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의 원리
I. A. 리처즈 지음, 이선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시를 썼다고 치자.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시골의 정경을 소재로 시를 쓴다. 완성된 시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시를 읽고 잊고 있었던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시에 묘사된 고향의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쓴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가 시골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시에 진술한 시골 정경은 도시 밖에 나가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경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아무리 좋아도 시인의 경험과 거리가 먼 시적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비평가 I. A. 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라면 내 시에 후한 점수를 줬을 것이다. 리처즈는 독자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 비평가다. 그는 시를 ‘정서적 언어’로 만들어진 텍스트로 봤다. 독자는 시의 정서적 언어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독자는 시적 언어로 진술된 시인의 개인적 경험에 공감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경험이 사실인지 허위인지 판단하는 건 중요치 않다. 리처즈는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효과를 기준으로 하여 그 작품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처즈는 1920년대에 영국의 신비평(new criticism)을 제시한 인물이다. 1924년에 발표한 《문학비평의 원리(Th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는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비평 수준의 위치로 한 단계 끌어올린 책이다. 리처즈가 제시한 비평가의 역할은 문학작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문학작품의 가치란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긍정적 정서를 뜻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공감하는 독자의 반응 등이 ‘정서적 언어’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이다. 이러한 효과를 유도하는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전달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리처즈가 《문학비평의 원리》 23장의 제사(題詞)로 인용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말은 그의 비평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말이다.

 

 

 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미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다.

 

(《문학비평의 원리》, 224쪽)

 

 

흄의 말속에 있는 단어인 ‘사물’을 ‘문학작품’으로 바꿔서 설명한다면,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가치는 작품 텍스트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작품 텍스트를 읽으면서 반응하는 독자의 마음속에 있다.

 

《문학비평의 원리》에 부록 두 편이 있는데, 그 중 한 편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서 리처즈는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이 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들은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독자가 『황무지』를 신비주의 사상과 연관 지어서 읽는다거나 분석한다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리처즈는 엘리엇이 『황무지』를 쓰면서 사용한 인유(引喩)를 주목한다. 인유는 유명한 고전의 내용이나 널리 알려진 어떤 다른 개념을 끌어다가 비유하는 표현 방법이다. 리처즈에 따르면 『황무지』에 나오는 상징들은 단순히 초월적인 개념 혹은 대상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 경험’을 뜻하는 인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지식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인유를 사용해 드러나고자 하는 『황무지』의 의미는 텍스트 자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시를 분석하는 리처즈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리처즈는 시를 ‘감정의 표현’, ‘정서적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봤지만, 반대로 엘리엇은 시를 ‘지식의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리처즈의 신비평주의를 본다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정서적 언어’로 진술된 시를 무조건 가치 있는 작품으로 보는 시선,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문학작품의 분석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은 1920년대 이후로 나온 여러 가지 비평주의들과 비교하면 낡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치’라는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려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또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리처즈가 제시한 ‘훌륭한 비평가의 자질’ 중 하나인 ‘가치를 건전하게 판단하는 일’은 한계가 있는 작업이다.

 

언어로 진술된 작가의 경험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과정을 간과하는 리처즈의 비평 관점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는 몇 년 전에 불거진 ‘문단 내 미투 운동’ 사례와 관련 지어 설명할 수 있다. 남성 작가가 여권 신장을 강조하는 시나 소설을 썼다고 치자. 어떤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고 나서 작가가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에 가려진 여성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한 페미니스트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 남성 작가가 평소에 여성을 차별했다는 사실, 여성 문인을 성추행한 이력이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리처즈의 비평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 작가의 모습과 그가 작품 속 언어를 통해 진술한 페미니즘 관점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작품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에 중점을 둬서 볼 것이다. 이러면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철저히 분리한 채 문학작품을 평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작가의 삶과 문학작품을 분리해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게 맞는가? 도덕적인 문제로 비난받은 작가가 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글이 독자에게 좋은 가치관을 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가의 경험과 무관한 글에 감동하는 독자의 반응은 결국 작가의 허위에 속아 넘어간 ‘가짜 감동’에 불과하다. 진실하지 않은 글을 쓴 작가는 독자를 기만한 것이다. 이런 작가의 글이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문학적으로 가치 있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비평 관점을 떠나서 자신과 독자들을 속이는 작가의 글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옹호할 수 없다. 독자는 자신의 삶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면서 재미와 감동을 끌어올리는 ‘이야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한다. 그러나 거짓으로 감동을 유발하면서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기꾼’의 글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 Trivia

 

* 92쪽 [역주]

  미국의 물리학자인 A. A. 마이켈슨과 E. W. 모울리는 공동의 실험으로 그 당시까지 믿어 왔던 에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낳는 동기를 만들었다.

 

→ 역자는 옛 외국어 표기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몰리(Morley)를 ‘모울리’로, 아인슈타인(Einstein)을 ‘아인쉬타인’으로 썼다. 참고로 번역본이 출간된 연도는 2005년이다. 아마도 역자는 ‘에테르(ether: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상의 물질)라는 단어 자체를 몰라서 그냥 단순하게 ‘에텔’로 표기했던 것 같다.

 

 

 

* 260쪽 [역주]

  희랍 신화의 인유. 제우스는 백조의 모습으로 레다에게 접근하여 그 여성에게서 헬레네와 포류 듀케스를 낳았다.

 

→ 포유류 듀케스? 이 해괴한 이름을 정확하게 쓰면 ‘폴리데우케스(Polydeuces)이다.

 

 

 

* 287쪽

괴스타 베를링 이야기

 

→ 스웨덴의 소설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작품명이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Gösta Berlings saga)로 고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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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04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치 있는 문학이란 정말 주관적인
잣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관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나한테 재밌는 책이 저
는 좋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cyrus 2019-03-04 17:2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결국 애서가가 즐겨 읽는 책은 본인이 재미있다고 느껴지거나 관심 있는 책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책’을 절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책’과 상대방이 생각하는(원하는) ‘재미있는 책’은 아주 다르거든요.. ^^

레삭매냐 2019-03-04 17:28   좋아요 0 | URL
가끔 블로그에 책 추천해 달라는
덧글이 달리는 데 정말 난감합니다.

보는 관점이 그리고 좋아하는 킬링
포인트가 다 다른데, 어찌 추천을
해달라고 하시는지...

거의 100% 욕 먹을 확률이 높습니다.
캐공감하는 바입니다.

cyrus 2019-03-04 17:34   좋아요 0 | URL
난감한 질문이 들어오면, 저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이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해요.

상대방이 제게 특정 주제와 관련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답변해줄 수 있어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책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

페크pek0501 2019-03-04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경우, 난감하군요...

cyrus 2019-03-05 12:20   좋아요 0 | URL
삶과 문학관이 일치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 망설이게 됩니다. ‘작가는 비난할 수 있어도 그 작가가 쓴 작품까지 비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
 

 

 

목사의 딸들(Daughters of the Vicar)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가 쓴 초기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초고였을 때 제목은 두 결혼(Two Marriages)이었다. 1911년에 써졌다가 1914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패니와 애니(창비, 2013)

* [구판 절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목사의 딸들(창비, 2001)

 

    

 

초고 제목은 소설의 핵심 인물인 어니스트 린들리 목사의 두 딸 메리루이자의 결혼을 의미한다. 린들리는 자신이 상류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탄광촌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는 가난한 목사로 살아간다. 메리는 기울어진 가세를 살리기 위해 매시라는 젊은 목사와 결혼한다. 매시는 성실하게 목회 활동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열두 살 소년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체격이 상당히 왜소하다. 매시는 자식을 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이가 얼른 태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메리의 삶은 가정에서 남편을 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내/어머니 역할을 하는 게 전부다. 루이자는 그런 언니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루이자는 메리와 다르게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다. 그녀는 언니의 결혼에 손톱만큼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자신은 계급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다짐한다. 루이자가 사랑하는 알프레드 듀랜트는 하류 계급에 속한 광부. 막둥이로 자란 알프레드는 어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았지만, 광부가 되려고 하자 어머니와의 관계가 냉랭해진다. 어머니는 신사(남자)답지 못한 알프레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남성성을 찾기 위해 해군에 복무하지만, 해군 특유의 엄격한 규율과 권력적 상하 관계에 적응하지 못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 알프레드는 자신이 남자답지못한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그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수록 자존감은 계속 떨어지고, 여성을 멀리하게 된다.

 

어느 날 알프레드는 부사관과 함께 술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여성 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구애하는 이탈리아 남성을 보게 된다. 알프레드는 아주 쉽게 여성에게 다가가는 이탈리아 남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성에게 말조차 걸어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개인과 무관한 본능적인 힘에 끌려 몸이 여자에게 다가가는, 우쭐거리며 편하게 사랑하는 이딸리아인들을 기묘한 부러움으로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남자였고 자신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마치 문둥이 같다고 느끼며 앉아 있었다(He sat feeling short, feeling like a leper). 그리고 그는 자신과 어떤 여자와의 성적인 교접 장면을 상상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런 몽상에 몰두한 채 걸어 다녔다.

 

 

(목사의 딸들, 《패니와 애니, 101)

 

 

알프레드는 자신의 소심한 남성성을 문둥이(leper)’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프레드의 자기비하적인 심리 상태를 문둥이로 비유한 로렌스의 표현, 그리고 ‘leper’문둥이로 번역한 백낙청의 단어 선택(차별하려는 의도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으로서의 한센인(나환자)을 비하하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백영경, 이유림, 나영, 나영정 외,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후마니타스, 2018)

 

* 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오월의봄, 2018)

 

    

 

로렌스는 여자와 섹스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동정(童貞) 알프레드를 나환자의 삶과 일치시킨다. 이때 로렌스는 한센인을 성적 권리와 무관한 비정상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로렌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와 장애인의 삶을 잘 모르는 비장애인의 문제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가는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을 정상적인 몸의 범주에 벗어난 존재로 보기 시작했고, 그들이 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출산과 관련된 재생산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했다. 특히 국가가 만든 수용시설은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1].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그들의 실질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들을 정의하게 만드는 단편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인식에 익숙한 비장애인은 수용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은 애당초 없는 것[2]으로 규정한다.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심각한 편견 중 하나는 장애인은 성적 욕구와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무성적으로 잘못 정의되기 쉽고,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무시당한다.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장애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많은 장애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거나, 대화해보거나, 실행해보거나, 실패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나영정, 어쩌면 이상한 몸, 79)

 

 

문둥이는 한센인 후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문둥이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란 말과 같은 의미로 쓰였고, 사회에 격리된 한센인들은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 목사의 딸들이 수록된 로렌스의 단편 선집이 처음 나온 해는 1991년이다. 그때는 문둥이가 한센인을 가리키는 표준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구시대적인 악어(惡語)를 쓴 백낙청의 번역도 문제지만, 이를 교정하지 않은 출판사의 편집자도 문제.

 

혹자는 필자의 지적에 책 읽는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사회적 약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거부하게 만들고, 배제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예민해져야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적 사회구조를 인지하는 예민함은 부단한 성찰과 자기반성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반응이다. 예민함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가 발전하는 데 이로운 건강한 비판이다. 세상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자극을 주어 한층 더 생각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향상한다. 나는 상대방의 진지한 예민함을 스트레스에 의한 증상으로 여기면서 걱정하는 그들이 더 걱정된다. 그들은 고민보다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회 변혁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예민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원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변혁의 목소리는 예민한 성찰이 함께 하지 않으면 커질 수 없다.

 

 

 

[1] 조미경, 수용시설에 감금된 성과 재생산 권리, 배틀그라운드, 후마니타스, 2018, 193~194.

      

[2] 같은 책, 각주,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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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의 책들, 제목만 외우고 있는 책중에 하나가 <목사의 딸들>인데, 이것까지 읽어셨군요! 괜히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cyrus 2019-02-26 23:55   좋아요 1 | URL
구판 <목사의 딸들>은 단편 네 편이 수록되었고요, <패니와 애니>는 <목사의 딸들> 수록작 네 편에 단편 세 편이 추가된 책입니다. 저는 이 책으로 로렌스의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요, 로렌스가 여성을 ‘결혼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한 것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읽을 때마다 찝찝하게 느껴지는 장면 몇 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렌스의 소설을 아예 읽지 말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소설에 대한 해석도 그렇고 그 책을 읽는 행위 역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니까요. 원래 로렌스의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품 하나씩하나씩 읽으면서 장점도 찾고 싶습니다. 얼른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고 싶어요. ^^

카알벨루치 2019-02-27 00:01   좋아요 1 | URL
제가 <아들과 연인>을 가지고 논문을 썼기 때문에 로렌스를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시대의 분위기나 트렌드가 지금 나타난다면 난리나겠죠 로렌스는 남근숭배주의자로도 볼 수 있으니깐요
제가 로렌스의 매력에 꽂힌 것은 그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비평이었다는 역설 ㅎㅎㅎㅎ

cyrus 2019-02-27 00:15   좋아요 2 | URL
제가 꾸준히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렌스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요. 저는 케이트 밀렛이 쓴 <성 정치학>을 통해 로렌스를 알기 시작했는데, 부정적 평이 많았어요. 페미니즘 독서 모임 중에 로렌스의 소설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의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제대로 비판을 하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하니까요. 단편적인 인용이나 설명을 근거로 로렌스의 작품을 단정하면 작품의 진면목을 못 볼 수 있어요. 카알벨루치님은 로렌스의 장편소설들을 읽어보셨으니 로렌스를 주제로 한 제 글을 보신다면 의견을 주셔도 좋습니다. 제 견해에 반박하셔도 좋습니다. 변증법적(?)으로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로렌스의 문학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

2019-02-26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7 00:16   좋아요 1 | URL
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나병’, ‘문둥병’이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저는 2010~2011년에 알라딘 블로그에 한하운 시인에 대한 글을 썼어요. 그 글에 ‘문둥이’라는 표현을 썼을 거예요. ‘한센병’, ‘한센인’의 ‘한센’은 나병을 일으키는 균을 처음으로 증명한 학자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나병’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센이 누군지, 한센병이 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

레삭매냐 2019-02-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스 샘의 책은 한 개도 읽어 본 게 없네요.

언제고 읽고 말리라 !

<채털레이 부인>부터 읽어야 하나요.

cyrus 2019-03-04 13:48   좋아요 0 | URL
저는 발표 연도순으로 읽으려고 해요. <채털리 부인>은 로렌스 후기 작품에 속하고요, 초기 장편소설은 <아들과 연인>입니다. ^^

2019-02-27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04 13:59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페미니즘 독서 모임의 주제가 ‘인정과 재분배’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잘 살려면 그들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재분배 정책이 나오지 못합니다. 일단 사회적 약자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인정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정 투쟁을 하지 않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들에 향한 ‘무시’와 ‘모욕’은 이어질 것입니다. 인정이 먼저, 재분배가 먼저냐,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정의론을 논할 때 반드시 논의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차별과 혐오가 심각해지는 현재 상황을 보면서 ‘인정 투쟁’이 많아져야 한다는 걸 느껴졌어요.

페크pek0501 2019-03-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말이든 글이든 언어에 예민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편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어느 쪽에선 상처를 받게 되지요. 편한 것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저 역시 잊으면 안 되는 점을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3-04 14:03   좋아요 1 | URL
저도 종종 글을 쓰다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표현을 쓸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뭔가 생각나면 바로 글을 썼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경솔한 표현이 나올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난 뒤에 글을 씁니다. ^^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catcher’를 ‘파수꾼’으로 해석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일단 익숙한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이 소설의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The catcher in the Rye’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 「호밀밭을 지나오다가(Comin Thro the Rye, Coming Through The Rye)에서 따온 제목이다.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The Catcher in the Rye》 (Little Brown & Company, 199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1998)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어갈 때 한 아이가 흥얼거린 콧노래를 듣는다. 그 노래가 바로 번스의 「Coming Through The Rye」에 곡을 붙인 민요다. 그런데 홀든은 그 노래를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If a body catch a body coming through the rye)이라고 착각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확고히 다진다. 나중에 그의 여동생 피비(Phoebe)는 그 노래가 「Coming Through The Rye」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절판] 로버트 번스 《올드 랭 사인》 (솔출판사, 1995)

* [절판] 김천봉 엮음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이담북스, 2011)

* [e-Book] 로버트 번스, 김천봉 엮음 《다정한 입맞춤: 로버트 번스 시선》 (글과글사이, 2017)

 

 

 

 

로버트 번스는 오늘날에 민요로 더 알려진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붉고, 붉은 장미(A Red, Red Rose)를 쓴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이다. 번스가 누군지 몰라도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드 랭 사인」은 연말 또는 졸업식에 자주 불리는 노래다. ‘auld lang syne’은 ‘옛날’이라는 뜻을 가진 스코트어(Scots: 스코틀랜드 표준 영어)다. 현재의 ‘애국가’가 나오기 전에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 그리고 독립군 및 임시정부 인사들은 민요 버전의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춘 애국가를 불렀다.

 

홀든이 우연히 들은 「Coming Through The Rye」는 「올드 랭 사인」에 비하면 자주 불리는 노래는 아니지만, 사실 「Coming Through The Rye」도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이다. 우리나라에 ‘들놀이’라는 제목의 동요로 번안되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 동요 모음집 카세트테이프에 흘러나오는 ‘들놀이’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도 이 노래를 알려나?

 

 

 

 

 

 

※ 영국의 드라마틱 소프라노(dramatic soprano) 가수 플로런스 이스턴(Florence Easton)이 부른 「Coming Through The Rye」

 

 

 

 

 

 

※ 동요 ‘들놀이’

 

 

 

번스는 스코틀랜드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를 썼으며 전원생활의 평화로운 분위기, 농민들의 애환 등을 담아냈다. 그래서 번스의 시는 투박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 난다. 그의 고향에 박물관이 된 생가가 있을 정도로 번스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번스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분류되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번스의 인지도는 아주 낮다. 시 앤솔러지(anthology)에 가장 많이 수록된 번스의 시는 「붉고 붉은 장미」다. 번스의 시 선집은 1995년에 나온 《올드 랭 사인》(솔출판사)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들과 함께 수록된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이담북스)이다. 두 권 모두 스코티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지만, 절판되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한 번스의 시들은 《다정한 입맞춤》(책과책사이)이라는 새로운 제목이 붙여져 전자책 형태로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절판된 종이책과 전자책 두 권 모두 역자는 같아도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Coming Through The Rye」는 종이책에 없고, 전자책에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출판사의 번스 시 선집에도 「Coming Through The Rye」는 수록되지 않았다. 「Coming Through The Rye」가 번스의 대표 시로 보기 어렵다고 해도 소설 때문에 유명해진 시를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점은 의아스럽다.

 

종이책으로 나온 번스의 시 선집 모두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사실 번스가 시를 쓰면서 사용한 스코트어는 오늘날의 미국과 영국식 영어와 다르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18세기 초반 영국 연방에 합쳐진 후 영어와 스코트어, 그리고 스코틀랜드 방언을 함께 썼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코트어 특유의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영국 표준 영어의 철자(spelling)를 바꿔서 사용했다. 이를테면 영국인들은 ‘하나’를 뜻하는 영어로 ‘one’을 쓰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ane’라고 쓴다. 어쨌든 번스는 스코트어와 스코트랜드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번역가는 번스의 시를 2중(옛 스코트어→영국 표준 영어→한국어)으로 번역해야 하는 번뇌에 시달려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의 역자 해설(119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의 아버지(William Burness, 1721~1784: 1786년까지 번스는 자신의 이름을 ‘Robert Burness’로 표기했다)는 가난한 농부였다.

 

 

시인의 성(姓)은 원래 ‘Burnes’였다. 1786년 이후로 번스는 ‘e’를 뺀 ‘Burns’로 서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는 ‘Burness’로 잘못 적혀 있다. 고친다면 뒤에 있는 ‘s’를 빼야 한다.

 

《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권에 있는 장시 「경건한 윌리의 기도(Holy Willie’s Prayer)」에 누락된 원문의 일부와 그것을 번역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은 이 시의 제사(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와 번스의 해설문이다. 김천봉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내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의 출처는 번스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웹사이트이다.

 

링크: http://www.robertburns.org/works/58.shtml

 

 

 

“And send the godly in a pet to pray.” - Pope.

 

 

* Argument

Holy Willie was a rather oldish bachelor elder, in the parish of Mauchline, and much and justly famed for that polemical chattering, which ends in tippling orthodoxy, and for that spiritualized bawdry which refines to liquorish devotion. In a sessional process with a gentleman in Mauchline - a Mr. Gavin Hamilton - Holy Willie and his priest, Father Auld, after full hearing in the presbytery of Ayr, came off but second best; owing partly to the oratorical powers of Mr. Robert Aiken, Mr. Hamilton’s counsel; but chiefly to Mr. Hamilton’s being one of the most irreproachable and truly respectable characters in the county. On losing the process, the muse overheard him (Holy Willie) at his devotions, as follows:-

 

 

번즈에 의하면, 홀리 윌리는 실제로 윌리엄 피셔(Willie Fisher)라는 모흘린(Mauchline) 마을의 독신 장로로, 그 마을 목사와 합세하여 개빈 해밀턴(Gavin Hamilton, 또는 곤 해밀턴)이라는 선량한 사람을 교회 재판에 고소했다. 그러나 에어(Ayr, Ayrshire: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항구 도시, 번즈가 태어난 지역- 필자 주)의 장로회가 해밀턴을 무죄로 판결하자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번즈는 불만 가득한 상태의 윌리가 혼자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을 엿듣는 형식을 빌려, 자기만 옳고 선택됐다고 믿는 칼뱅교도의 오만한 독선과 편협성과 이기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솔출판사, 128쪽,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 형식으로 요약한 내용)

 

 

솔출판사 판본의 「Holy Willie’s Prayer」 역시 번역이 좋다고 볼 수 없다. 번즈의 해설문을 각주(脚註) 형식으로 언급했지만, 제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 [e-Book]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5)

* [품절] 알렉산더 포프 《포프 시선》 (지만지, 2010)

 

 

 

제사의 출처는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1714년에 발표한 풍자적인 장시 「머리 타래의 강탈(The Rape of the Lock)」 4곡(曲, canto)의 64행 구절이다. 이 시는 흔히 ‘머리카락을 훔친 도둑’으로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The Rape of the Lock」은 총 5곡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포프 시선》(지만지)은 포프의 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본이지만, 「The Rape of the Lock」은 제1곡와 제2곡만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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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잉글리시 튜터가
<호밀 밭의 파수꾼>을 자신의 인생책
으로 꼽던 기억이 나네요 :>

cyrus 2019-03-04 14:04   좋아요 0 | URL
지난주 목요일에 <호밀밭의 파수꾼> 독서 모임이 있었는데, 저랑 다른 한 분 빼고는 이 책을 좋게 봤어요. ^^;;
 

 

 

이름만 들으면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가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쓴 작품들이 뭔지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 읽은 건 하나도 없었다. 올해 1월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그 후》였다. 소세키의 중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소세키의 초기 문학 중 걸작으로 알려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봤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진 못했다. 언젠가 다시 시도해보려고 한다.

 

 

 

 

 

 

 

 

 

 

 

 

 

 

 

 

 

 

 

 

* 나쓰메 소세키, 노재명 옮김 《그 후》 (현암사, 2014)

* 나쓰메 소세키, 윤상인 옮김 《그 후》 (민음사, 2003)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고등유민은 ‘인텔리 백수’를 뜻하는 단어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부유한 실업가이다. 그는 가족에게 용돈을 받아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간다. 다이스케가 살았던 일본 메이지(明治) 말기는 출세주의가 오늘날 못지않게 치열했던 시대였다. 에도(江戸) 시대의 봉건 가신들은 메이지 시대의 귀족이 되었고, 러일전쟁(1904~1905년)으로 큰 부를 쌓아 올린 신흥 부르주아들은 혼인을 통해 상류사회에 들어가고자 했다. 유산계급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곧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금전적 기반을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던 다이스케 역시 그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대학 동창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두 사람은 가족에게, 사회에게 버림받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사이에서 다이스케는 번민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생활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후》, 윤상인 옮김, 256쪽)

 

 

※ 글꼴을 굵게 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자신에게 떠안겨진 무겁고 벅찬 현실 때문에 고뇌하는 다이스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문장이다. 작품 해설(민음사 판본)에 따르면 ‘자연’은 소설의 핵심 주제이면서도 다양한 의미가 있는 단어다. ‘자연의 아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인위적인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와 결혼해서 살아가려면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이스케는 예전처럼 한량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제는 미치요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직업을 구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는 ‘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 전에 다이스케, 즉 ‘자연의 아들’이었던 그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 반대한다. 소설의 6장 후반에 노동의 의미를 두고 히라오카와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

 

(《그 후》, 윤상인 옮김, 107쪽)

 

 

 

민음사 판본의 역자는 다이스케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사회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가 쓴 글의 제목이다. 라파르그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위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새물결, 2005)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가들이 ‘신성한 노동’이라는 일종의 교리를 만들어 동물실험을 하듯 민중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라는 이상한 꿈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라파르그는 방직기계 한 대가 1분 동안 작업한 양이 숙련 여공이 100시간동안 일한 정도로 보면서 노동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을 불태울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라파르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구조 아래서 ‘일할 권리’는 ‘착취당할 권리’일 뿐이다. 그는 하루 노동시간을 3시간으로 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고, 개개인에게는 더욱더 많은 휴식이 주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존 러스킨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 (아인북스, 2018)

* 존 러스킨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좁쌀한알, 2018)

* 티머시 힐턴 《라파엘 전파》 (시공사, 2006)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 (예경, 2002)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는 다이스케의 입장이 존 러스킨(John Ruskin)에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러스킨은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지만, 인간적 가치를 금전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를 혐오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산업자본이 노동자를 기계로 전락시키는 참상을 목격한 러스킨은 시각 · 건축예술로 관심을 옮겼다. 그가 예술 분야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파편화된 사회를 인간 정신이 구현되는 곳으로 되돌리려는 열망이었다.

 

국내에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책(현재 ‘생명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에서 러스킨은 노동은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는 단순히 임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창조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러스킨이 생각한 ‘노동을 위한 노동’인 것이고, 이는 다이스케의 입장과 비슷하다. 다이스케가 들려주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전국시대에 일본을 통일한 무장)의 요리사 이야기에서 ‘노동을 위한 노동’에 대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최고의 요리사를 고용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맛보고는 맛이 없다면서 꾸짖는다.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요리사는 평소와 다르게 이류, 삼류 음식을 만든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 음식이 맛있다면서 칭찬한다. 다이스케는 요리 기술을 위해 일하는 요리사가 매우 불성실하고 타락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요리사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류 음식을 만든 거라고 본 것이다. 다이스케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을 선호한다.

 

러스킨이 1851년에 발표한 《라파엘 전파》의 첫 번째 글은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러스킨은 빅토리아 시대 런던 미술계를 점령했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소속 화가들을 옹호하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도 그는 자신의 노동관을 언급한다.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라파엘전파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글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추구해야 할 예술과 노동을 역설한 러스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창의성과 성취욕을 갖춘 노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노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중세에 활동했던 장인들이다. 따라서 러스킨은 노동자가 모두 이런 장인이 될 수 있을 때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정신적 공황이 심해지는 산업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러스킨은 신앙심으로 충만한 중세의 영성과 근대인의 삶을 일체화시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라파엘전파가 추구했던 것은 중세의 미학이다. 러스킨과 라파엘전파 소속 화가들이 생각하는 중세는 때 묻지 않은 소박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이다.

 

 

 

 

 

 

 

 

 

 

 

 

 

 

 

 

 

 

 

 

*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 (현인, 2018)

* 나쓰메 소세키 《런던 소식》 (하늘연못, 2010)

* 도가와 신스케 《나쓰메 소세키 평전》 (AK커뮤니케이션, 2018)

 

 

 

《그 후》를 읽다 보면 다이스케가 ‘일본의 러스킨’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영국에서 2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한 나쓰메 소세키는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에 심취했고, 박물관이 된 칼라일의 집을 세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수필에 가까운『칼라일 박물관』은 소세키가 칼라일의 집을 방문하면서 느낀 소회를 기록한 글이다. 칼라일도 러스킨처럼 자본주의를 비판했는데, 영국 문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소세키가 칼라일과 동시대에 활동한 러스킨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소세키의 초기작인 『환영의 방패』『해로행』[주]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두 작품을 위한 삽화가 나온다면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그림으로 정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좀 더 분석해봐야겠지만 존 러스킨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요긴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 故 노재명 씨가 번역한 하늘연못 번역본에 적힌 '해로행'의 작품명은 ‘북망행’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재명 씨는 '북망행'으로 제목을 바꾼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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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1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1 17:08   좋아요 1 | URL
미래에 자본의 힘이 도시 밖을 넘어 시골에도 미친다면 자급자족하는 공동체 사회도 이상향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02-1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양이...만 읽어봤는데 집에 있는 다른 소세키 작품들(그 후, 마음)도 차차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cyrus 2019-02-12 16:25   좋아요 1 | URL
나쓰메의 장편소설을 다 읽어본 독자들의 평을 보니 장편소설 모두 일독할 가치가 있다고 하네요. ^^

blueyonder 2019-02-12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소개해 주신 여러 권을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9-02-12 16:2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blueyonder님 덕분에 과학 정보를 많이 알아갑니다. ^^
 
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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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매번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다. 어떤 이는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한 성취욕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내 집을 마련해서 예쁜 마누라 혹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Nora)는 우리의 이런 세속적인 물음에 “그래, 네가 원하는 데로 사니까 행복하니?, 행복하게 살고 있는 너는 ‘인형’이니, ‘인간’이니?”라고 다시 질문한다.

 

《인형의 집》은 여권신장운동에 불을 댕긴 사회극이다. 노라 헬메르(Nora Helmer)는 변호사인 남편 토르발 헬메르(Torvald Helmer)와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지난 8년간의 결혼생활을 보낸 ‘아내’이자 ‘어머니’다. 그녀는 중병이 걸린 남편이 이탈리아에 요양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남편의 동료 변호사 닐스 크로그스타드(Nils Krogstad)에게 돈을 빌린다. 그 당시에 여성은 돈을 빌릴 수 있는 경제적 권한이 없었다. 노라 헬메르는 친정아버지의 연대 보증을 받아서 돈을 빌리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친정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져서 자신이 대신 서명하는 위증을 했다. 남편이 총재로 취임할 은행에 몸담고 있었던 크로그스타드는 해임 통고를 받아 실직자가 될 위기에 처했는데 그는 자신과 노라와의 거래를 빌미로 노라 헬메르에게 자신의 해임을 번복시켜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내의 뒷거래와 위증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오직 자신의 출세와 명예에만 집착한다. 이에 노라 헬메르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아내란 인격도 개성도 없는 존재이며 종달새나 같은 한낱 인형에 불과한 것인가? 마침내 노라 헬메르는 인간으로서의 ‘노라’가 되고자 집을 박차고 나간다. 시민사회가 기대했던 ‘예쁘고 상냥하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조건을 완벽히 갖췄던 노라가 자아를 찾기 위해 가정을 버린다는 결말은 당시로써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인형의 집》이 초연된 지 올해로 140주년이 된 지금 자신의 자아를 찾아 집을 떠나는 노라의 결정은 우리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노라를 ‘여권주의자’로 바라보는 해석은 다소 진부하다. 노라는 주체적인 자아를 자각해가는 한 여성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또는 연극 공연을 보면서) 봉건 윤리와 사회적 인습에 순응하여 살아 온 ‘헬메르의 인형 아내’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모하는 모습에서 깨달음과 감동을 얻을 수 있다. 노라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외침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토르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이 옳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책에도 그런 비슷한 말들이 있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인형의 집》 3막 중에서, 164쪽)

 

※ 글꼴을 굵게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가부장제 사회 속에 사는 여성은 너무나 수동적이었고, 인형 같은 존재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나만의 생각’, ‘나만의 꿈’,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여성들은 ‘자기 삶의 의미’ 또는 ‘삶의 목표’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뚜렷한 언어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타자가 아닌 주체로 살아가는 것.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궁극에 절대적 자유를 얻는 주체적 존재가 되는 것.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삶에 관한 어떠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노라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인형의 집》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기 전에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종의 성장 소설 같은 희곡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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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2 16:33   좋아요 0 | URL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 공연작이 <인형의 집>이라서 거기에 맞춰 나온 특별판입니다. 저도 한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로라’로 생각했어요. 아마도 변진섭의 노래 제목 때문에 노라를 로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