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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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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판결' 만 기억되는 <베니스의 상인> 

고전이란 누구나 내용은 알지만 읽어보지는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베니스의 상인>은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내용은 대충 안다.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인 샤일록에게 '1파운드의 살점을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는 명판결만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앤토니오는 그의 이름만 대면 무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을 정도로 신용이 높은 상인이었다. 자신의 친구인 바싸니오포오셔에게 구혼하러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기 위해 샤일록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는 앤토니오에게 상당한 금액의 이자를 요구한다.  앤토니오는 샤일록의 부당한 제안에 경멸로 가득찬 비난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는 샤일록이 원하는 대로 원금을 제때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심장에서 가까운 살 1파운드' 를 주겠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빌린다. 그런데 공교롭게 상선의 사고로 원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게 되었고, 샤일록은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 1파운드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앤토니오와 샤일록 간의 '살 1파운드' 논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앤토니오 측이 불리한 입장에 놓여지게 되었지만 판결 결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법학 박사들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된다.   바싸니오의 연인 포오셔와 그녀의 시녀 니리서가 법학 박사로 변장하여 재판장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포오셔는 계약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1파운드의 살을 떼어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도려내라" 고 판결한다.  이것은 계약서의 내용이나 샤일록의 요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므로 법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하지만 내심 앤토니오의 죽음을 원한 샤일록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막판에 궁지에 몰린 샤일록은 오히려 '계약 내용에 베니스 인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 는 죄목으로 결국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는데다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받는 처지에 놓인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 위기에 처한 선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살려낸 재치 있는 판결 정도만으로 알려져 있다.  샤일록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약자에 횡포를 부리는 악덕 고리대급업자의 상징으로만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유대인 출신' 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은 오랫동안 '돈만 밝히는 민족' 으로 왜곡, 폄하되기도 하였다.    큰 맥락으로 보면 기독교와 이교도인 '유대교' 와의 싸움에서 기독교의 일방적 승리를 상징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도 있다.  

 

 

 샤일록은 왜 법정에서 칼을 갈았을까?

샤일록이 법정에서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에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유대인이라는 점과 그 당시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고리대금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샤일록은 중세 유럽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스테레오 타입인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채권자로 그려질 수가 있었다. 

반면 앤토니오는 부자지만 친절하고 자기희생적인 한 마디로 말해 '선한 기독교인' 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는 이교도에 대해서는 비관용적이고 비타협적이다.   

 

샤일록, 나는 이자를 수수하는 금전거래를  

해본 적이 없지만 내 친구의 시급한 필요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관행을 깨려 하오.  

- 제1막 3장 중 앤토니오의 대사 (pp 26) -

 


그는 샤일록에게 빚을 청하면서도 고리대금업을 일종의 '투기' 로 인식하면서 이자수취를 경멸하는 기독교도로서의 도덕관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샤일록은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에 제법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라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을 했는데도 그것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멸시받고 조롱받고 증오를 받았기에 샤일록은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계약서를 흔들며 앤토니오에게 이자를 요구하는 것만 아니라 기독교에게 핍박받았던 '유대인' 민족으로서의 힘을 당당하게 과시한다.  

 

난 차용증서대로만 하겠고, 당신 말은 듣지 않겠소. 

난 차용증서대로만 할 작정이니까 말일랑 더 이상 마오. 

난 머리를 흔든다든가, 측은하게 여긴다든가, 한숨을 쉰다든가,  

기독교인 중재자들에게 주장을 굽히는 등의 우유부단하고 

멍청한 눈을 한 바보는 되지 않겠단 말이오. 따라오지 마시오. 

말하기 싫소이다.  난 차용증서대로 할 것이오. 

- 제3막 3장 중 샤일록의 대사 (pp 95) -

  

"계약대로 하겠다" 고 큰소리치며 법정 안에서 칼을 가는 샤일록의 모습은 이자에 집착하는 사악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대한 복수심에 불 탄 유대인의 모습이다.   

 

바싸니오   무슨 이유로 당신은 칼을 그처럼 열심히 갈고 있소. 

샤일록      저기 저 파산자에게서 벌금을 베어내기 위해서요.  

- 제4막 1장 중에서 (pp 115) -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당한 이론을 펼쳐도 결론은 KO패로 정해져 있다.  앤토니오를 신뢰하지 못하고, 계약서만 굳게 믿었던 샤일록은 크게 참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샤일록은 유대인으로서의 서러움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민족의 위력을 보여주고 싶어했지만 결국 신뢰보다 취약한 계약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악인' 샤일록의 외로운 최후

'악인' 샤일록과 '선인' 앤토니오의 대결구도로 인식되어 온 <베니스의 상인>은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읽게 된다면 오로지 악하기만 한 악인과 선하기만 한 선인이 없으며 다만 '악의가 선의를 넘어서는 그 순간들' 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샤일록은 그동안 대부분 파렴치한 악인으로 그려졌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받고 난 뒤의 그의 모습은 동점심을 유발할 정도로 처량하다.   오랫동안 모은 재산의 절반은 한순간에 국가로 귀속되어지고 자신의 딸 제시커는 기독교인 청년 로렌조와 결혼하게 되어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된다.  샤일록은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받아야하는 외로운 민족의 전형이면서도 딸에게서도 버림받는 외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법정 판결 이후 샤일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최후마저도 언급되지도 않는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두 딸이 아버지인 고리오 영감의 임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영감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파산 직전으로 몰리게 된 샤일록도 고리오 영감처럼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돈' 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돈' 때문에 자신도 상처를 입고 몰락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돈' 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법대로' 를 외치는 샤일록이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종국엔 몰락을 겪는 모습을 통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만 샤일록은 돈만 밝히는 전형적인 수전노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사회적 진출이 막혀 있었던 그 당시 유럽의 사회가 '샤일록' 이라는 악명 높은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를 만들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돈 많은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 그만큼  부(副)의 위력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와 평가도 달라진다.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재물을 늘리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도 무시할 수 없다.  물질만능 시대의 사회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앤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삼겠다는 샤일록의 욕망은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정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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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 악인은 사회가 만든 부조리와 악행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예나지금이나 본인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는생각해요. 글쎄....써놓고보니 어려운 주제같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cyrus 2011-10-01 11:36   좋아요 0 | URL
현맘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무조건 성격만 가지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잘못된 사회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과 사고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아이리시스 2011-10-0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밤 읽을 책, <베니스의 상인> 당첨! 시루스님 덕분.^^

cyrus 2011-10-01 11:41   좋아요 0 | URL
ㅎㅎ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하네요. 참고로 베니스의 상인은
민음사에서도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문학동네판을 추천하고 싶어요.
민음사에서 나오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최종철 교수가 번역을 맡고 있는데
이 분의 번역한 문장이 문어체라.. 간혹 대사 중에 한문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0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또래의 극작가로 크리스토퍼 말로가 있었는데 라이벌이었다네요.말로는 <베니스의 상인>에 맞서 역시 유대인이 주인공인 <말타의 유대인>을 썼답니다.이 두 작가의 관계는 상당히 재밌어서 역사가나 문학애호가들에게 회자되었죠.우리나라에도 말로의 작품이 몇 개 번역되어 있더군요.유대인이 당시의 기독교권 국가의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은 연구자들에겐 이 두 작품이 흥미로운 비교연구대상이 될 것 같아요.

cyrus 2011-10-02 20:58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번역본 해설을 보게 되면 크리스토퍼 말로는 꼭 언급하더라고요.
노자님 말씀대로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에 말로의 희곡작품이 번역된
걸로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셰익스피어 읽기에는 말로의 작품을
무시할 수 없을거 같아요. 시간이 된다면 말로의 작품을 비교하여
읽으면서 노자님이 제시한 주제(?)에 대해서 탐구해봐야겠습니다. ^^;;
 

 

 

 

 

 

 

 

 

     

 

  

 Scene #1  대학교 축제의 모습

어제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맨스필드의 단편선집을 읽게 되었다.  제목은 그녀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의 동명제목인 '가든파티' 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제는 학교 축제가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  축제와 파티는 의미에만 조금 차이가 있을뿐 공통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 노는 것이다.  

원래 학교 축제가 있는 날이면 대부분 수업은 휴강을 하게 된다.  학생들이 축제를 마음껏 즐기기 위한 교수님의 배려(?)도 있지만 실제로 축제 기간에 수업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강의실 안까지 들려올 정도로 엠프에서 울려나오는 아이돌 그룹의 흥겨운 노랫소리에다가 축제의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 고성방가하는 청춘남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업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정말로 참기 힘들 정도로 고역이다.    교수님이 열심히 칠판에 써가는 내용은 안중에 없다. 그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는 생각만 들게 된다.

하필이면 어제 들은 수업은...      '정치학' 이었다.    

안그래도 원래 수업도 지루한 마당에 어제 같은 날은 나뿐만 아니라 출석한 모든 학생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리라.  ^^;;

 

아직 축제 첫날인지 모르겠지만 올해 우리 학교 축제는 예전에 비해 간소화하게 진행되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뿐만 아니라 최근 대학 축제들은 24시간 하루종일 술만 마시고 유명한 가수들을 초청하는 그저 먹고 놀기만 하는 축제에서 탈피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요즘 '반값 등록금' 에다가 대학 구조조정 등과 같은 대학교와 대학생들에게는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이슈가 거론되고 있기에 예전과는 다르게 대학교 축제는 '경제적' 이면서도 한편 학생들에게 유익한 취업 및 문화 관련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취업' 과 '진로 선택' 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보니 축제를 즐길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어제 잠깐 학교 도서관에 들리게 되었는데 축제 기간 속에서도 열람실에서 공부에 열중한 학생들이 많았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펙을 쌓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도서관 입구를 나오는 순간,  자신의 몸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할 정도로 술에 떡이 된(?)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축제 기간이 되면 대학 캠퍼스 안에는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의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은 서로 남이 무엇을 하든 간에 관심이 없으며 남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익숙한 현실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Scene #2   인생이라는게... 그런 것이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땅 위에 살아가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삶과 상반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경우가 드물다.  심지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낯선 환경을 이해하고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번에 처음으로 읽는 맨스필드의 단편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여성 작가의 단편소설이라서 많은 기대감을 안은채 읽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했던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과거에 오 헨리와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얻게 된 인상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성 작가답게 인물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 일상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이야기 전개는 읽는 내내 결말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그녀의 대표작인 '가든파티' 는 주인공 로라가 끝내 말하지 못한, 형용할 수 없는 여운으로만 남겨진 그녀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초여름의 어느 날, 주인공 로라는 노동자들이 푸른 잔디밭 위에서 천막을 치고 밴드를 옮기며 파티를 준비하는 것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빈촌인 아랫 마을의 스콧이라는
젊은 짐 마차꾼이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파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빠 로리만 제외하고, 모두 가든파티와 죽음은 별개의 문제라며 예정대로 파티를 연다. 끝내, 로라는 한 쪽에선 사람이 죽었는데도 파티를 계속한다는 것은 비정하다면서 사치스러운 파티를 떠난다.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죽은 짐 마차꾼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어둡고 누추한 집을 찾은 로라는 마치 잠을 자듯 평화롭게 누워 있는 짐 마차꾼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난 후, 흐느끼며 집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오빠 로리를 만나게 되는데 로라는 오빠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의미의 말을 하게 된다.

 

“무서웠어?”
 
“아니.” 

로라가 흐느꼈다.

 "그저 대단했어. 하지만 오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오빠를 바라보았다.

“인생이, 인생이...”

그녀가 더듬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 그래도 상관없었다. 로리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정말, 그렇지?”

로리가 말했다.                  

([가든파티] 중에서, pp 114)

  

이 소설은 파티에 들뜬 부유한 사람들과 교통사고를 당한 노동자의 비참함을 비교하며 인생의 한 단면을 펼친다. 하지만 그 방법이 결코 작위적이지 않다. 그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소녀가 하층 계급 노동자의 죽음을 접한 후 겪는 심리 변화만 따라간다. 사건 뒤에 담긴 의미들은 로라가 마지막에 오빠에게 하는 말, `인생이라는게... 그런 것이다` 라는 말에 모두 압축된다.

 

  

 Scene #3  '현실' 이라는 익숙한 동굴에 갇혀버린 인간

 

피터르 브뤼헐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1555~1558년경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를 읽으면서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이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로 하늘을 날게 된 인간 1호이면서도 비행을 하다 추락사를 하게 된 불명예스러운 인간 1호이기도 하다.   이카로스는 새처럼 나는 것이 신기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잊은 채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태양열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버려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카로스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제목과는 다르게 목가적인 풍경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면 오른편 커다란 배 앞에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는 두 개의 다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추락하는 이카로스의 최후 모습이다. 너무도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이카로스의 발버둥은 그 비극적 상황에도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한다. 농부는 여전히 밭을 가는 데 여념이 없고, 배는 자신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낚시꾼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저 고기잡이에만 열중하고 있다. 양치기만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브뤼헐은 '이상' 을 좇는 이카로스보다 열심히 '현실' 을 살아가는 이름 모르는 민중들을 그림의 중심에 놓았다. 더불어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이카로스의 욕망을 무모하고 어리석은 의미로 그렸다.   

하지만 그림 속 민중들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매진하는 현실주의적 삶도 부작용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삶의 환경에 익숙해지고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은 자칫 '현실 안주' 라는 문제점으로 발전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익숙하게 되면 전혀 새로운 미지의 상황 앞에서는 두려움으로 인해 움츠려들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제시한 '동굴의 우상' 처럼 동굴에 오랫동안 생활한 인간은 동굴 밖에 펼쳐져 있는 넓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결국에는 현실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편견을 낳게 된다.

   

 

 Scene #4   하나의 세상, 두 가지 현실

베이컨은 다른 사람의 감정, 정서 및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로라가 하층민 가족이 겪은 죽음과 그로 인한 슬픔을 접 목격함으로써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듯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잠깐이마나 고개를 돌려본다면 전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며칠 전부터 조세희의 <난쏘공>을 읽고나서부터 항상 느낀 것이지만 하나의 세상 속에는 안과 밖이 서로 다른 모순적인 현실이 공존하고 있다.  '난쏘공' 과 '가든파티' 속 시대적 배경의 모습처럼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상반된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쪽에서는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공장 노동자들은 24시간 투쟁을 벌이고 있고, 정부와 기업의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면서 골프를 하고 신용카드를 남발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뒤안길에는 실직으로 인한 가난과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양극화 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권에서는 민생 대책에 고심하기보다는 곧 치뤄질 대선의 승리라는 현실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세계적 금융 위기라는 찬 바람이 슬슬 불어 오고 있는데도 정부는 경제적 혹한에 취약한 서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옷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서민들은 올해의 겨울은 지난해처럼, 아니 이보다 더한 혹독한 계절을 맞이하지도 모른다.    

정치권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는 권력형 비리로 인해 잡음이 일어나고 있고 각 정당들은 대선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발빠르게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의 그늘 진 곳에서는 또 다른 어느 누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로라의 애정이 새삼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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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09-28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선거철만 되면 인간 대접을 받으니 다행이죠. 개인적으로는 매일 선거였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1-09-29 19:21   좋아요 0 | URL
선거철이 지나도 정말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어요 ^^

stella.K 2011-09-28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제 때 수업을 하는 교수님이 어딨니?
축제를 간소화 할 필요는 있지만 축제는 축제대로 놀아줘야 하는데
그 기간에도 스펙을 쌓기위해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니 좀 그러네.
울나라 대학생은 가면 갈수록 불쌍해지는 것 같아.
대학의 낭만이란 게 없는가 보다.ㅠㅠ

cyrus 2011-09-29 19:23   좋아요 0 | URL
원래는 축제 기간 때는 수업을 안 하는데 이틀 전 수업 같은 경우에는
교수님이 다음주에 출장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한거예요.
2학기 같은 경우에는 축제 기간에다가 공휴일이 있어서 1학기보다는
수업 일수가 적거든요.

저뿐만 아니레 제 주변에도 대학의 낭만을 점점 잃어버리는거 같아서
씁쓸해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제때 수업이라뇨..ㅎㅎㅎ 요샌 정말 분위기가 좀 다르네요.
저희 학교는 축제가 재미없어서 그런지 남학생들이 여학교로 다 놀러가는 바람에
학교에 여학생들만 득실댔었던 안좋은(!) 기억도 있어요.ㅎㅎㅎ
그래도 그때만큼은 공부하는 학생들은 없었는데 정말 세월이 다르네요.

cyrus 2011-09-29 19:24   좋아요 0 | URL
글 쓰면서 언급을 안 했는데,, 교수님이 다음주에 출장이 있어서
학습 진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거예요. ^^;;

blanca 2011-09-28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새 축제 분위기는 사뭇 다르군요. 다른 학교 축제 원정 가는 일도 이젠 드문 풍경이 되었겠어요. 아, 저도 요새 양극화 풍경을 절감합니다. 인생이라는 게 때로 참 잔혹한 것 같아요. 저 그림에서 이카루스를 한참 찾다 보고 웃었어요^^;; 재미있는 그림이네요.

cyrus 2011-09-29 19: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 역시 다른 학교 축제 원정이라고 갈려고 했었는데,,
2학기 때는 축제를 안 하는 학교도 있었어요. ^^;;

잘잘라 2011-09-2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쪽에서는 축제 한 쪽에서는 수업이라니.. 허어어 우째 그런 일이..
인생이.. 시절이.. 참....

cyrus 2011-09-29 19:27   좋아요 0 | URL
ㅎㅎ 교수님이 다음주에 출장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했던거에요 ^^;;
야간 수업 같은 경우에는 휴강인데 주간에 강의가 있는 몇 몇 교수님은
축제 기간에도 수업을 하기도 한답니다.

맥거핀 2011-09-2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이 참 좋아요. 맨스필드의 단편으로부터 학교 축제, 그리고 이카로스의 그림, 사회의 조망...(개인적으로는 그냥 쓸데없는 생각들이 드네요. 그때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시끄러운 축제를 원망하는 학생이었으면 지금 좀 나으려나? - 축제 때, 늘 술에 떡이 된 몰골로 본부앞 잔디밭을 굴러다니던 1人이 하는 한탄..;;)

cyrus 2011-09-29 19:29   좋아요 0 | URL
저도 4년 전, 1학기 때 이틀동안 잠 안 자면서 술 마셨어요. ^^;;
특히 3일동안 축제 기간하면 절대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1-10-0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라 정도의 적당한 감상주의가 사회안정에 좋지요.거기서 계급간 갈등 운운 하다가 혁명을 해야겠다고 선동하면 글쎄요...혁명 좋아하는 자칭 정통 혁명주의자에겐 이 단편이 불철저한 감상주의를 전파하는 유해한 반혁명적 작품이겠지요.

cyrus 2011-10-01 21:18   좋아요 0 | URL
ㅎㅎ 혁명론자들에게는 소설이 그렇게도 볼 수도 있겠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10-0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대학이 제대로 된 낭만을 즐기던 때가 있었나요.1985년 신동아에선가 본 기사인데 요즘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된다는 내용이었어요.축제기간에도 도서관에서 취직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고...그리고 그렇잖아도 방학도 긴데 축제기간까지 강의를 안 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죠.시간이 모자라면 축제기간에라도 수업해야죠.

cyrus 2011-10-01 21:19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실업의 역사를 정리한 강준만의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대학생들의 취업난이 최근에 일어난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노자님이 언급하신 80년대 중후반에도 대학생 취업난이
거론되었더군요.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80년대의 대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다 취업이 되는줄만 알았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1-10-01 22:3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고학력자를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시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보면 일제시대에도 고학력자들은 실업자기 많았다는 내용이 있고요.

지금의 50대 전후 나이들도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 많습니다.
 
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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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좌파의 등장

한 달뒤에 치뤄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그리고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이 각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요즘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가 바로 '강남좌파' 이다.   진보, 중도. 보수성향 언론들은 앞다투어 소개할 정도로 오늘날 강남좌파 논의는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통념적으로 볼 때 ‘강남 좌파’ 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강남’ 이라는 지명과 이념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진보 진영의 ‘좌파’ 라는 표현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강남좌파는 곧 부유한 진보주의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을 일컫는 다채로운 용어들이 사용되어 왔다. 각국 문화를 반영한 용어들은 대개 말로만 진보적인 부자들의 위선을 풍자하는 부정적 의미의 조어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급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좌파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 이라는 함의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고급 승용차인 리무진을 몰고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비아냥대는 의미로 ‘리무진 리버럴’ 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고급 요리인 철갑상어알을 먹으며 사회주의를 논한다는 의미로 부자 좌파들을 '캐비어 좌파' 라고 부른다.

강남좌파 역시 처음에는 이들과 비슷한 의미의 용어로 출발했다. 다만 서구의 용어가 보수진영의 비아냥거리는 용도 이상을 넘지 못했다면, 근래 한국의 강남좌파는 수동적으로 붙여진 부정적 이미지를 넘어선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고학력, 전문직의 중산층이면서 적극적으로 진보적 언행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 사회적 영향이 커지면서 등장한 것이다. 

  

 

 '엘리트주의' 가 만들어낸 강남좌파

강준만 교수는 2006년에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 이라며 '강남 좌파'를 처음으로 공론화시켰다.  그리고 때마침 강남좌파의 존재가  정치적 이슈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강남좌파를 석한 종합적인 결과물이 단행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주 거론되는 강남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국 서울법대 교수다. 그는 전형적인 강남좌파 아이콘으로 꼽힌다. 본인 스스로 강남좌파라고 자처할 정도로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파에 빼앗긴 정권을 진보 세력이 탈환하기 위한 이념적 당위성과 전략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강 교수는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고 분류하고 있다.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선 학벌, 학력에서 생활 수준까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영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는 강남좌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보 좌파와 대립하는 보수 진영도 예외일수가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강남 지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우파이면서도 강남 좌파적 언어를 사용하며, 반(反) 포퓰리즘적 언어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강남좌파를 이념 진영의 기준보다는 엘리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이루어지는 정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지지받기 위해서는 이와 동일한 성향을 지닌 인물과 결탁하기 쉽다.  민주화 이후에 정치적 엘리트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우리나라 특유의 '인물 중심주의' 에  원인을 두고 있다.  최근에 줄줄이 터져나오는 MB 정부 측근 인사들의 권력형 비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학벌, 연고 등을 통해 이루어진 자기동질적 집단의 특징에서 기인한 정치적 엘리트의 폐단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물 중심주의가 곧 '엘리트주의' 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에게는 민생문제보다는 승진과 사리사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강 교수는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하층계급에게 큰 힘이 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더 많은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 '진보' 이념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일 수 있다고 했다. 하층 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실현가능한 공약이 아닌 립서비스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중에 존재하고 있는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로 가장하는 우파 진영을 경계했다. 좌파 성향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개인적, 정치적 이익과 결부되는 '밥그릇 지키기 싸움' 에서 이기기 위해 겉으로 좌파 성향을 드러내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강남좌파 신드롬 이면에 숨겨진 엘리트주의의 문제점

강남좌파의 실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복잡해지는 양상이지만 강남좌파는 ‘있는 자=우파’ , ‘없는 자=좌파’ 라는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이분법을 깨뜨리면서 환경 변화에 맞춰 자연선택적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파의 보수 진영이 두 번 연속해서 정권을 빼앗기면서 뉴라이트가 등장했듯 강남좌파는 진보주의자들이 변화된 사회 상황에 적응하며 진화한 좌파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강남좌파는 부와 권력에 양심과 정의라는 상징 자본까지 가지려는 위선자로만 비춰지는 부정적 인식이 강하지만 강 교수의 주장대로 모든 정치인이 '강남좌파' 라고 해서 꼭 '있는 자' 들은 양심과 정의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심과 정의는 빈부귀천을 떠나 맘껏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신좌파 사회사상가인 앙드레 고르<프롤레타리아여 안녕>(생각의 나무, 2011)에서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해방의 주체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에 작별을 고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이 이미 자본주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지배질서에 편입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계급만으로 실업 및 고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의 주체' 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의 주장처럼 지금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토록 찾고자했던 양극화 해법의 열쇠가 기득권층에 있을 수 있다. ‘진보의 진보’ 를 꿈꾸는 진정한 강남좌파라면 이 지점에서 뭔가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상징적 제스처에 머물게 된다면 '엘리트주의의 옷을 입은 진보' 라는 강남좌파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와 불신은 곧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강남좌파 진영이 진보 세력에서도 환영을 못받든 간에 결국 강남좌파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참여한 또 하나의 정치적 세력이다.    지금 우라나라 사회에는 경제적 위기와 대북관계 등과 같은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굵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이 '강남좌파' 라는 이슈에만 사로잡힌채 설전이 길어지게 된다면 정작 눈 앞에 보이는 근본적인 사회적 문제들을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

모든 정치인들이 '강남좌파' 라면 그 용어의 이면에는 숨겨져 있는 우리 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으로 비판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은 엘리트로써의 허위의식과 정치 유혹을 떨치는 게 관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념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 팽팽하게 다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념의 허상에서 벗어나 '소통' 과 '화합' 을 통해 실천적 담론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욕망의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 진영은 결판이 나지 않은 무의미한 대립 속에서 진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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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9-2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인가요? 논평을 하나 쓰신건가요? 빛이납니다..
저 10기 신청했는데...다시 활동하게 되었어요.
축하받을 일이죠?....혼자 자축하고 있답니다.,,^^

cyrus 2011-09-28 14:47   좋아요 0 | URL
오~~!! 축하해요, 꽃도둑님. 어느 분야에 활동하시는가요?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겠네요 ^^

saint236 2011-09-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 플레이어가 없으면 안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타 플레어에 걸맞는 실력이 없으면 흔히 먹튀라고 합니다. 스타 정치인에게 실력이라하면 다른 무엇보다 정치력이 아닐까요? 이것이 없는 정치인을 우리는 먹튀라고 규정한다면 지금은 먹튀의 세상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죠. 그냥 소설을 써보는 겁니다.^^(나꼼수 증후군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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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스포일러 주의 
 

 

 

 

  핵전쟁 혹은 강대국들이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이젠 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핵을 발사하면 상대국도 보복 공격을 할 것이고 결국 핵 공격을 한 나라, 받은 나라 할 것 없이 모두 망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바보 중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섣불리 선제공격을 감행할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핵전쟁의 위험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비밀리에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인류의 무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군사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처음에 나는 사람들에게 핵전쟁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기 보존 동기는 매우 강력해서 그 동기가 작동되면 대개는 다른 모든 동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확신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보존보다 강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려는 욕망이었다.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서 재인용, pp 47~48 -

 

정치 권력자들이 인류의 대종말이라는 근심을 멈추고 무시무시한 폭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핵무기는 단 한 대라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세계의 패권을 한번에 쥘 수 있는 강대국들이 좋아하는 '조커' 이다.  

1963년에 개봉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는 미사일 개발을 둘러싼 미소 냉전 시대를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영화 속 내용과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떤 인물도 실존했거나 실존한 적이 없다' 라고 영화 오프닝 때부터 자막으로 알리고 있지만 영화가 개봉되기 일 년 전에 실제로 핵미사일 배치 논쟁으로 인한 미국과 소련 간의 국제적 위기가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면 큐브릭이 비판하려고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左)와 케네디 미국 대통령(右)을 

풍자한 만화 

 

1962년 미국은 소련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 중임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J.F. 케네디는 소련은 서반구에 대하여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라고 공포하고, 쿠바에 대하여 해상봉쇄조치를 취하였다. 케네디는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에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공격용 무기를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세계의 긴박감 속에서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그 다음날에는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두 번째로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전자의 소련의 제안을 무시하고, 후자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 해군함정을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미소 간의 대립 위기는 사라졌다.  

전면전이 감돌던 위기일발의 분위기는 단 11일 간이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던 가장 공포스러운 사건 중 하나였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낳은 군비 대립으로 인해 핵전쟁의 위기가 있었지만 큐브릭은 다음 해 자신이 만든 영화 속에서나마 못 다 이룬(?) 핵전쟁과 이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실현시켰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

 

 

핵전쟁만이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반공주의자  '잭 리퍼 장군'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냉전 시대 속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배척하는 비이성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 

영화 속의 잭 리퍼 장군은 좌익 혐오증 수준을 넘어선 비정상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땅에 잠입한 소련의 스파이들이 수돗물에 불소을 타 미국인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기지 안의 라디오를 모두 없애버리라고 지시한다. ‘빨갱이’ 들은 주로 라디오로 명령을 수신한다는 이유였다.    장군에게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은 '공산주의자' 들이다.  그는 미국이 선제 핵 공격을 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 마디로 결벽증과 피해망상증, 거기에 공격성까지 가미된 '정신병자' 였다.

장군은 드디어 핵무기를 장착한 폭격기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핵 공격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핵무기 공격 명령을 너무나 쉽게 내릴 정도로 그의 두뇌는 이미 합리적 판단능력을 상실된 상태였다.     결국 리퍼 장군은 자신의 계획이 뜻대로 실현되지가 않자 스스로 욕실에서 목숨을 끊어버린다.    장군의 자살은 '독일 순수 혈통' 으로 자부한 게르만 족을 규합하여 세계지배를 실현하려고 했던 히틀러의 최후를 연상케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전략상황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머킨 머플리 대통령은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냉정하게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군 장성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허수아비일 뿐이다.  자신이 승인한 “R” 작전에 의해 이런 상황이 도래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는 합동참모장인 벅 터지슨의 “기왕에 이리 된 거 대대적인 핵공격을 감행하자”는 주장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호색한' 벅 터지슨 장군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군 장성이라고 하기에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펼치고 있다. 

 

터지슨은 리퍼 사령관의 복사판일 정도로 좌익 혐오증에 사로잡힌 전쟁광이다. 그는 인류의 평화와 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리퍼 사령관과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상 두 장성은 지독한 냉전 이데올로기의 흑백논리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군인일 뿐이다. 큐브릭은 이 두 인물을 통해 관료주의와 편협한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잘 보여주고 있다. 

 

    

'Strange' 라는 특이한 이름의 인물답게 스트레인지 박사는 

인류의 파멸에 관심이 없으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궤변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치 출신의 과학자 스트레인지 러브 박사의 등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희극적 요소이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병기 '둠스데이' 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기계팔과 휠체어에 의지하는 러브 박사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 백 미터의 갱도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자 1명에 여자 10명이라는 비정상적인 가족 구조를 유지하면서 100년 정도 땅 속에 살면 인류는 다시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그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남자의 헌신적인 봉사를 위해 성적인 특징이 발달되어 있는 여성만을 엄선해서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치 출신 과학자답게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건전한 유전자를 가진 인류를 증가하는데만 중점을 두고 있는 우생학적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어디서 언제일지도 몰라도...   

 

 

큐브릭이 영화를 통해서 비판하고자해던 것은 냉전 시대의 부조리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권력자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일 것이다. 그는 관료주의와 편협함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핵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도, 인류 공멸의 위기 속에서도 반공사상에 사로잡힌 광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  We' 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when,   

but I know we' ll meet again, some sunny day.  ♪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어디서 언제일지도 몰라도. 어느 화창한 날 다시 만날거예요.

 

영화의 엔딩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엄혹한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멜로디.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라는 노랫말에서 풍기는 빈정거리는듯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큐브릭은 영화의 말미에서까지 저주스럽게 냉소적인 메시지를 핵폭발 장면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나간 장군, 미치광이 과학자가 폭탄을 사랑하게 된 대가가 어떤 것이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몇 가지 그럴듯한 단계만 거치면 인류가 한순간에 멸망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디 현실 세계에서는 리퍼 장군 같은 정신병자가 권력을 쥐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끔찍하고 불운스러운 영화 속 장면들이 '큐브릭' 의 작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기만 하다. 

만약에 영화처럼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인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인가?    아니,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 사진출처: 알라딘 영화검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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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9-27 18:57   좋아요 0 | URL
스탠리큐브릭 영화 스크린에서 하는 거예요? 저도 예전에 몰아서 본 적 있는데, 특히 그 뭐더라, <아이즈 와이드 셧>이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좋아해요! 이건 못 봤어요. 내용이 이렇구나. 핵전쟁과 냉전.. 장르는 코미디,드라마인데 어쩐지 더 무시무시해요.

cyrus 2011-09-27 20:43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는 이 영화 쿡TV로 본거예요. 며칠전에 야무님께서 추천하셔서 보게 되었어요. 내용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썩 유쾌하지 않았어요.

stella.K 2011-09-27 19:39   좋아요 0 | URL
이거 본다고 해놓고 여태 못 보고 있다.
그런데 난 왜 이 영화를 SF라고 생각하는 걸까?
옛날 영화가 괜찮은 게 많긴 하지.^^

cyrus 2011-09-27 20:46   좋아요 0 | URL
꼭 보세요. 강추합니다^^ 아마도 2001 스페이스오딧세이랑 혼동하신거 같아요. 저도 처음엔 SF영화인줄 알았어요. ㅎㅎ 제가 언급한 영화 마지막 장면이 압권입니다
 

 

 

 

 

 

 

 

   

 

  

  비행사의 낭만적인 최후, <남방 우편기>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읽으면 지루할 법도 한데 <어린왕자>만큼 역시 비행사가 주인공으로 동증하는 생텍쥐페리의 소설들은 언제나 늘 새롭다.

그의 첫 장편인 <남방 우편기><야간 비행>은 스물여섯 살 때부터 우편비행 일에 종사하면서 유럽과 남미를 하늘로 오갔던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당시만 해도 비행이란 추락과 실종의 위험이 상존하던 때였다.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그런 역경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경험을 소설 창작으로 융화시켰다.  폭풍우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항로를 이탈해버린 비행기, 지상과의 연락은 끊어지고 연료는 바닥나가고 오직 구름 사이로 스치는 불빛 한 점을 희망으로 기수를 돌린다. 그 불빛은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이다. 

생텍쥐페리의 실종은 그의 1931년 작 <남방 우편기>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있다.  작가는 이미 자신이 곧 겪게 될 불의의 사고를 미리 직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생텍쥐페리는 소설 속 비행사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의 동료여......  그러고보니 여기에 보물이 있었군. 자네가 그토록 찾아다니지 않았나?
이 모래언덕 위에서,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벌리고 얼굴은 저 짙푸른 만을 향한 채 있는 자네, 그날 밤 자네는 어찌나 가볍던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자네는 얼마나 많은 밧줄을 풀어놓았던가. 벌써 공기처럼 가벼워진 베르니스. 자네는 오직 친구 하나만을 남겨 두었더군. 거미줄 한 가닥이 겨우 그대를 붙잡고 있으니 말일세......
 그날 밤 자네는 훨씬 더 가벼웠지. 갑자기 현기증이 났을 거야. 그 때 자네 머리 위로 별에서 보물이 반짝였겠지. 
아주짧게. 아주 덧없이 !
 내 우정의 거미줄이 자네를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지만 불충한 목동인 나는 아마도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네.     (생 텍쥐페리, [남방 우편기] pp 275)  

 

<남방 우편기>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주인공인 자크 베르니스는 비행기로 우편물을 운송하는 비행 조종사다. 그는 주느비에브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느비에브는 사랑하는 남자를 혼자 두고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크 베르니스는 지상을 떠나 하늘 위로 나는 순간동안만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린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려고 한다. 하늘 어딘가에 있을 주느비에브를 만나기 위해서 그는 위험천만한 비행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그의 위험한 비행은 불의의 사고로 이어졌으며 그는 외딴 사막에 불시착한 이후, 원주민에게 피살당한채 발견됨으로써 소설은 끝이 난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베르니스의 동료가 행방불명된 그의 주검을 발견하고 있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기억이 남는 엔딩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죽음의 결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꼽고 싶다.  주인공의 비행기 사고가 '낭만적'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색한 감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최후를 묘사하는 수많은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결말을 읽을 때마다 작가의 죽음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베르니스는 사막 위에서 싸늘하게 주검이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에도 밤하늘의 별빛은 반짝거리고 있다.   죽은 베르니스의 머리가 향하고 있는 저 하늘 위에 떠있는 별에는 분명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주느비에브가 살고 있을 것이다.  베르니스는 그녀가 살고 있는 천국의 별로 떠났던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남방 우편기>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 언뜻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 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다.    <남방 우편기> 속 베르니스를 둘러싼 밤이라는 배경 역시 그렇다.  베르니스는 밤하늘의 별빛 삼아 사랑하는 연인의 부재가 만들어낸 고독을 달래보려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나도 짧고 한순간이다.   새벽이 되면 별빛이 사라지게 되듯이.    자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저녁'이라는 공간 때문에 화자인 '나' 와 별과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관계가 정다운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인연이란 언제 어디서든 다른 존재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명구절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광섭의 시는 미술 작품으로 변용된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화폭 속에는 수많은 점들이 박혀 있다. 김광섭의 시 내용을 비추어보면 그림을 가득 차고 있는 점들은 밤하늘 위에 수놓은 별들이다. 저기 저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진 밤하늘의 수천개 별들의 무리 사이에 시 속 화자인 '나' 와 소설 속 자크 베르니스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는 사랑한다는 것은 ‘길들이는 것’ 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를 ‘쳐다 봄’으로써 소중한 사랑으로 맺어지게 된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은 무수히 많은 것들이지만 참으로 소중한 사랑으로 길들여지는 존재는 그 중에서도 오직 ‘별 하나’ 뿐이다.

하루에 한 번쯤이라도 서재 블로그에 글을 남기거나 이웃분의 서재에 방문하는, 이 사소한 행위도 어떻게 보면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분들끼리 온라인 공간에서 만나서 댓글이나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인연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디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관계이다.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법이다.  어떻게 하다보면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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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9-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낭만적인 소설, 페이퍼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댓글 주고 받는 이 관계들. 참 소중하다고요. 꼭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요. 그런데 <야간비행>은 어땠어요? cyrus님.

cyrus 2011-09-26 12:46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보니 잘못 적었네요. 비행사의 죽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남방 우편기>라는 소설이고요.. <야간비행>은 제목 그래도 야간비행을
담당하는 조종사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내용이에요. 개인적으로 저는
멜로적 요소가 있는 <남방 우편기>를 인상깊게 읽어서그런지 <야간비행>은
다시 읽어도 마음에 크게 와닿지가 않았어요. ^^:;

잘잘라 2011-09-2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아느은~~~
이 소절만 자꾸 부르게 되요^^

우편비행을 하며 그에 관한 소설을 쓰고, 비행 중에 실종된 작가 생텍쥐베리와
알래스카에 살며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다가 곰의 습격으로 사망한 작가 호시노 미치오, 두 사람의 마지막이 안타깝고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나의 마지막은 어떨지, 어떻기를 바라는지.. 생각하게되네요.

cyrus 2011-09-26 12:52   좋아요 0 | URL
알고보니 시 구절에서 따온 가요도 있더군요. ^^

저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천상병 시인의 시 구절처럼
살아온 세상이 아름답다고 적을 수 있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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