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질병 한길그레이트북스 97
헨리 지거리스트 지음, 황상익 옮김 / 한길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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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더 센 놈이 온다. 슈퍼박테리아

작년에 전 세계를 강타했던 신종 플루가 남기고 간 공포가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지고 있어가고 있는 즈음에 이번에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슈퍼박테리아의 등장으로 열도가 공포로 떨고 있다. 특히, 발병의 근원지가 병원이라는 점과 이를 은폐하고 있었던 병원 관계자의 대처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 2월에 문제의 병원 환자 8명이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되어 그 중 4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감염자와 사망자 수도 늘어나서 현재는 집계된 감염자 수가 46명이며 사망자는 27명이다. 여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슈퍼박테리아의 정식 병명은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이다. 증상은 패혈증, 폐렴 증세가 나타나며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항생제에 강한 내성을 보이고 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될 우려는 낮지만 면역력이 낮은 중병 환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현재로서는 슈퍼박테리아에 대항할만한 항생제가 없다. 슈퍼박테리아의 등장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대책만이 그나마 슈퍼박테리아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최우선적이며 현실적인 방법일 뿐이다. 
      

인류 질병 잔혹사 

역사를 되돌아보면 강력한 질병들이 등장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헨리 지거리스트의『문명과 질병』에는 역사 속에서 맹위를 떨쳤던 악명 높은 질병들을 소개하고 있다.

14세기 중세부터 17세기 절대왕정 시기까지 페스트가 전 유럽에 창궐하였으며, 그 당시 취약했던 위생 환경과 미숙한 의학 기술 덕분에 페스트 이외에도 콜레라, 결핵 등과 같은 전염병도 유행하여 많은 유럽 시민들의 사망자수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피바람이 전 세계에 불고 난 뒤인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였다. 2년 동안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중세 시기 때 유행했던 페스트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이 책이 1943년에 발표한 것이라서 질병의 역사는 여기까지 소개되어 있지만, 세계적 질병의 유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업화의 발전과 동시에 보다 높은 의학기술이 보유하게 된 선진국은 과거에 치료할 수 없었던 병들과 종말을 고했지만 개발도상국이나 빈곤 국가에서는 아직도 말라리아, 콜레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세균들은 항생제의 내성에 강하도록 스스로 계통번식을 하였다. 이후로 에볼라 바이러스, 에이즈가 등장하였으며 2003년에는 사스(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2009년에는 신종 플루의 등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판데믹포비아 

역사 속에서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 불치병들은 의학기술로 인해 지구상에서 떠났지만, 인간들이 느끼는 질병에 대한 공포는 아직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전 병들보다 더 강력한 질병이 지구를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총 6단계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최고 위험 등급을 판데믹(Pandemic)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어로 ‘pan’은 ‘모두’, ‘demic’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염병의 대유행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까지 판데믹 경보를 내린 사례는 1918년 스페인 독감과 최근 신종 플루를 포함해서 단, 4번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전염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여 세계적인 유행병이 발생할 수 있는 초기 상태를 4단계로 두고 있으며 5단계는 병의 유행이 임박했다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병의 유행이 심각하면 6단계 판데믹으로 등급이 상승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론에서 언급되는 전염병 경보 단계 가지고 지나치게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공포의 감정이 너무 지나치면 판데믹포비아(Pandemicphobia)까지 이르게 되어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게 된다. 자신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거나 발견된다면 곧 죽을 병 걸린 것 마냥 착각하기 쉽다. 신종 플루가 한창 유행했을 때 마스크와 손 소독제의 매출이 증가했으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공공기관에서는 손 소독기를 설치하여야만 했다. 이전에 설치되었던 손 소독기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도 병에 걸릴 우려 때문에 손 소독기를 사용에 의존하게 된다. 이번에 발생한 슈퍼박테리아의 경우에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무해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사이에 병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감이 확산된다고 대한의사협회가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판데믹포비아는 과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지금과 같은 의학기술이 본격적으로 갖춰진 시기는 20세기부터이다. 유럽 중세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까지는 의학 기술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아 전염병과 각종 질병의 유행 앞에 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이었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은 자신이 살면서 큰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신이 큰 벌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페스트 환자들은 신 앞에서 면죄와 동시에 자신의 병을 낫기 위해서 자해를 가하였다. 지금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방법이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질병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하였다.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은 황당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들을 신을 반하는 악마나 마녀로 규정하였다. 무고한 특정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대중의 행동을 뜻하는 ‘마녀사냥’ 도 신이 내린 벌이었던 질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 속에서 탄생되었다.  

그리고 성서에는 병을 낫게 하는 예수의 존재가 언급되다보니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숭배되는 성인(聖人)이 그려져 있는 이콘화(Icon)라든가 소유하고 있었던 소지품을 가지고 있으면 병을 낫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성인이 죽은 뒤에라도 손가락, 귀, 코와 같은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했다. 기독교 성인에 대한 사람들의 치유 의식은 왕의 안수(按手) 의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막강한 종교의 힘 덕분에 나라를 지배하는 왕도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병든 시민들을 치료하게 해주는 안수 의식이 생겨났다. 중세 때부터 시작되었던 안수 의식은 18세기에 이르러 샤를 10세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안수 의식은 치료술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성격이 강한 치료를 위한 의식일 뿐이었다. 단순히 왕이 직접 병자의 몸에 살짝 손으로 접촉하고 마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안수 능력을 믿었다. 영국의 찰스 1세가 처형당하였을 때, 처형식에 있었던 영국 시민들이 처형대로 몰려와 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수건에 묻히려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처형당한 찰스 1세는 한낱 권력에서 밀려나 죽은 사람이 되었지만 이전에 왕이라는 신성한 존재였기에 시민들은 찰스 1세의 피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질병의 힘을 극복하지 못한 문명의 진보

『문명과 질병』을 번역한 황상익 서울대 교수는 서론에서 문명의 진보가 어느 정도 질병을 극복해왔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문명의 진보가 질병을 극복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한 질병의 파급 효과를 어떻게 대처했으며 적용했다고 생각된다. ‘극복’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악조건이나 적을 이겨 내 굴복시킨다는 사전적 의미가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질병 유행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문명의 진보가 질병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발달된 의학기술로 통해 악명 높았던 질병을 지구상에 퇴치했다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의학기술로도 소용없는 강력한 질병들이 등장하였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슈퍼박테리아 때문에 떨고 있는만큼 우리나라도 슈퍼박테리아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헨리 지거리스트는 질병 역사의 순환성을 이해하고 앞으로 발생할 강력한 질병 퇴치를 위해서 국제적인 문제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는 보건정책의 권위자로서 보건의료 서비스 구축론자이다. 전 세계적으로 판데믹이 유행하게 되면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신약 개발에 시동을 건다. 그러나 일부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개발도상국들은 거대 제약회사의 독점에 휘둘려서 그들의 배만 부르게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이 질병에 맞서야하는 인류 생존에 걸린 일이니 만큼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 투자를 제한하는 것은 억측이다. 오히려 질병에 대한 안일한 대처가 후에 더 많은 질병의 희생자가 늘어지고, 보건 대책에 대한 경제적 비용을 더 부담할 우려가 있다. 헨리 지거리스트의 주장처럼 세계 문제를 주관하는 국제 사회단체와 다국적 제약회사가 서로 손을 맞잡아 질병 퇴치에 앞장서야 한다. 질병 역사의 순환성 속의 질병 vs 문명의 대결 결과는 장군 멍군이다. 항상 질병이 발생하면 그 질병을 이길 수 있는 의학기술이 등장하곤 하였다. 비록 점점 발달되어가는 문명의 진보가 질병의 힘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인류는 스스로 질병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검증된 의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의 세계적인 환난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희망을 가져본다.

  


* 인용 관련 기사 출처 및 링크

[일본 ‘슈퍼박테리아’ 파문 확산] YTN, 2010년 9월 8일 입력
http://www.ytn.co.kr/_ln/0104_201009080653364349  

[의협, 슈퍼박테리아 "불필요한 공포감 확산"] 머니투데이, 2010년 9월 10일 입력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91011125658272&outlink=1

[슈퍼 박테리아, "더이상 치료제가 없다!"] 뉴스한국, 2010년 9월 11일 입력
http://www.newshankuk.com/tv/nhtv_view.asp?articleno=s2010091100301819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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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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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시 만난 좀머 씨

 

열린책들 세계문학 이벤트를 계기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는 것을 필두로 하여『좀머 씨 이야기』도 같이 읽게 되었다. 오랜만에 장 자크 상뻬의 삽화가 그려진 책표지를 보고 나니깐 무척 반가웠다. 지금의 신판보다 나은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장 자크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도 읽은 지도 10년이나 지났다. 세월의 흐름에 왠지 모를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좀머 씨나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었을 때만 해도 어린아이였는데 말이다. 그 때는『향수』를 쓴 작가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분량도 『향수』보다 얇다는 이점(?)이 있어서 읽게 되었다. 책 속의 어린 ‘나’가 좀머 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몇 년 전, 어린아이였던 나도 좀머 씨의 행동을 기이하게 여겼으면서도 좀머 씨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살아남는 자의 슬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은 좀머 씨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읽었을 당시에는 좀머 씨의 행동을 이해할 만한 성숙한 수준의 나이도 아니었고, 오히려 좀머 씨를 바라보는 관찰자 어린 ‘나’에 관심을 가지며 읽었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만큼 어린 ‘나’와 동질감을 느꼈다고 해야 되나? 동산의 초원에서 바람의 기운을 느끼면서 날아다니는 체험도 해보고 나무타기도 하면서 노는 ‘나’가 무척 부러웠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어른이 된 눈으로 다시 읽게 되니 어렸을 때 보지 못했던 좀머 씨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좀머 씨가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니 그에 대해서 서글픔과 동정심이 느껴졌다. 과거에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이외에는 좀머 씨에 대한 정확한 과거의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전시 기간 중에 겪었던 원인 모를 일이 그를 평생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전쟁터에서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승리라는 쟁취의 목표를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과 결국에는 승리를 얻는 동시에 살아남는 사람이다. 좀머 씨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이다. 하지만 그는 지옥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동원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좀머 씨의 내성적인 마음에 침투하여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세상은 전쟁터라는 말이 있다. 비록 총을 겨누고 피 튀기는 그런 잔혹한 전쟁은 아니지만 지금도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을 희생시켜야하는 총성 없는 전쟁과 같은 세상이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은 곧 좋은 취업으로 연결되는 화려한 인생의 연결고리 때문에 마음껏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하는 학생 시절에는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서도 이번에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또 다시 친구들과 경쟁해야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도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더욱 슬픈 것은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승리자에게도 해피엔딩은 없다. 언젠가는 자신도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평생 경쟁 사회에 구속받는 힘든 삶을 살아간다. 경쟁 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빨리 하려고 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게 되면 쉽게 배 아파하고, 무조건 따라잡기 위해서 자기 자신 스스로 경쟁 대열에 합류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다보니 사는 것이 힘들어지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만 하게 된다. 주위에 모든 이들과 관계를 차단하며 자신 스스로 외톨이가 되어간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현대판 ‘좀머 씨’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의 회의주의자들이 웃으면서 살아남는 방법 

   

이 책 속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어린 ‘나’와 자살과 좀머 씨의 자살이었다. ‘나’는 미스 풍켈 선생님의 고약한 잔소리와 주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 때문에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하필 나무 밑에 지나가고 있던 좀머 씨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했던 행위들이 웃기는 짓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나’는 매일 돌아다니는 좀머 씨를 보고 죽음 앞에서 굴복당하지 않으려는 태연함에 감명 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좀머 씨는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이 두 사람의 자살 행위를 통해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인생이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 ‘나’는 동심이 만들어 낸 긍정적 시선이 발동했기에 아주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피폐해질 대로 정신이 황폐화된 좀머 씨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에 눈이 먼 나머지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택하게 되었다. 
 

 
 좀머 씨, 우리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가 온 지 이제 한 달쯤 지났고, 더위가 한 풀 꺾이면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처서(處暑)가 온 지 보름째이다. 일 년 내내 살면서 알겠지만 여름은 다음 계절인 가을에게 자연의 텃세를 쉽사리 물려주지 않는다. 9월이 되어도 햇빛은 쨍쨍하게 내리 찌어 무더운 날씨는 여전하기만 하고, 태풍이 하루 우리나라 한 번 휩쓸고 갔다하면 며칠 뒤에 또 다른 태풍이 오게 마련이다. 지난주에 곤파스가 지나갔건만 이번 주에는 말로라는 태풍이 또 온단다.  

 

여름만 되면 무더위에 따라 사람의 몸이 느끼는 불쾌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불쾌지수라는 말이 뉴스에 나오게 된다. 그만큼 사람이 느끼는 불쾌함에 따라서 여름 날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날씨가 너무 더운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그 감정이 더욱 격화되질수록 상대방과의 다툼으로 커지게 된다. 외람된 예이지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단지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이유 없이 아랍인을 죽인 것처럼 날씨에 따라서 평범했던 사람의 감정이 갑자기 타오르는 불처럼 변할 수 있다. 여름에는 너무 덥다는 이유만으로 짜증만 내는가?  비가 지지리 와도 짜증이 나게 된다. 장마 기간이 지속되면 집 안에 습기가 가득 차게 된다. 습한 기운 때문에 찝찝한 기분은 불쾌하기 짝이 없고, 이런 환경 조건은 곰팡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장마보다는 더 최악인 것은 바로 태풍이다. 한반도에 거쳐 가는 태풍의 영향력과 경로에 따라서 올 해의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알 수가 있다. 농사 관련 관계자만 태풍을 겁먹는 것이 아니다. 태풍 때문에 침수 피해가 많았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고 있다. 그리고 태풍이 주는 경제학적 문제는 농산물 가격이 오른다는 것이다. 특히 추석을 앞둔 지금, 제사상에 올려야할 과일 가격이 너무 비싸서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들은 ‘최소 비용, 최대 이익’(?)을 위해서 지금도 머리를 싸매고 계실 것이다.  이렇듯, 변덕스러운 날씨인 여름이 사람의 감정 변화에 영향을 주기 쉽다. 그렇다고 날씨가 무척 덥다고 불만을 갖는다거나 태풍 때문에 사는게 꼬였다고 원망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인 말과 생각은 스트레스가 되어 도리어 자신만 피곤해질 뿐이다.   

 

 

여전히 좀머(Sommer, ‘여름’이라는 뜻도 있음) 씨는 9월 중에도 걷고 있다. 도저히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주에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또 더워질 것이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좀머 씨에게 이 말 한마디 전해주고 싶다.

“좀머 씨, 우리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당신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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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고딩때 처음 읽었을때는 정말 글자 그대로 읽기만 해서 뭔소리 인가 싶더군요.

유행이 조금 지나서 대학을 다닐때 이 책을 봤는데 정말 좋더군요~

cyrus 2010-11-06 16:08   좋아요 0 | URL
매버릭꾸랑님도 그러셨군요.
저도 아무것도 모른 시절에 이 책,, 베스트셀러라기에
무턱대고 읽었다가는 좌절했었답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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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끌리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 완독을 할 겸 남미 계열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칠레 태생)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제목이 참 독특하다.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다?  왜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을 결정적으로 읽은 이유는. . . 책의 분량이 얇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서관에서 두 권 짜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최후의 유혹』과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사이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지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 얇은 책을 좋아하는 나쁜 습관(?)을 이기지 못해 세풀베다의 짧은 책을 선택했다.  

  
 자연을 지키려는 인간 vs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아마존의 숲에서 홀로 사는 안토니오 노인이다. 그리고 노인과의 갈등 구도를 맺고 있는 인물이 뚱보 읍장이다. 그는 아마존 개발에 앞장 서는 권력자로 등장하며 노인과 반대로 자연의 위대함을 모른다. 이야기 초반에보면 아마존의 독거 노인인 안토니오 노인은 초라하고, 읍장이라는 직책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 뚱보의 기세는 당당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안토니오 노인이 뚱보 읍장의 사냥 수색대에 합류한 뒤부터는 이야기에서 읍장은 점점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어간다. 질퍽한 늪지대를 지나가는데 노인이 알려준 늪지대를 수월하게 가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은 수색대의 우두머리라고 큰소리치며 절대로 그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걷지 않는다고 똥고집을 부린다. 노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읍장은 결국에는 가다가 넘어지게 되면서 수색대원들마저도 그를 비웃고 만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 무조건 자연을 인간의 생존을 위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권력자의 속물 근성을 세풀베다는 은밀히 조롱하고 있다.  

 자연 vs 인간, 싸움의 미학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갈등은 안토니오 노인과 암살쾡이 사이의 갈등이다. 사실 루이스 세풀베다 이전 세계문학들을 살펴보면 자연 대 인간이라는 골자로 하는 작품이 몇 편 있다. 허먼 멜빌의『백경』의 에이햅 선장 대 흰 고래 모비 딕,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에서의 노인 대 청새치, 상어 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굴복하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두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의도는 과감하게 자연과 대결하는데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에이햅 선장이 모비 딕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깊은 바다에 빠져 죽어도, 고생 끝에 잡은 청새치를 상어들에게 다 뜯긴 채 노인이 집으로 돌아와도 결국 자연은 자신에게 패배한 두 인간의 존엄성을 빛나게 해주는 배경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는 오히려 반대이다. 노인과 암살쾡이의 1 대 1 대면과 대면 후 결과는 긴장감보다는 엄숙미가 느껴진다. 사람을 해친 암살쾡이의 습성과 자취를 파악할수록 노인은 짐승의 힘과 용기에 경탄하면서 둘 중 하나는 살아남게 되는 최후의 대결을 준비한다. 노인에게는 암살쾡이를 죽여서 자신은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암살쾡이의 두 눈을 통해 자신과의 대결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는 확연한 의지를 읽게 된다. 노인과 암살쾡이에게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인간 대 자연. 당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은 이 둘은 어쩔 수 없이 운명의 순리로 마주치게 된 것 뿐이다. 

결국 안토니오 노인은 암살쾡이와의 사투 끝에 살아남는다. 비록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다. 죽은 암살쾡이의 시체를 흐르고 있는 아마존 강에 떠내려가게 함으로써 암살쾡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노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연애소설을 읽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노인의 안식처는 아마존의 자연을 상징한다. 암살쾡이를 죽였어도 아무 일 없다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애소설 읽기에 매달리는 것은 그냥 자연 속에 몸을 맡겨 본능적으로 살려는 자세이다. 노인이 살고 있는 광활한 아마존에는 인간의 손길을 거치치 않은 자연의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는 동물들이 많이 있다. 노인의 암살쾡이 사살은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 승리자인마냥 도취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며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는 승자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에 맷돼지와 말벌이 살게 된 이유

아무리 암살쾡이가 인간들을 무참히 죽였다지만 정작 암살쾡이가 인간들을 향한 살기를 드러낸 이유는 자연에 해를 가하려는 인간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암살쾡이 입장에서는 총을 들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연을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암살쾡이가 어쩔 수 없이 날카로운 어금니와 발톱을 인간들에게 향한 것은 사필귀정이다. 

 
간혹 뉴스을 보게 되면 도심 한복판에 야생 맷돼지가 돌아다닌다거나 사람이 사는 집에 말벌 떼들이 커다란 벌집을 틀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소방대원들이 동원되어 맷돼지는 사살되고, 벌집은 가차없이 파괴된다. 인간의 눈에는 도시 속에 있는 맷돼지와 말벌은 우리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만 비춰질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시에 살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다. 단지 살고 싶은 보금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존재가 쉽게 노출되는 인간의 보금자리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을 도시로 불러들이게 한 것은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는 인간의 행위가 만든 현상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못된 사고와 행위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리지지 않는 한 자연 파괴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만은 우리 인간들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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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82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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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86] 향수

 

 

 

 

『향수』에 대한 기억 속의 향수(鄕愁) 
 

오랜만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걸로 포함하면 총 네 번째이다. 최근에 읽었던 때가 군 복무 시절이다. 군 생활 다 꿰뚫고 있다는 신의 계급(?) 병장 때는 말년 휴가를 가기 전까지 주말을 포함한 하루하루가 지루함의 연속이다. 그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낙은 부대에 마련한 작은 독서실에서 책 읽는 것이었다. 그 곳 책꽂이 에서 하얀 책표지가 없는 구판으로 출간된『향수』가 눈에 띄었다. 집에도 구판으로 나온 책이 있었고 오랜만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읽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 책을 보게 되니깐 책 제목처럼 갑자기 집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은 향수(鄕愁)가 느껴지고 그 밖에 옛날 이 책과 관련된 사춘기 시절의 조그마한 추억들도 떠올랐다.

이 책을 처음 구입하고 읽었던 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 때 샀던 구판의 겉표지는 지금과 다르다. 구판은 흰색 바탕에 아르누보 형식의 무늬가 있다. 지금의 개정판은 그르누이에게 체취를 빼앗긴 채 희생당한 여인 중의 한 명인지 아니면 향수에 취해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문학적 위상이 높아진 지금은 ‘열린책들 문학전집’ 시리즈 중의 하나로 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이 책을 읽었을 때 책 제목의 부제 때문에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주위에 친구들은 이 책을 추리소설로 오해를 하기도 했으며 몇 몇은 왜 이런 암울한 제목의 책을 읽고 있냐고 묻기도 했다. 이런 오해가 다 책 표지에 ‘살인자’라는 제목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 때 교실은 남녀공학이었고 짝꿍은 여자였다. 짝꿍은 머리도 좋아서 공부도 잘하고 나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내가 읽은『향수』를 그 친구가 읽을 수 있게 빌려준 기억이 있다. 그 친구에게 짝사랑한 감정은 없었지만 이성이 내가 읽고 있는 책에 관심을 가져준 것 자체가 내 인생으로서는 처음이었기에 특별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그 애가 이 책을 완독하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실『향수』의 딱딱한 전개와 문장은 여자들이 끝까지 읽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조그만 참고 읽었더라면 이 책의 뛰어난 작품성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더 씁쓸했던 것은 그 아이가 성적 관리를 위해서 공부에 집중하다보니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입시 위주의 학교 공부에 매달려야만 하는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중학생 시절의『향수』와의 첫 만남은 충격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무고한 25명의 소녀들을 해하는 과정은 냄새에 집착하는 그르누이의 광기를 엿볼 수 있었고, 사형을 받기 전에 완성된 향수를 바르고 사형장에 등장하자 그 곳에 모인 시민들이 집단 성관계를 맺는 장면은 세상을 무아지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르누이 향수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결말에도 향수의 위력은 그르누이의 잔혹한 죽음으로 몰고 간다. 향기에 취한 부랑자들이 한 순간에 식인종으로 돌변하여 그르누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장면은 여태까지 읽었던 문학 작품들의 주인공의 최후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특성 없는 남자

  

비록 첫 만남은 소설 속 자극적인 설정과 장면에 치중하였지만 몇 번 반복해서 읽어보니 이제는 그런 설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그르누이가 왜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그 끔찍했던 행동들은 잃어버리고 있었던 인간적인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에 TV 프로그램에서 아기들은 엄마의 모유를 정확히 알아맞힌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기들의 감각 능력은 성인으로서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데 특히 후각이 발달하여 엄마의 모유 냄새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르누이는 일반적인 아기들보다 더 우월한 후각 능력을 가졌을지 모른다. 아기였을 때부터 냄새를 맡기 위해서 유난히 조그마한 코를 벌름거리는 것이 전에 그르누이를 사랑스러워 했던 테리에 신부가 한 순간에 혐오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가슴을 품어보지도 못했고 모유도 먹어보지도 못했다.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그를 썩어가는 선 조각 더미에 버리고 도망간다. 자궁 속에 갇혔던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 안에 안기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애 처음 느껴보는 동시에 그 아기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로 인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그런 고귀하고 행복한 특권을 누리기 못했다. 자신의 체취를 가지지 않은 그르누이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 받지 못하는 그냥 살아 숨만 쉬는 특성 없는 인간이었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탐욕스럽게 유모의 젖을 빨고 심하게 코를 벌름거렸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르누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맡는 순간이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사와 같은 아기로 보기 보다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악마의 아기로 보았다. 
  

 

 ‘인간’이 되지 못한 '향수의 신' 그르누이 

 

그르누이가 추구했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향수는 자신의 잃어버린 체취. 즉,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아의 결정체이다. 결국에는 처형당하기 직전에 그르누이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바른 채 등장한다. 드디어 자신을 경멸했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끔 매혹시켜버린다.

 

  따뜻한 인간적 영혼도 없이 오로지 반항심과 역겨움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작은 키에 구부정한 모습, 절름발이에 추한 얼굴로 보기만 해도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가, 외모와 마찬가지로 내면 세계 역시 괴물인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데  

  성공한 것이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구판, p 358 -

하지만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는 너무나 훌륭했던 나머지,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인간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가 향수의 신이 되고 말았다. 25명이나 되는 소녀들을 죽이면서까지 향수를 완성했건만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증오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르누이는 자신에게 향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혐오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자신만을 위해 만들었던 향수가 25명의 소녀들에게 빼앗아 섞어 만든 조잡한 향수에 불과하다는 것과 이 향수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체취가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커다란 절망감을 빠지게 된다.

  그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다. (중략)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날은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수의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면을
  쓰면 얼굴이 없는 것과 같아서 그는 완전히 무취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구판, p 360~361 -

몸에 남은 향수의 향기는 오래 가지 못하고 공기 중에 증발되고 만다. 그가 만든 위대한 향수는 일시적이나마 상실된 자아의 단점을 커버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봉책이었다. 결국 사형장에서 보여준 그르누이의 모습은 온 몸에 잠시 겉돌고 마는 향수 냄새와 같은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자아의 가면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채 특성 없는 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인간적인 향기를 지닌 사람

 

그르누이가 살았던 17~18세기 유럽에는 향수를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치장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단순히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향수를 뿌렸다. 당시 17~18세기 유럽은 위생 관리가 취약했던지라 아무리 잘 사는 왕이나 귀족일지라도 몸에 악취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결한 냄새를 드러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향수의 성분 특성상 몸에 나오는 악취를 제거할 수가 없다. 악취와 향수의 향기가 결합되어 오히려 더 이상한 냄새만 나올 뿐이다. 지금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혹은 이성을 매혹시켜 사랑을 받기 위해서 향수를 애용한다. 그 중에도 자신의 정확한 체취를 알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남에게 드러내기 싫은 체취를 가리기 위해서 자신이 향기에 취할 정도로 남발한다그러다보니 그르누이처럼 자신의 진실한 체취를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의 주제와 내용에 관련이 없는 결론이지 인간적인 향기를 지닌 사람이란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따스해져 오는 사람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고
  단순하면서 소박한 사람 
  

   - 이정하향기로운 사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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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제일 값싼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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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데이빗 소로우    800원
    체 게바라               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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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체 게바라

  ※ 원문: http://blog.naver.com/sobin94?Redirect=Log&logNo=30083716327 
   

 

오규원의 시『프란츠 카프카』를 필자가 한 번 패러디해본 것이다. 원작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판에 서구의 유명한 문학가, 철학가 등을 이용하여 문학이나 인간의 정신을 상품화되어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제시한 문학과 사상, 철학뿐만 아니라 반문화(counterculture)를 상징하고 있는 아이콘들마저도 모든 제품에 가격을 붙여 상품화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가 공동으로 펴낸 책『혁명을 팝니다』의 앞표지에 있는 스타벅스 컵 속에 그려져 있는 체 게바라처럼 반문화는 이미 그들이 거부했던 기성 문화처럼 변환되고 있다. 반문화는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도전하는 하위문화이다. 전통적인 기성문화에 도전했던 사회적 사례로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과격한 페미니스트들, 급진적인 종교 운동가, 사랑의 자유를 외친 동성애자들이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지금, 어느새 하위문화는 기성 문화로 변하게 되었다. 히피족 스타일은 하나의 비주얼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종종 거리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모터사이클 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복장 방식이다. 과거에는 기성 사회와 문화로부터 금기시하였고 배격 받았던 동성애는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에까지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 방식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쿠바 정치 체제를 뒤엎으려고 했던 혁명아 체 게바라는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입고 있는 값 싼 티셔츠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열린 대중문화의 삼적(三敵): 프로이트, 마르크스, 히틀러  
 
  
두 저자는 록 음악에서부터 영화까지 대중문화들로 상징되는 개념들을 총동원하여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반문화의 실태를 분석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두 저자는 반문화를 형성하게 한 사람을 프로이트, 마르크스, 히틀러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말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가 옹호하려던 노동자 계급은 마르크스의 급진적 이론을 외면하였다.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신장시킬 수 있는 보다 실현성 있는 정책을 환영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이르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등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묻혀 있었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이 억압되는 과정을 통해서 문명이 발달된다고 주장한다. 전혀 통하는 게 없을 거 같은 사회 사상가와 심리학자, 두 사람의 기이한 만남은 대중 사회 속에서 ‘키메라(chimera)’ 문화를 낳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사회와 그 문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반문화의 기본적인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반문화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과 다르게 대중들이 제멋대로 해석하여 탄생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본의 아니게 반문화라는 현상을 견고히 해준 것이 히틀러와 독일 나치스였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대중들은 광적으로 자신들의 지배자인 히틀러와 나치스를 추종하였다. 독일 대중들이 비이성적으로 독재 권력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대중매체였다. 나치즘이 버무려진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은 히틀러의 선동에 세뇌당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히틀러와 나치스가 몰락한 이후 독일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은 하나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무시무시한 힘을 각인시켰다. 히틀러가 남긴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했던 대중들은 언젠가는 제 2의 히틀러가 등장하여 자신들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기성 문화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저항하는 반문화라는 후유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원했던 바가 아니었지만 역사적 인물 세 사람이 만들게 한 반문화는 지금은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종양이 되고 말았다. 반문화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좌파는 우파 진영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으며 우파와의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인류의 개인의 자유가 인정되며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열린 대중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두 진영 간의 화합이 필요하다. 사회적 갈등만 조장시키는 반문화를 만들게 한 세 사람은 열린 대중문화의 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 저자는 반문화를 단지 대중문화에서 없어져야 할 주적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문화 형성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본주의적인 얼굴의 대중문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대량 생산되고 있는 티셔츠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반문화를 추구해했던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속했던 록 그룹 너바나의 앨범이 아직도 팔려가고 있는 현상이 그 예이다. 반문화 존재 자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대중들이 왜곡되어 포장되고 있었던 반문화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망상에서 벗어나기를 경고하고 있다.  

  

 

  

자멸하고 있는 반문화 
 

최근에 러시아의 스킨헤드(Skinhead)들이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행사장에 난입하여 관객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킨헤드’는 직역 그대로 하면 머리카락이 너무 짧을 정도로 바싹 깎은 머리이다. 원래는 1960년대 후반 영국 노동자 계급의 하부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폭력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다.    

  

 록도 어떻게 보면 반문화 성향이 짙은 음악 장르이다. 스킨헤드 역시 초기에 반문화를 지향했던 점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두 반문화 집단 간의 충돌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결국에는 반문화가 열린 대중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해하는 꼴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서론에서 두 저저가 말했던 것처럼 반문화의 반란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비생산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만약에 몽둥이를 손에 들고 행사장에 습격한 러시아의 젊은 스킨헤드 일원들 중에서 미국산 나이키 신발을 신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지인 중 한 사람이라도 동성애라고 하면 혐오를 느끼면서도『왕의 남자』에 열광했으며 한창 TV에 방영되고 있는『인생은 아름다워』를 빠지지 않고 시청하고 있는 것이 지금 문화의 현실이다. 이런 반문화의 모습들은 웃지 못할 난센스이다. 반문화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문화 사회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들의 주장이 약간 거칠고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반문화가 자본주의 사회에 잠식되어 있는 현실은 대중들은 자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관련 기사 인용 및 출처 링크 


[러 스킨헤드, 록 페스티벌 습격] 중앙일보 8월 31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8/31/3982088.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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