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 현실문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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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낙서를 하려고 크레파스를 쥐었던 손은 왼손이다. 그 후로 나는 왼손잡이가 되었다. 하지만 왼손의 임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 그때부터 부모님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야 하는 거야.” 누구도 왼손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와 오른손만을 써야 할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을 쓰는 것이 올바르며 왼손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런 원인 없는 편견과 이유 없는 억압이 어디 왼손잡이에게만 해당할까? 세상은 귀가 따갑도록 배워온 올바른 상식과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면 여지없이 낙오자’, ‘패배자’, ‘문제아라고 낙인을 찍으며 배척한다. 차별과 혐오는 차이에서 시작한다. 나와 다른 존재는 낯설고, 낯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혐오와 수치심에서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분석한 것처럼, 혐오와 수치심은 공통점이 있다. 수치심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수치심 문제의 핵심에는 정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들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정상으로 정의하고 자신의 약점에서 생겨난 수치심을 타자에 투여하여 그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수치심은 타인에게 모욕과 수치심을 주는 공격적인 행위로 표출된다. 자녀에게 오른손을 쓰라고 알려준 부모도 처음에는 왼손잡이로 태어났을 것이다. 왼손잡이를 향해 눈으로 욕하는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시작하면 왼손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체의 일부가 된다. 왼손잡이는 혹독한 교정 끝에 오른손잡이가 된다.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편한 자식을 혼낸다. 부모는 오른손을 활용할 수 있는 정상적인 존재라는 기만 위에 있으므로 왼손잡이 자식을 통제한다. 왼손잡이라는 수치심은 자신의 약점을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이 믿고 있는 삶의 방식(“오른손을 쓰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다”)을 방어하기 위해 타자를 공격한다.

 

사회에 정상성 신화가 작동하게 되면 비정상적인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 모두가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 취약함을 덧씌울 수 있는 타자가 필요하게 된다. 타자라는 단어의 자리에 항상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가 있다. 이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자신을 비정상적인 존재와 비교하려는 욕구에서 온다. 이러한 반응은 곧 몸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다. 우리 몸은 질병과 바이러스에 취약하고, 냄새나는 불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일라이 클레어(Eli Clair)는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이다. 그는 장애, 환경, 성소수자 운동 등에 참여하는 젠더 퀴어 페미니스트. 뇌병변 장애인은 손 떨림 증상을 보인다. 클레어의 오른손은 떨림 증상을 보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오른손 때문에 놀림감을 받았다. 그러나 클레어의 연인이자 트랜스젠더 활동가인 새뮤얼 루리(Samuel Lurie)는 클레어의 떠는 오른손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 느껴지는 촉감을 관능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클레어는 자신의 오른손이 항상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신체적인 약점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개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다.

 

클레어의 대표작 망명과 자긍심은 지금까지 3판이 나올 정도로 장애학, 퀴어 이론, 페미니즘의 고전이 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종 차별, 동성애 혐오, 계급 차별, 성차별이 교차하면서 관통한 자신의 삶과 몸을 분석한다. 그가 책 2판 서문에서 밝히기를 (뇌성마비를 안고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통, 비탄, 부담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열어젖힌다.” 그의 분석 방식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활동한 흑인,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의 다중 쟁점(multi-issue) 정치 활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다중 쟁점 정치는 단일 쟁점(single-issue) 정치의 반대말이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다중 쟁점 정치는 가부장제와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강화되는 관계에 주목한다. 다중 쟁점 정치는 젠더, 인종, 사회계급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다중 쟁점 정치는 여성/남성’, ‘피해자/가해자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분석하는 방식의 한계를 넘어 억압과 특권이 복잡하게 뒤얽힌 경험과 관점을 이해하는 사회분석 전략이다.

 

이 책은 크게 장소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이루어졌다. 클레어가 말하는 장소다중 쟁점 정치가 가능한 세상을 의미한다. 그는 노동계급을 자연 파괴에 일삼는 나쁜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생태계 보호에 앞장서는 환경운동가들, 시골에 거주하는 퀴어들의 활동과 존재감을 배제하는 도시의 퀴어 활동가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클레어의 글은 우리가 환경문제,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보일 때 흔히 놓칠 수 있는 세부 사항들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멸종 위기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벌목 노동자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법적으로 막으면 다 해결될까? 일자리를 잃은 벌목 노동자들의 생계는 누가 보장해주는가? 생태계 보호라는 단일 쟁점에 치우치면 벌목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경제권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들과의 연대가 어려워진다. 클레어는 위기의 지구를 구하려면 환경 파괴에 일조하는 그릇된 신념과 정책만 개선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변화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시골에서 자란 클레어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중산층 퀴어 활동가의 활동이 시골의 퀴어 공동체를 고립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삶, 정체성, 공동체, 정치가 공존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사회를 갈망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를 누구나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으로 비유한다.

 

반면에 차별과 혐오, 그리고 수치심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에 무단 침입하는 도둑이다. 도둑은 타인의 몸에 거짓말을 심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제하고 그 사람들의 욕망을 파괴해버린다. 클레어는 어린 시절에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뻔한 도둑과 함께 살았는데, 그 도둑은 바로 자신을 강간한 친아버지다. 클레어의 떠는 오른손을 비웃으면서 그의 장애를 멸시하던 친구들도 클레어의 몸에 침입하여 짓밟는 도둑들이다. 클레어는 도둑들이 판을 치는 지역에 벗어나 자신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을 찾기 위해 이주한다. 그는 자신의 이주 생활을 망명이라고 말한다.

 

만약 클레어가 수치심을 받아들이면서 고립을 선택했다면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에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혐오와 폭력의 말들에 저항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망명과 자긍심은 퀴어, 장애, 페미니즘, 환경, 계급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세상의 구조에 대해서 다시 질문하도록 만든다. 이 책의 장점은 자신의 위치를 끝없이 돌아본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클레어가 자신의 몸을 열어젖혀 사유하면서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 사회운동에 동참하는 내가 변화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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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10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선생님은 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왼손으로 글씨 쓰는 아이한테 고치라 하고... 왼손으로 쓰든 오른손으로 쓰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데, 오른손만 쓰게 해서 오른손잡이가 많아지고 세상은 오른손잡이를 더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지금은 예전보다 덜한 듯합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을 생각하는 건 쉽게 바뀌지 않는군요 그렇다 해도 자신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희선

transient-guest 2020-05-1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손을 늘 바른손이라고 말하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한국은 더 심했지만 어디나 규정에 맞춰 사람을 재단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걸 보면 사회와 인식의 변혁은 늘 꾸준히 가져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Angela 2020-05-1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어떠신가요 왼손글씨 아니면 오른손으로 바꾸셨어요?
 

 

 

로트레아몽(Lautréamont)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는 가장 난해한 문학작품 중 하나다. 우리는 이 작품을 가장 난해한 시아니면 가장 난해한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 로트레아몽, 윤인선 옮김 말도로르의 노래(달섬, 2020)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말도로르의 노래(문학동네, 2018)

 

    

 

학자와 역자들은 노래 여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산문시로 보고 있지만, 그 속에 시의 기본 형식인 운율과 압운(rhyme)은 없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노래가 시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로트레아몽이 독보적인 산문시 세계를 일구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노래프랑스 산문시 문학의 계보에 넣어야 할 작품이다.

    

 

 

 

 

 

 

 

 

 

 

 

 

 

 

 

 

* 보들레르, 황현산 옮김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2015)

*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파리의 우울(민음사, 2008)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끈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이 평가했듯이 보들레르(Baudelaire)산문시를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보들레르 이전에 이미 산문시와 유사한 형식을 갖춘 글을 쓴 프랑스 작가들이 있었다. 보들레르는 요절 시인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Aloysius Bertrand)의 유고인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를 스무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프랑스의 음악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동명의 피아노곡을 만든다]. 그는 이 책을 유명하다고 불릴 만한 작품이라서 칭찬한다. 그리고 자신도 <밤의 가스파르>와 유사한 어떤 방식의 글을 시도한다. 그 글이 바로 파리의 우울이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헌사에서 자신의 꿈은 산문시를 쓰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우리 중 누가 한창 야심만만한 시절, 이 같은 꿈을 꾸어보지 않은 자가 있겠소?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상념의 물결침과 의식의 경련에 걸맞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 동시에 거친 어떤 시적 산문의 기적의 꿈을 말이오. (파리의 우울민음사, 18)

 

 

말도로르의 노래(달섬)지인들(출판업자와 경제적 후원자)에게 보낸 로트레아몽의 편지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로트레아몽은 186910월 말에 쓴 편지에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밀턴(John Milton), 사우디(Robert Southey), 뮈세(Alfred de Musset), 그리고 보들레르가 한 것처럼 악을 노래했다고 밝혔다. 로트레아몽은 여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노래를 이미 다 쓴 상태였다. 인쇄 작업도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출판업자는 노래의 대담성과 잔인성이 검찰총장의 검열에 걸릴 수 있다면서 출판을 거부한다. 그래도 로트레아몽은 작품 출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글에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면서 보들레르의 시 부록을 보내달라고 출판업자에게 부탁한다. 로트레아몽은 다음 작품에는 이 아니라 ’, ‘희망’, ‘행복을 노래하겠다고 밝힌다. 노래를 외면하고 기피하는 당대의 반응에 좌절감을 느낀 로트레아몽은 낭만주의 문학을 끔찍한 궤변에 불과한 시적 탄식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뮈세 등의 선배 작가들을 가냘픈 여자’, ‘항상 우는 흉내를 내는 연약한 문호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186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시기에 열여덟 살의 로트레아몽은 자신이 태어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떠나 프랑스의 왕립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로트레아몽의 학창 시절에 대해 자세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젊은 로트레아몽이 보들레르의 글을 읽으면서 영감을 얻은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보들레르의 글을 참고하겠다고 편지를 통해 밝혔으므로 보들레르와 로트레아몽의 문학적 교집합(“대도시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보들레르와 로트레아몽”)[]에 대해서 논의해볼 수 있다. 아마도 로트레아몽은 풍기문란 혐의를 받아 검찰의 검열을 피하지 못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래의 대담성과 잔혹성은 악의 꽃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로트레아몽은 1867년부터 파리에서 생활한다. 그해부터 그는 노래의 초고를 쓰기 시작한다. 로트레아몽이 산문시의 등장을 선언한 파리의 우울도 눈여겨봤다면 노래》도 리듬과 각운이 없는 시적 산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래가 로트레아몽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 바람에 ‘시적 산문의 두 번째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다. ‘시적 산문의 두 번째 기적은 로트레아몽이 죽은 지 훨씬 지난 뒤에 나타난 20세기의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 원문은 로트레아몽의 시에 나오는 구절로 알려진 해부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이다. 이 구절은 초현실주의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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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5-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우울을 두 권 다 갖고 있어요. 문학동네의 것이 글자가 작아 민음사 걸로 또 샀지요. ㅋ

cyrus 2020-05-09 14:39   좋아요 0 | URL
저는 민음사 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문학동네 판을 역자의 주석 위주로 읽었어요. ^^
 
말도로르의 노래 달섬 세계고전 13
로트레아몽 지음, 윤인선 옮김 / 달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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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받친 천재를 아시오? 그 천재의 이름은 이지도르 뒤카스(Isidore Ducasse). 사실 이 본명보다는 가명인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이 잘 알려져 있다.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난 로트레아몽은 학업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로트레아몽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며 몬테비데오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1868년에 로트레아몽은 익명으로 <말도로르의 첫 번째 노래>를 발표한다. 특이하게도 그 책의 저자 이름은 없고 ★★★만 표시되었다. 이듬해에 로트레아몽은 말도로르의 두 번째 노래를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지만, 출판업자는 출간을 거부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노래부터 시작해서 여섯 번째 노래까지 완성한다. 1870년에 로트레아몽은 언젠가는 나오게 될 책(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한다)을 위해 그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시집(Poesies)>을 발표한다. 그해 11월 말 아침에 로트레아몽은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으며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6부로 구성된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는 그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로트레아몽은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의 유년시절과 사망 원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짧은 인생의 시작과 끝이 영원한 비밀로 남게 되는 바람에 그에 대한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대중은 요절 시인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혹자는 로트레아몽을 정신 이상자로 보고, 그가 광기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중은 요절 시인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를 둘러싼 추측성 말들이 나오게 된 또 다른 원인은 말도로르의 노래의 난해성에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말도로르(Maldoror)가 저지르는 나쁜 행동들과 해석하기 어려운 잡다한 생각들이 장황하게 나온다. 말도로르의 노래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로트레아몽의 글 쓰는 방식은 독자에게 불친절하기로 악명 높다. 인칭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글을 읽다가 헤매기 쉽다. 사실 말도로르의 노래는 수수께끼 같은 단어와 단번에 봐도 이해하기 힘든 구절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하기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말도로르의 노래번역본을 읽을 때는 번역의 질에 대해서 따지지 말자. 읽다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을 만나면 그냥 넘어가면 된다.

 

로트레아몽은 독자의 분노를 유발하는 글을 쓰려고 작정한 듯이 상당히 공격적으로 글을 썼다. ‘말도로르의 첫 번째 노래의 첫 문장은 독자를 향한 경고로 시작한다.

 

 

 

 자신이 읽는 글처럼 순간적으로 잔인해지고 대담해진 독자가, 이 어둡고 독으로 가득 찬 페이지들의 황폐한 늪지대를 지나면서, 방향을 잃지 않고, 험하고 거친 자신의 길을 찾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가 엄격한 논리와 적어도 자신의 의심과 동등한 정신적 긴장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이 책의 치명적인 발산물들이 마치 물이 설탕을 적시듯 그의 영혼을 적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다음에 이어지는 페이지들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 단지 몇 사람들만이 위험 없이 쓰디쓴 이 열매를 맛볼 것이므로. 따라서 수줍은 영혼이여, 그 길은 미탐험의 황야 속으로 더 멀리 잠입하기 전에, 그대의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지 말고 뒤로 돌리라.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 것을 잘 들으라. 그대의 발걸음은 앞이 아니라 뒤로 돌리라. (7)

    

 

 

이 글의 실체를 잘 모르는 독자는 이 문장을 보면서 로트레아몽이 치명적으로 위험한 글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과장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자신감 있는 독자라면 여섯 번째 노래까지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도 그 사람은 이 글을 쓴 로트레아몽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신을 모독하고,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는 말도로르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로트레아몽은 생전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의 스타가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문법과 서술 구조를 무시한 로트레아몽의 파격적인 글쓰기에서 자유와 반항의 힘을 확인했다. 말도로르의 노래고전이 될 만한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의심하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그들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책에 정말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말도로르의 노래1997년에 나왔으나 한동안 절판된 번역본(출판사는 청하’)의 개정판이다. 국내에 출간된 말도로르의 노래완역본은 두 종이다. 그중 한 권은 2년 전에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것(출판사는 문학동네’)이다. ‘달섬출판사에서 나온 말도로르의 노래의 역자는 로트레아몽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록으로 로트레아몽이 쓴 편지들이 실려 있다. 이 편지들은 말도로르의 노래의 집필 의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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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Chehov)가 만들어낸 인간의 모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는 인간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였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모로아(Andre Maurois)현대의 의사는 환자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예술가가 돼야 하며 철학가의 지능과 소설가의 재주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호프가 현대의 의사에 가장 적합한 작가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체호프는 의사였다. 모스크바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아내를 의학, 애인을 문학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삶을 규정했다. 그러나 병원 근무와 집필 생활을 병행한 삶은 체호프의 건강을 나쁘게 만든 원인이 된다. 작가로서 명성이 차츰 높아졌지만 젊은 시절부터 걸린 폐결핵은 평생 체호프의 건강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1904년에 요양 생활을 하다가 사망한다.

    

 

 

 

 

 

 

 

 

 

 

 

 

 

 

 

 

* 안톤 체호프 지루한 이야기(창비, 2016)

* [품절] 안톤 체호프 귀여운 여인(시공사, 2013)

*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9)

 

 

 

문학과 의학의 만남은 체호프의 죽음을 재촉했지만, 그에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제공해주었다. 체호프가 남긴 수백 편의 소설 중에 생명과 죽음, 질병의 고통, 광기, 의사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있다. <6호실> 또는 <6호 병동>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중편소설은 체호프가 작가로서의 원숙기로 접어든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시골 마을에 사는 정신병원 원장이 환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환자로 몰리는 과정을 그렸다.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있는 <지루한 이야기>는 죽음을 앞둔 학자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는 과정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지루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체호프의 수작이라 할 수 있는데, 창비에서 나온 지루한 이야기는 우리말로 번역한 이 작품을 실은 유일한 책이다. 표제작인 <지루한 이야기> 이외에 <검은 옷의 수도사>,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출판사의 책 소개 내용 중에 오류가 있다. <지루한 이야기>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중편이라고 소개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지루한 이야기>따분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965에 처음 번역되었다. 최초의 번역 작품이 수록된 책은 문우출판사에서 나온 러시아 문학 전집 2이다. 그리고 1983년에 주우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인 사랑스러운 여인, 지루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책은 체호프의 중 · 단편을 선별해서 모은 책이며 사랑스러운 여인<귀여운 여인>의 이명이다. 이듬해에 주우세계문학전집학원세계문학전집(출판사는 학원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간되었는데 역자나 수록 작품은 주우사의 책과 같다.

 

문우출판사의 러시아 문학 전집동완, 사랑스러운 여인, 지루한 이야기박형규가 역자로 참여했다(두 책 모두 단독 번역이 아닌 공동 번역이다), 두 사람 모두 1세대 러시아 문학 번역가. 이미 두 차례 번역된 체호프의 작품을 국내 초역이라고 잘못 소개한 것은 책 소개 글을 만든 창비 출판사 측 또는 역자(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번역으로 유명한 석영중 교수)의 착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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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5-06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한달동안 책 몇 권을 끝나고서평을 한꺼번에 확~쓰시는군요? ㅎ

cyrus 2020-05-06 23:32   좋아요 0 | URL
가끔 책만 읽고 싶어지는 날이 오긴 해요. 사실 2월 말부터 대구에 있는 모든 공공도서관이 휴관하면서 글쓰기 욕구가 한풀 꺾었어요. ^^;;
 
이상한 수학책 - 그림으로 이해하는 일상 속 수학 개념들
벤 올린 지음, 김성훈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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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나오는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은 재미없다. 하루 18시간씩 문제를 풀었다는 수학자 폴 에어디시(Paul Erdos) 같은 비범한 인물이 아닌 이상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 재미없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학 수업 시간에 문제 하나를 제대로 풀지 못해서 창피를 당했거나 한 번 놓친 진도를 따라잡지 못해 좌절한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수학에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배웠던 수학 교육방식이 잘못되었다.

 

당신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싫어해도 수학을 좋아할 수 있다. 아니면 수학에 가까이하기가 힘들어도 재미없다는 수학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 수 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상한 수학책을 읽고 나면 수긍이 간다. 이상한 수학책을 읽는 것과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책은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인간적인 학문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이상한 수학책의 저자는 수학 교사다. 그는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다가 수학이 인기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수학을 가르치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수학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공식과 기호로 가득한 학문이 아니라 아름답고 논리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대부분 수학 교사는 문제를 만들려고 이 예술을 가져와 잘게 썬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조각난 수학을 원래 모습으로 맞추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수학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싸매다 보면 골머리를 앓는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수학 공부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이 치르는 수학 시험은 말 그대로 수학능력시험이다(여기서 말하는 수학數學이지 修學이 아니다). 문제의 정답을 정해진 시간 안에 찾는 수학 능력은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한 이력서의 일부가 된다. 저자는 학생들과 함께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관해서 토론했다. 토론에 참여한 어떤 학생은 대학과 고용주에게 우리가 똑똑하고 일도 열심히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학을 공부한다고 말했다.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경제학을 우울한 학문(dismal science)이라고 불렀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학도 우울한 학문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상한 수학책은 수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우울해지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이상한 그림으로 보는 수학(Math with Bad Drawing)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한다. 그는 직접 그림을 그려가면서 수학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수업 시간에 수학 선생님들이 칠판에 써가면서 가르쳐주던 공식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 특히 수학 문제를 풀기 싫어하고 수학 공식을 보면 어지러워하는 당신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수학은 우울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이다.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를 빨리 풀라고 압박하거나 수학 공식을 암기하도록 만드는 교육 방식은 수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인간적인 학문인 수학은 문제를 잘 푸는 똑똑한 학생을 치켜세우고, 학생들에게 경쟁을 유도하는 시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학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학생은 문제의 정답을 찾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인간적인 수학은 문제를 천천히 풀어보려는 학생들에게 배려심이 깊다. 이 학생들은 수학 공식을 전혀 몰라서 문제를 천천히 푸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한 문제에서 막히면 다른 문제로 넘어가지 못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불리한 학생도 아니다. 이들은 단순한 문제도 문제 풀이의 지름길이나 다름없는 공식에 의존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대부분 사람은 문제를 느리게 푸는 학생들을 보면 답답하게 느껴지고 이상하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는 믿음이 이상한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수학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만든 장벽이다.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어떤 현상에 대한 제 생각을 확률과 통계를 동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저자는 확률론을 온갖 역설이 부비트랩처럼 깔려 있는 현대 수학의 미묘한 가지라고 말한다.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확률론의 역설을 피하지 못하면 헛똑똑이가 된다. 통계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데 유용한 학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통계를 지나치게 믿는 것을 경계한다. 통계가 보여주는 단순화의 장점은 오히려 대중을 속이는 거짓말이 될 수 있다. 통계학은 불완전한 목격자다. 진실을 말하지만, 결코 진실을 전부 말하지는 않는다.”(294) 알고 보면 통계학도 인간처럼 허점이 있는 학문이다. 이런 젬병이 있는 수학이라면 한 번쯤은 배워볼 만하다. 수학이라는 학문도 가끔은 바보가 된다. 고작 수학 문제를 못 푼다는 이유로 자책하면서 바보 취급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수학과 절대로 친해지기 힘들어도 야구를 정말 좋아한다면 이 책의 17장만이라도 꼭 읽어보시라. 17장에 야구선수의 능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타율과 세이버매트릭스(Sabermetrics)의 탄생 과정과 전설의 4할 타자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이 세상에 수학이 없었다면 야구라는 스포츠 종목도 없었을 것이다. 수학을 미워하지 말자.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수학이 아니라 수학 교사와 학생들 모두 우울하게 만드는 이상한 교육방식이다.

 

 

 

 

Trivia

 

저자는 빌 제임스(Bill James)가 타율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야구 통계에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한다(307). 그가 세이버매트릭스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인물인 건 맞다. 그러나 빌 제임스가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빌 제임스는 세이버매트릭스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 아니다.

 

최초로 세이버매트릭스를 만든 사람은 월간 야구 전문 잡지 <베이스볼 매거진(Baseball Magazine)>의 편집장이었던 F. C. 레인(Ferdinand Cole Lane)이다. 레인은 1915<베이스볼 매거진>타율 시스템을 왜 바꾸어야 하는가(Why the System of Batting Averages Should Be Changed?)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세이버매트릭스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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