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는 별명이 많다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다(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니다)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 언급된 별명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보지 않았다작년에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내 눈에 띈 별명들이 있었.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두 번째 선정 도서]

호메로스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 (도서 출판 숲, 2015)





신과 같은 오디세우스오뒷세이아》 1권 20행(천병희 옮김)에 오디세우스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오디세우스는 왕족 출신이다다른 영웅들에 비해 신과의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호메로스는 시작부터 서사시의 주인공이 신과 대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디세우스는 뛰어난 지략가다. 그의 지혜로운 면모와 관련된 별명이 꾀가 많은이다그 밖의 별명은 고귀한’, ‘참을성이 많은 등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는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안으로 진입하는 작전에 성공한다) 길고 긴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부하들과 함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오는 길에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us)가 사는 동굴에 잠시 정착한다오디세우스 일행은 동굴에 갇혀서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는 위기에 처한다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다폴리페모스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불에 달군 뾰족한 나무 막대기로 거인의 눈을 찌른다오디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동굴에 탈출하지만오디세우스는 오만했다그는 배를 타고 탈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폴리페모스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다폴리페모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이다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아들의 절규를 들은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 일행의 귀환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험난한 여정 끝에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이타카에 돌아온다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그러나 이타카 남자들은 페넬로페에게 구혼하기 위해 궁전으로 모여든다100명이 넘는 구혼자들은 제 집인 것처럼 주인 없는 오디세우스의 궁전에 눌러앉아 생활한다구혼자들의 무례한 구애에 지친 페넬로페는 시아버지를 위한 수의가 완성되면 새 남편을 결정하겠다고 약속한다그녀는 낮에 베를 짜고밤이 되면 낮에 만든 것을 다시 풀었다이렇게 해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재혼 결정을 미룰 수 있었다.


변장한 채로 오디세우스는 궁전으로 돌아왔고, 어엿한 어른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와 충직한 부하들과 함께 구혼자들을 죽인다페넬로페를 따르는 시녀는 총 50명이었는데그중 12명은 구혼자들의 애인이었다오디세우스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열두 명의 시녀에게 피범벅이 된 구혼자들의 시체를 깨끗하게 정리하라고 명령한다뒷정리가 끝난 후에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과 잠자리한 시녀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 교살한다.

















아폴로도로스강대진 옮김 그리스 신화》 (민음사, 2022)


아폴로도로스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도서 출판 숲, 2004)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페넬로페는 정숙한 아내를 설명하거나 신화 속 악녀들과 비교할 때 자주 거론된다그러나 신화는 여러 사람이 만든 이야기다또 시간이 지나면 신화 속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다많이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작가들은 페넬로페가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고 주장했다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블리오테케>(Bibliotheca) 신화 모음집이다아폴로도로스는 페넬로페에 대한 다른 형태의 신화를 소개한다그가 인용한 신화에 따르면 페넬로페는 구혼자 중 한 사람인 안티노오스(Antinous)와 몰래 정분을 맺었고오디세우스는 절개를 저버린 페넬로페를 살해했다미상의 작가가 쓴 신화는 원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페넬로페를 묘사했다페넬로페와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반인반수의 목신 판(Pan)이다.
















[절판] 조반니 보카치오임옥희 옮김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 (나무와숲, 2004)





데카메론을 쓴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총 106명의 여성을 소개한 유명한 여자들이라는 책을 썼다그는 이 책에서 페넬로페를 정절을 지킨 영원한 모범으로 칭송한다당연히 그가 참고한 글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다그리고 구혼자 중 한 사람과 부정을 저지른 페넬로페를 묘사한 글도 언급한다이 글을 쓴 사람은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시인 리코프론(Lykophron)이다하지만 보카치오는 리코프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페넬로페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지난 시점에도 순수한 도덕의 표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신화(myth)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우리가 아는 신화의 의미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또 다른 의미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근거 없는 믿음은 주인공을 위한 스포트라이트주인공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을수록 주인공에게 향한 스포트라이트의 불빛은 더 강렬해진다. 항상 그들은 주인공의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 한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은 희끄무레한 조연이 되고주인공과 대립한 인물은 주인공의 팬들에게 비난받는 악인이 된다이렇게 되면 조연과 악인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세계문학 작품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5년 1월의 책]

[개정판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 (문학동네, 2024)


[구판 절판] 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문학동네, 2005)

 




오디세우스 신화를 패러디한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 페넬로피아드는 근거 없는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 영웅을 미화했는지 보여준다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영웅이다.”, “페넬로페는 정숙한 아내다.”, “구혼자들과 사귄 열두 명의 시녀는 나쁜 여자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디세우스 신화를 접한 독자들은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해석을 선호했다이것을 거꾸로 뒤집는 해석은 환영받지 못한다.








페넬로피아드는 신화(근거 없는 믿음)를 뒤집은 신화(이야기)이 소설의 주인공은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에게 희생당한 열두 명의 시녀다작가는 호메로스가 듣지 못한 페넬로페와 시녀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그녀들의 목소리는 ()신화적이다반신화적인 페넬로페는 신분이 아주 낮은 시녀들을 자매처럼 대하면서 어울려 지낸다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열두 명의 시녀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자책한다반신화적인 시녀들은 외로운 페넬로페를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다그녀들은 구혼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알아낸다호메로스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유혹에 굴종한 시녀들을 용서하지 않는다하지만 애트우드의 시녀들은 페넬로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몸을 희생하면서 구혼자들에게 접근했다.


신화를 반신화적인 관점으로 읽는다면우리가 당연하다면서 받아들인 해석들이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근거 없는 믿음이 오래 지속되면 여성이 불리해지는 남성 문화가 된다성경과 함께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인 신화는 가장 오래된 남성 문화를 낳았다영웅호색은 성적 유혹에 이겨내지 못한 남성 영웅의 모습을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포장한다여성의 몸을 마치 정복하듯이 탐하는 영웅은 남성들의 존경심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반면 여성에게 혼전 순결을 강요한다정절을 지키지 못하거나 성적 욕망을 드러내면 모든 남성에게 멸시받는 천박한 존재가 된다. 남성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감정과 자유 의지를 포박한 올가미다.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두 번째 선정 도서

(2017년 11~12, 3주 진행] [주1] 

마거릿 애트우드김선형 옮김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2018)

 

마거릿 애트우드르네 놀트 그림진서희 옮김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황금가지, 2019)

 


 


여성학자 정희진은 피해자 중심주의 비판이라는 글(《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에 첫 번째로 실린 글이다)에서 남성 중심 문화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소위 남성 문화는 남성의 주관성을 보기 좋게 만들려고 보편성객관성전통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 썼다오디세우스가 위기에 빠지면 지혜의 신 아테네(Athena)가 등장해서 도와준다오디세우스 신화는 전통과 지혜로움으로 멋있게 포장해 준 남성 문화 덕분에 고전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희진은 여성주의 지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여성주의 지식은 남성 문화의 한계를 해체하기 위한 지적 무기애트우드는 여성주의 지식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다. 2005년에 발표된 페넬로피아드이보다 20년 전인 1985년에 발표된 시녀 이야기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면서 근거 없이’ 믿어왔던 남성 문화를 해체한 작품이다.

















아즈마 히로키 정정하는 힘》 (메디치미디어, 2024)




해체라는 표현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해체는 흩어짐’과 ‘붕괴’의 의미와 비슷한 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해체’ 대신에 정정(訂定)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정정은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시한 용어이다그가 강조하는 정정하는 행위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고치는 일이다과거의 지식을 고치는 일은 ㅘ거를 재해석’하는 일이과거를 재해석한 견해도 언젠가 고칠 수 있다정희진은 여성의 경험도 남성처럼 주관적이라고 했다개인 또는 집단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성주의 지식도 주관적이다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지적 무기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녹이 슨다폐기 처분할 것이 아니라 조금씩 고치면 된다현실에 맞는 지식으로 갈고 닦는(切磋琢磨) 것이다.

 

오디세우스 신화를 정정한 애트우드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오디세우스가 귀환 여정 중에 겪은 일들을 진실로 볼 수 있는가그의 경험을 가까이서 지켜본 부하들은 모두 죽고 없다오디세우스의 증언은 주관적이다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단지 그가 지혜로운 영웅이라는 이유로 그의 영웅담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다꾀가 많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을 교묘하게 가릴 줄 안다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자신을 방해하는 적들을 만났다고 말하기그는 이 세상에 없는 적들도 만들 수 있다오디세우스의 꾀는 말재주 좋은 선동가들이 자주 쓰는 전술이다. 선동가는 무해한 사람을 위험인물’로 만든다. 위험한 인물로 잘못 알려진 사람은 악인이 되고그런 악인을 집요하게 헐뜯는 선동가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오디세우스를 너무 믿지 마시라오디세이 구라세이[주].






[1] <레드스타킹> 최초의 모임이 진행된 날은 2017년 10월 9일이다내가 <레드스타킹> 모임에 처음 참석했던 기간은 2018년 1월 말이었다이때 페미니즘 영화를 보는 날이었고, 2월부터 책 읽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주2] 귀신을 부르는 주술인 분신사바의 주문이 지역마다 다르다가장 많이 알려진 주문은 분신사바분신사바오이데 구다사이(“와 주세요를 뜻하는 일본어)’변형된 주문 중에 내가 어렸을 때 들은 것은 분신사바분신사바오디세이 그라세이그래서 오디세이 그라세이를 패러디해서 오디세이 구라세이로 바꿔 썼다


오디세이는 오뒷세이아의 영어식 이름이다. ‘장기간 여행을 뜻하기도 한다. 구라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뜻하는 은어세이는 말하다’ 또는 발언권을 뜻하는 영단어 ‘say’따라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자 글의 제목으로 정한 오디세이 구라세이’를 의역하면 오디세우스가 거짓말을 한다(오디세우스의 여행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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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라이프 - 20세기 주거건축의 사상을 찾아서
이냐키 아발로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이유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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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철학자를 건축가로 비유하면, 철학자가 쓴 책은 철학으로 만든 집의 설계도다. 철학자는 사람들을 철학의 집으로 초대한다. 철학의 집은 편안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철학의 집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거푸집이다. 마음에 드는 철학 거푸집을 발견한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면 철학자가 된다. 철학 거푸집에 거주하는 철학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생각한다.








니체(Nietzsche)과거에 만들어진 철학의 집들을 망치로 부수는 철학자. 그의 책 아침놀철거 서약서. 니체는 플라톤(Plato) 이후에 활동한 철학적 건축가들을 비판한다. 철학적 건축가들이 철학의 집을 지으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재료는 도덕이다. 도덕으로 만든 집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도덕에 복종한다. 도덕을 너무 믿고 따르면 개인의 자유는 사라지며 욕망은 억눌린다도덕은 삶의 주인이 아니다. 니체는 도덕 철학의 집들을 철거한 다음에 도덕이 무너진 그 자리를 쟁기로 갈아엎는다. 니체는 자신만의 철학의 집을 세우기 전에 땅속에 구멍을 뚫는작업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도덕에 대한 신념을 파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도덕의 집이 무너져도 흩어진 잔해들은 또다시 도덕의 집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된다.


니체는 철학적 건축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가 열심히 쟁기질한 땅에 새로운 철학적 건축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도덕이 주인인 철학의 집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이 주인이 되는 철학의 집을 만들었다굿 라이프: 20세기 주거 건축의 사상을 찾아서니체 이후에 활동한 20세기 철학적 건축가들을 소개한 책이다20세기의 철학적 건축가들은 다수가 선호하는 좋은 집의 조건을 거부한다. 좋은 집4인 이상 가족이 살 수 있어야 하며,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적 건축가들이 설계한 집은 오로지 건축가를 위한 공간이다. 주로 많이 사용된 재료는 건축가의 상상력이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의 정의를 의심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건물은 형태가 없으며 가족도, ‘라는 개인도 살지 않는다


책은 총 일곱 군데 철학의 집을 소개한다. 독자들이 제일 먼저 방문하는 집은 차라투스트라의 집이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초인(Übermensch)을 상징하는 존재.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어(Mies van der Rohe)8년 동안 중정이 있는 집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중정이 있는 집의 주인은 도덕을 거부하고, 자아를 변화하는 일에 전념한 차라투스트라다니체 철학을 좋아하는 거주자라면 이 집을 거푸집으로 삼을 수 있다.


니체의 망치에 의해서 도덕 철학의 집이 무너진 이후에 철학을 잊은 사람들은 과학과 공업 기술로 만들어진 집을 선호했다. 과학 지식이 적용된 공법, 실증주의적 건축 방식이 유행하면서 저비용으로 많은 양의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실증주의적 건축술의 목표는 대량 건설, 표준화된 설계실증주의가 가져다준 혜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과거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삶의 여유를 잃어버렸다니체는 실증주의를 비판한 철학자다. 미스 반 데 로어가 구상한 차라투스트라의 집굿 라이프에 첫 번째로 소개된 반실증주의적 건축물이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인 현상학을 만들었다. 현상학은 개인의 경험을 분석하는 실증주의와 다르게 개인의 경험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현상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이다그래서 현상학자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물을 한데 모아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콜라주(collage) 또는 브리콜뢰르(bricoleur)을 선호한다. 어린이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 줄 안다. 따라서 주관성이 강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현상학적 집에 입주할 수 있.


굿 라이프실제로 만들어진 집도 나온다팩토리(Factory)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실이다. 팩토리는 무의식과 욕망을 탐구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계급 없는 세상을 꿈꾼 마르크스(Karl Marx)가 혼합된 건축물이다. 이곳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개성과 욕망이 억눌린 채 살아온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팩토리에 자주 드나들었다. 팩토리는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의 장이다.


집을 짓는 일 또한 철학을 하는 일과 같다. 집과 철학은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뼈대다. 뼈대가 튼튼해야 외부의 유혹과 세파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잘 만든 집에 오래 살다 보면 한계와 문제점이 눈에 보인다. 철학적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굿 라이프는 책에 소개된 철학적 건축물들에 입주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과대광고를 하지 않는다. 책은 철학적 건축물들의 한계도 밝힌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집에 인간이 산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철학자의 언어와 사유가 스며든 집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철학자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실존주의자의 집그 집에 사는 사람의 내면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가부장적 권위를 중시하는 실존주의자가 집주인이 되면 그 집 안에 딱딱한 수직적 문화가 흐른다현상학적인 집에 설계자와 거주자의 취향이 반영된 장식품이 많다. 겉만 화려한 현상학적 집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거주자들에게 추천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집은 건축가의 실험 정신이 많이 반영된 가상 공간이다. 현실 도피에 가까운 과도한 실험 정신은 비현실적인 집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마저 파괴한다.


굿 라이프집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선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좋은 삶의 조건과,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좋은 집의 조건 또한 다양하다. 철학은 집을 만들 때 쓸 수 있는 좋은 재료. 그렇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교조주의적 성향이 강한 철학으로 지어진 집은 부실하다. 불량한 사상(思想)이 가득한 집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 cyrus의 정오표




* 65




 

 실존적인 집이 가부장적 권위의 체계와 연결되며, 자기 중심화되고 초월적이며 수직적인 공간 조직을 갖는다는 사실을 명학하게 보여준다.



명학하게 명확하게






* 93쪽 각주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1856~1925) [주]



[] 테일러의 사망 연도는 1915이다.





* 133쪽 각주






조르지오 데 기리코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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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소련 건국사와 러시아 문학사 양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무장한 이방인이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손에 무기를 쥔 이방인으로 살았다. 러시아 황실과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군주의 시대가 무너졌다. 사빈코프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의 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내분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다투는 상태였고, 온건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레닌(Vladimir Lenin)이 주도한 볼셰비키(Bolsheviks)가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러시아를 장악했다


사빈코프는 또다시 무기를 들었다. 그가 보기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민중의 편이 아니었다. 사빈코프는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무장 세력을 조직했다. 볼셰비키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사빈코프는 폴란드에 합류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반 볼셰비키 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 폴란드는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종전 이후에 반 볼셰비키 세력을 토사구팽했다. 사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922년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을 합병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다.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세계만방에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볼셰비키에 반대한 세력을 반혁명 분자로 규정하여 모조리 체포하거나 처단했다. 심지어 소련에 반정부 세력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면서 선동하기까지 했다. 사빈코프는 노동자를 위한 비밀 무장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소련에 돌아왔지만, 결국 비밀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사실 그에게 손을 내민 비밀 무장 세력은 반정부 세력을 소탕하려는 소비에트 정권의 미끼였. ‘무장한 이방인사빈코프는 1925년에 소련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주]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 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빛소굴, 2022)




사빈코프는 망명 생활 중에 무기 대신 펜을 쥐었다. 그는 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자전적인 성격이 짙은 이 글은 처음에 <테러리스트의 수기>라는 단순한 제목이 붙여졌다창백한 말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 68절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빈코프는 회상록을 소설로 개작했고,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사빈코프는 롭쉰(로프신, V. Ropshin)’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빈코프의 글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어울려 지낸 막심 고리키(Maxim Gorky)마저 사빈코프의 글에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사빈코프가 글로 묘사한 테러리스트, 즉 혁명가는 살인을 저지른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가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테러리스트로 활동한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튜체프(N. S. Tyutchev)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사빈코프의 글에 대한 견해를 밝혔는데, 소설가 사빈코프혁명가 사빈코프를 죽였다고 비판했다.

















* [절판] D. S. 미르스끼, 이항재 옮김 러시아 문학사(써네스트, 2008)




사빈코프는 생전에 소설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며 죽어서도 소설가로 대우받지 못한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사빈코프 또는 롭쉰이라는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모든 러시아 문학사 관련 문헌을 전부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빈코프가 한 번이라도 언급된 책 한 권을 찾긴 했다그 책이 바로 현재 절판된 드미트리 P. S. 미르스끼(Dmitry Petrovich Svyatopolk-Mirsky

)러시아 문학사. 영국으로 망명한 미르스끼는 1922년부터 런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했고1926년에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 이듬해에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From Its Beginnings to 1880>를 썼다이 두 권의 책 덕분에 영미권 국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사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역본은 두 권의 책을 요약 편집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미르스끼는 사빈코프를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Dmitry Merezhkovsky)의 영향을 받은 테러리스트로 소개한다. 그리고 센세이셔널한 고백창백한 말은 메레시콥스키의 아내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지나이다 기피우스(Zinaida Gippius)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한다메레시콥스키와 기피우스는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을 이끈 작가다


하지만 단편적인 수준의 내용은 사빈코프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미르스끼의 러시아 문학사》는 1920년대에 나온 책이다.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는 사빈코프가 옥사한 지 일 년 뒤에 나온 책이다따라서 미르스끼의 분석은 사빈코프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 이디스 클라우스, 천호강 옮김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도덕의식에 관하여(그린비, 2022)

 




사빈코프와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책이 이디스 클라우스(Edith Clowes)의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이 책은 19~20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철학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떤 형식으로 자신들의 작품으로 구현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 철학을 접하자마자 전율을 느낀 메레시콥스키러시아 문화가 위대해지려면 종교적 의식, 즉 기독교적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적 가치의 부활을 갈망했는데, 자유로운 주체를 억압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니체 철학을 미래의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으로 이해했다메레시콥스키러시아에 정착해야 할 새로운 기독교를 3의 성서라고 표현한다. ‘3의 성서아름다움을 최상으로 여기는 유미주의와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기독교 윤리를 모두 수용한 미래의 종교.


메레시콥스키는 러시아에 니체 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출판하는 등 니체 철학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고리키와 함께 니체의 책을 번역하려고 했지만, 이들의 계획은 실패한다. 두 사람이 이해한 니체는 너무나도 달랐다메레시콥스키가 니체의 반기독교적 관점에 주목했다면, 고리키는 ‘개인의 창조적 의지에 주목했다. 그는 창조적 의지만 있으면 개인의 삶은 변화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니체 철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통속적 니체주의자였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로 고리키는 니체 철학을 부르주아 철학으로 비난하면서 결별한다.


메레시콥스키는 프랑스로 피신한 사빈코프를 도와준 은인이다. 사빈코프는 은인의 영향을 받아 니체주의적 소설창백한 말을 썼다. 이디스 클라우스는 미르스끼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사빈코프와 메레시콥스키와의 관계를 알려준다. 롭신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사람은 지나이다 기피우스였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김인순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열린책들,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04)




이디스 클라우스는 자신의 책에 혁명가의 본명인 사빈코프대신에 필명이자 소설가 롭신을 호명한다.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롭신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드러난 초인(Übermensch)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접한 니체 철학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가 아니었다러시아에 들어온 니체의 저서는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거나 니체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편집자의 손을 거친 조악한 책이었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왜곡된 니체를 성급하게 만났고, 모방하거나 오독하는 수준에 그쳤다. 클라우스는 롭신을 문학적 개성이 부족한 작가로 평가한다. 


클라우스는 창백한 말에서 니체의 초인 사상을 모방하고 왜곡한 흔적을 주목한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 조지(George)는 테러리스트인 작가의 분신이다. 조지는 세상을 경멸한다. 사랑, 도덕, 평화도 증오한다. 그에게 테러와 살인은 혁명을 위한 일이 아니다. 조지는 살인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삶은 투쟁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지의 투쟁적 삶은 니체의 초인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니체의 초인은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마저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용어로 알려진 운명을 사랑하는(긍정하는) 태도조지의 목적 없는 투쟁은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른다. 니체 철학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고, 자기 파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동적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창백한 말의 테러리스트는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인물이다. 세상을 증오하는 조지는 죽을 때까지 볼셰비키에 맞서 싸운 무장한 사빈코프를 닮지 않았다. 기독교적 사랑과 도덕을 무시하는 조지는 종교에 심취한 메레시콥스키에 대한 사빈코프의 거부감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사빈코프는 생명의 은인을 등 돌릴 수 없었는지 은인의 아내가 지어준 필명으로 자전적인 소설 창백한 말을 발표했다소설가 롭신은 니체를 잘못 이해한 니체주의자이렇듯 창백한 말작가 한 사람의 분열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글에서 서술된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은 주류 역사학계의 관점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러시아 혁명을 연구한 주류 역사학계는 케렌스키 임시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등장한 191710월 혁명을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보수파 역사학자들은 볼셰비키를 부정적인 정치 세력으로 바라봤다


정보라 작가가 쓴 창백한 말해설문에도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정보라 작가는 사빈코프를 권력에 저항한 민중주의자로 소개하는데, 사빈코프가 저항한 권력이 바로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볼셰비키를 가리킨다.


















* [개정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책갈피, 2017)

 

* [구판 절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교양인, 2008)



 

하지만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방 정책과 소련 연방이 해체된 1991년 이후에 오랫동안 봉인된 문서고가 열렸다. 그 속에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사료들이 있었다. 이 사료를 주목한 역사학자들은 주류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견해를 반박했고, 10월 혁명을 민주적인 과정을 거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권력 독점을 목표로 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민중의 평등이 목표인 소수파였다고 주장한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혁명 연구자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라비노비치의 저서 1917년 러시아 혁명》(구판 제목은 《혁명의 시간》이다)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군인 사빈코프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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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2-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글은 거의 논문 수준이네요. 아니, 늘 시루스님의 글은 그랬던 것 같아요. 암살자이자 혁명가가 쓴 소설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런데 또 그 책이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결과물이었다니.

교양인에서 냈던 [혁명의 시간]은 책장에 있었어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읽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개정판을 책갈피에서 냈군요. 두 출판사 모두 인연이 있어서 저에게는 이 사실이 흥미롭네요.

cyrus 2024-12-25 22:56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이번 주 금요일에 있는 독서 모임 때 참석자들에 들려주고 싶어서 썼어요. 참고한 책들의 주요 내용을 요약했어요.

저는 <혁명의 시간>을 살 뻔했어요. 제가 주말에 자주 가는 헌책방에 <혁명의 시간>이 있거든요. 책갈피 출판사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주로 펴내는 곳인데, 개정판이 출판사를 잘 만났어요. ^^
 



서한용 작가가 감사하게도 내가 진행하는 독서 모임을 위한 추천사를 썼다. 이번 달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내가 정했지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서한용 작가다. 서 작가의 추천사에 보르헤스(Borges)가 예술을 정의한 말이 나온다. 예술은 불과 수학의 결합이다.’ 





















* 리사 크론, 문지혁 옮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웅진지식하우스, 2024)




2주 전에 나는 서 작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독서 모임 추천사를 써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서 작가는 소설 집필을 위해 창작 방식을 소개한 책을 읽는 중이라고 했는데, 그 책이 바로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였다서 작가는 이 책의 머리말에 언급된 보르헤스의 말을 다시 인용했다.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는, 독자의 강력한 기대를 계속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예술이란 불과 수학의 결합이다라고 말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중에서, 7)



불과 수학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Tion, Uqbar, Obis Tertius)에 나오는 구절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송병선 옮김 픽션들》 (민음사, 20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황병하 옮김 픽션들》 (민음사, 1994)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에 수록된 작품이다보르헤스가 만든 가상의 인물과 지명,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책들, 그리고 실존 인물의 이름이 나열되면서 뒤섞인 이야기는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여기에 여러 종류의 철학들도 녹아 들어 있어서 보르헤스의 글을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보르헤스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꿈, 상상력, 백과사전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픽션들은 현재 두 권이다. 처음 나온 지 30년이나 된 보르헤스 전집픽션들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픽션들이 있다. 두 권의 책을 만든 출판사는 같지만, 번역자는 다르다픽션들》의 두 번역자는 불과 수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어느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피상적인 언질을 발견했었다. 이제 우연은 내게 보다 정확하고 꼼꼼히 읽어야 할 어떤 무엇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알 수 없는 혹성에서의 건축과 놀이기구, 그곳의 신화가 가진 공포와 그곳 언어들의 흔적, 그곳의 황제들과 바다들, 그곳의 광석들과 새들과 고기들, 그곳의 기하학과 불, 그곳의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쟁들과 함께 그곳의 전 역사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방대한 자료의 일부를 바로 내 손안에 들고 있게 된 것이었다


(황병하 옮김, 27)


 이 년 전 나는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짓 국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발견했다. 이제 우연은 보다 정확하고 보다 공들인 무엇인가를 내게 제시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알려지지 않은 행성의 전체 역사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다룬 자료 일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 행성의 건축과 카드 패, 소름 끼치는 신화와 그 언어의 속삭임, 그곳의 황제와 바다, 광석과 새와 물고기, 그곳의 수학과 불꽃, 그곳의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송병선 옮김, 19)




소설 속 화자인 보르헤스는 기억력이 좋다. 그는 동료 작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Adolfo Bioy Casares)가 잠깐 언급한 말을 잊지 못한다그 말은 이교도 지도자 우크바르가 한 말인데,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우크바르의 말의 출처가 궁금해서 백과사전을 살핀다백과사전에 언급된 여러 편의 참고문헌까지 경유한 보르헤스는 틀뢴과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라는 비밀에 휩싸인 행성과 세계를 만난다.


두 권의 픽션들중에 딱 한 권만 읽으라고 추천하기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두 번역본에 있는 역자의 주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 전집픽션들의 단점은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이다. 비록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담긴 주석도 더러 있다. 그 예로, 실제 인물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사망 연도를 물음표로 표시한 역주(18쪽). ‘보르헤스 전집이 출간된 1994년에 카사레스는 살아 있었고, 그는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보르헤스의 창작 의도를 알려주는 역자의 주석은 보르헤스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보르헤스 전집픽션들의 문장은 읽기 수월하지만, ‘보르헤스 전집픽션들과 비교하면 역주의 양이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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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2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고가 많겠구나. 사람들은 많이 나오나? 이런 모임은 흔들리지 않는 꾸준함이 중요한 것 같아. 몇명이 나오든 상관하지 말고 꾸준히 잘 해 봐. 벌써 지원군도 있고. 든든하겠어. ㅎ 멀리서 응원한다!
이책 나도 읽어보고 싶던 책이야.

cyrus 2024-12-22 22:41   좋아요 1 | URL
문학 읽기 모임은 많으면 (저를 포함해서) 5, 6명이 참석하는 소모임이에요. 누님은 오래전부터 저의 서재를 봐서 아시겠지만, 저의 문학적 취향이 독특하잖아요.. ㅎㅎㅎ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분들은 제가 추천한 문학 작품들이 재미없다고 투덜대요. 그런데도 제가 감탄할 정도로 작품 분석을 잘 해요. 문학 모임이 6월부터 시작했는데, 이번 달까지 하면 7개월째 진행했네요. 이 정도면 예상보다 오래 한 겁니다. 저는 이 모임이 길게 가봐야 3개월로 예상했거든요.. ^^;;

감은빛 2024-12-24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거리를 극복할 수 있다면 시루스님 모임에 가고 싶네요. 저도 예전부터 책 모임 여러 개를 나가다 말다 했었어요. 제일 오래 나갔던 건 아마 1년 넘게 가기도 했었죠. 요즘은 SF읽기 모임을 시작한 지 세 달 정도 되었는데, 재미있습니다. 참석자들이 모두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점이 흥미로운 포인트인 것 같아요. 제일 연장자는 60대의 공장노동자이신데, 매주 주말은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보내는 정말 책을 많이 읽고 상식이 풍부한 분이시고, 막내는 30대 후반의 예술가로 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노동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든 생겨를 꾸려가면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훌륭한 활동가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유일한 여성이라 대화를 나눌 때, 여성의 시선으로 보려고 하는 흐름을 잘 이끌어 줍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훌륭한 분들인데, 각자 긴 시간 다른 분야에서 사회운동을 펼친 사람들이라, 각자의 경험과 시선이 달라서 더 재미있어요.

cyrus 2024-12-26 06:26   좋아요 0 | URL
연령대와 관심사가 서로 다른 분들이 모여서 즐거운 분위기 속에 독서 모임을 진행한다는 건 축복이에요. 제가 20대 때 참석했던 독서 모임은 감은빛 님이 말씀하신 독서 모임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라서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요즘 독서 모임은 과거 분위기만큼 나지 않네요. ^^;;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 - 신, 물리학, 젠더 전쟁
마거릿 워트하임 지음, 최애리 옮김 / 신사책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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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코스모스(cosmos)는 여름 바람이 식어가는 가을에 피는 꽃이다.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 또는 조화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꽃보다 과학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스모스는 질서정연한 우주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가 되었다.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덕분에 그리스가 원산지인 코스모스는 시들지 않았다(꽃 이름은 그리스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꽃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대중이 과학과 친해지길 바란 칼 세이건은 1980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 출연했다. 브라운관을 채운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종이 위에 피어나 한송이의 책이 되었다. 세이건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코스모스의 자녀라고 말했다.[주1] 우리는 우주의 별에서 왔다. 유기물이 들어 있는 별 먼지들이 모여서 ‘창백한 푸른 코스모스(pale blue cosmos), 지구가 피어났다.[주2]


과학자들은 코스모스 우주론’을 매우 좋아한다. 코스모스 우주는 완벽할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한 치의 오차가 없는 우주는 아름다운 예술과 같다. 코스모스 우주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눈여겨 본 과학자가 피타고라스(Pythagoras). 피타고라스는 모든 덕은 조화(harmonia)’이며 좋은 것도, (god)조화라고 했다.[주3] 우주에 질서를 부여한 존재는 조화로운 신이다. 피타고라스는 수()를 만물의 근원으로 이해했다. 피타고라스는 코스모스 우주가 완벽한 비율로 만들어진 음악이라고 상상했다. 피타고라스에게 수와 수학은 신이 만들어낸 우주를 듣기 위한 보청기였다.


세이건은 중세가 시작되면서부터 서양 과학이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1,000년이나 지속된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표현한다. 이 기간에 종교는 과학을 이단 학문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고 학살했다. 교황과 성직자들에 의해 쫓겨난 과학은 학문에 관심이 많은 이슬람 국가로 도피했다. 무슬림 과학자들은 이방의 나라그리스에서 온 과학을 보듬어주었다세이건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특히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로마가톨릭이 장악해 버린중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가 과학을 박해했다고 믿는다. 종교의 폐해를 고발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과학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로마 교황청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확신한 갈릴레이를 이단 심문소로 소환했다. 처형과 종신형을 겨우 피한 갈릴레이는 가택 연금 처분을 받았다종교를 비판한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천 년 동안 죽어 있던 코스모스가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피었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자에게 과학은 코스모스의 씨앗이라면 이성은 코스모스를 활짝 피게 해주는 거름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과학과 종교의 갈등 관계의 관점으로 과학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보완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중세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중세 지식인들의 서재에 고대 그리스 과학이 자취를 감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에 관심이 있는 수도사들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갈릴레이 재판 사건은 반종교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갈릴레이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와 친분이 있는 성직자들은 과학을 배척하지 않았다. 로마가톨릭은 과학의 후원자였다. 비록 가톨릭이 선호하는 과학은 천동설(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설)이었지만, 성서의 교리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 과학 이론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가 두려워한 세력은 가톨릭이 아니라 대학교수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와 추종자들은 실험과 관측을 건너뛴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자신들이 믿는 지식과 상반되는 견해를 무시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과학의 발전을 막은 주범은 종교가 아니라 지식의 수정을 거부한 보수적인 과학자들이었다.


과학 친화적인 종교는 코스모스 우주론을 활짝 피게 해준 거름이다. 교회는 과학의 정원이 있는 경건한 온실이었다. 가톨릭과 기독교 신자들은 과학의 정원에 마음껏 드나들었고, 성직자들은 코스모스를 소중히 보살피는 정원사가 되었다. 그러나 코스모스가 필 무렵에 여성은 온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과학과 종교는 합심하여 여성이 과학의 정원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했다.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 , 물리학, 젠더 전쟁과학과 종교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란 코스모스를 보여준다. 이 책을 쓴 마거릿 워트하임(Margaret Wertheim)은 종교가 없었으면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논리적이며 객관적으로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신이 만든 코스모스 우주를 이해하고 싶어서 과학을 연구했다. ‘조화로운 신에 지나치게 심취한 피타고라스는 훗날 피타고라스학파로 알려진 비밀스러운 공동체를 이끄는 교주가 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가 소멸하여 사라진 뒤에도 질서가 잡힌 자연 세계를 탐구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성경을 열심히 읽은 중세 과학자들은 신을 과학자 또는 수학자로 인식했다. ‘중세의 가을이 최고조로 무르익은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자 그리스도적인 코스모스가 만개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피타고라스의 정신을 물려받은 과학자였다. 그의 천문학은 수학적 창조주인 신을 위한 학문이었다. 조화로운 우주를 좋아한 코페르니쿠스는 모든 천체의 궤도가 완벽한 원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뉴턴(Isaac Newton)은 자신의 과학이 신을 탐구하는 데 유용한 지식이 되기를 바랐다.


저자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등과 같이 종교에 협력한 과학자들을 사제(司祭)’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과학의 사제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물리학과 수학은 남성 과학자들의 텃세가 유독 심한 과학 분야이다. 저자는 가톨릭-기독교 남성 중심의 과학을 수학적 인간(Mathematical man)으로 의인화한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언어학자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남성 지배 사회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 남성은 정권이나 지도부를 독점하거나 지배하고, 정치적 의사 결정에서 여성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지닌다.

 

*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을 소유하거나 통제한다.

 

* 남성의 활동, 직업, 문화적 산물, 사상, 지식은 여성의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데버라 캐머런, 강경아 옮김, 페미니즘》, 

신사책방, 2022년, 

24~25쪽)




종교의 권위가 약해졌어도 남성 지배 사회는 건재했다. 남성 계몽주의자들도 수학적 여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권 신장에 반대한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감성에 손쉽게 지배당하는 여성은 과학을 이해하는 역량이 부족하다. 여성에 대한 수학적 남성의 편견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었고, 남성 과학자들은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워 수학적 여성의 과학적 열망을 억눌렀다.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남성 과학자들은 영국 왕립학회를 설립했다. 그런데 왕립학회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왕립학회의 초창기 회원들은 과학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독신 생활을 유지했다. 하지만 수학적 여성은 독신녀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은 결혼하지 않으면 경제적 자원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수학적 인간’은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과학의 산물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교회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신이 만든 우주를 규명하는 일이 숙원이었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유명해진 덕분에 물리학은 과학의 꽃이 되었다. 물리학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계의 네 가지 힘인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을 하나로 통합해서 설명하는 만물이론(Theory of Everything, ToE)이다. 과학의 정원은 연구소와 천문대 그리고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발전소에 있다. 저자는 만물이론을 알고 싶어 하는 과학자들의 열망 속에도 우주의 신적인 원리를 이해하려는 종교적 기조가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은 만물이론 연구에 쓸 예산을 많이 받길 원한다. 저자는 과학이 대중의 실생활에 동떨어진 학문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결국 대중은 과학을 어렵고 지루한 학문으로 인식한다. 대중과의 소통이 익숙하지 않은 과학자들은 논문 쓰기에 여념이 없다. 수학적 여성들이 물리학에 진입할 수 있는 문턱은 더 높아진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순결과 순정이다. 하지만 코스모스 우주를 좋아하는 과학은 순수하지 않다.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가 정의한 과학은 지저분한 과학이다. 지저분한 과학은 종교를 포함한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학문이다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1995년에 출간된 책이다. 원서 제목은 피타고라스의 바지(Pythagoras’ Trousers)’.[주4] 저자는 종교와 과학계의 여성 차별이 불가분 관계임을 쉽게 설명했다. 하지만 저자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톺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과 같은 이분법이 여성의 물리학 진출을 막는 문화적 관성이라고 지적한다(352쪽). 저자가 과학을 의인화해서 표현한 수학적 인간에는 수학적 남성수학적 여성’이 있다. 과학 연구에 참여해야 하는 수학적 여성이 생물학적 여성을 전제한다면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의 한계를 답습하게 된다. 저자는 수학을 연구하는 여성의 역량이 남성보다 떨어진다고 보는 성차(性差)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의 생물학자 앤 파우스토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의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349). 파우스토스털링은 남성중심주의와 이성애주의(heterosexism)를 옹호하는 생물학을 비판한 페미니스트 생물학자다. 이성애주의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을 정상으로 규정한다. 이성애주의의 문제점은 남녀 간의 성차를 강화하고, 이성애주의의 기준으로 비정상’에 속한 동성애와 젠더퀴어(genderqueer) 차별한다. 파우스토스털링은 성차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개의 성이 아닌 다섯 개의 성을 제안한다.[주5


수학적 남성수학적 여성만 존재하는 과학은 또 다른 차별을 만든다. 이성애주의의 잔재가 남은 과학은 젠더 이분법에 속할 수 없는 성소수자를 희미하게 만든다. 이런 과학은 성소수자를 비정상적으로 취급하는 우파 기독교의 우군이 된다과학과 종교가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조화롭고 안정적인 사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여성과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과학과 종교는 잘못된 만남이다.





[1] 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 477.

 

[2] 칼 세이건, 현정준 옮김, 창백한 푸른 점, 사이언스북스, 2001.

 

[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김주일, 김인곤, 김재홍, 이정호 함께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나남출판, 2021. 8권 피타고라스학파, 175.








[주4]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1997년에 원서 이름을 그대로 옮긴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책의 부제는 여성의 시각에서 본 과학의 사회사출판사는 사이언스북스이다. 번역자는 최애리. 이번에 나온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번역을 다시 맡았다. 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피타고라스의 바지의 구판인 셈인데, 번역자와 출판사는 구판이 출판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주5] 티에리 오케, 변진경 옮김, 셀 수 없는 성: ‘두 개의 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오월의봄, 2021, 36.

 






※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297, 옮긴이 각주 [닐스 보어]


 덴마크 물리학자. 특정 원자핵의 비대칭 모양과 그 이유를 규명하여 1975 노벨상 수상[주6]



[주6] 연도 오류닐스 보어(Niels Bohr)1922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 297, 옮긴이 각주 [하이젠베르크]


1933 노벨상 수상. [주7]



[주7] 연도 오류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1932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 337




 

리정다오(Tsung-Dao Lee, 1926~ ) [주8]



[주8] 올해 84일에 별세했다.





* 356

 

 SSC 사업은 본래 2억 달러 예산으로 시작되었으나, 1993년 중반에는 100억 달러로 확대되었으며, 일각에서는 사업 완료까지 130억 달러는 들리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 시점에 다다르자, 국회에서 플러그를 뽑았다. 이는 만물이론 학계로서는 커다란 좌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꿈은 절대로 무산되지 않았다. 유럽 공동체가 자신들의 초가속기,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LHC)를 지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여전히 관련 정부들은 재정 지원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LHC를 짓는 데 드는 비용은 훨씬 적어서 100억 파운드(150억 달러) 정도이며, SSC만큼 강력하지는 못하지만, 그것도 통일 영역에서 새로운 전망을 보여줄 희망이 있다. [주9]



[주9] 이 책이 출간된 1995년에 LHC 건설이 승인되었다. 건설비와 실험을 위한 예산 등이 포함된 LHC 프로젝트의 예상 비용은 32~64억 유로(46천억 원)였다. 그러나 비용이 늘어나면서 건설 속도가 더뎌졌다. 우여곡절 끝에 건설이 완료되었고, 2008910일에 가동하기 시작했다.





* 미주, 390





Nicolaus Cusanus, De docta ignorantia [주10]



[10]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조규홍 옮김, 박학한 무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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