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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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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 읽기’ 에 도전하다 

 

나는 문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 주로 세계문학을 읽는다.
가끔 한국문학도 읽지만 지금까지 도서관 대출 도서들을 기억해 본 결과
세계문학이 압도적으로 많이 빌리고 읽었던 거 같다.
그리고 집에 소장되어 있는 문학 도서를 살펴보면
세계문학은 초등학생 때 읽었던 아동용 문학전집과
중학생 때 샀던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과 모파상 단편선,
(지금도 생각하면 이 책을 사서 읽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 모으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과
파트리크 쥐스킨트, 움베르토 에코.....
소설 책 대부분 외국 작가 쪽이다.
유독 세계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한 번도 책표지에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작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는..... 예전부터 사실 읽고 싶지도 않았고 일부러 읽지 않으려고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려울 거 같아서.....
그리고 소설이 아니라 희극 형식이다. 연극 공연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과연 극 작품을 읽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

그러던 중에, 몇 달 전에 TV 홈쇼핑 광고를 통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을 구입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 속에서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던 중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몇 권 있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셰익스피어에 도전하기로 했다.
도전 첫 작품은 “햄릿”.
집에 소장한 책인만큼 일단은 부담 없이 천천히 읽어나갔다. 
  

 

 <햄릿> 속에는 ‘햄릿’ 만 있다?

 

극 중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들과
자신의 생각들을 어필하게 하는 동작까지 하나 하나 빠짐없이 읽어나갔다.
생각보다 극 작품 읽기도 소설과 비슷하였다.
읽다보면 평소 들어봤던 유명한 구절도 있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 라든가
햄릿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유명 대사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는냐, 그것이 문제로다“ 로만 알고 있었던
구절들이 보였다. (이 책에서는 ‘있느냐 없느냐’ 로 번역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대부분 인물들 간의 갈등에 관련된 스토리라고 하던데
역시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부터 시작해서
햄릿의 삼촌이자 양 아버지인 클로디어스, 어머니 거트루트,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오필리아 등 주요 인물들은 하나씩 갈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햄릿이 겪고 있는 갈등은 그야말로 ‘최악’ 이다.
자신의 아버지는 삼촌한테 독사당하여 아버지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마당에
어머니는 삼촌과 결혼하게 된다.
그 와중에 친 아버지의 유령을 보게 된 이후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심지어 어머니까지 빼앗아 가버리는 것에 대해서
클로디어스를 경멸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까지 위험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좋아하면서도 삼촌과 결혼한 거르투트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도 하고
오필리아와 대화하는 도중 화를 내다가 갑자기 기분이 풀어지는  

약간의 조울증도 보여진다.
햄릿, 이 친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유부단한 사람을 햄릿형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를 읽는지,
무엇보다도 정신이 불안정한 어느 덴마크 왕자의 비극적 이야기에  

독자들이 열광하는지 알 거 같았다.
하지만 햄릿이 처한 갈등을 중심으로 이 비극을 읽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안 그래도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은 그를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 ‘햄릿’ 의 비극적 갈등과 최후로 치부하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구성 의도를  

주인공인 덴마크 왕자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에는 ‘햄릿’ 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햄릿만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햄릿 주위의 인물들도 말 못하는 고민으로 괴로워한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햄릿뿐만 아니라
각자 처해진 갈등으로 인해 반응하는 다른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들도 흥미로웠다. 
 

 

 <햄릿>의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 :
 햄릿과 거트루트 중심으로 분석한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위험한 곳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우리도 불안감에 시달린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현실적 불안, 신경증적 불안, 도덕적 불안’ 으로 분류했다. 
 

가장 기본적인 현실적 불안자신을 위협하는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면 경험하게 되는데,
클로디어스는 자신의 친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등장으로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현실적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머지 두 가지 불안은 앞에서 언급했던 현실적 불안에서 파생된 것이다.
신경증적 불안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을 때 올 수 있는 위험을
그러한 행동을 하기 전에 미리 경험하는 불안이다.
햄릿이 왕비 거트루트와의 대화 도중에 휘장 뒤에 숨어있는
폴로니어스를 삼촌인줄 알고 죽이게 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이고 만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는 햄릿 때문에 미쳐버리고 만다.
비록 작품 속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미쳐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과연 자신이 삼촌을 죽이면 괜히 죄 없는 어머니까지 미쳐버릴지 않을지
신경증적 불안감을 한 번쯤은 가졌을지 않았을까?

도덕적 불안자신의 욕구나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
자신의 도덕 기준에 맞지 않을 때 경험하는 불안이다.
쉽게 말하면, 양심이라는 도덕 기준에 의해 생기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불안이다.
비록 삼촌이지만 어머니와 결혼이 성립됨으로써 아버지이며 한 나라의 왕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면 패륜아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고  

주위의 신하들의 반응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햄릿은 삼촌을 증오하지만 그와 결혼한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어
도덕 기준 때문에 삼촌을 죽이고 싶은데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도덕적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불안은 어떤 종류이든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으며
불안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현실을 파악하는 자아의 기능이 무너질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없애려 할 것이다.
햄릿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가지 불안감은 햄릿의 자아 기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1막에서 아버지의 유령을 보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겨를 없이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피해 망상적인 투사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극 후반부로 갈수록 판단력이 저하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햄릿 이외에도 그의 어머니인 거르루트에도 흥미로운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
거트루트는 자신의 재혼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아들 햄릿에게
‘곱고 애정 어린 말’ (제1막 제2장 121행)을 언급하면서
과거에 선왕이 살아있을 때처럼 지내길 바라면서 햄릿을 설득한다.
하지만 거트루트의 설득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일뿐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자신이 가진 나쁜 감정을  

완전히 반대의 감정으로 표출하는 경우를  ‘반동 형성’ 이라고 한다.
거트루트가 친자식인 햄릿을 싫어한다고 말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은 있지만
양 아버지가 싫다고 자기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면  

그것을 좋아하는 엄마가 있을까?
그런 자식에게 무조건 강압적으로 설득하면 무용지물이다.
아이를 잘 타이르려면 좋은 감정을 내세우면 긍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
결국 그녀는 남편 동생과의 결혼이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유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왕비’ 라는 자신의 권력도 상실하기 때문이다.
선왕이 죽으면 그 동생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그녀는  

권력 유지를 위해 결혼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가 햄릿에게 설득하기 위해 내세웠던 권유 뒤에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야심가의 어두운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햄릿 읽기의 첫 경험을 기억하면서

 

내가 감히 불멸의 고전에 대해 개인적이고 억지스러운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쓴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
(들녘, 2008)을 읽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얇은 분량이지만, 저자는 <햄릿>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을 펼친다.
저자는 햄릿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새로운 경험들을
완전하지 않지만 자신의 학문적 일대기를 빛나게 해줄 수 있는 

‘문화적 기념비’로 남기고 싶어 했다.
나도 기념비 정도는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 셰익스피어 도전 첫 관문으로 <햄릿>을 선택하였으며
햄릿 읽기의 첫 경험을 했기에, 나의 독서 일대기에 좋은 경험으로 남기는 차원으로
나만의 해석을 여기 이 리뷰에 기록을 한 것이다.

<햄릿>은 단순히 보면 400여 년 전에 쓰여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햄릿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 어디선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가

‘험한 세상에서 고통 속에 숨을 쉬며’(제5막 제2장 356~357행)
전하는 햄릿의 사연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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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1001-913] 책 읽어주는 남자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한다.

카오스 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예측하기가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 용어를 처음 알기 전,
그러니깐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아이였을 때이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단순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작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착한 일만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착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학교라는 어린이의 사회에 내딛을 때에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세상에 먼저 몸을 담가본 어른들은
아무도 세상의 수심(水深)을 알려준 적도 없었고, 어린 나는 거대한 세상을 너무 얕봤다.

김기림의 시에 나오는 흰 나비처럼 말이다.  

바다에 내려갔던 나비는 날개가 젖은 상태에 지쳐서 돌아오듯이,
어른들의 사회에 무심코 들어간 나는  

끝이 없는 깊이감에 빠져 헤매다가 후회 하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하고 만만하게 아니라는 것을.
또 내가 원하는 삶이란 그리 쉽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타인들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상충되어
예측 불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고 그것이 인생을 좌우하고 있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을 주는 여자  

 

이 책에 나오는 두 남녀 주인공도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으나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듯 애정 소설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벗어날 수 없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예사롭지가 않다. 
소설 속 남자 미하엘은 15세 소년이고, 여자 주인공 한나는  

미하엘보다 21살 위인 36살이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면 그녀는 보답으로 샤워를 해주고
서로 뜨거운 육체적 관계를 맺고야 만다.
그리고 열정적인 쾌락의 시간이 끝나면 연인은 잠깐 같이 누워 있는다.
그러고는 한나는 아무 일 없다듯 다시 일상적인 생활을 한다.
이렇듯 한나가 미하엘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홀연히 사라질 때까지
짧고 길었던 시간동안 연인은 그렇게 지냈다.
어린 미하엘은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 그녀와 만남은 시간 속에 묻어가기로 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미하엘은 어엿한 법대생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한나에 대한 추억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미하엘은
우연히도 법정에서 그녀를 만난다.
8년의 세월은 그녀를 예전보다 늙어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늙게 만들었으며 왜 미하엘의 곁을 떠나야만 했었는가?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다 

 

그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와 문맹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치명적인 수치심이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항상 불안케하는 원인이었으며   
치유하기 위해서는 미하엘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커다란 원인은 전쟁이었다.
과거에 나치 친위대의 여성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친위대에 잡힌 유태인 여자가 읽어주는 글을 통해  

문맹을 벗어나고 싶었고 두 여자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하지만 정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그녀는  

그 여자를 포함한 유태인들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다.
전쟁이라는 잔인한 운명이 그녀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래서 소년 미하엘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 때의 과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이하고 강렬했던 미하엘과의 만남부터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녀가 정작 갈망했던 사랑은 책을 읽는 나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사랑이 있는데
‘에로스(Eros)’‘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가 있다.
과연 인간은 살면서 에로스와 플라토닉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이상적인 사랑은 오래 갈 수 있을까? 
 

한나는 비록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지만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그를 통하여 정신적인 감정 교류,  

플라토닉 러브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에로스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나의 사랑’ 이 투영된 에로스를 보는 독자의 관점이다.
우리는 에로스를 성 본능에 충실한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편향된 인식을 가지기 쉽다.
‘에로스=Sex' 라고 만든 사람은 프로이트일뿐
진정한 에로스는 시간을 거슬러 고대 철학자 플라톤으로 기원을 삼고 있다.
에로스를 보다 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불완전한 자신을 자각하고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나아가려는 정신이다.

 

한나는 남성인 미하엘과의 섹스를 통해
사랑을 하고 있는 여성 ‘한나’ 로 재탄생되길 바랬던 것이다.
비록 오래가지 못하지만 한나는 미하엘을 통해
여성이 누리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미하엘 앞에서는 단순히 성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여자이길 보다는

사랑을 하고 있는 완전한 여자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은 현실에서는 따라주지는 못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사춘기 소년 미하엘은
책을 읽어주면 육체적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가까우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자로만 볼 뿐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사랑이 아니었음을 느낀 한나는 미하헬 곁을 떠나게 되고
그때부터 이 둘의 사랑은 어긋나게 되고  

미하엘은 평생동안 한나와의 추억을 오류가 점철된 사랑으로 간직하고 만다.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한나의 자살 이후 미하헬은 그녀의 유품을 통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게 된다.
오히려 한나의 자살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사랑은 가능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랑을 보면 볼수록
한국의 비극적 커플 중의 하나인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난다. 
나무꾼은 끝까지 자신 곁에 남고 싶어하지만
정작 선녀는 자신의 근원지이지만 
이상적인 곳이기도 한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비록 한나-미하엘 커플과의 상황은 다르지만
남성은 현실에 순응하려고 하지만
여성은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지향한다.
이렇듯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랑이 달라
이별을 선택해야하는, 헤어지기 싫어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는 점이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꼭 이상적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설은 작가의 눈을 통해 창조되는 현실일 뿐이며
참된 사랑에 대해 에로스든 플라토닉이든 추상적인 기준들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서로 차이점을 존중하고 이해하면
좋아하는 감정들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독일 남녀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특수적인 환경적 요인이 컸다.
전쟁으로 인해 한나는 나치 친위대 일원이 될 수 밖에 없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미하엘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우게 된다.
그런데 한나의 과거 행적이 사랑을 오래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나비의 날개짓이 
이들의 사랑을 비극의 토네이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한나의 죽음 후에 미하엘이 그녀의 진실된 사랑을 
뒤늦게 알게 된 점에 대해 안타깝기보다는
과거에 두 사람이 한창 사랑했던 추억의 시간들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다.
만약 한나가 조금 더 마음의 문을 열고 미하엘에게 다가왔더라면
그리고 미하엘이 조금 더 성숙한 마음으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과연 이들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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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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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솝 우화와 동물 농장 

 

어렸을 때, 집의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아동문학전집에는 ‘이솝 우화’가 있었다.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순진한 아이는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를 보면서

착한 행동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쁜 행동으로 살 것인가에 따라서
평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는 다 읽은 책을 덮고나서 다짐한다.

"베짱이처럼 살지 않겠다고....."

이솝 우화가 어린 나에게 권선징악이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솝 우화’는 책장 구석 한 켠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집의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에는 ‘동물 농장’이 있었다.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단 맛, 쓴 맛 본 남자는
책장 구석에 꽂혀 있는 ‘이솝 우화’에 눈길을 준다.
이 책도 단순히 현대판 ‘이솝 우화’일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하지만 우화가 주는 특유의 유머와 페이소스를 한번 더 느끼고 싶은 맘에 읽었다.
읽고 난 후 책을 덮고 나서 남자는 생각한다.  

 

"동물농장이라는 곳이 진짜로 존재하는 곳이구나....."  

  

 

 50년 후, 동물 농장은...  

 

이 책의 번역자 도정일 교수는 작품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 p 151, ‘작품 해설 [동물농장]의 세계’ 중에서 -

 
   


오웰이 이 책을 집필하고 있던 1940년대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정적 트로츠키를 축출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스탈린은 나폴레옹, 트로츠키는 스노볼  

그리고 나머지 동물들은 당시 소련 국민을 뜻한다. 그리그 그들의 에피소드는  

스탈린 체제의 사회상을 풍자한 것이다.
냉전의 벽과 철옹성 같았던 소련은 무너지고 많은 세월이 지났다.

과연 50여 년 전의 시대상을 풍자하고 있는 이 책은 아직까지도 유효한가?

그렇다. 동물농장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동물농장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간 세태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동물들은 농장주 존즈 밑에서 안위된 생활을 누리지 못한 채 죽어라  

일만 하고 고생한다.
이는 곧 우리 사회의 ‘워킹푸어(working poor)’, 즉 ‘근로 빈곤층’이다.
그 동물들 중에 나폴레옹이라는 돼지는 농장의 생활 개선을 위해 동물 반란에 참가하고
그 공로로 농장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된다. 농장에서의 돼지가 동물들 사이에서  

계급 지배력이 높은 점을 이용하여 동물들을 선동하고 적인 스노볼을 쫓아냄과  

동시에 자신이 다른 동물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웃 농장주인 필킹턴과 화친을 맺게 되는데 결국 나폴레옹은 자본가와  

협력하여 특권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 즉 ‘노동 귀족’이다.  


소설은 동물들이 필킹턴과 나폴레옹의 만남을 그냥 창 밖에 지켜보고 있는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작가는 잘못된 권력 부패 사회를 비난함과 동시에
이를 그냥 의도적으로 묵시하고 있는 정치 앞에서 무기력한 대중을 비꼬고 있다.
벤자민이라는 당나귀는 여기에 나오는 동물들에 비해 등장 비중은 크게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 당나귀는 동물 반란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전히 농장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정치에 무관심을 가지며 정치를  

참여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책무를 기피하는 정치적 모라토리엄 인간인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화는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교훈을 주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단순히 텍스트를 읽다보면 독자는 사회 풍자에 대한  

페이소스만 얻을 뿐 우화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문학의 현실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화는 특유의 아우라를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우화인 [동물농장]을 읽으면서 소설 속의 농장이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 책은 우화가 주는 재미와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아니, 지금도 동물농장은 문을 닫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다. 소설은 점점 부패하고 망가져가는 농장의 모습을 끝으로  

마무리 짓는다.  만약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면 비참한 동물들의 생활이 계속  

이어져나가거나 동물들 중에 새로운 제3자가 등장하면서 나폴레옹 체제를 무너뜨려  

새로운 지배 사회가 등장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 된다’고 토인비는 말했다. 동물농장의 역사도 그렇게 될 것이다.

 아마도 동물농장은 영원히 문을 닫지 못할 거 같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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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열린책들 에서 나온 버전으로 동물농장 을 봤는데 무척 몰입해서 흥미진진했던게

기억나네요.

도정일 이 번역한 민음사 판도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0-11-06 15:54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 버전이랑 민음사 버전이랑 번역에 약간 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재미있으면서도 독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정말 훌륭한 작품인거 같습니다.

2016-11-0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4 14:21   좋아요 0 | URL
부끄럽네요. 옛날에 썼던 글을 보면, 앨범에 있는 아기 돌 사진을 보는 것 같아요. ㅎㅎㅎ

이때 서재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라서 글에 서툰 표현이 많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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