는 것일까? 
 

 

 

 고통 받는 육체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자의 육체가 그려진 그림보다는
고통 받고 있는 육체가 그려진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특히 유럽 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성경 속의 유명한 순교의 장면을 그린 종교화가 

유행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양 손과 몸에 상처를 입은 예수의 모습이나 화살이  

온 몸에 박힌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은 인간이 저지른  

원죄의 벌을 대신 받고 있는 위대한 성자(聖子)로 비춰지게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경 속 순교의 장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게 되었고 그림 속의 순교자들은  

이전보다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고통을 인내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뤼네발트 <십자가책형>,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못이 박힌 예수의 두 손과 두 발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피와 

  예수 온 몸 전체가 생긴 상처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적인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의 고통을 공감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내가 언급한 그림의 표현을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1>을 참고하면 된다. 

 
근대에 와서는 그림의 주제가 대담해진다. 인간이 저지른 전쟁과 살육 현장을 화폭에  

담아내어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잔혹성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화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람객들에게 인간의 추악한 면을 알리기 위한  

충격 요법과 동시에 잔인한 장면이지만 더욱 더 보고 싶게 되는 무의식적인   

사디즘(Sadism)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며, 인간은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들라크루아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카메라가 발달됨으로써 사진기술이 발달된다.
사진 기술이 도입이 되어서도 ‘고통 받는 육체’에 대한 주제는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특히 전 세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는 ‘종군기자’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TV가 없었던 시절에는  

전쟁터의 모습을 세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진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진의 셔터를 눌러댔다. 총탄에 맞아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병사와 포탄에 맞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진 병사의 시체가 찍힌
사진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전 세계 시민들에게 반전(反戰)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진의 활약은 끝나지 않았다.  

냉전 시대의 사회주의 국가 사회에서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살육 장면이 담긴 사진들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하였다. 전쟁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비인권적인 사회 문제와 현상들을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들은 셔터 누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찍은 사진은 빈곤국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촉발시켰고, 미군의 공습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어린이를 찍은  

사진은 미국이 시작한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의 사진 작품은  

예술성을 넘어서 작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사회의식을 관람객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그들에게도 사회 현상에 대해서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한 현상을  

다루는 사진작가들은 아무도 알고 싶지도 않은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을 사진으로  

촬영함으로써 사회를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일종의 사회 운동가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진, 관람객 그리고 TV : 불편한 삼각 관계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펴낸 저자 수잔 손탁은 오늘날의 사진 사업을 비난하고 있다.
선혈이 낭자하고 신체 일부는 절단된 사진들은 보는 이들에게는 충격을 주게 만든다.
저자는 이 점을 문제 삼아 사진 사업은 충격을 이용해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물론,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전쟁을 향한 비난을 북돋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쟁의 현실을 전달해주는 사회적인 공감  

형성은 저자는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람들이 사진 속에  

나타나는 고통의 아우라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수잔 손탁이 제기한 사회적인 문제는 사진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TV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사진작품들은 자연스러운 장면이기보다는 

작가와 사진 속 대상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로 유명한 원작 소설 <아버지의 깃발>의  

표지 속의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조 로젠탈의 1945년 퓰리처 상 수상작에서  

따온 것이다.   

 

   
 

 

 

 

 

 

 

 

 

 

                                       조 로젠탈 <성조기, 수리바치 산에 게양되다>

 이 사진으로 인해서 치열한 전장 속에서 끝내 승리한 미국을 상징하게 된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이 역사적 사진이 의도된 작품이었음을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진이 진실임을 여겨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사진이  

의도되었다고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도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어도  

대다수 사람들은 사진 속 장면들이 실제이며 우연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결국, 오늘날의 사진 작품들은 생생하게 전달되는 현실성과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생기는 허구성이 결합되는 키메라(Chimera)적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기묘한 결합으로 탄생한 사진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여러 가지 해석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람객은 사진을 보면서 이런 참혹한 일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잔혹함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더구나 문제가 있는 점은 관객들은 사진이 전달하고자 하는 충격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사진 작품이 의도적인 

구성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면 사진이 정작 알려주고 했던 의도는 퇴색이 되고, 관객들은 

그 때 알게 된 사진의 허구성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외 토픽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기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수잔 손탁은 관람객들의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으로  

TV에게도 공범죄임을 증명하는 화살을 날리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TV의  

등장으로 사진과 신문을 넘어서 가장 지배적인 보도 체제로 확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TV를 보면서도 타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안방에서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텔레비전 안의 세상 보면서 동점심이나 격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텔레비전 안의 세상도 의도적으로 구성한 세상이다.
방송으로 전파되기 전에 많은 보도 장면들 중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선별한다.  

결국에는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비춰지는 전쟁이나 빈곤 국가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TV 속 이미지는 시시각각 시청들에게 비춰진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TV 속에서 범람하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무감각해지게 된다.  

사람들이 무감각해지는 원인에는 의도적인 면도 더러 있다. 이미지가 주는 고통을  

인식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스스로 외면하기 위해서 무감각해질 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으며 자신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한, 쉽게 타인의 고통과의 합일이 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만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능력만 지적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연민만 느끼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을 보고 고통의 연민만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현실을 방관적으로 받아들인  

인식이 낳은 무고함을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저자는 심하게 손상된 시신이 담겨진  

사진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혔던 점을 예를 들어서
그런 사진 작품들은 과거 식민지주의의 오래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한다는 것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꼴이 된다. 

수잔 손탁은 9.11 테러에 관한 칼럼에서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불의의 테러 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과 추모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테러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게끔 하는 범인은 무역 센터를 폭파하게 한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중동 국가와의 대립을 조장하는 미국도 공범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패권자임을  

자처하면서 세계 평화를 주장하지만 속마음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평화를 저해하고 있는 이중적인 미국 권력의 잣대에 휘둘리는 바보가 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오류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자는 단순히 타인에게  

연민만 베풀지 말고, 고통을 받는 그들과 우리는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해결 방안이 추상적이라서  

독자들에게는 깊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최선의 대안에는 이 방법 밖에 없는 거 같다.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 
 

퓰리처 사진전에 관한 홍보성 짙은 기사문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사진전을 관람했다는 기사문이었다.  

사진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정 총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기사문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문에는 사진전을 보고 난 후의 정 총리의 소감이 짤막하게 인용하고  

있었는데, 그의 소감을 보고 나니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정 총리는 사진전은  

‘역사적 호기심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회’라고 평했다.  

이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살아있는 역사라고 비유하였다.
퓰리처 상 사진 작품들이 전시하는 목적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전시회와 차원이 다르다.  

사진 작품에는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역사의 현장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을 알려주는 역사와 인권의 이력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진전을 역사와 인권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전시회임을 표현한 정 총리의 말은  

공감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정 총리의 말을 거꾸로 비유하자면 퓰리처 상 사진전은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정 총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자극받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적 사진 작품들을 보면서 사진에 뿜어내고 있는 고통에 대해  

자극을 느껴보고, 역사의 과오들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성찰하는 행위와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지적  

행위은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성찰하는 행위는 수잔 손탁이 주장한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몸소 느껴보고, 사진 속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요인들을  

공감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반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정 총리의 말 그대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역사의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지적 호기심을 느끼고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만  

훑어보고 가는 것은 제대로 된 퓰리처 상 사진전 감상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정 총리의 인식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퓰리처 사진전을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가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에 혹하여 전시회를 찾는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을 위해서 방학 기간을 틈타 자식들 손 꼭 잡고 전시회를 찾는 부모님들.
그들도 사진 속의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공감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기 보다는
단순히 전시회의 홍보, 아니면 타인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정 총리가 베이브 루스의 은퇴식을 찍은 ‘그의 등번호, No. 3' 이라는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마지막 기사 문장을 보고나니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개입하려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퓰리처 상 사진전의 광고를 보고 난 뒤에,  

이번 사진전이 우리나라에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거 같은 역사적인 전시회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한 번은 꼭 전시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수전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면서
내가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사진전을 제대로 관람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진 전시회에 직접 찾아가서
진지하게 관람하는 일만 남았다.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시회 관람을 계기로 나도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두근거려진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퓰리처상 사진전’ 끝없는 인파 … 15일부터 관람 시간 연장] 중앙일보 7월 5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89726 

 

[정운찬 총리 “퓰리처상 사진전, 역사적·지적 호기심 자극”] 중앙일보 7월 15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7/15/3912183.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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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쓰는 김연수 도 이 책을 추천하더군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데

마음만 먹은지 1년이 넘었네요 --

cyrus 2010-11-06 16:04   좋아요 0 | URL
김연수 씨가 이 책을 추천했었군요.
간혹 이 책 중간중간에 잔인한 사진들 몇 점 있지만,,
전쟁과 국제 분쟁이 사라지지 않은 지금 이 시대에
수잔 손택이 남긴 메시지를 읽게 되면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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