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Michel Foucault)말과 사물을 다 읽지 않아도 읽은 척하는 방법이 있다. 말과 사물1장만 읽으면 된다. 1장 제목은 시녀들이다
















[카페 <스몰 토크> 푸코 읽기 모임 선정 도서]

미셸 푸코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시녀들은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그림 제목이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Felipe IV)의 궁정 화가로 죽을 때까지 활동하면서 왕족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방문한 펠리페 4세 부부의 딸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와 시녀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 왼쪽에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가 있고,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 서 있다. 그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일까, 아니면 시녀들일까? 화실에 공주만 있는 게 아니다. 펠리페 4세 부부도 화실에 있다. 왕이 어디 있냐고? 그림 중앙에 있다. 조그맣게 그려진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다







여기서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왕과 왕비는 왜 벨라스케스의 화실에 찾아온 것일까? 마르가리타 공주를 보러 오기 위해서? 거울 속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점의 초상화와 비슷하다. 왕과 왕비가 초상화 모델일 수 있다벨라스케스는 스스로 모델이 되어 본인의 모습을 그렸다. 관람자는 그림 속 화가의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모델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때 화가는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관람자가 된다. 우리는 그림 바깥의 모델인 셈이다. 푸코는 시녀들에서 관람자와 모델 역할이 한없이 뒤바뀌는 기능을 수행하는 시선을 주목한다.

 

지금까지는 말과 사물을 읽은 척하고 싶을 때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을 제시했다. 내가 언급한 것은 1장 전체 내용을 요약한 것이 아니다. 시녀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내용만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말과 사물을 완독해서 어떤 책인지 설명할 수 있는 독자는 책에 미친 사람이다. 이런 유형의 독자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으로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이다. 말과 사물을 읽었지만, 책의 핵심보다는 곁다리에 더 관심이 많은 독자도 있다. 이런 사람의 머릿속에 진짜 광기가 흐른다. 여기서 말하는 곁다리책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내용, 즉 푸코가 인용한 인명이나 문헌 또는 역주를 뜻한다. 하지만 진짜 광기의 독자는 곁다리에 더 관심이 많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현재 말과 사물13장까지 읽었다. 1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장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본문 읽기가 지루할수록 곁다리에 눈길이 간다. 곁다리가 재미있다



* 30 [옮긴이 주4]

 




 화가가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하는 것은 벨라스케스가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나는 역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벨라스케스 이전에 활동한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 속에 정면으로 바라보는 본인 모습을 그려 넣었다.















* 파스칼 보나푸, 이세진 옮김 그림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미술문화, 2023)


[책 소개] 서평 <못 찾겠다, 꾀꼬리> https://blog.aladin.co.kr/haesung/14923064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Düre) 등이 큰 그림 속 작은 자화상을 시도했다. 그림속으로 들어간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 속에 숨은 화가들의 다양한 모습을 모아놓은 책이다. 당연히 이 책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도 나온다.




* 33





 늙은 파체로가 세비야의 화실에서 작업 중인 제자에게 했다는 조언, 이미지는 액자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이지만 뒤집어 적용하는 이상한 방식.


[옮긴이 주] Pachero. 황금 세기(에스파냐의 16세기) 초엽에 세비야에서 활동한 화가. 벨라스케스는 한때 그의 제자였다.



역자는 말과 사물프랑스어 원서와 영역본을 참고하면서 번역했다. 원서가 인쇄되는 과정에 생긴 오탈자일까, 아니면 푸코 또는 역자의 실수일까? 벨라스케스 스승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 [절판] 자닌 바티클, 김희균 옮김 벨라스케스: 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시공사, 1999)


[책 소개] 푸코의 말과 사물1장을 일부 발췌한 내용이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다.




파체로(Pachero)가 아니라 파체코.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44)내가 가지고 있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벨라스케스에 프란체스코 파체코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되어 있다. 세비야에 거주한 파체코는 문화적 소양을 갖춘 화가였다. 그의 집에 세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6년간 파체코의 도제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의 제자가 된다. 파체코는 제자가 성장하는 과정을 자신의 책 <회화예술>에 기록했다. 세비야의 장인(匠人) 파체코는 훗날 벨라스케스의 장인(丈人)이 된다. 


말과 사물다른 장에도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렇지만, 내게는) 흥미로운 곁다리여러 개 발견했다. 나머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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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10-18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곁다리 취향을 광기로 승화시켜주시는 cyrus님 좋아요!!
두 가지 광인 중 저 역시 후자^^;;;

파체로, 파체코.....어떻게 이런 세세한 실수까지 찾아내시는지, 비법 전수는 도둑 심보이니, 저도 한 번 자습이라도 해봐야겠어요. 정말 넘 신기하답니다.

cyrus 2023-10-25 06:41   좋아요 0 | URL
파체코의 말, ““이미지는 액자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가 인상 깊어서 파체코가 누군지 알아보다가 이름이 잘못 적힌 사실을 확인했어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고요, 호기심이 오류와 오자를 찾게 만드는 지름길이었어요. ^^

호시우행 2023-10-18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곁다리에 심취하는 성향은 바로 지적호기심 탓 아닐까요? 공감합니다.

cyrus 2023-10-25 06: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다른 책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해 봅니다. ^^

레삭매냐 2023-10-1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진촤 ...

그리고 보니 그 화가가 등장하는
소설도 있었나 어쨌나 싶네요.

cyrus 2023-10-25 06:44   좋아요 0 | URL
국내 작가가 쓴 소설 중에 박민규의 <죽은 여왕을 위한 파반느>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이에요. 제목은 라벨의 곡 제목으로도 유명한데,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어요. ^^
 




전망 좋은 []

 

EP. 19


일글책, 직립보행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Sence #1


이번 주말에 무조건 꼭 읽어야 할 책 한 권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말과 사물이다. 다음 주 토요일은 푸코 읽기첫 번째 모임 날이다푸코 읽기2022니체 읽기모임에 이어 카페 <스몰 토크>(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김완 사장이 올해 새롭게 진행하는 철학책 읽기 모임이다.
















[카페 <스몰 토크> 푸코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민음사, 2012)




말과 사물1부를 읽어야 하는데, 분량이 꽤 많다. 다른 책들을 쫓다 보니 말과 사물을 너무 소홀히 했다





Sence #2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는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끝나면 말과 사물을 읽으려고 했다. <일글책>은 주말에 오후 6시까지 펼쳐져 있다. <일글책>이 덮을 때까지 1부 끝까지 다 못 읽더라도 절반 분량은 읽어야 했다.
















* 이창현 (), 유희 (그림)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1(사계절, 2018)

* 이창현 (), 유희 (그림)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2(사계절, 2023)




나를 포함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는 여덞 명의 정회원 모두 독서중독자. 일단 <일글책> 주인장이 독서중독자’다. 그분이 회원들에게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추천했다. 나는 <일글책> 주인장이 구매한 익명의 독서중독자》를 빌려서 읽었다. 독서중독자들이 모여서 대화하면 당연히 책 이야기를 하게 되고, 상대방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알게 된다.


















* 크리스티앙 보뱅, 김도연 옮김 그리움의 정원에서(1984Books, 2021)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회원 한 분이 자신이 예전에 읽은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그리움의 정원에서가 좋았다면서 추천했다. 그분은 이 책을 <일글책>에서 샀다. 요즘 나는 보뱅과 같은 나라 출신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글에 푹 빠져 완전히 젖은 상태다. 보뱅의 글도 어떤지 한번 적셔보고 싶었다그리움의 정원에서를 구매하여 <일글책>이 다 덮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읽었다. 작고 얇은 그리움의 정원에서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정작 읽어야 할 말과 사물은 가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Sence #3


그리움의 정원에서에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노랫말이 인용되어 있다. 노래 제목은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 [절판] 에디트 피아프 마르셀 세르당, 강현주 옮김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은행나무, 2003)




종이에 흘러나온 에디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은 에디트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다. 에디트와 마르셀은 서로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길게 이어진 그리움 위에 사랑을 편지 위에 띄워 주고 받았.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르셀은 에디트를 만나러 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는 마르셀이 사망하기 직전에 두 사람이 쓴 편지 글을 모은 책이다.





Sence #4


저녁에 <직립보행>에 갔다. 직립보행 부부는 다른 지역의 책방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자주 가는 책방 중 한 곳이 인천의 헌책방 <아벨 서점>이다. 추석에 <아벨 서점>에 가서 총 50권의 책을 샀다고 했다.

 

<직립보행> 주인장이 내게 서울 여정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기분이 들뜬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린다면서 호언장담의 허세를 부렸다. 나는 입을 열면 버퍼링이 심하다.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한 시간은커녕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내 이야기는 구멍이 뻥뻥 뚫린 채 나왔다


<책 바>가 있는 망원동을 망월동이라고 잘못 말하기도 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직립보행> 주인장은 오류를 정확히 짚어냈고, ‘망월동은 광주에 있는 동네라고 알려줬다. 말보다는 글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다.





Sence #5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중간중간 끊어져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말하는 도중에 책방에 손님이 왔다.

 

<직립보행>은 삼덕동에 있는 책방이라서 이 동네를 지나가는 연인들이 심심찮게 책 보러 온다. 부부 책방 주인장은 <직립보행>데이트 필수 코스라고 대놓고 홍보한다. 독서중독자 성향의 연인은 직립보행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손님이다. 오늘 온 연인은 독서중독자 정도는 아니었다.

 

부부 책방 주인장은 책을 유심히 고르는 연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책 큐레이팅을 한다. 이게 <직립보행>만의 영업 방식이다남편 책방 주인장은 나의 허술한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연인에게 말 걸기 시작했다. , 또 시작이군. 연인에게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Romain Gary)를 소개하면서 그가 쓴 대표작을 추천했다. 여기서 또 프랑스 작가를 만나네.

 

남편 책방 주인장은 내 말을 중간에 끊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인이 독서에 몰입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얘기했다. 그렇지만 이미 끊어져서 잘게 부서진 이야기를 이어 붙여서 말하자니 너무 힘이 빠지고 버거웠다. 말 잘하는 책방 주인장들이 부럽다.





epilogue


결국 오늘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못했다

하루만 남은 주말에 전력투구하듯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러면 일요일에 해야 할 일들이 다음 주말로 미뤄진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뇨,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했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겐 모두 똑같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 내 기쁨은 오늘 당신과 함께 시작하니까요.



(그리움의 정원에서에서 인용된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노랫말,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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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3-10-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저 이 책 읽었는데 ㅠㅠ 그리고 여기다 후기까지 썼는데 ㅠㅠ 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사가 나온게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졌을까요. ㅠㅠㅠㅠ 이건 분명 인셉션에서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다른데서 들어도 이렇게 책에 나와도 시간이 지나면 인셉션만 떠오르는 것이다! 라고 변명을 생각해봤습니다만. ㅡㅡ;;

cyrus 2023-10-17 21:49   좋아요 1 | URL
에디트의 노래가 영화에 나왔군요. <인셉션> 정말 유명한 영화죠. 이때 영화 개봉 당시 책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시절이라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ㅋㅋㅋㅋ

서니데이 2023-10-15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오늘 페이퍼의 제목을 보고 에디트피아프를 생각했는데, 그 노래에서 온 게 맞았네요. 인셉션에서 많이 나오긴 했지만, 이전부터 유명한 곡이긴 했어요. 프랑스어 번역된 가사도 좋았던 것 기억나고요. 페이퍼에 가사도 소개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이제 10월이 되어서인지 아침 저녁으로는 기온이 많이 내려가네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cyrus 2023-10-17 21:51   좋아요 1 | URL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항상 유튜브로 음악을 켜요. 요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고 있어요. 저녁은 완전 가을 날씨에요. 서니데이님,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새파랑 2023-10-1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진정한 독서중독자 이십니다. 책을 좋아하신다는게 글에서 확 느껴집니다~!!

cyrus 2023-10-17 21:54   좋아요 1 | URL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다 보니 완독한 책이 거의 없어요. 그래도 슬럼프에 빠져서 글 한 편 쓰는 것조차 버거웠던 2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예요. ^^
 




페리클레스(Pericles)와 역병. 투키디데스(Thukydides)펠로폰네소스 전쟁사2을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면 이렇다.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1년 차]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투키디데스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서출판 숲, 2011)





페리클레스는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정치가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라케다이몬(스파르타)이 먼저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아테네는 여러 도시 국가들과 연합하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맞서 싸운다. 1차 전쟁은 델로스 동맹의 승리로 끝이 난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의 군주 아르키다모스 2(Archidamus II)30년 휴전 평화조약을 맺는다. 평화를 되찾은 아테네는 번영을 누린다. 이 전성기에 나온 건축물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다. 신전 건축 공사의 총 감독을 맡은 조각가 페이디아스(Phidias)는 페리클레스의 친구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승승장구한 아테네는 하나하나씩 도시 국가를 지배하고, 속국이 된 도시 국가 지도자들에게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아테네의 지배욕에 진절머리가 난 도시 국가들은 스파르타의 편을 든다.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형성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지도자들은 라케다이몬에 회동하여 아테네와의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처음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들은 1차 전쟁 기간에 아테네의 막강한 해군력을 몸소 경험했다. 스파르타는 동맹국들에 최대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하자고 종용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자신들의 장점인 해군력을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의 해상로를 차단해 버린다. 이러면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경제력을 옥죄는 동시에 궁지에 몰린 친()스파르타 도시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해상 봉쇄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아테네는 해상 봉쇄령 철회를 거부하고, 도리어 스파르타에 불리한 제안만 내놓는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다.

















[절판] 이소크라테스페리클레스데모스테네스 외김헌 외 2명 옮김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민음사, 2015)

[책 소개] 페리클레스의 민회 연설문 두 편과 추도사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연설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역자의 해설도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안 읽어도 될 정도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단과 당시 아테네의 상황이 잘 정리되어 있다.




2권의 백미는 페리클레스의 추도사다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의 무덤 앞에서 추도 연설을 한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스러워도 아테네 민주정을 지키고헬라스(그리스전체의 번영을 유지하려면 스파르타와의 항전은 불가피하다고 호소한다


전쟁 2년 차, 아테네에 역병이 돈다. 아테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도 맞서 싸워야 할 처지에 놓인다. 많은 아테네인이 목숨을 잃는다. 혼란에 빠진 민중은 페리클레스의 지도력을 의심한다. 페리클레스는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는 위기를 맞지만, 민회에서 자신의 유능한 무기인 (logos)’을 이용하여 아테네인들을 설득한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과 남에게 들은 것은 엄밀히 검토해서 기록’했다고 밝혔다그렇다면 사료를 철저히 검토하는 일을 중시한 투키디데스처럼 똑같이 투키디데스에 맞서보자투키디데스의 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비판적으로 읽자는 뜻이다.

















* 도널드 케이건허승일 · 박재욱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 2006)




투키디데스의 그리스어 문체는 난해하다. 투키디데스는 전업 작가가 아니라 군인이다. 얼마나 문체가 어렵게 썼으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연구자들이 번역의 어려움에 불만을 토로한다. 고대 전쟁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역사가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은 총 4권으로 구성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하는 일 자체가 해석이라고 말한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4권을 축약한 책이다.
















* 메리 비어드강혜정 옮김 고전에 맞서며전통모험혁신의 그리스 로마 고전 읽기》 (글항아리, 2020)




영국의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Mary Beard)어느 투키디데스를 믿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투키디데스의 문체가 최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 나아가 투키디데스가 쓴 글의 신뢰성을 의심한다투키디데스는 남에게 들은 것을 참고했다고 주장만 했을 뿐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그렇다면 투키디데스는 과연 누구로부터 연설문과 사료를 입수했을까투키디데스가 검토했어도 그에게 사료를 제공한 익명인을 100% 신뢰할 수 있는가?


도널드 케이건도 투키디데스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을 경계한다. 투키디데스는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이 아테네의 중대한 실수’였다고 주장한다(26511~12). 페리클레스의 죽음(아테네를 덮친 역병은 전쟁 영웅마저 쓰러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이후 아테네는 적임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1년 차]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아리스토파네스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 (도서출판 숲, 2010)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이후에 등장한 아테네 지도자고만고만한 수준의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그들이 페리클레스에 못 미칠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들이 너무나 한심해 보여서 이름조차 입에 담기 싫어했던 것일까? 지도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아테네의 형편을 풍자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 아카르나이 구역민들을 먼저 본 독자라면 지도자들이 누군지 알 수 있다. 클레온(Kleon)니키아스(Nikias)다. 그들이 주도한 당파 싸움은 아테네의 군사력을 떨어뜨렸다. 무기력한 아테네는 항복할 때까지 승기조차 보이지 않는 전쟁을 억지로 질질 끌고 갔다.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전쟁이 길어지자 민중은 지쳐만 간다. 


하지만 케이건은 투키디데스의 견해를 반박한다. 시켈리아 원정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아테네인들의 소극적인 태도라고 주장한다. 투키디데스는 시켈리아 원정을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무모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건은 만약 아테네인이 제대로 된 지도자를 지지해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했으면 승산이 있었을 것으로 예측한다.

 

비어드는 투키디데스가 페리클레스의 광팬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대중을 마음대로 주무른,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라고 평가한다(265장 8절). 그러면서 페리클레스가 명망이 높았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정부(情婦) 아스파시아(Aspasia)와의 관계 때문에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아스파시아는 소크라테스(Socrates) 교류할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었지만, 정적들은 그녀의 과거 직업을 집요하게 공격했. 아스파시아는 상류층 인사들을 접대한 고급 매춘부였다. 민중은 페리클레스의 지도력을 비난할 때마다 내연녀 아스파시아도 같이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페리클레스의 아들조차도 아버지와 정부를 싫어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경력과 연설문 전문을 여러 장에 걸쳐서 기록하는 내내 아스파시아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투키디데스는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라면 자신의 책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내다봤다(1권 22장 4). 과연 우리는 이런 투키디데스를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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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 첫째 날(927일 수요일). 홍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숙소로 정했다. 숙소 역시 열차 예매표와 같이 화요일에 예약했다. 다행히 수요일 1인실 방 하나 있어서 예약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게스트하우스가 식당과 술집들이 모인 골목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내 방 바로 옆에 밤새도록 네온사인 빛을 뿜어대는 술집이 있었다. 젊음에 취해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가 내 방의 작은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어쩔 수 없었다. 홍대 게스트하우스가 수요일 저녁에 가야 할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책이 가득한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망원동에 있는 칵테일 바로 향했다.







내가 간 곳은 술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 바>(Chaeg Bar). <책 바>는 연희동에 처음 터를 잡은 칵테일 바였고, 올해 망원동으로 옮겼다. 이곳을 이용하려면 예약해야 한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사적인 좌석 1을 예약했다. 이용 시간은 2시간이다. 저녁 7~9시 이용 좌석과 930~1130분 이용 좌석이 있다. 나는 930~1130분 이용 좌석을 선택했다.










사적인 좌석3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면에 보이는 벽에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그림 <빛의 제국>이 나를 환대했다. 책상 오른쪽에 로트레크(Lautrec)의 그림 <침대>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책 바>에서만 마실 수 있는 각종 술과 칵테일 이름은 술을 사랑했던 작가와 유명 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내 혀를 첫 번째로 적신 술은 달과 6펜스.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을 모델로 한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제목이다. 술이 된 달과 6펜스순한 맛이 나는 압생트. 도수는 6%.





두 번째로 맛본 술은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박상영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도수 9%의 테킬라 칵테일이다.







세 번째 술은 녹색 빛이 나는 압생트. 앞에 마신 술들은 혀의 취기를 돋기 위한 애피타이저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입에 술 내음이 날 정도로 압생트를 찬양했다. 도수가 엄청 강한 술로 유명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압생트를 유명하게 만든 건 압생트의 주재료인 향쑥의 독성 성분이다







<책 바>가 제조한 압생트는 도수 18%로 꽤 높지만, 몸과 정신 건강에 해로운 옛날 압생트를 똑같이 재현한 술은 아니다. 압생트는 원래 향쑥 특유의 쓴맛이 강하게 난다. 압생트의 독한 맛에 혀가 화들짝 놀라면 달래주기 위해 안주로 닭튀김과 방울토마토를 주문했다. 하지만 안주가 없어도 되었다. 내가 마신 압생트는 혀를 안심시키는 보드라운 허브 맛이 났다. <책 바> 압생트가 너무 좋아서 앞에 마신 술맛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안주 없이 압생트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다. 아쉽게도 시곗바늘이 11시 10분을 가리키면서 내게 술을 음미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넌지시 알려줬다















* 그렉 클라크, 몬티 보챔프 공저, 이재욱 옮김 알코올과 작가들: 위대한 작가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음주 열전(을유문화사, 2020)

[책 소개] 책은 포도주, 맥주, 위스키, 압생트 등 여러 종류의 술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술꾼 작가들의 술과 관련된 어록과 일화.

 



19세기 중반 유럽에 압생트가 유행했는데 이 술을 즐겨 마시면 환각을 일으키고, 신경이 손상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창작을 위해 압생트의 환각 효과를 이용했다. 그들은 압생트의 녹색 빛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압생트를 음미하는 순간을 ‘녹색 빛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애주가인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은 압생트를 ‘녹색 빛 요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로트레크는 파리의 카바레 물랭루주를 놀이터로 삼아서 활동했다. 로트레크의 친구들은 유흥가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그녀들은 무희, 술집 종업원, 매춘부가 되어 근근이 살아갔다. 술 역시 로트레크의 친한 친구다. 로트레크는 어린 시절에 두 다리를 크게 다쳐 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몸집은 상당히 작았고, 지팡이 없으면 걸을 수 없었다. 지팡이의 속은 비어 있는데, 그 안에 압생트가 담긴 유리병이 있었다고 한다.

















* [절판]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백선희 옮김 알코올과 예술가(마음산책, 2002)

[책 소개] 이 책의 예술가는 작가, 화가, 음악가를 아우른다. 당연히 알코올과 작가들에 소개된 술꾼 작가들이 알코올과 예술가에도 나온다.




과연 술에 일절 입에 담지 않은 작가와 예술가가 있을까? 분명히 있기 한데, 금주가로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가 단 한 명도 생각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다. 술을 즐겨 마시고, 술을 사랑한 작가와 예술가는 수두룩하다. 알코올과 예술가서문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문학과 예술은 술에 절여 있다. 술꾼 작가들은 술에 취할 때마다 하얀 종이 위에 글 한 편을 토해냈다.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자신이 일할 때 필요한 도구는 , 종이, 음식, 담배 그리고 약간의 위스키라고 말했다. 포크 너, 뭘 좀 아네







나는 일할 때 책, 노트북, 음식 그리고 술이 있으면 된다. 한 주의 마지막 평일인 금요일이 지나가고, 이어서 조용히 찾아오는 토요일 새벽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가 좋다. 새벽에 재미있는 일을 하기 전에 야식으로 막걸리를 반주 삼아 돼지국밥을 먹는다. 글 한 편 다 쓰고 나면 피곤함을 쫓아내기 위해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 취기가 적당히 올라와서 컨디션이 좋으면 책을 더 읽는다. 나는 주책잡기(酒冊雜記)’의 달인이다. 술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잡문(雜文)을 쓰는 밤은 달짝지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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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are 2023-10-08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밤이네요~~!! 집에서라도 비슷하게 분위기라도 내보고싶어집니다^^!

cyrus 2023-10-09 05: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집에 술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가 계셔서 시도를 못 하고 있어요.. ^^;;

stella.K 2023-10-08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네. 난 서울 살면서 들어는 보았으나 실제로 체험할 생각은 못해봤는데. 근데 얼마전 박광식 KBS 의학전문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건강을 생각하면 술은 한 잔도 안 마시는 것이 좋다고 하더군 그러니 무알콜로! 근데 책 바 자체는 너무 좋은데 사람들 이 워낙에 책을 안 읽으니 유지가 가능할지 우려되네.

cyrus 2023-10-09 05:27   좋아요 1 | URL
그날 제가 가보니 빈자리가 없었어요. <책 바>도 책을 팔긴 한데, 아무래도 여긴 책 판매보다는 술 판매량이 많을 거예요. 8년 정도 영업했으니, 단골이 많은가 봐요. ^^

얄라알라 2023-10-08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렸던.글입니다요...와.별세계군요.. 책 bar는.처음.들어봤어요. 주책잡기 cyrus님.께서 취중 음주중 글을.쓰셨다면.또 얼마나.더.bar와 어울릴까.상상도 해봅니다 ㅎ 좌석예약에 3잔이면, 가격은 좀 쎌 거 같아요?^^

cyrus 2023-10-09 05:33   좋아요 1 | URL
1인 ‘사적인 공간’ 예약비는 3만 원이고, 이용하고 나면 다시 돌려줘요. 술값이 많이 나가요. 도수 높은 술 석 잔을 계속 마시면서 정신은 훅 가진 않았는데, 카드값이 훅 나갔죠....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3-10-09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책 바 한 번 가보고 싶네요.
테이블에 술이 있는데 칵테일을 직접 말아야 하는건 아니겠죠?
압생트 6%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테킬라도 한 번 마셔보고 싶어요^^

cyrus 2023-10-09 05:32   좋아요 1 | URL
책상 위에 있는 술병은 빈 병이에요. <책 바> 바텐더들이 만들어 줍니다. 참고로 <책 바> 바텐더들은 젊고 잘생긴 남자입니다. 제가 예약했던 날 <책 바>에 여자 손님들이 많았어요. ^^

새파랑 2023-10-0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 책 바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ㅋ 분위기 좋네요~!! 술 마시면서 취하면 책을 못읽을수도 있겠네요 ^^

cyrus 2023-10-10 06:12   좋아요 1 | URL
정말 마셔보고 싶은 술이 아주 많아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메뉴판을 보면서 다음에 뭘 마실지 고민하게 되거든요. ^^;;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가 올해로 20회를 맞이한다. 개막작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살로메(Salome). 원작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쓴 동명 희곡이다.



















* 오스카 와일드,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임성균 옮김 살로메(지만지드라마, 2023)


* 오스카 와일드, 정영목 옮김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민음사, 2009)




오페라 공연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공연 장소인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처음 가본 터라 예매표를 어디서 받는지 몰랐다. 살짝 마음이 움츠러든 채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어깨 너머로 익숙한 향기가 났다. ? 이 향기는? 누구지? 뒤돌아보니 <일글책> 토요일 고전 읽기 모임의 프론트우먼(Frontwoman: 밴드나 그룹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핵심 인물) 향기님이었다. 연보라색 옷을 입은 향기님은 남편과 같이 오페라 공연을 보러 왔다. 향기님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공연 시작하기 전에 무대 뒤에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공연장 안에 서로 다른 악기들이 내는 소리가 뒤섞인 채 울려 퍼졌다. 예매하면서 지정한 자리를 금방 찾았다. 자리 뒤에 낯선 이름이 적힌 명찰이 있었다. ? 여기 내 자린데 내 이름은 없고 왜 다른 사람이 있지? 내가 자리를 잘못 찾았나? 다시 살펴보니 분명 내 자리가 맞다. 당황한 나는 안내자에게 자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안내자가 알려준 자리는 분명 내가 찾은 그 자리가 맞았다. 자리 뒤에 이름표가 있는데, 이거 뭐예요?” 내 질문에 안내자는 대구오페라하우스에 기부한 사람들 이름이라고 답변했다. 물어보길 잘했다. 오페라 공연 감상 초보자는 오늘도 하나 배웠다.


원작의 시간적 배경과 장소는 고대 이스라엘의 헤롯(Herod) 왕의 궁전이다. 오페라의 시간적 배경은 휴대전화가 카메라가 있는 현시대. 무대 장치는 반투명 유리로 둘러싸인 원형 형태로 되어 있다. 거대한 원형 무대는 헤롯 왕의 사치스러운 삶을 암시하는 연회장, 헤롯 왕과 새 아내 헤로디아스(Herodias, 원래 헤롯의 제수였다)의 왕좌, 세례자 요한(Johannes)이 갇힌 지하 감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원형 무대 장치가 빙글빙글 천천히 돌아가면서 다음 이야기 속 장소를 보여준다.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 두 명의 복장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과 흡사하다. 눈을 가린 그들은 살로메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경비대장 나라보트(Narraboth)의 눈은 무방비 상태다. 그는 살로메의 매력에 빠져 계속 그녀를 쳐다본다. 헤로디아스의 시종은 나라보트에게 살로메를 너무 보지 말라면서 여러 차례 경고한다. 반면 살로메의 눈은 요한의 목소리가 나오는 지하 감옥으로 향해 있다. 살로메는 병사들에게 요한을 풀어달라고 명령한다. 요한의 실제 모습을 본 살로메는 본격적으로 그를 유혹한다. 하지만 요한의 눈은 오로지 주님에게 향해 있다. 의붓아버지 헤롯은 살로메를 음침하게 바라보면서 다가온다. 늙은 욕망덩어리 왕의 요구에 지친 살로메는 왕 앞에 일곱 베일의 춤을 출 테니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구한다춤을 다 추고 나서야 살로메는 왕에게 소원을 말한다. 요한의 머리를 주세요!”















* 오광수 · 박서보 감수 모로(재원, 2004)

[책 소개]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들을 유일하게 소개한 화집 형태의 책이다. 책 앞표지의 작품 제목은 출현이다. 살로메가 요한의 잘린 머리를 얻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원작 살로메는 남자들을 정복하려는 요부로 묘사되어 있다. ‘일곱 베일의 춤은 살로메의 요염한 자태를 상상하게 만드는 에로틱한 춤이다. 화가들도 살로메의 성적 매력에 끌렸다. 특히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는 살로메를 주제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그가 묘사한 살로메는 알몸이 비치는 투명한 동양풍 옷을 입고 있다이 이미지는 요부로서의 살로메를 충실히 구현했다

















* 미레이유 도탱-오르시니 외, 박아르마 옮김 살로메(이룸, 2005)




하지만 오페라 살로메는 요염함과 거리가 멀다그녀는 흰옷을 입고 있다흰색은 순결을 상징하는 색이다실제로 오페라를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원작 살로메가 춤을 추면서 나체가 되는 묘사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슈트라우스가 쓴 오페라 공연 지침서에 보면 살로메는 순결한 소녀인 동양의 공주로 설정되어 있다. [주]


오페라 살로메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춤을 춘다여기서 살로메는 춤을 추는 자신과 왕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다이때 거대한 반투명 유리는 스크린이 된다. 스크린 화면은 휴대폰에 담긴 헤롯 왕과 살로메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헤롯 왕을 껴안기도 하고성교를 암시하는 행위를 한다하지만 살로메는 절대로 옷을 벗지 않는다춤을 추고 난 후 그녀는 양손에 머리를 쥐면서 좌절한다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가지기 위해서 요부인 척 행동하고 마치 헤롯을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이 춤춘다옷을 벗지 않은 살로메의 춤은 왕의 음탕한 요구를 순순히 따르지 않겠다는 저항의 몸짓이다.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포기하지 않는다그녀는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면서까지 태양 빛으로 직진하는 나방과 같다살로메는 기어이 자신의 입술을 쓰디쓴 피 맛이 나는 요한의 붉은 입술에 갖다 댄다하지만 잘린 요한의 머리는 태양처럼 빛나지 않는다그래서 살로메는 씁쓸하다태양 같은 거룩한 요한을 가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태양처럼 빛나던 요한의 생명력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한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에 여러 번 입맞춤한다그런 다음에 차가워진 살로메의 팔을 껴안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소녀는 진심으로 요한을 사랑했다

 

공연을 본 관객 대다수는 여전히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인 살로메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요한의 머리를 탐낸 살로메의 사랑은 퀴어(gueer: 기묘한, 괴상한)하다. 남들이 멸시하고, 헤롯이 괴물 같다고 해도 살로메는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사랑을 끝까지 고집했다. 원작자 오스카 와일드는 퀴어한 동성애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멸시받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요한의 머리 앞에서 절절하게 고백하는 살로메의 노래 속에 오스카 와일드의 서러운 이야기가 들렸다.


관객을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오페라 대사가 자막으로 나왔는데, 여기서 옥에 티가 있었다. 헤롯 왕이 최상급 포도주를 로마 시저 황제가 주신이라면서 말하는 대사가 있다. ‘시저는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된 단어로, 황제를 뜻한다. 원작에서는 시저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대사 자막을 만든 번역자가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저 황제라고 썼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 황제라고 써도 된다. 원작에 언급된 시저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티베리우스(Tiberius).





[] 살로메(이룸, 2005)는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회화, 음악)으로 묘사된 살로메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오페라 감상문을 쓰기 위해 이 책에서 참고한 글은 오스카 와일드와 슈트라우스, 혹은 춤추는 몸이다. 이 글에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공연 지침서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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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0-08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페라 관람하고 오셨군요. 대구에서 오페라축제를 하는 건 몰랐는데, 좋은 공연이 많을 수 있겠어요. 근데 오페라 공연은 한국어로 하는 건가요. 아니면 영어나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로 진행되는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cyrus 2023-10-08 15:17   좋아요 1 | URL
올해 오페라 축제 공연작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와 베르디의 오페라 세 작품, 총 다섯 작품이에요. 베르디의 오페라가 정말 유명한데, 전부 다 보려면 매주 토요일 정오 이후 시간대를 다 비워야 해요. 공연 예매했다가 공연 보는 날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보면 돈이 아까워요. 그래서 욕심부리지 않고, <살로메>와 <엘렉트라>만 예매했어요.

오페라 가수들은 외국어로 노래했는데,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어요. 오페라 작곡가가 독일인이라서 노랫말과 대사가 독일어일 수 있어요. 자막은 영문과 한국어로 나왔어요. ^^

얄라알라 2023-10-0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cyrus님 지난번 정독도서관 포스팅이랑 이번 포스팅 .....완벽남이실 것 같은데, 은근 빵터지게 하시는 매력이 있으시네요.

기부자 이름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ㅎ
대구오페라하우스 , 다음 [엘렉트라] 포스팅에서 내부 사진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아니될까요?^^ 천장이 엄청 궁금하옵니다. 아...귀찮게 해드려 죄송해요 cyrus님, 제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공연장이라서...

cyrus 2023-10-09 05:39   좋아요 1 | URL
제가 실제로 좀 어설픈 구석이 있긴 해요.. ㅎㅎㅎㅎ

죄송한 일 아니에요. 사실 오페라 공연장 내부 사진을 몇 장 찍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일이 익숙하지 않고, 찍어도 화질이 별로더라고요. 그래도 다음 공연 보러 갈 땐 사진을 많이 찍을게요. 얄라알라 님의 부탁하신 거 기억하겠습니다. ^^