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 나이트 1 범우 세계 문예 신서 14
리처드 F.버턴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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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 아라비안나이트

 

 

 무모한 천일야화 도전


이번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주최한 리뷰 이벤트에서 운이 좋게 당첨이 되어 『천일야화』세트를 받게 되었다. 원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세트 중 랜덤 발송이었지만 이미 『신』세트 모두 소장하고 있던 터라 뭐 어떻게..... 저렇게 하여.....『천일야화』세트를 받게 되었다. 사실 『천일야화』세트를 받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읽었던 축약본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닌 완역본의 고전을 서재에 있다는 자체가 기뻤다. 그리고 1001Books 독서 프로젝트 목록에도 『천일야화』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번 당첨이 나의 독서에 큰 활기를 불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천일야화』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리처드 F. 버턴 (1821~1890) 판이 아니다. 버턴이 번역하기 100여 년 전에 이미 프랑스의 앙투안 갈랑(1646~1717)이라는 작가가 방대한 이슬람의 전설과 민화를 번역한 것이다. 이슬람 문화를 유럽에서 최초로 소개한 사람을 리처드 버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앙투안 갈랑이 먼저이다. 이 책에 대한 알라딘 서지 정보에 의하면 발행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면 괴테, 스탕달 등의 작가에도 큰 영향을.....  

 

이야기가 갑자기 앙투안 갈랑 버전의『천일야화』로 새는 거 같다. 자세한 정보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검색해서 찾아보시길. 어차피 앙투안 갈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읽고난 뒤, 리뷰에 언급해도 되니깐.....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각설하고, 이제 리처드 버턴 판의 『천일야화』아니, 범우사에서 출간된 『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해서 글을 시작해보겠다.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 1001권』에는 당연히 리처드 버턴 판이 소개되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라면 리처드 버턴이라는 이름의 꼬리표는 항상 붙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좀 망설였다. 출간된 지 무려 17년 정도 되었으며(초판 발행 시기가 1992년 12월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쓴 리뷰에는 이 책에 대한 찬평을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있어서 읽는 내내 지루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같은 형태의 이야기가 나온다.....  

   몇 권부터는 번역이 엉망이다..... 등등.      

 

간혹 평이한 칭찬과 책 속 일부 이야기들을 리뷰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대체로 후반부의 권수로 갈수록 그다지 그렇게 좋은 평의 리뷰가 없다. 그래서 범우사판 시리즈를 두고 보류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벤트에 덜컥 당첨되어서 안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도서관에 당당히 서가에 꽂히고 있어서 최장수 출판 책으로서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래서 열린책들 세트가 집으로 배송될 때까지만 1권만 읽기로 하였다. 딱 1권만.....  

 

우여곡절 끝에 1권을 빌리게 되었는데 나와 친분이 있는 동네 도서관의 스마일 사서(남성인데 성격이 무척 착해서 도서관 사서 중에서 제일 친절하고 항상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분이다)가 나에게 1권을 가리키며 씩 웃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건투를 빕니다."   

    ...... ??

 

그 말을 바로 듣자마자 이해를 하지 못한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을 본 사서는 본인도 헌책방에서 범우사판 시리즈를 헐값에 구입해서 읽었는데 4권까지 읽다가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버턴이 쓴 완역판이라서 범우사 시리즈가 최고인 것은 인정하였지만 역시나 이 책의 구성의 단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가에 2~4권이 안 보이는데 그 부분의 권수는 보존서고에 보관되어 있냐고 물어봤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은 보존서고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컴퓨터에 검색하고 난 뒤,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마일을 활짝 지으면서  

사서가 하는 말.....

  

    "네, 보존서고에 있구요..... 만약에 다음 2권도 읽고 싶으면 

    저에게 이야기하세요. 언제든지 빌려드릴께요."   

    ..... ?! !!!! 

 

나는 의도적(?)이지 않은 사서의 친절한 말에 무심결에 '네' 하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시리즈를 완독하려는 무모한 시민이 되고 말았다. 1권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음 권도 안 읽어도 되는 일이지만 스마일 사서의 친절한 표정을 보니 안 읽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스마일 사서는 4권까지 읽다고 포기했는데 나는 1권부터 포기하면 X팔리지 않은가! 

  

은연중에 드러난 독서에 대한 알랑한 자존심이 시리즈 도전에 대한 포기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읽는데 괜찮으면 다음 권도 읽을 생각이다. 솔직히 1권은 좀 무난하였다. 읽다가 중간에 지루한 느낌은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친절한 스마일 사서가 나의 독서 프로젝트 도전을 할 수 있게 해준 숨은 공로자였던 것이다.  

 

 

아! 아라비안 나이트 특유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구성에 혹한 나머지 이상하게도 리뷰도 길어지게 되었다. 이제 진짜로 내용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사실 1권에는 그렇게 기억이 나는 이야기가 없다. 왜냐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나중에 기억이 남는 이야기가 없다.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도중에  새로운 이야기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뭐 계속 읽다보면 적응은 되지만..... 그래도 읽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1권에서 기억나는 이야기라곤 수많은 여자들과 하룻밤의 동침을 하고 난 뒤에 잔혹하게 죽이는 샤리야르 왕의 이야기, 그리고 운명의 여인 샤라자드(요즘은 세헤라자데라고 하는데 출판 당시 외국어 표기법에 의거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샤라자드’라고 표기하고 있다)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외설적인 대화와 삽화들이 기억이 날 뿐이다. 어린이용 축약본이 있는 이유가 원전에 있는 외설적이면서도 잔혹한 내용들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원전에는 샤리야르 왕이 자신의 아내와 흑인 노예의 불륜 장면을 본 뒤에 열 받아서 여성들과의 잔인한 동침을 하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고, 요즘에 나오는 어린이용에도 이야기의 시작을 샤라자드가 샤리야르 왕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부터 일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초반부터 불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곤란하다.    

  

1권에는 우리가 아는 캐릭터인 신드바드나 알리바바의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온다. 그래서 내용이 좀 낯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딱 하나 온전히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은 ‘왕과 매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나오는 왕의 이름이..... 신드바드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신드바드가 아닌 동명이인의 인물이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신드바드 왕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는 매 한 마리가 있는데, 어느 날에 사냥하는 도중에 왕이 무척 갈증이 나서 눈 앞에 마침 물방울이 흐르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왕은 나무에 흐르는 물을 잔에 받으려고 하는데. 자신의 매가 발톱으로 잔을 엎질렀다. 매의 기이한 행동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왕이 계속 잔에 물을 받으려고 하면 또 매가 잔을 엎질러버렸다. 이에 왕은 무척 화가 나서 단번에 매를 죽이고 말았다. 이제 곧 숨이 멎게 될 매는 왕에게 나무 위를 보라는 몸짓의 신호를 보냈다. 왕은 다 죽어가는 매의 신호에 따라 나무 위를 응시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독사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알고 보니 독사들의 입에서 나온 독인 것이었다. 뒤늦게 매의 행동을 알게 된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매를 죽인 것에 대해 큰 후회감에 목놓아 울면서 후회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방이 무슨 의도로 행동이나 말을 하는지 잘 헤아려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이야기 말고도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난하거나 삶에 대한 교훈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원전이 단순 성인용은 아닌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변강쇠 타령>이나 <고금소총>과 같은 성(性)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듯이 이슬람 인들도 성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자유분방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다. 
  

1권의 또 다른 특징은 버턴이 번역본을 출판 당시 쓴 머리말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판본의 역사(물론 앙투안 갈랑 판본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 그리고 아랍 어에 대한 언어 법칙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말이 무려 23페이지나 할애되고 있다.  

  

분량도 많은 것도 있지만 버턴은 머리말에서 자신의 번역이 이전의 번역보다 월등히 훌륭한 점들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가면 설명하고 있어서 읽기에 지루하다. 자신의 정통된 이슬람 어 사용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번역본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도 가지고 영국인 버턴이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 식견이 넓고, 본인도 유럽에서의 이슬람 문화의 전파를 주장할 정도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유독 강했던 이유는 머리말의 후반부에 알 수 있다.  

 

   요즈음 영국은, 자국이 세계 최대의 이슬람교도국임을 차차 잊어가는 모양이다.  

   또한 최근에는 조직적인 아라비아어 연구를 경시하고, (중략) 인도 문관(文官)의 임용시험 

   에서조차 조금도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 갑자기 이슬람교국에서 통치권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근소한(지극히 근소한) 우리 우방마저 분개시키고 마는 결과가 되어 결국  

   실패를 겪게 될 것이다.  

 

    - 『아리비안 나이트 1권』[영역자 버턴의 머리말] 리처드 F. 버턴. 김병철 역, p 26 -   

 

영국이 이슬람교도국이라.....??   '인도' 문관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인도를 식민지 삼아 지배하는 영국의 통치 상황을 알 수 있다. 버턴이 아라비안 나이트를 번역, 출간한 시기가 1885~1888년이다. 인도는 1857년에 무굴 제국 멸망 후, 영국의 식민지국이 되었고, 187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인도의 여왕이 된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버턴이 왜 영국을 이슬람교도국이라고 자처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버턴은 한술 더 떠 이슬람교도를 지배하는 자는 이슬람 교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습득 방법에는 자신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다.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했던  근대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의 성향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1권은 무난하게 읽었지만 다음 2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앙투안 갈랑 번역본을 읽기 전에 잠깐 버턴 번역본 1권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일단 2권도 읽어 보기로 하였다. 원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드바드, 알리바바 이야기 정도는 읽어봐야 할 거 같기 때문이다. 2권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몇 권까지 읽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일단 읽을 수 있을 능력이 될 때까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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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0-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차드 버턴이고,앙투안 갈랑이고를 떠나서...
어릴때 만화책으로 말고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ㅠ.ㅠ

cyrus 2010-10-07 21:41   좋아요 0 | URL
아무리 버턴 본 번역판이 세계적으로 알아준다고 해도...
뭐니뭐니해도 그냥 만화로 읽는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아예 원전을 만화화한 아라비안 나이트가
출간되었으면 좋겠네요. 오히려 만화가 더 읽기가 쉽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10-0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헌책방에서 40년전 번역된 정음사판을 사서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물론 버튼 판이죠.매 이야기는 징기즈칸의 일화에도 나옵니다.민족이나 국적을 떠나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cyrus 2010-10-07 19:05   좋아요 0 | URL
어! 저도 칭기즈칸 생각 했었는데..
나무에 물을 마신다는 점만 다를 뿐
내용과 결말이 같죠ㅎㅎ
그래서 1권의 내용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남는 거 같습니다.
사실 리뷰에 칭기즈 칸 일화를 언급하려다가
리뷰가 아라비이안 나이트화(?)될까봐 언급 안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07 23:01   좋아요 0 | URL
아하...역시 징기즈칸 이야기...아무래도 그게 연상된다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 무서운 그림 2
나카노 교코 지음, 최재혁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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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그림 속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뒷담화 
 

2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부대 배치를 받은 지 5개월 만에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실 수 있는 사회에 드디어 발을 내딛었다. 군대에서 말하는 우스갯소리로 4분 5초, 4박 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아직 신병 티를 벗지 못한 이등병은 5개월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부대 밖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집이 있는 대구로 향하기 위해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곤 했었는데 가끔 동대구역행 KTX가 역 플랫폼에 들어 올 때까지는 2, 30분 정도 시간이 빌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서울역 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서점에 들러서 그 때 나온 신간도서들을 확인하였다. 5개월 동안 무수히 많은 신간도서들이 많이 나왔었다. 보이는대로 이리저리 움직인 나의 눈길은 독특한 표지와 제목이 있는 책 한 권에서 멈췄다.  


 

     그 책이 나카노 교코의『무서운 그림』1권이었다.  

 

 

제목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것도 있었지만 표지 속 그림도 미술에 관심 있었던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화가의 이름은 기억은 안 났지만(조르주 라 투르의 <사기꾼>이라는 그림의 일부이다) 책 표지에 있는 힐끔히 쳐다보는 여인이 그려져 있는 그림은 본 적이 있었다. 원화는 저 여인 이외에 두 명의 남자와 함께 등장하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책을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라 투르의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는 직접 읽어봐야 재미있으니까.....『무서운 그림』시리즈에서 소개되는 그림 이야기들은 나름 흥미 있는 것들이 많아서 리뷰에서 언급하면 스포일러성 내용이 되고 재미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라.....  부제만 봐도 유명 그림 속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읽는 시간이 여유롭지 않은 터라 목차만 잠깐 봤는데 흥미진진한 그림 속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대구에 도착하면 동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때 이 책이 대출중이라서 아쉽게도 읽지 못하고 말았다. 휴가 기간이 9박 10일이었다면 이 책이 반납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을텐데..... 언제 읽게 될지 모르기에 독서를 하지 못한 것과 부대 복귀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정기 휴가 때 꼭 읽기로 하였다.  

 

결국, 1권은 9박 10일 일병 정기 휴가 기간이었던 다음 해 5월달 쯤에 읽게 되었다. 2권 역시 출간한 지 1년이 지난, 그러니까 올해 전역하고 나서 읽었다. 일병 정기 휴가 갔다 오고 나서 2권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리뷰를 읽기 전에.....

작년에 1권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읽은 지 오래 됐다보니 지금 리뷰로 쓰기는 늦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최근에 읽은 2권에 대해 리뷰를 쓰게 되었다. 앞에도 미리 언급했지만 사실 이 책을 리뷰로 쓰는 게 껄끄럽다. 읽으면서 인상 깊은 내용을 리뷰에 언급하고 싶지만 자칫 읽지 못한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기대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내가 소개한 그림의 내용은 무시무시했다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그림의 내용에 대해 깊이 사색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2권에 소개된 그림 중에서 개인적으로 그렇게 무섭게 다가오지 않은 그림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해볼까 한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해 한껏 기대감이 부풀려 있는 독자는 주저 없이 ‘뒤로 가기’를 클릭하시거나 아니면 다른 리뷰어의 글을 읽는 게 나을 것이다.  
 

 

 
한 부인, 두 초상화     

 

 

 

 


자크 루이 다비드 作
 

 

위의 그림은 프랑수아 제라르가 그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이다. 그림 속 복장만 봐도 부유한 귀족의 부인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그림 속 모델의 레카미에 부인은 18세기 프랑스 살롱의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미녀였다. 그래서 제라르의 그림 이외에도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그 중에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그림이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 자크 다비드와 제라르는 사제 관계이다. 다비드가 제라르보다 먼저 레카미에 부인의 그림을 그렸는데 부인의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미완성이 된 채 남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림 하나 그리는데 1시간 만에 뚝딱 그려지는 것도 아닌데 이보다 더 긴 시간동안 긴 의자에 저런 자세에 있었으면  모델로서는 짜증이 날 만 하다) 그러다가 부인은 다시 다비드의 제자인 제라르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게 된다. 스승인 다비드로서는 자존심이 상했을 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세는 다비드의 레카미에를 명작으로 손꼽힌다. 두 그림 속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부르는 패션 유행 
  

하지만 레카미에 부인이 다비드에게 반감을 가졌던 진짜 이유는 복장의 차이에 있었다. 다비드의 레카미에는 당시 일상적으로 입던 긴 치마의 드레스를 입었지만 제라르의 레카미에는 가슴 라인이 돋보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자신이 사교계 최고 미녀라는 것을 알고 있던 레카미에는 그림 속에서도 자신의 미모가 돋보이길 바랬을 것이다. 이 두 그림을 대놓고 비교해봐도 제라르의 레카미에가 다비드보다 사교계의 남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성적 매력이 드러난다. 다비드의 레카미에는 사교계의 미녀라기보다는 그냥 수수한 여인의 느낌이 묻어나온다.  

 

그러나 레카미에만 자신의 미모를 강조하기 위해서 가슴 라인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것이 아니다. 그녀가 사교계를 주름 잡고 있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여성들도 레카미에 식의 옷을 입었던 것이다. 요즘 사회를 비유하자면 레카미에는 살롱의 패셔니스타, 패션 아이콘이었다. 귀족의 부인들은 자신의 신체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레카미에식 패션을 따라하기에 이르렀다.  제라르의 그림 속 복장처럼 가슴이 드러나는 것은 기본이었고 몸매 라인과 하얀 피부를 강조할 수 있게 얕은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 당시 속옷이 없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여성이 옷 한 벌 걸쳐도 속이 보였다. 이렇다보니 사교계 귀족 남정네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선이 한 몸에 받음으로써 자신의 미모가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사교계에서 알려지기 위해서는 무조건 아름다워야만 했다.  

 

문제는 프랑스 여성들의 복장은 남성의 은근한 성적 욕구 충족 해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난방 시설도 갖추지 않은 시절임에도 프랑스 여성들은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가슴이 드러나는 얕은 옷을 입고 다녔다. 이렇다 보니 여성들은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악화되어 사망하게 된다. 레카미에는 당시로서는 장수한 70세 정도 살았지만 다른 여성들은 30세도 못 넘기도 추위 앞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죽음을 부르고 만 셈이다.

 

   

 

골칫거리 패션 유행, 시스루 룩 
 

레카미에식 패션이 낳은 프랑스 사회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요즘도 여성들 사이에서 속이 훤히 보이는 시스루 룩(see-through look)이 유행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여성들처럼 어리석게도 추운 겨울에 입지는 않지만, 이 복장 역시 몸매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옷을 입어도 속이 보인다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미성년자인 여성 연예인이 시스루 룩 복장을 입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리 연예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이라고는 하지만, 형식상 어른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가 속이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는다는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 미성년자의 여성 가수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보니 방송가에서는 노출이 심한 복장을 입고 출연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봐서는 패션 유행의 문제점이 그낭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여성의 신체를 노출하는 복장이 오히려 남성 성 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은 많지만 지금까지 체포된 성 범죄자들이 노출 복장을 입은 여성을 보고 범죄를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복장과 성 범죄 발생의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가 없다.    

 

레카미에의 그림을 보면서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이 떠올랐다. 분명 하나의 패션 유행으로 인해서 이런 문제점들이 야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무턱대고 시스루 룩을 아예 입지 말라고는 할 수가 없다. 패션 자체가 그 사람만의 외모를 강조시켜 주며 요즘과 같은 자유 국가 사회에서 1970년대 복장 검열이 도입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패션을 통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좋지만 자기중심적 생각을 벗어나 주위 시선들의 태도를 인식한 상태에서 자신만의 패션을 추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외부의 화려함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아름다움도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 이황의 시로 긴 글을 마무리 하겠다. 

  

 

    꽃치고 열흘 가는 꽃이 없고 

   번화한 꽃일수록 열매 적은 법. 

   요즘들 화려함을 숭상하지만 

   근본이 없는데 어디다 쓸꼬. 

 

   - 퇴계 이황「꽃이 화려한들」전문,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편역, 돌베개 -  

 

 

 

 

 

*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haru8365?Redirect=Log&logNo=850113
http://100.naver.com/100.nhn?docid=76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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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0-07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좋은 걸요.
형식이나 내용 뿐만 아니라,시각적으로 까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장시간 저런 표정,저런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냔 말이죠.
진짜 무서운 그림 맞는걸요~~~ㅋ~.

cyrus 2010-10-07 21:43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의 댓글을 보고나니깐 모델이 저런 상태에서
오래 있다는 것 자체도 무섭다는 것을 알았네요^^;;

비로그인 2010-10-22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cyrus님^^)

관심있는 부분이 많아서 올리신 글 챙겨보고 있습니다. 근데 이곳에 들르시는 분들 가운데 저위의 양철님 처럼 저랑 취향이 비슷하신 분들이 몇 있으신 듯 하네요~

ㅎ.. 오늘은 좀 들렸던 흔적 남기고 가겠습니다 :)



cyrus 2010-10-22 14: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결님^^
저도 어떻게 하다보니 다른 분들의 서재에 들리다보니
이렇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취향이 비슷한 분들끼리 만나는것도 같네요ㅎㅎ
저도 바람결님 서재 자주 들릴께요^^ㅋ
 
체크! 체크리스트 - 완벽한 사람은 마지막 2분이 다르다
아툴 가완디 지음, 박산호 옮김, 김재진 감수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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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챌린저호와 땅 위의 버스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의 역사적인 발사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 플로리다 주의 케이프커내버럴 기지로 모여들었다. 원래 발사 당일로부터 사흘 째 연기된 터라 사람들은 이번에는 챌린저호가 지구 밖으로 나가 우주로 향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챌린저호 본체의 엔진이 점화되어 보조추진로켓이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발사된 지 73초 만에 챌린저호는 공중에서 폭발하고 만다. 챌린저호 안에 탑승하고 있던 7명의 승무원이 전원 사망하게 되는 참사였다. NASA에서 발족한 챌린저호 사고 진상 조사규명회의에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P. Feynman, 1918~1988)은 챌린저호의 O-Ring 추진 장치가 폭발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발사 당시 날씨가 쌀쌀할 정도의 낮은 온도와 발사 점화를 하면서 발생하는 초고압을 견뎌내지 못해 결함이 발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파인만이 지적한 O-Ring 결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 발사된 콜롬비아호도 O-Ring 결함이 발생한 상태에서 운 좋게 발사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챌린저호 사고는 이전에 발견되었던 심각한 문제점을 인지한 상태에서 강행된 예고된 인재(人災)였다. 조그만 결함이 7명의 생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들었고, 추진 중이었던 우주왕복선 운용 계획은 2년 간 중단되어야만 했다.

인재로 인한 대폭발 사고는 미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2개월 전,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던 천연가스 버스의 엔진이 갑자기 폭발하여 사고 현장 주위의 행인과 버스 탑승자들이 부상을 입은 아찔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최근에 한나라당 이종혁 의원이 제출한 서울  천연가스 시내버스 점검 실태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2007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4차례에 걸쳐 총 3만 13대의 버스를 대상으로 점검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 748대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여 부적합 판정을 받았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없이 운행하도록 방치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시내버스 폭발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버스 엔진의 문제점을 지적된 바가 있었다면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관련기관의 행정 태도를 비난하였다.

하늘 위에서 폭발하고, 땅에서도 폭발해버리고.....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두 사고는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다가 발생한 사고이다. 두 가지 사례와 관련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와 유사한 유형을 법칙으로 정한 것이 있다. 법칙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라고 하는데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들이 반드시 발견된다는 내용이다.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고들을 분석해본 결과, 대형사고에는 1명의 중상자가 발생하는데 그 전에는 같은 원인의 사고로 인해 29명의 경상자가 있었고, 또 그 전에는 부상을 당할 뻔한 300명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하인리히 법칙을 1:29:300 법칙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대형사고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여 생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소한 문제들을 무시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대개 "전에는 이런 일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다 언젠가는 그게 문제가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체크! 체크리스트』p 52)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유, 프로가 아마추어로 된 이유 
 

우리나라 속담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높은 나무 위를 잘 타고 오르는 원숭이도 가끔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어떤 것에 잘하는 사람들도 간혹 실수가 있음을 비유하고 있다. 요즘은 작년에 개그 프로그램 속 코너로 인해 유행했던 말이 이 속담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상대방이 예기치 않은 실수 한 번 하는 것을 보면 바로 이 멘트를 날려준다.

그런데 우리는 실수하는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도 왜 원숭이가 나무에 떨어지는 이유를, 그리고 프로 같이 하는 일마다 능숙하게 처리하고 똑똑했던 사람이 왜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하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봤는가?  우리는 실수를 한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하여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상대방을 비하하여 낮추게 보려는 일말의 자만심만 느낄 뿐이지 실수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체크! 체크리스트』의 저자 아툴 가완디는 인간이 실수하는 이유를 무지(無知)와 무능(無能)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가 된 인간은 지금까지 습득한 지식만 있으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무지 속에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항상 일정하게 일어난다는 법은 없다. 간혹 불규칙적이면서도 인간이 예측하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결국, 이런 현상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하게 된다. 지식은 있으면서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모를 때도 실수가 발생한다.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무능한 전문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한 지식 적용 능력을 인지를 하고 있든 말든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그대로 방관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무지한 자와 무능한 자가 실수를 하게 되면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오류로 인해 발생한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실수 앞에서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기만하려는 인간의 얄팍한 심리로 인해 커다란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크리스트 활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크! 체크리스트』속에서 소개되는 병원 업무에 대한 사례는 체크리스트의 중요성을 더욱 더 강조되게 해줄 뿐, 아툴 가완디가 말하고자 하는 올바른 체크리스트를 만들기 위한 예들은 그리 신선하지가 않다. 쓸데없는 정보를 버리고 소속 일원들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질문사항, 소속 집단의 리더만 사용하는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모든 소속 일원들이 체크리스트를 숙지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체크리스트의 단계들을 다시 한 번 상키 시켜줄 수 있는 팀워크의 필요성 등등. CEO나 비즈니스 업계 종사자들을 겨냥한 성공학 개론서에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다만, 사람들이 한 번 읽은 내용들을 바로 행동으로 실천을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도 가볍게 보다가는 시낭 낭비, 무의미한 독서가 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유용한 것은 책의 제일 마지막 뒷장에 직접 체크리스트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실제 체크리스트 표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유용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독자나 CEO들은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도 인간이다 보니, 이런 성공학 관련 도서 10권, 50권 읽고 또 읽어도 책 속 내용들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고작 한 두 개 정도 밖에 없다.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바빠지는 삶에 치이게 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지켜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러다보니 『체크! 체크리스트』를 읽을 때도 체크리스트 활용에 대해 중점적으로 보기 보다는 제1장 「왜 전문가들조차 실수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유심히 읽었으며 지금도 기억이 남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통해서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솔직히 체크리스트를 활용해서 자신의 실수를 무작정 고치려는 것보다는 자신이 왜 실수를 일으키는지 그 원인을 알고,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 내용과 외람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재로 인한 대형사고에는 꼭 인재를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이를 묵인한 관련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 중 낯짝 두꺼운 얼굴을 한 일부는 뻔뻔스럽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사고의 진상이 밝혀진 이상 자신의 오류와 실수를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자꾸 변명만 늘어놓으면 오히려 자신을 절벽 끝으로 몰아넣게 만드는 불리한 상황으로 만들 뿐이다. 공인(公人)이기에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마추어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챌린저호 관련 내용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디피아 백과사전

* 관련기사 출처
[이종혁 "부적합 CNG버스 2년여 간 748대 적발"]  연합뉴스 2010년 10월 3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68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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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6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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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17] 어느 작가의 오후

 

 

 

      꿈꾸는 작가의 오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만났다.
평소에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께가 얇은 탓도 있지만, 겉표지 없는 노란색 책이 한편으로 작가노트 같은 분위기도 나서  
(작가노트라기 보다는 노란색 열린책들 북북이 같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의 책에 저절로 손이 갔다.


제목 그대로 이름이 없는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단순히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오후의 풍경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실 내부 

                                                             

정원 
                                                              

공원 
                                                              

강변 
                                                              

들판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거리 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마주하면서도 지나쳐버리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경험하는 세상은 현실과 꿈이 교차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이다. 
오전부터 시작된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오후에 짬을 내서 쉬려고 했건만
‘작가의 본분’이라는 직업병이 머릿속에 각인된 작가는
소설 구상에 필요한 언어가 잃어버리지 않을까봐 걱정을 하기도 하고, 
소설 속 서술처럼 주변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장르 자체가 소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작가의 망상은 갈수록 심화된다.
자신의 서재가 있는 작업실로 돌아오면서도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과 풍경이 모두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작가는 소설을 쓰게 될 오전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을 끝으로 작가가 겪었던 환상적인 오후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에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산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작품 구상을 위한 심혈을 기울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접촉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보니 고립된 생활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고독과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중고에 맞서야 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생처럼 말이다. 

한트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써야하는 실제 작가들에게는 어쩌면 외부 세계와의 만남은
그들이 꿈꾸는 하나의 일탈일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펜과 글을 놓아두고 외부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집필 생활하면서 느껴보지도 못했던 정(情)도 느껴보고  

창작의 고통으로 인해 생긴 번뇌의 찌꺼기를 뱉어내고 

고립으로부터 해방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작품 속 작가는 해방을 시도해보나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노쇠하게 만들어버렸다.
작업실에서 탈출을 해도 자신에게 외부 세상은 낯설게만 느껴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작품 구상에 결부시키려고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도 얻지도 못한 채 그냥 오후동안 싸돌아다닌 것이다.  

결국 그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잠시나마 느끼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걷는 에셔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현실과 꿈을 혼동한 채 살아야 하는 고립의 굴레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의 만남과 작품으로서의 해방을 제공해주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것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에서 인용)

   

 

 

비록 작가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은 못했지만,  

작품 읽기를 통해 낯설고도 새로운 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단지 일상 모습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무의미한 텍스트이면서도  

작가가 겪는 망상이 가득한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무의미한 텍스트에도 현실감이 부여된다.  

훈데르트바서의 말처럼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꿈 같은 체험에 자연스럽게 개입되어 

전혀 꿈 같지 않는 실제 현실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며 만남이다.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어느 작가의 오후』p 40) 

작품 속 구절을 빌린다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페트케의 서술 방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어느 작가의 오후』 속의 모든 요소들이 '자유'라는 것이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자유롭게 작가의 꿈에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은  

읽는 내내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소설의 일반적인 전개가 없었던 것이다.   

발달,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통해서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 속 줄거리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스토리는 필수 요소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허구적 전개를 읽도록 하게 만든다.

작품 스토리 자체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작가와 독자 간의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내용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각각의 과정에서 유난히 눈에 띄인 것도 없이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야기 없는 이야기 속에는 독자에게 작가의 오후를 강제적으로 이해시키려는  

한트케의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전개일수도 있으며  

작품 하나로 인해서 작가와 독자가 처한 상황은 극명하게 갈라졌지만

나에게는 스토리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한트케의 노마드적 전개가 무척 좋았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작품으로서의 해방이라고 해야되나?  

 

이 한 작품을 통해서 페터 한트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알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낯선 작가로부터 느껴보지도 못했던 낯선 이야기를 통해서  

다독(多讀)에 얽혀 살았던 수많은 시간들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어서 좋았다. 

페터 한트케와의 만남.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 그림 출처    

 

에드워드 호퍼 <작은 도시 속 사무실>
http://blog.naver.com/ziggy1980?Redirect=Log&logNo=80102996673

발튀스 <거리>
http://blog.naver.com/amorfati05?Redirect=Log&logNo=30023096112  

 

M.C. 에셔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http://blog.daum.net/chic_black/6589707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http://jschoe69.blog.me/40014207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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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ap #1  

요컨대 아침볕을 받는 곳은 저녁 그늘이 먼저 들고,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람은 이리저리 옮겨 붙어 한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 뜻을 둔 사람은 한때의 좌절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한 마리 가을 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눈은 건곤을 작게 보고, 손바닥은 우주를 가볍게 보아야만 한다.

                                                                     - p 36,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 준 가계 -        

 

 ...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하늘을 박차고 오를 수 있는  

     한 마리의 매의 기상이 있어야 한다 ...
     男子漢胸中, 常有一副秋隼騰霄之氣 
  

 언제나 봐도 참 멋진 말이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다산의 글이 대부분 자신보다 어린 자식이나 젊은 제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이 많다.
 그래서 요즘도 그의 글을 읽어도 전혀 오래되어 보이지 않다. 수백 년이 지나도 다산의 글에는
 스승으로서 제자와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정말 다산과 같은 정신적인 멘토 한 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scrap #2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이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  p 42, 수오재기(守吾齋記) -    


 세상에서 변하기 쉬운 것은?
 .
 .

 .   


 만약에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 ,      

 바로 ‘자기 자신’ 이라고 할 것이다.
 화려한 부귀가 눈앞에 있으면 1초에 생각할 겨를이 없이  

 혈육의 정과 우정을 쉽게 집어치울 수 있는 속물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이러 저리 당을 옮기는 정치인들,
 잠깐의 향락이 주는 달콤함에 도취하여 단물이 쏙 빠지면 다른 향락을 찾는 젊은 세대들 

 (물론 나 자신도 포함된다).
 이들은 변해가는 세상과 현실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처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들이 세상의 변화에 쉽게 휘둘러서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끝내 ‘자기 자신’도 변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산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삶의 방식도 좋지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도록 ‘나’라는 본질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scrap #3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개과(改過)’ 즉 허물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중략) 왜 그랬을까? 대개 사람의 정리란 빈번이 허물이 있는 곳에 대해 부끄러움이 변해 분노가 된다. 처음엔 아로새겨 꾸미려 들다가 마침내는 어그러져 과격하게 되고 만다. 허물을 고치는 것이 허물이 없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급하게 힘쓸 것은 오직 ‘개과’ 두 글자뿐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기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영예를 탐하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뜻이 같으면 한 패가 되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잡서를 즐겨 읽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요, 새로운 견해 내기에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이 같은 병통들은 이루 다 꼽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마땅한 약제가 있으니, 오직 ‘개(改)’란 한 글자일 뿐이다.

                                                                                   - p 60,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 
 

 

 예전에 동물 프로그램에서 좀 문제가 있는 애완견들의 성격을 바로 잡아주는
 ‘개’과천선(멍멍 짖는 동물의 개 + 잘못을 고쳐 올바르게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개과천선의 합성어)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주인에게 받은 애정이 부족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강아지부터 시작해서
 주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버릇을 가진 강아지까지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애완견들이 등장하여 애견 전문 훈련 소장님이 개들의 못된 습관들을 고쳐주는  

 일종의 동물 치료를 해주는 나에게는 기억이 남는 코너였다.
 그 많고 많은 문제견 중에서는 자신이 주인인 마냥 진짜 주인 사람한테 으르렁 짖어대면서  

 물려고 하는 하룻강아지 주인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주인도 고치지 못했던 애완견의 악습관들은 소장님의 특별한 처방과 훈련으로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애완견들이 자신이 드디어 ‘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전의 못된 성격은 온데간데없다.
 개들은 제대로 훈련만 잘 해주면 못된 습성들을 쉽게 버리던데...
 일부 몇 몇 인간들은 자신이 못된 허물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허물을 벗으려는 ‘개과’하려는 노력도 하지도 않으니...
 옛날부터 허물이 있는 부족한 사람에게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불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scrap #4 


사람은 늘 스스로를 가볍게 보고 자신을 업신여긴다. 그런 까닭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헐뜯거나 기리고, 닥치는 대로 비난하고 칭찬한다. 그 사람의 영욕과 이해가 이처럼 서로 아득한 줄은 생각지 못한다. 허락해서는 안 되는데 허락하는 것은 잘못이 오히려 내게 있지만, 배척해서는 안 될 때 배척하는 것은 해로움이 장차 남에게 미친다. 그러나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은혜와 원한은 흔히 한 마디 말 때문에 생기고, 화와 복은 한 글자로 인해 야기된다.

                                                                                                   - p 64, 도산사숙록 -  

   

요즘 출판사 인터넷 카페나 알라딘 서재에서 멋진 글을 읽게 되면 항상 감사의 댓글을 남긴다.
댓글 남기는 일이 습관이 되다보니 읽었던 글이 잘 쓰든 못 쓰든 그 글에 대해서  

무조건 댓글을 남기려고 한다. 나 자신도 그렇게 좋은 글 솜씨도 아니길래  

잘 썼다 못 썼다라고 비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상대방의 글을 읽게 되면 항상 좋은 점을 보게면서 글에서 인상이 깊었던 점 등을 언급하다보니  

대부분 댓글의 내용이 칭찬과 감사 인사가 많다.
그런데 가끔 댓글 남기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생각할 때가 많다.
상대방의 글이 좋아서 남긴 것뿐인데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괜히 상대방이 나의 댓글에 부담스러워할까 댓글 하나하나 남기는데 노심초사한다.
한 번은 어느 분의 서재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는데
본의 아니게 글 작성자의 닉네임을 잘못 적은 것이었다.
다행히도 글 작성자께서 작은 실수로 넘어가주셔서 망정이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른 일은 글 작성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일일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평소에 댓글을 남겼을 때도 너무 감정에 사로잡혀 작은 일에도  

가볍게 봤던 점에 대해서 반성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할 때도 잘 헤아리면서 말을 해야 되는 것처럼
댓글 작성에도 신중을 가해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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