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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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48]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1월 1일 새벽,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이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송이 시작되었다. 백남준이 주도 하에 존 케이지 등 전위 예술가와 대중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뉴욕, 그리고 한국을 연결하여 실시간으로  

위성 생중계한 퍼포먼스를 제작하였다. 퍼포먼스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 퍼포먼스로 인해서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는
20세기 예술사의 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통해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빅 브라더 사회가 오지 않았음을 위성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시켰다. 역사적인 생중계 이후 언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비평가들은  

백남준의 위성 방송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미디어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1984>의 ‘빅 브라더’는 개인 생활 및 사상의 통제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는 지배 기구를  

상징하고 있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그리고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권력의 일당독재화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정당화하며 자유라는  

인간으로서의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빅 브라더의 눈은  

일상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마저  들이댄다.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이면서도  

은밀한 성 생활까지 감시하면서 욕구 충족을 위한 성 생활을 억제한다. 작품 속  

빅 브라더의 사회는 처음부터 결말까지 전체주의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전체주의 사회에 굴복해버리고 마는 윈스턴 최후의 독백과 함께 흐르는 

눈물은 빅 브라더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미디어의 존재를 무서워하고 부정하면서도
결국에는 미디어의 매력에 사로잡혀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流刑)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417 -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미디어도 다변적으로 발달하였다. 범죄 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설치한 CCTV에서부터 이제 방송에서는 일반인부터 유명  연예인까지 개인의 일상  

생활이 TV와 인터넷으로 전파되고 있다. 특히 트위터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발달됨으로써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며 예전보다 신속한 정보 소통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모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트위터에 올린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개인 정보 유출은 사생활 초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트위터의 개방성을 악용한 범죄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 영국에서는 빈집털이범  

경력이 있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다른 사람의 트위터에 공개된 일거수일투족의
기록을 이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빈집털이범들은 트위터에 자신의 여행 일정을 올린  

사람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 미디어 제국주의

미디어를 지배한 빅 브라더는 인간의 공공장소에서까지도 영항을 미친다.
예전 극장에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지배정권에 관한 보기 좋은 소식들을 알려주었던  

‘대한 늬우스’처럼 빅 브라더 사회의 극장에도 전체주의 정권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홍보성이 짙은 영상물이 스크린에 전파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 만 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18 -

이 대목에서 무시무시한 점은 잔혹한 전쟁 영화 장면에서도 관객들이 전혀 연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이다. 수잔 손택은 전쟁의 참혹성에 관해서 쓴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대중들은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의 상실에 대해서 지적을 하였다. 빅 브라더 체제의 사람들은 범람하고 있는  

미디어의 거짓된 영상으로 인해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려는 능력이 상실되었다.

정치 지배 세력이 미디어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현상은 다원주의인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나라의 민영 TV 방송국을  

3개를 소유하고 있는 최대 미디어 그룹의 소유주이다. 동시에 이탈리아 세리에 A 축구  

명문 팀인 AC 밀란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미디어 매체와  

AC 밀란을 총괄하는 통합적인 그룹을 만들었다. 속내에는 자신의 기업이 유리하도록
하기 위한 사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많은 부정적인 정치 스캔들 속에서도 3선이나  

총리직을 올랐다. 그리고 그는 2001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계적 정세의 배후에도 베를루스코니보다 더한 미디어의  

지배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지구촌의 정보통신부 장관’이라는 칭찬과  

‘비도덕적인 악덕 자본가’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미디어 제국의 왕 루퍼트  

머독이다. 그가 소유한 미디어와 이와 관련된 사업만 해도 총 52개국 780여 종에 달하며  

한때 미국 LA 다저스의 소유주이기도 했었다. 머독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이라크 타도에 한 몫을 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이라크를 세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머독이 장악하고 있던 미디어의
힘이 컸다. 미디어의 무서운 전파력은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다. 대부분 전 세계  

사람들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부시의 허황된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미국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중심부를 공습하였다. 

전 세계로 방영된 공습 장면에 세계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1984>에서 전쟁 영화  

장면을 보는 관객들처럼 ‘세계 공공의 적’ 후세인의 나라가 파괴되는 모습에 환호하는  

사람들, 반대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미국과 거대 미디어 제국의 합작에 희생당하는  

이라크의 모습에 세계 평화 존속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지배계층에 의해  

미디어가 통제되고 이를 권력 유지에도 이용하는 ‘미디어 헤게모니’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부시 정권은 이라크를 세계 평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이라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미국 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 속에서도
그는 이라크 전쟁을 찬성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을 힘입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했던가.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였던 동명의 부시 대통령도  

1994년 재임 당시, 이라크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CNN을 통해서  

전 세계로 방영되게 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전 세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동조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1984> 속의 미디어 헤게모니는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하나의 나라를 통제하고 있지만 지금은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세계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미디어 제국주의’가 형성됨으로써 지금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믿는 미디어에 발등 찍혀버린 백남준 
 

백남준의 퍼포먼스 제목에는 조지 오웰의 영혼을 만나 당신의 예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소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리고 과학 기술로 발달된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찬가를  

불렀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백남준이 불렀던 희망찬가는 이제 그만  

불러야할 때이다. 백남준은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거대한 키메라로 진화된 새로운 빅 브라더의  

존재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것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시도하고자 했던 미디어를 이용한 세계  

통합은 거꾸로 미디어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미디어가 올바르게 성장해주기를 바랐건만 10년이 지난 지금 지구촌의 악동으로  

자라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백남준은 믿고 있었던 '미디어'에게 자신의 발등이  

찍혀버리고 만 셈이다.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윈스턴처럼  

빅 브라더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을 펼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다.  

윈스턴과 같이 빅 브라더에 대항했다가 나중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남 일처럼 같이 여겨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실 미디어는 현대 문명  

발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이다.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지구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미디어는 TV와 컴퓨터를  

이용해 우리의 감각을 마사지하고 있다. 지금도 24시간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는  

수많은 정보들이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를 무조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유용한, 그리고 올바르고 진실한 정보를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디어 정보에 대한 적극적인 안목이 있어야 앞으로 계속  

위세를 부리게 될 미디어의 빅 브라더에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용 관련 기사 자료 출처 

["트위터에 휴가계획 올리면 큰일나요"] 한국일보 7월 21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007/h2010072116385822450.htm

[이탈리아 권력·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 경향신문 2009년 12월 22일자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12221758265&code=9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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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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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한 관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처음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맨 처음 제목 속의  

‘고도(Godot)’가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고도(高度)’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고도’는  사람 이름이었다. 작품 내용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인물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제1막부터 보게 되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며 고도를 기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1막부터 이들은  이름 모를 시골길에서 만나게 된다. 이 두 인물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직업인지 알 수 있는 상세정보는 없다. 다만 에스트라공의 ‘공(公)’이 공작의 지위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로 보아서는 블라디미르보다는 높은 계급에 추측할 수 있다.  

1막의 대화 속에서도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에게 ‘나으리’라는 단어와 높임말을  

쓰는 대사가 딱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부조리극인만큼 에스트라공의  

공작이라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친구처럼 대화를 하지만  

의미 없는 대화일 뿐이다.  서로 동문서답을 한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거까지고 티격태격  

말다툼하며 괜히 지나가는 럭키와 포조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계급의 차이를 떠난 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보기 어렵다.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아니, 또 너로구나!  

  에스트라공  그래서? 
  블라디미르  다시 만나니 반갑다. 아주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에스트라공  나도 그래.
  블라디미르  우리가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껴안아줄게. 
 

   에스트라공에게 손을 내민다.

  에스트라공  (짜증스럽게)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0 -  


 

  

 계속되는 무의미한 대화

이들의 대화는 가면 갈수록 부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신발 벗는데 생기는 고통을 한 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무안한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단추나 제대로 끼우라고 반격하고 있다.  

결국 이 두 사람에게는 부조리한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이 대화가 진행된다.    

 

 

  에스트라공  (약한 소리로) 좀 거들어줘!

  라디미르  아프냐? 
  에스트라공  아프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블라디미르  (화를 내며)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에스트라공  너도 아팠냐?

  블라디미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에스트라공  (집게손가락을 가리키며) 그렇다고 단추까지 안 끼고 다닐 거야 없지 않아? 

  블라디미르  (아래를 내려다보며) 참 그렇군. (단추를 채운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2 -

 

그리고 이들은 미지(未知)의 인물을 고도를 기다리면서 무의미한 대화는 계속된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하나의 막이 끝날 무렵에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2막이 시작되면 1막과 같은  

장소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재회한다. 1막처럼 대화의 물꼬를 트자마자  

동문서답과 의미 없는 대화는 계속되며 2막에서도 그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가 곁에 있어도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는 ‘고도’에 대한 상징성은 다양하다.
작가는 고도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독자나 관객들에게 고도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독자나 직접 무대를 보는  

관객들도 무형(無形)의 고도를 기다리게 하는 참여성의 효과를 주고 있다.  
 

고도가 희망 또는 자유이며, 현대인의 상실한 목적의식 등 다양한 해석이 많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블라디미르가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에스트라공이며, 반대로  

에스트라공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라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만나면  

티격태격한다. 대화는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주는  

원인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서로 친하지 않는 이들이  

굳이 만나서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에게는  

서로서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희망이자 행복인 '고도'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희망과 행복이 우리 삶 가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또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 되지도 않을 복권에  

매달리거나 돈만 많이 모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부조리한 현실에 매몰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블라디미르  너는 속으로는 반갑지? 안 그래?  

  에스트라공  뭐가 반가워? 
  블라디미르  날 다시 만나서 말이다. 
  에스트라공  그럴까?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해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에스트라공  뭐라고 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나는 반갑다>라고 해봐.
  에스트라공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나도. 
  에스트라공  나도.
  블라디미르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01 - 
 

 

 둘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2막이 끝나가는 부분에서는 이번에도 고도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되고 다음 날에도  

고도를 기다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트라공은 다음에 올 때는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가 막바지로 갈수록  두 인물의 

심리 변화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블라디미르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트라공의 ‘끈’이 부조리한 삶에 사는  

두 인물이 결국에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나?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져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중략)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58 -

 

만약에 사무엘 베케트가 또 하나의 막, 3막을 만들었다면 이 두 사람을 죽게 되는 결말을  

선택했을까?  고도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이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고도를 못 만나면 죽겠다는 말은 거짓된 한탄뿐이다. 연세 드신 분들이 가끔 ‘빨리  

죽어야 편하지.’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 날에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이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에스트라공의 ‘끈’은 자신과 블라디미르를 연결해줌으로써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매개체이다. 다음 날에 끈을 가지고 옴으로써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의지는 부조리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도 살아가려는 일상인들의 생존력이기도  

하다.   
 

 

 기다리다 지친다

<사기열전> ‘소진열전’에 미생(尾生)이라는 인물의 일화가 나온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오지 않았지만 미생은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서 다리 밑의 물이
불어나는데도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 장소인 다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결국 그는 넘쳐나는 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소진은 미생의 일화를 인용하여
자신의 신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장자> ‘도척편’에서는 도척은 미생의 행동은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후세에 미생은 미련하게 약속을 지키는 융통성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이런 약속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고 하게 된다.

고도를 향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도 어떻게 보면 ‘미생지신’의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기다림은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도 아니며 부질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알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고도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리고 미생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질없는 존재나 일에 대해서 큰 미련을 갖는 버릇이 있다.  

복권을 백 장이든 천 장이든 여러 번 구입해도 언젠가는
꼭 1등에 당첨되리라 믿는 사람, 2PM의 노래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어 기다리다가 
지치는 사람처럼..... 그러나 희망과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으며 아무리 상대방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지만 상대방은 당신을 알아주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믿는 외곬들이 자기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주위를 둘러보아라. 우리가 바라는 희망과 행복은 어쩌면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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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2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정말 별 시나리오를 다 쓰면서 괴로워했는데.. 그 고도가 고도를 말함이 아닌걸 알아도..아마도 그때부터 우리말이
지니는 동음이의적 표현에 더욱 환상마저 갖으며....ㅎㅎㅎㅎ어렸던..내가..

cyrus 2015-01-22 15:40   좋아요 0 | URL
이거 완전 오래 전에 쓴 글에 댓글을 남기시다니, 부끄럽습니다. 꼭 벌거벗은 제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ㅎㅎㅎ 이때가 이 작품이 독자(관객)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제 맘대로 생각하면서 글로 끼적거렸던 시절이에요. ^^

[그장소] 2015-01-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비밀인데..알라딘 램프가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서 찾아줘요..묶은 글..찾아..이것도 네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어때?..이러는 거죠..진짜예요..(-_ど) 어때..? 그치?? 거봐..좋아할줄 알았다니까...이런다니까요...신기하게.

cyrus 2015-01-22 20:02   좋아요 0 | URL
북플에 `읽고 싶은 책` 추천글 말하시는군요. 신기하네요. 5년 전의 글을 보여주다니.. ㅎㅎㅎ

[그장소] 2015-01-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닌데..그렇게 찾은것은..ㅎㅎ
스마트폰도..북플도 초보라서..뭘 움직이는지 통모르고 주사위를 던지는지도 모르죠..ㅎㅎ
그냥..아..이 책 좋았지..싶으면..그다음..이렇게.글이 떡..와요..읽다보면..헉..시간이 역순하고 있음을..아는..거죠..cyrus님이 글이 예전것..이라 말 하지않았다면..실감도 채 못할..만큼..^^! 마법이라는...
 
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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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뉴스 

7월에 들어서 우울한 소식들이 들리고 있다. 남아공 월드컵의 열기가 이제 막  

무르익어갈 무렵에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였다. 사건 발견 당시 유서도 없었다고 한다.  

그를 자살로 몰고 간 원인을 알 수 있는 유서가 없었기에 그의 가족과 지인,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팬들은 자살 소식에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연예인 자살 소식의 여파는  

오래 지속되었다. ‘베르테르 효과’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를 모방한 자살 사건이  

생겨났다. 공통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우울증. 연예인 자살 소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울 바이러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리는  

또 하나의 우울한 소식은 우리나라 독거노인이 100만 명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 뉴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로움과 가난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독거노인의 소식이 들려온다. 자살과 독거노인 문제. 우울한 소식을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두 문제의 심각성이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우울한 소식 속의 타인이 나 자신일 수도 있으며  

자신과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우울 증세가 있으면서도 이를 그래도 방치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우울증에 걸리는 지도 모르고 있다. 두 사건은 공통적으로 우울한 심리가 일으킨  

충동적인 행위이다. 우울한 사람들에게는 삶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걱정과 염세적인 생각 등 마이너스 요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살아가면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야 하는데 우울한 사람들에게는
밝은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행복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다

우리는 풍요로운 생활. 즉, 평생 쓸 수 있든 재화와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천만에 말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나름 부족함이 없어 생활을 하는 연예인들의 자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세상은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다가  

한 순간에 찾아온 불행으로 인해서 원하지 않는 인생의 결말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  

워낙 사회가 다양하고 복잡해질수록 인맥 관계의 중요성이 떠오르고 있지만 대부분  

인맥을 연결하는 사람의 수만 채우는데 급급할 뿐이지 평생 관중과 포숙아처럼  

서로 믿음의 끈이 이어져 있는 지우(知友)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에서는 현실과 행복의 이상향의 괴리감 속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저자의 연구 대상 집단은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들, 이너시티 고등학교 중퇴자들, 그리고 중산층 여성들로 구성된  

터먼 여성 집단, 이 세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책 속에서 구성된 내용 대다수가  

연구에 참여한 이들의 삶을 기록한 수기이다. 그래서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의  

이야기가 쉽게 눈에 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 속의 이들의 인생 이야기가 대부분  

지루한 내용도 아니며 남 일 같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우리들은 으레 수재들이  

모인다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만으로도 앞날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등장하는 하버드대 졸업생들은 직업이 천차만별이다.  

하버드 대학 졸업자라고 해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월급이  낮은 직업을 가진 사람부터  

기업 사장이나 예술가까지 다양하다.  잘 사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에 대한 고민과 불안,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우울 증세까지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중퇴한 사람들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 풍요로운 환경이 꼭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잘못 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유년기 시절에 유복한  

생활 속에서 성장하였다거나 그 시절이 행복했더라도 노년에도 행복이 오래 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서 노년기에도 그 불행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타인의 마음 이해하기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행복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방어기제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심리학자인 만큼 말이 전문적이다보니 이해가  

가지 않을 수가 있겠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처한 불행이 만드는 우울증 형성을 방어하여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심리적인 대처 능력이다.

우선적으로 저자가 말하는 성숙한 방어기제의 조건으로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저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숙한 방어기제’를 발현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전에 남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이타적인 활동의 경험이 축적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저자의 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리들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닌 남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행복은
무조건 얻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행복을 주게 되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행복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과 경험이 쌓이게 되면 자신의 인격이 성숙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노년기에 들어서는 기성세대들에게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읽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 무조건  

권위와 복종을 내세우며 교육하고 있다. 그런 어긋난 교육이 미래에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도 어긋나게 된다. 저자는 자녀들의 말에도 귀 기울여야 하며  

젊은 세대들에게 유행하는 문화나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되면 삶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 간의 단절된 우리 사회에게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 봐야 한다. 

 

 추억 활용법..... 글쎄?

그리고 또 하나의 방어기제의 조건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되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그 밖에도 긍정적이면서도 밝은 생각을  

한다거나 과거에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사실 저자의 근거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며  일리가 있다. 대부분의 심리치료사들이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도리어 우울 증세가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 저자는 과거에 경험한  

사랑의 실연을 긍정적으로 재구성을 하면 행복했던 기억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지금의 삶이  힘들 때 그 때의 소중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통해서 저자가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심리 요인의 특수성을 인지 못한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과거에 커다란 실연의 상처가 남은 사람들에게 저자의  

심리 요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너무 행복했던 과거에 지나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집착일 뿐이며 과거에 안주하는 현실회피 형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한 정서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을 피하게 됨으로써 가지고 있었던 우울 증세가 악화될  

뿐이다. 혹 떼려 하다가 도리어  혹을 붙여 오는 꼴이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하여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적절한  

치료 요법을 찾아 우울증을  해결해야 한다. 
  

 

 

 정신적 고통 공유하기 
 

이번 유명 연예인 자살 소식으로 인해서 제일 슬퍼했던 사람은 그와 친분이 있었던 탤런트 

소지섭이었다. 하얀 뼛가루로 남게 된 친구가 납골당에 안치될 때까지 그는 장례식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모든 장례식 비용도 자신이 부담하였다. 그만큼 그와의 끈끈한 우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약에 자살한 그가 친분이 있었던 소지섭과 정신적인 고통들을  

공유했었더라면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우정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성숙한 방어기제 이외에도 항상 새로운 것에 배우는 것과 술과 담배를  

자제하고, 운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제시한 행복의 조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익한 방식들이다. 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힘들다고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 것도 좋지 않다. 정신적인 아픔을 타인과 공유하면서 치유하는 것도 성숙한  
방어기제 형성에 도움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울증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우울증에 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정말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일단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우울증적 정서들을 제거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무턱대고 책 속에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억지로 따라하려거나 맞출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건전한 활동을 하고 삶을 유연하게 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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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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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77]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현실주의자 vs 낙관주의자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미국의 스톡데일 장군은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수용소에는 스톡데일 장군뿐만 아니라 많은 미군  

병사들이 잡혀 있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고문에 시달렸다. 스톡데일 장군도  

수용소에서 무려 8년이나 갇혀 있을 동안 베트콩의 무자비한 고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장군뿐만  

아니라 함께 수용소에 갇혀 있던 미군 병사들도 고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절반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포로 생존자들이 악명 놓은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스톡데일 장군은 사고방식의 차이가 포로들의 생사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을 사고방식에 따라 현실주의자와 낙관주의자로 나누어진다.
낙관주의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게 되면 크리스마스에는 꼭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현실주의자는 크리스마스가 와도 수용소에서 나가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언젠가는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대비하는 마음을 가졌다.  

두 유형의 포로 중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결국에 수용소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은 현실주의자였다. 낙관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차게 되지만 막상 탈출하지 못하면 금방 낙심하였다. 그리고 명절이 또 한번 

찾아오면 그 때는 꼭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희망과 낙심이 반복된 그들은  

상심에 빠지게 된다. 상심이라는 부정적 사고방식에 지배당한 낙관주의자들은 면역력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맞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장군의 이름을 따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패러독스가  

말하고 자 하는 것은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사람이 미래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스탈린 시대의 비극, 웃음으로 희화화하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슈호프의 수용소  

일상에서의 비인간적인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을 억압하는 소비에트 체제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작품 속 슈호프의 다소 어리숙한 인간적인 면모와 대비되어 수용소의  

억압적인 상황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절망적인 수용소 생활의 하루를 행복한 하루라고 말하는 반어적 표현은 슈호프의  

비극적인 상황을 희화화하고 있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중략)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206 - 

 

그리고 슈호프의 기나긴 수용소 생활의 일수를 언급하면서 고통의 연속이었던 수용소의  

생활을 강조함과 동시에 희화적으로 비극적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206 - 
 

 

 전쟁 박물관은 두 번 이상 가지 않는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고발한 시대는 역사 한 켠 구석으로 사라졌다. 작품 속 배경은  

구시대적이며 그의 작품은 과거의 한 시대를 말해주고 있는 문학적 유물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독자들도 솔제니친의 작품을  ‘다크 투어리즘’의 시선으로  

읽기 마련이다.  이 작품을 교훈 삼아서 어두웠던 역사에 대해 알게 되고 반성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전쟁 박물관에 두 번 이상 가는 사람이 있던가?   

아무리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전쟁 박물관에 자주  

관람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즉, 역사의 사회 고발적 내용을 그린 문학작품은  

단순 일회성 독서로 끝나기가 쉽다. 그리고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지금까지도  

잘못된 역사가 낳은 희생자로만  생각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솔제니친이  

말하고자 한 것처럼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를 어두운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로  

여겨야만 하는가?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행복한 시간들 

슈호프도 어떻게 보면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극복한 현실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에는 수용소에서 풀려나는 슈호프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결말을 통해서 그가  

3653일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들을 이겨내고 수용소에서 풀려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비참한 수용소의 생활을 직시한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이  

10년의 수용소 형기를 마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그는 사소한 일상에서  

많은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다! 윗사람들이 상의를 하고 있는 동안  

  아무 곳이나 따뜻한 곳을 찾아 불 옆에 앉아 조금 후에 시작될 고된 노동의  

  시간에 대비하는 것이다.  (중략) 난로가 없어도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나 행복한 것이다.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58 - 

 

힘든 노동 끝에 찾아오는 짧은 휴식 시간은 슈호프에게는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다. 비록 자신이 원했던 수용소 밖의 자유로움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지만
슈호프는 나름 수용소 생활에 길들어져 고통스러운 수용소의 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쉬는 시간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식사 시간이야말로 슈호프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행복 엔도르핀이 최고조로 달하는 시간이다. 슈호프는 식사 시간이  

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수용소 형기가 끝나게  

될 날을 인고하면서 일상적인 삶으로의 회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슈호프는 먹기 시작한다. (중략)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  

  불만을 잊어버린다.  (중략) 그래, 한번 견뎌보자. 하느님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테지!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175 - 
 

 

 만약에 솔제니친이 낙관주의자였더라면?

이 작품처럼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을 그린 또 하나의 작품은 빅토르 E.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있다. 작가가 경험했던 일들을 수기 형식으로 쓴 이 작품 속에서도 

스톡데일 패러독스와 유사한 사례가 등장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낙관주의들은  연말만  

되면 수용소에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 빠지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빅토르 프랑클은 힘든 수용소 생활과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생이별한 아내와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장르는 소설이지만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솔제니친은 반 소련 체제 관련 조직을 결성한 죄로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11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러 곳의 정치범 관련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미 자신의 나라 소련의 잘못된 정치 체제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고, 기존의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수용소 생활로 인해서 

젊은 시절부터 뿜어져 나온  혁명적인 열정을 접어야했던 것이 아쉬웠던 것일까?  

그는 스탈린 체제가 지난 뒤에서야 사회에 대한 분노를 소설 속에서나마 표출하였다.
자신이 못다 이룬 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솔제니친은 길고 긴 악명 높은 수용소  

생활을 극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그도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슈호프처럼  

고통 속에서의 행복을 느끼는 방식을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먼 훗날, 수용소를 벗어나  

잘못된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는 날을 고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걸출한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만약에 솔제니친이 낙관주의자였더라면, 다시 말하자면 수용소 생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혁명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살아갔더라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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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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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엘도라도, 샹그릴라 
 

 『○○투어,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국내 섬 여행』데일리안 2010년 5월 25일 입력 
 

 『윤증현 “공짜점심은 없다..... 유토피아적 주장』노컷뉴스 2010년 3월 23일 입력

우리나라 대중 매스컴에서는 ‘이상향(理想鄕)’이라는 단어보다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리고 대중들도 매스컴에 주는 전달의 영향에 의해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즉,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요즘은 유토피아의 뜻이 확대되어  

다음과 같은 기사 제목과 같이 차용되고 있다. 인간의 손이 거치지 않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섬을 유토피아라고 말하며,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나  

제도에도 ‘유토피아적(Utopian)'이라는 단어로 비유된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쓴 공상 소설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어로는 ‘아무데도 없는 나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목 그대로 ‘유토피아’라는 이상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의  

생활상을 묘사하였는데 작품 의도는 당시 영국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유토피아’ 말고도 

이상 세계를 뜻하는 단어들이 있다. 아마존 강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 도시  

‘엘도라도(El Dorado)’, 제임스 힐튼의 동명 제목 소설로 인해 알려지게 된 평화와  

행복의 도시 ‘샹그릴라(Shangri-La)’. 재미있게도 이 세 가지  이상향들은 각각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처럼 말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1997년에 중국 정부는 소설 속의 ‘샹그릴라’가  

티베트에 위치하고 있는 ‘중뎬’이라는 지역임을 공식 발표를 하였고 4년 뒤에는 지명을  

아예 ‘샹그릴라’로 개명하였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고원이 많고 천연의 자연 상태를  

간직하고 있어서 이상 세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중국과  

티베트와의 관계가 냉랭한 분위기임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친(親) 티베트적인 모습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하는 중국의 ‘샹그릴라’ 공식 발표는 미덥지가 않게 느껴진다.  

‘샹그릴라’는 소설 속에서만 그려지는 이상 세계로 기억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거 같다. 
 

 

 우리나라에도 유토피아가 있었을까?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TV나 신문 속에서 등장하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많이 보고  

들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 세계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스컴의 영향으로 인해서 이상 세계=유토피아’ 라는 서구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정작 우리나라의 이상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나날이 갈수록 홍수 흐르듯  

유입되고 있는 서구 문화의 영향과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유토피아 문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오랜 가뭄 끝에는 단비가 한 번이라도 내리는 법. 우리나라의 유토피아 문화에  

관한 도서가 출간되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저자는 역사 속에 사라져 가고  

있던 우리나라 고유의 유토피아를 복원하였으며 유토피아와 관련된 선인들의  

문헌 자료와 일화, 그리고 그림까지 배치하여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한국적인 유토피아의 세 가지 키워드

책에서는 이상 세계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엿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꿈을 화폭에 담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부터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 속의 허생이 세운 이상 국가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평소 매스컴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토피아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이상향과 한국의 이샹향의 특징을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서양의 이샹항은 대부분 사회 현실 속의 문제를 비판하거나 해결하는데 목적이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이상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자연친화적이다. 문헌 자료에 등장하는 이상향은 항상 사람의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으로  

묘사된다. 특히 이상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연물은 바로 ‘복숭아’다. 옛날부터  

복숭아를 먹으면 천수를 누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래 사는 산신들이 사는 세계에는  

꼭 복숭아나무가 있다고 믿어왔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무릉도원에 가게 되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본 장면들이 너무나 아쉬워서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화가 안견에게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림의 오른쪽을 꿈 속 이상향으로  

표현했듯이 이상향을 상징하는 복숭아나무 밭이 펼쳐져 있다. 이 밖에도 이상향을 그린  

다른 그림들도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평온한 분위기가 감도는 자연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장수(長壽)를 하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상들이 꿈꿔왔던 이상 세계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 칩거하는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조상들의 문헌에 살펴보면 현실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 우연히 이상 세계에  

들어가게 되어 몇 일간 그 곳에서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현실 세계에  

돌아보면 자신이 살았던 현실은 이미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이상 세계의 하루는 현실 세계의 10년과 맞먹는다. 장수를 누릴 수 있는 이상 세계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꿈꾸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하지만 조상들은 장수를 하고 싶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도 이런 이상 세계를 통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유교적인 이상 세계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토머스 모어는 당시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토피아라는 현실에서 선보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토머스 모어처럼 당시 조선 시대의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이상 세계를 꿈꿔왔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에는 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계급 없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 사상은 버리지 않았다.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만큼 이웃끼리 서로 도우면  

살아야 했으며 웃어른을 공경하는 기본예절은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문을  

공부하여 정신적 수양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사회에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유교이념을 탈피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좀 더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다  

현실 세계와 같은 이상 세계를 구상했다는 점은 눈 여겨 봐야할 부분이다. 
 

 

 판미동 사람들,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를 세우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이나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된  

유럽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그들의 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들 이외에도 새로운 이상적 공동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으며 

시도 끝에 이상적 사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나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유토피아 실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공보다는 실패의 결과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가 있었으며 그것도 무려 1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관련 문헌 자료들을 통해 서

경기도 가평군의 판미동이 우리나라에서 세운 이상적 사회 공동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석이라는  명망 높았던 가문이 이곳에 정착하여 사회 공동체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 이념을 유지하면서도 공동체 일원 모두 평등함을 갖춘 그들만의 사회  

제도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점은 판미동 사람들은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상향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그만큼 이상 세계가 있다고 해도 현실 세계 사람들이 그곳을 찾기란 힘들다.
이상향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 자신들의 구역에 들어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현실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비밀을 

유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판미동 사람들은 다른 지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인사성 밝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판미동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판미동은 유명해지고 전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판미동 사회 공동체도 100년 이상은 넘기지 못했다. 전국에 알려진
소문에 의해서 공동체 관리가 어려운 것도 있었으며 신석 집안의 후손이 벼슬에 올라
서울로 이주하게 되면서 판미동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이상 사회 건설을 우리나라 조상들은 실현시켰으며 심지어 10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이다. 

 

 상상하라, 그러면 이루어지게 되리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 문화를 접하게 되면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상상력이  

집약된 영화나 만화들을 보게 되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나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문화적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문화적 현실의  

문제점의 근원은 유교 사상에서 기인한 조선 사회의 고정적이며 폐쇄된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근거는 어불성설이다. 조너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라퓨타 섬의 학자들처럼 조선의 지식인들이 상상력을  

학문에서 무시한다거나 단순히 가부좌 틀어서 사서삼경을 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결과물들은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한층 더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던 지식인들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시도하였다. 그래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래도 우리나라 문화는 상상력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데  

완벽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에 대해  

상상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공상주의자들이 하는 생각이라고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고정된 사고의 틀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런 공상주의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실제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파블로 피카소의  

말처럼 우리가 헛된 망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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