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심비우스 - 이기적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1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약육강식, 적자생존', 왜곡된 다윈의 진화론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작동된다? 

일부 맞는 부분은 있지만 자연의 세계가 꼭 그렇게 강한 자들에게만 유리한 '그들'만의 무대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하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그동안 진화론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다윈가 살던 19세기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유럽의 힘센 나라들은 세상의 곳곳을 집어삼켰다. 자연 상태에서도 강하고 흉포하며 교활한 자들이 살아남게끔 되어 있다.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힘없는 나라를 억누르고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문제로 삼지 않았다. 만약에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정당성을 반박하는 이가 있었다면 당하는 게 억울하다면 국력을 키우면 될 것이라고 맞섰을 것이다. 이렇듯 다윈의 진화론은 억압과 침략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로 쓰이곤 했다.

 

진화론은 또 20세기 들어 군비경쟁이나 자유경쟁 논리, 우생학, 사회진화론 분야에서 오도된다. 인종 차별과 여성 차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은 진화론적으로 적응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특히나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의 현대사회에도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용어는 그대로 유효하고, 생명 탄생이나 인종 차별, 성차별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진화론 등장 자체가 단순히 과학사를 떠나서 인류사에 있어서 너무나 큰 획기적인 사건임은 분명하고 그 영향력도 인류 전반에 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등식은 다윈의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성전'을 끼고 세상으로 뛰쳐나간 '전도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다윈은 그런 용어를 즐겨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진화론에 처음으로 '적자생존'을 도입한 사람이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다. 스펜서는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실제로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명확히 이해했다기보다는, 그저 생물학 이론들을 차용해 현실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럴듯하게 설명했을 뿐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생태학자들, 특히 남성 생태학자들은 95%가 자연계의 치열한 경쟁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추세는 달라졌다. 자연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무조건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이제는 '호모 심비우스'다


흔히 '협동'은 인간만이 가진 고도의 기술이고 동물은 단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맞춰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를 비추어본다면 오히려 생각했던 것과는 거꾸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시장자유주의의 원리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경쟁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게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일부 생물들 중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종(種)들과 경쟁을 하기보다는 서로 협동하면서 인간 사회보다 더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는 자연의 세계에서 잘 살아남고 있다.

 

현생인류와 같은 종으로 분류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학명의 어원 속에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뜻하고 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결코 그 어원처럼 영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잘 이용해 만물의 영장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차별적인 세계화, 국가간 빈부격차, 환경 오염 등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 문제에 있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는 이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한테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호모 심비우스는 공생을 뜻하는 'Symbiosis'에서 착안한 말로 그가 만들어 쓰는 말이다. '함께'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syn'과 '삶'이라는 뜻의 'biosis'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동안 최재천 교수의 글을 관심있게 읽어 본 독자라면 용어가 낯설어도 그 의미만큼은 무척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공생', '협조'의 방식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알이 닭을 낳는다』와 같은 대중들을 위한 과학 에세이집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알면 사랑한다'라는 메시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올해 초에 다윈의 진화론를 새롭게 조명한 『다윈 지능』을 통해 '호모 심비우스'라는 새 용어로 정립하여 '공생'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강조하게 되었다. ('다윈의 대답' 시리즈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호모 심비우스』는 작년 12월에 처음 초판본이 출간되었고『다윈 지능』은 그 다음 올해 1월 초에 출간되었다) 

 

그는 자연계가 수차례 멸절 위기를 겪었음에도 다양성을 회복한 것은 '니치'(Niche), 곧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을 갖고 공존해왔기 때문이라 말한다. 지구의 생물 중량 중 으뜸인 것은 식물, 개체수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곤충인데,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을 대신해 곤충이 꽃가루를 날라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으며 공생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럼핏나무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는데, 그 속에 아즈텍개미들이 입주하여 산다. 나무는 개미에게 집은 물론 개미들이 선호하는 단백질이 함유된 뮬러체라는 먹이도 제공한다. 개미들은 그 대가로 나무를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이파리를 갉아먹는 모든 초식동물들은 물론 물과 햇빛을 두고 경쟁할 다른 주변 식물들까지 제거해준다. 아즈텍개미와 트럼펫나무는 진화의 역사를 통해 공생의 지혜를 터득하여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p 34~36)

 

 

'니치'를 통한 공생의 생존방식의 대표적인 예가 트럼핏나무와 아즈텍개미의 관계이다. 트럼핏나무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고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로는 드물게 동물성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뮬러체라는 물질을 분비해 줄기 내부에 사는 아즈텍개미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뮬러체는 아즈텍개미가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아즈텍개미는 트럼핏나무를 위한 보답으로 나무 전체를 순찰하면서 온갖 포식동물로부터 보호한다.

 

 

 

 

 

 '공생'이 없는 생태계 = 동반멸종

 

 

 

 

 

생태 피라미드

(그림출처: http://cafe.naver.com/iyh0606/3)

 

 

 

 

생물학 용어 중에 '생태 피라미드'(Ecological pyramid)라는 것이 있다. 생물군에 있어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각 단계의 개체군의 양적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히는 동물의 수는 그것을 먹는 동물의 수보다 항상 많다. 따라서, 먹히는 동물을 저변으로 하고, 먹는 동물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생태계 피라미드(또는 먹이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저변 동물은 초식성이고 소형이며 다수이다. 정점 동물은 육식이고 대형이며 소수이다. 이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동물의 한 종류가 멸종하면 '생태계' 피라미드는 무너진다. 이는 곧 자연 파괴를 뜻한다.

 

 

 

 

 

 

개미가 멸종하면 그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동식물들이 줄줄이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이 같은 공생-동반멸종(Mutualism coextinction)이 최근 보전생물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치밀한 공생관계를 맺으며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이룩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이제 전례 없는 환경 파괴로 인해 그들이 멸종의 길을 걷게 되면서 공생이 동반멸종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공생관계를 잘 이용하면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을 복원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p 94) 

 

 

하지만 단순히 먹고 먹히는 관계로 인해 특정 종이 사라진다고해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공생을 통해 살아남은 동식물의 관계가 '환경 파괴'로 인해 어긋나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던 다른 동식물도 멸종하게 되어 생태계 전체가 교란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공생-동반 멸종'(Mutualism coextinction)이라고 한다.

 

부전나비의 애벌레는 다른 나비의 종과는 다르게 개미굴에서 자란다. 개미가 직접 부전나비의 애벌레를 개미굴로 데리고 들어와 일종의 보모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애벌레가 개미들이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생태계를 먹고 먹히는 과정만이 작용하는 세상으로 인식하는 '경쟁'에 익숙한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다)  부전나비는 개미굴 속에서 개미들의 도움으로 자란다. 부전나비와 공생 관계의 개미가 살기 위해서는 실내온도가 높은 토양에서 군락을 형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풀이 많이 자라지 않으면서 햇볕이 많이 드는 토양이라면 개미뿐만 아니라 부전나비의 번식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러한 공생 관계를 모른 채 점차 개체수가 줄어드는 부전나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식지에 인간과 동물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말뚝을 쳐서 아예 보호관리구역으로 만들게 된다면 부전나비의 수가 늘어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게 되면 서식지에 수많은 식물들이 자란다. 식물들이 자라나게 되면서 햇빛을 받지 못하는 토양의 온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개미가 서식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환경 상태가 되어버린다. 보호관리구역에 개미가 살 수 없다면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전나비 애벌레 또한 생명유지를 보장할 수 없다. 당연히 부전나비의 수가 더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보호관리구역을 해체하고 그 곳에 소나 말을 풀어놓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소와 말이 풀을 뜯어 먹음으로써 토양에 햇볕이 들게 되어 온도가 상승한다. 그러면 그 곳에 다시 개미가 살게 되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부전나비의 수도 늘어나게 된다.

 

 

 

 

 공생하는 인간이 사회 경쟁력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확실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이기적인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남을 해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는 인종차별주의자도 있고, 종교가 다르다고 원수처럼 서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이기적 인간이 얻는 이익은 이타적 인간이 얻는 이익보다 늘 크다. 그러나 이는 결국 소멸, 파괴, 파멸이라는 결과를 남긴다. 그래서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결코 고립된 상태로 주위 생명체를 무시하고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공생의 생존 방식을 볼 수 있다. 개미는 진드기를 돌봐주고, 진드기 분비물을 영양분으로 섭취하고 살아간다. 악어새는 악어의 이빨을 청소해 주는 대신 먹이를 얻어먹고 있다. 살벌할 것 같은 동물의 세계도 이렇게 공생의 관계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견해가 다르다고 상대를 증오하는 일이 많다. 진보 세력은 보수 세력이 전부 없어지면 세상에 낙원이 올 것이라 상상하고, 보수는 진보가 사라져야 세상이 평화로울 거라 생각한다. 어떤 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의 인종만이 단언 우수하기 때문에 지구상에 살아남아야 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생할 줄 아는 동식물보다도 생각이 짧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인간 세계에만 보지 말고 자연 세계에 한번 들여다봐야 한다. 또, 동물들의 지혜로운 공생관계를 알아 인간 사회에 접목하여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볼 수 없다.

 

'호모 심비우스'는 단순히 공생하는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만 아니다. '공생'의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갖 전자기기를 통해 사이버 세상과는 그렇게 잘 공감하는 듯하지만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친구와는 교감하지 못하는 이러한 '불통'(不通) 사회에 무조건 '공생'을 강조한다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으로 그칠 뿐이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처럼 동식물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공생'을 알게 되는 '공감'이 형성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타인들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2-07-2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재천 교수의 이야기에 딱히 태클을 거는 것은 아니고, 위의 이야기들에 상당히 공감합니다만,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는 상당수 인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자연의 동식물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것이고, 그 방식을 인간이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글의 논의대로 동식물의 진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부분을 인간이 강조해서 보는가의 문제도 또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cyrus 2012-07-23 18:55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공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는데요. 상리공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공생의 의미입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종이 서로 이익을 얻으면서 돕는 것이죠. 이와는 조금 다른게 편리공생인데 한 쪽에만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이익 또는 불이익을 얻지 않으면서 돕는 관계를 말합니다. 사실 최재천 씨의 책을 읽게 되면 공생을 강조하면서 설명하는 것 같은데 편리공생에 대해서는 언급이 잘 없더군요. (정확한 기억이 아닙니다. 공생의 정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잠깐 편리공생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고요) 어찌 보면 이러한 관점도 동식물의 관계 특정 부분만을 인간의 생활방식과 견주어 강조할 수도 있겠고요.
 
과학자처럼 사고하기 -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 37인이 생각하는 마음, 생명 그리고 우주
에두아르도 푼셋 & 린 마굴리스 엮음, 김선희 옮김, 최재천 감수 / 이루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의 '과학' 콤플렉스  

 

 

SERI가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핵심인재가 2020년까지 약 9만명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향후 국가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초과학 및 공학분야의 석. 박사급 인력을 육성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래서 부족한 인력을 육성할 수 있는 '과학기술 핵심인재 10만 양병설'이 제기되었다. 우리나라의 9대 미래 유망산업 분야가 발전되기 위해서 연간 1만명 규모의 과학기술 핵심인재를 추가 공급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지원방안을 수립해야 하고 기초, 원천, 융합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기초 분야의 신속한 학위 취득이 가능한 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경제, 2012년 2월 22일)

 

과학기술 핵심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연간 1만명의 석. 박사급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미래에 대응하기 위한 제안으로서의 취지는 좋으나 과학에 대한 기피하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이상 목표 연도까지 10만 명을 육성한다는 것이 조금은 힘들어 보인다.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게 되면 이에 대한 세계적인 공로로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 의학상을 수여한 세계적인 과학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업적을 낸 과학자가 등장하게 되면 어김없이 언론에서는 '노벨상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노벨상 수상자 발표 기간이 다가오는 시점에 맞춰 해외 유명 과학자들로부터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수준의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과학기술의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 학술기관이나 잡지에 당당히 한국 출신의 과학자의 연구 결과 또는 논문이 발표되는 사례가 있었으며 한 번은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논문으로 한국 출신의 과학자가 쓴 학술논문이 선정될 정도로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노벨상에 인연이 없는 것일까?  여기서 반대로 생각해보자. 아무리 우수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꼭 노벨상을 수상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노벨상'은 뛰어난 업적을 남겨야지만 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무조건 어느 분야에 있어서 '최고'가 되어야하며 '과정'보다는 '목표', '결과'에 집착하는 특유의 한국식 사고는 노벨상의 가치를 일반인도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라면 꼭 받아야 할 명예로운 훈장쯤으로 여기며 그것이 과학자들이라면 한번씩 꿈꾸게 되는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매년 말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상 수상자 명단 발표에 촉각에 곤두서게 되고 한국인의 이름이 수상자 명단에 없으면 모든 국민 모두 아쉬워하는 나라가 또 대한민국이다.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아직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과학기술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다. 최소한 '기초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낮은 인식 그리고 이공계 기피 현상만 증가하고 있으며 점점 과학자들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사회적 환경 등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37인의 과학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과학자'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떠올릴 것이다. 과학자가 장래희망으로 꼽은 어린이들을 제외하면 과학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부정적인 면이 많이 차지한다. 연구 성과에 집착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실험 조작도 하고 마는 비양심적인 학자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위한 것이 아닌 순전히 자신만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과학을 연구하는 괴짜로 보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 사회를 뒤흔들었던 황우석 박사 사건는 우리나라 첫 노벨상을 기대했던 대중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본의 아니게 황우석 박사, 단 한 사람에게만 실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과학 연구에 이바지하고 있는 다른 과학자들마저도 대중의 싸늘한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소설, 영화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엉뚱한 연구에만 골몰하면서 은둔하는 괴짜 또는 인류의 평화를 방해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많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왜곡된 과학자에 대한 인식은 비단 대중들만 잘못한 것이다.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할 줄 몰랐던 과학자들의 태도는 오히려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직업소명뿐만 아니라 과학이라는 학문을 기피하는 성향을 부추기고 말았다. 제임스 왓슨은 자신의 자서전『이중나선』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과학자들의 본 모습들이 공개했고 에르빈 슈뢰딩거, 칼 세이건,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은 뛰어난 글쓰기로 대중들을 위해서 과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기여를 했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대중들에게 쉽게 소개하도록 노력한 과학자들이다. 그리고 대중들과 소통할 줄 알았으며 그들이 왜 과학을 어려워하게 여기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과학자처럼 사고하기』에는 그동안 대중들이 접할 수 없었던 과학의 흥미로운 단면들로만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대중적 과학 프로그램 연출자 겸 사회자인 에두아르도 푼셋이 인터뷰어로 나서 세계적인 과학자 37명의 생생한 육성을 담아냈다. 리처드 도킨스, 스테판 제이 굴드, 제인 구달, 올리버 색스 등 37명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얻은 심오한 통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주의 본질, 생명의 진화, 인간의 마음 등 다양한 분야를 통틀어 현대 과학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 책 제목만 본다면 독자들은 과학자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의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논리적이며 합리성으로 무장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37명의 과학자들을 보게 된다면 '과학자의 사고방식'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일단 여기서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과학에 무지한 대중들을 기만하는 지적 허영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대중들이 알고 싶어하는 부분에 대해서 친절하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물론 수준 높은 인터뷰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푼셋의 진행도 한 몫 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몸 담고 있는 연구영역의 범위 안에 갇혀버린 과학적 사고를 지향하지 않는다. 폐쇄적인 과학적 사고를 벗어나 과학의 발전을 인류의 삶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이야말로 곧 '진보'라는 인식을 반박하고 있다.

 

지능심리를 연구하고 있는 니콜라스 매킨토시는 스티븐 제이 굴드와 유사하게 진화를 진보를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만 보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평생 침팬지 연구와 영장류 보호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제인 구달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관점은 오늘날에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탈 인간중심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제가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결국 우리를 동물계에서 분리시키는 경계선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개성과 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감정을 지닌 유일한 존재가 아니에요.

 

 (제인 구달, pp 75)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개미 연구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을 지구를 파괴하는 운석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파괴를 남발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있다.

 

 

 

 

지금 인간의 활동은 (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있으며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첫 단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많은 글에 다루는 '병목현상'이란 이런 것입니다. 병목은 과다한 인구입니다. 인간이 자연환경을 너무 많이 파괴하므로 다른 종은 더 이상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없습니다. 또한 전 세계 사람들이 소비하는 음식과 자원의 양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이 현상은 1인당 소비의 증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인구와 개인적 소비의 증가가 합해지면 이른바 세계의 '자연자본'을 고갈시킵니다.  

 

 (에드워드 윌슨, pp 87)

 

 

 

 

 

 인간, 거대한 푸른 지구에 존재하는 그저 작은 동물

 

 

"하늘은 캄캄하고, 지구는 푸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한없이 아름답다."

 

1961년 4월 12일 소련 공군 중위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대기권 밖에서 지구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찬탄했다. 가가린의 말은 인간이 보지 못했던 거대한 땅덩어리와 바다로 이루어진 지구라는 존재에 대한 경의에 찬 감탄사가 아니다. 인간은 이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작은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해주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지구상 생명의 한 종에 불과하기에 겸허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가이아 이론을 제시한 제임스 러브록의 말은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닌 그저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일하게 아는 사실은(아주 중요한 점인데)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우주의 일부라는 것이 큰 행운이라는 것입니다.

 

 (제임스 러브록, pp 340)

 

 

 

과학자들은 '과학'만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오만과 지적 허영심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할 줄 알며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기여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전문가의 오만에서 벗어나 국민의 눈높이로 내려와야 한다. 과거처럼 전문가라는 권위를 이용해 일방적인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대중들도 인터넷에서 얻은 조각 지식으로 근거 없는 편견을 형성하지 말고 선입견 없이 진실에 다가간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기초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트랑 2012-03-3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며 과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인지하게되었습니다.
읽는 동안 매트릭스의 스미스가 한 말이 떠오르더라구요
'인간은 암과 같은 존재야'
제게는 뜨끔한 말이었죠.

cyrus 2012-03-30 19:08   좋아요 0 | URL
차라리 이 책을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이 읽으면
좋을 책으로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수많은 과학자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어서 그런지 한 사람의 인터뷰 분량이 좀 적은게
아쉽지만요. ^^

맥거핀 2012-03-30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얘기하신 뛰어난 과학적 연구들을 해오면서도, 그것을 늘 대중들에게 쉽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들 존경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재승 교수님도요.) 일단 그런 분들 책을 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cyrus 2012-03-31 00:16   좋아요 0 | URL
저도요, 이런 분들의 노고가 있어서 과학에 무지한 제가 여러모로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학창시절에 과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게 후회할 때가 있어요. 그 때는 성적지향에다가 교과서 위주라서
어렵고 딱딱해보였지만 막상 과학은 실험을 직접 해보고 관찰한다면
무척 재미있는 학문인데 말이죠 ^^
 
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세상을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에 서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아이작 뉴턴 -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다?

 

지난 해, 세계적으로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된 소식이 있었다. 현대물리학의 절대 진리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천재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론이 '실험실의 기계'를 앞세운 학자들에게 도전받는 형국이다. 만약에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오류가 사실이라면 20세기 이후 생성된 대부분의 물리학 이론과 가설은 정도에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과학자들은 '소립자인 중성미자의 속도가 빛보다 빠르다는 측정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빛보다 빠른 물질이 없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이 틀렸다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옳다고 전제한 뒤 쓰여졌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발표에 주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예외적으로 반응이 시큰둥했던 나라는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이과 학생들을 제외하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고 그런 과학 원리가 먹고 살기가 바쁜 실생활에서는 많이 동떨어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전세계적으로 과학자들이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물리학계의 판도를 뒤집을만한 위대한 발견인 것만은 아니다. 만약에 빛보다 빠른 물질이 실재할 경우 소설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타임머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비견할 정도로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이 될뻔한 이 연구 결과는 실험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졌다. 맥이 풀리게도 관측장치의 전선을 잘못 연결하는 바람에 생긴 잘못된 결과였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 과학자들은 빛보다 빠른 물질에 대해서 검증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절대적인 이론이 흔들릴뻔한 위기를 겪은 과학자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타임머신의 등장을 바라왔던 대중들에게는 잠깐이나마 기대치를 한껏 높여준 해프닝으로만 남게 되었다.  

 

 

 

 E=mc2는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E=mc2, E(에너지)는 m(질량)에 c(속도)를 2제곱한 값과 같다. 상대성원리의 정확한 내용을 설명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기호상으로 말할 수 있는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바꾼 이 유명하고도 간단한 공식이 갑자기 하늘에서 아인슈타인의 두뇌 속으로 내려온 것은 아니다. 이 간단한 공식 속에는 뉴턴, 라부아지에, 패러데이 등이 통찰한 과학적 발견의 역사와 원자폭탄, 원자력 발전, 각종 첨단기기의 발전 등 이 공식이 만들어낸 엄청난 역사적 파장이 함축돼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고 들어보는 '에너지'라는 단어는 20세기 초, 그러니깐 현대에 들어서면 등장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에너지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하나하나씩 탐구, 증명되어 오기 시작했다. 에너지라는 단어의 개념이 탄생하는 데는 마이클 페러데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페러데이는 전기와 자기 그리고 구리선이 움직이는 힘을 가역적인 양으로 측정할 수 있음을 밝혀 포괄적인 에너지라는 개념이 정립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화약이 폭발하게 되는 화학 에너지나 추위에 양손을 문지르면 발생하는 마찰에 의해 발생하는 따뜻함도 에너지 개념으로 정리됨을 알게 되었고 에너지가 변화 될 뿐 보존된다는 에너지 보존법칙 측 에너지의 합이 불변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질량(m)의 대한 개념은 아이작 뉴턴의 법칙이 영향을 미쳐 개념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저서『프린키피아』에서 제시한 법칙은 운동의 법칙이 지구상에서뿐 아니라 보이는 모든 행성에까지 보편적으로 적용되므로 필연적으로 전 우주적인 물질에 동일한 무엇이 존재해야했다. 그의 제2법칙인 가속도의 법칙은 물체가 힘을 통해 운동량을 교환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며 훗날 특수상대성이론에 적용될 수 있었다. 모든 물질이 같은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고 모든 물질의 연관성이 있어야했는데 이러한 작업에 공헌한 사람이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결합하거나 압축을 하는 방식 등을 통해서 변화를 가하더라도 질량의 총량은 불변하다고 주장했다.

 

'빛의 속도'(c)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처음 측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으로는 빛의 측정을 할 수 있는 실험 환경을 구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 후 과학자들은 빛의 속력이 무한할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게 되었다. 몇 십 년이 지난 후 빛의 속도는 덴마크의 뢰머에 의해 계산되었다. 그는 목성 측정을 통해 빛의 속도가 유한하며 300000km/s임을 계산해냈다. 놀랍게도 뢰머의 측정은 현재 측정할 수 있는 빛의 속도와 근사한 수치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리고 빛의 속도 측정이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중요한 상수로 에너지와 질량을 연결하는 환산인자가 되었다. 앞에서 쭉 설명하는 내용을 비추어 본다면 아인슈타인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과학의 모든 성채들을 결합시켜 과학사의 위대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다.  

 

하지만 E=mc2 공식이 발표되었을 때 처음에는 거의 무시를 당했다. 에너지와 질량이 같다는 아인슈타인의 통합은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방향과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인슈타인은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고전물리학을 대표하는 뉴턴의 어깨 위에 올라 간 것이다. 그것도 아마추어에 가까울 정도로 과학을 전공했고 스위스 특허국 직원이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물체를 다루는 전자기학에서는 뉴턴의 고전역학과 패러데이의 법칙이 서로 모순되는 측면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전자기학에 내재하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빛의 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전자기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물체가 고속으로 가속되면 질량이 증가한다. E=mc2이 말하는 것은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하면 에너지 값이 된다. 따라서 두 물리량은 언제든지 상호 변환할 수 있다. 방사성 물질이 핵분열 하거나 수소가 핵융합 한 후 질량은 반응 전의 질량에 비해 적다. 이러한 공식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하나의 공식 속에 숨겨진 강력한 세상의 힘

 

E=mc2는 간결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 개의 기호로 이뤄진 수식이지만 그것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에너지로부터 작용되는 현상부터 까마득히 멀고 광활한 우주에서 일어나는 폭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에너지 변환을 설명하는 방대한 과학 지식을 담고 있다. 원자폭탄은 이 공식이 적용방법에 따라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극명하게 나타낸 지극히 현실적인 수식이다.

 

스티븐 호킹은 무(無)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의 E=mc2는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색(色)과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인 공(空)은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질량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으며, 이 에너지는 허공(空)에 퍼져 있게 되니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 우주에 대한 인식의 확대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물질과 에너지로 구성된 것이 우주이다. 자연과 우주는 신비의 영역이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그 베일이 벗겨져 왔다.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 그리고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꾸준히 축적되어 온 것이 오늘의 과학문명이다. 알고 보면 과학이란 학문은 우주와 삼라만상의 법칙을 파헤치는 커다란 정신의 활동이기도 하다.

 

1세기의 과학기술은 인류 문명과 삶에 또 다른 기적 같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비록 실험 오류에 의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오랫동안 절대적인 원리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뒤흔들 새로운 원리들이 발견하는 날이 오는 것도 곧 멀지 않은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위대한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과학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2-03-07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은 시루스님 따라읽기 좀 해야겠어요. 맘먹어도 잘 안되고요, 막상 책을 펼쳐도 잘 모르겠어요. 이건 또 뭡니까!!! -_-;; 자꾸 한걸음 두걸음 시루스님과 멀어지는 이 느낌은;;

cyrus 2012-03-08 15:34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은 재미있는데(^^;;) 제가 리뷰를 좀 어렵게 쓴거 같군요.
사실 과학도서 리뷰가 제일 쓰기 어려운거 같아요. 쓰다보니
과학 법칙들만 기록한 내용만 남게 되었네요 ^^;;

반딧불이 2012-03-07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재미있지요? 내용도 형식도. 우주의 원리를 하나의 수식으로 나타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참 지나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cyrus 2012-03-08 15:3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처음 책 제목 보고 아인슈타인을 중심으로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책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과학사의 뒷이야기도 재미있었고요 ^^

차트랑 2012-03-0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과학의 세상이여...
스티븐 호킹의 말은 무극과 태극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어보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 또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
글을 읽으니 과학은 분명 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심증이 이는군요^^
멋진 페이퍼입니다~

cyrus 2012-03-08 15:36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쓰다보니 과학 법칙만 설명하는 글이 되고 말았는데요.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과학 내용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세상을 돌아가는 데 있어서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2-03-09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헌책방 가보시면 소련이나 동구 쪽에서 교과서로 쓰던 변증법적 유물론 번역본을 구입해 보세요.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변증법에서 어떻게 접근하는지도 나와 있어요.

cyrus 2012-03-14 17:07   좋아요 0 | URL
간혹 헌책방 가면 변증법이라는 제목이 달린 책을 발견하곤 해요.
다음에 들리게 되면 다시 한 번 확인해봐야겠어요 ^^
 
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카츄는 '진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88년 또는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포켓몬 신드롬'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생태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 수수께끼 특수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만화는 전국 모든 어린이들을 열광케했다. '뽀로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가 피카츄가 아닐까 싶다.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에다가 만화 주인공과 함께 등장했었기에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포켓몬스터들 중에서 단언 인기가 많았고 '포켓몬스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카츄였다.

 

만화 '포켓몬스터'가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열풍 못지 않게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100여 개가 넘는 포켓몬 캐릭터(오리지널 포켓몬스터 1기 방영 당시 포켓몬의 수는 151종이었다. 지금도 포켓몬의 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포켓몬 빵에 포함되어 있는 스티커를 모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만화를 포함하면 포켓몬스터의 수는 수천여 종이 넘을 것이다)가 매 한 편의 에피소드마다 등장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 간의 대결 구도 그리고 그러한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좀 더 강한 몬스터로 업그레이트하여 '진화'를 해야한다는 구도가 만화를 시청하는 어린이들에게 '경쟁심'과 '소유욕'을 유발하도록 만드는 은근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전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으킨 포켓몬스터 스티커 열풍은 단지 캐릭터 이미지의 대중적인 호감도만은 아니라 스티커를 모음으로써 자신도 만화 속 주인공 지우처럼 몬스터를 잡으려고 하는 소유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상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스티커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심리에는 '소유욕', '경쟁심'이라는 코드가 있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영향이 컸다.  

 

 

 

포켓몬스터와 관련해서 사람들마다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가 포켓몬스터 빵 안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모으는 것이다. 151종의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다 모으기 위해 하루에 수십번 문방구에 드나들며 빵을 구입한 사람이 많았다. 오로지 빵을 먹기 보다는 조그마한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서다. 얼마나 스티커에 집착했냐면 어떤 아이들은 스티커만 가져간 채 한 입 베어 물지 못한 빵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정도였다. 이러한 포켓몬스터 캐릭터 빵과 스티커의 성공은 타 제빵회사의 마케팅에 그 영향을 미쳤다. 그 후로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들어있는 빵들이 등장했지만 포켓몬스터 스티커의 열풍만큼 미치지 못했다. 캐릭터 이미지가 들어간 제품이 망할 수 있었던 것은 포켓몬스터 빵의 인기를 받쳐 준 만화의 영향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이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은 이유는 단지 그 캐릭터 이미지가 호감이 가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가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진짜 세상에서 실제로 구현하고 싶어하려는 마음이 있다. 실제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과 관련되거나 유사한 대상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만화 에피소드에 빈번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몬스터 사냥 그리고 자신이 잡은 몬스터를 키우고, 다른 몬스터 간의 대립 설정 등 만화 속에서만 가능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한 실제 세계에 살고 있ㄴ는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으는 것 밖에 없다. 결국 만화 속 이야기에 설정된 전개 구도, 즉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이들을 조그만한 스티커에 열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만화 '포켓몬스터'는 단순히 재미있는 만화를 넘어서 만화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갖고 싶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진화를 거듭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몬스터들은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앞서서, 만화 포켓몬스터의 에피소드 속에는 어린이들의 감정을 자극할 정도로 '경쟁'과 '소유욕'이라는 코드를 은근슬쩍 심어 놓았다고 설명했는데 그러한 의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바로 1기 초창기 때 '피카츄와 라이츄'의 대결구도가 등장했던 편이다.

 

지우와 피카츄는 전국에 위치한 체육관을 전전하면서 그 곳에서 체육관장들의 포켓몬들과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그런 대결에서 승리를 하면 일명 '포켓몬 배지'를 획들할 수 있다. 지우 일행은 여행을 하면서 포켓몬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는 라이츄를 훈련하고 있는 포켓몬 체육관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느 에피소드와 다름없이 패기가 넘쳤던 지우와 피카츄는 체육관장의 라이츄를 상대하게 되지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고 만다. 자신만만했던 대결에서 대패를 하게 되자 크게 좌절을 하게 된 지우는 한 때 포켓몬 체육관장으로 활동했던 동료들, 이슬이와 웅이 그리고 자신에게 크나큰 패배를 안겨준 체육관장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조언을 듣게 된다.  

 

"피카츄가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카츄를 진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우는 한동안 고민을 하게 된다. 여행길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정이 들었던 피카츄를 라이츄로 진화시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번개의 돌' 이 있어야 한다. 피카츄는 다른 포켓몬과 달리 아무리 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도 라이츄로 진화할 수 없는 종이다. 단지 '번개의 돌'을 통해서만 라이츄로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츄로 진화하면 그토록 좋아했던 노란 피카츄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으며 한 번 진화되면 원래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 번개의 돌을 통해 진화할 수 있는 기회도 피카츄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트레이너인 지우의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피카츄는 좀 더 강한 라이츄로 진화시켜야 한다. 

 

과연 지우는 포켓몬 배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피카츄를 진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피카츄를 위해서 진화의 작용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강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진화를 해야한다고?

 

'진화'와 관련해서 글의 초반부터 포켓몬스터 옛 에피소드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만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진화'라는 개념이 잘못 되었거니와 만화 시청을 통해 왜곡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점을 쉽게 압축해서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화'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은 간단히 말하자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비슷한 것이 약한 생물이 강한 생물에게 잡아먹힌다는 뜻의 '약육강식'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진화'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과정이며 진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종족 또는 생물들 앞에는 '미개'라는 단어를 붙여 '열성적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대중들의 인식은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으로 엉뚱하게 불똥이 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대중들은 그의 이론을 경쟁을 유도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강한 존재의 힘을 부각시켜 준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다. 잘못된 선입견의 전파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에 적용시킴으로써 '사회적 진보'를 내세웠고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은 과학사에 있어서 최악의 학문이라고 평가받는 우생학을 만들 수 있었다. 다윈의 이론을 '적자생존'의 의미로 받아들인 골턴은 우수한 소질을 가진 인구의 증가가 많아야 하고 대신에 열악한 우성적 소질의 인구의 증가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골턴의 우생학은 유태인 학실이라는 독일 나치스의 비인륜적 행동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진화론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이해는 비단 세계사적 착오의 사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비해 다윈의 사상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존재한다.『다윈 지능』을 쓴 최재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다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후진국이다. 

 

최 교수는『다윈 지능』을 통해 학자와 대중들에 의해 입혀진 잘못된 옷에 가려진 다윈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다윈 관련 용어들도 바로잡을 권하고 있다. 사실 다윈은 단지 '경쟁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환경에 따라 생물의 모습들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에 대해서 호기심을 품었으며 그러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의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화'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나름 고심한 역력이 있었다. 다윈에게 있어서는 진화는 고등한 존재가 살아남는 데 유리한 경쟁 체제의 과정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윈 자신은 원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 또는 '수정된 상속'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종의 기원』이 판을 거듭하며 다윈은 결국 너무나 굳어 버린 용어인 'evolution'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일기에는 이 세상의 온갖 생명체들을 논할 때 "나는 결코 어느 것이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68 -

 

 

  

 

다윈의 진화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가 바로 '자연 선택론' 이다. 다윈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때 자연선택을 통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형질이 선택되어 살아남아 내려옴으로써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생물 개체는 같은 종이라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이가 나타내게 되는데, 이 변이 중에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변이가 있어서 선택이 일어나서, 결국 후대로 전해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 때 주위 환경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물은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다. 즉 '자연선택론'은 강한 생물이 약한 생물보다 환경적응에 유리한 입장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예정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관점의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리뷰에서는 '자연선택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물학 교과서에는 '자연선택설'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 교수는 이미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증명되었기에 가설의 의미가 담긴 '자연선택설' 대신에 '자연선택론'을 쓸 것을 제안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아직도 '자연 선택설'이라고 부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관한 설명은 더 이상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지난 15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당당히 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반드시 '자연 선택론' 또는 '자연 선택의 원리'라고 부를 것을 주문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31~32 -

 

 

 

이미 전세계적으로 다윈의 이론들이 검증되는 결과들이 많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만 여전히 '자연선택설'로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윈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관련해서 또 다른 왜곡의 논리는 자연 선택이 생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연선택설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물은 오랜 세월동안 선택의 과정 끝에 결국 완벽한 존재로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크게 반발했던 당시 영국의 종교계와 학계가 훗날 그의 이론에 대한 비난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은 수긍했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윈의 이론을 원숭이에서 '완벽한' 인간이 탄생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자연 선택론에 대해서 설명했듯이 인간 그리고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유리한 번식의 과정을 선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경'은 고정불변하지 않다. 그리고 제아무리 인간이 정보와 사회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원리와 특정 도구가 있다하더라도 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경의 변화'는 생물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게끔하는 조건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에 인간과 생물은 정확하게 '맞춤식'으로 적응할 수도 없다.  

 

 

 

 

 

 '완벽함'을 위한 인위적인 변이의 위험성

 

앞서 이야기 하다 만 포켓몬스터 에피소드의 결론을 소개하자면 지우는 피카츄를 진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피카츄'의 모습으로 라이츄와 재대결하게 된다. 결국에는 만화 주인공 피카츄가 승리하고 만다. 그런데 첫 대결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피카츄가 자신보다 강한 라이츄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피카츄와 싸웠던 라이츄는 단순히 포켓몬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츄는 진화하기 이전 피카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및 방어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 채 바로 라이츄로 진화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눈에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피카츄의 공격 기술에 라이츄는 이렇다 할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한다. 지우와 피카츄는 이러한 라이츄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여 역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포켓몬 간의 대결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맞춤형'으로 진화해버린 라이츄의 사례는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눈 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피카츄에게 당한 라이츄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진화'는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하고 우수한 품성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진화 또는 변이는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키우고 있는 닭들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진화와 변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인식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양계장의 닭은 모두 달걀을 많이 낳기 위해서 '자연 선택'이 아닌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개량된 품종이다. 달걀을 많이 낳을 수 있는 우수한 품종의 닭만 키우다보니 달걀을 많이 낳지 못한 닭들 간의 경쟁이 사라지게 되고 종(種)의 유전적 다양성도 희박해진다. 이렇다보니 자연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량 품종된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견딜 수 있는 면역력조차 없으며 양계장 안에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순간 모든 닭들이 죽게 된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인위적인 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양계업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전자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질병의 위험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맞춤 유전자'. '맞춤 아기' 도 치명적인 모순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서울에 사는 모든 인구가 병에 걸리지 않는 정말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다면 과연 이들중에 제 아무리 강력한 항생제에 살아남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앞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지금 우리 사회는 '다윈 지능'이 필요해야 할 시점

 

진화는 철저하게 종족 번식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의 원리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다윈은 벌과 개미와 같은 서로 돕고 사는 사회성 곤충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으며 그 후 다윈의 후계자들은 이기주의적 개체들이 구성되는 생태계에서도 이타주의적 개체들도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이타주의적 관점의 진화론을 소개하기에는 내용상 길어질 수 있고 자세한 내용은 책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에 생략하겠다.

 

다만 자연 선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타주의적 현상이 만들어 낸 진화의 산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화는 번식 보존을 위한 경쟁 체제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 교수는 이제 우리 사회에는 '다윈 지능'(Darwinian inteligence)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다윈 지능'은 머리말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서는 '다윈 지능'이 들어가는 문장을 찾아볼 수 없다. 문장 하나하나 마침표까지 읽어야 하는 독서 습관이 아니라서 놓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본문에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오늘날의 연구 성과들을 설명하고 있을뿐 '다윈 지능'의 정확한 정의 또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다.

 

하지만 핵심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책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다양한 진화 이론들을 통해서 독자는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다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윈 지능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모색해봐야 한다.

 

책의 머리말에는 '다윈 지능'이 언급되기 전에 '집단 지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집단 지능'이란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집단적 지적 능력을 말한다.  '집단 지능'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SNS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SNS을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타인의 의견에 동의 또는 비판을 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소통'이라는 행위에 있기에 가능하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소통을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행위 중의 하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의 '소통'의 능력은 부재중이다. 권력면에서 우위가 있는 기득권층은 자신의 입장에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대방과의 소통을 무시한다거나 아예 자신의 입장에 반하는 의견들을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차단하기도 한다. 사회 내에서 강하다고 하는 자들의 논리에만 집중하게 되는 사회는 또 다른 문제점을 양산해낸다. 무조건 '강하고 나쁜 자'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인식 하에 경쟁을 유도하게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드세져만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한 동료보다 내가 앞서야 하며 '조작', '은폐'도 거리낌없이 할 정도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비도덕적인 아노미는 사람들 간의 신뢰마저 무너뜨리게 되며 소통은커녕 서로 반목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감'이란 상대방의 의견과 마음에 동의한다는 사전적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며 그것을 검증하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토론 및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획일적인 유전자만 있는 사회 또는 개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학문의 지식에만 내세울 줄 알고 다른 학문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모든 학문의 지식을 아울러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닌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최 교수가 항상 강조했던 화두, 바로 통섭(統攝)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지식과의 만남이다. 다양한 분야가 만나 오래된 궁금증의 해답을 찾아내기도 하고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예고하기도 한다.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는 다양성의 조호와 어울림이야말로 좀 더 발전되는 미래의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2-02-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예전에 교회에서 가르치던 아이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진화 계보도를 외웠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포켓몬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요즘 포켓몬은 왠지 짝퉁 냄새가 나서 과거만큼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습니다. 저도 피카츄 진화하지마를 외쳤던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cyrus 2012-02-28 22:52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만화 내용이 재미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요즘에 나오는 시리즈는 보지 않지만 정말 초창기 시리즈가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그 때 동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에는 포켓몬이 빠질 수가 없었고요.
^^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 찰스다윈 자서전
찰스 다윈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흔한 과학자의 자서전.txt

 

 

인간이 스스로를 평가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생의 파노라마를 담아 낸 자서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들까지도 서슴없이 밝혀낸다. 하지만 자서전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100%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있는 법이다. 기억 속에 지우고 싶은 좋지 않은 일들도 기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 감히 그런 것까지 세세히 밝혀내고 싶어 하겠는가. 자신의 명예로운 미지에 부합되지 않거나 도리어 손상될 우려가 있는 부정적인 일은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보니 자서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자화자찬으로 가득하다거나 자신의 업적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신과 관계된 타자의 성격 또는 업적을 왜곡 또는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있다. '무한도전'에 나오는 노홍철처럼 자신의 입으로 '위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업적만 부각시키는 '변종 위인전'인 것이다.

 

 

 

 

 

 

 

 

몇 주 전에 제임스 왓슨의『이중 나선』을 읽었다. 워낙에 잘 알려진 대중 과학도서라고 하기에 집어 들었지만 DNA 모형을 발견해내는 왓슨과 크릭, 두 과학자의 탐구 과정보다는 왓슨과 그 주변 과학자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더 눈이 갔다. 더군다나 아무리 DNA 모형을 발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함께 한 동료 과학자들의 업적을 크게 부각되지 않은 그의 서술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연구 활동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거나 다름없는 비운의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의 동료인 크릭, 윌킨스보다 평가가 박했다. 과학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과학고전이라고 하기에는 내용 면에서는 실망스러웠다.

 

 

 

 

 

 겸손한 과학자, 다윈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 진화론 공부할 겸에서 읽게 된 찰스 다윈의 자서전은 과장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 담백한 고백을 담고 있다. 왓슨의 자서전도 자신의 동료인 크릭을 '말 많은 오지랖쟁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평가했지만 다윈은 생물학자의 길을 반대했던 가족들, 연구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 지도교수, 동료 학자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부각시키면서도 동시에 겸손의 미덕을 놓지 않고 있다.

 

 

"제가 만일 20년을 더 살아서 일할 수 있다면『종의 기원』에 고쳐 쓸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시작일 뿐이니 그 자체로 뭔가 의미가 있겠지요."

 

 - 찰스 다윈이 J.D.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1869년), 『나의 삶은 서서히...』서두 -

 

 

 

다윈의 자서전에 들어가기 앞서 책 앞에는 다윈이 동료 과학자인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찰스 다윈이라는 학자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 스스로 낮출 줄 알고 겸손할 줄 알았다.

 

사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다윈의 자서전 분량은 자신이 쓴 『종의 기원』분량보다 더 적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은 『비글 호 항해기』발췌문을 제외하면 책은 159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짧은 자서전 속에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도 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삶의 과정들도 세밀하면서도 솔직하게 기록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나는 외국어 하나도 변변하게 익히지 못했다. 시를 지어보려고 각별한 노력을 해보기도 했으나 영 소질이 없었다. 친구는 많은 편이었으며, 오래된 시를 잔뜩 모아다가 다른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 이어붙이기를 해서 어떤 주제든 공부할 수는 있었다. 

 

 (중략)

 

나는 나이에 비해 뛰어나지도 처지지도 않는 정도였다. 그리고 여러 선생님이나 아버지도 나를 아주 평범한, 지적인 면으로는 보통 수준보다 약간 모자라는 소년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pp 26~27 -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나 우리가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찰스 다윈도 그러한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기억력 좋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린 다윈은 유명한 시를 암기해도 48시간이 못 되어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다윈은 어린 시절 때부터 마주친 지적 한계에 대해서 크게 좌절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자서전의 화자 다윈은 외국어 공부를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다윈의 겸손함은 생물학자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성공한 뒤에도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옹호한 헉슬리처럼 비상한 이해력이나 재치도 없었고, 비평가로서도 약점 투성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리고 기억력은 너무나 빈약해서 날짜를 며칠 이상 기억해 본적이 없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들이 진화론을 주장한 만큼 그는 종교문제에 관해서도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윈은 생물학자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어했던 신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다. 특히 그가 페일리의『자연 신학』을 공부했으며 책 속의 논증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는 장면은 진화론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다윈의 이런 면이 새롭고 이채로울 것이다. 수백 년 뒤에 자신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리처드 도킨스『눈 먼 시계공』을 통해 페일리의 이론을 반박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 밖에도 다윈은 생물학자의 길을 반대했던 아버지에서부터 훗날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지도교수 헨슬로 그리고 자신의 부인 엠마까지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해온 가족 및 동료들을 따뜻하면서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연구를 위해 비글 호에 승선하면서 만난 피트로이 선장에 대한 그의 서술은 '대인배'다운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피트로인 선장은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윈과 여러 차례 시비에 휘말렸으며 몇 번씩 불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다윈은 그러한 선장의 성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악의에 찬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서전에는 가족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한 '가장'로서의 다윈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생활을 한 그가 내심 부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게 다가온다. 다윈은 열 살이라는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 여린 '딸바보' 아버지였다.

 

 

내 가정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여기서 또 밝힐 것은 내 아이들은 건강문제를 제외하고는 걱정을 끼친 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다섯 아들의 아버지로서 진정으로 이런 자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본다.

 

 (중략)

 

딱 한 번 잇었던 슬픈 일은 1851년 4월 24일 열 살을 넘긴 큰딸 애니가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다. 그 아이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멋진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의 품성에 대한 짧은 글을 사망 직후에 쓴 일이 있으니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 아이의 상냥한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젖곤 한다.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pp 140 -

 

 

 

 

그가 이러한 좋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강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아버지로부터 중요한 정신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관찰력'과 '동정심'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관대하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모습을 배우면서 자랐기에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관대할 줄 알며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Poco curante, 찰스 다윈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여자 관계를 서슴없이 밝혀내고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만 다루는 모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은 탓인지 다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이 정화되면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 따뜻하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대중들을 위한 과학을 위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재천 교수는 과학자들은 글을 잘 써야한다고 설파하는 '과학적 글쓰기론자'이다. 과학적 원리를 어려운 수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훌륭한 '과학적 글쓰기'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이라는 학문도 아름다우며 따뜻한 휴머니즘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질 수 있도록 대중들을 매혹시킬 줄 아는 감성 표현 능력도 중요하다고 본다.  

 

문장력을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다윈의 자서전은 과학자의 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성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즐겨 읽었을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으며 자신에게 쓴 부인 엠마의 편지 그리고 비글 호 항해를 반대했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외삼촌이 쓴 편지까지도 죽을 때까지 보관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감정을 연결하고 공유하려는 자세를 놓지 않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처럼 다윈의 삶은 서서히 '진화'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성숙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여느 훌륭한 과학자들처럼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집착보다는 자연의 신비에 호기심을 가질 줄 알며 관찰과 실험을 좋아하는 '모태' 과학자였다.

 

적어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죽는 날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날이 될 것이다. (pp 165~166)  

 

다윈은 학창 시절, 별명이 Poco curante(포코 큐란테)였다. '낙천가'라는 뜻의 라틴 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그러한 낙천적인 성격은 자신의 진화론이 학계와 종교인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는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윈의 쓴 『종의 기원』의 내용이 너무나 어려워서 못 읽더라도 다윈의 자서전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이나 과학도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관찰력'과 '동정심' 그리고 실패와 비난에도 굴하지 않은 채 포기하지 않는 탐구 열정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포코 큐란테' 정신은 훗날 과학자가 될 독자만 본받야되는 것이 아니다. 다윈의 삶의 원칙은 점점 정(情)의 의미가 퇴색해져만 가고 이해타산적인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처세술이기도 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2-2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겸손한 과학자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윈은 기억력은 어떠하셨을지 모르나, 통찰력은 엄청나게 뛰어난 분이었을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섬 내의 조금씩 다른 새들을 관찰한 내용에서 그렇게
뛰어난 발상이 나왔겠습니까! 참 멋지군요...

아, 그런데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 글쓰기라.... 글만 둥둥 뜨지 않는다면
다윈과 같이 겸손함과 현명함과 핵심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 그런 글쓰기를 한다면 정말 우리같은 후손의 복일테지만, 히틀러처럼 껍데기만 있는 사람이 그렇다면 현혹되기 딱 맞을테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엉뚱한 한마디였네요~ ^^

cyrus 2012-02-26 22: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일명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빈틈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윈처럼 한 가지는 꼭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

마고님 말씀대로 대중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글쓰기가 많으면 좋은데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서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그저 대중들을 현혹하는
글쓰기는 조심해야죠. ^^

차트랑 2012-02-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은 정말 인내심을 요하던걸요 ㅠ.ㅠ
물론 매우 정렬적인 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용옥선생은 다윈을 자사선생의 환생이 아닐까
뭐 그런생각까지도 했다고도 합니다 ㅠ.ㅠ
(오타를 수정하고 갑니다 ㅠ.ㅠ)

cyrus 2012-02-26 22:48   좋아요 0 | URL
저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사놓고도 아직까지
한 페이지를 넘겨본 적이 없답니다. ^^;;

자사선생은 처음 들어보네요. 검색해서 알아봐야겠습니다. ^^

휘오름 2012-02-2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자서전은 별로 안좋아 하는 편인데요 리뷰 보다보니 이런책이면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cyrus 2012-02-26 22:49   좋아요 0 | URL
저도 자서전을 완전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인물에 대한 삶의 과정과 주변 환경을 보면 인물의 생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서전도 좋은 옥석이 있는지
읽는 우리들이 잘 선택해야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