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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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ppy Birthday! 『공산당 선언』

 

2월 21일. 오늘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그것'의 생일이다. 오늘이 바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이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날이다. (책의 출간을 '생일'이라고 표현하기에 어색하다. 차라리 '공산주의' 유령의 생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문득 궁금한 점. '공산주의 유령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장 하나만 써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갈 수 있는건가?)

 

연도수로만 따지면 정확히 164돌이다. (1848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모든 유럽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신화에 갇혀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버린 지 21년이 지난 지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들은 서점에 볼 수 있으며 인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마르크스 사상은 여전히 연구대상 중의 하나이다. 아무래도 『공산당 선언』이 번역되고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뭔가 읽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지금도『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로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잘 읽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쓴 원전 텍스트보다는 간략하게 마르스크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로나마 접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당당하게 『공산당 선언』을 읽는다면 그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자못 궁금하다. 어린 시절에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문구를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을 노년층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지도. 어찌 보면 책 제목에 나온 '공산당'이라는 말 때문에 『공산당 선언』읽기에 대해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7,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 꽃이 피우던 시절에는 유신과 5공 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공산당 선언』을 읽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대가 찾아오고 냉전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음지에 숨어있던 마르크스는 드디어 햇빛을 볼 수 있다. 그동안 국내에게 몰래 유입되어 온 마르크스의 사상 및 사회주의 관련 책들이 대량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려움 없이 '공산당'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 속에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책을 읽는데도 주위 사람들의 눈총은 여전하다. 심지어 작년에는 법원은『공산당 선언』을 포함한 국내에 번역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물들을 이적표현물이라고 판결했다. 여전히 법의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국가보안법 덕분인 것이다.

 

 

 

 

 '공산주의'의 반댓말은...?

 

혹자는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많은 국민들에게 '세뇌'와 다름없을 정도로 주입시켜온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에 민주주의에 반하는 의미로 받아들인 탓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공산당 선언』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취업 준비에 얽매여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기가 쉽다.

 

아무나 지나가는 대학생에게 물어보라. 아마도 대부분은『공산당 선언』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내용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할걸. 심지어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 본 것처럼 여겨지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정확히 모르는 건 이해가겠다만 고등학생 윤리나 사회 교과서에 등장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데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젊은 세대들 중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의 반대말을 정확하게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반대되는 개념을 꼽으라면 '자본주의'가 적당하다. 『공산당 선언』을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고자 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대를 기표 삼아 공산주의의 방침을 세상에 공표한 글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내다

 

 

특정 사상이 담긴 고전이라고 하면 내용이 딱딱하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거기에다가 글자만 빽빽하게 적혀 있고 베개 두께만한 분량이라면 고전 읽기를 지레 겁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은 생각보다 분량이 많지 않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수많은 텍스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100 페이지 채 안 되며, 50페이지도 넘지 않는 분량이다.

 

『공산당 선언』이 출간되었을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을 19세기 중반의 유럽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르크스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를 먼저 읽고 있는 상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공산당 선언』은 사상서의 범주로 포함되고 있지만 일종의 역사 기록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의 19세기 근대 유럽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담긴 의미가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쓰인 지 수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 사회의 모습은 현재 자본주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채 무장된 신자유주의에 물든 대한민국의 사회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 그 중에서도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물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 가운데 돈, 땅, 기계 같은 자본을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가졌느냐, 갖지 못했느냐에 따라 계급이 생긴다고 봤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산수단을 가진 계급을 '부르주아지', 반대로 이것을 가지지 못한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나누었다.

 

부르주아지가 등장하기 전까진 이전의 사회는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사회였다.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등장한 후 신분은 '돈'을 가진 정도에 의해 결정되어졌다.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큰 자유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마르크스는 더욱 냉혹하게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으로 생산되는 자본의 이익을 프롤레타이라로부터 착취한다고 봤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좀 더 많은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거래가 작용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일을 하는 '인간' 노동자들마저도 자본을 생산하는데 적합한 '현금 계산'에 필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그의 '타고난 상전들'에게 묶어놓았던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갈기갈기 찢고,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와 냉혹한 '현금 계산' 이외에는 다른 어떤 연줄도 남지 않게 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열광, 기사도적 열정,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황홀경을 이기적인 타산이라는 차디찬 물속에 집어던졌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해소시켰으며, 특허를 통해 얻은 취소될 수 없는 무수한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지한 자유, 상거래의 자유를 세웠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에 의해 가려진 착취를 벌거벗고 후안무치하며 직접적이고 잔인한 착취로 대체되었다.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중에서, pp 231 -

 

 

 

'냉혹한 현금 계산'이라는 표현처럼 '차가운' 자본주의, 일명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기업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나날이 부를 획득하고 있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다. 불균형된 생산 거래 관계로 인해 사회적으로 약한 계층들이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이들에게는 자신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버리는 자본주의의 얼굴이 너무나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으며 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 범위를 넓히려고 한다.

 

 

생산물의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해야 할 필요는 지구 표면 전체에 걸쳐 부르주아지를 쫓아다닌다. 부르주아지는 어디에서나 둥지를 틀어야 하고, 어디에서나 정착해야 하며, 어디에서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나라에서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반동들에게는 매우 분한 일이었지만, 부르주아지는 공업의 발아래에서 그것이 딛고 서 있는 민족적 기반을 파내어 버렸다.

 

 (중략)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의 급속한 개선을 통해, 엄청나게 용이해진 통신수단을 통해 모든 민족,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민족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의 값싼 상품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모든 성벽을 쳐부수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극도로 완고한 증오를 강제로 굴복시킬 수 있게 하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멸망을 원치 않거든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하라고 강요하며, 자신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 한가운데 받아들이라고, 즉 그들 자신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중에서, pp 232~233 -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가 전 세계에 자신의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강요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세력에 지배당한 '미개한 민족'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부르주아지'의 강요된 욕망이 또 하나의 '부르주아지'들을 만드는 것이다. 전 세계를 '자본주의적 문명'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의 욕망은 국가 간의 자유 무역 거래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범지구적 신자유주의의 모습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민족적 일면성과 편협함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으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pp 233)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문학'을 요즘 말로 바꾸자면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대 초에 거론되기 시작했던 세계화 열풍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쟁의 이름으로 국가 간의 빈곤의 갈등을 부추겨 놓았다. 그 틈새로 밀려든 비참한 삶의 운명. 자본주의에 무장한 승리한 자본가들의 환호에 취해 그저 착취당한 채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패배자의 아픔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한 아픔을 뒤로 한 채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FTA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경제적 약소국가들에게 '부가 넘치는 자본주의 문명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채 강요하고 있다. 현대의 자본가들은 'FTA'의 형상대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어야 하는 이유

 

마르크스는 이러한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유재산의 철폐' 라는 정책을 제안한다. 사적 소유가 없어져야만 계급과 인간 사이의 차별이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적 소유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계급 간 차별이 사라질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도입했던 국가들의 실제 모습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했던 스탈린, 모택동 등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그런 국가들도 그 어떤 체제보다 더욱 인민들을 억압하는 심각한 폐해를 드러냈다. 그리고 3대 세습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지도력을 고집하는 북한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증명해낸 하나의 법칙으로 귀결한 현실적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 사상 역시 문제점이 있는 유토피아에 불과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소상인과 소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로 굴러떨어지고, 부르주아 멸망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피할 수 없는 일이란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이러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공허한 헛점과 환상에만 고집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하나씩 붕괴되거나 이전보다 더 가난한 국가로 전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혁명 이론의 전제는 인간은 사회적 경제적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제도의 변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너무도 많은 억압과 부당한 자유가 바로 그런 사회변혁 이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사상의 단순성과 편협성에 치우진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실상은 지금까지도 그러한 병폐가 만연하고 있는 지금도 곱씹어 볼만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사회 변혁을 꿈꾸던 젋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이유는 단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전투적 의지가 담겨진 문체와 문구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르주아지의 욕심 그리고 그들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인 면에서 프롤레타이라가 불리해져만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세계경제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계급투쟁이니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니 하는 교조적인 단어의 주술에 묶이지만 않는다면, 자본의 속성과 사회 불평등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이 수백 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을 때때로 망각하게 할 정도다. 누군가는 이미 '실패'로 증명되버린 사상을 왜 읽고, 공부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작용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바라볼 줄 알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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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22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의 순수성은 마치 과학적 성과의 중립성과
매우 유사해보입니다.

과학적 성과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가
문제의 본질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은 것은
마치 공산당 선언의 순수성을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의 본질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왕왕있다고 느끼게되니 말입니다.

최근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읽고 느낀 바도 이와 다르지 않더군요.
유학의 본질은 유학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적을 위해 충실한 시녀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그 용도가 유학의 본질은 아닌데 말입니다.

공산당선언이 그 사용자들에 의해 변질된 덕분에
공산당선언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듯 하여 안카까운 마음이 들어
글을 드리게 되는군요.

같은 맥락에서
칼 막스가 죽기 전에
자신은 절대로 막시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러한 형질의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2-02-22 19:22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자칫 마르크스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어요. 글에서도 밝혔지만
어떠한 사상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개론서를 먼저 보고
원전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마르크스 사상 관련 개론서를 많이 보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려고 해요. 부족한 부분이 많을텐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꽃도둑 2012-02-2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인간적인, 무엇보다도 인류애적인, [공산당 선언]!
세뇌당하고 붉은 색으로 덧칠해놓은 색깔부터 벗겨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뜻은 옳았으나 가는 길이 잘못되었던 공산주의...
다시 공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

오잉?
저 낯익은 붕어빵에 소주병은?..

cyrus 2012-02-22 19:2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허풍 떠서는 아니되는
일이지요 ^^

겨울 날씨에 맞게 지금까지 붕어빵 바탕화면 쓰고 있었답니다.
이거 바탕화면 작년 겨울부터 썼었어요 ^^

2012-02-22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3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정아 2012-07-19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ㅎ
도서관에 가서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ㅎ
<공산당 선언>이 성경 다음으로 널리 번역하여 출간된 도서랍니다 ㅎ
만약에 마르크스가 생전에 저작권 보호를 받았다면 아마도 평~생을 배부르게 먹고 살고도 남았을 거라는데요 ㅎ
 
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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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격세지감이다. 이 책이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었다니. 미셸 깽의『처절한 정원』을 처음 읽었을 때가 10년 전이다. 한창 히딩크의 월드컵 대표팀이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악마'가 되어 열띤 거리 응원전을 펼치던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이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책은 2005년에 출판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3년 전에 처음 출판되었던 걸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기억이 강하게 자리잡은 이유에는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고 이 책을 읽고난 뒤에 학교 내에서 만들어진 독서기록장에 감상문을 썼기 때문이다. (가끔 창고를 정리하면 옛날에 기록한 것들(예를 들어 초등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 알림장)을 발견하곤 하는데 정작 중학생 시절 때 쓴 독서기록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불가사의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버리지 않았을텐데... 언젠가 꼭 찾고 싶은 물건이다)

 

사실 처음 이 책 읽었을 당시, 생전 처음 접해 본 프랑스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읽고난 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여기서 문자로만 '감동을 받았다'라고 적기에는 그 때 그 시절, 독서의 감동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에 휘말려야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와 관련한 추억들을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모리스 나치 협력자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진행될 때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가 입었던 광대 복장을 입고 참석한 장면 등이 인상 깊었다. 분명 이러한 이야기라면 나름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프랑스에서 출판했던 당시에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았을 정도니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등극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미셸 깽의 소설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지금도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는지 수긍이 가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였다. 하필 이 해에 『뇌』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얇은 미셸 꺵의 소설이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책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고 최근에 우연히 알라딘 검색하던 도중에 이 책이 지금도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앍게 되었다. 내가 좋았했던 책이 십년이 지난 지금도 절판되지 않은 채 팔리고 있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이 책이 중학생(중1)들을 위한 서울시교육청 선정 추천도서란다. 나 역시 중학생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그 때 나이 또래 지금의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고 있는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하다.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최근에 다시 미셸 꺵이 들려주는 '처절한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내가 읽었던 2002년에 출판된 책이 도서관 서가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워낙에 얇은 책이라 자신보다 커다란 책 틈 사이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한 손에 쉽게 쥘 수 있도록 작은 판형은 여전했다. 하지만 작은 책도 무시 못한다. 짧지만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로, 극한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리스 파퐁 (1910~2007)

 

 

사망 당시, 그는 자신의 나치 협력 전력이 밝혀지기 전에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자신의 무덤에 함께 매장한 점에 대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변절'로 점철된 나치 협력자가 죽은 넋이 되었다하더라도 과연 떳떳하게 훈장과 함께 묻힐 자격이 있을까?

 

 

 

소설의 중심 모티프는 지난 20여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모리스 파퐁 재판'이다. 파퐁은 2차대전때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다는 경력을 내세워 드골 정권하에서 예산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시 정권하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나치 협력자였다. 그의 치부는 한 역사학자의 추적에 의해 폭로됐으며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파퐁은 1997년에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소설은 파퐁 재판이 열리던 법정에 어릿광대 복장의 한 남자가 입장하려다 저지당하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결국 분장을 지우고 재판을 지켜본 기이한 행동의 주인공 '나'는 작고한 아버지와 삼촌, 숙모를 회상하며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된 배경을서술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틈나는대로 어릿광대 복장으로 차리고 사람들을 웃기는 일을 자청하던 괴짜였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창피하게 여겼지만 기행 뒤에 가슴을 울리는 일화가 숨겨져 있음을 삼촌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아버지와 삼촌은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하다 독일군에 잡혀 흙 구덩이에 갇히게 됐는데 당시 그들을 감시하던 독일군 초병이 익살과 묘기로 추위와 공포로 떨던 그들을 안심시키고 삶의 희망을 준 적이 있다. 총은 들었지만 인간미로 가득했던 보초병은 뒤에 자신의 전직이 어릿광대라고 그들에게 전한다.

소설의 진가는 막판의 대반전에서도 발휘된다. 주인공의 눈에 촌스럽게만 보였던 숙모에게 슬프면서도 장엄함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이 독일군에게 잡혀 구덩이에 갇힌 것은 열차역 변압기를 폭파하는 임무 때문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끝낸 뒤 독일군에 잡힘으로써 처형될 위기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폭파범이라고 자수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와 삼촌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든 '그'는 누구일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겠다. 리뷰가 자칫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고 아직까지 이 감동적인 소설을 접해보지 못한 무언의 독자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아직도 삼촌이 말하는 모습과 문장들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삼촌의 이야기는 자신이 겪었던 잔인한 순간들의 그림자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의 문을 나에게 열어 준 것이다.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삼촌이 전해준 그 생생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 미셸 깽『처절한 정원』중에서, 문학세계사, pp 40 -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는 주인공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절한 정원'은 독일 나치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변절자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터전이며,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가족의 희생적인 삶의 기억이 남아 있는 역사을 의미한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광대 복장을 하고 파퐁 재판의 방청석에 들어간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주인공은 아버지가 그토록 부활시키고 싶어 했던,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의 이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조용히 되뇐다.

 

 

 

 

범죄자가 아닌 자의 속죄 (사진출처: 한겨레)

 

반인륜적인 전쟁이 할퀴고 간 역사의 상처는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남아 있다. 그러한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약자들이 있는 반면에 모리스 파퐁처럼 자신의 행위에 반성하지 않은 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회개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며 무릎을 꿇은 채 참회하고 있다. 그는 위안부에 대해서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반성했다. 이러한 분들이 있기에 지금도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자 하는 '진실'이 존재하며 더 나은 역사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원래 광대였던 독일군 보초가, 훗날 광대가 된 화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자신의 편' 때문에 죽어가야 했던 숱한 희생자들에 대한 속죄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왜 진정한 범죄자들이 아닌 그들이 속죄의 짐을 져야 하는가. 반대로 속죄해야 할 누구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지 않은 채 죽어서도 끝까지 허울뿐인 '명예'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려고 한다. 그와 같은 질문을 숨겨둠으로써 소설 속의 화자 그리고 작가는 역사 앞에서의 철저한 반성의 연대를 촉구하는 것이다.

 

비중이 작지만 소설 속에 독일 병사 베른이 보여 준 포로에 대한 친절은 시대의 잔혹함에 고뇌하는 인간의 '양심'을 느끼게 해 준다. 양심과 용기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가능케 하는 실마리가 된다. 모든 것을 참혹하게 무너뜨리는 전쟁의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전쟁은 수많은 인간관계를 본의 아니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중첩시킨다. 프랑스인들이 독일 나치에 의해 시련과 고통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나라 잃은 슬픔과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아픈 기억이 치유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역사의 아픔을 무조건 묻어두기보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겐 곧 역사를 바로 알고 가슴에 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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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도 몇년 전에 읽었는데.
얇은데도 참 잘 쓴 것 같아.
그런데 감동스럽고 처절하고 이러진 않았던 것 같아.
아무래도 내 현실이 아니라고 느껴서 그럴까?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네.

cyrus 2012-02-21 19:1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읽으니깐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소설, 영화로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영화로 본다면 정말 감동적일거 같아요. ^^
 
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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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28] 장미의 이름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No. 43,  1799년 

 

 

 

 

 

 

 

 

 5년 만에 완독 성공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두 권짜리를 처음 구입했을 시기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2007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에코의 소설이 유명한데다 어느 일간지에서 선정한 대학생 새내기 추천도서목록을 본 뒤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이맘때가 되면 일간지의 북섹션마다 2012학번 대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를 소개한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이제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 정도로 어엿한 '세계문학'으로 자리잡았지만 5년 전만 해도 『장미의 이름』은 전집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장미의 이름』 은 회색 사철 양장본이다. 회색 사철로 된 『장미의 이름』은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기가 드물어졌다. 알라딘에서는 절판 상태다. 지금 세계문학전집의 『장미의 이름』은 노란색 사철 양장본으로 나오고 있다. 요한묵시록의 주석서에 실린 삽화를 차용한 표지는 여전하다. 간혹 헌책방에 들리면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86년판 『장미의 이름』이 굴러다니긴 한데 세월이 조금 지나면 개정판인 회색 사철 양장본도 헌책방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5년 전에 구입해놓고선 여러 차례 완독의 실패를 고배를 마신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읽기 시작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횟수만 해도 수십번 정도다. 중세와 관련한 방대한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낸 스토리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개정을 거듭하면서까지 내용을 보충한  故  이윤기 씨의 상세한 역주가 있어도 중세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눈에는 그저 어렵고 빽빽한 문자로만 보일 뿐이다.    

 

본의 아니게 소설의 결말을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1권 때문에 알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소설만큼은 완독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오히려 작년에 숀 코너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소설을 읽어보려고 한 번 뒤적거려보기도 했다. 비록 이 도전 역시 실패했지만.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장미의 이름』을 완독하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자하니  내 자신이『장미의 이름』에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떠올려졌다. 이들은 금지된 책에 담겨진 금지된 지식을 알려고 하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이 쓴 어렵기로 유명한 소설을 읽으려고 하다가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굳이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을 완독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장미의 이름』 독서의 목적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맞추기 보다는 소설 속에 소개된 중세의 사상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알고 싶었다. 시지프스가 죽어서도 영원히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 것처럼 나는 도전, 중간에 포기를 반복해야 했다. 1권짜리 완독은커녕 1권 반 페이지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중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은 꼭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첫 장부터 다시 읽었다. 결국에는 한 달동안 틈틈이 읽은 끝에 두 권짜리를 완독할 수 있었다.

 

 

 

 

 역사의 회색시대라기엔 너무나 어두웠던 중세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독자는 중세라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중세'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거나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어도 에코의 소설을 읽기가 수월하지가 않다. 중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흑시대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시대다. 중세적 삶의 문법과 근대적 삶의 문법 가운데 무엇이 더 옳으며 무엇이 더 좋은가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에코가 재현한 중세는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미로처럼 설계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지성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성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은 지식을 누리는 데 있어서 적잖이 한계가 있었다. 중세의 도서관은 오늘날처럼 누구나 마음대로 책을 빌려가면서 읽지 못했다. 특정한 시간만 도서관의 책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열람'은 책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읽는 것이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교회 도서관에 보관된 책을 읽거나 필사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칠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단적인 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지된 책을 읽으려고 했다.

 

소설은 종교의 맹신적 믿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시절의 이야기다. 종교와 교회의 입장에서는 화려했던 장미가 꺾이는 시기였던 것이다. 종교적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내보이는 구 세력과 철학적 이성을 중시하는 젊은 수도사들 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관리륻 담당했던 원장 수도승은 그리스 철학에 관한 책들이 보관된 장서관의 출입을 철저히 막는다. 아울러 일반인의 경우 조금이라도 부도덕하다고 판단되면 마녀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로 인한 억압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는 지식에 대한 갈구를 불러일으켰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교리로부터의 깨달음보다는 진리 그 자체, 곧 삶의 비밀을 추구하기 위해 책을 보고자 했다. 에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중세인들의 인생관을 라틴어 명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수도승이 찾고자 했던 지식의 근원은 도서관에서 숨겨져 있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pp 23)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단 한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권 때문이었다.  『시학』2권은 희극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뿐 아니라 웃음도 우리 삶에 유용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헤 신부는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이 원죄를 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리에 집착했던 호르헤 신부의 눈에는 야밤에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으려고 한 수도원들이 위험천만한 이단자로만 보였던 것이다.

 

 

 

 

 지식의 권력화의 위험성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호르헤 신부가 예수와 기독교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다면, 월리엄 수도사는 그 진리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장미의 이름』은 월리엄과 호르헤의 대결을 통해 독자들에게 깨우쳐 준 교훈은 진리란 알고 보면 이름뿐인 데, 그 진리라는 허상에 얽매이면 자신이 '악마의 책'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처럼 자신도 남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악마로 만드는 것은 호르헤 신부가 휘둘렀던 권력이다.

 

진리의 권력화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서양 열강은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자신들보다 미개한 문화를 지닌 식민지를 '종교 전파'라는 명목 하에 지배 헤게모니로 사용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천 년 전에 등장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절대적인 지식이 권력이 될 때, 그 지식 권력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사탄이 된다. 에코는 이러한 문명사적인 비극을 중세 말의 신앙과 학문의 대립을 통해서 그려냈다. 중세의 악마는 호르헤 신부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생겨났다.

 

이단에 대한 탄압과 신학적 독단,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지배질서는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면 '동지', 그 반대는 '적'이라고 여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권력과 야합한 진리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위험한 우상이 된다. 이러한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윌리엄 수사가 추구했던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반성,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열린 자세,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 탐구가 필요하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윌리엄의 제자였던 아드소가 수도원의 폐허 위에서 내뱉는 독백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라져 버린 과거의 아름다웠던 장미의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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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어려운 책을 읽었구나.
난 영화로 봤는데. 영화로 잘 봐서 책으로는 볼 맛이
안 나더라.ㅋㅋ

cyrus 2012-02-20 18:41   좋아요 0 | URL
영화는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과 미로 도서관 장면이
일품이죠. 그래서 저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

차트랑 2012-02-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머리를 쥐어짜며 읽는다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는 제게 마치 세트처럼 다가왔답니다 ㅠ.ㅠ
장미의 이름을 대하니 무착 반갑군요
저는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한 상태인데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2-21 19:07   좋아요 0 | URL
역시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영화로 보면 내용이 금방 이해가 가더라고요.
 
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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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미디어로부터 위로받는 고독한 현대인들

 

어느 연구결과에 의하면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의 중독성이 술, 담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대한 욕구는 술과 담배에 비해 비용이 들지 않으며 일상에 유용하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현대인들은 정말이지 심각하게, 다른 방식으로 분주하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주부든,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터넷 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스마트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수시로 훑어보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글을 새로 올리고, 트위터로 쉴 새 없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담고 나르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확실히 인터넷은 정보의 검색을 용이하게 하고 트위터와 같은 SNS은 여론의 새로운 창구 역할을 거의 실시간으로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발휘한다. 연구팀의 분석대로 비용이 들지 않으면 시간면에서도 효율적이다. 그리고 SNS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팔로어를 하면서 폭넓은 인관관계를 맺을 수 있다.

 

최근에는 '트위터봇'이라는 것이 유행을 한단다. 해당 봇이 메시지를 팔로어들에게 보내고, 팔로어들이 보낸 메시지의 키워드를 분석해 사전에 저장한 메시지 중 연관도가 높은 내용을 자동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 트위터봇은 종류별로 다양하다. 좋은 명언을 메시지 삼아 보내는 '좋은글봇'도 있고, 여자친구가 대화를 거는 것처럼 메시지가 트위터에 전달되는 '여친봇'도 있다. 여친봇을 팔로잉한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야, 뭐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팔로워는 여친봇의 메시지에 답변을 보낸다. 진짜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친구처럼 대하는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트위터봇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욕구, 즉 현대인들이 스마트폰, SNS를 달고 살면서도 여전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많다도 정작 현대인들은 외롭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트위터에 팔로워한 사람들의 숫자, 카카오톡에 저장되어 있는 지인들의 숫자 등에 얽매이기도 한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처럼 자신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의 팔로워라든가 카카오톡에 저장된 '친구'의 수가 수백명이라고 해서 우리는 과연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100명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스마프톤이나 컴퓨터에서만 가능하는 온라인 세계가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저장된 100명 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절반도 채 안 될 것이다. 10%는 가족 관계 또는 비즈니스상으로 필연적으로 만나야 되는 사람이며 나머지 90%는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할까 말까하는, 친구인데도 그렇다고 정말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연락이 뜸한 사람이 있다면 연락 안 한 채 나 몰라라하고 쿨하게 넘어가든가 아니면 다시 볼 일이 없다면 과감하게 그 사람의 폰 번호나 주소를 지워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의 결별을 익숙하게 여기지 않는다. 안 친해도 그 사람의 인적 정보는 그대로 남겨 둔다.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면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마당발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람이 타인과 관계 맺기에 있어서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이 같이 얽히고설킨 숱한 관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욕망과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잊은 채 타인의 요구에 맞춰 기능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이별이나 죽음 같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극복하기 힘든 고통의 나락에 쉽게 빠져버린다.

 

 

 

 

 '대화'도 필요하지만, '고독' 역시 필요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을 연구했던 앤서니 스토는 사랑과 우정 등과 같이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관계과 행복감을 증폭시켜주는 것과 관련해서 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자의 입장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트위터와 스마트폰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그들은 '외롭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리고 사람들 간의 대화를 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트위터는 어찌 하다 팔로워들에게 인간 아닌 인간처럼 대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러한 현상이 자신의 주변에 친하다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정작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관계가 행복의 절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앤서니 스토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고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버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독의 장점 그리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천재' 또는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 중에는 고독한 삶을 살다가거나 또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글을 쓰는 작가나 화가, 음악가들은 훗날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될 위대한 '명작'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다. '명작'을 탄생하기 위해서 고독한 삶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창작 활동 이외에는 타인과의 대화를 하는 인간 관계를 외면했으며 특별하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천재들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이며 창의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일수록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토는 대중들이 천재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고독의 장점으로 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 그의 내면에서 진정한 '성숙'과 '통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감정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며 창조적인 상상력을 증대시킨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기번, 고야 등 학자와 예술가의 빛나는 업적은 고독에 침잠하는 그들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시간마저도 없는 현대인들 

 

 

 

 

 

 

 

페르낭 크노프  <슈만을 들으며>  1883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재미난 사례를 인용하자면, 그리스의 시골 마을에서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 또는 연인이 사별하면 5년 동안 애도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지는 풍습이 있다. 이 기간동안 미망인은 검은 옷을 입고 고인의 무덤에 매일 가고 고인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그리스 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슬픔의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동시에 앞으로의 여생에 주어진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이 자연스럽게 키워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후 시간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여성은 관습에 따라 자신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는 데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오후의 휴식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절대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두 풍습은 공통적으로 고독을 심리적인 상처를 나을 수 있게 만드는 치유의 수단으로 이해했다. 슬픈 일이 있으면 혼자서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대 이후 사회의 주류는 고독을 무시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변하고 말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리스처럼 사별한 사람에게 얼마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문화도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주어지지 않는다. 유교문화의 우리나라에도 부모가 죽었을 때 아들이 상복을 입은 채 3년 동안 부모의 무덤 곁에 지내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는 고인을 추모하고 그리워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독을 외부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상실, 고통, 슬픔 등의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그대로 묻어들수록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또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슬픔과 고독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악순환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힘겨워지도록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적 동물이다

 

영국의 호스피스가 몇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에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제시해 우리나라에서도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살펴 보면 시한부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되는 일로 꼽은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 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 꿈들'을 후회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이 두번째로 후회하는 일로 꼽혔다. 일이 바뻐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나 배우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않은 것' 인데 다른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솔직한 감정을 말하지 않아 정신적 피로가 쌓였다는 설명이다. 네번째와 다섯번째로는 '옛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것' , '변화를 두려워해 즐겁게 살지 못한 것'이 뒤를 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인간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다. 인간 마음 속에 그러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고독은 우리 삶에 있어서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오래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던 사회적 동물이라는 범주에만 포함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도 본인 고유의 자아(Self)를 탐색하고, 타인들 앞에서 드러낼 줄 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고 싶어하는 충동에 집착하여 정작 자기 내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타인 중심의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다보니 정작 자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에 순응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존중감을 뚜렷하게 지니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 받는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일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면 더 이상 타인과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타인을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상호적 관계를 맺고 사는 동반자로 여길 수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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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1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과잉연결시대>라는 책을 봤는데, 이 얘기들과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처럼 예술이나 철학적으로 이야기를 푸는 책은 아니지만요. 저도 어느 정도는 그래요. 트위터를 저도 조금 하는데(뭐 거의 한다고 볼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때로는 올라오는 수많은 멘션들이 이게 다 뭐야..싶다가도 왜 나는 팔로워가 늘지 않나를 생각해보기도 하거든요. 귀찮아하면서도, 또 막상 연결이 끊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사실 요즘에 트위터 중에 진지하게 읽는 멘션은 오로지 공자봇의 멘션. 모든 인간을 다 제쳐두고, '봇'의 멘션을 가장 진지하게 읽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생각해보니 뭘까..싶네요.)

cyrus 2012-02-19 22:51   좋아요 0 | URL
<과잉연결시대>라는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요즘에는 덜하지만
예전에 유행했던 싸이월드 친구추가에 신경쓰곤 했어요. 그 땐
친구추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공자봇이라는 것도 있군요, 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아서
잘 몰랐어요 ^^;; 제가 디지털 문명에 너무 한참 뒤쳐진 느낌이
드네요 ㅎㅎ

루쉰P 2012-02-1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완전 요즘 내 얘기네 하며 글을 봤네요 ㅋ 잘 지내시죠 전 고독 속에 빠져 있으니 천재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할까요 ㅋㅋ 이 글을 보며 그런 위로를 느꼈네요 ㅋㅋㅋ 저 땡스 투 하고 이 책 삽니다 완전 딱 내 책이에요 ㅋㅋㅋ

cyrus 2012-02-19 22:53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잘 지내고 계시죠?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서
경기 일하시는데 고생 많으시겠어요.

책 내용 중간에 심리학적 이론을 소개한 부분만 빼면 예술가들의 사례들을
읽어볼만해요. 그들로부터 고독을 벗어날 수 있는 비법을 배울 수 있고요 ^^

stella.K 2012-0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친구 한 애는 고독을 너무 좋아해 자기가 파놓은 동굴에서만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예 자신이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더군.
그 친구 언젠가 나한테 그렇게 말한 거 후회할까?ㅋ
그 친구는 고독이 너무 좋아 그 안에서만 살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약간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람을 알아 온 것이 맞나 싶었어.
지적한 두 가지 충동 맞는 말인데, 그것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cyrus 2012-02-19 22:5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웃사이더형이지만 차마 제 입으로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라'라고는 말 못할거 같아요 ^^;;
오히려 제가 포기하고 먼저 연락하거든요 ㅎㅎ
누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줄 아는게 중요하죠 ^^

 
우울과 몽상 -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홍성영 옮김 / 하늘연못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1001-91] 어셔 가의 몰락

[1001-96] 갱과 추 (저승과 진자)

 

 

 

 

 가장 오래되고 강렬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다.

 

 - H.P. 러브크래프트 -

 

 

 

 

 공포문학의 효시, 에드거 앨런 포

 

공포문학은 오싹하고 음산하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녔기에 시대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주, 재생산되며 읽혀지고 있다. 괴기스럽고도 공포스러운 이 이야기의 근저를 이루는 초자연적인 공포는 인류의 출연과 함께 시작됐으며 그 자체로 문학 형식이 되기도 했다. '공포'라는 감정을 주제로 또 하나의 문학 장르를 구축한 에드거 앨런 포야말로 공포문학의 효시로 보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포가 태어나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이미 공포와 초현상을 주제로 한 고딕소설이 유행했기 때문에 포를 '공포문학의 원조'라고 평가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런 포 역시 고딕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어셔 가의 몰락」이다) 

 

하지만 포의 소설은 현실을 벗어난 독특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 공포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포는 세속적인 주제에 사로잡힌 예술과 문학을 경멸하였으며, 그 자체로 새롭고도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의 문학적 평가는 죽은 지 1세기가 지난 뒤에서야 이뤄졌다. 혹자의 비평가는 포를 미국 문학사에 크게 이바지한 영향이 없다고 저평가할 정도로 포는 자신이 태어난 미국에서도 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 준 사람들은 저 바다 건너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뿐이었다.

 

국내에서도 포의 작품, 특히 너무나도 유명한 「검은 고양이」, 「어셔 가의 몰락」등은 단편소설 모음집을 통해 심심찮게 만나 볼 수 있지만 단순히 아동 대상의 독자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두 단편소설만으로 포 특유의 그로테스크를 느낄 수가 없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포가 남긴 수많은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책이 『우울과 몽상』이다. 공포를 주제로 한 소설뿐만 아니라 '명탐정의 원조'인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유명한 추리소설까지 포의 모든 단편소설들이 실려 있는 유일한 소설전집이기도 하다. 단, 소설의 분위기를 흐트리게 만드는 오자에다가 독자들 사이에서는 역자가 원전의 일부를 일부러 훼손한 채 발췌 번역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리는 게 옥의 티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공포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정말 불행하기 짝이 없었던 일생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불우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술과 도박, 아편에 탐닉했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과 정신을 본인 스스로 망가뜨리고 말았으며 번번히 연애에서도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포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는 지독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소설 대부분은 공포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이다. 그가 표방하는 주제는 공포이며, 그 공포는 영혼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초자연적인 괴물의 형상이며,「어셔 가의 몰락」의 초반부에 그려진 늦가을 저물녘 늪가의 황폐한 옛 집은 바로 괴물의 집이다. 검은 고양이와 그 기괴한 분위기는 유년기에 포의 마음 깊은 곳에 축적된 공포감에서 나온 것이다.

 

 

 

 

 

 공포 앞에서 굴복하고 마는 인간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마로니에북스, 2007)는 수백명의 국제적인 문학 관편 필자들이 선정한 작품들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 소개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두 편이다. 그 두 편이 바로 「어셔 가의 몰락」「저승과 진자」(국내에 번역된 박스올의 책에서는 '갱과 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다. 포의 대표작인「검은 고양이」가 아닌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단편소설인「저승과 진자」가 소개된 점은 이례적이다.

 

하지만 「저승과 진자」에서도 절망적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공포적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공포로 인해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절망적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음산한 분위가 흘러나오는 어둡고 폐쇄적인 방, 먹이에 굶주린 채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는 쥐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진자의 날카로운 거대한 칼날을 보면서 공포에 질린 소설의 주인공. 「저승과 진자」속 주인공은 소설 시작부터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강력한 공포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 포는 밀폐된 공간 그리고 '끔찍한 죽음의 선고'(「저승과 진자」pp 734)를 내리려고 하는 진자의 칼날이라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만듬으로써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공포감에 의해 피폐해져만가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나는 눈을 떠 내 앞에 펼쳐진 환영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물을 최초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끔찍한 것을 보게 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결국 강렬한 마음의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눈을 떴다. 그러자 상상했던 최악의 상태가 나타났다.

 

 - 에드거 앨런 포 「저승과 진자」중에서 (pp 737) 『우울과 몽상』홍성영 역 -

 

 

「어셔 가의 몰락」에셔는 우울증에 사로잡힌 채 알 수 없는 공포감에 괴로워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혼란스러운 정신 이상 증세를 가진 주인공 어셔와 음습한 분위기로 가득 찬 어셔 가의 저택에 대한 고딕소설풍 묘사는 아편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을 경험한 포였기에 가능했다.

 

 

나는 내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단 한 채의 저택과 그 주변의 단조로운 풍경, 황폐한 담, 공허하게 뜬 눈 같은 창, 몇몇 사초 더미, 그리고 뒤섞인 나무의 흰 둥치들. 나는 그것들을 극도로 침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아편 중독자가 꿈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베일을 벗겨내는 끔찍함 이외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었다. 마음속이 싸늘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매스꺼웠다. 어떤 상상을 해보아도 적막감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음울함이었다.

 

 - 에드거 앨런 포「어셔 가의 몰락」중에서 (pp 675) -  

 

 

그래도 포라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 바로 「검은 고양이」다. 온순했던 인물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으면서 무시무시한 살인자로 변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악마'스러운 본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내를 살해하게 되자 아내의 시신을 지하실 벽 속에 감쪽같이 숨긴다. 하지만 완전범죄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끔찍한 살인의 내막은 들통난다. 시신이 숨긴 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게 되고 그 곳을 허문 순간, 부패된 아내의 시체와 시체 옆에서 외눈의 검은 고양이가 흉칙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앉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괴물'이 벽 안쪽에 시신과 함께 있는 그 '괴물' 검은 고양이를 벽에 발랐던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거나 특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면 주위에 평범한 대상들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살인자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유발하게 했으며 그 장면을 목격했을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처음에는 끊어질 듯한 어린아이의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였는데, 곧 너무나 괴기하고 사람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끊임없이 울리는 큰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그것은 비탄에 잠긴 저주받은 이와 그 저주에 기뻐 날뛰는 악마의 목구멍에서 함께 나오는, 지옥에서만 솟아오르는 공포와 승리감이 섞인 울부짖는 비명 소리였다.

 

 -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중에서 (pp 654) -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고양이가 우는 소리로만 들렸겠지만 살인자의 귀에서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자신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아내가 벽 속에서 외쳐대는 절규에 찬 비명 소리였던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포의 이야기

 

포가 썼던 단편소설들을 모은 첫 번째 소설집 제목이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다. 첫 번째 소설집 출간 이후에도 포는 제2의 소설집을 출간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첫 번째 소설집의 제목이아말로 포가 추구했던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의 뜻처럼 포의 소설에는 괴기스럽고, 흉측스럽고, 현실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존재와 세계가 있다. 그런 형식을 지는 포의 소설이 자칫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일종의 기피감을 가질 수 있겠다. 그의 문학을 칭찬하고 프랑스에 소개했던 보들레르의 문학처럼 포의 문학 역시 단지 '우울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포는 문학의 목적이 도덕이나 교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美)의 창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꿈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고 그 곳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짧은 소설마다 소재의 창발성에 놀라고, 때론 광기어린 감정 묘사에 혀를 내두르고, 때로는 기발함에 멈칫하게 된다. 몽상적인 소재들이 많아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무엇보다고 그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마주할 때 가지게 되는 인간의 무의식 속 감정, 즉 '공포'에 질리면서 나타나게 되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도 묘사하고 있다. 

 

다독가인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젋은 시절에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문학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소설과 같은 픽션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했다. 다치바나 다카시 입장에서는 단순히 시간낭비일지 몰라도 포의 상상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까?  더욱이 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는 현실에 벗어난 건 사실이지만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세계 앞에 공포감을 느끼는 감정만큼은 '실재'의 경험이다. 

 

이렇듯 포의 소설은 단순히 호기심 많은 아동들을 겨냥한, 순순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 독자들에게 겁을 주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게 만드는 싸구려 공포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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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18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샤이닝님도 그러고 시루스님도 쓰시고 할인도 많이 돼서 이 책 살까 해요!^^

cyrus 2012-02-18 14:08   좋아요 0 | URL
요즘엔 이 책 싸게 팔더군요, 책이 두꺼워서 심심할 때 읽으시면
좋을듯해요 ^^

꽃도둑 2012-02-1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는 구체적 대상이 있을 때보다 막연하거나 형체가 없을 때 더 증폭된다고 합니다..
포의 공포는 분명 내적불안에 기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쏘우 인가요?,..보는 내내 기분나쁘고 섬뜩했어요, 그 팽팽한 긴장감의 줄을 탁! 끊어버리던 반점의 묘미도 있었지만...
암튼 공포 영화 호러 영화 소설 등...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cyrus 2012-02-18 14:10   좋아요 0 | URL
쏘우, 완전 최고죠! 저는 공포영화 한 편 보면 영화에서 봤던
영상들이 머릿속에 남아도는 편이라서 되도록이면 잘 안 보는 편이에요.
공포영화 무서워서 안 보는게 아니랍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2-02-1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우...좋죠.저는 '어셔가의 몰락'이 좋았어요.이 집의 정체는 뭘까...의문의 여인은...그러다 마지막에 저택이 와르르...기묘한 매력이죠.

그리고 포우의 유일한 장편인 <아더 고든 핌의 모험>이 몇 년 전 다시 번역되었으니 관심있으면 구해 읽으세요.

cyrus 2012-02-20 18:43   좋아요 0 | URL
저도요. 소설 중간에 삽입된 시도 좋았어요. '애너벨 리'가 연상되더라고요.

사실 포를 읽으면서 장편도 구입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절판이더군요.
그나마 중고샵에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게 비싼 가격에 팔고 있고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네요 ^^

휘오름 2012-02-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에 포우 단편집 조그만한건 한번 봤는데 제대로 나온 책은 한번도 못봐서 고민중이었네요. 이기회에 한번 도전해 바야겠궁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