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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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28] 장미의 이름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No. 43,  1799년 

 

 

 

 

 

 

 

 

 5년 만에 완독 성공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두 권짜리를 처음 구입했을 시기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2007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에코의 소설이 유명한데다 어느 일간지에서 선정한 대학생 새내기 추천도서목록을 본 뒤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이맘때가 되면 일간지의 북섹션마다 2012학번 대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를 소개한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이제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 정도로 어엿한 '세계문학'으로 자리잡았지만 5년 전만 해도 『장미의 이름』은 전집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장미의 이름』 은 회색 사철 양장본이다. 회색 사철로 된 『장미의 이름』은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기가 드물어졌다. 알라딘에서는 절판 상태다. 지금 세계문학전집의 『장미의 이름』은 노란색 사철 양장본으로 나오고 있다. 요한묵시록의 주석서에 실린 삽화를 차용한 표지는 여전하다. 간혹 헌책방에 들리면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86년판 『장미의 이름』이 굴러다니긴 한데 세월이 조금 지나면 개정판인 회색 사철 양장본도 헌책방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5년 전에 구입해놓고선 여러 차례 완독의 실패를 고배를 마신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읽기 시작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횟수만 해도 수십번 정도다. 중세와 관련한 방대한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낸 스토리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개정을 거듭하면서까지 내용을 보충한  故  이윤기 씨의 상세한 역주가 있어도 중세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눈에는 그저 어렵고 빽빽한 문자로만 보일 뿐이다.    

 

본의 아니게 소설의 결말을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1권 때문에 알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소설만큼은 완독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오히려 작년에 숀 코너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소설을 읽어보려고 한 번 뒤적거려보기도 했다. 비록 이 도전 역시 실패했지만.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장미의 이름』을 완독하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자하니  내 자신이『장미의 이름』에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떠올려졌다. 이들은 금지된 책에 담겨진 금지된 지식을 알려고 하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이 쓴 어렵기로 유명한 소설을 읽으려고 하다가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굳이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을 완독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장미의 이름』 독서의 목적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맞추기 보다는 소설 속에 소개된 중세의 사상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알고 싶었다. 시지프스가 죽어서도 영원히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 것처럼 나는 도전, 중간에 포기를 반복해야 했다. 1권짜리 완독은커녕 1권 반 페이지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중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은 꼭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첫 장부터 다시 읽었다. 결국에는 한 달동안 틈틈이 읽은 끝에 두 권짜리를 완독할 수 있었다.

 

 

 

 

 역사의 회색시대라기엔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독자는 중세라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중세'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거나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어도 에코의 소설을 읽기가 수월하지가 않다. 중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흑시대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시대다. 중세적 삶의 문법과 근대적 삶의 문법 가운데 무엇이 더 옳으며 무엇이 더 좋은가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에코가 재현한 중세는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미로처럼 설계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지성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성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은 지식을 누리는 데 있어서 적잖이 한계가 있었다. 중세의 도서관은 오늘날처럼 누구나 마음대로 책을 빌려가면서 읽지 못했다. 특정한 시간만 도서관의 책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열람'은 책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읽는 것이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교회 도서관에 보관된 책을 읽거나 필사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칠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단적인 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지된 책을 읽으려고 했다.

 

소설은 종교의 맹신적 믿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시절의 이야기다. 종교와 교회의 입장에서는 화려했던 장미가 꺾이는 시기였던 것이다. 종교적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내보이는 구 세력과 철학적 이성을 중시하는 젊은 수도사들 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관리륻 담당했던 원장 수도승은 그리스 철학에 관한 책들이 보관된 장서관의 출입을 철저히 막는다. 아울러 일반인의 경우 조금이라도 부도덕하다고 판단되면 마녀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로 인한 억압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는 지식에 대한 갈구를 불러일으켰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교리로부터의 깨달음보다는 진리 그 자체, 곧 삶의 비밀을 추구하기 위해 책을 보고자 했다. 에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중세인들의 인생관을 라틴어 명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수도승이 찾고자 했던 지식의 근원은 도서관에서 숨겨져 있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pp 23)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단 한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 때문이었다.  『시학』2권은 희극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뿐 아니라 웃음도 우리 삶에 유용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 신부는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이 원죄를 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리에 집착했던 호르헤 신부의 눈에는 야밤에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위험천만한 이단자로만 보였던 것이다.

 

 

 

 

 지식의 권력화의 위험성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호르헤 신부가 예수와 기독교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다면, 월리엄 수도사는 그 진리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장미의 이름』은 월리엄과 호르헤의 대결을 통해 독자들에게 깨우쳐 준 교훈은 진리란 알고 보면 이름뿐인 데, 그 진리라는 허상에 얽매이면 자신이 '악마의 책'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처럼 자신도 남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악마로 만드는 것은 호르헤 신부가 휘둘렀던 권력이다.

 

진리의 권력화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서양 열강은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자신들보다 미개한 문화를 지닌 식민지를 '종교 전파'라는 명목 하에 지배 헤게모니로 사용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천 년 전에 등장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절대적인 지식이 권력이 될 때, 그 지식 권력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사탄이 된다. 에코는 이러한 문명사적인 비극을 중세 말의 신앙과 학문의 대립을 통해서 그려냈다. 중세의 악마는 호르헤 신부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생겨났다.

 

이단에 대한 탄압과 신학적 독단,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지배질서는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면 '동지', 그 반대는 '적'이라고 여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위험한 우상이 된다. 이러한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윌리엄 수사가 추구했던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반성,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열린 자세,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 탐구가 필요하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윌리엄의 제자였던 아드소가 수도원의 폐허 위에서 내뱉는 독백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라져 버린 과거의 아름다웠던 장미의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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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어려운 책을 읽었구나.
난 영화로 봤는데. 영화로 잘 봐서 책으로는 볼 맛이
안 나더라.ㅋㅋ

cyrus 2012-02-20 18:41   좋아요 0 | URL
영화는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과 미로 도서관 장면이
일품이죠. 그래서 저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

차트랑 2012-02-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머리를 쥐어짜며 읽는다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는 제게 마치 세트처럼 다가왔답니다 ㅠ.ㅠ
장미의 이름을 대하니 무착 반갑군요
저는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한 상태인데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2-21 19:07   좋아요 0 | URL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영화로 보면 내용이 금방 이해가 가더라고요.
 
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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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미디어로부터 위로받는 고독한 현대인들

 

어느 연구결과에 의하면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의 중독성이 술, 담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대한 욕구는 술과 담배에 비해 비용이 들지 않으며 일상에 유용하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현대인들은 정말이지 심각하게, 다른 방식으로 분주하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주부든,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터넷 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스마트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수시로 훑어보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글을 새로 올리고, 트위터로 쉴 새 없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담고 나르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확실히 인터넷은 정보의 검색을 용이하게 하고 트위터와 같은 SNS은 여론의 새로운 창구 역할을 거의 실시간으로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발휘한다. 연구팀의 분석대로 비용이 들지 않으면 시간면에서도 효율적이다. 그리고 SNS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팔로어를 하면서 폭넓은 인관관계를 맺을 수 있다.

 

최근에는 '트위터봇'이라는 것이 유행을 한단다. 해당 봇이 메시지를 팔로어들에게 보내고, 팔로어들이 보낸 메시지의 키워드를 분석해 사전에 저장한 메시지 중 연관도가 높은 내용을 자동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 트위터봇은 종류별로 다양하다. 좋은 명언을 메시지 삼아 보내는 '좋은글봇'도 있고, 여자친구가 대화를 거는 것처럼 메시지가 트위터에 전달되는 '여친봇'도 있다. 여친봇을 팔로잉한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야, 뭐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팔로워는 여친봇의 메시지에 답변을 보낸다. 진짜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친구처럼 대하는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트위터봇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욕구, 즉 현대인들이 스마트폰, SNS를 달고 살면서도 여전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많다도 정작 현대인들은 외롭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트위터에 팔로워한 사람들의 숫자, 카카오톡에 저장되어 있는 지인들의 숫자 등에 얽매이기도 한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처럼 자신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의 팔로워라든가 카카오톡에 저장된 '친구'의 수가 수백명이라고 해서 우리는 과연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100명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스마프톤이나 컴퓨터에서만 가능하는 온라인 세계가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저장된 100명 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절반도 채 안 될 것이다. 10%는 가족 관계 또는 비즈니스상으로 필연적으로 만나야 되는 사람이며 나머지 90%는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할까 말까하는, 친구인데도 그렇다고 정말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연락이 뜸한 사람이 있다면 연락 안 한 채 나 몰라라하고 쿨하게 넘어가든가 아니면 다시 볼 일이 없다면 과감하게 그 사람의 폰 번호나 주소를 지워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의 결별을 익숙하게 여기지 않는다. 안 친해도 그 사람의 인적 정보는 그대로 남겨 둔다.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면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마당발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람이 타인과 관계 맺기에 있어서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이 같이 얽히고설킨 숱한 관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욕망과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잊은 채 타인의 요구에 맞춰 기능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이별이나 죽음 같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극복하기 힘든 고통의 나락에 쉽게 빠져버린다.

 

 

 

 

 '대화'도 필요하지만, '고독' 역시 필요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을 연구했던 앤서니 스토는 사랑과 우정 등과 같이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관계과 행복감을 증폭시켜주는 것과 관련해서 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자의 입장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트위터와 스마트폰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그들은 '외롭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리고 사람들 간의 대화를 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트위터는 어찌 하다 팔로워들에게 인간 아닌 인간처럼 대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러한 현상이 자신의 주변에 친하다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정작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관계가 행복의 절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앤서니 스토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고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버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독의 장점 그리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천재' 또는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 중에는 고독한 삶을 살다가거나 또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글을 쓰는 작가나 화가, 음악가들은 훗날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될 위대한 '명작'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다. '명작'을 탄생하기 위해서 고독한 삶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창작 활동 이외에는 타인과의 대화를 하는 인간 관계를 외면했으며 특별하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천재들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이며 창의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일수록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토는 대중들이 천재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고독의 장점으로 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 그의 내면에서 진정한 '성숙'과 '통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감정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며 창조적인 상상력을 증대시킨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기번, 고야 등 학자와 예술가의 빛나는 업적은 고독에 침잠하는 그들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시간마저도 없는 현대인들 

 

 

 

 

 

 

 

페르낭 크노프  <슈만을 들으며>  1883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재미난 사례를 인용하자면, 그리스의 시골 마을에서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 또는 연인이 사별하면 5년 동안 애도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지는 풍습이 있다. 이 기간동안 미망인은 검은 옷을 입고 고인의 무덤에 매일 가고 고인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그리스 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슬픔의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동시에 앞으로의 여생에 주어진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이 자연스럽게 키워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후 시간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여성은 관습에 따라 자신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는 데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오후의 휴식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절대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두 풍습은 공통적으로 고독을 심리적인 상처를 나을 수 있게 만드는 치유의 수단으로 이해했다. 슬픈 일이 있으면 혼자서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대 이후 사회의 주류는 고독을 무시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변하고 말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리스처럼 사별한 사람에게 얼마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문화도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주어지지 않는다. 유교문화의 우리나라에도 부모가 죽었을 때 아들이 상복을 입은 채 3년 동안 부모의 무덤 곁에 지내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는 고인을 추모하고 그리워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독을 외부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상실, 고통, 슬픔 등의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그대로 묻어들수록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또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슬픔과 고독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악순환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힘겨워지도록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적 동물이다

 

영국의 호스피스가 몇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에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제시해 우리나라에서도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살펴 보면 시한부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되는 일로 꼽은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 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 꿈들'을 후회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이 두번째로 후회하는 일로 꼽혔다. 일이 바뻐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나 배우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않은 것' 인데 다른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솔직한 감정을 말하지 않아 정신적 피로가 쌓였다는 설명이다. 네번째와 다섯번째로는 '옛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것' , '변화를 두려워해 즐겁게 살지 못한 것'이 뒤를 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인간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다. 인간 마음 속에 그러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고독은 우리 삶에 있어서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오래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던 사회적 동물이라는 범주에만 포함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도 본인 고유의 자아(Self)를 탐색하고, 타인들 앞에서 드러낼 줄 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고 싶어하는 충동에 집착하여 정작 자기 내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타인 중심의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다보니 정작 자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에 순응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존중감을 뚜렷하게 지니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 받는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일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면 더 이상 타인과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타인을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상호적 관계를 맺고 사는 동반자로 여길 수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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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1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과잉연결시대>라는 책을 봤는데, 이 얘기들과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처럼 예술이나 철학적으로 이야기를 푸는 책은 아니지만요. 저도 어느 정도는 그래요. 트위터를 저도 조금 하는데(뭐 거의 한다고 볼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때로는 올라오는 수많은 멘션들이 이게 다 뭐야..싶다가도 왜 나는 팔로워가 늘지 않나를 생각해보기도 하거든요. 귀찮아하면서도, 또 막상 연결이 끊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사실 요즘에 트위터 중에 진지하게 읽는 멘션은 오로지 공자봇의 멘션. 모든 인간을 다 제쳐두고, '봇'의 멘션을 가장 진지하게 읽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생각해보니 뭘까..싶네요.)

cyrus 2012-02-19 22:51   좋아요 0 | URL
<과잉연결시대>라는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요즘에는 덜하지만
예전에 유행했던 싸이월드 친구추가에 신경쓰곤 했어요. 그 땐
친구추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공자봇이라는 것도 있군요, 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아서
잘 몰랐어요 ^^;; 제가 디지털 문명에 너무 한참 뒤쳐진 느낌이
드네요 ㅎㅎ

루쉰P 2012-02-1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완전 요즘 내 얘기네 하며 글을 봤네요 ㅋ 잘 지내시죠 전 고독 속에 빠져 있으니 천재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할까요 ㅋㅋ 이 글을 보며 그런 위로를 느꼈네요 ㅋㅋㅋ 저 땡스 투 하고 이 책 삽니다 완전 딱 내 책이에요 ㅋㅋㅋ

cyrus 2012-02-19 22:53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잘 지내고 계시죠?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서
경기 일하시는데 고생 많으시겠어요.

책 내용 중간에 심리학적 이론을 소개한 부분만 빼면 예술가들의 사례들을
읽어볼만해요. 그들로부터 고독을 벗어날 수 있는 비법을 배울 수 있고요 ^^

stella.K 2012-0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친구 한 애는 고독을 너무 좋아해 자기가 파놓은 동굴에서만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예 자신이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더군.
그 친구 언젠가 나한테 그렇게 말한 거 후회할까?ㅋ
그 친구는 고독이 너무 좋아 그 안에서만 살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약간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람을 알아 온 것이 맞나 싶었어.
지적한 두 가지 충동 맞는 말인데, 그것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cyrus 2012-02-19 22:5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웃사이더형이지만 차마 제 입으로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라'라고는 말 못할거 같아요 ^^;;
오히려 제가 포기하고 먼저 연락하거든요 ㅎㅎ
누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줄 아는게 중요하죠 ^^

 
우울과 몽상 -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홍성영 옮김 / 하늘연못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1001-91] 어셔 가의 몰락

[1001-96] 갱과 추 (저승과 진자)

 

 

 

 

 가장 오래되고 강렬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다.

 

 - H.P. 러브크래프트 -

 

 

 

 

 공포문학의 효시, 에드거 앨런 포

 

공포문학은 오싹하고 음산하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녔기에 시대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주, 재생산되며 읽혀지고 있다. 괴기스럽고도 공포스러운 이 이야기의 근저를 이루는 초자연적인 공포는 인류의 출연과 함께 시작됐으며 그 자체로 문학 형식이 되기도 했다. '공포'라는 감정을 주제로 또 하나의 문학 장르를 구축한 에드거 앨런 포야말로 공포문학의 효시로 보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포가 태어나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이미 공포와 초현상을 주제로 한 고딕소설이 유행했기 때문에 포를 '공포문학의 원조'라고 평가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런 포 역시 고딕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어셔 가의 몰락」이다) 

 

하지만 포의 소설은 현실을 벗어난 독특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 공포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포는 세속적인 주제에 사로잡힌 예술과 문학을 경멸하였으며, 그 자체로 새롭고도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의 문학적 평가는 죽은 지 1세기가 지난 뒤에서야 이뤄졌다. 혹자의 비평가는 포를 미국 문학사에 크게 이바지한 영향이 없다고 저평가할 정도로 포는 자신이 태어난 미국에서도 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 준 사람들은 저 바다 건너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뿐이었다.

 

국내에서도 포의 작품, 특히 너무나도 유명한 「검은 고양이」, 「어셔 가의 몰락」등은 단편소설 모음집을 통해 심심찮게 만나 볼 수 있지만 단순히 아동 대상의 독자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두 단편소설만으로 포 특유의 그로테스크를 느낄 수가 없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포가 남긴 수많은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책이 『우울과 몽상』이다. 공포를 주제로 한 소설뿐만 아니라 '명탐정의 원조'인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유명한 추리소설까지 포의 모든 단편소설들이 실려 있는 유일한 소설전집이기도 하다. 단, 소설의 분위기를 흐트리게 만드는 오자에다가 독자들 사이에서는 역자가 원전의 일부를 일부러 훼손한 채 발췌 번역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리는 게 옥의 티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공포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정말 불행하기 짝이 없었던 일생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불우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술과 도박, 아편에 탐닉했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과 정신을 본인 스스로 망가뜨리고 말았으며 번번히 연애에서도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포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는 지독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소설 대부분은 공포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이다. 그가 표방하는 주제는 공포이며, 그 공포는 영혼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초자연적인 괴물의 형상이며,「어셔 가의 몰락」의 초반부에 그려진 늦가을 저물녘 늪가의 황폐한 옛 집은 바로 괴물의 집이다. 검은 고양이와 그 기괴한 분위기는 유년기에 포의 마음 깊은 곳에 축적된 공포감에서 나온 것이다.

 

 

 

 

 

 공포 앞에서 굴복하고 마는 인간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마로니에북스, 2007)는 수백명의 국제적인 문학 관편 필자들이 선정한 작품들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 소개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두 편이다. 그 두 편이 바로 「어셔 가의 몰락」「저승과 진자」(국내에 번역된 박스올의 책에서는 '갱과 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다. 포의 대표작인「검은 고양이」가 아닌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단편소설인「저승과 진자」가 소개된 점은 이례적이다.

 

하지만 「저승과 진자」에서도 절망적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공포적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공포로 인해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절망적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음산한 분위가 흘러나오는 어둡고 폐쇄적인 방, 먹이에 굶주린 채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는 쥐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진자의 날카로운 거대한 칼날을 보면서 공포에 질린 소설의 주인공. 「저승과 진자」속 주인공은 소설 시작부터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강력한 공포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 포는 밀폐된 공간 그리고 '끔찍한 죽음의 선고'(「저승과 진자」pp 734)를 내리려고 하는 진자의 칼날이라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만듬으로써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공포감에 의해 피폐해져만가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나는 눈을 떠 내 앞에 펼쳐진 환영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물을 최초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끔찍한 것을 보게 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결국 강렬한 마음의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눈을 떴다. 그러자 상상했던 최악의 상태가 나타났다.

 

 - 에드거 앨런 포 「저승과 진자」중에서 (pp 737) 『우울과 몽상』홍성영 역 -

 

 

「어셔 가의 몰락」에셔는 우울증에 사로잡힌 채 알 수 없는 공포감에 괴로워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혼란스러운 정신 이상 증세를 가진 주인공 어셔와 음습한 분위기로 가득 찬 어셔 가의 저택에 대한 고딕소설풍 묘사는 아편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을 경험한 포였기에 가능했다.

 

 

나는 내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단 한 채의 저택과 그 주변의 단조로운 풍경, 황폐한 담, 공허하게 뜬 눈 같은 창, 몇몇 사초 더미, 그리고 뒤섞인 나무의 흰 둥치들. 나는 그것들을 극도로 침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아편 중독자가 꿈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베일을 벗겨내는 끔찍함 이외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었다. 마음속이 싸늘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매스꺼웠다. 어떤 상상을 해보아도 적막감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음울함이었다.

 

 - 에드거 앨런 포「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pp 675) -  

 

 

그래도 포라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 바로 「검은 고양이」다. 온순했던 인물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으면서 무시무시한 살인자로 변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악마'스러운 본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내를 살해하게 되자 아내의 시신을 지하실 벽 속에 감쪽같이 숨긴다. 하지만 완전범죄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끔찍한 살인의 내막은 들통난다. 시신이 숨긴 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게 되고 그 곳을 허문 순간, 부패된 아내의 시체와 시체 옆에서 외눈의 검은 고양이가 흉칙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앉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괴물'이 벽 안쪽에 시신과 함께 있는 그 '괴물' 검은 고양이를 벽에 발랐던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거나 특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면 주위에 평범한 대상들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살인자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유발하게 했으며 그 장면을 목격했을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처음에는 끊어질 듯한 어린아이의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였는데, 곧 너무나 괴기하고 사람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끊임없이 울리는 큰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그것은 비탄에 잠긴 저주받은 이와 그 저주에 기뻐 날뛰는 악마의 목구멍에서 함께 나오는, 지옥에서만 솟아오르는 공포와 승리감이 섞인 울부짖는 비명 소리였다.

 

 -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중에서 (pp 654) -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고양이가 우는 소리로만 들렸겠지만 살인자의 귀에서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자신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아내가 벽 속에서 외쳐대는 절규에 찬 비명 소리였던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포의 이야기

 

포가 썼던 단편소설들을 모은 첫 번째 소설집 제목이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다. 첫 번째 소설집 출간 이후에도 포는 제2의 소설집을 출간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첫 번째 소설집의 제목이아말로 포가 추구했던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의 뜻처럼 포의 소설에는 괴기스럽고, 흉측스럽고, 현실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존재와 세계가 있다. 그런 형식을 지는 포의 소설이 자칫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일종의 기피감을 가질 수 있겠다. 그의 문학을 칭찬하고 프랑스에 소개했던 보들레르의 문학처럼 포의 문학 역시 단지 '우울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포는 문학의 목적이 도덕이나 교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美)의 창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꿈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고 그 곳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짧은 소설마다 소재의 창발성에 놀라고, 때론 광기어린 감정 묘사에 혀를 내두르고, 때로는 기발함에 멈칫하게 된다. 몽상적인 소재들이 많아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무엇보다고 그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마주할 때 가지게 되는 인간의 무의식 속 감정, 즉 '공포'에 질리면서 나타나게 되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도 묘사하고 있다. 

 

다독가인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젋은 시절에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문학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소설과 같은 픽션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했다. 다치바나 다카시 입장에서는 단순히 시간낭비일지 몰라도 포의 상상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까?  더욱이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는 현실에 벗어난 건 사실이지만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세계 앞에 공포감을 느끼는 감정만큼은 '실재'의 경험이다. 

 

이렇듯 포의 소설은 단순히 호기심 많은 아동들을 겨냥한, 순순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 독자들에게 겁을 주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게 만드는 싸구려 공포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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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18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샤이닝님도 그러고 시루스님도 쓰시고 할인도 많이 돼서 이 책 살까 해요!^^

cyrus 2012-02-18 14:08   좋아요 0 | URL
요즘엔 이 책 싸게 팔더군요, 책이 두꺼워서 심심할 때 읽으시면
좋을듯해요 ^^

꽃도둑 2012-02-1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는 구체적 대상이 있을 때보다 막연하거나 형체가 없을 때 더 증폭된다고 합니다..
포의 공포는 분명 내적불안에 기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쏘우 인가요?,..보는 내내 기분나쁘고 섬뜩했어요, 그 팽팽한 긴장감의 줄을 탁! 끊어버리던 반점의 묘미도 있었지만...
암튼 공포 영화 호러 영화 소설 등...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cyrus 2012-02-18 14:10   좋아요 0 | URL
쏘우, 완전 최고죠! 저는 공포영화 한 편 보면 영화에서 봤던
영상들이 머릿속에 남아도는 편이라서 되도록이면 잘 안 보는 편이에요.
공포영화 무서워서 안 보는게 아니랍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2-1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우...좋죠.저는 '어셔가의 몰락'이 좋았어요.이 집의 정체는 뭘까...의문의 여인은...그러다 마지막에 저택이 와르르...기묘한 매력이죠.

그리고 포우의 유일한 장편인 <아더 고든 핌의 모험>이 몇 년 전 다시 번역되었으니 관심있으면 구해 읽으세요.

cyrus 2012-02-20 18:43   좋아요 0 | URL
저도요. 소설 중간에 삽입된 시도 좋았어요. '애너벨 리'가 연상되더라고요.

사실 포를 읽으면서 장편도 구입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절판이더군요.
그나마 중고샵에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게 비싼 가격에 팔고 있고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네요 ^^

휘오름 2012-02-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에 포우 단편집 조그만한건 한번 봤는데 제대로 나온 책은 한번도 못봐서 고민중이었네요. 이기회에 한번 도전해 바야겠궁요..ㅎ
 

 

 

 

 

(짤방) 주인아, 내가 정 때문에 산다

 

 

 

 

 수강신청, 첫 날

 

 

오늘부터 수강신청을 하는 기간이다. 2월 중순, 그러니깐 이 시기 즈음에 모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순위에 'OO대학교'가 상위권에 있다면 '아.. 오늘이 대학생들이 수강신청하는 기간이구나'하고 생각하면 된다.

 

대학생의 수강신청은 좋은 수업을 듣기 위해서 마우스와 컴퓨터 자판기를 동원하는 '속도전'이다. 빨리 클릭하고, 입력하는 자만이 원하는 수업을 듣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기간만 되면 아침 늦게 일어나는 학생들도 일찍 일어나게 된다. 일찍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수강신청을 할 수 있는 학교 홈페이지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대체로 수강신청은 아침 9시(학교마다 다를 수 있음)부터 가능한데 그 때까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너무 일찍 접속한 채 가만히 놔두면 자동으로 로그아웃이 되기 때문이다. 9시가 되는 순간, 바로 수강신청을 한다. 마우스를 빨리 클릭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시간표를 만들 수 있다.

 

오늘 아침 8시 30분~9시 경에 N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 순위에 'D 대학교'가 1위였는데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서 미리 접속하려고 하는 수많은 대학생들의 위력이다.

 

수강신청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아시다시피 수업 시간이 한 시간이라도 중복되어도 원하는 수업을 듣을 수 없다. 그리고 학생들이 많이 듣는다는 인기 수업을 듣는 것도 쉽지 않다. 접속한 지 1분도 채 안 되 신청인원이 차서 신청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오늘 같은 경우에도 이미 예비로 신청해두었던 경영학 과목 3과목이 인원 초과되는 바람에 다시 시간표를 편성해야했다. 문제는 2학년 과목을 넣고 싶은데 내가 현재 3학년이라 2학년 과목을 넣지 못했다. 왜냐하면 해당 학년 학생들이 다른 학년 학생들의 신청 때문에 정작 해당 학년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오늘은 해당 학년 과목을 신청을 할 수 있고 내일부터는 전 학년별로 과목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원했던 2학년 과목이 인원이 꽉 차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오늘 하루종일, 그러니까 수강신청 시간이 마감되는 오후 8시까지 수강계획서 일일이 확인하고 시간표를 다시 만들었다. 복수전공을 겸한 수강신청이라서 그런지 주전공 수업시간만으로 시간표를 만드는 것보다 힘들었다. 주전공 수업 시간에 중복되어서 복수전공 과목을 신청하는 데 여러모로 골치 아팠다. 이미 신청된 주전공 수업 시간을 유지한 채 남은 시간을 복수전공 과목을 신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내가 처음에 원했던 시간표는 아니었지만 최대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과목 위주로 편성했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다행히도 수요일은 수업이 없어서 좋다. 하지만 화요일에는 세 과목 수업이 있고 하루에 세 과목이나 시험을 쳐야 한다. ^^;;

 

 

 

 

 등록금 3% 인하했다고 학교 신문을 폐간한다?

 

가뜩이나 오늘 시간표 짜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우연히 학교 게시판을 통해서 씁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내가 다니고 있는 D 대학교가 점점 호감이 가지 않다.

 

국가등록금 확충 발표 이후에 성적우수장학금은 저소득층을 위한 장학금 재원 보충이라는 명목으로 수혜 범위를 갑자기 축소시킨 것부터 시작해서 이번에는 등록금 인하 이유만으로 학교 신문까지 폐간한단다. 등록금 인하 이유로 학교 신문을 폐간하는 학교는 우리 학교가 처음일 것이다.

 

지방에 위치한 대학교 내 소식이라서 그런지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직접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봤는데 관련 소식을 접한 언론매체를 단 한 곳 빼고는 없었다. 대구, 경북에 사는 사람들도 이 소식을 모르리라.

 

학교 측은 등록금 3% 인하에 대한 예산 절감 차원 조치로 학교 신문을 폐간하고 대신에 인터넷 신문 형태로 전환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학교 측은 종이 신문을 만드는 신문 편집부 쪽에게 어떠한 의견도 물어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결정, 통보해버린 것이다. 종이 신문 낼 때마다 드는 비용이 120만원이 드는데 학교가 충당하는 재원치고는 많지 않은 액수이다. 신문 낼 때마다 드는 비용보다 수천만원을 소비하는 건축 공사를 안 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만... 그리고 종이 신문 대신에 인터넷 신문으로 전환하는 데만 적지 않은 비용도 들어가게 된다. 등록금 인하만 가지고 학교 신문을 폐간한다는 학교 측의 주장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문제의 학교를 다니는 일부 혹자의 학부생은 학교신문 폐간이 일종의 언론통제 효과를 노린 거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D 대학교는 몇 년 전부터 사학비리 재단 반대 여론이 들끊었고 최근에는 등록금 인하 문제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 홈페이지 내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학교의 문제점에 대해서 소신 있게 문제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 게시판에 옳은 지적을 한다거나 제안을 해도 학교 측에서는 그런 학생을 달가워 하지 않게 여긴다.

 

게시판에 학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많이 남기는 학생에 의하면 학과 사무실에서 직접 전화가 와서 게시판에 글 남기는 것을 자중하라는 일종의 경고도 받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현재 학교의 모습은 국민 간의 소통을 소홀히 하는 정부나 MBC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내세운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려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결국, 이 문제가 일파만파 커지자 학교 측과 학교 신문 편집부 간의 회의 끝에 종이 신문 폐지가 아닌 신문 발행 주기 수정 및 온라인 신문 병행으로 결정났다. 끝내 등록금 인하로 인한 예산 삭감 결정은 유지된 채 말이다.

 

 

 

 

 미운 정, 고운 정

 

종종 학교 게시판에는 곧 졸업을 앞둔 학부생들이 글을 남기곤 한다. 인생의 선배로써 아직 학생 신분인 후배들을 위해서 충언의 글도 남기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그동안 쌓고 쌓였던 학교에 대한 실망스러운 마음들과 불만들을 쓰곤 한다.

 

그런 글들을 읽게 되면 올해부터 3학년인 나도 졸업생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내가 군대 가기 전 때보타 학교의 이미지가 더욱 나빠진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대구, 경북에 위치한 다른 4년제 대학교에 비해 발전이 더디고 있다. 아직까지 결론의 매듭 짓지 못한 사학 비리 재단 문제는 학교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최근에 불거진 등록금 문제는 학생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또 정작 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해야 할 학생회는 이렇다 할 힘도 쓰지 못한 채 죽만 쑤고 있으니 학생들로부터 신뢰감을 잃은지 오래다. 더욱이 학생들의 진심을 보지 않으며 아예 그들의 소통마저도 차단시키려고 하는 모교의 태도는 학생들 간의 반목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고 있다.

 

마음 같으면 내가 다니고 있는 모교보다 더 좋은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하고 싶다. 한 때 편입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운 정 고운 정'이라고 했던가. 편입하기에는 이미 모교에 대한 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도 언젠가는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 불투명한 희망이 내가 졸업하고 난 뒤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 주위에는 친한 동기,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학교 다닐 맛이 난다. 이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혔고, 함께 공부를 했고, 함께 장래에 관한 꿈을 꾸었다. 서로 챙겨주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 집보다 한 시간이나 먼 학교에 불평, 불만을 늘어 놓으면서도 다니고 있다.

 

이제 겨울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도 시간표 때문에 몇 몇 동기들과 전화 통화를 많이 했다. 이제야 개강이 앞두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아직 겨울의 찬 바람은 남아 있지만 내 가슴 속에는 벌써부터 기분 설레게 만드는 봄 기운이 이미 감돌고 있는 듯하다.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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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2-1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아들도 어제 아침에 수강신청하고 1받 2일 OT갔어요~
학교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애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재단들이 큰돈을 펑펑 쓰면서 작은 돈에 연연하는 걸 보면 정말 웃기지도 않아요.
내세우는 이유야 허울뿐이고 속내는 따로 있다는 게 다 보이는데...

cyrus 2012-02-16 21:52   좋아요 0 | URL
아드님이 꽤 일찍 수강신청을 하셨네요. OT도 그렇고 새내기 대학생으로서
아드님께서 무척 마음이 설레셨겠어요 ^^ 저도 그 기분 알죠 ㅎㅎ


stella.K 2012-02-1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치 않아도 오늘 아침 뉴스에 대학교들 적립금이 그렇게 많은데
겨우 3% 인하에 그것도 과목을 축소하거나 수업 일수를 줄이는 대학이 글케
많다더라. 참 기가막혀 3%라봤자 16만원 정돈데 한 학기 차비도 안 빠지는
액수잖아?
반값은 멀기만 한 걸까? 이러고 나오는 것 같으면 집단으로 등록금 내는 거 거부
해 보면 안 되는 건가 싶기도 하더라. 그놈의 대학이 뭔지...흐

cyrus 2012-02-16 21:54   좋아요 0 | URL
오늘 제가 본 신문에서는요,, 모 학교는 등록금 인하 핑계로
학교 도서관에 지원되는 경비마저도 삭감했대요. 학생들을 위해서
지식의 장을 만들어줘야할 대학이 발전은커녕 오히려 발전에
역행하는 꼴을 보이고 있으니 씁쓸해요. 반값 등록금 문제는
쉽게 해결할 사안이 아닌거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2-1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의 잔머리 굴리는 소식은 우울하지만 저 강아지는 정말 귀엽네요. 으~ 안아주고 싶어~

cyrus 2012-02-16 21:56   좋아요 0 | URL
ㅎㅎ 귀엽죠, 비글은 강아지 시절이 무척 귀여운데 반려견주 사이에서는
'3대 악마견' 중의 한 종으로 악명 높다죠 ^^;;
TV 동물농장에 봤는데 완전 집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더군요ㅎㅎ

차트랑 2012-02-1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 쯤이면
입학금 등록금이 얼마나 되지
걱정이 앞섭니다.

cyrus 2012-02-16 21:57   좋아요 0 | URL
지금이라도 반값 등록금이 학교와 학생들 간의 합의 하에 이뤄져야하는데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을거 같네요. 그대로 미온적으로 놔두다가는
다음 세대들에게 되물림될까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합니다.

카스피 2012-02-1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꼴랑 3~5%정도 수업료 내리는 대학들을 보면 쇼도 그런 쇼가 없단 생각이 듭니다.모 대학은 등록금 3% 내리면서 1주일 수업시간을 없앴다고 하더군요.1주일을 없애면 학교측에서 십몇%가 이득이라고 하니 참 대단한 잔머리지요.이런 뒌장할~~~

cyrus 2012-02-18 14: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늘은 또 인터넷 기사에 봤는데 대학교 등록금 줄인답시고
이번에는 대학'원' 등록금을 올렸다는군요. -_-;;

saint236 2012-02-1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학교는 등록금 인하를 핑계로 16주짜리 수업을 15주로 단축했다는 기사도 있더라고요. 어째 이런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니. 저도 졸업한 다음에는 학교에 안가게 됩니다. 간혹 가게 되더라도 학교 서점 주인 아주머니와의 친분 때문이지 학교가 그리워서는 절대로 아닙니다.

cyrus 2012-02-18 14:13   좋아요 0 | URL
요즘 등록금 인하로 학교들 꼼수 쓰는거 보면 웃기면서도 씁쓸하네요 ^^;;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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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15] 보바리 부인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바다와 나비」-

 

 

 

 

 

『마담 보바리』가 출간된 1857년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현대'가 시작된 시기다. 마담 보바리는 사랑의 현대적 의미를 묻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결혼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주제와 소재가 통속적일 수도 있지만 일상의 지루함, 즉 '권태' 앞에서 무력해지는 군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중세적 전통에서 시작한 시민적 결혼의 이상이 결코 소시민적 이상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엠마는 여느 귀족이나 부르주아 가정의 딸처럼 사춘기를 수녀원에서 지내면서 정숙한 가정 생활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교육을 받는다. 그 당시 여성들에게 유일하게 배울 수 있는 교육이 정숙한 부인이 되는 방법 또는 예절이었다.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샤를 보바리라는 의사가 농장으로 왕진을 오고 엠마의 평범한 일상에는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엠마는 사를 보바리와 결혼을 하지만 시골 구석에서 앞날 없는 왕진 생활에 만족해 하는 그는 아내의 욕구를 채워줄 수도, 소설적 환상을 함께 나눌 수도 없는 인물로 무력감으로 가녀린 비상을 꿈꾸는 나비를 또다시 권태의 거미줄에 옭아매고 만다. 그러던 중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멋진 청년 레옹을 만나며 그가 열정적인 사랑을 고백해오기를 기대하고, 세련된 바람둥이 로돌프가 자신을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나주기를 바라지만 엠마를 기다리는 것은 일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배신과 환멸로 가득찬 현실이었고, 환상을 채우기 위한 애정 행각으로 생긴 엄청난 경비 목록과 고리대금 업자로부터의 빚 독촉뿐이었다. 환상을 좇다 날개가 찢긴 나비, 엠마 보바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자신에게 환상의 날갯질에 대한 불먕을 불러일으켰으면서 그 날갯질을 허용하지 않는 삶을 저주하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땅에 묻히는 것뿐이었다.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  <무도회 이후>  1895년

 

 

 

 

그녀의 일탈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었고, 그녀의 순수한 갈망은 그녀가 탐독하던 낭만적인 삼류소설 속에서만 읽혀질 수 있었다. 자유분방한 애정행각이 수반한 과소비로 인해 경제적 파탄에 이른 엠마 보바리가 택한 해결책은 음독자살이었다. '소설'과 같은 낭만적인 삶을 동경하고, 일상의 단조로움을 떨쳐버리는 사랑을 항시 찾아헤매던 에마는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교정하고 있는 셈이다.

 

『마담 보바리』가 출간될 무렵에는 중세적인 계약 결혼의 풍속이 사라지고 남녀의 사랑에 기반한 결혼 풍속이 이미 자리잡은 시기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일상이 낭만과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시기였다. 낭만적인 결혼관을 키워온 엠마 보바리에게 샤를과의 결혼생활은 현실이었고, 그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였던 엠마가 저지른 불륜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도덕적인 시민사회에서 그녀가 서 있을 자리를 빼앗아갔다.

 

이 소설로 인해 그 유명한 '보바리즘'(bovarysme)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과거에 대한 추억, 미래에 대한 꿈이 현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성향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 때문에 미래가 이상화되어 현재란 끝없는 환멸과 기쁨의 연속이며 현실 도피의 세계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현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인간의 비극이다. 보바리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바리즘'이 일정 정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선 보바리 부인 그리고 그녀가 권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과 반대로, 권태를 그대로 받아 안고 있는 샤를 보바리처럼 '권태'라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마담 보바리의 자유로운 삶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현실의 냉엄함에 너무 무능한 현대인의 자기연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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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1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어봐야 할 것 같네.
나이 들수록 권태가 문젠 거 같아.
예전에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씨였나? 배삼룡 씨였나,
하루는 너무 빨리 가는데 세월은 너무 지루하고 했는데
그말 참 이해해.
그런데 책이 좀 지루하다고 해서 읽어줄 자신이 없더라구.
이거 읽다 권태로워 엎어버리면 어쩌지?ㅋ

cyrus 2012-02-15 22:46   좋아요 0 | URL
그러면 읽지 마세요. 위험해요 ^^;;
저는 플로베르의 사실적인 문장 때문에 조금은 지루했어요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2-1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바리즘. 그러면 저도 가끔 보바리즘에 시달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을 읽으면 가끔 모든 현실에 심드렁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해요. 요즘 좀 나아졌는데 한때는 재미 없으면 읽다 던져놓고 읽다 던져놓고 그런 적도 있도 이제는 끝내는 거에 강박관념이 생겨가지고 끝까지 붙잡고 읽기도 하고. 파멸로 가면 문제겠지만 권태를 이겨보려고 책이든 뭐든 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요. 보바리 부인이 살던 시기는 참 그렇기도 했고요^^

cyrus 2012-02-15 22:48   좋아요 0 | URL
앙드레 지드가 말했듯이 가끔은 읽고 있는 책을 내던질 필요가 있어요 ^^
이제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어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