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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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는 ‘페미니즘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태동은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권리를 주창했고 뒤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책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을 의미할 뿐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었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서 나섰고, 《여권의 옹호》에서 루소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여권의 옹호》는 여성들도 국민 교육의 대상이며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이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불멸의 작가’가 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태어난 지 11일 만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출신 모녀가 쓴 세 편의 소설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메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첫 소설이다. 『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 여성스러운 매력만을 보여주는 남성 작가의 감상 소설(Sentimental novel)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집필에 공을 들였다. 『마틸다』는 셸리의 미발표 작품이다. 『마틸다』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라는 파격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이다. 고드윈은 셸리가 보낸 『마틸다』 원고를 읽은 뒤 경악을 금치 못했고 원고 발표를 요청한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소설의 원조로 꼽히지만,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켄슈타인》은 당대의 남성 신화에 도전하는 텍스트이다. 서구 문명의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출산 없이 탄생한 괴물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불행한 결과를 상징한다. 『마틸다』의 여주인공 마틸다 역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근친 사랑’이라는 주제는 불순하고도 비도덕적이다. 파격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주인공의 주체적 여성상을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건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틸다는 근친 사랑을 금기하는 정상 가족 사회 자체를 거부한다. 그녀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마틸다』를 읽은 고드윈은 아버지를 못 잊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남성 독자들도 고드윈과 비슷한 정서를 느꼈으리라. 이들의 눈에는 마틸다가 ‘변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쌍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쌍년’의 의미는 남자들이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쌍년’과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쌍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회의 틀에 벗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성을 뜻한다[1]. 셸리가 창조한 마틸다는 남성이 부여한 ‘쌍년’의 부정성을 뒤집은 여주인공이다.

 

만약 울스턴크래프트가 문학적 역량을 더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메리』와 『마리아』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메리』의 여주인공 메리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능동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 생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내로서의 의무’에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결혼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메리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지만, 자신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앤을 향한 우정이 깊어질수록 메리는 사랑(이성애)과 결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녀는 한 차례 결혼을 경험했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헨리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이성애적 규범과 질서를 끝내 거부한다. 이 소설에서 메리는 앤과의 우정을 경험하면서 평소에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성찰과 낯선 감정들을 마주한다. 그녀는 결혼이나 가족, 연애가 이성애 중심의 관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은 ‘혼자’ 또는 동성 동거를 원하는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49쪽)

 

  메리는 심사숙고한 뒤 앤의 가족에게 남편과 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며 한동안 그 이유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편과 살지 않다니! 그럼 어떻게 살 생각이니? 그 질문에 메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메리』, 89~90쪽)

 

 

이성애 결혼과 가족 중심 규범이 주류를 형성하는 사회에서는 독립적 삶의 모델을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정상 가족’ 사회는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은커녕 편견과 차별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메리와 앤의 만남은 ‘성애 없는 헌신과 우정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 모델을 보여준다. 가부장제는 이성애 제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성애 규범이 전제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간의 우정은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메리』가 보여준 권력이 없는 여성들끼리의 결합은 당대 문학 작품들에 볼 수 없었기에 낯설다. 그래서 더더욱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를 시도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고 낯설지 몰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성애 부부관계만 정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도전한 여성들의 전위적 투쟁으로 평가받는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 미혼 여성 두 명이 동거하는 생활 방식)보다 한발 먼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원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마리아』에서도 울스턴크래프트가 구상했을 법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는 남편이 꾸민 계략에 빠져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자신이 낳은 딸에 대한 양육권마저 박탈당한다.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힌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 정신병원 수용소 관리인으로 일하는 제미마(Jemima)다. 두 여자는 출신 배경이 다르지만(마리아는 상류층, 제미마는 빈곤층), 공통으로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다. 『마리아』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면서 독자는 ‘열린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적 양식을 그대로 따라 결말을 지었다면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유토피아 소설은 현실의 문제점을 부각한 다음 이를 교정한 이상향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개혁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마리아의 수기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문제들을 분석하여 낱낱이 비판한다. 이러한 그녀의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결말을 상상해본다면, 울스턴크래프트는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을 ‘계급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것이다.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소설들은 오늘날의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이란 실용성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문학은 매우 역동적인 장르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 순간적인 고통이었으나 그것을 이겨낸 자신만의 역동적인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은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의 욕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고발의 언어로 표현했던 작가들의 삶과 닮았다. 그녀들은 일상성의 문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는 저만의 방식과 태도로, 세상에 대한 저항을 감행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의 문학은 여성에게 예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세상의 규범에 반기를 든다. 또, 잊힐 뻔한 여성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의 역할이고 존재 이유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작가들의 목소리로 세상에 발표된 페미니즘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성 독자는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싶은 현실과 미래는 이 작가들이 간절히 원했고 상상했던 현실과 미래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적극적인 독서는 끝없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장에서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를 얻게 해준다. 이러한 사유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드는 독서를 통해 여성 독자들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분명히 ‘오늘날의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 그녀들의 페미니즘 소설은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

 

 

 

 

 

[1] 페미니즘이 전유한 ‘쌍년’의 의미는 이 글에서 참고했다. [내 ID는 강남미인, 되살린 ‘쌍년’의 기록] (일다, 2017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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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기존 관념에 대한 비판 내지 저항에 뿌리를 두는 바, 페미니즘 소설은 충분히 문학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cyrus 2018-05-28 11:41   좋아요 1 | URL
이제 우리나라도 페미니즘 문학,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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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의 원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한 뒤 내용을 수정하여 이름을 바꿔 내놓은 것인데 첫인상으로 인해 겪게 되는 연인 사이의 갈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엘리자베스 베넷(애칭은 ‘리지’)은 부유한 신사 피츠윌리엄 다아시의 청혼을 받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처음 만나 느낀 그의 오만한 태도에 못마땅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엘리자베스는 첫인상이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아시가 사려 깊은 인물임을 알게 된다.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 줄거리 자체보다는 대화 내용이나 인물의 행동과 성격묘사를 눈여겨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오스틴의 뛰어난 묘사력과 사회 비판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간혹 《오만과 편견》을 ‘빅토리아 시대 사회상이 반영된 작품’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는 고증에 맞지 않는 평가이다. 1817년에 오스틴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를 ‘섭정 시대’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면서 섭정 시대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아직 오지 않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는 엄격한 도덕주의와 ‘성 역할’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강인한 신사’의 반대편에는 ‘(신사에게) 보호받아야 할 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이 등장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은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점점 주변화되어 스스로 그늘진 존재로 머무른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9쪽)

 

 

세계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언급할 때 《오만과 편견》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첫 문장만 보더라도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깊은 혜안을 확인할 수 있다.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 그렇다. 이 첫 문장은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던 여성이 자신을 부양할 남편을 만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야 했던 섭정 시대 사회상을 압축하고 있다. 여성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삶을 동시에 강요하는 여성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였고, 빅토리아 시대로 이어져서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문화가 지배한 시대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으로 취급받았고, 자신의 진실한 욕망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그런 시대가 만든 틀을 은근슬쩍 비꼬고 이를 거부한 여성이 많지 않은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오스틴이다. 그녀는 첫 문장 하나로 ‘누구나 보편적인 진리’를 점잖게 비꼰다. 《오만과 편견》이 ‘로맨스의 고전’으로 많이 알려지다 보니 독자들은 첫 문장부터 보여준 작가의 사회 비판 의식을 간과한다.

 

오스틴은 ‘결혼에 목숨을 건 남성과 여성’을 풍자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결혼에 목숨을 건 남성’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다가 거절당한 성직자 윌리엄 콜린스이고, ‘결혼에 목숨을 건 여성’은 엘리자베스에게 퇴짜 맞은 콜린스의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인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 루카스다. 결혼을 신분 상승의 기회(샬럿) 또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기회(콜린스)로 삼는 것은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하려는 콜린스와 이를 거부하는 엘리자베스의 대화, 그리고 ‘결혼’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엘리자베스와 샬럿의 대화는 자의식이 뚜렷한 엘리자베스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제가 결혼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로, 저처럼 생활에 걱정이 없는 성직자라면 누구나 훌륭한 결혼 생활의 모범을 교구민들에게 보여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결혼이 저의 행복을 훨씬 더 증진시켜 주리라는 것을 제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콜린스, 152쪽)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재차 청혼을 받을 가능성에 자신의 행복을 맡길 만큼 그렇게 무모한 아가씨들과는 다릅니다. 그런 아가씨들이 있기는 있다면 말이지요. 제 거절은 진지한 거절이에요. 당신과 결혼해서 제가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엘리자베스, 155쪽)

 

 

 결혼은 언제나 그녀(샬럿-cyrus 주)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중략]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샬럿)

 

[중략]

 

  콜린스 씨의 아내인 샬럿, 정말로 창피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창피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더 무겁게 한 건 샬럿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운명 속에서 웬만큼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177, 180, 181쪽)

 

 

 

엘리자베스는 결혼이 인생의 목표이자 전부라고 여기는 인습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과 관점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다. 비록 그녀도 인습적인 결혼제도를 수용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여성의 감정을 억압하는 결혼제도를 거부하고, 하나뿐인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스틴은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을 통해 ‘여성이 (남성 중심의) 세상 앞에 떳떳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엘리자베스의 당당한 모습은 투박하거나 거칠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주변 인물의 심성을 꿰뚫을 정도로 섬세하다.

 

《오만과 편견》에는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는 시대적 제약’과 ‘전통적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습’ 등 매우 진지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일반적인 로맨스의 기승전결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 작가에 향한 예우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만과 편견》을 ‘고전적 연애소설’로 느껴지지 않으려면 영화보다 원작소설을 먼저 봐야 한다.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매체이다. 영국 사회의 보수적인 인습과 거기에 지배당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 등에 대한 오스틴의 세밀한 묘사는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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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2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보면 짚신도 제 짝있다는 말은 별로 맞는 말이 아니거나
엄청난 진실을 내포하는 말이거나 둘중 하난 것 같아.ㅋ

cyrus 2018-03-29 17:23   좋아요 0 | URL
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ㅎㅎㅎ 비혼주의자들은 그 말을 들으면 코웃음 칠 겁니다.. ^^;;

oren 2018-03-29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는 아무래도 찰스 디킨스(1812~1870)가 아닐까요? 제인 오스틴(1775∼1817)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영국 작가가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지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오만과 편견‘을 모두 극복하고 난 뒤에 마침내 펨벌리의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나눴던 대화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그렇지만 처음에 어떻게 시동이 걸렸죠?˝

˝시동을 건 시각이라든가, 장소라든가, 표정이라든가, 말이라든가 하는 것을 꼭 집을 수는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내가 시작했구나 알았을 때는 벌써 한참 지났더군요.˝

cyrus 2018-03-29 17:27   좋아요 0 | URL
부끄럽게도 올해에 제가 오스틴의 작품 중에 처음으로 읽은 게 <오만과 편견>입니다. 오늘 독서모임 때문에 드디어 오스틴의 대표작을 읽게 되었어요.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읽으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디킨스를 읽기 위한 시동이 언제 걸릴지 모르겠어요. ^^;;

2018-03-29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29 17:30   좋아요 0 | URL
저도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끔 지인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결혼 언제 하냐?”라는 말이 툭 나옵니다. 또 기혼자 지인을 만나면 자식 출산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고요. 이래서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인습이 무서워요. ^^;;

레삭매냐 2018-03-2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인 오스틴은 <설득> 읽고 보고 한 게
전부네요.

<오만과 편견>은 읽겠다고 일단 사두긴 했
는데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산 건 을유문화사 버전입니다.

오렌님이 언급해 주셨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서는 어째 디킨즈가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
습니다.

cyrus 2018-03-29 17:32   좋아요 0 | URL
<에마>,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그리고 작년에 나온 초기작 및 미발표작을 수록한 번역본을 제외하면 오스틴의 소설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는 정말 마음잡고 오스틴 전작 읽기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

transient-guest 2018-03-3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은 그저 사회상을 보여주는 소설로 봤지 날카로운 풍자는 묘사 이상의 수준으로 보지는 못했네요. 제 critical reading능력에 역시 많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8-03-31 15:27   좋아요 1 | URL
책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봐야 책 속에 숨어있는 진가를 볼 수 있어요. 저를 제외한 독서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오만과 편견>을 두 번 이상 읽었어요. 영화와 드라마도 봤고요. 시간이 흐른 뒤에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다른 한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알프레트 쿠빈 지음, 홍진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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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쿠빈(‘알프레드 쿠빈’으로도 표기할 수 있다, Alfred Kubin)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화가다. 쿠빈은 칸딘스키와 함께 첫 번째 ‘청기사’ 그룹전에 참여했고, E. A. 포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등을 위한 삽화를 제작했다. 쿠빈은 괴생물체, 지옥, 인간의 욕망과 타락 등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기괴한 그림체로 표현했다. 그래서 쿠빈의 그림은 어느 하나 불쾌하지 않은 게 없다.

 

쿠빈은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친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는데,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섬약한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병약한 쿠빈에게는 학교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쿠빈은 어머니의 무덤에 찾아가 그곳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쿠빈은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창 잘 나가던 중에 쿠빈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쿠빈은 또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쿠빈은 우울증에 억눌려 잠잠했던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했고, 그는 4주 만에 자신의 유일한 장편소설 《다른 한편》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1909년에 발표되었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소설답게 환상적인 세계와 초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명이며 직업은 화가다. 어느 날 주인공의 친구 클라우스 파테라는 자신이 세운 ‘꿈의 왕국 페를레’에 주인공을 초대한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꿈의 왕국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한다. 꿈의 왕국은 외부 세계의 침입을 차단하는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지역이다. 꿈의 왕국을 드나들 수 있는 문도 하나뿐이다. 꿈의 왕국에 사는 ‘꿈의 주민들’은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옛 것을 좋아하며 나날이 진보하는 현대 문화를 거부한다. 파테라는 꿈의 왕국 지배자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가 좀처럼 힘들다. 주인공의 아내는 파테라를 직접 마주친 이후로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꿈의 왕국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로 하지만, 실패한다. 주인공과 이곳 주민들은 알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는 파테라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 출신의 억만장자 허큘레스 벨은 꿈의 왕국에 들어온 ‘외부인’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을 펼쳐보려고 했으나 파테라는 미국인을 무시한다. 자신의 사업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에 못마땅한 미국인은 꿈의 왕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그는 ‘루시퍼’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꿈의 주민들에게 ‘이성’과 ‘진보’의 가치를 전파한다. 또 주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파테라를 비난하는 선전을 펼친다. 미국인은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선동을 일으켜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꿈의 왕국에 내부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한 일들이 발생한다.

 

소설 1부, 2부는 주인공이 꿈의 왕국에서 생활하면서 겪게 된 일련의 경험들을 비교적 평이하게 묘사하면서 전개된다. 3부 3장부터 이야기는 ‘범상치 않은 전개’로 흘러가고, 독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3부 3장 제목은 ‘지옥’이다. 3부 3장은 평화로운 꿈의 왕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리듯 이상 증세를 보인다. 사람을 죽이는 난폭한 행동도 이어진다. 꿈의 왕국 전역에 ‘잠 중독’이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 병에 걸린 주민들은 잠들어 버린다. 그들이 잠든 사이에 동물과 곤충들이 왕국을 점령한다. 꿈의 왕국은 ‘동물의 세계’로 변하고, 퇴폐적 욕망에 사로잡힌 주민들은 무질서한 삶을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주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무의미하다. 번역본의 ‘해설’ 편에 《다른 한편》을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들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기존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싶다. 나는 이 소설이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한 창작 방식인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쓰였을 거로 생각해본다. 주인공의 꿈을 묘사한 2부 5장 마지막 장면(부제는 ‘꿈의 혼란’, 211~214쪽)과 3부 3장 ‘지옥’ 편을 읽어 보면 초현실주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치 꿈을 꾸듯 작업을 했다. 그들은 논리와 합리, 이성이 무의식을 구속한다고 봤다. 그들이 선호한 자동기술법은 미리 계획하고 다양한 조건을 철저히 계산하는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무의식 상태에 자신을 내려놓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꿈의 왕국이 몰락하는 과정은 예기치 않은 변모의 연속이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 앞에 무너지는 왕국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무(無)’로 귀결되는 허무적인 패배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이미 낡고 닳아서 힘없는 파테라의 권력을 파괴하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환기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무시무시한 악몽에서나 볼 법하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담담하게 묘사한다. 기괴한 상황과 아무 상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의 모습은 거대한 세계 하나를 파괴하는 인간 내면의 잔혹성과 대비돼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다른 한편》에 관통하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은 섬뜩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쿠빈의 예술적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소설이 보여준 그로테스크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로테스크는 우스꽝스러운 것과 괴기스러운 것 둘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범주다. 따라서 《다른 한편》이 발산하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은 이중의 의미로 구조화되어 있다. 하늘에서 추락한 기구의 파편을 ‘거대한 고래’라고 착각하는 주민들의 반응(294~296쪽), 꿈의 왕국 주민이자 은행가인 알프레트 블루멘슈티히의 죽음(310쪽)은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를 보여주는 적절한 장면이다. 쿠빈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죽고 죽이는 게 우스운 일이 된 부조리함을 연출한다. 《다른 한편》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알프레트 쿠빈’이 누군지 모르는 독자라도 상관없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당신도 소설의 ‘마력’에 이끌려 끝까지 다 읽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단연 3부 3장이다. 이 장의 제목은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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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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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뮤리얼 스파크(Muriel Spark)의 대표작이 나오게 돼서 무척 반갑다. 1961년에 발표된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The Prime of Miss Jean Brodie)는 이미 오래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번역본 제목은 《느릅나무 밑에서의 수업》(마루, 1993)이다. 이 제목을 보면 왜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희곡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생각나는 걸까? 아무튼, 1993년에 나온 번역본은 절판됐다가 이번에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했다.

 

진 브로디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녀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 교사로 일한다. 브로디는 교정에 있는 느릅나무 밑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 ‘느릅나무 밑에서의 수업’을 받는 다섯 명의 학생들(샌디 스트레인저, 로즈 스탠리, 유니스 가드너, 제니 그레이, 메리 맥그레거)은 학교 내에서 ‘브로디 무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브로디는 학생들에게 진취적으로 살아가라고 강조한다. 그럴 때마다 브로디는 제자들을 ‘크림 중의 크림(crème de la crème: ‘최고’를 뜻하는 프랑스어)’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감이 가득한 브로디는 아직 자신의 전성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학교 측은 보통 교사와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브로디를 사직시키려는 방안을 생각해보지만, 브로디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브로디가 생각하는 ‘전성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교정 느릅나무 밑에서 브로디 무리를 가르치는 일을 의미한다. 브로디는 자신의 뚜렷한 교육관에 신념을 가지고 브로디 무리를 가르친다. 그녀는 주입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학교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고 거부하는데, 자신의 교육 방식은 학생들이 스스로 지식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머리에 많은 정보를 쑤셔넣는 것이 교장의 방식이야. 내 방법은 지식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고. 내 방식이 어원적 의미에서 더 진정한 교육이라 할 수 있지. 교장은 내가 소녀들의 머리에 어떤 생각을 집어넣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건 실은 교장의 방식이야. 내 방식은 그 반대라고. 내가 너희의 머리에 어떤 생각을 집어넣었다는 소리를 하도록 그냥 두어선 절대 안 돼. 샌디, 교육의 의미가 뭐라고?”

  “밖으로 이끄는 거요.”

 

(49쪽)

 

 

브로디 무리는 다른 교사들의 수업에서 느낄 수 없는 브로디식 교육법에 매료된다. 브로디를 따르는 다섯 명의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들을 ‘브로디 무리’라고 부르는 것에 희열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들이 ‘브로디 무리’에 속한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심리학자 매슬로(Maslow)는 인간은 욕구 충족을 위해 행동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내재한 안전과 소속감, 자아존중,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 소설에 적용해볼 수 있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 비추어서 소설에서 드러난 브로디 무리의 정서적 반응 및 변화를 유추할 수 있다. 욕구 단계설에 따르면 브로디 무리는 3단계4단계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3단계는 집단에 소속되려는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외로움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4단계는 타인의 인정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구이다. 자신감을 느끼고, 자신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느끼려는 욕구가 이에 해당한다. 이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열등감을 느낀다. 브로디는 4단계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자신만의 교육 방식으로 브로디 무리를 가르치는 위치에 오른 ‘전성기’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브로디 무리는 ‘크림 중의 크림’으로 성장해서 전성기를 누리고 싶어 한다. 브로디 무리는 4단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브로디의 가르침을 따른다.

 

인간이 행동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이다. 브로디는 자기 인정 욕구가 강한 편이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하는 음악 교사 고든 로더, 미술 교사 테디 로이드와 연애를 한다. 브로디도 ‘인간’이고, 연인을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랑 욕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연애는 실패로 끝나게 되고, 좌절한 브로디는 자신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한탄한다. 사랑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탓인지 브로디는 실연의 상처를 애써 숨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연애 경험이 사직 근거가 될 수 없다면서 자신의 사랑은 육체적 관계가 없는 플라토닉 러브라고 강조한다. 브로디는 자신의 진취적인 이미지가 훼손될까 봐 연애 사실을 브로디 무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가장 믿고 사랑하는 유일한 제자인 샌디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브로디는 외강내유형 인물이다.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나, 속은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어쩌면 브로디는 연약한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서 자신을 따르는 브로디 무리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브로디는 자신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는 ‘연약한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학생들 앞에서 파시스트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한다.

 

  “파시스트예요.” 브로디 선생은 이렇게 설명하고 나서 물었다. “누구라고, 로즈?”

  “파시스트입니다, 선생님.”

  그들은 새까만 제복을 입고 똑같은 각도로 손을 올린 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나란지 줄지어 행진하고 있었으며, 무솔리니는 체육 선생, 혹은 걸가이드 단장처럼 단상에 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샌디는 문득 자신들 역시 행군중인 브로디 선생의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서는 모르겠지만, 사실 브로디 선생의 필요에 맞춰 무솔리니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줄지어 걷고 있는 파시스트들. 그거야 그렇다 치고, 걸가이드를 향한 브로디 선생의 경멸에는 질투와 모순과 오류가 있었다. 어쩌면 걸가이드가 너무 강력한 파시스트 라이벌이라서,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리에서 제외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한번 샌디를 사로잡았고, 샌디는 브로디 선생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42~43쪽)

 

 

샌디는 브로디의 불완전하고도 모순된 모습을 간파한다. 그러나 샌디는 브로디와 브로디 무리를 지키기 위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브로디의 자아도취는 점점 심해지고, 자신이 ‘크림 중의 크림’으로 살고 있으며 ‘강인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소설은 브로디와 브로디 무리의 행동과 심리적 반응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독자는 겹겹이 쌓아 올린 서사를 잘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브로디와 브로디 무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뮤리얼 스파크는 등장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려 불완전한 인간의 모순을 표면화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시간과 상황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통해 진정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소설은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개인적 고통과 실패가 보편적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생각해보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전성기’는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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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어떤 책일까 궁금하긴 했어.

근데 너는 책을 아주 빨리 읽나 봐.
너도 완독 스타일이지?^^

cyrus 2018-03-22 17:44   좋아요 0 | URL
도서관 반납일이 얼마 남지 않은 책, 독서모임 선정도서는 되도록 빨리 읽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완독이 독서의 최고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고, 읽을거리가 점점 많아지게 되면서 완독에 집착하지 않게 됐어요.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끝까지 다 읽지 않은 책이 완독한 책보다 더 많을 거예요. ^^;;
 
랑베르 씨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랑베르 씨》(열린책들, 1999)장 자크 상뻬(Jean Jacques Sempe)의 초기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상뻬의 첫 번째 그림책인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Rien n’est simple, 국내 미출간)이 1962년에 발표되었고, 《랑베르 씨》는 1965년에 발표된 네 번째 그림책이다. 《랑베르 씨》는 상뻬의 대표작 《얼굴 빨개지는 아이》(별천지, 2009)보다 넉 달 늦게 국내에 출간되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1969년에 발표된 그림책인데, 우리나라에선 이 책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렇다 보니 《랑베르 씨》를 주목한 독자의 리뷰가 많지 않다.

 

 

 

 

 

 

랑베르 씨는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인데도 말이 거의 없다. 그림의 절반이 ‘피가르 식당’에서 수다를 떠는 단골손님들의 말들로 채워져 있다. 단골손님들은 매일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1936년 프랑스 좌파 정권이 수립한 인민전선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는 손님들이 있고, 다른 쪽 식탁에서는 1950년대에 활약한 축구선수들과 당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축구팀들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이 앉아 있다. 랑베르 씨는 항상 자신과 함께 식탁에 앉은 동료들의 대화를 경청한다. 랑베르 씨도 식당을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지만, 존재감이 없다. 가끔 랑베르가 제시간 늦게 식당에 도착하면 단골손님들이 그의 안부를 묻곤 한다. 그러나 손님들은 랑베르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손님들의 관심 대상은 랑베르가 아니라 ‘정치’와 ‘축구’였다. 랑베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손님들은 정치와 축구에 대해 말하느라 바쁘다.

 

어느 날부터 랑베르는 플로랑스라는 여성과 사귀게 된다. 랑베르의 연애 사실을 알아차린 손님들은 다시금 조용한 사내에 주목한다. 동료들은 플로랑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식당에 온 랑베르에게 다가가서 그녀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재촉한다. 평소에 랑베르를 알고 지낸 동료들은 축구 얘기를 접어두고, 자신들이 연애하면서 만났던 여자들을 주제로 대화한다. 재미있게도 연애하는 랑베르가 주변 사람들의 대화 주제를 바꿔놓은 것이다. 확실히 단골손님들은 ‘연애꾼’ 랑베르에 주목했고, 그가 식당에 나타날 때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그러나 랑베르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랑베르의 결별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예전처럼 축구 얘기를 한다. 그렇게 랑베르는 자연스럽게 ‘존재감 없는 평범한 사내’로 돌아온다.

 

알라딘에 공개된 《랑베르 씨》의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평범한 월급쟁이들의 진부한 일상에 새콤한 양념처럼 곁들여진 랑베르의 에피소드. 여기에 그의 식당 동료들의 은근한 우정이 짭잘하게[1] 가미된 감칠맛 나는 이야기.

 

 

상뻬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풍경과 얼굴들에 집중한다. 《랑베르 씨》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 미세한 변화를 느끼는 그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렇지만 나는 ‘식당 동료들의 은근한 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의 우정은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분류하는 남성 간의 연대, 즉 ‘호모소셜(Homosocial)’에서 이루어지는 ‘쉰내 나는 우정’이다. 남성들은 호모소셜 속에서 여성들은 품평과 희롱의 대상으로 소비한다. 호모소셜은 ‘내(남성)가 너를 남자로 인정한다’는 남성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존재감 없던 랑베르가 연애하기 시작하자 동료들은 그를 ‘남자’로 인정하고, 그(의 연애)에 호기심을 느낀다.

 

자, 지금부터 나오는 말이 당신의 분노를 유발하고, 당신의 뒷목을 잡게 만들 수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시대착오적인 언어들’식당 손님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남성우월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뻬의 문장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들은 딸 단속 잘 하라고!”, “여자들은 그저 처신만 잘하면 돼!” (75쪽)

 

 

“난 항상, 여자들은 정복해야 한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지.” (83쪽)

 

 

랑베르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그가 우리의 우정으로 기운을 되찾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남자들 사이의 우정은 중요하니까. 게다가 우정, 그것밖에는 없다. 인생의 온갖 크나큰 골칫거리는 여자들로부터 비롯한다는 건 누구나 뻔한 얘기다. (90쪽, 상뻬)

 

 

축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단결심을 필요로 한다(여자들은 그 단결심이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 축구란 늘 함께 모여 경기를 벌이는 걸 좋아하는 열한 명의 친구들이다. (100쪽, 상뻬)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수준 떨어지는 발언들이다. 이 절판된 책이 재출간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상뻬는 여성이 축구가 필요로 하는 단결심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썼는데, 지금까지 프랑스 여자축구가 거둔 뛰어난 성적을 생각하면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 프랑스 여자축구 대표 팀 최고 성적

 

2008년 FIFA 칠레 U-20 여자 월드컵 4위

2011년 FIFA 독일 여자 월드컵 4위

2012년 FIFA 아제르바이잔 U-17 여자 월드컵 우승

2014년 FIFA 캐나다 U-20 여자 월드컵 3위

 

 

 

 

올해 8월 5일부터 한 달간 프랑스에서 FIFA U-20 여자 월드컵이 치러진다. 내년에 있는 FIFA 여자 월드컵의 개최국도 프랑스다. 상뻬 할아버지는 지금도 정정(亭亭)하신데 조국에서 치러지는 여자축구 경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경기를 보고 나서 본인의 펜에서 나온 시대착오적인 언어를 정정(訂正)했으면 좋겠다.

 

상뻬 할아버지, 정정(亭亭/訂正)하세요!

 

 

 

 

 

[1] ‘짭잘하게’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짭짤하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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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사람들 중에서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외국의 옛) 철학자도 있어서 놀랐던 적이 있지요. 그 시대 문화의 영향 탓일까요? 어째서 글은 훌륭하게 쓰면서 여성 비하를 하는 (우리나라) 작가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미투 운동을 보면서, 인간은 알 수가 없도다, 그랬네요.

cyrus 2018-03-02 08:01   좋아요 1 | URL
시대가 변하면 인물, 문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집니다. 이제는 여성 차별, 여성 비하와 연관된 발언 및 행위들에 문제 삼아야 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