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지나가버린 토요일의 날씨는 차갑지 않았다. 서울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무튀튀한 잔설(殘雪)이 다 녹을 정도로 그날은 미온(微溫)했다. 그러나 세상은 미온(未穩)하다. 용산의 대역죄인이 풀려났다. 탄핵을 열심히 외친 광장이 한풀 꺾였다탄핵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새긴 독자들의 마음도 광장이다. 대역죄인의 석방 소식에 격분한 독자들의 눈에 ()가 맺혀 있다. 활활 타오르는 독자들의 눈을 마주친 책은 소심해진다. 뜨거워진 독자들의 눈에 책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화를 삭인 독자들은 평소처럼 책을 읽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어지러운 마당에 한가하게 책 읽을 때냐고 째려보면서 말한다. 그들은 모른다. 점점 혼탁해지는 세상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독자들이 왜 책을 읽는지를.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찬쉐, 강영희 옮김 

격정세계》 (은행나무, 2024년)



2025년 3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4시

장소: 투썸플레이스 을지로입구역점



<달궁>을 만든 독자들

삽하나, 헤르메스, 마욤, 레삭매냐, 시진,

습습, 숨, 대장물방울, Jarrett, 최해성(독서 모임 후기 엮은이)







서 모임 <달의 궁전>(달궁) 올해 첫 번째 책은 중국의 작가 찬쉐(殘雪)의 장편소설 격정 세계. 격정 세계에 나오는 인물들은 책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독자들이다. 이들에게 책은 공기요, 밥이요, 사랑이다격정 세계에 나오는 독자들은 비둘기라는 이름의 북클럽의 정규 회원이다. ‘비둘기모임에 한 번 참석하게 되면 문학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소설 속 독자들은 유독 문학을 좋아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한마(寒馬). 한마는 자신보다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샤오쌍(小桑)을 만나면서부터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샤오쌍의 소개로 비둘기모임에 참석한 이후부터 한마는 읽는 인간에서 글 쓰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한마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격정 세계독서와 글쓰기를 예찬하는 소설이다. 진심으로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글쓰기도 좋아한다글을 쓰는 모든 독자는 작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천쉐는 이 세상에 글 쓰는 독자들이 많을수록 좋다고 말한다샤오쌍과 한마는 작가 찬쉐의 분신이다. 책을 잘 읽는 샤오쌍도 글쓰기의 장점을 강조한다. 



 “우린 진심으로 사랑에 휩쓸리고자 하지. 우리가 읽기와 쓰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사랑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읽기와 쓰기는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게 다른 점이지. 바로 이 때문에 인류는 문학을 발명했어.”


 (326)




격정 세계를 추천한 헤르메스 님은 살기 팍팍한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하고, 또 문학을 좋아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헤르메스 님을 제외한 달궁 독자들은 격정 세계를 비판하는 견해를 쏟아냈다(독서 모임 후기 엮은이도 비판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레샥매냐 님(알라딘 서재 마을에 북 리뷰를 쓰고, 독서 모임 전날에 격정 세계》 리뷰[주]를 남긴 그 레삭매냐 님이다)은 소설 속 나오는 사람들 모두 문학에 미친 자들이라고 평가했다. 문학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발전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달궁> 독자들은 비둘기북클럽 모임 회원들이 커다란 갈등 없이 화목하게 지내고, 결국 서로 사랑해서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단조롭다고 지적했다. <달궁> 모임장 삽하나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격정 세계는 그야말로 없는 세계(utopia)’개인의 삶을 구원하는 문학을 지나치게 예찬하는 인물들이 부담스럽고, 오히려 기괴하다. 소설에 나오는 동물들은(검은 고양이, 표범, 새 등)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격정 세계를 비판하는 <달궁독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수록 헤르메스 님은 차분하게 격정 세계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책의 매력을 지키려고 했다독서 모임 후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나는 <달궁독자들이 치고받는’ 대화를 정말 흥미롭게 관전했다이래서 내가 <달궁>을 안 나올 수 없다니까.



















[(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 [절판] 안토니오 그람시,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감옥에서 보낸 편지(민음사, 2000)


[ROUTLEDGE Critical THINKERS 26]

* 스티브 존스, 최영석 옮김, 안토니오 그람시 비범한 헤게모니(앨피, 2022)

 

* 마이크 곤살레스 & 이언 버철 외, 이수현 옮김,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마르크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책갈피, 2015)





헤르메스 님은 비둘기북클럽의 성격을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내세운 개념인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 설명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세운 사회주의 정치인이다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탄압을 받아 옥중 생활을 한 그람시는 감옥에서 자신의 생각을 담은 편지를 남겼다.









그람시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완전히 장악한 이탈리아에 혁명이 성공하려면 부르주아 기득권과 부르주아 문화에 장기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러시아 혁명처럼 정면으로 맞서서 신속하게 기동전(war of maneuver)’을 수행하면 혁명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1905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지켜본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의 위력을 습득하면서 그들의 투쟁 전략을 예상한다. 따라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은 참호 속에 숨어서 싸우듯이 진지전을 펼쳐야 하며, 자본주의에 맞서서 뒤집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비록 혁명이 달성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자본주의의 참호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하면 부르주아 기득권의 헤게모니(hegemony, 지배권)는 무너진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이 기동전을 펼칠 기회가 생긴다.


비둘기북클럽은 문학과 독서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의 검열 방식에 정면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다비둘기’ 북클럽의 일차 목표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비둘기북클럽 회원이자 샤오쌍의 직장 동료인 샤오마(小麻)문학 읽기가 인간을 각성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문학의 힘을 감염으로 비유한다.



 “문학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난 스스로 변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변화도 이끌어냈어요. 이것이 바로 문학의 감염력이죠.”

 

(464)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의 문학 예찬은 책 밖에 있는 독자들에게도 계속 강조한다.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의 신조는 문학에 등 돌린 (소설 속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건전한 구호독서와 문학에 제대로 미친 독자들이 많으면 독서와 문학의 강점을 무시하는 냉소주의에 맞설 수 있다.




















[바벨의 도서관 24]

* 포송령,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해제), 김혜경 옮김, 요재지이(바다출판사, 201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픽션들(민음사, 201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알레프(민음사, 2012)

 



 






























[보르헤스 선집 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1994)

 

[보르헤스 선집 2]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민음사, 1994)

 

[보르헤스 선집 3]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알렙(민음사, 1996)

 

[보르헤스 선집 4]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 송병선 옮김, 칼잡이들의 세계사(민음사, 1997)

 

[보르헤스 선집 5]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1997)




찬쉐는 중국보다는 서구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문학 세계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Borges)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다. 보르헤스는 허구와 현실을 철저히 구분 짓는 경계를 허문 이야기꾼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세계와 인물들은 비현실적이다. 헤르메스 님은 찬쉐의 문학 세계에 한 축을 담당하는 환상성 포송령(蒲松齡)의 기담 소설집 요재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보르헤스는 요재지이에 실린 기담을 ‘사실주의(realism) 소설이라고 했다. 그는 왜 환상 소설을 실제와 같은 이야기라고 말한 것일까? 보르헤스에 따르면 중국 독자들은 미신을 믿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야기를 실제의 사건으로 이해하면서 읽는다. 나를 포함한 <달궁> 독자들은 격정 세계비현실적이야기로 느꼈지만, 반대로 중국 독자들은 현실적인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허구적인 이야기가 그렇게도 재미있냐면서 비아냥거린다심지어 문학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현실 도피자로 규정한다.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눈동자와 머릿속에 유튜브만 있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유튜브가 전부인 그들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그래서 현실을 똑바로 보려는 의지력, 즉 생각하는 힘이 책을 읽는 독자보다 부족하다. 유튜브는 알기 쉽게 세상물정을 알려준다. 유튜브는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싶지 않은 현실 도피자들의 낙원이다. 하지만 유튜브는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 때가 있다. 유튜브에 중독된 사람은 유튜브의 거짓말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유튜브가 말하지 않는 진짜 현실을 ‘소설’이라면서 무시한다유튜브에 갇힌 사람이 생각하는 소설은 가짜’ 또는 ‘거짓’이이렇게 소설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으니 문학을 좋아할 리가 없다.



책을 즐겨 읽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책을 멀리하면서 유튜브에 매달린 삶은 불행하다.






[] <문학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레삭매냐 (202537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723405103/16284512




레삭매냐 님은 <달궁> 모임에 오실 때마다 책에 대한 정보를 간략히 설명한 글A4 용지에 정리해서 <달궁> 독자들에게 나눠 준다. 격정 세계모임에 참석한 독자들을 위해 레삭매냐 님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소개한 글(마욤 님이 찍은 첫 번째 사진에 나온 A4 용지)을 작성했다독서 모임 후기를 쓰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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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 2025-03-10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웠던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읽을 때는 답답했는데 같이 모여 얘기하니 생각지 못했던 점들을 들을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다음에도 또 책얘기 같이 나눠요ㅎ

삽하나 2025-03-1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를 통해 글을 쓴다‘던(p.317) 샤오웨의 격.정.을 떠오르게 하는 멋진 후기/감상/비평 잘 읽었습니당! 헤르메스님 말씀이 멀리서 잘 안 들려서 시진님 필기를 컨닝하려다 못 했는데 ㅋㅋㅋ 정리해 주신 내용을 보니 아! 하고 기억이 나네요. 소중한 후기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

+
뒷풀이 때 추천해 주신 책 좀 알려주십쇼... 장바구니에 넣어 뒀는데 실수로 죄다 날아갔어요 ㅠㅠ

blanca 2025-03-1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책을 가운데 두고 다양한 의견을 펼치고 서로 주고 받는 장면, 그리고 생생한 관전기 다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

그레이스 2025-03-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모임 좋아보여요.
좋은 책으로
오래토록 함께 하시길!
독서의 격정세계!
혹시 레삭메냐님도 같은 동아리시군요!^^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 AI를 움직이는 우아한 수학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노승영 옮김 / 까치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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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며칠 전부터 인스타그램이 이상하다한 번 마주치면 우리 마음에 끔찍한 잔상을 남기는 잔인한 동영상이 불쑥 튀어나온다짧은 영상들(short-form)을 보여주는 플랫폼(Reels)에 들어가서 영상을 연달아 보고 나면 해로운 동영상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 고어(gore) 영화에 나온 장면, AI로 만들어진 기괴한 이미지들. 2월 마지막 날, 인스타그램은 불쾌한 영상들의 폭주를 멈추지 못했다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주식회사 메타(Meta)해로운 영상들을 걸러내지 못한 알고리즘의 오류 문제를 수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오늘 해로운 영상들이 또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관심사를 관찰하고, 수집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모아서 분류한다알고리즘이 모은 자료들은 모든 사람을 끌어당긴다알고리즘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관심사와 비슷한 사람들을 금방 찾을 수 있다그런데 최근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뜻밖의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평소에 본 적 없는 해로운 영상들을 제대로 검열하지 못한 채 보여주고 있다알고리즘은 왜 우리가 원하지 않은 정보를 아무렇게나 보여주는 오류를 일으킬까?


나는 알고리즘 전문가가 아니다. 최근에 일어난 인스타그램 알고리즘 오류의 구체적인 원인을 모른다하지만 나는 알고리즘 오류와 관련된 한 가지 진실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이 진실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그것은 바로 알고리즘은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다는 진실이다. 완벽해 보이는 알고리즘도 때때로 틀릴 때가 있다. 모든 알고리즘 전문가도 인정하는 진실이다.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실수하고 틀리는 알고리즘에 왜 수학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우리에게 친숙한 알고리즘은 전산공학(컴퓨터 공학) 용어로 알려졌지만, 이 용어는 수학에서 시작되었다알고리즘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 또는 절차를 뜻한다. 수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중 하나가 패턴(pattern)’을 찾는 일이다패턴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방대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 알고리즘 최근린(最近隣) 또는 NN(nearest neighbor) 알고리즘이라고 한다AI가 일하는 방식은 마치 수학자들이 자연 현상에서 패턴을 찾는 일과 같다.


수학을 모르는 AI는 패턴을 식별할 수 없다. AI는 수학을 공부한다. 컴퓨터 시스템이나 기계가 패턴을 감지하고, 분류하기 위해 수학을 학습하는 과정을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이라고 한다우리에게 친숙한 컴퓨터를 포함한 대부분 기계는 수학을 학습하면서 발전했다.


매년 꾸준히 공부한 사람도 가끔 문제를 풀다가 오답을 낼 때가 있다. 틀렸으면 다시 문제를 풀어서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AI도 마찬가지다. 한 번 오류를 일으킨 AI는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수학을 공부한다. 이때 AI는 이전에 배웠던 수학을 반복하는 학습을 하지 않는다. 배운 적이 없는 새로운 수학을 공부한다. 따라서 AI가 학습하는 수학의 종류는 다양하다.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AI가 지금까지 공부한 수학 분야들을 소개한다. 기계 학습의 필수 수학 과목은 미적분, 확률 통계, 행렬 등이다.


AI는 똑똑해지려고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오류와 실수를 줄이려고공부한다. 대부분 사람은 점점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AI의 등장을 두려워한다영화 속 AI는 인간을 조종하는, 냉철한 악당으로 묘사된다그러나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알고리즘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수준에 도달해도 또다시 실수한다기계가 왜 수학을 공부하는지 이해한다면 AI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다. 한 번 실수하면 수학(數學)을 수학(修學, 受學)[주1]하는 AI. 수학으로 단련하는 AI는 차갑지도 않고, 기계적이지 않다.


AI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 속에 있는 편견을 알지 못한다. AI 기술자는 AI가 기계 학습을 할 때 자료의 편견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꾸준히 학습하고, 알고리즘을 교정하는 AI가 아니다. 스스로 학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편견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편견을 의심하지 않고, 편견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공부하지 않으며 자신이 주장하는 오류를 고치지 않는다.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학습하는 AI, 

정확하지 않은 가짜 정보에 갇힌 답 없는 인간


, 이제 누가 악당이지?







<cyrus가 만든 주석과 정오표>




[1] 수학(修學): 학문을 닦음

수학(受學): 학문을 배우거나 수업을 받음.







* 12




 

 수학자 유지니아 쳉수학은 실재일까?(Is Math Real?)라는 책[주2]에서 수학을 배우는 과정이 점진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꼬물꼬물 발을 내디디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듯하다가 느닷없이 뒤를 돌아보고서 어느덧 높은 산에 올랐음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약간의(때로는 다량의) 지적 막막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학에서 진전을 거두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주2] 번역본: 유지니아 쳉, 성수지 옮김, 수학, 진짜의 증명: 우리 삶의 방정식을 구하는 수학의 즐거움(드루, 2024).





* 75




 

 오차를 제곱하여 평균하는 방법은 통계 및 미적분과 관계된 또 다른 이점이 있지만, 아직은 들여다볼 때가 아니다. 목표는 이 제곱 평균 오차(Mean squared error)’[주3]를 필터의 매개변수에 대해 최소화하는 것이다.



[주3] 정확한 명칭은 평균 제곱 오차. 제곱 평균 속도(mean square velocity)’라는 과학 용어가 있지만, 평균 제곱 오차와 관련이 없다. 제곱 평균 오차라고 단 한 번이라도 적힌 교재나 문헌이 있으면 이 주석은 틀린 것이다.





* 107




 


 토머스 베이스의 탄생 연도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에는 유쾌한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0.8의 확률로 1701년에 태어났다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망일은 확실하다. 1761417[주4] 영국 로열 턴브리지 웰스에서 사망했다.


[원문]




 There’s delicious irony in the uncertainty over Thomas Bayes’s year of birth. It’s been said that he was “born in 1701 with probability 0.8.” The date of his death, however, is firmly established: April 17, 1761, at Royal Tunbridge Wells in England.



[주4저자와 번역자 모두 사망 날짜를 잘못 적었다토머스 베이스(베이츠)의 사망 날짜는 47이다위키피디아(Wikipedia)‘Thomas Bayes’ 항목의 주석(Note 1)베이스의 사망 날짜가 잘못 알려진 이유가 있다.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Ba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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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 2025-03-03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자입니다. 오류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오표에 반영했습니다.
http://socoop.net/WhyMachinesLearn/corrections/

cyrus 2025-03-10 06:28   좋아요 0 | URL
저의 서평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학 분야의 책을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번역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공들여 번역한 책, 잘 읽었습니다.

꼬마요정 2025-03-0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도움 되는 리뷰입니다. 누가 악당일지는 바로 알겠습니다. 근데 결코 쉬운 책이 아닐텐데 cyrus 님 리뷰만 보면 읽을만 한데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ㅎㅎ
(땡투 드렸어용^^)

cyrus 2025-03-10 06:31   좋아요 1 | URL
책에 수식이 많이 나와요. 어려우면 수식이 나오는 내용을 넘어가셔도 됩니다. 제가 수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수식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월의 세계 문학

차학경 《딕테

김경년 옮김, 현대문학 (2024)







2025년 2월 28일 금요일저녁 8시~10시 20분

장소: 인더가든



<세계문학>을 만든 독자들

조약돌, 향기, 최해성(모임 후기 엮은이)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 카페 <small talk>의 주인장 김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김 사장님은 철학책 독서 모임(니체, 미셸 푸코, 레비나스)을 함께 했던 분입니다. 우리는 고요한 어둠이 채워진 <small talk>에서 대화를 했습니다. 말을 주고받는 중에 김 사장님은 본인이 선호하지 않는 독서 모임을 얘기했습니다. 김 사장님은 참석자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확인하는 대화가 많은 독서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런 모임에 책은 뒷전입니다. 결국 모임 참석자들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하는 사교 모임이 되고 맙니다. 김 사장님의 말에 저도 이런 유형의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쑥 걱정이 들었습니다. 독서 모임을 꾸리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지난 제가 다른 독서 모임을 비판할 처지가 아니더라고요


<세계 문학 속으로> 2월의 책 딕테》는 독자들이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에요. 독서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한 독자들은 딕테》를 읽는 내내 무엇을 얘기하면 좋을지 생각을 엄청 많이 했을 거예요(그리고 본인의 결정을 후회했을 겁니다)책에 대한 흥미가 없으면 그 책이 어떤지 얘기할 수 없습니다. 책과 친해지지 못한 독자들은 독서 모임에 나오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보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로 일관합니다. 어떤 독자는 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김 사장님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딕테를 다시 펼쳤어요. 이틀 후에 있을 독서 모임에 겉도는 독자들이 한 분이라도 나오지 않게 모임을 어떻게 진행할지 생각해 봤습니다.


2월의 <세계 문학>을 만든 독자는 조약돌 님과 향기 님입니다. 두 분과의 인연은 2년 전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에서 시작되었어요. 만나자마자 두 분은 책이 어렵다면서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두 분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었습니다독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도 그렇게 느꼈을 거예요. 제가 고른 책이 어렵다, 재미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사소한 감정이 아닙니다. 감상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에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가 스며 들어 있어요. 저는 책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의 반응도 눈여겨보면서 다음 독서 모임을 위해서 함께 읽을 책을 신중하게 고르려고 합니다.


딕테는 차학경 작가의 자서전적인 글입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독자들은 작가의 관점에서 읽으려고 시도합니다. 역자와 작가의 친오빠가 쓴 해설은 차학경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재구성한작가의 시선으로 딕테를 읽는다고 해서 딕테에 친근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한 달 전인 1<세계 문학 속으로> 모임을 마무리할 때 딕테를 읽을 때 차학경 작가를 찾기 위해서 읽지 말고, 그 글에서 드러내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 읽어보라고 제안했어요. 이때 제가 했던 말을 금시초문이라는 독자들이 있다면, 독서 모임을 능숙하게 진행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딕테를 쉽게 읽는 저만의 방식을 소개한 글 한 편 쓸 걸 그랬나 봐요.


딕테77쪽에 프랑스어로 쓴 문장이 나옵니다.

 

 


방출하라. Ne te cache pas. Révéle toi. Sang. Encre.


 


프랑스에서 태어난 말을 우리말로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자신을 감추지 말라. 자신을 드러내라. 혈액. 잉크.” 저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딕테와 친해지면서 읽을 수 있는 방식을 발견했어요딕테》는 독자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읽는 책이라고 확신했어요.


저는 향기 님에게 <세계 문학> 2월 모임에 꼭 참석하라고 부추겼어요. 향기 님은 러시아어를 전공했어요.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꾸준히 공부하고, 외국어 원서를 즐겨 읽는 독자입니다차학경 작가는 어린 시절에 거대하고 낯선 땅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을 제2 고향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 보려고 했지만, 모국어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외국어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차학경 작가는 영어를 미국인처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본인의 모습을 입으로 흉내 내는 짓(딕테, 13)’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딕테를 읽은 향기 님이라면,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느낀 작가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할 거로 생각했어요. 향기 님은 중국어의 성조(聲調, tone)를 최대한 정확하게 내기 위해서 거울 앞에 서서 중국어를 읽은 적이 있다고 했어요. 거울에 비친 입 모양을 확인하면서 성조를 연습했던 거죠.

















[대구 책방 <일글책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2025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김재홍 옮김 · 해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그린비, 2023)




딕테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두 분의 근황과 딕테감상을 충분히 확인했다고 해서 독서 모임을 일찍 마무리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딕테를 가방에 넣고, 제가 참석하지 않은 ‘다른 독서 모임의 책을 꺼냈어요. 그 책은 바로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명상록이었어요. 이 책이 올해 첫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였어요


<일글책>이 고른 번역본은 김재홍 번역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명상록의 원제입니다. 마르쿠스는 연약한 자신의 참모습을 돌아보기 위해 잉크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을 썼어요역자 김재홍 교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단체인 정암학당의 공동 이사입니다.


지난달 <세계 문학> 모임이 끝난 후에 조약돌 님은 저에게 명상록에서 자살을 긍정하는 대목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자살에 대한 철학자 마르쿠스의 견해를 어떻게 보는지 물으셨어요그때부터 김재홍 교수의 명상록을 읽기 시작했어요마르쿠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자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자살은 이성에 맞는 벗어남입니다. 조약돌 님은 스토아 철학적인 자살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어요. 우리는 스토아학파의 자살할 권리를 주제로 철학적인 대화를 하면서 모임을 마무리했어요.






 

 











* 캐시 박 홍, 노시내 옮김 마이너 필링스: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마티, 2021)





딕테함께 읽어야 하는 책으로 자주 거론되는 책이 한국계 이민자 출신의 미국 작가 캐시 박 홍(Cathy Park Hong)마이너 필링스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차학경 작가의 죽음을 이르게 한 성폭력 및 살인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한 미국 사회와 동료 예술가들의 미온적인 반응(차학경의 죽음을 예술적으로 미화하는 태도)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유색인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을 고발합니다


마이너 필링스210딕테의 내용 일부가 언급된 문장이 나옵니다. 차학경 작가는 딕테에 미국 하와이에서 이주 한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과 독립운동가 윤병구(1880~1949)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낸 탄원서(편지)를 인용합니다.



 




 차(학경)딕테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지 전혀 안내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를 번역하거나 이승만 대통령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의 맥락을 짚어주거나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에 나오는 프랑스 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의 사진에 설명 붙이기를 거부한다. 독자는 나름대로 단서를 연결해 퍼즐을 풀어가는 탐정이 된다.


(마이너 필링스중에서, 210)

 


루스벨트라는 성()을 가진 미국 대통령은 두 명입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 이승만과 윤병구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는 1905년에 써졌고, 당시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입니다.







책 속에 있는 오류와 오역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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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5-03-01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주말에 독서 모임 하시는군요. 차학경 <딕테>는 소개를 읽어보고 난해할 것 같았는데, 모임도서로 읽으면 각자의 경험을 살려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을 것 같아요.
여러 책들을 구매하거나 고르다보면 늘 비슷하거나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게 됩니다만, 모임으로 정해진 책을 읽으면 조금 더 다양하게 읽게 될 것 같습니다.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25-03-03 16:49   좋아요 1 | URL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는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 하는 독서 모임이에요. 사실 독서 모임을 주말에 하고 싶은데, 이러면 주말에 개인적인 일(독서, 글쓰기, 서울 여행)을 할 수 없어서 금요일 저녁에 하게 됐어요. ^^

페크pek0501 2025-03-06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서 모임에서 책 얘기가 끝나고 나서 멤버들의 일상 이야기를 듣는 게 좋던데요. 남들은 어찌 살아가는지 어떤 생각, 어떤 고민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요. 남들 얘기에 경청하는 게 글쓰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영화 모임에서 만난 한 분은 심리 상담사였는데 많은 사례를 들려 줘서 견문 넓히는 데 도움이 됐어요.^^

cyrus 2025-03-10 06:33   좋아요 0 | URL
내가 혼자 책을 읽을 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알 수 있어서 좋아요. 저는 독서 모임 후기를 쓸 때 모임에 참석한 분들의 견해를 많이 써보려고 해요. ^^
 
화전가 - 배삼식 희곡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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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여자는 꽃이다.” 옛날에 이 문장은 외모가 수려한 여자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을 꽃으로 비유한 찬사는 시들해졌다. 이 말 속에 여성의 참모습을 외모로 판단하는 시선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가 ’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여성은 남성의 눈과 마음에 끼워 맞춰진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된다. 남성을 위해 꽃이 된 여성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하지만 극작가 배삼식 <화전가>(花煎歌)를 희곡으로 읽고, 연극으로 보고 난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빛바랜 찬사를 다시 쓰고 싶다<화전가>에 나오는 여인들은 꽃다운 인생을 살다 간 화녀(花女).







연극 <화전가>

극단 구리거울


2025221~22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연출] 

김미정



[출연진]

 

닭실 할매김 씨: 이경자

고모: 허세정

장림댁: 김정연

금실이: 석효진

박실이: 박나연

봉아: 이연주

영주댁: 이연진

독골 할매: 김미향

홍다리댁: 이혜정(극단 나무의자 소속)





<화전가>의 시간은 19504이다. 한반도 땅이 포탄을 맞고 두 개로 찢어 갈라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닭실 할매김 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해 오랜만에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세 딸(금실이, 박실이, 봉아)두 며느리(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 씨, 행랑어멈(나이 든 하녀) 독골 할매,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처럼 함께 지낸 홍다리댁여인들의 고향인 경북의 반촌(班村)에 따스한 봄의 기운이 돌아오지만, 매캐한 전운이 봄을 짓누른다마음이 미지근한 김 씨는 환갑 잔치가 달갑지 않다그러나 여인들은 화목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결국 김 씨는 자신을 위한 화연(花宴) 대신에 모두가 즐기는 화전(花煎)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여인들의 화전놀이가 시작되기 전날은 경신일(庚申日)이다. 이날 밤(庚申夜: 경신야)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노는 풍습이 있다. 도교 신앙에 의하면 사람 몸에 기생하는 삼시(三尸)라는 벌레가 있다. 경신일은 삼시가 승천하는 날이다. 하늘에 올라간 삼시는 천제(天帝: 최고 신)에게 자신이 기생한 사람의 죄를 일러바치는데, 그 사람은 목숨을 잃는다. 경신일에 사람이 잠들면 삼시가 하늘에 올라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시의 승천을 막아 천수를 누리기 위해 경신야에 잠을 자지 않는다. 김 씨와 여인들은 소주 한 말을 함께 마시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여인들은 각자 마음속에 뭉쳐진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분출한다.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섭섭했던 순간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홉 명의 여인 중 가장 젊은 피인 막내딸 봉아는 가족들이 잠을 못 자게 방해한다.



[봉아] 내가 몬 자게 할 기다.

[금실이] ?

[봉아] 언니 오래 살라꼬.

[금실이] 참 빌.

[봉아] 아무도 못 잔다, 오늘은. 자기만 해 바라. 가만 안 둘 기다.


(3경신야 2중에서, 92)

 


경신야에 잠을 청하는 일은 작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은 인간의 수명뿐만 아니라 시간도 멈추게 한다살아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거나, 이런 행복한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봉아는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경신야와 화전놀이는 아홉 여인이 함께 경험한 화양연화(花樣年華). 아홉 여인의 화양연화는 순수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여인들은 커피를 함께 마시고, 초콜릿을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먹는다그리고 쓴맛이 강한 커피에 넣으려고 준비한 설탕 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맛보기도 한다행복한 순간은 물에 녹는 설탕 가루와 같다. 결국 행복한 순간은 흐르는 시간에 금방 녹아버리지만, 달콤한 여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화전가>화녀전(花女傳)’이다아홉 명의 화녀는 어수선한 일상을 잠시 제쳐두고, 함께 행복을 느낀다. 혼자 피는 꽃보다 여러 송이의 꽃이 다 같이 활짝 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cyrus의 주석>







봉아는 극이 시작되자마자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소네트 15, 그것도 영어 원문으로 된 시를 고모 앞에서 읊으면서 등장한다. 극 중반부에 봉아는 잠에 취한 상태로 T. S. 엘리엇(T.S.Eliot)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을 영어로 낭송한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황동규 옮김, 황무지, 민음사)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 선생은 1955<황무지>가 수록된 T. S. 엘리옽 시전집(탐구당)을 펴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에 출간된 모든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 홈페이지에 T. S. 엘리옽 시전집의 서지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에 저장된 서지정보가 무조건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양주동 선생 이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엘리엇의 시가 실린 문헌(단행본이 아닌 문학잡지)이 있을 수 있다.

 

화전가의 시간적 배경은 양주동 선생의  T. S. 엘리옽 시전집》이 나오지 않은 19504월 하순이다. 봉아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황무지>를 영어로 읽을 줄 아는 똑똑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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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셰익스피어 소네트랑 엘리엇의 황무지까지, 흥미롭네요!

cyrus 2025-03-01 21:10   좋아요 1 | URL
봉아가 낭독하는 셰익스피어와 엘리엇의 시구는 희곡의 주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20246월 마지막 금요일 밤에 태어났습니다. 독서 모임이 태어난 요람은 술과 책을 파는 책방이었어요. 하지만 그 책방은 지난달에 문을 닫았어요. 새로운 가게가 책방을 덮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독자들의 책과 문학 사랑은 언제나 펼쳐져 있습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독자들은 새로운 장소에 정착하여 올해도 책과 생각을 펼치려고 합니다.









 








* 버지니아 울프, 박인용 옮김, 보통의 독자(함께읽는책, 2011)




저를 포함해서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에 한 번이라도 참석하는 분들 모두 독자입니다. ‘독자는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는 단어에 다양한 의미를 넣어주고 싶어요. 제가 선호하는 독자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말한 보통의 독자와 비슷해요. ‘보통의 독자특별한 문학 훈련을 받지 않은 독자예요. 여기서 울프가 표현한 문학 훈련은 문학 강연과 같은 교육입니다. 보통의 독자는 혼자 낯선 책에 다가가서, 스스로 생각하면서 책을 여러 번 쓰다듬은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獨子)가 바로 보통의 독자(讀者)’입니다. 저는 보통의 독자독자(獨子)적인 독자(讀者)’라고 부르고 싶어요.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독자들이 만든 독서 모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부터 제가 아닌 다른 독자들이 추천한 책을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3, 6, 9월은 다른 독자들이 추천한 책을 읽는 달입니다. 문학 분야의 책 이외에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 예술 분야의 책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3월의 세계 문학 도서를 추천한 독자는 조약돌님입니다. 조약돌 님은 20231월 토요일 아침에 시작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정회원입니다. 지금도 꾸준히 <일글책>에 오십니다. 그 밖에 현대 철학 독서 모임도 참석하는데, 니체(Nietzsche)와 라캉(Jacques Lacan) 등을 읽기도 했습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3월의 세계 문학]

* 페터 빅셀, 이용숙 옮김, 책상은 책상이다(위즈덤하우스, 2018)

 

* [구판 절판] 페터 빅셀, 이용숙 옮김, 책상은 책상이다(예담, 2001)




약돌 님이 추천한 책은 스위스의 소설가 페터 빅셀(Peter Bichsel)의 단편 소설집 책상은 책상이다입니다. 이 책의 표제작 <책상은 책상이다>는 제가 중학생 시절에 만난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입니다. 작가 이름은 몰라도 <책상은 책상이다>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이야기는 단순해요. 한 남자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는 대신에 양탄자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사물의 이름 바꾸는 일에 흥미가 생긴 남자는 의자를 시계, 신문을 침대라고 부릅니다. 책상은 책상이다에 실린 단편 소설들 속 주인공 모두 평범하지 않습니다. 열차 시간표만 암기하는 남자, 이미 만들어진 것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믿는 발명가. 지구가 정말로 둥근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남자.

 

약돌 님은 다르게 보기의사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으로 책상은 책상이다를 추천했어요. 저는 이 책을 2014년에 읽은 적이 있어요.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다시 만나면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을 함께 펼쳤어요. 책상은 책상이다철학 소설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면서도 철학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어요. 책상은 책상이다의 매력은 철학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시선을 통과시킬 수 있는 투명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책은 투명할수록 독자들의 흥미로운 해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책상은 책상이다보통의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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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2-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상은 책상이다!
제가 몇 살 때 였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엄청 인기있는 책이었어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네요.
미셸 푸코의 어떤 책을 펼쳤는지도 궁금해요^^

cyrus 2025-02-26 06:44   좋아요 1 | URL
중학생 시절에 국어 선생님이 <책상은 책상이다> 소설집을 추천해 주셔서 작가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지금 읽고 있는 푸코의 책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입니다. ^^

stella.K 2025-02-2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의 독자 나도 가지고 있는데 여태 못 읽고있다. 읽어야하는데... ㅠ 책상은 책상이다 사 봐야겠다. 잘 지내지?

cyrus 2025-02-26 06:46   좋아요 0 | URL
저도 <보통의 독자>를 샀는데, 어디에 있는지 못 찾았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