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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ㅣ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유토피아, 엘도라도, 샹그릴라
『○○투어,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국내 섬 여행』데일리안 2010년 5월 25일 입력
『윤증현 “공짜점심은 없다..... 유토피아적 주장』노컷뉴스 2010년 3월 23일 입력
우리나라 대중 매스컴에서는 ‘이상향(理想鄕)’이라는 단어보다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리고 대중들도 매스컴에 주는 전달의 영향에 의해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즉,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요즘은 유토피아의 뜻이 확대되어
다음과 같은 기사 제목과 같이 차용되고 있다. 인간의 손이 거치지 않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섬을 유토피아라고 말하며,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나
제도에도 ‘유토피아적(Utopian)'이라는 단어로 비유된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쓴 공상 소설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어로는 ‘아무데도 없는 나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목 그대로 ‘유토피아’라는 이상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의
생활상을 묘사하였는데 작품 의도는 당시 영국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유토피아’ 말고도
이상 세계를 뜻하는 단어들이 있다. 아마존 강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 도시
‘엘도라도(El Dorado)’, 제임스 힐튼의 동명 제목 소설로 인해 알려지게 된 평화와
행복의 도시 ‘샹그릴라(Shangri-La)’. 재미있게도 이 세 가지 이상향들은 각각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처럼 말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1997년에 중국 정부는 소설 속의 ‘샹그릴라’가
티베트에 위치하고 있는 ‘중뎬’이라는 지역임을 공식 발표를 하였고 4년 뒤에는 지명을
아예 ‘샹그릴라’로 개명하였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고원이 많고 천연의 자연 상태를
간직하고 있어서 이상 세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중국과
티베트와의 관계가 냉랭한 분위기임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친(親) 티베트적인 모습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하는 중국의 ‘샹그릴라’ 공식 발표는 미덥지가 않게 느껴진다.
‘샹그릴라’는 소설 속에서만 그려지는 이상 세계로 기억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거 같다.
우리나라에도 유토피아가 있었을까?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TV나 신문 속에서 등장하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많이 보고
들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 세계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스컴의 영향으로 인해서 ‘이상 세계=유토피아’ 라는 서구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정작 우리나라의 이상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나날이 갈수록 홍수 흐르듯
유입되고 있는 서구 문화의 영향과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유토피아 문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오랜 가뭄 끝에는 단비가 한 번이라도 내리는 법. 우리나라의 유토피아 문화에
관한 도서가 출간되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저자는 역사 속에 사라져 가고
있던 우리나라 고유의 유토피아를 복원하였으며 유토피아와 관련된 선인들의
문헌 자료와 일화, 그리고 그림까지 배치하여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한국적인 유토피아의 세 가지 키워드
책에서는 이상 세계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엿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꿈을 화폭에 담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부터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 속의 허생이 세운 이상 국가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평소 매스컴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토피아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이상향과 한국의 이샹향의 특징을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서양의 이샹항은 대부분 사회 현실 속의 문제를 비판하거나 해결하는데 목적이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이상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자연친화적이다. 문헌 자료에 등장하는 이상향은 항상 사람의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으로
묘사된다. 특히 이상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연물은 바로 ‘복숭아’다. 옛날부터
복숭아를 먹으면 천수를 누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래 사는 산신들이 사는 세계에는
꼭 복숭아나무가 있다고 믿어왔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무릉도원에 가게 되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본 장면들이 너무나 아쉬워서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화가 안견에게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림의 오른쪽을 꿈 속 이상향으로
표현했듯이 이상향을 상징하는 복숭아나무 밭이 펼쳐져 있다. 이 밖에도 이상향을 그린
다른 그림들도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평온한 분위기가 감도는 자연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장수(長壽)를 하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상들이 꿈꿔왔던 이상 세계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 칩거하는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조상들의 문헌에 살펴보면 현실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 우연히 이상 세계에
들어가게 되어 몇 일간 그 곳에서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현실 세계에
돌아보면 자신이 살았던 현실은 이미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이상 세계의 하루는 현실 세계의 10년과 맞먹는다. 장수를 누릴 수 있는 이상 세계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꿈꾸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하지만 조상들은 장수를 하고 싶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도 이런 이상 세계를 통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유교적인 이상 세계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토머스 모어는 당시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토피아라는 현실에서 선보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토머스 모어처럼 당시 조선 시대의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이상 세계를 꿈꿔왔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에는 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계급 없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 사상은 버리지 않았다.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만큼 이웃끼리 서로 도우면
살아야 했으며 웃어른을 공경하는 기본예절은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문을
공부하여 정신적 수양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사회에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유교이념을 탈피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좀 더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다
현실 세계와 같은 이상 세계를 구상했다는 점은 눈 여겨 봐야할 부분이다.
판미동 사람들,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를 세우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이나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된
유럽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그들의 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들 이외에도 새로운 이상적 공동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으며
시도 끝에 이상적 사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나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유토피아 실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공보다는 실패의 결과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가 있었으며 그것도 무려 1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관련 문헌 자료들을 통해 서
경기도 가평군의 판미동이 우리나라에서 세운 이상적 사회 공동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석이라는 명망 높았던 가문이 이곳에 정착하여 사회 공동체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 이념을 유지하면서도 공동체 일원 모두 평등함을 갖춘 그들만의 사회
제도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점은 판미동 사람들은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상향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그만큼 이상 세계가 있다고 해도 현실 세계 사람들이 그곳을 찾기란 힘들다.
이상향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 자신들의 구역에 들어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현실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비밀을
유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판미동 사람들은 다른 지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인사성 밝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판미동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판미동은 유명해지고 전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판미동 사회 공동체도 100년 이상은 넘기지 못했다. 전국에 알려진
소문에 의해서 공동체 관리가 어려운 것도 있었으며 신석 집안의 후손이 벼슬에 올라
서울로 이주하게 되면서 판미동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이상 사회 건설을 우리나라 조상들은 실현시켰으며 심지어 10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이다.
상상하라, 그러면 이루어지게 되리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 문화를 접하게 되면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상상력이
집약된 영화나 만화들을 보게 되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나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문화적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문화적 현실의
문제점의 근원은 유교 사상에서 기인한 조선 사회의 고정적이며 폐쇄된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근거는 어불성설이다. 조너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라퓨타 섬의 학자들처럼 조선의 지식인들이 상상력을
학문에서 무시한다거나 단순히 가부좌 틀어서 사서삼경을 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결과물들은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한층 더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던 지식인들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시도하였다. 그래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래도 우리나라 문화는 상상력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데
완벽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에 대해
상상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공상주의자들이 하는 생각이라고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고정된 사고의 틀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런 공상주의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실제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파블로 피카소의
말처럼 우리가 헛된 망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