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자를 꿈꾸는 여학생들이여, 왓슨의 책을 읽기 전에 마음 단단히 각오하길. 그리고 왓슨이 여성 과학자를 `매력 없다`라고 표현해도 이에 기 죽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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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2-2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오를 하고 읽었는데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cyrus 2012-02-26 22:50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DNA 모형 설명하는 부분에서 좌절했습니다. 그냥
과학자들의 일상만 재미있게 보고만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

생각소녀 2015-02-20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과학자..왓슨이 매력없다하지만 저한텐 정말 매력있는걸요.
남들이 뭐라하건 자신이 과학에 열정이 있다면 여학생들, 그정도에 좌절하지 않아요!!
과학자들의 일상도 알게되어 저는 더더욱 과학자가 되고싶어졌답니다.

cyrus 2015-02-20 20:40   좋아요 1 | URL
생각소녀님, 닉네임에 걸맞게 마음자세가 좋습니다. 꼭 멋진 과학자가 되길 바랍니다! ^^
 
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세포는 하나의 우주와 같다. 세포 안에서 참으로 다양한 생명활동이 일어나고 있고 생명활동의 중심에는 유전자가 있다. 유전자는 세포의 생명활동을 지배한다. 즉 유전자는 생명의 정보인 셈이다. 유전자에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를 아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의 신비를 아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 있고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유전자의 물질적 실체는 바로 DNA인데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DNA 안에 유전정보가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에는 DNA의 유전정보를 통해 질병의 발병 가능성을 미리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는 데 단 며칠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제는 유전자가 질병의 발병 가능성이나 기질 등의 근본이라는 사실이 상식이 됐지만, 그 구조가 밝혀진 것은 불과 50년 전 일이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유전자 게놈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당시엔 DNA가 어떻게 유전정보를 갖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비밀을 풀기 시작한 과학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왓슨이 쓴 그 유명한『이중나선』이다.

 

 

 

 DNA의 구조를 둘러싼 과학자들 간의 질투와 경쟁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EBS에서 방영중인 최재천 교수의 '공감의 시대' 강연이었다. 강연 제1부에서 최재천 교수가 대학생 시절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과학 도서라고 추천했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는 탐구의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책만 가지고 DNA의 구조에 대한 과학적 내용을 기대해선 안 된다. 사실 이 책은 그 발견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생물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는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가나는 과정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이과계가 아닌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과학 고전으로 알려진 이유에는 DNA의 구조를 발견하게 되는 탐구의 과정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어려운 생물학 지식을 대중들을 위해 쉽게 소개하고 있는 왓슨의 과학적 글쓰기 능력도 한 몫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이 책의 화자인 왓슨, 자신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재미요소이다. 왓슨의 동료 과학자들이 연구했던 다양한 주제뿐만 아니라 연구실 밖 일상까지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궁리에서 번역한 『이중나선』앞표지에는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 구조를 발견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있다.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소임이다. 하지만 『이중나선』에 등장하는 왓슨과 크릭 그리고 DNA를 연구한 과학자들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연구 주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학계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을만한, 흥미를 느끼는 분야만 좇아 다녔고, 다른 연구자들이 조금이라도 진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곧 경쟁심과 질투심에 들떠 어쩔 줄 몰라 했다. 위대한 발견을 함께 한 동료로서 크릭의 모습과 성격을 묘사한 왓슨의 증언이 너무나도 솔직하다.

 

 

 

 

자신들이 만든 DNA 모형 앞에 선 제임스 왓슨(左)와 프랜시스 크릭(右)

 

 

(『이중나선』pp 224)

 

 

내가 보기에 프랜시스 크릭은 그리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겸손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중략)   당시 그는 35세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 과학자였다. 그와 친한 몇몇 동료들만이 크릭의 빠른 머리 회전과 통찰력을 알았고 가끔 조언도 구했지만, 대다수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말 많은 수다쟁이로만 대할 뿐이었다.

 

 - 제임스 왓슨 『이중나선』중에서, 최돈찬 역, 궁리, pp 25~26 -   

   

 

친한 동료 아니랄까봐 책의 첫 장부터 크릭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왓슨은 자신의 동료 크릭이 그동안 연구했던 과정과 결과가 다른 동료 학자들 앞에서 떠벌리고 다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크릭의 오지랖 때문에 연구 성과가 다른 동료들에게 빼앗길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사실 왓슨의 걱정은 단순히 성과 집착에 대한 지나친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크릭은 자신의 오지랖으로 인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겅험이 있었다. 자신이 독립적으로 연구한 과학적 아이디어가 대학 지도교수였던 로렌스 브래그로부터 도용당하고 만 것이다.

 

 

브래그 경은 크릭의 이론을 미리 알았다는 사실을 단호히 부인하고, 다른 과학자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말은 자신에 대한 더 없는 모욕이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크릭 자신이 그토록 떠들고 다닌 아이디어를 브래그 경이 몰랐을 리 없다고 대들자, 브래그 경 또한 이를 맞받아쳤다. 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10분도 채 안 돼 크릭은 교수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pp 74)

 

 

 

아이디어가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허락도 없이 도용한 점에 대한 이의를 둘러싼 두 학자 간의 다툼은 이 책에서는 그저 사소한 일화로만 지나갈 수 있지만 과학자들은 자연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데 만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성과와 그에 대한 보장 역시 간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왓슨이 '네이처'라는 과학 잡지를 통해 DNA의 이중나선을 밝힌 나이는 불과 25세다. 책에서 스스로 그리고 있는 당시의 왓슨은 불투명한 앞날로 인해 방황하는 대학생과 다름 없다. 화학은 전혀 모르는 데다, 학교에서 지급되는 장학금과 연구 성과,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그가 평생 바치기로 선택한 연구 주제가 바로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DNA의 구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가 DNA 연구에서 한발 앞서 있었던 모리스 윌킨스(DNA 구조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왓슨과 크릭과 함께 1962년에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한다)와 당시 유일한 여성 DNA 연구자였던 로잘린드 프랭클린, 화학의 대가로 꼽히는 라이너스 폴링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된 이유는 바로 그 질투심과 경쟁심 때문이었다.

 

 

 

 

 『이중나선』그리고 왓슨의 과학적 글쓰기에 대한 평가 

 

왓슨의 『이중나선』은 과학도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독자들마다 이 책에 대한 평과 인상이 차이가 있을 것이다. 최 교수도 이 책을 소개하면서 언급했지만 오늘날에도 동료들에 대한 왓슨의 적나라한 모습이 담긴 이 책이 과학 고전으로 읽혀져야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남아 있다.

 

왓슨의 과학적 글쓰기는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DNA의 구조에 대해서 쉽게 설명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솔직하게 고백했다는 점에서는 높히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 책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는 위대한 과학 논픽션이라고 하더라도 『이중나선』의 저자 왓슨의 주관적인 관찰과 감상으로 이루어진 글이라는 것을 염두하여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모리스 윌킨스의 동료였던 로잘린드 프랭클링은 DNA 이중나선 발견에 결정적인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나선』에서는 그의 활약을 미진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로잘린드 프랭클린에 대해 왓슨은 성격 괴팍하고 데이터 분석능력이 떨어지는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 때문에 '숨은 주연'이나 다름없는 로잘린드 프랭클링은 왓슨과 크릭이 성취한 과학적 성과의 발견을 더욱 돋보이게끔 만드는 '엑스트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녀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여성 최초의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불행하게도 놓치고 말았다. 혹자는 왓슨의 행동이 동료 과학자의 성과를 가로 챈 행위이며 『이중나선』을 통해 동료들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폭로함으로써 유명세를 얻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왓슨은 나중에서야 후기를 통해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숨은 공로를 인정했지만 지금도 대중들은 DNA의 이중나선을 발견하는 사람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은 모리스 윌킨스 그리고 2004년에 세상을 떠난 동료 크릭마저도 왓슨의 인지도에 묻혀지고 있다. 『이중나선』이 책 한 권 덕분에 왓슨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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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12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과학도들에게 필독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상당히 불편했던 점등을 생각하면
이중나선을 과학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크릭을 겸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왓슨도
사실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인문학적 측면에서는 별로인 책이 확실하거든요^^

왓슨이 로잘린드 플랭클린의 공로를 매우 축소시켜 소개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공로를
행간에서는 절대로 숨길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위 글에서 지적해주신대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살아 있었다면
왓슨이 지금과 같은 명성을 가질지는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2-02-13 22:0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과학자들 간의 대화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지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에 대한 왓슨의 차별이 좀 불편했어요.
랑공님 말씀대로 이 책이 고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hnine 2012-02-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슨이 최근에 낸 책으로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서 제목은 Avoiding boring people 인데, 왓슨이 얼마나 치밀하고 야망이 많은 사람인지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어요. 천재성을 지닌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과학에 있어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우리는 과학 이외의 다른 것도 은연중에 기대를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때로는 그 사람의 과학적 업적, 왓슨의 예에서 보면 DNA의 구조에 대한 것 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DNA 구조를 밝혀내기 까지 그 뒷배경이 어떠했을까 하는 점에 더 관심이 많이 쏠리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좀 아쉬워하는 쪽입니다.
로잘린 프랭클린, 윌킨스 와 왓슨, 크릭, 이런 사람들 사이의 일화는 뭐,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요.
리뷰를 참 성실하게 잘 쓰십니다.
잘 읽었어요.

cyrus 2012-02-13 22:08   좋아요 0 | URL
왓슨이라는 사람이 은근히 과학 대중서를 많이 썼더라고요.
그런데 <이중나선>이 고전이라고 손가락 치켜세우기에는 불편해고
조금은 부족한게 있었어요. 저자의 주관적인 느낌도 강했고요.
로잘린드 프랭클린 평전이랑 크릭 평전도 출간되었던데 그 책도 겸해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 - 개정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 김현숙 옮김, 송상용 감수 / 바다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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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르네상스형 괴물, 켄타우로스 케이론

 

 

 

 

 

폼페오 바토니  <아킬레우스를 가르치는 케이론>  1746년

 

 

 

 켄타우로스는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말의 형태를 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그들은 야만적이어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난폭한 성질을 지녔다. 또한 음탕할 정도로 여색을 좋아해서 종종 님프(nymph)나 신족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기도 한다. 몸에서 말(馬)의 부분은 태양에 속하는 남성적인 힘을 나타내며, 이 힘을 다스리는 정신이 상반신을 이루는 사람 부분에 있다. 요컨대 켄타우로스는 덕성과 판단력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본성과 대비되는 인간의 저열한 본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모든 켄타우로스가 호전적이고 난폭한 건 아니다. 케이론이라는 이름의 켄타우로스는 선량하고 정의를 존중하는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의술, 음악, 수렵, 예언에 능통하여 헤라클레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킬레우스를 가르치는 케이론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활을 쏘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케이론은 수많은 영웅들에게 궁술, 수렵만 가르쳤던 것은 아니다. 케이론은 켄타우로스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박학다식한 현자였다.

 폼페오 바토니가 묘사한 장면에서 케이론은 아킬레우스에게 수금을 켜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젋은 아킬레우스 뒷편에는 지구의가 있는 걸로 봐서는 케이론은 지리학도 가르쳤나보다. 하지만 지구의가 존재하기에는 아킬레우스가 활동하던 신들의 세계는 지리학, 천문학이라는 학문도 존재하지 않았던 너무 먼 옛날 시절이다. 바토니는 지구의를 조그맣게 그려넣음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케이론의 박학다식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킬레우스는 성인이 되면서 수금 연주를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보다는 그리스의 오랜 적국인 트로이를 공략하는 데만 열을 올렸지만 말이다.

 

 앞에서 켄타우로스를 날 것 그대로의 야만성과 덕과 정신이 다스리는 인간의 본성이 결합된 혼합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케이론은 인간이라면 알아야 할 학문과 예술이라는 지식의 분야를 동시에 습득하고 있는 르네상스형 인간, 아닌 '괴물'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형 인간이란 한 분야가 아닌 다양한 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을 말한다. 누구보다도 더 호기심과 탐구력이 강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문학이던 과학이던 예술이던 골고루 습득하고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들 간의 링크가 잘되어 있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저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20세기의 마지막 르네상스형 인간인 동시에 과학과 예술 간의 밀접한 지적 사유 과정을 집대성할 줄 아는 현대의 케이론이다. 그의 마지막 지적 활동의 결과물로 남게 된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인류의 정신 및 지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진보'라는 인간의 등정이 지성사에 미친 영향

  

 브로노우스키는 인류 지성의 진보적 발전을 '인간 등정'으로 비유하고 있다. 인간의 체력으로는 높은 산 정상까지 뛰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 정상에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에 처음부터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오르게 되면 체력적 소비가 많아져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한걸음씩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산에 오르는 과정을 인류의 진보에 비유하자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단 한 번만에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봉우리가 또 다른 봉우리의 발판이 되는” 유기적 여정을 거친 끝에 만들어졌다.

 아기는 걸음마를 떼고 스스로 일어서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다. 인간의 조상도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커진 두뇌와 자유로워진 두 손은 창조의 모체가 된다. 인간은 과학과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놀라운 창조물들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인류의 진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최초의 과정이다.

  나무와 돌을 깎기 시작했을 때 인류는 다시 한 번 진보했다. 브로노우스키는 ‘사물을 쪼개고 깎는 것은 흙을 뭉쳐 토기를 빚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깎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사물의 본성을 파헤쳐 구조와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돌덩이 내부에 있는 형상을 망치로 해방시킨다’고 생각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처럼 인간은 깎으며 분석하고 이때 발견한 법칙을 토대로 사물을 재구성했다. 연금술 역시 금속의 숨겨진 구조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인간 등정의 일보 중 하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잉태된 진보는 예술과 종교 등의 영역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미술을 발전시킨 원근법은 단지 중세 미술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원근법은 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배치하는 중세의 예술관을 붕괴시켰고, 수학을 시간과 연동되는 역동적 사유양식으로 발전시켰다. ‘눈에서 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빛이 나온다’는 이슬람 물리학자 알 하젠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원근법은 예술을 넘어 과학과 종교, 세계관의 붕괴로 이어졌다.

 

 

 

 

 '도덕적 상상력' 없이는 인류의 진보는 없다

 

 케이론은 비록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이지만 그는 이성과 지혜를 두루 갖춘 박학다식한 현자였기에 오늘날에는 포악한 짐승에 가까운 켄타우로스 일족과 구분하고 있다. 케이론은 수금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지만 켄타우로스 일족은 그저 술만 마시고 아무 님프나 잡아서 추태 부리는 짐승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이처럼 브로노우스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상상력의 자질에서 비롯된 창의적인 정신의 능력이라는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창의적인 정신의 능력은 예술과 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는데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귀한 선물'인 것이다. 이런 믿음 하에 브로노우스키는 인류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브로노우스키의 관점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인간중심적 사고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과학과 예술을 통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진보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절대 지식으로 여기는 인류의 오만과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절대적인 확실성을 신봉하는 독재자들의 신념으로 과학과 인류 진보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현대로 오면서 핵물리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레오 실라드의 진언과 현실로 나타난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통해 과학의 오용 가능성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고자 한다.

 특히 책이 쓰여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인간의 고유한 정신을 배반하면서까지 목적보다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데 과학을 이용하는 사회적 흐름을 우려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시험해보지도 않고서 절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인간이 신의 지식을 갖고자 할 때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지식의 그야말로 인간적인 형태이다. 우리는 항상 알려진 것의 첨단에 있으면서 바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 (중략) 우리는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p 416~420)

 

 

 

 오늘날의 과학은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고삐를 쥐고 흔들기를 원하는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 때문에 과학이 할 일은 지상의 부(副)가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데 놓여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도덕적 상상력이 없이는 인간과 믿음, 과학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이론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 사회의 발전은 물론이고 훌륭한 인재가 탄생하듯이 브로노우스키는 이와 같은 과학의 바탕이 확립될 때 진보의 ‘인간 등정’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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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신, 인간, 자연을 서로 분리시키고,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도 좋은 대상으로 바라본 서구의 사상적 배경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경쟁의식을 잉티했대고 저는 봅니다.

아, 그리고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제가 해당 책을 읽지 못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이랍니다)

아주 좋은 글 잘 일었습니다.

cyrus 2012-01-11 19:14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문장에서 중간 내용을 일부러 생략해서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네요 ^^;;

저자는 원시 시대부터 원자폭탄이 등장하는 현대까지(이 책이 1970년대쯤에
다큐로 만들어진 것을 토대로 출판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조망해보면서
인간이 과학과 예술을 다룰 줄 아는 능력 덕분에 무시무시한 원자폭탄까지
제조할 수 있는 진보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예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
예를 들어서 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보며 맹신하게 되면
결국에는 인간 우리 스스로 파멸하는 길로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요.
원자폭탄 같은 경우에도 결국 과학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은 정치세력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위험한 무기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과학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인간만의 절대적인 지식 또는 힘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생하는 도덕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추천되는 책이고 과학 분야 도서치고는
어렵지 않은 게 장점이에요.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 ^^


차트랑 2012-01-1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생략을 해서 죄송합니다.
(맥락을 무시한 생략은 큰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 인정합니다)

제가 인용한 부분은 "(중략) 우리는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p 416~420)"입니다.

아, 그리고 좋은 말씀해주시고
독서 목록에 포함 시킬 수 있도록 해주신 점
고맙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써주셔서 역시 고맙습니다.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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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한계  

어린 시절 TV 앞에 앉아서 즐겨보던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물론 세상물정 몰랐던 어린이라서 만화라면 무슨 내용이든지 간에 보곤 하였다.  그리고 맨날 비디오방에 들러 '후레쉬 맨' , '바이오 맨' 등 지구를 지키는 알록달록 색깔 용사들의 등장에 환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린 시절에 만화, 비디오만 즐겨 본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들이 TV를 시청하는 습관이 부모의 교육과 시청 취향에 따라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실인가보다.   

어머니는 동물을 좋아하시는 편인데 저녁 때만 되면 하던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 보시곤 하였다.  오늘날에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많이 방영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동물이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이라면 '동물의 세계' 와 지금은 방영되지 않은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둘 뿐이었다.    '동물의 세계' 같은 경우에는 만화가 전파되는 시간대랑 겹쳐서 잘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같은 경우에는 온 가족이 집에 모여 함께 볼 수 있는 시간대(저녁 8시쯤에 한걸로 기억하고 있다)라 볼 수 있었다.   '동물의 세계' 는 다큐멘터리라서 유익한 내용임에도 지루할 수도 있지만 '퀴즈탐험' 같은 방송은 동물의 신비로운 생활방식들을 퀴즈라는 오락적인 요소를 통해서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 당시로서는 유익한 내용을 다룬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요즘에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와 같은 프로그램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TV 동물농장' 을 중심으로 동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소개하는 동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동물들의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한 생태 환경을 소개하기에는 범위가 협소한 감이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듯이 요즘 시청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아주 거리가 먼 아마존 밀림의 '동물의 세계' 보다는 자주 볼 수 있는 친숙한 강아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TV 동물농장' 을 즐겨 볼 수 밖에 없다.   r그리고 사람들이 '동물의 세계' 를 즐겨 보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큐멘터리에는 버라이어티에서 볼 수 없는 웃음 코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TV를 통해서 동물의 생활환경을 알기에는 당연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보니 브라운관에 비치는 동물의 모습은 실재에 가깝기보다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희화화하는 장면 위주로만 가공, 편집되기도 한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동물의 생태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동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의도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동물의 생태를 '인간' 위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동물의 눈으로 동물의 생활을 바라보기

최재천 교수는 인간을 동물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강의내용을 담은 <인간과 동물>에서 동물의 행태와 오묘한 자연 간의 조화를 분석해주며, 인간이 동물의 세계를 이기적인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만든다.   구경거리, 포획 대상, 돈벌이 수단으로 보아온 동물의 세상를 자연 그대로 이해하고 환경 친화적인 태도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동물들의 의사소통, 사회생활, 성생활 등을  인간의 생활과 비교해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행동은 ‘어떻게’ ‘왜’ 그런지를 설명하고 있다. 

책에 소개된 동물들의 생활 모습과 실험 내용은 TV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중들을 위한 강의 내용답게 어렵지 않을뿐더러 흥미롭게 읽혀진다.  그리고 몇 몇 내용들 중에는 인간의 생활과 유사한 것도 있다.

 

  

원앙 부부는 금실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 원앙은   

일부다처제이므로 수컷 원앙은 여러 명의 암컷 원앙을 아내로 두고 있다.

 

스웨덴 행동생태학자 앤더슨은 참새만한 몸집에 꼬리가 아주 긴 천인조란 새를 대상으로 기발한 실험을 했다. 앤더슨은 이 새 암컷이 어쩌면 수컷의 꼬리를 보고 짝짓기 상대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가정을 세웠다. 일군의 수컷에겐 꼬리의 절반을 잘랐다. 또 다른 집단에겐 자른 꼬리를 붙였다. 그리곤 두 집단간 암컷 사이에서 인기를 비교했다.  

각 영역 안에 둥지를 튼 암컷을 세어 본 결과, 꼬리를 잘린 수컷은 정상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암컷을 맞아들였다. 반면 꼬리를 붙여준 수컷은 훨씬 많은 암컷을 얻었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엄청나게 긴 꼬리를 만들어 줬더니 암컷들이 수컷의 모습에 정신을 못차린 것이다.

천인조 실험을 통해서 비추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원앙의 이야기와 배치된다.  원앙 수컷은 아내와 함께 다니다가 다른 암컷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미를 한다. 물론 아내가 보는 앞에서다.   원앙 사회에서 수컷은 자기 배우자는 지키면서 남의 아내는 빼앗으려 한다. 오리 종류의 새는 모두 그렇다고 한다. 일부일처제라고 믿고 있는 많은 새들이 사실은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원앙의 생활만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컷이 다 원앙 같지는 않다. 해마는 교미를 하고나면 암수가 뒤바뀐다.  해마 사회에서 수정이 되면 암컷은 수정란을 수컷의 배주머니로 넘겨준다. 해마 새끼들은 자기 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빠 해마는 새끼를 키워서 다 자라면 바다로 떠나 보낸다. 그 사이 엄마 해마는 다른 수컷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또 넘겨주고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    

'인간' 의 시각으로 원앙과 해마의 사례를 본다면 수컷 원앙과 암컷 해마가 단지 바람둥이라서 짝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의 교미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 생활환경에 적합한 교미를 하고 있는 것뿐이며 이들이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생태적 과정이다.
 

  

 

  

동물의 사회에서도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동물이 존재할까? 

개미와 진딧물의 예를 보자. 개미는 진딧물의 단물을 빨아먹는데 진딧물에서는 아주 작은 방울이 가끔 삐죽삐죽 나온다.  개미 입장에서는 힘들게 단물이 나오는 진딧물 뒷꽁무니만 바라봄녀서 감질나게 단물을 먹느니 그냥 진딧물을 통째 삼켜버릴 수도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미의 이런 습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는 진딧물을 살려놓고 계속 거기서 단물을 빨아먹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진딧물을 통째로 잡아먹지 않는다. 이런 방식을 택한 개미들이 진딧물을 바로 잡아먹은 개미보다 더 많이 번식하면서 그런 습성이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개미도 인간처럼 어떤 상황 앞에서 다양한 전략을 세우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인간이 지구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일상에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물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삶의 지혜  

인간은 상당히 모순적인 동물이다. 일본이라는 타국에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故 이수현 씨의 실화처럼 아름다운 일을 하는가 하면,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켜 대량 학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늑대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만 상대를 적당히 위협하는 수준이지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인간이나 몇몇 동물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런 절제된 듯한 동물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해 있는 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종족 번식 또는 종의 유지를 위한 행동이다. 

 

우리에게는 공존의 지혜가 조금 부족한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잇속대로 나무를 마구 잘라내고 동물을 죽이면서 스스로 환경의 위기를 자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개미를 비롯한 여러 동물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들이 진화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공존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 인간만 독불장군처럼 영원히 살 수는 없지요. 남을 배려해야만 우리도 사는 것입니다.    

- 최재천 <인간과 동물> pp 229~230 - 

  

그동안 인간은 인간의 시선과 입장으로 동물을 '오만과 편견' 으로 볼 줄만 알았다. 책을 덮고나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한 시선이 머쓱하게 느껴진다. 책에서 보여 준 동물의 세계는 인간 세계의 판박이나 다름없다. 정치와 사랑과 생존 전략이 숨 가쁘게 충돌하는 세계가 바로 생태계다.  <인간과 동물>생생한 사진이 곁들여진 21세기 이솝 우화를 읽은 듯하다.

인간은 무엇보다 인간들과 공생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사는 인간관계를 떠올려보면, 인간의 삶이야말로 다방면의, 가장 정교한 공생의 원리가 펼쳐지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사거나 파는 것도 결국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나 식물과의 조화로운 공생 관계를 조작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발상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난다. 힘을 가진 인간이 약한 인간을 착취하고 관계를 조작하는 현상들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려 한다. 인간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자연과의 관계를 이기적으로 변질시킬 때, 그 해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처럼,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착취하는 관계에서 해는 결국 착취자들에게 돌아오게 되리라는 교훈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얼핏 보면 손해 보는 것 같은 이 말은 공생의 원리가 보여주는 과학적인 진리이기도 하다.공생의 원리로 개미와 진딧물과 같은 약하고 작은 생물들이 오랜 세월 생존해온 비결을 우리 인간이 머리숙여 배울줄 알고 되새기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최 교수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알면 사랑하라' 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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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0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9-11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상이 그 무엇이든 좋은 말씀이죠!
추석인사 고맙습니다~~~
보름달 구경은 어렵다지만 즐거운 일 많은 추석되면 좋겠습니다.
추석이 지나면 열공모드로 들어간다니 응원합니다!!

cyrus 2011-09-14 17: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응원을 해준만큼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

2011-09-11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1-09-1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제일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은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진행하는 '늘푸른 인생'이예요. 거기 나오는 어르신들 얘기하시는 거 보면 정말 할아버지들은 정말 한결같이 할머니 속 썩이고 바람 나고 노름 하고 가산 탕진하고 그러면서도 자손은 많이 낳고...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제나 한세상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프로그램이예요. 바람을 피건 게으름을 피건 노름을 하건 어쩌건 아무튼 방송에 나와 정말 그렇게 한마디 하실 수 있는 분들은 어쩌니 저쩌니 해도 결과적으로는 함께 살고계시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 드네요. 우리도 알라딘 서재에서 오래 오래 함께 '공생'하기루해요. 네?^^

cyrus 2011-09-14 17:22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이상용 씨가 진쟁하는 우정의 무대를 봤어요.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군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였죠 ^^;;
TV 속 군인들의 모습과 충성하는 거수 경례하는 모습이 멋져보였는데,,
어른이 되면서 실제로 군인 생활을 해보니깐,, 제가 어렸을 때 너무
한참 잘못 생각했더군요 ㅎㅎ

'공생' 이라는 표현,, 이렇게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 생활을 비유하는데도
적절하고 좋아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5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앙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요즘은 꽤 알려졌더군요.사진의 원앙수컷의 저 현란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cyrus 2011-09-16 18:57   좋아요 0 | URL
실제로 원앙 수컷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이쁘더군요. 그런데
제 주위에는 원앙 부부를 잉꼬 부부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더군요, 심지어 화려한 깃털의 원앙 수컷을 암컷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48   좋아요 0 | URL
이쁘고 화려하면 암컷일 것이라는 편견이죠! 사실 사람의 암컷(여자)중에서도 못생긴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자는 다 이쁘답니까? 그리고 남자들의 아름다움도 대단한 거죠.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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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혁명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죽기 직전에 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 세월을 지배해왔던 천동설의 체계를 무너뜨렸다.    

이처럼 사유방식에서 혁명적인 대전환을 이룰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엔 의학을 공부한 폴란드의 천문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주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꿔서 '천문학의 대전환' 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것은 '사고의 혁명'을 가져왔다.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혹성의 하나인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구 중심적인 견지를 태양 중심적인 견지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신이 만든 천체는 완전한 원의 궤도를 돈다고 말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케플러 는 혹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돈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발표한다. 이 법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으로 이어지고, 갈릴레이의 법칙으로부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의 확립과 그에 따른 자연상. 세계상의 변혁의 성립이 이루어졌던 17세기 유럽의 시대를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라고 불리우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마스 S. 쿤<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서 과학 지식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학이 이상 현상의 출현으로 위기에 부딪혀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그 결과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때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체현상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학설이었다. 이처럼 상당기간 동안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단계를 정상과학 단계라고 한다.  이렇게 연구를 진행하다가 정상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정상과학은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근대가 시작될 즈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이 너무 복잡한 천체현상을 상당수 과학자들은 발견하게 되면서 천동설은 학문적 당위성으러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이를 위기 단계라고 한다.  

이 위기 단계에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설명체계를 모색하게 되면서 많은 가설이 등장하고, 그 가설들 중에서 보다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이나 모형이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천동설의 대안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가설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었고, 또 다른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이 지동설이 실제로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30여년 동안이나 실험과 관측을 하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브라헤의 천문학 연구를 이어 받은 케플러에 의해 그 오류가 지적되었지만 지구중심설을 태양중심설로 전환시켰으며 이러한 지배학설의 전환을 과학혁명 단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혁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 속에서 ‘과학 혁명’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우리가 ‘과학’ 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추상적인가 아니면 단일한 실재인가라는 것이다.  도리어 여러 개의 구체적인 ‘과학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자연이라는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기존의 역사관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과거를 보는 현재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당대인들의 경험과 시각 속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 혁명을 볼 때 필요한 질문은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혁명적인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는가이다. 

피터 디어가 쓴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과학 혁명’ 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통해 근대 과학의 발달 과정뿐만 아니라 그 당시 과학자들이 '과학' 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탐구하였는지 묘사하고 있다.  

 

 


   1500년 :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텔레스주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스콜라 철학을 탄생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목표는 중세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기독교 신앙에 철학을 이용하여 이성적인 근거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 당시 오랫동안 중세 학문을 지배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을 반영하였다.  

그 당시만해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학문의 내용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이 때부터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이 유행하였는데 중세의 자연철학은 과학적. 실용적 가치보다는 신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 로 격하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신학적 교리를 설명하는데 이용하였다.  오직 신이 조물주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를 이해하는 학문이 자연철학이었던 것이다.    

한 때 몇 몇 학자들 사이에서는 12세기 아랍 철학자였던 아베로에스(1126~1198)의 사상을 받아들여 철학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철학의 독립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대해 논의를 점화시켰지만 자연철학과 종교와의 불가분적 관계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16세기 인문주의 :  '과학적 르네상스' , 공존의 시대

 

 

 

  

(위) 코페르니쿠스의 <천제의 회전에 관하여>에 실린 지동설 체계도  

(아래)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에 실린 도판    

  

14세기에 르네상스 시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인간의 지적. 창조적 힘 역시 재흥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의 동시 출간은 ' 과학적 르네상스 ' 가 등장하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Renaissance)' 라는 단어에는 '부활, 부흥, 재생'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문화의 부흥을 부르짖는 당시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 역시 오랫동안 지배해오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도 고대의 권위적인 학문의 영향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이전에 유지되어온 기존의 학설을 폐기하려는 의지보다는 선대 학자들의 이론을 전수받아 복원하겠다는 인문주의적 의지가 더 강했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인 베살리우스 역시 인문주의적 감수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중세의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지배했다면 의학에서는 갈레노스(131?~201?)의 해부학 이론은 오랫동안 학문적 권위를 누렸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삼았으며 자신이 주장한 원칙들은 어느 정도 갈레노스의 원칙을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적 르네상스' 에는 고대인의 지식을 뛰어넘는 창조성과 함께 그들의 지식을 모방하고 복원이 강조되었던 공존의 시대였다.   

  

 

  17세기  :  혼합된 잡종의 과학

   

  

' 아는 것이 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1561~1626)  

 

이전의 과학이 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면 16~17세기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실용적인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섭정 시대 때 궁정 행정인으로 활동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국가의 역할에 요구되는 자연철학을 강조하였다.  그는 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인간의 기술적 진보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의 등장으로 학문에서의 '실험' 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의 자연철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답게 베이컨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지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의 특징과 비슷하다.  베이컨에게 '실험' 이란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결과를 다시 한 번 검증하는 행위일뿐이었다. 

 

 

 토머스 홉스 (1588~1679)

 

후에 파스칼, 보일 등이 과학적인 검증 과정으로 이루어진 '실험철학' 이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자연철학' 의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철학자 토머스 홉스마저 보일의 실험이 전혀 '자연철학' 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자연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와  

자연현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뉴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애초부터 고수하려는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영국 경험론자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귀납적인 방식과 경험을 강조하였으며 훗날 '뉴턴주의' 라는 과학철학 스타일을 형성하게 된다.    

뉴턴은 가설을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이라 하여, 이를 배격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저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관념적, 이성적 고찰보다는 거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경험적 기술에 치중했다.  뉴턴은 <광학>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빛을 입자라고 설명하면서도 빛 입자의 구체적 운동과 작용에 대해서는 어떤 실험적 증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뉴턴주의와는 반대로 데카르트주의는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관을 강조하였다.  세계와 자연의 모든 과정이 필연적이고도 자연적인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그 기계적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자연의 생물학적 현상들을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책의 저자 피터 디어의 표현대로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주의와 뉴턴주의 간의 논쟁의 시대동안 과학은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실증적인 면이 혼합된 잡종의 학문이었다.  

 

 

  과학혁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과학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는 시대에는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터 디어의 <과학혁명>은 자신의 책이 발간하기 5년 전에 쓰여진 동명 제목인 스티븐 샤핀<과학혁명>(영림카디널, 2002)에 응수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스티븐 샤핀은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학계의 주장에 맞서 도발하였지만 피터 디어는 샤핀의 주장을 정면에 반박하기보다는 샤핀의 관점대로 기존의 과학혁명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전 전회' 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선천적 형식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고 설명하였다. 즉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 구질서의 파괴를 동반한 사고방식의 변혁을 강조하고 있다.  니체는 커다란 사유의 망치로 낡은 구 이론들을 파괴함으로써 '망치로 철학하기' 가 가능했겠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는 코페르니쿠스는 니체처럼 '망치로 과학하기' 가 불가능했다.  아니, 아예 망치를 집어 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자연 철학은 여전히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근대 과학의 주요한 분야인 화학이나 생물학은 18세기에 와서야 ‘과학 혁명’에 해당하는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신구의 과학 학문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구성요소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통일성을 내포하면서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양식의 과학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제국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과학혁명 역시 하루 아침에 근대사회로 전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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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정말 다양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읽으시네요.
만화만 빼고 다 읽으시는것 같아요, 아, 판타지도 안 읽으시지.. ^^

저는 맹목적인 진리를 추구하던 때가 차라리 속편하구나 싶기도 해요.
칸트처럼 주관적인 현상학의 관념은 정말 피곤하거든요.
대체! 무엇인 진리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라,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으니까요. ㅎㅎ

cyrus 2011-07-28 19:36   좋아요 0 | URL
만화도 좋아해요. 판타지나 SF도 읽어보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독서 습관에 변화를 준다는게 쉽지 않네요. ^^;;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좀 그런 면이 있죠, 전 학기 때
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 추상적인 내용이라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